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00년 누가복음 제 22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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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누가복음 제 22 강
성만찬의 의미
말씀/누가복음 22:1-23
요절/누가복음 22: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오늘 말씀은 성만찬에 관한 것입니다. 성만찬은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밤에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식사를 하시면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는 의미를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친히 성찬식을 제정하시고 이를 행하도록 명하셨습니다. 성만찬은 의식적으로 이를 기념하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성만찬은 예수님을 믿고 영적인 교제를 나눔으로 매일 우리의 영적 생명을 유지해 주는 원동력이 됩니다. 또한 복음을 전함으로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을 알려야 합니다. 이 시간 성만찬의 의미를 생각해 보는 가운데 은혜 받기를 기도합니다.
때는 유월절이라고 하는 무교절이 가까운 때였습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430년 동안 바로의 권세 아래서 노예 생활하다가 구원받은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로의 권세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어린양의 피가 필요했듯이 오늘날 우리가 죄와 사단의 권세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어린 양되신 예수님의 피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유월절이 가까워오자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선조들에게 베푸신 은혜를 마음에 새기기를 원했습니다. 로마 식민지 통치 하에 있는 그들에게 다시 이러한 은총을 베풀어 주시도록 눈물로 간구했습니다.
그러나 이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그들은 마땅히 하나님의 크신 권능과 사랑을 묵상하며 유월절 잔치를 준비해야 했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생명을 다하여 말씀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통하는 백성들을 위로하고 희망을 심어 주고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들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예수님을 제거할 방책을 연구하고 있었습니다(2). 그들 마음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대신에 시기심과 악독과 살의가 가득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종들이 아니라 마귀의 자식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백성들이 두려웠습니다. 그들이 정말로 두려워해야 할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고 사람을 두려워했을 때 마귀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백성들이 예수님의 말씀과 사랑을 받고 따르는 것을 보고 만약 예수님을 명절에 잡으면 데모가 일어날 것을 알고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자기를 죽이는 회개의 투쟁을 하기 보다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습니다. 마침 열 두 제자 중 하나인 가룟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가 돈을 받고 예수님을 팔고자 함으로 그들의 범죄에 속도가 붙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사단이 많은 사람들 가운데 왜 하필이면 가룟 유다의 마음에 들어간 것입니까? 이는 그의 마음이 사단이 역사하기 좋은 환경이었기 때문입니다. 더러운 곳에 병균이 서식하듯이 인간적이고 죄악된 생각을 하는 사람의 마음에 사단이 역사하게 됩니다. 베드로도 신앙 고백 후에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기 보다 사람의 일을 생각하다가 사단의 종노릇을 한 적이 있습니다(막8:33). 가룟 유다는 몸으로는 예수님을 좇았으나 마음으로는 좇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지 않았고 거듭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진리의 말씀을 받지 않고 자기 생각을 고집했습니다. 그는 예수님보다도 세상을 더 사랑하고 돈을 더 사랑했습니다. 그는 순수치 못하고 이중적이었습니다. 그는 인간적인 생각을 하다가 마침내 사단에게 마음 문을 열어주고야 말았습니다. 사단이 그 마음 속에 들어갔을 때 그는 자제력을 잃고 사단의 힘에 이끌려 다니는 사단의 도구가 되고 말았습니다. 마침내 그는 돈을 주고 예수님을 팔고자 기회를 엿보게 되었습니다(6). 우리는 가룟 유다를 비판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가룟 유다적인 요소가 있습니다(23). 우리 속에 있는 기회주의, 교만,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 시기심 등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겨준 심각한 죄악들인 것입니다.
유월절 양을 잡을 무교절이 이르게 되었습니다(7). 유월절 양은 1월 14일 오후에 잡아 그날 저녁에 가족 단위로 유월절 식사를 하였습니다. 그 후에 유월절 양을 잡아 제사를 지내었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유월절 양이 되어 세상 죄를 지고 죽으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시며 구체적으로 장소를 말씀하시지 않고 물 한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따라가 유월절을 예비하도록 하셨습니다(10). 이는 가룟 유다를 의식하였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그들은 가룟 유다와 달리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세상 그 어떤 것보다도 지극히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언제든지 순종할 자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순종했을 때 예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들은 마가의 집에 있는 큰 다락방에서 유월절을 예비하였습니다.
14,15절을 보십시오. "때가 이르매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앉으사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여기서 원하고 원하였노라는 말씀은 갈망하였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먹기를 갈망하였을까요?
