누가복음 2000년 누가복음 23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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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누가복음 23 강
아버지여 원대로 하옵소서
말씀 / 누가복음 22:31-71
요절 / 누가복음 22:42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라"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공생애의 클라이막스인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첫째(31-46),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 둘째(47-71), 심문을 받으시는 예수님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어려운 시련에 부딪혔을 때 어떻게 그 문제를 해결하셨습니까? 예수님은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하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승리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를 배우고 실천하는 기도의 사람들로 성장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나의 원보다도 주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이 이루어지도록 간구 하는 기도의 용사들로 쓰임 받을 수 있길 기도합니다.
I.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신 예수님 (31-46)
예수님은 제자들과 조용한 시간을 가지시면서 성만찬을 드셨습니다(1-23). 예수님은 자신이 지실 십자가의 의미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런 예수님의 가르침을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배반당할 것을 말씀하시자 제자들은 자신들의 예수님께 대한 충성심을 과시라도 하려는 듯, 자신이 더 큰 자임을 주장하며 쟁론을 벌였습니다. 이 쟁론은 제자들의 본래 관심이 구세주이신 그리스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름으로써 얻게 될 지위나 영광에만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진정으로 큰 자는 젊은 자요 섬기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말씀하심으로 제자들의 논쟁에 종지부를 찍으셨습니다.
31-34에서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할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사탄은 유다에 이어 베드로를 넘어뜨리고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실족하지 않도록 어떻게 주의를 주었습니까? 31절을 보십시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이 말씀에서 사탄은 하나님 역사를 섬기는 중심인물을 어찌하든지 실족시키고자 요동함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특별히 베드로의 이름을 말씀하시면서 깨어 있도록 주의하셨습니다. 이는 수제자로서 자기 과신과 우월감으로 헤이해진 그의 심령을 새롭게 하고자 함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이를 통해서 모든 제자들에게 사탄의 유혹에 대한 경고를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탄은 유다에 이어 다른 제자들마저 유혹하여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을 가지 못하도록 하고자 기를 썼습니다. 사탄의 본성은 영혼을 고통받게 하며 결국에는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입니다. 불신자나 거짓 신앙인들은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시1:4) 사탄이 까부르는 바람에 휩쓸립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을 훼방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탄이 제자들에게 관한 송사를 주님께 청구했다고 했습니다(31). 이와 같이 사탄은 언제나 우리의 죄와 허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송사를 합니다(욥1장). 사탄은 이렇게 하여 가룟 유다를 얻었고 이제 남은 제자들의 연약한 점을 송사 하여 그들의 영혼마저도 자기 것으로 삼고자 했습니다(욥1:8).
32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예수님은 베드로가 사탄의 시험에 넘어지지 않도록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돌이킨 후란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실족한 후에 회개하고 다시 믿음을 회복하여 사명을 감당할 때입니다. 이 때 그가 해야할 일은 형제를 굳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제자들을 돌보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 말을 들은 베드로는 의리의 뱃사람답게 어떤 자기 의지적인 결단을 말했습니까? 33절을 보십시오. "저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베드로는 주님의 사랑의 경고에도 깨닫지 못하고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갈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라고 호언장담했습니다. 이와 같이 의로운 의지적인 결단은 좋은 것이지만(딤전3:1), 무지한 소치에서 나온 것은 울리는 꽹과리요 허공을 치는 메아리와 같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육신의 연약함과 타락한 본성, 그리고 자기에게 닥칠 고난을 알지 못했습니다. 또한 하늘의 악한 영들의 능력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장담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 의지적인 무지한 결단을 해서는 안됩니다. 오직 기도함으로 영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겸손히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합니다.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과 비교해서 자기가 얼마나 충성된 제자인가를 나타내고자 하는 불순한 동기에서 그런 장담을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신앙적 우월성을 과시하여 수제자로서 주도권을 잡고자 했습니다. 그의 인간적인 의도를 아신 예수님은 그의 연약함을 어떻게 깨우쳐 주셨습니까?
34절을 보십시오. "가라사대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베드로가 얼마나 연약한 자인가를 잘 아셨습니다. 그는 지상 메시아관을 갖고 있었고 복음신앙도 부활신앙도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큰 입으로 큰 소리를 쳤지만 예수님의 말씀대로 닭 울기 전에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습니다(60). 이와 같이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의 진리를 외면하고서는 삶의 참된 승리를 얻을 수 없습니다(고후4:2). 이는 참 믿음과 거짓 믿음의 판별은 고난과 환란이 닥칠 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35-38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후 새 환경을 경계하시며 이에 대한 준비를 지시하신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로하시고 고아와 같이 두지 않고 성령으로 보호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또한 제자들도 스스로 지켜 방어할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39-46에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에 대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생활은 어떠했습니까? 예수님은 습관적으로 감람산에 나가사 기도하셨습니다(39). 이를 통해서 예수님의 기도생활의 일면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시간을 정해놓고 습관적으로 지속적으로 기도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산적한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힘은 바로 기도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살전5:17). '쉬지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 24시간 매일 잠도 자지 않고 기도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실제적으로 예수님처럼 규칙적으로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함으로 실천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규칙적인 기도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해야합니다. 또한 예수님은 조용한 곳에서 개인기도를 하셨습니다(41). 예수님은 기도의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 돌 던질 만큼 떨어져서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는 조용한 골방이나 기도 장소를 찾아 하나님과 개인적으로 기도할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합니다. 이와 같은 개인기도는 우리에게 불필요한 외식적인 행위를 방지해 주고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 나아가 진실된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겟세마네에서 어떤 기도를 드렸습니까?
