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마가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제자양성 제 7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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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제자양성 제 7 강
예수님의 수제자 양성
말씀/ 마가복음 1장-16장
요절/ 마가복음 3:16,17 "이 열둘을 세우셨으니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뢰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지금까지 우리는 여섯개의 강의를 통해 예수님의 제자양성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오늘은 제자양성의 진수라고할 수 있는 key member training 즉 수제자 양성입니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 가운데 세명의 수제자 그룹을 세우셨고 그 가운데서도 베드로 한 사람을 키우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세 명의 수제자 그룹과 수제자 베드로를 어떻게 도우셨는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저희가 본문 말씀을 통해 수제자 양성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내가 돕고자 하는 한 사람을 찾아 가을학기 제자양성 역사를 섬길 수 있길 기도합니다.
I. 예수님과 세 제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은 크게 복음을 전파하며 가르치시는 일, 병자를 고쳐주시는 일, 그리고 제자들을 훈련하사 키우신 일입니다. 그중에서도 예수님께서 제자를 훈련하신 일은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의 노른자위와 같이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이를위해 예수님은 첫번째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막1:16,19절을 보십시오.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저희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예수님께서 첫번째 제자로 부른 자들은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는 어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평범한 자들이요 자신들의 일에 성실한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율법 교육과 인간 기초 훈련이 잘된 엘리트 집단에서 제자를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새 포도주 되시는 예수님을 담을 수 있는 겸손하고 배우고자 하는 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부르시면서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부르셨습니다. 1:17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예수님은 그들을 사람 낚는 어부로 키우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세상이란 바다에 그물을 던져 수많은 영혼들을 하나님 나라의 해변으로 이끄는 자들로 키우고자 하셨습니다. 지금까지 그들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고기를 많이 잡는가 하는데 있었습니다. 푸른 바다에 그물을 던져 끌어 올릴 때 흰 비늘을 드러내며 파닥거리는 고기를 보면 그들은 살맛이 났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어떻게 하면 사람을 사랑하고 섬기며 살릴지는 연구하는 자들로 변화시키고자 하신 것입니다.
3:16-19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택하신 열두 제자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그들은 시몬, 야고보, 요한, 안드레, 빌립, 바돌로매, 마태, 도마,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다대오, 가나안인 시몬, 그리고 가룟 유다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중에 세 제자들에게는 특별한 이름을 더하셨습니다. 3:16,17절을 보십시오. "이 열둘을 세우셨으니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뢰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먼저 예수님은 시몬에게는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43절에는 게바라는 이름도 주셨는데 두 이름이 동일하게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장차 그를 반석과 같은 인물로 교회역사에 귀하게 쓰시고자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6:18절에서는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예수님은 베드로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라는 신앙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시고 베드로를 교회역사에 반석과같은 위대한 인물이 되게 하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후에 그는 베드로 전후서를 기록하며 핍박가운데 있는 신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산소망을 제시하는 반석과같은 인물이 되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세베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에게 보아너게 곧 우뢰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셨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성격을 말해주는 것이었습니다. 한번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사마리아를 거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기를 거절하였습니다. 그러자 화가 난 야고보와 요한은 하늘에서 불을 내려 그들로 바베큐가 되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그들은 야심이 얼마나 많은지 베드로보다 높아지기 위해 자신의 어머니를 이용해 예수님께 청탁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하나님의 역사에 우뢰와같은 말씀의 종이요 위대한 인물이 되도록 소망가운데 키우셨습니다. 후에 야고보는 헤롯 안티바스에 의해 죽음으로 기독교 역사상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으며 사도 요한은 네번째 복음서를 기록하였고 요한 1,2,3서와 계시록을 집필하였습니다. 또한 끝까지 복음을 전하며 영지주의자들과 맞서 신앙을 지킨 위대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 가운데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특별한 관심을 가지시고 수제자 그룹으로 키우셨습니다.
그럼 예수님께서 이들을 어떻게 도와 주셨습니까?
