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마가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제자 양성 제 6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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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제자 양성 제 6 강
예수님의 제자 양성 방법
말씀/ 마가복음 4:21-25
요절/ 마가복음 4:24 "또 가라사대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요 또 더 받으리니"
우리는 지금까지 네 번에 걸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교육하신 내용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이 모든 내용들을 교육하신 예수님의 방법을 배우고자 합니다. 제자를 양성하는데 있어서 교육 내용이 중요하지만 실제적인 방법도 역시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무슨 일이든지 방법이 좋으면 열매도 좋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의 방법이라 하여 겉으로 나타난 행위와 기술만 흉내낸다면 이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한 장의 그림이나, 하나의 조각품에도 작가의 기술뿐만 아니라 정신과 혼이 깃들이 있습니다. 하물며 제자 양성이란 사람을 키우는 종합 예술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양성 방법을 공부할 때 먼저 예수님의 심정과 믿음과 사랑과 가치관을 배우고 다음에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의 방법 속에 있는 그런 정신들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 제자 양성가 예수님의 내면과 방법을 잘 배워 훌륭한 제자 양성가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Ⅰ. 공동 생활
예수님의 제자 양성 방법 중 첫째는 공동생활이었습니다. 공동생활이란 문자 그대로 함께 사는 것이며, 함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택하신 목적은 제자들로 하여금 자기와 함께 있게 하는 것이었습니다(3:14). 예수님은 안식일에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실 때, 심방가실 때, 초대받아서 식사를 하실 때, 바닷가로 바람을 쐬러 나가실 때, 폭풍우 속에서, 고향에 가실 때, 역사보고 때, 들판에서, 배에서, 중요한 교육을 시킬 때, 십자가의 비밀을 말씀하실 때, 십자가를 지러 가실 때 등등 거의 제자들과 함께 생활하셨습니다(1:21,29, 2:15,23, 3:7, 4:10,35, 36, 5:31,37 6:1,30,7:17, 18:1,14,27, 9:28,33,10:10,32,46, 11:1,12:43,13:3,14:17,32, 16:14). 예수님이 계신 곳에는 언제나 열 두 제자들이 함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제자들과 함께 하고자 할 때 어려움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육신을 입고 계시기 때문에 피곤할 때 마음대로 쉬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또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개인 시간을 할 수 있는 대로 많이 갖기를 원하는데 은밀한 개인 시간을 갖지 못하는 어려움도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제자들의 약점과 허물을 감당하며 문제를 일으킬 때마다 수습을 해야 하고 이들을 섬기는 어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분이시기 때문에 드러날 허물은 없으나 우리처럼 허물과 약점이 많은 사람들은 공동 생활을 하고자 할 때 자기의 허물과 약점이 드러나는 것을 감당해야 하는 어려움도 있습니다. 한마디로 제자와 함께 공동 생활을 하는데는 많은 자기 희생과 영적 투쟁이 따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과 함께 한 은혜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그러면 예수님께서 왜 공동생활의 교육 방법을 택하셨을까요? 첫째는 제자들과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성을 맺기 위해서였습니다. 제자 양성은 지식 전달이 아니라 인격과 신앙 교육입니다. 이런 교육은 말로나 지시로써 실현될 수 없습니다. 오직 사랑의 관계성을 맺고 모범을 보이고 감화를 줄 때 실현될 수 있습니다. 마음을 터놓고 대화할 수 있는 관계가 맺어지려면 상대방을 구체적으로 알고 진실되게 사랑하고 진실된 마음으로 대해야 합니다. 희비애락을 함께 나누며 이해와 신뢰의 바탕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함께 사는 것이 최선의 길입니다. 우리가 함께 할 때 고슴도치들의 공동체와 같이 될 수 있습니다. 고슴도치는 가까이 하면 서로 찔리고 떨어지면 춥습니다. 그래서 가까이 하기도 어렵고 떨어지기도 어렵습니다. 이 사이에 예수님이 함께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용서와 겸손을 배우는 자세가 있어야 하고 성령의 교통하심이 공동체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행복한 공동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제자들이 스스로 예수님을 관찰하고 배우고 본받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먼저 제자들에게 주지시키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이 스스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깨닫기까지 여러 표적들을 보여 주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모범적인 삶을 통해서 그들이 감화를 받고 그 인격이 변화되도록 도우셨습니다. 창조주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섬김과 사랑의 도리를 가르치기 위해 냄새나는 제자들의 발을 손수 씻겨 주셨습니다. 셋째는 세상의 악영향으로부터 제자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세상에는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종교 생활에 빠진 바리새인들과 권모술수와 음란과 권력욕으로 가득 찬 헤롯 당원들이 있었습니다. 불신 세계의 그릇된 가치관과 죄의 유혹의 마수들이 항상 뻗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린 제자들을 이들로부터 보호하고자 공동생활이라는 교육 방법을 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와 함께 한 제자 공동체를 얼마나 중요시 하셨습니까? 3:31-35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제자 공동체를 혈육을 함께 나눈 가족과 같이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많은 양무리들을 섬기시느라 식사할 겨를도 없으셨습니다. 이를 듣고 예수님의 친척들이 "예수가 미쳤다"고 말하며 예수님을 붙잡으러 왔습니다. 예수님의 모친과 동생들이 예수님이 계신 집 밖에 와서 사람들을 보내어 예수님을 찾는다는 전갈을 보내왔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둘러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예수님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가족으로 영접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가족관입니다. 제자들은 학식도 없고 매너도 없고 허물과 약점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고자 하는 그들을 가족보다 더 귀히 여기셨습니다.
