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마가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제자 양성 제 1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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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제자 양성 제 1 강
예수님의 제자들과 택하신 목적
말씀/ 마가복음 1-3장
요절/ 마가복음 3:14,15 "이에 열 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
제자 양성 역사는 예수님의 복음 사역 중에서 노른자위와 같이 중요하고도 위대한 사역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 만일 제자 양성을 하지 않으셨다면 복음 역사는 단절되고 이루어 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 양성을 통하여 복음 역사는 계승 발전되어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이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 양성은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마가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들을 부르시고 인류 구속 역사의 주인공으로 양육하신 과정이 그 어떤 복음서보다도 뚜렷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은 진흙과 같은 자를 빚으사 복음의 일군이 되게 하시는 가장 위대한 제자 양성가이십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을 배우고 본 받아서 이 시대에 빼어난 제자 양성가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1 강은 예수님께서 어떤 자들을 그의 제자로 택하셨으며 또 그 택하신 목적이 무엇인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Ⅰ. 예수님의 제자들(1:16-20)
예수님의 12제자들은 부르심을 받은 순서대로 하면 세 부류로 나누어집니다.
(ⅰ) 첫 번 제자들(1:16-20)
예수님은 복음 역사의 시작부터 제자들을 부르시고 제자 양성을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제자 양성이 단순히 시대적인 요청이나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 가운데 이루어진 하나님의 뜻임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은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40일간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신 후 갈릴리로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셨습니다. "때가 찾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1:15)" 그 후 예수님은 갈릴리 해변을 지나가시다가 바다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를 보시고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또 조금 더 가시다가 배에서 그물을 깁고 있는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고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첫 번 제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어떤 자들입니까? 당시 어부의 직업은 오늘날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어부의 직업과는 달리 보편적이었습니다. 갈릴리 해변에 위치한 동네는 대부분 생계 유지 수단으로 어업에 종사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천민도 아니요 그렇다고 상류층의 사람도 아닌 소위 보통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권세도 없고 부도 없고 사회적인 지위도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아무 배경이 없었습니다. 또한 그들에게는 확고한 사명도 없고 원대한 꿈이나 희망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먼저 먹고 살기 위해 매일 무의미하게 바닷가에서 고기를 잡아야 하는 평범한 생활인에 불과했습니다. 오늘날로 말한다면 소시민적인 꿈을 가지고 도서관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평범한 대학생들과 같습니다. 또 그들은 당시 사회적으로 무시받는 갈릴리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인간적으로 볼 때 영적 지도자가 되기에 합당치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그들을 제자로 부르신 것은 당시 랍비들이나 성현들이 제자를 뽑는 기준과는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플라톤의 아카데미아의 학원 입구에는 "기하학을 모르는 자는 들어오지 말라"는 문구가 쓰여져 있었습니다. 랍비들은 엄격한 테스트를 하여 합격을 해야 그 문하생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일반적으로 인간 기초가 잘 되어 있고 쓸모 있는 자를 제자로 뽑고자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경우는 전혀 달랐습니다. 예수님의 첫 번 제자들은 세상에서 약하고 미련하고 멸시받고 천한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자들을 택하신 이유는 세상의 강하고 지혜있는 자들과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었습니다(고전 1:27-29). 또한 예수님의 부르심이 인간 행위나 업적에 있지 않고 온전히 은혜에 기초한 것임을 알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날도 비천한 한국의 젊은이들을 예수님의 제자로 택하신 것은 온전히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은혜로 택하신 자들은 어떤 자들입니까? 이들은 부족할지라도 키우기만 하면 무한히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청년들이었습니다. 어떤 점에서 그렇습니까?
첫째로, 그들은 열심히 일하는 성실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부르심을 받을 때 자기 일에 충실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할 일이 없어서 빈둥 빈둥 노는 놈팽이들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노는 자들을 부르시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 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오늘날도 예수님은 도서관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자들을 그의 제자로 부르십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기본적으로 성실해야 합니다.