첫째, 중요한 자리에 함께 데려가심으로 그들에게 부활 믿음을 심어 주셨습니다. 한번은 예수님께 회당장 야이로가 찾아와 자신의 죽어가는 어린 딸을 살려 달라고 간절하게 부탁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의 집에 가시는 도중 혈루증 여인을 고치시기 위해 시간을 지체하시는 바람에 야이로의 딸은 죽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도 죽은 딸을 어쩔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예수님을 더 괴롭게 말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슬피 울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라고 말씀하시자 사람들은 비웃었습니다. 예수님은 비웃는 무리를 다 내어 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그곳에 남겨 두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죽은 딸에게 "달리다굼" 하심으로 소녀를 일으키셨습니다. 예수님은 세명의 제자들에게 부활의 능력을 나타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기초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비로서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듣기 거북하고 싫은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상 메시야 왕국을 건설해야 하는데 죽으셔야 한다는 것이 도저히 영접이 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사실이 부담이 되었습니다. 특별히 수제자 베드로는 자신의 죽으심을 말씀하시는 예수님께 간하다가 사단이라고 책망까지 받아 마음이 몹시 힘들었습니다. 그는 얼마동안 몸은 걸어다녔지만 마음은 누워있었습니다. 그런 제자들의 마음을 잘 아시는 예수님은 세 제자를 데리고 따로 변화산에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변형되셨습니다. 그 영광이 얼마나 찬란한지 세상에서 아무리 빨래를 잘하는 사람도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영광을 체험한 베드로는 다시 세상에 내려가서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곳에서 초막을 짓고 영원히 살고 싶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 제자들에게 영광스런 모습을 보여주신 이유는 그들이 십자가의 고난 가운데서도 부활의 영광을 소망하는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세 제자들에게 집중적으로 십자가를 가르치셨고 부활을 영광을 보여 주셨습니다. 부활의 영광을 소망할 때 우리는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갈 수 있습니다.
둘째, 진정한 리더쉽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세 제자들만을 따로 데리고 다니시자 다른 제자들 가운데 이를 시기하며 서로 누가 큰가 하는 쟁론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세 제자들만 편애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또한 세 제자들은 그들 나름대로 특권 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번은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고 있었습니다. 이를 본 요한은 그가 자신들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귀신을 쫓아내지 말도록 압력을 가했습니다. 이는 그들 안에 예수님을 통해 권세를 부리고자 하는 마음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아신 예수님은 제자들 안에 있는 헛된 명예욕과 권세욕을 도와 주셨습니다. 세상에서 사람들이 높은 위치에 오르고자 하는 목적은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과시하고자 하는 욕망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말에 '예' 라고 대답하기보다 '아니요' 라고 말하기를 더 좋아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시 사람들과 제자들에게 과히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는 가치관을 심어 주셨습니다. 막10:43-45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어떤 사람이 진정으로 큰 자인가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세 사람을 수제자 그룹으로 부르신 것은 그들에게 특권의식을 갖고 다른 사람을 부리라고 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섬기도록 하신 것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통해 진정으로 큰 자는 섬기는 자임을 가르치셨습니다.
셋째, 세 제자들이 예수님의 동역자가 되도록 도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세 제자를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데리고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두고 심히 고민하여 마음이 죽음과같은 고통가운데 있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능하다면 십자가를 지고 싶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로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몸부림치는 투쟁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때 세 제자들에게 기도 지원을 부탁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피곤을 이기지 못하고 졸고 있었습니다. 스승으로서 제자들에게 연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쉽지 않은 것입니다. 가급적이면 좋은 인상만을 남기고자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왜 제자들에게 이렇게 연약한 모습을 보여 주신 것입니까? 이는 그들이 앞으로 십자가를 어떻게 져야 하는가를 보여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제자들은 기도하기보다 몸으로 떼우고자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이 기도하는 자들이 되도록 키우셨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연약한 제자들이 예수님의 마음을 알고 예수님의 십자가에 동참하는 기도의 동역자들이 되길 원하셨습니다. 제자 양성의 궁극적인 목적은 스승을 배워 스승의 마음을 아는 동역자 수준으로까지 성장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영광의 순간뿐 아니라 고난의 때에도 수제자 그룹과 함께 하셨습니다.