첫째로, 유월절 식사를 통해서 그들에게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는 의미를 심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때까지 여러 번 자신이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십자가의 고난과죽으심의 의미를 심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 양으로서 많은 사람을 위한 대리의 죽음을 죽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가 결코 패배와 수치가 아니라 승리와 영광임을 가르쳐 주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십자가의 죽으심의 의미를 심는 것으로 끝나지 않으시고 이를 사람들이 대대로 기념하도록 성만찬을 제정하셨습니다(19). 예수님은 은혜를 쉽게 잊어버리는 인간의 죄악된 속성을 아시고 이를 기념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성찬식은 예수님께서 '나를 잊지 말라'는 정도의 어떤 감상적인 의식이 아니라 예수님과 연합하는 하나의 예배입니다. 제자들은 장차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이 되어 예수님께서 하신 복음 역사를 계승해야 했습니다. 과거에는 성직자만 성경을 읽을 수 있었고 일반 대중들은 성경을 읽을 권리도 없었고 또 읽을 수도 없었습니다. 이런 시대에 성만찬은 눈으로 볼 수 있는 말씀으로서 복음을 전달하고 수호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습니다. 가상 공간에서 생활의 모든 것이 이루어지고 있는 이 시대야말로 성만찬이 더욱 중요한 때입니다. 고린도전서11:26절에 보면 성만찬은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유월절 식사를 통해서 제자들과 사랑의 관계성을 견고케 하실 뿐만 아니라 제자 상호간에도 사랑의 관계성을 견고케 하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 자체나 그 지식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음으로 나의 것으로 소유해야 합니다. 성만찬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고전10:16)'에 참예하는 것입니다. 그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성만찬에 참예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됩니다.
16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이는 지상에서는 마지막 유월절임을 말해 줍니다. 또 동시에 하나님 나라에서 다시 있을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지상에서의 유월절 잔치는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있을 유월절 잔치의 그림자였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양이 되사 인류를 죄와 사단의 권세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완전한 희생 제물이 되셨습니다. 이로써 구약의 유월절은 완전히 폐지되었습니다. 유월절만 폐지된 것이 아니라 제사법에 관계된 모든 의식적인 율법도 다 폐지되었습니다. 유월절 식사는 주님의 성만찬으로 대치되었고 이는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완성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의 유월절 잔치는 어린양의 피로 구속받은 성도들만이 참석할 수 있는 구원의 잔치입니다. 이 유월절이 하나님 나라에서 이룬다는 것은 우리의 육신이 구속을 받아 죄의 세력에서 벗어나게 됨으로 완전한 자유를 누리게 됨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친히 우리와 함께 하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고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있지 않습니다. 18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18)."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대해 말씀하실 때마다 슬픔과 근심이 가득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 나라에 대한 놀라운 희망을 심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떡과 잔을 주시면서 이제는 자신이 십자가에서 받을 고난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떡을 가져다가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19)." 여기서 '사례'하셨다는 것은 감사기도를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식사 전후에 감사기도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의무감이나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그는 우리를 사랑하사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자발적으로 죽으신 것입니다. 준다는 말은 '너희를 위하여 거침없이 내어 준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아무 자격이 없는 죄인들에게 일방적으로 베푸시는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떡을 떼어 주신 것은 또 다른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6:35,51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생명의 떡이 되십니다. 누구든지 이 예수님께 나아가 생명의 떡을 먹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하고 진정한 만족을 누리게 됩니다. 세상에는 인간적으로 부족함이 없지만 늘 불만족을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는 영혼의 만족이 없기 때문입니다. 특히 오늘날 사람들이 성적 쾌락을 강렬하게 추구하는 것은 생리적인 욕구보다 영적인 공허감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영혼의 만족을 누리려면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먹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 나아와 말씀 앞에서 깊이 회개하고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말씀을 영의 양식으로 먹음으로 예수님과 영적 사귐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살을 먹는 것은 예수님과 연합하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의 굶주린 영혼은 진정한 만족을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이 주신 잔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20절을 보십시오.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여기서 너희를 위하여 붓는다는 말은 '너희를 위하여 거침없이 계속적으로 부어지는 피'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피로 세우는 새 언약입니다. 새 언약은 옛 언약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택하사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법도인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를 지키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겠고 그들은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가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출19:5,6).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하며 응답했습니다(출24:7). 이로써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언약 관계가 맺어졌습니다. 이 언약은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관계가 성립되기 때문에 조건적인 언약이요 쌍방간에 책임이 있는 언약입니다. 하나님은 이 언약을 견고케 하기 위해 짐승의 피로 인치도록 하셨습니다(출24:8).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이 언약은 파기되어 버렸습니다. 인간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옛 언약은 아무런 효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로 인해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는 인간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새 언약을 주셨습니다. 이 새 언약의 내용은 예레미야 31:31-34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노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 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새 언약은 인간의 행위와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다만 은혜로 일방적으로 주셨기 때문에 무조건적인 언약이요 하나님이 책임을 지는 언약입니다. 새 언약의 요지는 하나님의 법을 돌비에 새기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에 새긴다는 것이요 또한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악을 사해주시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19,20절에는 '너희를 위하여'라는 말씀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 내용은 이사야 53장에서도 다섯 번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사야 53장이 없다면 본문은 이해가 불가능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를 위하여 살을 찢기시고 피를 흘리셨습니까? 바로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입니다. 이 사실을 믿을 때 우리는 그의 죽음으로 인한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그가 죽으심으로 우리는 생명을 얻었고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입었습니다.