둘째로, 그들은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부르실 때 교만하게 반발하거나 튕기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즉시 응답했습니다. 이는 그들에게 겸손하게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음을 말해줍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닫힌 마음이 아니라 예수님을 향하여 마음이 열려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가장 기본적인 요건은 겸손히 배우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셋째로, 그들에게는 참된 용기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여러 가지 현실 문제로 인하여 주저하거나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혼자서 생각을 정리하겠다고 하면서 결단을 미루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즉시 배와 그물과 아비를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진리를 좇기 위해서 어떤 희생도 불사하는 참된 용기가 있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좋지만 현실적으로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또는 가정 문제 때문에 주저하거나 포기합니다. 겁쟁이들은 결코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어떤 희생도 불사하는 참된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ⅱ) 세리 레위(2:14)
예수님은 중풍 병자를 일으키심으로 사죄의 권세자이심을 선포하신 후 다시 바닷가로 나가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 후 예수님은 길을 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좇으라" 하심으로 그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레위는 세리로서 공인된 죄인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민족을 배반한 자였습니다. 그는 매국노요 자기만을 위해 사는 이기주의자로 낙인이 찍힌 자였습니다. 그는 사람들로부터 소외된 몹쓸 죄인이었습니다. 이런 자를 제자로 부르신 것은 가히 혁명적인 일이었습니다. 이는 사람들의 비난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의 비난에 조금도 개의치 않으시고 그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로, 한 병든 영혼을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크신 구속의 사랑 때문입니다. 레위는 능력이 많지만 그 능력을 자기만을 위해 쓰다가 내면이 깊이 병든 죄인입니다. 그는 상한 갈대와 같고 꺼져가는 심지와 같은 자였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겉모습만 보고 그를 정죄하고 소망을 끊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겉모습보다 그 내면의 고통을 보셨습니다. 그의 병든 내면을 치료하기만 하면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될 가능성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소망을 두시고 그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하사 양육하시며 그의 병든 내면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런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예수님은 영적 의사로서 죄로 인해 병든 영혼을 불쌍히 여기시고 치료하사 성 마태가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실로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제자 양성은 결코 사업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는 죄로 병든 한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데서 시작됩니다. 제자 양성은 어머니가 자식을 돌보듯이 사랑의 관계성을 맺는데서 시작됩니다. 제자 양성은 쓸모없는 자를 살려내어 소망 가운데 쓸모있는 자로 키우는 것입니다.
둘째로, 그 족속의 목자로 삼고자 하심입니다. 과부 사정은 과부만이 안다는 속담과 같이 세리 족속은 세리 출신 외에는 아무도 깊이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세리 레위를 키우사 세리 족속을 품고 섬기는 목자로 쓰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리 레위와 같은 죄인을 제자로 부르신 사건은 어떤 몹쓸 죄인도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줍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 때문에 절망하고 또 과거의 경력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자포자기해 버립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서는 과거의 경력이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쳐나듯이 과거의 경력이 주님의 구속의 사랑을 더 깊이 체험할 수 있게 합니다.
2:18-22절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새 부대들임을 말해 줍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심각한 얼굴을 하고 금식하고 있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연일 먹고 마시며 잔치를 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이 와서 예수님께 따져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때 신랑 비유와 생베 조각과 새 포도주 비유로 설명해 주셨습니다. 이는 새 것은 낡은 것과 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기성 종교 지도자들은 겉으로 볼 때는 율법도 잘 지키고 금식도 잘하고 매너도 좋아서 훌륭한 제자감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기존 전통과 문화 속에 얽매여 낡은 가죽 부대와 같이 굳어버린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의가 강하여 배우는 마음이 없었으며 성장할 가능성이 없었습니다. 반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인간적으로 볼 때 별 내세울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학문도 없고 사회적인 지위나 권세도 없었습니다. 또 율법을 잘 지킨다거나 매너가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한없이 부족하지만 겸손히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생각에 유연성과 신축성이 있어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을 수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키우기만 하면 위대한 사도들이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ⅲ) 자기의 원하는 자들(3:13)