열두 제자 중에서 세 사람의 제자들만 따로 세우고 그들을 집중적으로 훈련하신 것은 다른 제자들에게 시기심과 경쟁심을 일으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나머지 여덟 제자들은 이로인해 시기심으로 뼈가 썩는 고통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특별히 세 제자들을 구별하여 키우셨습니다. 왜 이렇게 하신 것입니까? 이는 예수님께서 세 제자들을 구심점으로 하여 제자 공동체를 이루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떤 모임이든지 그 모임에는 구심점이 필요합니다. 구심점이 없으면 위기의 순간에 뿔뿔히 흩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구심점이 분명하면 오뚜기와 같이 어떤 상황속에서도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 명의 수제자 그룹을 통해 영적 질서를 세우고 견고한 성령의 그릇을 이루길 원하셨습니다. 당시에 제자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서로 몹시 시기하며 경쟁하였습니다. 그러나 후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은 세 제자들을 구심점으로 하여 영적 질서를 세우고 합심 동역함으로 놀라운 사도 행전의 역사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수제자 그룹에 뽑힌 제자들을 부러워하며 그렇게 되지 못한 자신에 대해서 열등감을 갖습니다. 한 목자님은 학생 시절 쟁쟁한 다른 목자님들의 그늘에 가려 인정받지 못한 것에 대한 깊은 열등감과 상처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장차 세계 선교 역사에 지부장으로 쓰임받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지부장이 되었을때는 선진국 선교사 지부장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서 열등감을 갖게 되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이는 예수님을 순수하게 따른다고 하지만 우리 안에 있는 자기 영광과 명예욕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선교사님은 섬기러 오신 예수님을 묵상하며 자신이 영적 리더쉽을 잘 알지 못하고 있었다고 깊이 회개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세 제자들을 수제자로 세운 것은 권력의 핵심에 서서 다른 제자들을 다스리도록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다른 제자들보다 낮아져 섬기도록 세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들이 더 많은 고난을 감당하고 더 많은 섬김을 실천하는 자들로 키우셨습니다. 세상에서는 세움 받는 자는 권력의 핵심에 들어가 권력을 부리는 자이지만 예수님의 수제자는 섬기는 자입니다. 이를 위해 더 많은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의 수제자가 되고자 한다면 모든 사람을 섬기는 자로서의 고난과 훈련을 감당할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자기 야심과 인간적인 권세욕에 기초하여 예수님의 수제자가 되고자 한다면 결코 예수님께 쓰임받을 수 없습니다.
과거 저희 팀은 쟁쟁한 목자들로 인해 항상 불꽃이 튀었습니다. 절대적인 한 목자님과 베드로와 같이 예측 불허의 목자님으로 모임은 조용할 날이 별로 없었습니다. 모두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야심으로 경쟁을 하였습니다. 저도 뒤질세라 항상 최후의 승자가 되고자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사무엘 선교사님과 김아브라함 선교사님의 말 한마디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것을 보고 그 자리가 부러웠습니다. 그러나 저는 목자 생활을 하면서 그것은 저의 착각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번 유럽 수양회를 통해 이 사무엘 선교사님이 헌신적인 섬김을 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제가 예수님의 수제자가 진정으로 되길 원한다면 모든 사람을 섬기는 겸손한 종으로 변화되어야 함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제가 일생 막10:45절 말씀을 요절 말씀을 붙잡고 더욱 겸손과 섬김의 훈련을 깊이 감당하는 가운데 이시대 진정한 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II. 예수님과 베드로
예수님은 세 제자들 중에서도 특별히 베드로 한 사람에게 더 관심을 집중시키셨습니다. 그의 이름은 제자들 중 항상 가장 먼저 나옵니다. 이는 그가 자타가 공인하는 수제자임을 말해 줍니다. 그는 인간적으로 부족함이 많았지만 결정적일 때 항상 예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렸습니다.
그럼 예수님께서는 그를 어떻게 키우셨습니까?
첫째,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을 때 무섭게 책망하셨습니다. 한 번은 예수님께서 두 가지 질문을 하셨습니다. 하나는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아무에게도 알게 하지 말도록 경계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죽으실 것과 다시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그의 억센 팔로 예수님을 따로 데려다가 책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아따 예수님 그런 말씀은 하시덜 말랑께요, 죽기는 왜 죽습니까?" 이에 대해 예수님은 베드로를 꾸짖으시며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세상 소망에 기초하여 하나님의 사역을 가로 막고자 하자 사단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하나님 중심적인 사람이 되도록 도와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수제자로 인정만 받은 것이 아니라 어느 누구보다도 책망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책망을 받고 있다면 슬퍼하지 말고 나를 예수님의 수제자로 키우고자 하시는 사랑으로 영접해야겠습니다.
둘째, 자기 의를 버리고 끊임없이 겸손히 부르심의 은혜를 감당하도록 도우셨습니다.
한번은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좇고자 하였지만 재물이 많아 근심하다가 돌아간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이를 본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베드로는 자신의 의를 드러내고자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자들에게 주어질 놀라운 축복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핍박을 겸하여 받게 됨도 가르쳐 주셨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는 경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먼저 따른 자로서의 자기 의를 내세울 때 결국은 가장 나중된자와 같이 영적으로 어린 아이와 같을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르심 자체를 감사하고 겸손히 감당하고자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의와 근거없는 자만심을 버리지 않을 때 영적으로 뒤쳐지게 됩니다.