첫째,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셨습니다. 40절을 보십시오. "그 곳에 이르러 저희에게 이르시되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 하시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라 하시고 자신과 제자들을 위해 기도 하셨습니다. 특히 제자들을 위해 중보기도 하셨습니다. 그들에게 다가오는 시련은 피할 수가 없으나 그 환란의 시련으로 인해서 시험에 들어 실족하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인생은 얼마나 연약한 존재입니까? 우리는 쉽게 넘어지며 실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넘어지고 실족하더라도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기도해야합니다. 아무리 교활한 마귀라도 기도하는 성도는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 주님의 종으로서 여러 가지 시련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우리는 어떠한 환란의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에 의지하여 시험에 들지 않도록 간절히 기도해야합니다. 또한 예수님을 배워 섬기는 형제 자매님들을 위해 중보기도하는 아름다운 기도의 사람들로 성장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둘째, 자신의 뜻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를 하셨습니다. 42절을 보십시오.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예수님은 온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하셨습니다. 여기서 '잔'은 월드컵이나 올림픽에서 우승자에 주어지는 트로피가 아니라 십자가로 인한 고통과 죽음의 잔입니다. 여기에는 견딜 수 없는 육신의 고통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고통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온 인류가 죄로 인해서 받아야 할 저주의 십자가를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써 감당하셔야 했습니다. 왜 예수님은 영적인 투쟁을 하면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주님 앞에 나와 진실 되게 기도하셨습니까? 42절을 다시 보십시오.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구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간구는 육신적인 고통이나 어려움을 이기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기도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도의 결론에 가서 "하나님 아버지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러나 아버지의 원대로 마옵시고 나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어떤 분은 야곱의 소원기도를 한다고 하면서(하나님 이번 학기에 장학금을 주시지 않으면....)하면서 하나님을 협박하는 분도 있습니다. 한 형제님은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형의 자매와 결혼하고 선진국 선교사로 쓰임 받고자 했습니다. 키는 165㎝ 이상이고 얼굴은 목자이지만 귀엽고 상냥하고 요리도 잘하는 순종적인 자매님을 동경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믿음의 결혼 방향을 받았을 때 동역자는 자신이 생각했던 이상형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키는 작고 여장부와 같은 믿음의 여인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영접하기 힘들어지만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주신 베스트의 동역자로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때에 아름다운 믿음의 가정을 이루고 천사도 흠모하는 선교가정으로 미국 역사에 귀하게 쓰임받고 있습니다. 저는 1991년에 미국 유학생 선교사로 나아가고자 기도하고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일본선교사로 예비하고 일방적인 주권 가운데 보내시고자 하셨습니다. 저는 육본의 실무자에게 사정도하고 토플시험도 준비하고 어찌하던지 미국으로 가고자 했습니다. 일본어의 히라가나 하나도 몰랐고 전공도 수학이었던 저는 금속의 금자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순종하여 일본으로 가고자 결단하고 어학과 전공공부를 시작했을 때 하나님은 모든 것을 미리 준비하시고 베스트의 환경을 예비하셨습니다. 면접시험에서 일본어를 알아듣지 못해 교수님들의 질문에 한 마디로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는데 입학을 허락하시고 동해대 개척역사를 섬기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또한 믿음으로 사명을 감당할 때 보나스로 2편의 논문과 학위도 주시고 귀국 후에도 계승 역사를 이루어 주셨습니다. 현재는 7분의 선교사님들과 1명의 일본인 목자가 개척역사를 섬기고 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방향가운데 나아갔을 때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고 축복하셨습니다. 우리의 순종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들의 기도도 예수님의 기도와 같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기도가 되어야합니다. 나의 이기심과 사욕을 위한 간구에서 하나님을 위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로 변해야합니다.