3:1-12절은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들을 세우사 예수님의 공동체를 형성하시는 직접적인 동기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당시 영적 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은 심령이 부패해 있었습니다. 그들은 양무리의 목자임에도 불구하고 양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도움이 필요한 한 어린 양을 이용하여 예수님을 고소하고자 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근심하시고 분노하셨습니다. 또 많은 무리들은 육신의 질병과 더러운 귀신에 들려 정신적으로 고통하며 목자없는 양같이 유리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그 시대는 한 마디로 양무리들을 돌볼 목자를 절실히 요청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양성은 하나님의 뜻임과 동시에 그 시대의 요청이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상한 심정을 안고 산에 오르사 밤새도록 기도하신 후 밝으매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셨습니다(13, 눅 6:12,13). 그리고 열 둘을 세우사 그들을 사도로 임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실 때 객관적인 기준을 내세워 시험을 보신 것이 아니라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자기의 원하는 자들이란 공동 번역에 보면 '마음에 두었던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을 섬기면서 몇몇 사람들을 사도로 키우고자 마음먹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볼 때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부르심은 일방적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원해서 제자가 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원하셨기 때문에 선택하시고 부르신 것입니다. 이는 부르심이 인간에게 있지 않고 예수님의 주권에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은 자격이 있어서 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원하셨기 때문에 된 것입니다. 이는 순전히 주님의 일방적인 은혜입니다. 부르심이 주님의 주권에 기초한 것이기 때문에 이는 어떤 경우에나 변개할 수 없습니다. 내가 비록 실수하고 죄를 범할지라도 이 부르심은 결코 취소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날도 그 주권대로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그의 제자로 부르십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택하사 우리에게 보내 주십니다. 이런 자들은 때로 비리 못난 자로서 내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키가 크고 얼굴이 잘 생기고 인간 기초가 있는 자들을 제자로 키우고 싶은데 주님께서는 인간 기초가 전혀 없고 죄로 인해 내면이 깊이 병든 자들을 보내 주십니다. 이때 우리는 내 마음에는 들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자들을 영접하고 귀히 여기며 키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실 때 그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3:13b절을 보십시오.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그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겸손히 응답했습니다. 시몬과 안드레는 이미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으며 야고보와 요한은 아비 세베데를 배에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1:18,20). 레위는 세리직을 버리고 즉시 일어나 좇았습니다(2:14). 그들은 모두 예수님께서 부르실 때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즉시 기쁨으로 부르심에 응답하였습니다. 그들은 믿음의 결단이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를 수 있었던 것은 그 부르심은 하나님의 아들의 부르심으로 불가항력적인 신적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부르심은 세상의 그 어떤 일과도 비교할 수 없는 절대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기본적이고도 가장 중요한 문제는 부르심입니다. 부르심이 없는 자는 핍박이나 유혹이 밀려오거나 어려운 일에 부딪치면 넘어지고 맙니다. 그러나 부르심이 분명한 자는 어떤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고 오히려 더 견고히 뿌리를 내리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고자 할 때 사람이나 단체가 시켜서 목자나 선교사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절대적인 주권과 섭리 가운데서 나를 부르셨다는 분명한 소명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부르심은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을 살펴 볼 때 그들은 각자 개성이 뚜렷합니다. 시몬 베드로는 큰 소리를 잘치는 사람으로서 입이 크고 강한 것 같으면서도 약합니다. 요한은 조용하지만 때로는 불같으며 약한 것 같으면서도 강합니다. 야고보는 인간적인 야심이 강하고 한번 물면 절대로 놓치지 않는 불개미 정신이 있습니다. 안드레는 단순하면서도 도전적이고 빌립은 복잡하면서도 부정적입니다. 세리 마태는 이기적이고 도마는 앉으나 서나 의심하는 자입니다. 또 바돌로매는 사색적이고 열혈당 시몬은 행동이 앞서는 사람입니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는 순진한 자요 반면 가룟 유다는 기회주의자입니다. 예수님은 제자 양성하신다고 그들의 개성을 무시하고 일률적으로 키우지 아니하셨습니다. 각자의 개성을 인정하시고 그 개성대로 키우셨습니다. 이는 그 족속의 목자로 삼고자 하심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열 두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만민 구속 역사를 위해 왜 많은 사람을 택하시지 않고 열 둘 만을 택하셨을까요?
첫째로, 이는 새 이스라엘을 세우고자 함이었습니다. 십이는 완전수요 온 이스라엘을 나타내고 더 나아가 모든 족속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열 두 제자들을 부르사 새 이스라엘을 건설하시고 이들을 통해 만민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원대한 계획을 가지셨습니다.
둘째로, 소수 정예를 양성코자 하셨습니다. 열 둘이라는 수는 세상 만민을 구원하기에는 너무 적은 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수의 많고 적음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이는 얼마나 하나님께서 쓰실 만한 빼어난 영적 지도자가 있는가 없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위대한 장군 한 사람은 수만의 병사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귀합니다. 예수님은 열 두명의 소수를 양성하셨지만 그들을 인류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은 위대한 사도들로 키우셨습니다. 저희 UBF 역사는 소수 정예를 키우는 제자 양성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숫자에 대한 욕심 때문에 한꺼번에 많은 사람을 키우고자 하다가 실패를 잘 합니다. 우리가 욕심을 부인하고 소수 정예를 양성할 때 위대한 역사를 창조할 수 있습니다.