어떤 분은 대학교 1학때부터 부르심을 받고 영적 훈련을 받은 것을 큰 자랑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자신이 받은 훈련을 말하는 것으로 자신의 영적 성숙을 보여 주고자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먼저 된자로서 나중 될자가 많다고 하십니다. 중요한것은 신앙경력이 아니라 현재적으로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고 닮아가기를 힘쓰는가 하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심었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루는 열매없는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그러자 다음날 예수님께서 저주하신 무화과가 뿌리로부터 마른 것을 베드로가 보았습니다. 그에게 이 사건은 너무나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이 놀라운 광경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으라"는 한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믿을 때 태산과같은 문제도 바다에 던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하나님을 믿을 때 예수님께서 하신 일보다 더 크고 위대한 일을 이룰 줄을 믿으셨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을 때 위대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지만 믿음이 없을 때 작은 문제 앞에서도 두려워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하나님을 믿는 자립적인 믿음을 심으시고 그에게 하나님을 믿는 믿음만 있으면 불가능이 없음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독일 Bonn의 장베드로는 선교사님은 독일 지성인들의 개인주의와 인본주의가 마치 산과같이 보였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개척 초기에 독일 학생 양을 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장베드로 선교사님을 비롯한 선교사님들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도전하였을 때 그것을 가능하다는 것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때로 우리는 신세대 양 한 사람을 돕는 것도 어려워 보이고 나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절망감이 들어오기도 하지만 우리 하나님께는 결코 불가능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개인주의와 인본주의의 아성 독일 가운데 1만 성경 선생과 7천 가정 교회를 이루실 줄 믿습니다.
넷째, 그를 끝까지 도와 주셨습니다. 베드로의 특징 중의 하나는 큰 소리를 잘 친다는 것입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는 말씀을 인용해서 제자들이 다 예수님을 버릴 것임을 예언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나이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까지 버릴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늘밤 닭이 두번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자신있게 대답하였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그렇게 대답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연약함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22:31,3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으니 네가 돌이킨 후에 형제를 굳게 하라" 예수님은 그의 연약함을 아셨을뿐 아니라 그를 넘어 뜨리고자 하는 사단의 역사를 간파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기도하도록 도와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을 믿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랬을때 그는 계집 종 앞에서 예수님을 세번씩이나 부인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세번 부인하였을 때 닭이 베드로에게 회개를 촉구하며 두번 큰 소리로 울었습니다. 그는 닭소리를 듣고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통곡을 하였습니다. 이사건 이후로 베드로는 닭고기를 먹지 않았다고 합니다. 베드로가 기도하지 않았을 때 그는 인간적으로 강해보였지만 실제로는 연약한 자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베드로를 인내하시고 도와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가 실패를 통해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종으로 키우셨습니다.
한 형제님이 있었습니다. 그는 학창 시절 누구보다 모범적으로 훈련을 받고 제자양성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연약한 정욕 문제에 빠져 구원의 은혜마저 잃어버리고 세상으로 떠나고자 하였습니다. 이때 한 목자님이 그분을 끝까지 감당하여 주셨습니다. 반복되는 죄문제에도 포기치 않으시고 계속해서 심방하여 섬겨 주셨습니다. 한번은 죄를 짓고 얼굴이 시꺼멓게 되어 어두운 공원에서 방황하는 형제님을 목자님은 심방하여 도우시면서 "내가 결코 형제님을 포기하지 않을것이며 지옥까지라도 좇아가서 돕겠다" 라고 말씀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듣고 그 형제님은 자신의 죄악을 눈물로 회개하고 돌이키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자신의 연약함을 깊이 체험하고 주님의 은혜만을 붙잡는 목자로 변화되어 지금은 하나님의 역사에 귀하게 쓰임받는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 베드로를 도우시되 끝까지 도우셨습니다.
후에 베드로는 예수님의 소망을 좇아 섬기는 자로 제자 공동체를 이끌었고 핍박 가운데 있는 성도들을 위로하며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산 소망을 심는 위대한 종으로 성장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기도하지 않았을 때 그는 예수님을 세번 부인할 수 밖에 없는 연약한 자였지만 그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기도하였을 때 그는 한번에 삼천 명을 회심시키는 기적을 베풀기도 하였습니다. 무엇보다 계집종을 두려워하여 세번 부인하던 그가 후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꺼꾸로 메달려 죽기까지 하였습니다.