오늘날은 사도(師道)가 깨어지고 제자도(弟子道)가 깨어졌습니다. 교실이 붕괴되어가고 있습니다. 교육문제가 심각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런 시대에 어떻게 제자들과 함께 하는 좋은 스승이요 목자들이 될 수 있습니까? 예수님처럼 자기 제자와 함께 공동 생활을 함으로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석다윗 선교사님은 자신의 아파트에서 양들과 함께 공동 생활을 하고 계십니다. 장막팀 목자님들도 공동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대부분은 자기 제자와 함께 살지 못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제자와 함께 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마음으로 제자들을 영접하고 함께 있는 시간을 할 수 있는대로 많이 가짐으로써 함께 할 수 있습니다. 함께 식사도 자주 하고 심방이나 전도를 같이 하고 함께 운동도 하고 대화를 함으로써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일대일을 할 때도 정해진 시간에만 만나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자세를 가지면 함께 하기가 어렵습니다. 같이 배우는 자세를 갖고 공부하며 마음을 터놓고 실제적인 어려움과 고민들을 서로 나누며 공부할 때 함께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소감 발표 시간이 양을 잘 알고 함께 할 수 있는 좋은 시간입니다. 우리가 함께 하려면 자기의 벽을 깨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이 부담스럽고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양과 함께 하기 위해서는 자기와의 싸움이 필요합니다. 자기가 깨어지고 가치관이 하나님 중심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또한 자기의 프라이버시와 자기의 가족보다 제자를 더 귀하게 여기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냄새나고 허물 많은 우리 각자와 함께 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고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키우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Ⅱ. 성경 공부
예수님의 제자 양성 방법 중에 둘째는 성경 공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하시며 주로 하신 일이 성경 공부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 양성의 방향을 알 수 있습니다. 공동 생활을 하면서 무엇을 가르치는 가가 중요합니다. 공동생활을 하며 남의 흉을 본다든지, 인간적인 말, 불평만 늘어놓는다면 사람을 실족시키게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하시며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성경 공부를 시키는 일에 바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제자 양성 방향은 사람을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하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키우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딤후 3:15-17절은 말씀합니다.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바닷가에서, 회당에서, 산에서, 집에서, 길에서, 배 위에서, 식사 시간에, 집에 계실 때 등 성경 공부를 통해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려 주셨고 세속적이고 물질중심적인 가치관에서 하나님 중심적인 가치관으로 변화시키는 일을 하셨습니다. 문제 많은 세상에 사는 그들에게 바른 역사관과 삶의 도리를 가르치셨고 자신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을 통한 인류 구속 역사의 완성을 가르치셨습니다. 복음의 능력과 믿는 자에게 따르는 표적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경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가지라고 명하셨습니까? 4:24,25절을 읽어 봅시다. "또 가라사대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요 또 더 받으리니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예수님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들은 말씀을 깊이 생각하고 묵상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깊이 깨달으려면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성경 말씀은 우리의 이성만으로 깨달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조명하심이 있어야 말씀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어떤 표적을 체험한다고 해서 그 속에 담긴 영적 의미를 깨닫는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하면서 수많은 이적을 체험했지만 그 의미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공부할 때 기도로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주의 깊게 묵상해야 합니다. 우리가 자기의 죄를 묵상하거나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묵상하면 마음이 메마르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 그 속에서 생명수가 흘러 들어옵니다. 