셋째, 피땀이 나도록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4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같이 되더라" 땀이 피방울처럼 떨어졌다는 의미는 얼마나 애써서 기도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감람산에서의 예수님의 기도는 예수님의 고난의 일부였습니다. 예수님은 골고다에서는 육신의 피를 흘리셨으나 감람산에서는 기도할 때 영혼의 피를 흘리셨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예수님의 기도와 같이 간절히, 생명을 다해서 드리는 기도가 되어야합니다. 이때에 사자가 하늘로부터 와서 예수님을 도왔습니다(43). 주님께서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기도를 드릴 때 천사가 내려와서 도왔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할 때도 성령의 인도를 받는 기도를 드려야합니다. 아무리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미사여구의 기도도 성령의 인도함을 받지 않는 기도는 진정한 기도라 할 수 없습니다. 기도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하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횰을 구하고 자신의 육신의 정욕을 말씀에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순종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새롭게 하고 사명을 감당할 새 힘을 덧입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첫째, 예수님은 가장 힘든 일을 기도로 해결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생애에서 가장 어려운 시련 중의 하나는 메시아로서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광야에서 시험받았을 때였을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40일간 깨어서 말씀과 기도로써 그 시험을 이겼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기간 중에도 낮이면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이면 나가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쉬시며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광야의 시험보다도 훨씬 더 어려운 시련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앞에 놓고 자신의 육신과 투쟁하는 때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장 어려운 시련을 간절한 기도로 해결코자 하셨습니다. 어느 형제님은 자신이 어려운 문제에 부딪히면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잠을 자고 잊으려고 합니다. 다른 형제는 사람을 찾아다니면서 도움을 요청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형제님은 밤새 피시방에서 게임을 하거나 만화방, 비디오방이나 3류 극장가를 유리방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로써 영적인 투쟁을 하는 가운데 해결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려운 문제에 부딪힐 때마다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간절한 기도로써 해결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둘째, 예수님은 자신이 하고싶은 일보다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육신의 소원보다도 하나님의 원하시는 일을 구했습니다. 오늘날 젊은 지성인들은 자신이 해야 할 일보다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택하고 추구합니다. 자신의 인생은 자기 것이기 때문에 행복하고 즐겁게 살고자 하여 육신주의적인 쾌락과 타락에 빠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육신의 소욕보다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택했습니다. 자신의 뜻보다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했습니다. 그리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그리스도로서 온 인류의 죄를 감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알기 위해서 피땀을 흘리며 기도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육신의 소원을 꺾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고자 피땀을 흘리며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기도로 욕신의 연약함과 유혹을 극복하고 영적인 투쟁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신앙적인 양심에 기초하여 생각할 때 자신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문제는 자신의 육신의 소욕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릴 때입니다. 즉 자신의 계획이나 생각이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뜻에 상반될 때입니다. 이때 자기 육신의 소욕을 하나님의 뜻으로 합리화하거나 정당화하는 죄를 범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처럼 진실되게 하나님 앞에서 그 문제를 내려놓고 육신의 소욕을 죽이고 기도로 영적인 투쟁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에 두고 피땀나는 기도를 하실 때 제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45절을 보십시오. "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을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그들은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너무 슬픔 나머지 예수님의 기도부탁에도 불구하고 잠을 잤습니다. 그들은 유다의 배신 때문에 매우 슬픔 가운데 있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자신의 죽음에 대한 말씀 때문에 더욱 슬프고 숙연한 분위기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영접하지 아니하고 지상 메시야관을 갖고 있었으므로 예수님의 깊은 고뇌와 그 심정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가 길어지자 그들은 피로에 지쳐서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기도하자"고 부탁까지 하셨습니다.(마26:38). 그러나 열한 제자 중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를 통한 구속역사를 위해 기도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이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에게 자주 오신 것을 모르고 잠만 잤습니다(45).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기도 중에 오셨다고 했습니다(막14:37-41). 이와 같이 예수님은 임박한 십자가를 앞에 두고도 어찌하든지 제자들을 돕고자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하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그들로 하여금 배우고 영적으로 깨어서 기도하도록 도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 어려운 시련을 어떻게 극복하는가를 기도하심으로 손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어떠한 시련과 고난속에서도 주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사랑에 기초하여 기도로 가을학기 1:1과 제자양성에서 승리를 체험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모든 문제 앞에서 기도의 영적 투쟁을 통해 살아 계신 하나님을 체험하고 새 역사를 창조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II. 심문받으신 예수님 (47-71)
47-53절에서는 예수님의 체포당하심에 대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체포당하게 되셨습니까? 예수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에 한 무리가 나타났습니다. 열 두 제자 중 하나인 유다가 앞장서서 그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유다는 예수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왔습니다. 그 당시 입을 맞추는 것은 중동지역의 인사관습 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그들에게 미리 암호를 정해 주면서 "내가 입을 맞추는 사람이 그이니 그를 잡으시오(마26:49)."라고 약속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유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이때에 예수님의 주위에 있던 제자들이 "주여 우리가 검으로 치리이까?"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그 오른쪽 귀를 떨어뜨렸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사람의 귀를 만져서 고쳐 주셨습니다(47-51).