이상에서 볼 때 예수님의 수제자 양성은 제자양성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이는 한 사람의 영향력이 그만큼 크고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영국 가운데 이얀 목자님이 조상이요 수제자로 굳게 섰을 때 그 영향력 속에서 폴 형제님을 비롯한 많은 양들이 제자로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을 세우는 것이 제자양성의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저희가 많은 사람을 도울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을 도울 수는 있습니다. 현재 내가 돕고자 하는 그 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 한 사람을 분명히 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아직 그 한사람이 분명하지 않다면 수제자 한 사람을 보여 주시도록 기도해야 겠습니다. 이를통해 가을학기 우리 가운데 흥왕한 제자양성 역사가 이루어질 수 있길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양성
말씀/ 마가복음 1장-16장
요절/ 마가복음 3:16,17 "이 열둘을 세우셨으니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뢰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지금까지 우리는 여섯개의 강의를 통해 예수님의 제자양성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오늘은 제자양성의 진수라고할 수 있는 key member training 즉 수제자 양성입니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 가운데 세명의 수제자 그룹을 세우셨고 그 가운데서도 베드로 한 사람을 키우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세 명의 수제자 그룹과 수제자 베드로를 어떻게 도우셨는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저희가 본문 말씀을 통해 수제자 양성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내가 돕고자 하는 한 사람을 찾아 가을학기 제자양성 역사를 섬길 수 있길 기도합니다.
I. 예수님과 세 제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은 크게 복음을 전파하며 가르치시는 일, 병자를 고쳐주시는 일, 그리고 제자들을 훈련하사 키우신 일입니다. 그중에서도 예수님께서 제자를 훈련하신 일은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의 노른자위와 같이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이를위해 예수님은 첫번째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막1:16,19절을 보십시오.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저희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예수님께서 첫번째 제자로 부른 자들은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는 어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평범한 자들이요 자신들의 일에 성실한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율법 교육과 인간 기초 훈련이 잘된 엘리트 집단에서 제자를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새 포도주 되시는 예수님을 담을 수 있는 겸손하고 배우고자 하는 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부르시면서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부르셨습니다. 1:17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예수님은 그들을 사람 낚는 어부로 키우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세상이란 바다에 그물을 던져 수많은 영혼들을 하나님 나라의 해변으로 이끄는 자들로 키우고자 하셨습니다. 지금까지 그들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고기를 많이 잡는가 하는데 있었습니다. 푸른 바다에 그물을 던져 끌어 올릴 때 흰 비늘을 드러내며 파닥거리는 고기를 보면 그들은 살맛이 났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어떻게 하면 사람을 사랑하고 섬기며 살릴지는 연구하는 자들로 변화시키고자 하신 것입니다.
3:16-19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택하신 열두 제자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그들은 시몬, 야고보, 요한, 안드레, 빌립, 바돌로매, 마태, 도마,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다대오, 가나안인 시몬, 그리고 가룟 유다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중에 세 제자들에게는 특별한 이름을 더하셨습니다. 3:16,17절을 보십시오. "이 열둘을 세우셨으니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뢰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먼저 예수님은 시몬에게는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43절에는 게바라는 이름도 주셨는데 두 이름이 동일하게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장차 그를 반석과 같은 인물로 교회역사에 귀하게 쓰시고자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6:18절에서는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예수님은 베드로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라는 신앙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시고 베드로를 교회역사에 반석과같은 위대한 인물이 되게 하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후에 그는 베드로 전후서를 기록하며 핍박가운데 있는 신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산소망을 제시하는 반석과같은 인물이 되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세베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에게 보아너게 곧 우뢰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셨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성격을 말해주는 것이었습니다. 한번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사마리아를 거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기를 거절하였습니다. 그러자 화가 난 야고보와 요한은 하늘에서 불을 내려 그들로 바베큐가 되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그들은 야심이 얼마나 많은지 베드로보다 높아지기 위해 자신의 어머니를 이용해 예수님께 청탁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하나님의 역사에 우뢰와같은 말씀의 종이요 위대한 인물이 되도록 소망가운데 키우셨습니다. 후에 야고보는 헤롯 안티바스에 의해 죽음으로 기독교 역사상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으며 사도 요한은 네번째 복음서를 기록하였고 요한 1,2,3서와 계시록을 집필하였습니다. 또한 끝까지 복음을 전하며 영지주의자들과 맞서 신앙을 지킨 위대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 가운데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특별한 관심을 가지시고 수제자 그룹으로 키우셨습니다.
그럼 예수님께서 이들을 어떻게 도와 주셨습니까?