3:31-35절에는 예수님께서 부르신 제자들을 가족으로 삼으신 내용입니다. 이는 예수님과 제자의 관계가 사무적인 관계가 아니라 아버지와 자식과 같이 예수님의 피로 맺어진 관계임을 말해줍니다. 또한 의리나 지연으로 맺어진 인간적인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중심으로 맺어진 영적인 관계임을 말해 줍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제자 양성은 하나님의 뜻을 중심으로 가족적인 분위기 속에서 시작되었습니다.
Ⅱ. 택하신 목적
3:14,15절에는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들을 택하신 목적이 분명히 명시되어 있습니다. 제자 양성을 하는데 있어서 목적을 분명히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목적이 분명하지 아니할 때 방향을 잃고 헤매게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택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첫째, 예수님을 배우는 자(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실 때 "나를 따라 오너라(1:17)", "나를 좇으라(2:14)"고 하셨습니다. 이는 세상을 향해 있던 그들의 마음을 예수님께로 돌리는 인생의 큰 방향 전환입니다. 또한 자기를 중심한 생활에서 예수님을 중심한 생활로 바꾸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을 수단으로 삼지 않고 목적으로 삼고 예수님 자체를 배우는 생활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인격과 목자의 심정과 사상과 그의 십자가와 부활 등 예수님 전부를 배우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아 작은 예수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예수님으로부터 지식이나 기술이나 사상을 전수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예수님의 심정을 배워서 예수님을 본받고 닮아 나가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점점 성숙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되 부분적으로가 아니라 생활의 전부로서 따르도록 자기와 함께 있게 하셨습니다(3:14). 다시 말하자면 제자들과 공동 생활을 하셨습니다. 이것은 말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거룩하신 하나님이요 제자들은 냄새나는 죄인들입니다. 예수님은 성육신하사 그들의 문제에 동참하시고 종의 모습이 되사 그들을 섬기신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임한 은혜 중의 은혜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제자들을 자기와 함께 있게 하셨을까요? 이는 24시간 그들과 함께 있어 양육하시고 그들의 병든 내면을 치료하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렇게 해야 그들에게 산 교육이 될 수 있고 더 나아가 그들을 세상의 악 영향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거하는 가운데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실제 상황에서 체험적으로 배우기를 원하셨습니다. 제자들이 후에 무리들과 달리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함께 한 생활 때문이었습니다(8:29).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은 개인적인 말씀 공부나 일용할 양식을 먹는 시간이나 기도 시간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 시간을 통해서 예수님과 인격적인 사귐을 가질 수 있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제자 양성을 하고자 할 때 예수님과 같이 제자들과 함께 있는 시간을 많이 가져야 함을 배웁니다. 우리는 일대일 말씀 공부 시간 뿐만 아니라 식사할 때, 심방할 때, 또 때로는 축구나 농구와 같은 운동을 함으로서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모양으로든지 함께 할 때 인격과 인격이 맞부딪히는 산 교육이 될 수 있습니다.
둘째, 전도자(보내사 전도도 하며)
예수님은 첫 번째 제자들을 부르실 때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1:17)"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열 두 제자들을 부르실 때는 보내사 전도도 하게 하심이었습니다(3:14b).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택하신 목적은 그들을 사람 낚는 사명인으로 삼고자 하심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전도인으로 삼고자 하심이었습니다. 전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람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자입니다. 전도인은 죄와 사망의 바다에서 구원하는 자입니다. 고기 낚는 어부가 고기에 깊은 관심을 가지듯이 사람낚는 어부는 사람의 영혼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사람들은 영적으로 무지합니다. 인생의 목적과 의미를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심으로 영적인 세계를 알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예수님과 같이 말씀을 가르치는 성경 선생으로 키우셨습니다.
