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00년 누가복음 제 21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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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누가복음 제 21 강
말씀/누가복음 21:1-38
요절/누가복음 21:27
기독교의 역사관
“그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역사에 종말이 있을 것인가? 그런데 우리는 기독교 역사관이 시작과 종말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종말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비관적인 역사관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18세기 이후부터 자유주의와 인본주의가 인류 문명의 발전을 근거로 역사에는 종말이 없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20세기 전반에 슈펭글러의 “서양 문명의 몰락”이라는 책은 유럽 지성인들에게 폭탄과 같은 충격을 주었습니다. 우리는 이 시간 성경이 역사에 대해서 무엇을 말하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은 말세의 징조와 역사의 종말과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 개입하심을 믿습니다. 우리가 기독교 역사관을 가지고 이 시대를 분별하며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일하기를 기도합니다.
I. 말세의 징조 (1-24)
1-4절은 과부의 헌금에 관한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연보궤에 헌금 넣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들은 번쩍거리는 금화를 번쩍거리는 얼굴을 하고 드렸습니다. 또 어떤 가난한 과부는 미안한 듯이 두 렙돈을 넣었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 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3,4).” 제자들은 부자들이 헌금하는 모습을 보고 그들이 부러웠습니다. 반면에 자신들은 초라해 보였습니다. 이런 자세를 갖는다면 헌금을 많이 하는 사람은 귀하게 여기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가볍게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과부가 헌금을 많이 해서 칭찬한 것이 아니라 그 내면의 자세를 칭찬하셨습니다. 우리는 헌금을 체면 차리기로 해서는 안됩니다. 헌금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대한 감사와 기쁨 마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물질을 드리는 생활에는 그의 가치관, 신앙 자세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는 물질과 함께 자신을 드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과 같은 헌금을 진심을 다해서 드렸을 때 세계를 섬길 수 있도록 축복하셨습니다. 우리가 자기 쓸 것 다 쓰고 나서 나머지를 드리기 보다 먼저 하나님께 드릴 것을 작정하여 떼어놓고 쓰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올바른 헌금 자세인 줄 믿습니다.
제자들은 연보궤가 있는 여인의 뜰을 나오면서 성전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미석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하매” 제자들은 갈릴리 시골의 단층 흙벽돌집만 보다가 아름다운 대리석으로 꾸며진 성전을 볼 때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그들에게는 센타도 없어서 베드로의 집이나 시골 회당에서 모임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전은 웅장했습니다. 이 성전은 BC 19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AD 64년까지 공사가 계속되었습니다. 성전은 남북으로 450m, 동서로 300m되는 평탄한 지역에 높이 1m, 길이 5m 되는 대리석들을 쌓아 만들었습니다. 어떤 대리석은 약 21미터나 되는 것도 있었습니다. 성전의 남동쪽 모퉁이는 기드론 시내를 굽어 보고 있으며 그 안뜰은 암벽 45m 위에 있었습니다. 성전의 지붕은 황금색으로 만들어져서 태양이 비추이면 찬란하게 빛났다고 합니다. 성전은 히브리 문화의 금자탑이었습니다. 오늘날은 게놈 프로젝트로 대표되는 생물학 및 유전자 공학 분야의 발전이라든가 컴퓨터 기술, 항공 우주 기술 등을 보면 입이 딱 벌어집니다. 인간 유전자 지도인 게놈은 몇 살에 질병이 걸릴 것을 미리 알고 대비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2050년이 되면 인간의 나이가 150살 까지로 늘어난다고 합니다. 이런 문명의 눈부신 발전을 보면 인류의 미래가 밝게 보입니다. 테크노피아가 도래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성전의 웅장함을 보고 놀라는 제자들에게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예수님은 성전의 겉 모습이 아니라 그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죄악상을 보셨습니다. 성전의 부패로 인해서 멸망할 수밖에 없음을 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AD 70년 로마의 디투스 장군에 의해서 파괴될 성전을 보고 계셨습니다. 로마군인들은 돌 사이에 금이 있다는 말을 듣고 돌을 하나 하나 들어내어 다 파괴하였습니다. 그리고 성전 안에 있던 보물들은 개선 행진 가운데 옮겨졌습니다. 우리는 역사의 양면을 다 보아야 합니다. 문명에는 명암이 있습니다. 현대 과학 문명이 발전하면서 인간의 타락도 함께 발전하고 있습니다. 지금 인류가 가지고 있는 핵무기만으로도 지구를 수백번 이상 파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이 파괴된다고 말씀하시자 제자들은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물었습니다. “선생님이여 그러면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런 일이 이루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7)?” 그들은 때와 징조를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야 이 때를 대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세상의 종말에 대한 징조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가라사대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로라 하며 때가 가까왔다 하겠으나 저희를 좇지 말라 난리와 소란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 말라 이 일이 먼저 있어야 하되 끝은 곧 되지 아니하니라 또 이르시되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큰 지진과 기근과 온역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서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8-11).”