이 새 언약은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고귀한 몸을 찢으시고 보배 피를 흘리심으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흘리신 보배 피는 인간의 죄를 속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아무 죄가 없기 때문에 순결합니다. 그 피는 영원한 효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근본적으로 사람을 변하여 새 사람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추하고 욕된 삶을 청산하고 순수하고 깨끗한 삶을 살기를 원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을 회개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중심적으로 살고자 하지만 어느새 세상의 즐거움에 마음이 끌리는 자신을 보게 됩니다. 이는 그 피가 죄로 인해 더러워졌기 때문입니다. 피가 더럽기 때문에 더러운 것을 사모합니다. 병원에 가면 제일 먼저 피검사부터 합니다. 이는 사람이 병들면 피가 더러워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악된 삶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의 피의 은혜를 믿음으로 덧입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증거했습니다. "염소와 황소의 피가 육체를 정결케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히9:13,14)." 레위기 17:11절에 보면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고 피는 죄를 속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려면 반드시 짐승의 피를 흘려 죄를 속해야 했습니다. 피로써 모든 물건이 정결케 되었는데 이는 피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기 때문입니다(히9:22). 짐승의 피가 인간의 죄를 속하는 것은 대속의 원리입니다. 그러나 짐승의 피는 그 효과가 일시적이고 온전하지 못하여 죄를 범할 때마다 번거롭게 짐승의 피를 흘려 제사를 지내야 했습니다. 이는 장차 올 참된 것의 그림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죄를 속하기 위해 사랑하는 독생자를 희생제물로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아무 죄가 없는 하나님의 아들의 피이기 때문에 인간의 죄의 독소를 씻어내고 정결케 하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피로 단번에 영원하고도 온전한 속죄를 이루사 인간의 모든 죄를 속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신 단 한번의 사건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완전하고도 영원히 속하여 주셨기 때문에 이제 다시는 속죄를 위해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죄를 범할 때마다 진실되게 회개하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의 은혜를 덧입기만 하면 됩니다. 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내가 해야 할 일은 없습니다. 죄문제는 선행으로도 고행으로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죄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절망만 커질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단순히 나의 죄를 위해 그 고귀한 몸을 찢으시고 보배 피를 흘리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성령의 역사로 나를 짓누르던 무거운 죄의 짐이 순식간에 풀어지고 나를 얽어매던 죄의 사슬이 뚝 끊어지게 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는 우리의 양심을 깨끗케 합니다. 예수님의 피는 우리를 점점 거룩하게 하여 진실된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시켜 줍니다.
새 언약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인쳤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변개할 수 없는 가장 확실한 언약이요 영원한 언약입니다. 이 언약은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기만 하면 어떤 죄를 지었든지 간에 속함을 받을 수 있다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십자가 위의 강도는 흉악범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자기 죄를 위해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심을 마음으로 믿었습니다. 그가 믿는 순간 죄의 사슬이 끊어지고 흉악한 강도에서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는 그 시로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눅23:43). 이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이 약속을 믿는 자에게 실제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는 새 언약을 믿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와 사단의 세력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유월절 어린양이 되어 몸을 찢으시고 보배 피를 흘리셨습니다. 이는 우리를 향하신 크신 사랑 때문입니다. 나를 위해 살을 찢으시고 피를 흘리신 예수님의 사랑을 찬양합니다.