또한 예수님은 말씀을 헤아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금광을 캐내듯이 말씀 속에 감취인 보화를 캐어내라는 뜻입니다. 성경은 바다와 같습니다. 겉보기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지만 그 속으로 깊이 들어가면 온갖 고기와 해초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말씀을 헤아리고 깊이 생각하고 샘을 파도록 명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말씀의 비밀을 얻을 뿐 아니라 자립적으로 말씀을 파서 양들을 먹일 수 있는 빼어난 성경 선생들로 성장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문제의식과 방향을 가지고 제자들의 심령에 줄기차게 하나님의 말씀을 심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말씀을 심는데 반복교육을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신 사건이 있은 후 칠병이어로 사천명을 먹이셨습니다. 이를 통해서 목자의 심정과 책임감과 믿음을 심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제자들이 받아들이기를 완강하게 거절하는 고난과 부활에 대한 말씀을 반복하여 가르치셨습니다(8:31, 9:9,12, 10:33,34, 14:21). 또한 예수님은 높아지고자 하는 제자들에게 진정한 위대성에 대해서 반복하여 말씀하셨습니다(9:35, 10:43,44). 사람은 누구나 귀에 솔깃한 말씀, 귀를 간질이는 말씀은 잘 받아들이지만 고난, 희생, 낮아짐, 섬김과 같은 말씀은 잘 안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생명은 안일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통해서 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초적이면서도 복음 진리와 같은 중요한 말씀들을 반복하셨습니다. 우리가 해마다 복음서를 공부하는 것은 예수님을 배우기에 매우 좋은 방법입니다. 옛 속담에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합니다. 부엌개 삼년이면 라면도 끓인다고 합니다. 여하튼 아무리 둔한 사람도 반복하여 말씀을 듣고 마음에 심으면 말씀이 그 마음에 심겨집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마음 속에 말씀을 심기 위해서 반복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항상 새로운 것만 추구하는 시대에 한 말씀이라도 붙잡고 심령에 새기는 투쟁을 힘써 하기를 기도합니다.
Ⅲ. 역사 교육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인 사건이 있은 후, 제자들이 물 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유령이 아닌가 하여 심히 놀랐습니다. 한 밤중에 바다 위로 시커먼 물체가 걸어오는 것을 보고 놀라는 것은 당연한 일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저자는 이들이 놀란 이유를 "이는 저희가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막 6:52)" 고 기록했습니다.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역사 의식이 없음을 지적한 것입니다. 그들은 몇 시간 전에 체험한 믿음의 역사가 다른 상황에 부딪칠 때 연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칠병이어 사건이 있은 후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면서 "바리새인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즉시 자신들이 떡 가져오기를 잊었기 때문에 책망하시는 것으로 오해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바리새인들의 위선과 형식 주의, 헤롯의 탐욕과 음란, 권세욕 등을 주의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역사성이 없는 제자들에게 따발총을 쏘듯이 책망하셨습니다.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지 못하느냐?" 그리고 다시 오병이어와 칠병이어를 통해서 일어났던 이적을 환기시켰습니다. 이를 통해 그들이 역사의식을 갖도록 도우셨습니다.
우리가 역사의식을 갖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역사의식이 있을 때 우리는 과거를 통해서 교훈을 얻어 성장할 수 있습니다. 또한 현재와 미래에 부딪치는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힘을 기를 수 있습니다. 새로운 역사를 창조할 수 있는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 속담에 "한번 넘어진 돌부리에 두 번 넘어지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같은 돌부리에 반복하여 넘어진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할 당시 "그떡 참 맛이 있다"라고 말할 뿐 그 이적에 나타난 예수님의 신성, 믿음의 비밀, 믿음의 역사, 영적인 교훈들을 깨닫지 못한다면 혹은 잊어버린다면 이는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습니까?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역사에 있어서 역사의식을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역사의식을 가질 때 사건 사건을 통해서 나의 하나님을 체험해 갈 수 있습니다. 또한 그 사건을 통해서 주시는 영적 교훈을 깨닫고 성장하게 됩니다. 반복하여 비슷한 문제에 넘어지게 되고 새로운 어려움에 부딪칠 때마다 깜짝 깜짝 놀라는 것은 역사의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책망하심으로 역사의식을 심으셨습니다.