첫째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로라 하며 때가 가까웠다고 합니다. 그들은 장래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인해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확신있는 말을 하여 미혹합니다. 여러 가지 기적들도 행합니다. 그들은 진리의 말씀과 반대되는 거짓 진리를 가르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과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약속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안일한 인생관을 말하고 죄악된 본성에 따라 사는 것이 정당하다고 가르칩니다. 쾌락주의 인생관을 가지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거짓 평화와 지상 유토피아를 약속합니다. 그들은 거짓말쟁이들이요 마귀의 자식들입니다.
과거에는 공산주의이론과 같은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가진 자들이 거짓 메시야였습니다. 그러나 공산주의가 멸망한 이후에는 물신주의가 거짓 메시야가 되었습니다. 구 공산권이나 민주주의 사회에도 물질만능주의가 활개를 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돈만 있으면 행복할 것이라는 환상을 가지게 되었고 돈을 벌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다 하고자 합니다. 돈의 위력을 남용하여 쾌락을 추구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오락 산업만큼 번창하는 사업도 없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미치도록 즐기기를 원합니다. 쾌락주의는 인간에게 가장 위험한 거짓 메시야입니다. 과거에 로마에서는 검투사들이 원형극장에서 피를 흘리며 죽고 죽이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흥분하였습니다. 이런 쾌락주의는 로마 제국 멸망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노아시대의 쾌락주의의 악한 영향은 소돔과 고모라로 이어졌습니다. 사람들은 동성연애를 하다가 불과 유황으로 멸망하였습니다. 디모데후서 3:4절에는 말세의 징조를 이렇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기보다 더 하며”
쾌락주의는 정열적인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높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쾌락주의의 기초는 운명주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은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버린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고전15:32)”
왜 거짓 메시야가 이와 같이 많이 일어납니까? 이는 사람들이 방황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지금 무엇을 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할지 모릅니다. 왜 먹기 위해서 땀을 흘리며 일을 해야 하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은 아주 자유로운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인의 후예들로서 정처없이 방황하고 공포와 죄책감으로 유리합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은 상대주의에 기초한 사고방식을 갖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절대 진리가 없습니다. 모든 것을 상대적으로 생각합니다. 성경에 기초한 절대 진리가 없는 그들은 모든 것이 상대적입니다. 그러한 가치관으로 인해서 수많은 대학생들이 계약 결혼을 하고 동거를 합니다. 결혼한 부부들이 스와핑을 합니다. 그들은 죄악을 합리화하고 더욱 조장합니다. 그들은 목자없는 양과 같이 길을 잃고 고통합니다. 거짓 메시야들이 일어나서 그들을 미혹합니다. 거짓 메시야는 방황하는 그들을 이용합니다.