성만찬의 의미
말씀/누가복음 22:1-23
요절/누가복음 22: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오늘 말씀은 성만찬에 관한 것입니다. 성만찬은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밤에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식사를 하시면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는 의미를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친히 성찬식을 제정하시고 이를 행하도록 명하셨습니다. 성만찬은 의식적으로 이를 기념하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성만찬은 예수님을 믿고 영적인 교제를 나눔으로 매일 우리의 영적 생명을 유지해 주는 원동력이 됩니다. 또한 복음을 전함으로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을 알려야 합니다. 이 시간 성만찬의 의미를 생각해 보는 가운데 은혜 받기를 기도합니다.
때는 유월절이라고 하는 무교절이 가까운 때였습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430년 동안 바로의 권세 아래서 노예 생활하다가 구원받은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로의 권세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어린양의 피가 필요했듯이 오늘날 우리가 죄와 사단의 권세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어린 양되신 예수님의 피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유월절이 가까워오자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선조들에게 베푸신 은혜를 마음에 새기기를 원했습니다. 로마 식민지 통치 하에 있는 그들에게 다시 이러한 은총을 베풀어 주시도록 눈물로 간구했습니다.
그러나 이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그들은 마땅히 하나님의 크신 권능과 사랑을 묵상하며 유월절 잔치를 준비해야 했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생명을 다하여 말씀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통하는 백성들을 위로하고 희망을 심어 주고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들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예수님을 제거할 방책을 연구하고 있었습니다(2). 그들 마음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대신에 시기심과 악독과 살의가 가득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종들이 아니라 마귀의 자식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백성들이 두려웠습니다. 그들이 정말로 두려워해야 할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고 사람을 두려워했을 때 마귀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백성들이 예수님의 말씀과 사랑을 받고 따르는 것을 보고 만약 예수님을 명절에 잡으면 데모가 일어날 것을 알고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자기를 죽이는 회개의 투쟁을 하기 보다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습니다. 마침 열 두 제자 중 하나인 가룟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가 돈을 받고 예수님을 팔고자 함으로 그들의 범죄에 속도가 붙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사단이 많은 사람들 가운데 왜 하필이면 가룟 유다의 마음에 들어간 것입니까? 이는 그의 마음이 사단이 역사하기 좋은 환경이었기 때문입니다. 더러운 곳에 병균이 서식하듯이 인간적이고 죄악된 생각을 하는 사람의 마음에 사단이 역사하게 됩니다. 베드로도 신앙 고백 후에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기 보다 사람의 일을 생각하다가 사단의 종노릇을 한 적이 있습니다(막8:33). 가룟 유다는 몸으로는 예수님을 좇았으나 마음으로는 좇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지 않았고 거듭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진리의 말씀을 받지 않고 자기 생각을 고집했습니다. 그는 예수님보다도 세상을 더 사랑하고 돈을 더 사랑했습니다. 그는 순수치 못하고 이중적이었습니다. 그는 인간적인 생각을 하다가 마침내 사단에게 마음 문을 열어주고야 말았습니다. 사단이 그 마음 속에 들어갔을 때 그는 자제력을 잃고 사단의 힘에 이끌려 다니는 사단의 도구가 되고 말았습니다. 마침내 그는 돈을 주고 예수님을 팔고자 기회를 엿보게 되었습니다(6). 우리는 가룟 유다를 비판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가룟 유다적인 요소가 있습니다(23). 우리 속에 있는 기회주의, 교만,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 시기심 등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겨준 심각한 죄악들인 것입니다.
유월절 양을 잡을 무교절이 이르게 되었습니다(7). 유월절 양은 1월 14일 오후에 잡아 그날 저녁에 가족 단위로 유월절 식사를 하였습니다. 그 후에 유월절 양을 잡아 제사를 지내었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유월절 양이 되어 세상 죄를 지고 죽으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시며 구체적으로 장소를 말씀하시지 않고 물 한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따라가 유월절을 예비하도록 하셨습니다(10). 이는 가룟 유다를 의식하였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그들은 가룟 유다와 달리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세상 그 어떤 것보다도 지극히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언제든지 순종할 자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순종했을 때 예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들은 마가의 집에 있는 큰 다락방에서 유월절을 예비하였습니다.
14,15절을 보십시오. "때가 이르매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앉으사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여기서 원하고 원하였노라는 말씀은 갈망하였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먹기를 갈망하였을까요?