13장에서 예수님은 보다 스케일이 큰 역사공부를 시키셨습니다. 그 내용은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에 대한 예언과 말세에 일어날 일들, 그리고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역사 공부를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고자 한 것은 바른 역사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역사 공부를 통해서 제자들에게 세상 역사는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친히 운행하고 계신다는 것을 깨우쳐 주고자 하셨습니다. 세상에는 충격적인 사건들이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믿을 때 놀라지 않게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역사의 골인점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지상 역사의 종말임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골인점을 향해 진행되고 있는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이루시는 중심 역사는 만국 복음 전파임을 깨우쳐 주심으로 제자들이 역사의 주역들임을 깨닫기를 원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인간적으로 바라볼 때 스스로 초라한 마음을 갖기 쉽고 세상 죄의 유혹을 받기 쉬웠습니다. 그러나 자기들이 역사의 중심 줄기에 서 있는 주인공들이라는 신분을 인식하게 되면 어떤 역경도 뚫고 나가며 새 역사를 창조할 수 있습니다. 현재 양이 없고 제자가 없어도 역사의 줄기에 서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 사람의 인생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Ⅳ. 현장 교육
예수님의 현장 교육의 특징은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기회를 포착하여 훈련을 시키셨습니다(4:40, 6:37).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다가 심한 광풍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곤경의 때를 이용하여 제자들에게 자신이 자연과 만물을 다스리시는 창조주이심을 믿는 믿음을 심으셨습니다. 제자들은 실제적인 상황에서 예수님의 창조주의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 사건 때에도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제자들이 무리들의 목자로서 책임감과 심정을 갖도록 훈련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는 기적을 통해서 믿음으로 역사를 이루는 비밀을 체험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를 키우는데 말씀 공부뿐만 아니라 실제로 부딪친 어려움과 문제들을 적절하게 이용하셨습니다. 실제적인 문제를 통해 예수님을 체험할 때 살아있는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또 이렇게 체험적으로 심겨진 믿음은 그 뿌리가 깊어 시련이 와도 넘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제자들을 훈련하실 수 있었던 비결은 평소에 기도와 말씀 가운데 깨어 있었기 때문이요 제자들에게 필요한 훈련들을 연구하고 관찰하셨기 때문입니다. 목자가 영적으로 깨어 있을 때 기회를 포착하여 적절한 훈련을 줄 수 있습니다.
둘째는 실전훈련을 시키신 것입니다(6:1-13,6:38,39).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로 고향 마을 나사렛을 심방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곳에서 고향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실제 사건을 통해서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일꾼은 인간적으로 가까운 사람들에게 배척받는 것이 필연적이라는 사실을 심어주셨습니다.
그 후에 예수님은 열 두 제자를 둘씩 둘씩 여섯팀으로 나누어 전도훈련, 목자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제자들이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주머니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갖고 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다만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갖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성경과 일대일 노트만은 갖고 가는 것을 허락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여 믿음으로 복음 역사를 이루며 실전을 통해 목자로서의 비밀과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또한 제자들이 믿음으로 남의 집에서 먹고, 잘 수도 있는 사람들이 되도록 훈련하셨습니다. 또한 자기들을 배척하고 복음을 영접치 않는 집에서는 나오며 그 집 식구들이 보는 앞에서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림으로 복음의 일꾼으로서의 자부심을 쌓도록 훈련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변화산에서 세 제자에게 자신의 영광스러운 부활의 모습을 보이심으로 십자가와 부활을 영접하도록 도우셨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흘리며 기도하는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심으로 십자가 앞에서 기도로 투쟁하는 법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전도훈련, 믿음훈련, 기도훈련 뿐 아니라 필수적으로 공동 생활을 하면서 밥하는 훈련, 설거지 훈련, 청소훈련, 빨래 훈련, 심방훈련, 일대일 훈련 등을 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은 여러 현장에서 제자들에게 실전훈련을 주심으로 이론과 실제를 겸비한 지도자들이요 복음의 일꾼들이 되도록 키우셨습니다. 군인도 실전 경험이 있을 때 좋은 군인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이론가들로 키우지 않으셨습니다. 그 시대의 사단과 죄의 세력과 싸워 생명을 구해내는 실제적인 영적 군사요 목자요 제자 양성가들로 키우고자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실제적으로 훈련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교육 훈련을 통해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영접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을 때 사단과 싸우는 영적 군사요 세계적인 지도자들이 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갈릴리 촌부 열 둘을 택하셔서 공동생활과 성경 공부와 역사 교육과 현장 교육을 통해 믿음을 심으시고 한 시대를 섬길 위대한 영적 지도자들이요 목자들로 키우신 예수님은 믿음과 심정이 충만하신 참 목자요 제자 양성가이십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이 주시는 여러 훈련들을 통해 예수님의 사도들과 같은 영적 군사들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우리도 이 예수님을 본받아 실제적으로 제자들을 키우기 위해 희생과 아픔을 감당하여 예수님의 좋은 제자들을 키워내는 이 시대의 제자 양성가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제자 양성 방법