둘째로, 난리와 난리의 소문이 있습니다. 9절을 보면 “난리와 소란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 말라 이 일이 먼저 있어야 하되 끝은 곧 되지 아니하니라.”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고 전쟁의 소문이 계속 일어납니다. 지금은 미사일 전쟁, 핵전쟁의 위험에 관한 소문이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두려움을 극복하려고 하나 더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셋째로, 말세의 또 다른 징조는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과 하늘로서 나타나는 징조들입니다. 지금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은 전쟁으로 죽어가는 사람들보다 더 많습니다. 작년만해도 대만과 터키에서 일어난 지진으로 4700명이 죽었습니다. 세계 각지에서 지진이 일어나는 빈도수는 갈수록 증가하고 있습니다. UN 보고서는 2080년에는 지구온난화의 영향으로 빙하 등이 녹아내리면서 해수면이 지금보다 40㎝가량 높아지고 이에 따라 연간 발생하는 수재민이 현재 1300만명에서 9400만명으로 크게 늘어날 것으로 전망했습니다. 기후변화에 따라 물 부족현상이 심각해지고 지구온난화에 따라 말라리아 모기 번식이 늘어나면서 세계에서 연간 2억9000만여명이 말라리아에 감염될 것이라고 이 보고서는 분석했습니다. 지난 한해동안 에이즈와 말라리아 등 예방 가능한 전염성 질병으로 사망한 사람은 1300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국제적십자사연맹은 6월 28일 발간한 ꡐ세계 재해 보고서ꡑ를 통해 이같이 밝히고 “질병으로 인한 사망자수는 지난해 대규모 희생을 낸 터키 지진과 베네수엘라 홍수 등 자연재해로 인한 사망자의 160배가 넘는다ꡓ고 설명했습니다. 보고서에 따르면 1945년이후 전쟁으로 사망한 사람은 2300만명인데 비해 에이즈와 결핵 말라리아 이질 등 전염성 질병으로 사망한 사람은 6.6배 가량인 1억5000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보고서는 또 ꡒ중남부 아프리카 지역에서 에이즈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은 2300만명으로 전세계 감염자의 70%를 차지하고 있으며 매시간마다 300명이 에이즈로 죽고 있다ꡓ고 밝혔습니다. UNDP는 인간개발지수 상하위 그룹 국가들을 둘러싼 ꡐ지구촌의 실상ꡑ도 아울러 발표했는데 이에 따르면 지난 10년 사이에 일어난 전쟁 또는 내전으로 전세계에서 5000만명이 고향을 떠나 떠돌고 있으며 1억명의 어린이가 노숙하거나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지난 10년간 내전 또는 무력분쟁으로 600만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세상의 종말이 멀지 않았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세상에 환란이 많아지면서 제자들은 핍박을 많이 받게 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이 모든 일 전에 내 이름을 인하여 너희에게 손을 대어 핍박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 주며 임금들과 관장들 앞에 끌어가려니와” 신자들에 대한 핍박의 즉각적인 원인은 유다이즘과 로마 황제 숭배에 대한 거부 때문이었습니다. 마지막 때에는 크리스챤들이 그들과 같이 죄 가운데 뛰어들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겨 핍박합니다. 13절을 보면 “이 일이 도리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리라.”고 했습니다. 핍박의 때가 복음을 증거할 수 있는 좋은 기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신자들은 핍박의 때에 무슨 말을 할까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15). 우리는 그의 이름 때문에 미움을 받는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않게 보호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굳게 서야 합니다. 우리는 핍박의 때에 인내해야 합니다. 참는 자에게 구원이 옵니다. 이것은 해산의 고통과 같이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난들은 신자들을 연단하고 세상 죄를 끊게 합니다. 그러나 원수들에게는 죄없는 사람들을 핍박하였기에 심판의 증거가 됩니다.