첫째, 중요한 자리에 함께 데려가심으로 그들에게 부활 믿음을 심어 주셨습니다. 한번은 예수님께 회당장 야이로가 찾아와 자신의 죽어가는 어린 딸을 살려 달라고 간절하게 부탁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의 집에 가시는 도중 혈루증 여인을 고치시기 위해 시간을 지체하시는 바람에 야이로의 딸은 죽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도 죽은 딸을 어쩔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예수님을 더 괴롭게 말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슬피 울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라고 말씀하시자 사람들은 비웃었습니다. 예수님은 비웃는 무리를 다 내어 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그곳에 남겨 두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죽은 딸에게 "달리다굼" 하심으로 소녀를 일으키셨습니다. 예수님은 세명의 제자들에게 부활의 능력을 나타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기초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비로서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듣기 거북하고 싫은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상 메시야 왕국을 건설해야 하는데 죽으셔야 한다는 것이 도저히 영접이 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사실이 부담이 되었습니다. 특별히 수제자 베드로는 자신의 죽으심을 말씀하시는 예수님께 간하다가 사단이라고 책망까지 받아 마음이 몹시 힘들었습니다. 그는 얼마동안 몸은 걸어다녔지만 마음은 누워있었습니다. 그런 제자들의 마음을 잘 아시는 예수님은 세 제자를 데리고 따로 변화산에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변형되셨습니다. 그 영광이 얼마나 찬란한지 세상에서 아무리 빨래를 잘하는 사람도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영광을 체험한 베드로는 다시 세상에 내려가서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곳에서 초막을 짓고 영원히 살고 싶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 제자들에게 영광스런 모습을 보여주신 이유는 그들이 십자가의 고난 가운데서도 부활의 영광을 소망하는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세 제자들에게 집중적으로 십자가를 가르치셨고 부활을 영광을 보여 주셨습니다. 부활의 영광을 소망할 때 우리는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갈 수 있습니다.
둘째, 진정한 리더쉽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세 제자들만을 따로 데리고 다니시자 다른 제자들 가운데 이를 시기하며 서로 누가 큰가 하는 쟁론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세 제자들만 편애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또한 세 제자들은 그들 나름대로 특권 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번은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고 있었습니다. 이를 본 요한은 그가 자신들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귀신을 쫓아내지 말도록 압력을 가했습니다. 이는 그들 안에 예수님을 통해 권세를 부리고자 하는 마음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아신 예수님은 제자들 안에 있는 헛된 명예욕과 권세욕을 도와 주셨습니다. 세상에서 사람들이 높은 위치에 오르고자 하는 목적은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과시하고자 하는 욕망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말에 '예' 라고 대답하기보다 '아니요' 라고 말하기를 더 좋아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시 사람들과 제자들에게 과히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는 가치관을 심어 주셨습니다. 막10:43-45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어떤 사람이 진정으로 큰 자인가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세 사람을 수제자 그룹으로 부르신 것은 그들에게 특권의식을 갖고 다른 사람을 부리라고 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섬기도록 하신 것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통해 진정으로 큰 자는 섬기는 자임을 가르치셨습니다.
셋째, 세 제자들이 예수님의 동역자가 되도록 도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세 제자를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데리고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두고 심히 고민하여 마음이 죽음과같은 고통가운데 있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능하다면 십자가를 지고 싶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로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몸부림치는 투쟁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때 세 제자들에게 기도 지원을 부탁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피곤을 이기지 못하고 졸고 있었습니다. 스승으로서 제자들에게 연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쉽지 않은 것입니다. 가급적이면 좋은 인상만을 남기고자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왜 제자들에게 이렇게 연약한 모습을 보여 주신 것입니까? 이는 그들이 앞으로 십자가를 어떻게 져야 하는가를 보여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제자들은 기도하기보다 몸으로 떼우고자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이 기도하는 자들이 되도록 키우셨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연약한 제자들이 예수님의 마음을 알고 예수님의 십자가에 동참하는 기도의 동역자들이 되길 원하셨습니다. 제자 양성의 궁극적인 목적은 스승을 배워 스승의 마음을 아는 동역자 수준으로까지 성장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영광의 순간뿐 아니라 고난의 때에도 수제자 그룹과 함께 하셨습니다.