말씀/ 마가복음 4:21-25
요절/ 마가복음 4:24 "또 가라사대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요 또 더 받으리니"
우리는 지금까지 네 번에 걸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교육하신 내용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이 모든 내용들을 교육하신 예수님의 방법을 배우고자 합니다. 제자를 양성하는데 있어서 교육 내용이 중요하지만 실제적인 방법도 역시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무슨 일이든지 방법이 좋으면 열매도 좋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의 방법이라 하여 겉으로 나타난 행위와 기술만 흉내낸다면 이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한 장의 그림이나, 하나의 조각품에도 작가의 기술뿐만 아니라 정신과 혼이 깃들이 있습니다. 하물며 제자 양성이란 사람을 키우는 종합 예술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양성 방법을 공부할 때 먼저 예수님의 심정과 믿음과 사랑과 가치관을 배우고 다음에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의 방법 속에 있는 그런 정신들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 제자 양성가 예수님의 내면과 방법을 잘 배워 훌륭한 제자 양성가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Ⅰ. 공동 생활
예수님의 제자 양성 방법 중 첫째는 공동생활이었습니다. 공동생활이란 문자 그대로 함께 사는 것이며, 함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택하신 목적은 제자들로 하여금 자기와 함께 있게 하는 것이었습니다(3:14). 예수님은 안식일에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실 때, 심방가실 때, 초대받아서 식사를 하실 때, 바닷가로 바람을 쐬러 나가실 때, 폭풍우 속에서, 고향에 가실 때, 역사보고 때, 들판에서, 배에서, 중요한 교육을 시킬 때, 십자가의 비밀을 말씀하실 때, 십자가를 지러 가실 때 등등 거의 제자들과 함께 생활하셨습니다(1:21,29, 2:15,23, 3:7, 4:10,35, 36, 5:31,37 6:1,30,7:17, 18:1,14,27, 9:28,33,10:10,32,46, 11:1,12:43,13:3,14:17,32, 16:14). 예수님이 계신 곳에는 언제나 열 두 제자들이 함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제자들과 함께 하고자 할 때 어려움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육신을 입고 계시기 때문에 피곤할 때 마음대로 쉬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또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개인 시간을 할 수 있는 대로 많이 갖기를 원하는데 은밀한 개인 시간을 갖지 못하는 어려움도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제자들의 약점과 허물을 감당하며 문제를 일으킬 때마다 수습을 해야 하고 이들을 섬기는 어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분이시기 때문에 드러날 허물은 없으나 우리처럼 허물과 약점이 많은 사람들은 공동 생활을 하고자 할 때 자기의 허물과 약점이 드러나는 것을 감당해야 하는 어려움도 있습니다. 한마디로 제자와 함께 공동 생활을 하는데는 많은 자기 희생과 영적 투쟁이 따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과 함께 한 은혜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그러면 예수님께서 왜 공동생활의 교육 방법을 택하셨을까요? 첫째는 제자들과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성을 맺기 위해서였습니다. 제자 양성은 지식 전달이 아니라 인격과 신앙 교육입니다. 이런 교육은 말로나 지시로써 실현될 수 없습니다. 오직 사랑의 관계성을 맺고 모범을 보이고 감화를 줄 때 실현될 수 있습니다. 마음을 터놓고 대화할 수 있는 관계가 맺어지려면 상대방을 구체적으로 알고 진실되게 사랑하고 진실된 마음으로 대해야 합니다. 희비애락을 함께 나누며 이해와 신뢰의 바탕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함께 사는 것이 최선의 길입니다. 우리가 함께 할 때 고슴도치들의 공동체와 같이 될 수 있습니다. 고슴도치는 가까이 하면 서로 찔리고 떨어지면 춥습니다. 그래서 가까이 하기도 어렵고 떨어지기도 어렵습니다. 이 사이에 예수님이 함께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용서와 겸손을 배우는 자세가 있어야 하고 성령의 교통하심이 공동체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행복한 공동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제자들이 스스로 예수님을 관찰하고 배우고 본받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먼저 제자들에게 주지시키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이 스스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깨닫기까지 여러 표적들을 보여 주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모범적인 삶을 통해서 그들이 감화를 받고 그 인격이 변화되도록 도우셨습니다. 창조주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섬김과 사랑의 도리를 가르치기 위해 냄새나는 제자들의 발을 손수 씻겨 주셨습니다. 셋째는 세상의 악영향으로부터 제자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세상에는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종교 생활에 빠진 바리새인들과 권모술수와 음란과 권력욕으로 가득 찬 헤롯 당원들이 있었습니다. 불신 세계의 그릇된 가치관과 죄의 유혹의 마수들이 항상 뻗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린 제자들을 이들로부터 보호하고자 공동생활이라는 교육 방법을 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와 함께 한 제자 공동체를 얼마나 중요시 하셨습니까? 3:31-35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제자 공동체를 혈육을 함께 나눈 가족과 같이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많은 양무리들을 섬기시느라 식사할 겨를도 없으셨습니다. 이를 듣고 예수님의 친척들이 "예수가 미쳤다"고 말하며 예수님을 붙잡으러 왔습니다. 예수님의 모친과 동생들이 예수님이 계신 집 밖에 와서 사람들을 보내어 예수님을 찾는다는 전갈을 보내왔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둘러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예수님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가족으로 영접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가족관입니다. 제자들은 학식도 없고 매너도 없고 허물과 약점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고자 하는 그들을 가족보다 더 귀히 여기셨습니다.