셋째, 영적 권세자(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택하신 세 번째 목적은 양들을 사로잡고 있는 악령의 세력을 파할 수 있는 영적 권세자로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인간을 괴롭히고 못쓰게 만드는 것은 인간이나 사회 제도나 환경이 아니라 사단입니다. 귀신이 거라사인의 마음에 들어갔을 때 밤낮 무덤이나 산에서 소리를 지르며 자기 몸을 상하게 했습니다(막5:5). 사단은 우리를 두렵게 하고 불안하게 하고 쉼이 없게 합니다. 사단은 우리를 정욕의 노예가 되게 하고 시기심과 미움의 노예가 되게 합니다. 이러한 사단의 세력을 파하기 위해서는 위로부터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위로부터 성령의 능력을 덧입고 악령의 세력을 물리치는 영적 권세자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그들이 기도의 사람이요 겸손하게 성령을 의지하는 영적인 사람으로 키우셨습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부족한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들에게 큰 소원을 두고 키우셨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배우는 좋은 제자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성경 선생이요 악령의 세력과 싸우는 영적인 권세자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날도 우리를 그의 제자로 부르시고 큰 소원을 두고 키우십니다. 예수님은 가장 위대한 제자 양성가이십니다. 우리를 이 시대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시고 제자 양성가로 키우시는 주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택하신 목적
말씀/ 마가복음 1-3장
요절/ 마가복음 3:14,15 "이에 열 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
제자 양성 역사는 예수님의 복음 사역 중에서 노른자위와 같이 중요하고도 위대한 사역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 만일 제자 양성을 하지 않으셨다면 복음 역사는 단절되고 이루어 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 양성을 통하여 복음 역사는 계승 발전되어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이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 양성은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마가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들을 부르시고 인류 구속 역사의 주인공으로 양육하신 과정이 그 어떤 복음서보다도 뚜렷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은 진흙과 같은 자를 빚으사 복음의 일군이 되게 하시는 가장 위대한 제자 양성가이십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을 배우고 본 받아서 이 시대에 빼어난 제자 양성가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1 강은 예수님께서 어떤 자들을 그의 제자로 택하셨으며 또 그 택하신 목적이 무엇인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Ⅰ. 예수님의 제자들(1:16-20)
예수님의 12제자들은 부르심을 받은 순서대로 하면 세 부류로 나누어집니다.
(ⅰ) 첫 번 제자들(1:16-20)
예수님은 복음 역사의 시작부터 제자들을 부르시고 제자 양성을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제자 양성이 단순히 시대적인 요청이나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 가운데 이루어진 하나님의 뜻임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은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40일간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신 후 갈릴리로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셨습니다. "때가 찾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1:15)" 그 후 예수님은 갈릴리 해변을 지나가시다가 바다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를 보시고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또 조금 더 가시다가 배에서 그물을 깁고 있는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고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첫 번 제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어떤 자들입니까? 당시 어부의 직업은 오늘날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어부의 직업과는 달리 보편적이었습니다. 갈릴리 해변에 위치한 동네는 대부분 생계 유지 수단으로 어업에 종사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천민도 아니요 그렇다고 상류층의 사람도 아닌 소위 보통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권세도 없고 부도 없고 사회적인 지위도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아무 배경이 없었습니다. 또한 그들에게는 확고한 사명도 없고 원대한 꿈이나 희망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먼저 먹고 살기 위해 매일 무의미하게 바닷가에서 고기를 잡아야 하는 평범한 생활인에 불과했습니다. 오늘날로 말한다면 소시민적인 꿈을 가지고 도서관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평범한 대학생들과 같습니다. 또 그들은 당시 사회적으로 무시받는 갈릴리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인간적으로 볼 때 영적 지도자가 되기에 합당치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그들을 제자로 부르신 것은 당시 랍비들이나 성현들이 제자를 뽑는 기준과는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플라톤의 아카데미아의 학원 입구에는 "기하학을 모르는 자는 들어오지 말라"는 문구가 쓰여져 있었습니다. 랍비들은 엄격한 테스트를 하여 합격을 해야 그 문하생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일반적으로 인간 기초가 잘 되어 있고 쓸모 있는 자를 제자로 뽑고자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경우는 전혀 달랐습니다. 예수님의 첫 번 제자들은 세상에서 약하고 미련하고 멸시받고 천한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자들을 택하신 이유는 세상의 강하고 지혜있는 자들과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었습니다(고전 1:27-29). 또한 예수님의 부르심이 인간 행위나 업적에 있지 않고 온전히 은혜에 기초한 것임을 알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날도 비천한 한국의 젊은이들을 예수님의 제자로 택하신 것은 온전히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은혜로 택하신 자들은 어떤 자들입니까? 이들은 부족할지라도 키우기만 하면 무한히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청년들이었습니다. 어떤 점에서 그렇습니까?
첫째로, 그들은 열심히 일하는 성실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부르심을 받을 때 자기 일에 충실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할 일이 없어서 빈둥 빈둥 노는 놈팽이들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노는 자들을 부르시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 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오늘날도 예수님은 도서관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자들을 그의 제자로 부르십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기본적으로 성실해야 합니다.