첫째로, 유월절 식사를 통해서 그들에게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는 의미를 심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때까지 여러 번 자신이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십자가의 고난과죽으심의 의미를 심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 양으로서 많은 사람을 위한 대리의 죽음을 죽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가 결코 패배와 수치가 아니라 승리와 영광임을 가르쳐 주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십자가의 죽으심의 의미를 심는 것으로 끝나지 않으시고 이를 사람들이 대대로 기념하도록 성만찬을 제정하셨습니다(19). 예수님은 은혜를 쉽게 잊어버리는 인간의 죄악된 속성을 아시고 이를 기념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성찬식은 예수님께서 '나를 잊지 말라'는 정도의 어떤 감상적인 의식이 아니라 예수님과 연합하는 하나의 예배입니다. 제자들은 장차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이 되어 예수님께서 하신 복음 역사를 계승해야 했습니다. 과거에는 성직자만 성경을 읽을 수 있었고 일반 대중들은 성경을 읽을 권리도 없었고 또 읽을 수도 없었습니다. 이런 시대에 성만찬은 눈으로 볼 수 있는 말씀으로서 복음을 전달하고 수호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습니다. 가상 공간에서 생활의 모든 것이 이루어지고 있는 이 시대야말로 성만찬이 더욱 중요한 때입니다. 고린도전서11:26절에 보면 성만찬은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유월절 식사를 통해서 제자들과 사랑의 관계성을 견고케 하실 뿐만 아니라 제자 상호간에도 사랑의 관계성을 견고케 하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 자체나 그 지식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음으로 나의 것으로 소유해야 합니다. 성만찬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고전10:16)'에 참예하는 것입니다. 그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성만찬에 참예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됩니다.
16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이는 지상에서는 마지막 유월절임을 말해 줍니다. 또 동시에 하나님 나라에서 다시 있을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지상에서의 유월절 잔치는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있을 유월절 잔치의 그림자였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양이 되사 인류를 죄와 사단의 권세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완전한 희생 제물이 되셨습니다. 이로써 구약의 유월절은 완전히 폐지되었습니다. 유월절만 폐지된 것이 아니라 제사법에 관계된 모든 의식적인 율법도 다 폐지되었습니다. 유월절 식사는 주님의 성만찬으로 대치되었고 이는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완성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의 유월절 잔치는 어린양의 피로 구속받은 성도들만이 참석할 수 있는 구원의 잔치입니다. 이 유월절이 하나님 나라에서 이룬다는 것은 우리의 육신이 구속을 받아 죄의 세력에서 벗어나게 됨으로 완전한 자유를 누리게 됨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친히 우리와 함께 하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고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있지 않습니다. 18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18)."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대해 말씀하실 때마다 슬픔과 근심이 가득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 나라에 대한 놀라운 희망을 심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떡과 잔을 주시면서 이제는 자신이 십자가에서 받을 고난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떡을 가져다가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19)." 여기서 '사례'하셨다는 것은 감사기도를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식사 전후에 감사기도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의무감이나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그는 우리를 사랑하사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자발적으로 죽으신 것입니다. 준다는 말은 '너희를 위하여 거침없이 내어 준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아무 자격이 없는 죄인들에게 일방적으로 베푸시는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떡을 떼어 주신 것은 또 다른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6:35,51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생명의 떡이 되십니다. 누구든지 이 예수님께 나아가 생명의 떡을 먹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하고 진정한 만족을 누리게 됩니다. 세상에는 인간적으로 부족함이 없지만 늘 불만족을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는 영혼의 만족이 없기 때문입니다. 특히 오늘날 사람들이 성적 쾌락을 강렬하게 추구하는 것은 생리적인 욕구보다 영적인 공허감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영혼의 만족을 누리려면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먹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 나아와 말씀 앞에서 깊이 회개하고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말씀을 영의 양식으로 먹음으로 예수님과 영적 사귐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살을 먹는 것은 예수님과 연합하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의 굶주린 영혼은 진정한 만족을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이 주신 잔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20절을 보십시오.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여기서 너희를 위하여 붓는다는 말은 '너희를 위하여 거침없이 계속적으로 부어지는 피'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피로 세우는 새 언약입니다. 새 언약은 옛 언약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택하사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법도인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를 지키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겠고 그들은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가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출19:5,6).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하며 응답했습니다(출24:7). 이로써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언약 관계가 맺어졌습니다. 이 언약은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관계가 성립되기 때문에 조건적인 언약이요 쌍방간에 책임이 있는 언약입니다. 하나님은 이 언약을 견고케 하기 위해 짐승의 피로 인치도록 하셨습니다(출24:8).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이 언약은 파기되어 버렸습니다. 인간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옛 언약은 아무런 효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로 인해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는 인간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새 언약을 주셨습니다. 이 새 언약의 내용은 예레미야 31:31-34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노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 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새 언약은 인간의 행위와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다만 은혜로 일방적으로 주셨기 때문에 무조건적인 언약이요 하나님이 책임을 지는 언약입니다. 새 언약의 요지는 하나님의 법을 돌비에 새기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에 새긴다는 것이요 또한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악을 사해주시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19,20절에는 '너희를 위하여'라는 말씀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 내용은 이사야 53장에서도 다섯 번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사야 53장이 없다면 본문은 이해가 불가능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를 위하여 살을 찢기시고 피를 흘리셨습니까? 바로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입니다. 이 사실을 믿을 때 우리는 그의 죽음으로 인한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그가 죽으심으로 우리는 생명을 얻었고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입었습니다.