오늘날은 사도(師道)가 깨어지고 제자도(弟子道)가 깨어졌습니다. 교실이 붕괴되어가고 있습니다. 교육문제가 심각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런 시대에 어떻게 제자들과 함께 하는 좋은 스승이요 목자들이 될 수 있습니까? 예수님처럼 자기 제자와 함께 공동 생활을 함으로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석다윗 선교사님은 자신의 아파트에서 양들과 함께 공동 생활을 하고 계십니다. 장막팀 목자님들도 공동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대부분은 자기 제자와 함께 살지 못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제자와 함께 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마음으로 제자들을 영접하고 함께 있는 시간을 할 수 있는대로 많이 가짐으로써 함께 할 수 있습니다. 함께 식사도 자주 하고 심방이나 전도를 같이 하고 함께 운동도 하고 대화를 함으로써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일대일을 할 때도 정해진 시간에만 만나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자세를 가지면 함께 하기가 어렵습니다. 같이 배우는 자세를 갖고 공부하며 마음을 터놓고 실제적인 어려움과 고민들을 서로 나누며 공부할 때 함께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소감 발표 시간이 양을 잘 알고 함께 할 수 있는 좋은 시간입니다. 우리가 함께 하려면 자기의 벽을 깨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이 부담스럽고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양과 함께 하기 위해서는 자기와의 싸움이 필요합니다. 자기가 깨어지고 가치관이 하나님 중심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또한 자기의 프라이버시와 자기의 가족보다 제자를 더 귀하게 여기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냄새나고 허물 많은 우리 각자와 함께 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고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키우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Ⅱ. 성경 공부
예수님의 제자 양성 방법 중에 둘째는 성경 공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하시며 주로 하신 일이 성경 공부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 양성의 방향을 알 수 있습니다. 공동 생활을 하면서 무엇을 가르치는 가가 중요합니다. 공동생활을 하며 남의 흉을 본다든지, 인간적인 말, 불평만 늘어놓는다면 사람을 실족시키게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하시며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성경 공부를 시키는 일에 바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제자 양성 방향은 사람을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하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키우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딤후 3:15-17절은 말씀합니다.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바닷가에서, 회당에서, 산에서, 집에서, 길에서, 배 위에서, 식사 시간에, 집에 계실 때 등 성경 공부를 통해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려 주셨고 세속적이고 물질중심적인 가치관에서 하나님 중심적인 가치관으로 변화시키는 일을 하셨습니다. 문제 많은 세상에 사는 그들에게 바른 역사관과 삶의 도리를 가르치셨고 자신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을 통한 인류 구속 역사의 완성을 가르치셨습니다. 복음의 능력과 믿는 자에게 따르는 표적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경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가지라고 명하셨습니까? 4:24,25절을 읽어 봅시다. "또 가라사대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요 또 더 받으리니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예수님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들은 말씀을 깊이 생각하고 묵상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깊이 깨달으려면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성경 말씀은 우리의 이성만으로 깨달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조명하심이 있어야 말씀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어떤 표적을 체험한다고 해서 그 속에 담긴 영적 의미를 깨닫는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하면서 수많은 이적을 체험했지만 그 의미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공부할 때 기도로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주의 깊게 묵상해야 합니다. 우리가 자기의 죄를 묵상하거나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묵상하면 마음이 메마르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 그 속에서 생명수가 흘러 들어옵니다. 