열두 제자 중에서 세 사람의 제자들만 따로 세우고 그들을 집중적으로 훈련하신 것은 다른 제자들에게 시기심과 경쟁심을 일으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나머지 여덟 제자들은 이로인해 시기심으로 뼈가 썩는 고통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특별히 세 제자들을 구별하여 키우셨습니다. 왜 이렇게 하신 것입니까? 이는 예수님께서 세 제자들을 구심점으로 하여 제자 공동체를 이루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떤 모임이든지 그 모임에는 구심점이 필요합니다. 구심점이 없으면 위기의 순간에 뿔뿔히 흩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구심점이 분명하면 오뚜기와 같이 어떤 상황속에서도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 명의 수제자 그룹을 통해 영적 질서를 세우고 견고한 성령의 그릇을 이루길 원하셨습니다. 당시에 제자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서로 몹시 시기하며 경쟁하였습니다. 그러나 후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은 세 제자들을 구심점으로 하여 영적 질서를 세우고 합심 동역함으로 놀라운 사도 행전의 역사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수제자 그룹에 뽑힌 제자들을 부러워하며 그렇게 되지 못한 자신에 대해서 열등감을 갖습니다. 한 목자님은 학생 시절 쟁쟁한 다른 목자님들의 그늘에 가려 인정받지 못한 것에 대한 깊은 열등감과 상처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장차 세계 선교 역사에 지부장으로 쓰임받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지부장이 되었을때는 선진국 선교사 지부장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서 열등감을 갖게 되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이는 예수님을 순수하게 따른다고 하지만 우리 안에 있는 자기 영광과 명예욕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선교사님은 섬기러 오신 예수님을 묵상하며 자신이 영적 리더쉽을 잘 알지 못하고 있었다고 깊이 회개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세 제자들을 수제자로 세운 것은 권력의 핵심에 서서 다른 제자들을 다스리도록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다른 제자들보다 낮아져 섬기도록 세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들이 더 많은 고난을 감당하고 더 많은 섬김을 실천하는 자들로 키우셨습니다. 세상에서는 세움 받는 자는 권력의 핵심에 들어가 권력을 부리는 자이지만 예수님의 수제자는 섬기는 자입니다. 이를 위해 더 많은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의 수제자가 되고자 한다면 모든 사람을 섬기는 자로서의 고난과 훈련을 감당할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자기 야심과 인간적인 권세욕에 기초하여 예수님의 수제자가 되고자 한다면 결코 예수님께 쓰임받을 수 없습니다.
과거 저희 팀은 쟁쟁한 목자들로 인해 항상 불꽃이 튀었습니다. 절대적인 한 목자님과 베드로와 같이 예측 불허의 목자님으로 모임은 조용할 날이 별로 없었습니다. 모두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야심으로 경쟁을 하였습니다. 저도 뒤질세라 항상 최후의 승자가 되고자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사무엘 선교사님과 김아브라함 선교사님의 말 한마디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것을 보고 그 자리가 부러웠습니다. 그러나 저는 목자 생활을 하면서 그것은 저의 착각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번 유럽 수양회를 통해 이 사무엘 선교사님이 헌신적인 섬김을 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제가 예수님의 수제자가 진정으로 되길 원한다면 모든 사람을 섬기는 겸손한 종으로 변화되어야 함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제가 일생 막10:45절 말씀을 요절 말씀을 붙잡고 더욱 겸손과 섬김의 훈련을 깊이 감당하는 가운데 이시대 진정한 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II. 예수님과 베드로
예수님은 세 제자들 중에서도 특별히 베드로 한 사람에게 더 관심을 집중시키셨습니다. 그의 이름은 제자들 중 항상 가장 먼저 나옵니다. 이는 그가 자타가 공인하는 수제자임을 말해 줍니다. 그는 인간적으로 부족함이 많았지만 결정적일 때 항상 예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렸습니다.
그럼 예수님께서는 그를 어떻게 키우셨습니까?
첫째,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을 때 무섭게 책망하셨습니다. 한 번은 예수님께서 두 가지 질문을 하셨습니다. 하나는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아무에게도 알게 하지 말도록 경계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죽으실 것과 다시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그의 억센 팔로 예수님을 따로 데려다가 책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아따 예수님 그런 말씀은 하시덜 말랑께요, 죽기는 왜 죽습니까?" 이에 대해 예수님은 베드로를 꾸짖으시며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세상 소망에 기초하여 하나님의 사역을 가로 막고자 하자 사단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하나님 중심적인 사람이 되도록 도와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수제자로 인정만 받은 것이 아니라 어느 누구보다도 책망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책망을 받고 있다면 슬퍼하지 말고 나를 예수님의 수제자로 키우고자 하시는 사랑으로 영접해야겠습니다.
둘째, 자기 의를 버리고 끊임없이 겸손히 부르심의 은혜를 감당하도록 도우셨습니다.
한번은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좇고자 하였지만 재물이 많아 근심하다가 돌아간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이를 본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베드로는 자신의 의를 드러내고자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자들에게 주어질 놀라운 축복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핍박을 겸하여 받게 됨도 가르쳐 주셨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는 경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먼저 따른 자로서의 자기 의를 내세울 때 결국은 가장 나중된자와 같이 영적으로 어린 아이와 같을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르심 자체를 감사하고 겸손히 감당하고자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의와 근거없는 자만심을 버리지 않을 때 영적으로 뒤쳐지게 됩니다.