여기에서 예수님은 칼을 쓰는 제자들을 왜 만류하셨을까요? 제자들은 어떤 점에서 실수를 했습니까? 그들은 세상적인 방법으로 문제해결을 하고자 했습니다(49). 예수님의 제자들은 몰려온 군졸들을 대항하여 준비한 검으로 전투를 할 태세였습니다. 자칫하면 군졸들과 예수님의 제자들 간의 혈투가 벌어질 기세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방법은 그런 물리적인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원하시면 열두 영도 더 되는 천사들을 불러서 그들을 당장에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때로 어려운 영적인 문제를 해결할 때에 상대가 육신적으로 나온다거나 힘으로 나오고자 할 때 우리도 물리적인 힘이나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결하고자 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물리적인 힘으로는 인간의 근본문제를 전혀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진 자는 검으로 망하느니라(마26:52-54)" 예수님은 인간의 근본문제를 검이나 물리적인 힘을 통해서 해결할 수 없음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오직 십자가를 통해서 인간의 근본문제인 죄와 죽음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또한 무리에게도 자신이 붙잡혀 가는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의 때요 어두움의 권세로다 하시니라(52,53)."
54-62에서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붙들려서 대제사장의 집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멀찍이 따라갔습니다. 사람들이 뜰 한가운데 불을 피워놓고 둘러 앉아있었는데 베드로도 그 가운데 끼어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한 하녀가 베드로가 불빛을 안고 앉아있는 것을 보고 그를 자세히 쳐다보고 말하기를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어요."라고 말했습니다(56). 그때 베드로는 당황하여 말했습니다. 57절을 보십시오. "베드로가 부인하여 가로되 이 여자여 내가 저를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조금 뒤에 다른 사람이 베드로를 보고서 "너도 그 당이라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 사람아, 나는 아니로다.(58c)" 라고 부인했습니다. 그리고 한 시간쯤 지났을 때 또 다른 사람이 강경하게 주장하기를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59b)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어떻게 부인했습니까? 60절을 보십시오.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아 나는 너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 이런 베드로는 어떻게 회개하고 회복되었습니까? 베드로는 주님의 부드러운 사랑의 눈길을 보고서(61a), 자기의 잘못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눈길은 베드로에 대한 깊은 이해와 애정 어린 사랑의 눈길이었습니다. 또한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회개했습니다.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회개했습니다. 베드로는 밖에 나가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심히 통곡하며 회개했습니다(62). 우리도 어떠한 시련과 실패 가운데서도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안에서 다시 일어날 수 있길 기도합니다.
63-71에서는 공회에서 심문 받으시는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재판을 받으시기 전에 제사장의 하졸들에게 견딜 수 없는 희롱과 조롱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눈을 가리고 묻기를 "너를 때린 사람이 누군지 알아 맞혀 보라"고 했습니다(64). 그들은 그밖에도 온갖 말로써 예수님을 모욕하면서 욕설을 퍼부었습니다(65). 예수님은 산헤드린 공회에서 심문을 받으셨습니다. 심문관들은 "네가 그리스도이면 우리에게 말하라"고 하였습니다(67a). 그때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대답하시되 내가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않을 것이요 내가 물어도 너희가 대답지 아니할 것이니라. 그러나 이제 후로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 하시니" 그러자 모두가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라고 질문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분명하게 대답하셨습니다. "너희 말과 같이 내가 그니라(70b)." 그러자 그들은 "이제 우리에게 무슨 질문이 더 필요하겠소." 하면서 예수님을 빌라도 총독 앞으로 고소하기로 했습니다. 예수님은 험악하고 살벌한 심문 가운데서도 담대하고 분명하게 자신이 그리스도임을 증거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만물을 새롭게 회복시킬 메시야이심을 입증하셨습니다.
저는 일본선교를 준비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기도가 어떤 기도이며 내가 힘써서 해야할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동경대 교수님으로부터 입학을 받아주겠다는 편지를 받고 저는 기도하기보다는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라고 생각하고 누리고자만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저의 마음을 낮추시고자 군인신분이라는 이유로 교수심의과정에서 입학을 허락하지 않게 하셨습니다. 기반이 튼튼한 동경역사를 동역 하면서 세상적인 인정도 받고자 하는 마음을 회개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명문 사립대인 게이오 대학을 개척하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게이오 대학은 1858년 후쿠사와 유키치에 의해 창립되어 140년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유명 사립대로써 일본 기업의 인사담당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대학입니다. 학생들은 성실하며 우수한 자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거듭나면 일본과 세계를 섬길 수 있는 베드로와 같은 수제자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개척역사는 축복의 역사입니다. 저의 가정을 통해서 게이오 대학을 개척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모든 것을 새롭게 하고자 할 때 마음에 부담이 많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동역자와 기도 모임과 피싱, 1:1, 주일 예배등 모든 것을 감당하고자 할 때 축복은 축복인데 십자가가 너무 많아 보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두 번째 일본선교에 쓰임 받는데 예수님의 기도를 배워 자신의 육신의 소욕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고 게이오 대학 개척역사를 기도와 믿음으로 감당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매일 캠퍼스에 기도의 단을 쌓고 매주 생명의 말씀을 섬김으로 한 명의 믿음의 조상을 세울 수 있길 기도합니다. 또 모든 문제 앞에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라는 기도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사명의 십자가와 학업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감당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배웠습니다. 예수님은 그 생애 가운데서 가장 어려운 문제를 기도로써 해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도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신앙생활과 실제적인 삶에서 기도의 승리를 체험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라"
아버지여 원대로 하옵소서
말씀 / 누가복음 22:31-71
요절 / 누가복음 22:42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라"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공생애의 클라이막스인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첫째(31-46),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 둘째(47-71), 심문을 받으시는 예수님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어려운 시련에 부딪혔을 때 어떻게 그 문제를 해결하셨습니까? 예수님은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하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승리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를 배우고 실천하는 기도의 사람들로 성장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나의 원보다도 주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이 이루어지도록 간구 하는 기도의 용사들로 쓰임 받을 수 있길 기도합니다.