20-24절은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A.D. 70년 로마 군이 예루살렘을 포위할 때 크리스챤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산으로 도망했습니다. 성내에 있는 자들은 성 밖으로 나갔으며 촌에 있는 자들은 그리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설마 성전을 이방인들에게 내어 주시랴 생각하고 그리고 들어갔습니다. 실제로 예루살렘 성전은 안토니오 요새들로 둘러싸인 최고의 요새였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로마 군들이 예루살렘 성을 포위할 때 성전에 모여서 제사를 드리면서 구원해 주시도록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로마군들이 수로를 막고 성을 포위하여 물자가 공급되지 않아서 굶어죽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심지어 가죽 띠를 뜯어먹고 자식을 잡아 먹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이 파괴될 때 유대인 110만이 죽었고 10만명이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그들은 이후로 거의 2000년 동안 세계의 유랑자들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성전을 보는 시각이 달랐습니다. 제자들은 성전의 화려하고 웅장한 겉 모습을 보고 감탄하였지만 예수님은 그 속의 부패를 보고 멸망을 보셨습니다. 우리는 역사를 어떤 눈으로 보아야 합니까? 이것을 역사관이라고 합니다. 기독교인의 역사관은 한 마디로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의 역사 속에 개입하신다고 믿는 것입니다. 인간의 역사가 결코 사람들만의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역사라고 믿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하나님 없이 제멋대로 혹은 우연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움직이시고, 적어도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범위 속에서 움직인다고 보는 것입니다. 또한 이 세상의 문명이 발달하고 평화가 도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때가 되면 세상의 종말이 오게 됩니다. 우리는 인생에서 무엇을 설계하고 무엇을 위해서 살 것인가를 결정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려면 바른 역사관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미래를 알 수 없다 단정짓고 순간 순간 좋을대로 살기 쉽습니다. 현실의 유익을 따라서 살기 쉽습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예수님이냐 세상이냐 저울질을 하고 눈치를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역사를 주권적으로 이끌어 가심을 믿고 예수님 편에 분명히 서야 합니다. 역사 속에서 나를 발견하고 바른 신앙으로 헌신하며 복음 증거자의 사명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가 악의 세력에게 잠시 고통을 받는다할지라도 결국은 이길 것이기 때문에 인내와 믿음을 포기해서는 안되며, 목숨과 바꿔서라도 지켜야 합니다. 이 세상에 과연 몇 사람이나 박해를 받아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들에게 죽음을 두려워말라고 자신 있게 말할 사람이 있을까요? 성경 저자들의 이런 행동들이 바로 철저한 기독교 역사관에서 나온 것들입니다.
II. 역사의 종말과 인자의 재림 (25-38)
25-28절은 예수님의 재림의 때에 일어날 징조들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25,26절을 보십시오. “일월성신에는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우는 소리를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하리라 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하리니 이는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겠음이라.” 인자의 재림 때는 가장 영광스러운 날이 됩니다. 그때는 만물이 새로워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지고 만유가 회복될 것입니다. 이 날은 온 신자들이 간절히 기다리는 날인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는 태양과 별들과 달등이 다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우는 소리로 인하여 혼란한 중에 불안으로 절망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닥쳐올 일들을 예상하고 무서워 기절할 것입니다. 이는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이 시작되거든 너희는 머리를 들라고 했습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27절을 보십시오. “ 그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춘향이가 어사또가 된 이도령 앞에서 머리를 들 듯이 신자들은 영광스러운 왕으로 오시는 예수님 앞에서 머리를 들어야 합니다. 살전 4:16,17절은 말씀합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이후로 주님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것입니다. 그리고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 노릇 하실 것입니다.
28절을 보십시오.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구속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고난이 더욱 심해지고 천재 지변이 일어날 때에 우리는 두려움으로 움츠러들기보다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운 줄을 알고 그 날을 사모해야 합니다. 우리들은 세상이 어지럽고 난리의 소문과 환난이 온다해도 두려워 말고 오히려 소망 가운데 일어나 머리를 들고 주님의 재림과 영광에 참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말씀하셨습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 세상의 종말이 가까울수록 사람들은 더욱 죄악되고 불법이 성하게 되고 조급해 집니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마지막까지 복음을 전하다고 일대일로 성경을 가르치고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예수님은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운 줄을 알도록 하십니다. 무화과 나무에 싹이 나면 우리가 보고 여름이 가까운 줄을 자연히 알게 됩니다. 이와 같이 재난들이 일어나고 징조들이 나타나는 것을 보면 하나님 나라가 가까운 줄을 알아야 합니다.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이스라엘은 1945년 5월 14일 2000년의 방황을 끝내고 나라를 재건하였습니다. 이것은 중요한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임박해 있습니다. 천지가 없어져도 주님의 말씀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역사의식을 가지고 오늘을 살아야 합니다. 34-36절을 보십시오. “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항상 깨어 있는 비밀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항상 기도할 때 시대의 징조를 알 수 있습니다. 또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이 땅에 소망을 두지 말고 종말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주님의 재림을 소망하는 가운데 맡은 바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종말이 가까워 온다고 논밭 다 팔아서 산 속에 장막 짓고 은둔해 있지 말고 성경 선생이요 목자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열심히 말씀을 가르치고 깨어 기도하는 생활을 하는 것이 말세를 사는 바른 자세입니다.