어떤 분은 대학교 1학때부터 부르심을 받고 영적 훈련을 받은 것을 큰 자랑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자신이 받은 훈련을 말하는 것으로 자신의 영적 성숙을 보여 주고자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먼저 된자로서 나중 될자가 많다고 하십니다. 중요한것은 신앙경력이 아니라 현재적으로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고 닮아가기를 힘쓰는가 하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심었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루는 열매없는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그러자 다음날 예수님께서 저주하신 무화과가 뿌리로부터 마른 것을 베드로가 보았습니다. 그에게 이 사건은 너무나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이 놀라운 광경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으라"는 한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믿을 때 태산과같은 문제도 바다에 던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하나님을 믿을 때 예수님께서 하신 일보다 더 크고 위대한 일을 이룰 줄을 믿으셨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을 때 위대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지만 믿음이 없을 때 작은 문제 앞에서도 두려워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하나님을 믿는 자립적인 믿음을 심으시고 그에게 하나님을 믿는 믿음만 있으면 불가능이 없음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독일 Bonn의 장베드로는 선교사님은 독일 지성인들의 개인주의와 인본주의가 마치 산과같이 보였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개척 초기에 독일 학생 양을 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장베드로 선교사님을 비롯한 선교사님들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도전하였을 때 그것을 가능하다는 것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때로 우리는 신세대 양 한 사람을 돕는 것도 어려워 보이고 나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절망감이 들어오기도 하지만 우리 하나님께는 결코 불가능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개인주의와 인본주의의 아성 독일 가운데 1만 성경 선생과 7천 가정 교회를 이루실 줄 믿습니다.
넷째, 그를 끝까지 도와 주셨습니다. 베드로의 특징 중의 하나는 큰 소리를 잘 친다는 것입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는 말씀을 인용해서 제자들이 다 예수님을 버릴 것임을 예언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나이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까지 버릴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늘밤 닭이 두번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자신있게 대답하였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그렇게 대답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연약함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22:31,3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으니 네가 돌이킨 후에 형제를 굳게 하라" 예수님은 그의 연약함을 아셨을뿐 아니라 그를 넘어 뜨리고자 하는 사단의 역사를 간파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기도하도록 도와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을 믿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랬을때 그는 계집 종 앞에서 예수님을 세번씩이나 부인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세번 부인하였을 때 닭이 베드로에게 회개를 촉구하며 두번 큰 소리로 울었습니다. 그는 닭소리를 듣고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통곡을 하였습니다. 이사건 이후로 베드로는 닭고기를 먹지 않았다고 합니다. 베드로가 기도하지 않았을 때 그는 인간적으로 강해보였지만 실제로는 연약한 자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베드로를 인내하시고 도와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가 실패를 통해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종으로 키우셨습니다.
한 형제님이 있었습니다. 그는 학창 시절 누구보다 모범적으로 훈련을 받고 제자양성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연약한 정욕 문제에 빠져 구원의 은혜마저 잃어버리고 세상으로 떠나고자 하였습니다. 이때 한 목자님이 그분을 끝까지 감당하여 주셨습니다. 반복되는 죄문제에도 포기치 않으시고 계속해서 심방하여 섬겨 주셨습니다. 한번은 죄를 짓고 얼굴이 시꺼멓게 되어 어두운 공원에서 방황하는 형제님을 목자님은 심방하여 도우시면서 "내가 결코 형제님을 포기하지 않을것이며 지옥까지라도 좇아가서 돕겠다" 라고 말씀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듣고 그 형제님은 자신의 죄악을 눈물로 회개하고 돌이키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자신의 연약함을 깊이 체험하고 주님의 은혜만을 붙잡는 목자로 변화되어 지금은 하나님의 역사에 귀하게 쓰임받는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 베드로를 도우시되 끝까지 도우셨습니다.
후에 베드로는 예수님의 소망을 좇아 섬기는 자로 제자 공동체를 이끌었고 핍박 가운데 있는 성도들을 위로하며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산 소망을 심는 위대한 종으로 성장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기도하지 않았을 때 그는 예수님을 세번 부인할 수 밖에 없는 연약한 자였지만 그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기도하였을 때 그는 한번에 삼천 명을 회심시키는 기적을 베풀기도 하였습니다. 무엇보다 계집종을 두려워하여 세번 부인하던 그가 후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꺼꾸로 메달려 죽기까지 하였습니다.
이상에서 볼 때 예수님의 수제자 양성은 제자양성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이는 한 사람의 영향력이 그만큼 크고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영국 가운데 이얀 목자님이 조상이요 수제자로 굳게 섰을 때 그 영향력 속에서 폴 형제님을 비롯한 많은 양들이 제자로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을 세우는 것이 제자양성의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저희가 많은 사람을 도울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을 도울 수는 있습니다. 현재 내가 돕고자 하는 그 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 한 사람을 분명히 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아직 그 한사람이 분명하지 않다면 수제자 한 사람을 보여 주시도록 기도해야 겠습니다. 이를통해 가을학기 우리 가운데 흥왕한 제자양성 역사가 이루어질 수 있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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