I.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신 예수님 (31-46)
예수님은 제자들과 조용한 시간을 가지시면서 성만찬을 드셨습니다(1-23). 예수님은 자신이 지실 십자가의 의미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런 예수님의 가르침을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배반당할 것을 말씀하시자 제자들은 자신들의 예수님께 대한 충성심을 과시라도 하려는 듯, 자신이 더 큰 자임을 주장하며 쟁론을 벌였습니다. 이 쟁론은 제자들의 본래 관심이 구세주이신 그리스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름으로써 얻게 될 지위나 영광에만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진정으로 큰 자는 젊은 자요 섬기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말씀하심으로 제자들의 논쟁에 종지부를 찍으셨습니다.
31-34에서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할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사탄은 유다에 이어 베드로를 넘어뜨리고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실족하지 않도록 어떻게 주의를 주었습니까? 31절을 보십시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이 말씀에서 사탄은 하나님 역사를 섬기는 중심인물을 어찌하든지 실족시키고자 요동함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특별히 베드로의 이름을 말씀하시면서 깨어 있도록 주의하셨습니다. 이는 수제자로서 자기 과신과 우월감으로 헤이해진 그의 심령을 새롭게 하고자 함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이를 통해서 모든 제자들에게 사탄의 유혹에 대한 경고를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탄은 유다에 이어 다른 제자들마저 유혹하여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을 가지 못하도록 하고자 기를 썼습니다. 사탄의 본성은 영혼을 고통받게 하며 결국에는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입니다. 불신자나 거짓 신앙인들은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시1:4) 사탄이 까부르는 바람에 휩쓸립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을 훼방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탄이 제자들에게 관한 송사를 주님께 청구했다고 했습니다(31). 이와 같이 사탄은 언제나 우리의 죄와 허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송사를 합니다(욥1장). 사탄은 이렇게 하여 가룟 유다를 얻었고 이제 남은 제자들의 연약한 점을 송사 하여 그들의 영혼마저도 자기 것으로 삼고자 했습니다(욥1:8).
32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예수님은 베드로가 사탄의 시험에 넘어지지 않도록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돌이킨 후란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실족한 후에 회개하고 다시 믿음을 회복하여 사명을 감당할 때입니다. 이 때 그가 해야할 일은 형제를 굳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제자들을 돌보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 말을 들은 베드로는 의리의 뱃사람답게 어떤 자기 의지적인 결단을 말했습니까? 33절을 보십시오. "저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베드로는 주님의 사랑의 경고에도 깨닫지 못하고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갈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라고 호언장담했습니다. 이와 같이 의로운 의지적인 결단은 좋은 것이지만(딤전3:1), 무지한 소치에서 나온 것은 울리는 꽹과리요 허공을 치는 메아리와 같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육신의 연약함과 타락한 본성, 그리고 자기에게 닥칠 고난을 알지 못했습니다. 또한 하늘의 악한 영들의 능력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장담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 의지적인 무지한 결단을 해서는 안됩니다. 오직 기도함으로 영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겸손히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합니다.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과 비교해서 자기가 얼마나 충성된 제자인가를 나타내고자 하는 불순한 동기에서 그런 장담을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신앙적 우월성을 과시하여 수제자로서 주도권을 잡고자 했습니다. 그의 인간적인 의도를 아신 예수님은 그의 연약함을 어떻게 깨우쳐 주셨습니까?
34절을 보십시오. "가라사대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베드로가 얼마나 연약한 자인가를 잘 아셨습니다. 그는 지상 메시아관을 갖고 있었고 복음신앙도 부활신앙도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큰 입으로 큰 소리를 쳤지만 예수님의 말씀대로 닭 울기 전에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습니다(60). 이와 같이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의 진리를 외면하고서는 삶의 참된 승리를 얻을 수 없습니다(고후4:2). 이는 참 믿음과 거짓 믿음의 판별은 고난과 환란이 닥칠 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35-38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후 새 환경을 경계하시며 이에 대한 준비를 지시하신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로하시고 고아와 같이 두지 않고 성령으로 보호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또한 제자들도 스스로 지켜 방어할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39-46에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에 대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생활은 어떠했습니까? 예수님은 습관적으로 감람산에 나가사 기도하셨습니다(39). 이를 통해서 예수님의 기도생활의 일면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시간을 정해놓고 습관적으로 지속적으로 기도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산적한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힘은 바로 기도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살전5:17). '쉬지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 24시간 매일 잠도 자지 않고 기도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실제적으로 예수님처럼 규칙적으로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함으로 실천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규칙적인 기도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해야합니다. 또한 예수님은 조용한 곳에서 개인기도를 하셨습니다(41). 예수님은 기도의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 돌 던질 만큼 떨어져서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는 조용한 골방이나 기도 장소를 찾아 하나님과 개인적으로 기도할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합니다. 이와 같은 개인기도는 우리에게 불필요한 외식적인 행위를 방지해 주고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 나아가 진실된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겟세마네에서 어떤 기도를 드렸습니까?