또한 예수님은 말씀을 헤아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금광을 캐내듯이 말씀 속에 감취인 보화를 캐어내라는 뜻입니다. 성경은 바다와 같습니다. 겉보기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지만 그 속으로 깊이 들어가면 온갖 고기와 해초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말씀을 헤아리고 깊이 생각하고 샘을 파도록 명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말씀의 비밀을 얻을 뿐 아니라 자립적으로 말씀을 파서 양들을 먹일 수 있는 빼어난 성경 선생들로 성장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문제의식과 방향을 가지고 제자들의 심령에 줄기차게 하나님의 말씀을 심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말씀을 심는데 반복교육을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신 사건이 있은 후 칠병이어로 사천명을 먹이셨습니다. 이를 통해서 목자의 심정과 책임감과 믿음을 심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제자들이 받아들이기를 완강하게 거절하는 고난과 부활에 대한 말씀을 반복하여 가르치셨습니다(8:31, 9:9,12, 10:33,34, 14:21). 또한 예수님은 높아지고자 하는 제자들에게 진정한 위대성에 대해서 반복하여 말씀하셨습니다(9:35, 10:43,44). 사람은 누구나 귀에 솔깃한 말씀, 귀를 간질이는 말씀은 잘 받아들이지만 고난, 희생, 낮아짐, 섬김과 같은 말씀은 잘 안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생명은 안일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통해서 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초적이면서도 복음 진리와 같은 중요한 말씀들을 반복하셨습니다. 우리가 해마다 복음서를 공부하는 것은 예수님을 배우기에 매우 좋은 방법입니다. 옛 속담에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합니다. 부엌개 삼년이면 라면도 끓인다고 합니다. 여하튼 아무리 둔한 사람도 반복하여 말씀을 듣고 마음에 심으면 말씀이 그 마음에 심겨집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마음 속에 말씀을 심기 위해서 반복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항상 새로운 것만 추구하는 시대에 한 말씀이라도 붙잡고 심령에 새기는 투쟁을 힘써 하기를 기도합니다.
Ⅲ. 역사 교육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인 사건이 있은 후, 제자들이 물 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유령이 아닌가 하여 심히 놀랐습니다. 한 밤중에 바다 위로 시커먼 물체가 걸어오는 것을 보고 놀라는 것은 당연한 일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저자는 이들이 놀란 이유를 "이는 저희가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막 6:52)" 고 기록했습니다.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역사 의식이 없음을 지적한 것입니다. 그들은 몇 시간 전에 체험한 믿음의 역사가 다른 상황에 부딪칠 때 연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칠병이어 사건이 있은 후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면서 "바리새인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즉시 자신들이 떡 가져오기를 잊었기 때문에 책망하시는 것으로 오해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바리새인들의 위선과 형식 주의, 헤롯의 탐욕과 음란, 권세욕 등을 주의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역사성이 없는 제자들에게 따발총을 쏘듯이 책망하셨습니다.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지 못하느냐?" 그리고 다시 오병이어와 칠병이어를 통해서 일어났던 이적을 환기시켰습니다. 이를 통해 그들이 역사의식을 갖도록 도우셨습니다.
우리가 역사의식을 갖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역사의식이 있을 때 우리는 과거를 통해서 교훈을 얻어 성장할 수 있습니다. 또한 현재와 미래에 부딪치는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힘을 기를 수 있습니다. 새로운 역사를 창조할 수 있는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 속담에 "한번 넘어진 돌부리에 두 번 넘어지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같은 돌부리에 반복하여 넘어진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할 당시 "그떡 참 맛이 있다"라고 말할 뿐 그 이적에 나타난 예수님의 신성, 믿음의 비밀, 믿음의 역사, 영적인 교훈들을 깨닫지 못한다면 혹은 잊어버린다면 이는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습니까?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역사에 있어서 역사의식을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역사의식을 가질 때 사건 사건을 통해서 나의 하나님을 체험해 갈 수 있습니다. 또한 그 사건을 통해서 주시는 영적 교훈을 깨닫고 성장하게 됩니다. 반복하여 비슷한 문제에 넘어지게 되고 새로운 어려움에 부딪칠 때마다 깜짝 깜짝 놀라는 것은 역사의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책망하심으로 역사의식을 심으셨습니다.