이 새 언약은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고귀한 몸을 찢으시고 보배 피를 흘리심으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흘리신 보배 피는 인간의 죄를 속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아무 죄가 없기 때문에 순결합니다. 그 피는 영원한 효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근본적으로 사람을 변하여 새 사람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추하고 욕된 삶을 청산하고 순수하고 깨끗한 삶을 살기를 원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을 회개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중심적으로 살고자 하지만 어느새 세상의 즐거움에 마음이 끌리는 자신을 보게 됩니다. 이는 그 피가 죄로 인해 더러워졌기 때문입니다. 피가 더럽기 때문에 더러운 것을 사모합니다. 병원에 가면 제일 먼저 피검사부터 합니다. 이는 사람이 병들면 피가 더러워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악된 삶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의 피의 은혜를 믿음으로 덧입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증거했습니다. "염소와 황소의 피가 육체를 정결케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히9:13,14)." 레위기 17:11절에 보면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고 피는 죄를 속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려면 반드시 짐승의 피를 흘려 죄를 속해야 했습니다. 피로써 모든 물건이 정결케 되었는데 이는 피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기 때문입니다(히9:22). 짐승의 피가 인간의 죄를 속하는 것은 대속의 원리입니다. 그러나 짐승의 피는 그 효과가 일시적이고 온전하지 못하여 죄를 범할 때마다 번거롭게 짐승의 피를 흘려 제사를 지내야 했습니다. 이는 장차 올 참된 것의 그림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죄를 속하기 위해 사랑하는 독생자를 희생제물로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아무 죄가 없는 하나님의 아들의 피이기 때문에 인간의 죄의 독소를 씻어내고 정결케 하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피로 단번에 영원하고도 온전한 속죄를 이루사 인간의 모든 죄를 속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신 단 한번의 사건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완전하고도 영원히 속하여 주셨기 때문에 이제 다시는 속죄를 위해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죄를 범할 때마다 진실되게 회개하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의 은혜를 덧입기만 하면 됩니다. 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내가 해야 할 일은 없습니다. 죄문제는 선행으로도 고행으로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죄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절망만 커질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단순히 나의 죄를 위해 그 고귀한 몸을 찢으시고 보배 피를 흘리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성령의 역사로 나를 짓누르던 무거운 죄의 짐이 순식간에 풀어지고 나를 얽어매던 죄의 사슬이 뚝 끊어지게 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는 우리의 양심을 깨끗케 합니다. 예수님의 피는 우리를 점점 거룩하게 하여 진실된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시켜 줍니다.
새 언약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인쳤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변개할 수 없는 가장 확실한 언약이요 영원한 언약입니다. 이 언약은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기만 하면 어떤 죄를 지었든지 간에 속함을 받을 수 있다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십자가 위의 강도는 흉악범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자기 죄를 위해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심을 마음으로 믿었습니다. 그가 믿는 순간 죄의 사슬이 끊어지고 흉악한 강도에서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는 그 시로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눅23:43). 이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이 약속을 믿는 자에게 실제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는 새 언약을 믿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와 사단의 세력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유월절 어린양이 되어 몸을 찢으시고 보배 피를 흘리셨습니다. 이는 우리를 향하신 크신 사랑 때문입니다. 나를 위해 살을 찢으시고 피를 흘리신 예수님의 사랑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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