첫째,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셨습니다. 40절을 보십시오. "그 곳에 이르러 저희에게 이르시되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 하시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라 하시고 자신과 제자들을 위해 기도 하셨습니다. 특히 제자들을 위해 중보기도 하셨습니다. 그들에게 다가오는 시련은 피할 수가 없으나 그 환란의 시련으로 인해서 시험에 들어 실족하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인생은 얼마나 연약한 존재입니까? 우리는 쉽게 넘어지며 실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넘어지고 실족하더라도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기도해야합니다. 아무리 교활한 마귀라도 기도하는 성도는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 주님의 종으로서 여러 가지 시련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우리는 어떠한 환란의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에 의지하여 시험에 들지 않도록 간절히 기도해야합니다. 또한 예수님을 배워 섬기는 형제 자매님들을 위해 중보기도하는 아름다운 기도의 사람들로 성장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둘째, 자신의 뜻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를 하셨습니다. 42절을 보십시오.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예수님은 온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하셨습니다. 여기서 '잔'은 월드컵이나 올림픽에서 우승자에 주어지는 트로피가 아니라 십자가로 인한 고통과 죽음의 잔입니다. 여기에는 견딜 수 없는 육신의 고통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고통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온 인류가 죄로 인해서 받아야 할 저주의 십자가를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써 감당하셔야 했습니다. 왜 예수님은 영적인 투쟁을 하면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주님 앞에 나와 진실 되게 기도하셨습니까? 42절을 다시 보십시오.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구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간구는 육신적인 고통이나 어려움을 이기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기도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도의 결론에 가서 "하나님 아버지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러나 아버지의 원대로 마옵시고 나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어떤 분은 야곱의 소원기도를 한다고 하면서(하나님 이번 학기에 장학금을 주시지 않으면....)하면서 하나님을 협박하는 분도 있습니다. 한 형제님은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형의 자매와 결혼하고 선진국 선교사로 쓰임 받고자 했습니다. 키는 165㎝ 이상이고 얼굴은 목자이지만 귀엽고 상냥하고 요리도 잘하는 순종적인 자매님을 동경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믿음의 결혼 방향을 받았을 때 동역자는 자신이 생각했던 이상형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키는 작고 여장부와 같은 믿음의 여인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영접하기 힘들어지만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주신 베스트의 동역자로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때에 아름다운 믿음의 가정을 이루고 천사도 흠모하는 선교가정으로 미국 역사에 귀하게 쓰임받고 있습니다. 저는 1991년에 미국 유학생 선교사로 나아가고자 기도하고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일본선교사로 예비하고 일방적인 주권 가운데 보내시고자 하셨습니다. 저는 육본의 실무자에게 사정도하고 토플시험도 준비하고 어찌하던지 미국으로 가고자 했습니다. 일본어의 히라가나 하나도 몰랐고 전공도 수학이었던 저는 금속의 금자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순종하여 일본으로 가고자 결단하고 어학과 전공공부를 시작했을 때 하나님은 모든 것을 미리 준비하시고 베스트의 환경을 예비하셨습니다. 면접시험에서 일본어를 알아듣지 못해 교수님들의 질문에 한 마디로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는데 입학을 허락하시고 동해대 개척역사를 섬기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또한 믿음으로 사명을 감당할 때 보나스로 2편의 논문과 학위도 주시고 귀국 후에도 계승 역사를 이루어 주셨습니다. 현재는 7분의 선교사님들과 1명의 일본인 목자가 개척역사를 섬기고 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방향가운데 나아갔을 때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고 축복하셨습니다. 우리의 순종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들의 기도도 예수님의 기도와 같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기도가 되어야합니다. 나의 이기심과 사욕을 위한 간구에서 하나님을 위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로 변해야합니다.