말씀/누가복음 21:1-38
요절/누가복음 21:27
기독교의 역사관
“그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역사에 종말이 있을 것인가? 그런데 우리는 기독교 역사관이 시작과 종말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종말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비관적인 역사관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18세기 이후부터 자유주의와 인본주의가 인류 문명의 발전을 근거로 역사에는 종말이 없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20세기 전반에 슈펭글러의 “서양 문명의 몰락”이라는 책은 유럽 지성인들에게 폭탄과 같은 충격을 주었습니다. 우리는 이 시간 성경이 역사에 대해서 무엇을 말하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은 말세의 징조와 역사의 종말과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 개입하심을 믿습니다. 우리가 기독교 역사관을 가지고 이 시대를 분별하며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일하기를 기도합니다.
I. 말세의 징조 (1-24)
1-4절은 과부의 헌금에 관한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연보궤에 헌금 넣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들은 번쩍거리는 금화를 번쩍거리는 얼굴을 하고 드렸습니다. 또 어떤 가난한 과부는 미안한 듯이 두 렙돈을 넣었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 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3,4).” 제자들은 부자들이 헌금하는 모습을 보고 그들이 부러웠습니다. 반면에 자신들은 초라해 보였습니다. 이런 자세를 갖는다면 헌금을 많이 하는 사람은 귀하게 여기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가볍게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과부가 헌금을 많이 해서 칭찬한 것이 아니라 그 내면의 자세를 칭찬하셨습니다. 우리는 헌금을 체면 차리기로 해서는 안됩니다. 헌금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대한 감사와 기쁨 마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물질을 드리는 생활에는 그의 가치관, 신앙 자세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는 물질과 함께 자신을 드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과 같은 헌금을 진심을 다해서 드렸을 때 세계를 섬길 수 있도록 축복하셨습니다. 우리가 자기 쓸 것 다 쓰고 나서 나머지를 드리기 보다 먼저 하나님께 드릴 것을 작정하여 떼어놓고 쓰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올바른 헌금 자세인 줄 믿습니다.
제자들은 연보궤가 있는 여인의 뜰을 나오면서 성전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미석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하매” 제자들은 갈릴리 시골의 단층 흙벽돌집만 보다가 아름다운 대리석으로 꾸며진 성전을 볼 때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그들에게는 센타도 없어서 베드로의 집이나 시골 회당에서 모임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전은 웅장했습니다. 이 성전은 BC 19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AD 64년까지 공사가 계속되었습니다. 성전은 남북으로 450m, 동서로 300m되는 평탄한 지역에 높이 1m, 길이 5m 되는 대리석들을 쌓아 만들었습니다. 어떤 대리석은 약 21미터나 되는 것도 있었습니다. 성전의 남동쪽 모퉁이는 기드론 시내를 굽어 보고 있으며 그 안뜰은 암벽 45m 위에 있었습니다. 성전의 지붕은 황금색으로 만들어져서 태양이 비추이면 찬란하게 빛났다고 합니다. 성전은 히브리 문화의 금자탑이었습니다. 오늘날은 게놈 프로젝트로 대표되는 생물학 및 유전자 공학 분야의 발전이라든가 컴퓨터 기술, 항공 우주 기술 등을 보면 입이 딱 벌어집니다. 인간 유전자 지도인 게놈은 몇 살에 질병이 걸릴 것을 미리 알고 대비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2050년이 되면 인간의 나이가 150살 까지로 늘어난다고 합니다. 이런 문명의 눈부신 발전을 보면 인류의 미래가 밝게 보입니다. 테크노피아가 도래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성전의 웅장함을 보고 놀라는 제자들에게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예수님은 성전의 겉 모습이 아니라 그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죄악상을 보셨습니다. 성전의 부패로 인해서 멸망할 수밖에 없음을 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AD 70년 로마의 디투스 장군에 의해서 파괴될 성전을 보고 계셨습니다. 로마군인들은 돌 사이에 금이 있다는 말을 듣고 돌을 하나 하나 들어내어 다 파괴하였습니다. 그리고 성전 안에 있던 보물들은 개선 행진 가운데 옮겨졌습니다. 우리는 역사의 양면을 다 보아야 합니다. 문명에는 명암이 있습니다. 현대 과학 문명이 발전하면서 인간의 타락도 함께 발전하고 있습니다. 지금 인류가 가지고 있는 핵무기만으로도 지구를 수백번 이상 파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이 파괴된다고 말씀하시자 제자들은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물었습니다. “선생님이여 그러면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런 일이 이루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7)?” 그들은 때와 징조를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야 이 때를 대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세상의 종말에 대한 징조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가라사대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로라 하며 때가 가까왔다 하겠으나 저희를 좇지 말라 난리와 소란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 말라 이 일이 먼저 있어야 하되 끝은 곧 되지 아니하니라 또 이르시되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큰 지진과 기근과 온역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서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8-11).”