13장에서 예수님은 보다 스케일이 큰 역사공부를 시키셨습니다. 그 내용은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에 대한 예언과 말세에 일어날 일들, 그리고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역사 공부를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고자 한 것은 바른 역사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역사 공부를 통해서 제자들에게 세상 역사는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친히 운행하고 계신다는 것을 깨우쳐 주고자 하셨습니다. 세상에는 충격적인 사건들이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믿을 때 놀라지 않게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역사의 골인점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지상 역사의 종말임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골인점을 향해 진행되고 있는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이루시는 중심 역사는 만국 복음 전파임을 깨우쳐 주심으로 제자들이 역사의 주역들임을 깨닫기를 원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인간적으로 바라볼 때 스스로 초라한 마음을 갖기 쉽고 세상 죄의 유혹을 받기 쉬웠습니다. 그러나 자기들이 역사의 중심 줄기에 서 있는 주인공들이라는 신분을 인식하게 되면 어떤 역경도 뚫고 나가며 새 역사를 창조할 수 있습니다. 현재 양이 없고 제자가 없어도 역사의 줄기에 서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 사람의 인생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Ⅳ. 현장 교육
예수님의 현장 교육의 특징은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기회를 포착하여 훈련을 시키셨습니다(4:40, 6:37).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다가 심한 광풍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곤경의 때를 이용하여 제자들에게 자신이 자연과 만물을 다스리시는 창조주이심을 믿는 믿음을 심으셨습니다. 제자들은 실제적인 상황에서 예수님의 창조주의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 사건 때에도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제자들이 무리들의 목자로서 책임감과 심정을 갖도록 훈련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는 기적을 통해서 믿음으로 역사를 이루는 비밀을 체험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를 키우는데 말씀 공부뿐만 아니라 실제로 부딪친 어려움과 문제들을 적절하게 이용하셨습니다. 실제적인 문제를 통해 예수님을 체험할 때 살아있는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또 이렇게 체험적으로 심겨진 믿음은 그 뿌리가 깊어 시련이 와도 넘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제자들을 훈련하실 수 있었던 비결은 평소에 기도와 말씀 가운데 깨어 있었기 때문이요 제자들에게 필요한 훈련들을 연구하고 관찰하셨기 때문입니다. 목자가 영적으로 깨어 있을 때 기회를 포착하여 적절한 훈련을 줄 수 있습니다.
둘째는 실전훈련을 시키신 것입니다(6:1-13,6:38,39).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로 고향 마을 나사렛을 심방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곳에서 고향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실제 사건을 통해서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일꾼은 인간적으로 가까운 사람들에게 배척받는 것이 필연적이라는 사실을 심어주셨습니다.
그 후에 예수님은 열 두 제자를 둘씩 둘씩 여섯팀으로 나누어 전도훈련, 목자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제자들이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주머니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갖고 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다만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갖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성경과 일대일 노트만은 갖고 가는 것을 허락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여 믿음으로 복음 역사를 이루며 실전을 통해 목자로서의 비밀과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또한 제자들이 믿음으로 남의 집에서 먹고, 잘 수도 있는 사람들이 되도록 훈련하셨습니다. 또한 자기들을 배척하고 복음을 영접치 않는 집에서는 나오며 그 집 식구들이 보는 앞에서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림으로 복음의 일꾼으로서의 자부심을 쌓도록 훈련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변화산에서 세 제자에게 자신의 영광스러운 부활의 모습을 보이심으로 십자가와 부활을 영접하도록 도우셨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흘리며 기도하는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심으로 십자가 앞에서 기도로 투쟁하는 법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전도훈련, 믿음훈련, 기도훈련 뿐 아니라 필수적으로 공동 생활을 하면서 밥하는 훈련, 설거지 훈련, 청소훈련, 빨래 훈련, 심방훈련, 일대일 훈련 등을 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은 여러 현장에서 제자들에게 실전훈련을 주심으로 이론과 실제를 겸비한 지도자들이요 복음의 일꾼들이 되도록 키우셨습니다. 군인도 실전 경험이 있을 때 좋은 군인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이론가들로 키우지 않으셨습니다. 그 시대의 사단과 죄의 세력과 싸워 생명을 구해내는 실제적인 영적 군사요 목자요 제자 양성가들로 키우고자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실제적으로 훈련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교육 훈련을 통해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영접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을 때 사단과 싸우는 영적 군사요 세계적인 지도자들이 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갈릴리 촌부 열 둘을 택하셔서 공동생활과 성경 공부와 역사 교육과 현장 교육을 통해 믿음을 심으시고 한 시대를 섬길 위대한 영적 지도자들이요 목자들로 키우신 예수님은 믿음과 심정이 충만하신 참 목자요 제자 양성가이십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이 주시는 여러 훈련들을 통해 예수님의 사도들과 같은 영적 군사들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우리도 이 예수님을 본받아 실제적으로 제자들을 키우기 위해 희생과 아픔을 감당하여 예수님의 좋은 제자들을 키워내는 이 시대의 제자 양성가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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