셋째, 피땀이 나도록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4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같이 되더라" 땀이 피방울처럼 떨어졌다는 의미는 얼마나 애써서 기도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감람산에서의 예수님의 기도는 예수님의 고난의 일부였습니다. 예수님은 골고다에서는 육신의 피를 흘리셨으나 감람산에서는 기도할 때 영혼의 피를 흘리셨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예수님의 기도와 같이 간절히, 생명을 다해서 드리는 기도가 되어야합니다. 이때에 사자가 하늘로부터 와서 예수님을 도왔습니다(43). 주님께서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기도를 드릴 때 천사가 내려와서 도왔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할 때도 성령의 인도를 받는 기도를 드려야합니다. 아무리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미사여구의 기도도 성령의 인도함을 받지 않는 기도는 진정한 기도라 할 수 없습니다. 기도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하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횰을 구하고 자신의 육신의 정욕을 말씀에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순종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새롭게 하고 사명을 감당할 새 힘을 덧입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첫째, 예수님은 가장 힘든 일을 기도로 해결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생애에서 가장 어려운 시련 중의 하나는 메시아로서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광야에서 시험받았을 때였을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40일간 깨어서 말씀과 기도로써 그 시험을 이겼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기간 중에도 낮이면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이면 나가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쉬시며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광야의 시험보다도 훨씬 더 어려운 시련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앞에 놓고 자신의 육신과 투쟁하는 때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장 어려운 시련을 간절한 기도로 해결코자 하셨습니다. 어느 형제님은 자신이 어려운 문제에 부딪히면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잠을 자고 잊으려고 합니다. 다른 형제는 사람을 찾아다니면서 도움을 요청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형제님은 밤새 피시방에서 게임을 하거나 만화방, 비디오방이나 3류 극장가를 유리방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로써 영적인 투쟁을 하는 가운데 해결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려운 문제에 부딪힐 때마다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간절한 기도로써 해결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둘째, 예수님은 자신이 하고싶은 일보다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육신의 소원보다도 하나님의 원하시는 일을 구했습니다. 오늘날 젊은 지성인들은 자신이 해야 할 일보다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택하고 추구합니다. 자신의 인생은 자기 것이기 때문에 행복하고 즐겁게 살고자 하여 육신주의적인 쾌락과 타락에 빠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육신의 소욕보다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택했습니다. 자신의 뜻보다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했습니다. 그리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그리스도로서 온 인류의 죄를 감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알기 위해서 피땀을 흘리며 기도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육신의 소원을 꺾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고자 피땀을 흘리며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기도로 욕신의 연약함과 유혹을 극복하고 영적인 투쟁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신앙적인 양심에 기초하여 생각할 때 자신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문제는 자신의 육신의 소욕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릴 때입니다. 즉 자신의 계획이나 생각이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뜻에 상반될 때입니다. 이때 자기 육신의 소욕을 하나님의 뜻으로 합리화하거나 정당화하는 죄를 범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처럼 진실되게 하나님 앞에서 그 문제를 내려놓고 육신의 소욕을 죽이고 기도로 영적인 투쟁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에 두고 피땀나는 기도를 하실 때 제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45절을 보십시오. "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을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그들은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너무 슬픔 나머지 예수님의 기도부탁에도 불구하고 잠을 잤습니다. 그들은 유다의 배신 때문에 매우 슬픔 가운데 있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자신의 죽음에 대한 말씀 때문에 더욱 슬프고 숙연한 분위기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영접하지 아니하고 지상 메시야관을 갖고 있었으므로 예수님의 깊은 고뇌와 그 심정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가 길어지자 그들은 피로에 지쳐서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기도하자"고 부탁까지 하셨습니다.(마26:38). 그러나 열한 제자 중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를 통한 구속역사를 위해 기도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이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에게 자주 오신 것을 모르고 잠만 잤습니다(45).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기도 중에 오셨다고 했습니다(막14:37-41). 이와 같이 예수님은 임박한 십자가를 앞에 두고도 어찌하든지 제자들을 돕고자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하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그들로 하여금 배우고 영적으로 깨어서 기도하도록 도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 어려운 시련을 어떻게 극복하는가를 기도하심으로 손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어떠한 시련과 고난속에서도 주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사랑에 기초하여 기도로 가을학기 1:1과 제자양성에서 승리를 체험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모든 문제 앞에서 기도의 영적 투쟁을 통해 살아 계신 하나님을 체험하고 새 역사를 창조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II. 심문받으신 예수님 (47-71)
47-53절에서는 예수님의 체포당하심에 대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체포당하게 되셨습니까? 예수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에 한 무리가 나타났습니다. 열 두 제자 중 하나인 유다가 앞장서서 그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유다는 예수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왔습니다. 그 당시 입을 맞추는 것은 중동지역의 인사관습 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그들에게 미리 암호를 정해 주면서 "내가 입을 맞추는 사람이 그이니 그를 잡으시오(마26:49)."라고 약속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유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이때에 예수님의 주위에 있던 제자들이 "주여 우리가 검으로 치리이까?"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그 오른쪽 귀를 떨어뜨렸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사람의 귀를 만져서 고쳐 주셨습니다(47-51).