첫째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로라 하며 때가 가까웠다고 합니다. 그들은 장래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인해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확신있는 말을 하여 미혹합니다. 여러 가지 기적들도 행합니다. 그들은 진리의 말씀과 반대되는 거짓 진리를 가르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과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약속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안일한 인생관을 말하고 죄악된 본성에 따라 사는 것이 정당하다고 가르칩니다. 쾌락주의 인생관을 가지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거짓 평화와 지상 유토피아를 약속합니다. 그들은 거짓말쟁이들이요 마귀의 자식들입니다.
과거에는 공산주의이론과 같은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가진 자들이 거짓 메시야였습니다. 그러나 공산주의가 멸망한 이후에는 물신주의가 거짓 메시야가 되었습니다. 구 공산권이나 민주주의 사회에도 물질만능주의가 활개를 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돈만 있으면 행복할 것이라는 환상을 가지게 되었고 돈을 벌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다 하고자 합니다. 돈의 위력을 남용하여 쾌락을 추구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오락 산업만큼 번창하는 사업도 없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미치도록 즐기기를 원합니다. 쾌락주의는 인간에게 가장 위험한 거짓 메시야입니다. 과거에 로마에서는 검투사들이 원형극장에서 피를 흘리며 죽고 죽이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흥분하였습니다. 이런 쾌락주의는 로마 제국 멸망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노아시대의 쾌락주의의 악한 영향은 소돔과 고모라로 이어졌습니다. 사람들은 동성연애를 하다가 불과 유황으로 멸망하였습니다. 디모데후서 3:4절에는 말세의 징조를 이렇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기보다 더 하며”
쾌락주의는 정열적인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높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쾌락주의의 기초는 운명주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은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버린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고전15:32)”
왜 거짓 메시야가 이와 같이 많이 일어납니까? 이는 사람들이 방황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지금 무엇을 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할지 모릅니다. 왜 먹기 위해서 땀을 흘리며 일을 해야 하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은 아주 자유로운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인의 후예들로서 정처없이 방황하고 공포와 죄책감으로 유리합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은 상대주의에 기초한 사고방식을 갖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절대 진리가 없습니다. 모든 것을 상대적으로 생각합니다. 성경에 기초한 절대 진리가 없는 그들은 모든 것이 상대적입니다. 그러한 가치관으로 인해서 수많은 대학생들이 계약 결혼을 하고 동거를 합니다. 결혼한 부부들이 스와핑을 합니다. 그들은 죄악을 합리화하고 더욱 조장합니다. 그들은 목자없는 양과 같이 길을 잃고 고통합니다. 거짓 메시야들이 일어나서 그들을 미혹합니다. 거짓 메시야는 방황하는 그들을 이용합니다.
둘째로, 난리와 난리의 소문이 있습니다. 9절을 보면 “난리와 소란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 말라 이 일이 먼저 있어야 하되 끝은 곧 되지 아니하니라.”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고 전쟁의 소문이 계속 일어납니다. 지금은 미사일 전쟁, 핵전쟁의 위험에 관한 소문이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두려움을 극복하려고 하나 더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셋째로, 말세의 또 다른 징조는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과 하늘로서 나타나는 징조들입니다. 지금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은 전쟁으로 죽어가는 사람들보다 더 많습니다. 작년만해도 대만과 터키에서 일어난 지진으로 4700명이 죽었습니다. 세계 각지에서 지진이 일어나는 빈도수는 갈수록 증가하고 있습니다. UN 보고서는 2080년에는 지구온난화의 영향으로 빙하 등이 녹아내리면서 해수면이 지금보다 40㎝가량 높아지고 이에 따라 연간 발생하는 수재민이 현재 1300만명에서 9400만명으로 크게 늘어날 것으로 전망했습니다. 기후변화에 따라 물 부족현상이 심각해지고 지구온난화에 따라 말라리아 모기 번식이 늘어나면서 세계에서 연간 2억9000만여명이 말라리아에 감염될 것이라고 이 보고서는 분석했습니다. 지난 한해동안 에이즈와 말라리아 등 예방 가능한 전염성 질병으로 사망한 사람은 1300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국제적십자사연맹은 6월 28일 발간한 ꡐ세계 재해 보고서ꡑ를 통해 이같이 밝히고 “질병으로 인한 사망자수는 지난해 대규모 희생을 낸 터키 지진과 베네수엘라 홍수 등 자연재해로 인한 사망자의 160배가 넘는다ꡓ고 설명했습니다. 보고서에 따르면 1945년이후 전쟁으로 사망한 사람은 2300만명인데 비해 에이즈와 결핵 말라리아 이질 등 전염성 질병으로 사망한 사람은 6.6배 가량인 1억5000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보고서는 또 ꡒ중남부 아프리카 지역에서 에이즈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은 2300만명으로 전세계 감염자의 70%를 차지하고 있으며 매시간마다 300명이 에이즈로 죽고 있다ꡓ고 밝혔습니다. UNDP는 인간개발지수 상하위 그룹 국가들을 둘러싼 ꡐ지구촌의 실상ꡑ도 아울러 발표했는데 이에 따르면 지난 10년 사이에 일어난 전쟁 또는 내전으로 전세계에서 5000만명이 고향을 떠나 떠돌고 있으며 1억명의 어린이가 노숙하거나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지난 10년간 내전 또는 무력분쟁으로 600만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세상의 종말이 멀지 않았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세상에 환란이 많아지면서 제자들은 핍박을 많이 받게 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이 모든 일 전에 내 이름을 인하여 너희에게 손을 대어 핍박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 주며 임금들과 관장들 앞에 끌어가려니와” 신자들에 대한 핍박의 즉각적인 원인은 유다이즘과 로마 황제 숭배에 대한 거부 때문이었습니다. 마지막 때에는 크리스챤들이 그들과 같이 죄 가운데 뛰어들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겨 핍박합니다. 13절을 보면 “이 일이 도리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리라.”고 했습니다. 핍박의 때가 복음을 증거할 수 있는 좋은 기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신자들은 핍박의 때에 무슨 말을 할까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15). 우리는 그의 이름 때문에 미움을 받는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않게 보호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굳게 서야 합니다. 우리는 핍박의 때에 인내해야 합니다. 참는 자에게 구원이 옵니다. 이것은 해산의 고통과 같이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난들은 신자들을 연단하고 세상 죄를 끊게 합니다. 그러나 원수들에게는 죄없는 사람들을 핍박하였기에 심판의 증거가 됩니다.