여기에서 예수님은 칼을 쓰는 제자들을 왜 만류하셨을까요? 제자들은 어떤 점에서 실수를 했습니까? 그들은 세상적인 방법으로 문제해결을 하고자 했습니다(49). 예수님의 제자들은 몰려온 군졸들을 대항하여 준비한 검으로 전투를 할 태세였습니다. 자칫하면 군졸들과 예수님의 제자들 간의 혈투가 벌어질 기세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방법은 그런 물리적인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원하시면 열두 영도 더 되는 천사들을 불러서 그들을 당장에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때로 어려운 영적인 문제를 해결할 때에 상대가 육신적으로 나온다거나 힘으로 나오고자 할 때 우리도 물리적인 힘이나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결하고자 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물리적인 힘으로는 인간의 근본문제를 전혀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진 자는 검으로 망하느니라(마26:52-54)" 예수님은 인간의 근본문제를 검이나 물리적인 힘을 통해서 해결할 수 없음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오직 십자가를 통해서 인간의 근본문제인 죄와 죽음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또한 무리에게도 자신이 붙잡혀 가는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의 때요 어두움의 권세로다 하시니라(52,53)."
54-62에서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붙들려서 대제사장의 집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멀찍이 따라갔습니다. 사람들이 뜰 한가운데 불을 피워놓고 둘러 앉아있었는데 베드로도 그 가운데 끼어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한 하녀가 베드로가 불빛을 안고 앉아있는 것을 보고 그를 자세히 쳐다보고 말하기를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어요."라고 말했습니다(56). 그때 베드로는 당황하여 말했습니다. 57절을 보십시오. "베드로가 부인하여 가로되 이 여자여 내가 저를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조금 뒤에 다른 사람이 베드로를 보고서 "너도 그 당이라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 사람아, 나는 아니로다.(58c)" 라고 부인했습니다. 그리고 한 시간쯤 지났을 때 또 다른 사람이 강경하게 주장하기를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59b)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어떻게 부인했습니까? 60절을 보십시오.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아 나는 너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 이런 베드로는 어떻게 회개하고 회복되었습니까? 베드로는 주님의 부드러운 사랑의 눈길을 보고서(61a), 자기의 잘못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눈길은 베드로에 대한 깊은 이해와 애정 어린 사랑의 눈길이었습니다. 또한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회개했습니다.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회개했습니다. 베드로는 밖에 나가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심히 통곡하며 회개했습니다(62). 우리도 어떠한 시련과 실패 가운데서도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안에서 다시 일어날 수 있길 기도합니다.
63-71에서는 공회에서 심문 받으시는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재판을 받으시기 전에 제사장의 하졸들에게 견딜 수 없는 희롱과 조롱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눈을 가리고 묻기를 "너를 때린 사람이 누군지 알아 맞혀 보라"고 했습니다(64). 그들은 그밖에도 온갖 말로써 예수님을 모욕하면서 욕설을 퍼부었습니다(65). 예수님은 산헤드린 공회에서 심문을 받으셨습니다. 심문관들은 "네가 그리스도이면 우리에게 말하라"고 하였습니다(67a). 그때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대답하시되 내가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않을 것이요 내가 물어도 너희가 대답지 아니할 것이니라. 그러나 이제 후로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 하시니" 그러자 모두가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라고 질문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분명하게 대답하셨습니다. "너희 말과 같이 내가 그니라(70b)." 그러자 그들은 "이제 우리에게 무슨 질문이 더 필요하겠소." 하면서 예수님을 빌라도 총독 앞으로 고소하기로 했습니다. 예수님은 험악하고 살벌한 심문 가운데서도 담대하고 분명하게 자신이 그리스도임을 증거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만물을 새롭게 회복시킬 메시야이심을 입증하셨습니다.
저는 일본선교를 준비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기도가 어떤 기도이며 내가 힘써서 해야할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동경대 교수님으로부터 입학을 받아주겠다는 편지를 받고 저는 기도하기보다는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라고 생각하고 누리고자만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저의 마음을 낮추시고자 군인신분이라는 이유로 교수심의과정에서 입학을 허락하지 않게 하셨습니다. 기반이 튼튼한 동경역사를 동역 하면서 세상적인 인정도 받고자 하는 마음을 회개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명문 사립대인 게이오 대학을 개척하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게이오 대학은 1858년 후쿠사와 유키치에 의해 창립되어 140년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유명 사립대로써 일본 기업의 인사담당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대학입니다. 학생들은 성실하며 우수한 자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거듭나면 일본과 세계를 섬길 수 있는 베드로와 같은 수제자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개척역사는 축복의 역사입니다. 저의 가정을 통해서 게이오 대학을 개척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모든 것을 새롭게 하고자 할 때 마음에 부담이 많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동역자와 기도 모임과 피싱, 1:1, 주일 예배등 모든 것을 감당하고자 할 때 축복은 축복인데 십자가가 너무 많아 보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두 번째 일본선교에 쓰임 받는데 예수님의 기도를 배워 자신의 육신의 소욕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고 게이오 대학 개척역사를 기도와 믿음으로 감당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매일 캠퍼스에 기도의 단을 쌓고 매주 생명의 말씀을 섬김으로 한 명의 믿음의 조상을 세울 수 있길 기도합니다. 또 모든 문제 앞에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라는 기도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사명의 십자가와 학업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감당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배웠습니다. 예수님은 그 생애 가운데서 가장 어려운 문제를 기도로써 해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도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신앙생활과 실제적인 삶에서 기도의 승리를 체험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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