20-24절은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A.D. 70년 로마 군이 예루살렘을 포위할 때 크리스챤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산으로 도망했습니다. 성내에 있는 자들은 성 밖으로 나갔으며 촌에 있는 자들은 그리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설마 성전을 이방인들에게 내어 주시랴 생각하고 그리고 들어갔습니다. 실제로 예루살렘 성전은 안토니오 요새들로 둘러싸인 최고의 요새였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로마 군들이 예루살렘 성을 포위할 때 성전에 모여서 제사를 드리면서 구원해 주시도록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로마군들이 수로를 막고 성을 포위하여 물자가 공급되지 않아서 굶어죽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심지어 가죽 띠를 뜯어먹고 자식을 잡아 먹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이 파괴될 때 유대인 110만이 죽었고 10만명이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그들은 이후로 거의 2000년 동안 세계의 유랑자들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성전을 보는 시각이 달랐습니다. 제자들은 성전의 화려하고 웅장한 겉 모습을 보고 감탄하였지만 예수님은 그 속의 부패를 보고 멸망을 보셨습니다. 우리는 역사를 어떤 눈으로 보아야 합니까? 이것을 역사관이라고 합니다. 기독교인의 역사관은 한 마디로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의 역사 속에 개입하신다고 믿는 것입니다. 인간의 역사가 결코 사람들만의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역사라고 믿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하나님 없이 제멋대로 혹은 우연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움직이시고, 적어도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범위 속에서 움직인다고 보는 것입니다. 또한 이 세상의 문명이 발달하고 평화가 도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때가 되면 세상의 종말이 오게 됩니다. 우리는 인생에서 무엇을 설계하고 무엇을 위해서 살 것인가를 결정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려면 바른 역사관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미래를 알 수 없다 단정짓고 순간 순간 좋을대로 살기 쉽습니다. 현실의 유익을 따라서 살기 쉽습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예수님이냐 세상이냐 저울질을 하고 눈치를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역사를 주권적으로 이끌어 가심을 믿고 예수님 편에 분명히 서야 합니다. 역사 속에서 나를 발견하고 바른 신앙으로 헌신하며 복음 증거자의 사명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가 악의 세력에게 잠시 고통을 받는다할지라도 결국은 이길 것이기 때문에 인내와 믿음을 포기해서는 안되며, 목숨과 바꿔서라도 지켜야 합니다. 이 세상에 과연 몇 사람이나 박해를 받아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들에게 죽음을 두려워말라고 자신 있게 말할 사람이 있을까요? 성경 저자들의 이런 행동들이 바로 철저한 기독교 역사관에서 나온 것들입니다.
II. 역사의 종말과 인자의 재림 (25-38)
25-28절은 예수님의 재림의 때에 일어날 징조들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25,26절을 보십시오. “일월성신에는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우는 소리를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하리라 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하리니 이는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겠음이라.” 인자의 재림 때는 가장 영광스러운 날이 됩니다. 그때는 만물이 새로워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지고 만유가 회복될 것입니다. 이 날은 온 신자들이 간절히 기다리는 날인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는 태양과 별들과 달등이 다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우는 소리로 인하여 혼란한 중에 불안으로 절망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닥쳐올 일들을 예상하고 무서워 기절할 것입니다. 이는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이 시작되거든 너희는 머리를 들라고 했습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27절을 보십시오. “ 그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춘향이가 어사또가 된 이도령 앞에서 머리를 들 듯이 신자들은 영광스러운 왕으로 오시는 예수님 앞에서 머리를 들어야 합니다. 살전 4:16,17절은 말씀합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이후로 주님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것입니다. 그리고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 노릇 하실 것입니다.
28절을 보십시오.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구속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고난이 더욱 심해지고 천재 지변이 일어날 때에 우리는 두려움으로 움츠러들기보다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운 줄을 알고 그 날을 사모해야 합니다. 우리들은 세상이 어지럽고 난리의 소문과 환난이 온다해도 두려워 말고 오히려 소망 가운데 일어나 머리를 들고 주님의 재림과 영광에 참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말씀하셨습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 세상의 종말이 가까울수록 사람들은 더욱 죄악되고 불법이 성하게 되고 조급해 집니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마지막까지 복음을 전하다고 일대일로 성경을 가르치고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예수님은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운 줄을 알도록 하십니다. 무화과 나무에 싹이 나면 우리가 보고 여름이 가까운 줄을 자연히 알게 됩니다. 이와 같이 재난들이 일어나고 징조들이 나타나는 것을 보면 하나님 나라가 가까운 줄을 알아야 합니다.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이스라엘은 1945년 5월 14일 2000년의 방황을 끝내고 나라를 재건하였습니다. 이것은 중요한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임박해 있습니다. 천지가 없어져도 주님의 말씀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역사의식을 가지고 오늘을 살아야 합니다. 34-36절을 보십시오. “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항상 깨어 있는 비밀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항상 기도할 때 시대의 징조를 알 수 있습니다. 또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이 땅에 소망을 두지 말고 종말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주님의 재림을 소망하는 가운데 맡은 바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종말이 가까워 온다고 논밭 다 팔아서 산 속에 장막 짓고 은둔해 있지 말고 성경 선생이요 목자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열심히 말씀을 가르치고 깨어 기도하는 생활을 하는 것이 말세를 사는 바른 자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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