둘째로, 그들은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부르실 때 교만하게 반발하거나 튕기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즉시 응답했습니다. 이는 그들에게 겸손하게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음을 말해줍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닫힌 마음이 아니라 예수님을 향하여 마음이 열려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가장 기본적인 요건은 겸손히 배우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셋째로, 그들에게는 참된 용기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여러 가지 현실 문제로 인하여 주저하거나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혼자서 생각을 정리하겠다고 하면서 결단을 미루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즉시 배와 그물과 아비를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진리를 좇기 위해서 어떤 희생도 불사하는 참된 용기가 있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좋지만 현실적으로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또는 가정 문제 때문에 주저하거나 포기합니다. 겁쟁이들은 결코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어떤 희생도 불사하는 참된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ⅱ) 세리 레위(2:14)
예수님은 중풍 병자를 일으키심으로 사죄의 권세자이심을 선포하신 후 다시 바닷가로 나가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 후 예수님은 길을 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좇으라" 하심으로 그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레위는 세리로서 공인된 죄인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민족을 배반한 자였습니다. 그는 매국노요 자기만을 위해 사는 이기주의자로 낙인이 찍힌 자였습니다. 그는 사람들로부터 소외된 몹쓸 죄인이었습니다. 이런 자를 제자로 부르신 것은 가히 혁명적인 일이었습니다. 이는 사람들의 비난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의 비난에 조금도 개의치 않으시고 그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로, 한 병든 영혼을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크신 구속의 사랑 때문입니다. 레위는 능력이 많지만 그 능력을 자기만을 위해 쓰다가 내면이 깊이 병든 죄인입니다. 그는 상한 갈대와 같고 꺼져가는 심지와 같은 자였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겉모습만 보고 그를 정죄하고 소망을 끊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겉모습보다 그 내면의 고통을 보셨습니다. 그의 병든 내면을 치료하기만 하면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될 가능성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소망을 두시고 그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하사 양육하시며 그의 병든 내면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런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예수님은 영적 의사로서 죄로 인해 병든 영혼을 불쌍히 여기시고 치료하사 성 마태가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실로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제자 양성은 결코 사업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는 죄로 병든 한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데서 시작됩니다. 제자 양성은 어머니가 자식을 돌보듯이 사랑의 관계성을 맺는데서 시작됩니다. 제자 양성은 쓸모없는 자를 살려내어 소망 가운데 쓸모있는 자로 키우는 것입니다.
둘째로, 그 족속의 목자로 삼고자 하심입니다. 과부 사정은 과부만이 안다는 속담과 같이 세리 족속은 세리 출신 외에는 아무도 깊이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세리 레위를 키우사 세리 족속을 품고 섬기는 목자로 쓰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리 레위와 같은 죄인을 제자로 부르신 사건은 어떤 몹쓸 죄인도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줍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 때문에 절망하고 또 과거의 경력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자포자기해 버립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서는 과거의 경력이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쳐나듯이 과거의 경력이 주님의 구속의 사랑을 더 깊이 체험할 수 있게 합니다.
2:18-22절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새 부대들임을 말해 줍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심각한 얼굴을 하고 금식하고 있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연일 먹고 마시며 잔치를 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이 와서 예수님께 따져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때 신랑 비유와 생베 조각과 새 포도주 비유로 설명해 주셨습니다. 이는 새 것은 낡은 것과 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기성 종교 지도자들은 겉으로 볼 때는 율법도 잘 지키고 금식도 잘하고 매너도 좋아서 훌륭한 제자감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기존 전통과 문화 속에 얽매여 낡은 가죽 부대와 같이 굳어버린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의가 강하여 배우는 마음이 없었으며 성장할 가능성이 없었습니다. 반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인간적으로 볼 때 별 내세울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학문도 없고 사회적인 지위나 권세도 없었습니다. 또 율법을 잘 지킨다거나 매너가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한없이 부족하지만 겸손히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생각에 유연성과 신축성이 있어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을 수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키우기만 하면 위대한 사도들이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ⅲ) 자기의 원하는 자들(3:13)
3:1-12절은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들을 세우사 예수님의 공동체를 형성하시는 직접적인 동기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당시 영적 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은 심령이 부패해 있었습니다. 그들은 양무리의 목자임에도 불구하고 양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도움이 필요한 한 어린 양을 이용하여 예수님을 고소하고자 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근심하시고 분노하셨습니다. 또 많은 무리들은 육신의 질병과 더러운 귀신에 들려 정신적으로 고통하며 목자없는 양같이 유리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그 시대는 한 마디로 양무리들을 돌볼 목자를 절실히 요청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양성은 하나님의 뜻임과 동시에 그 시대의 요청이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상한 심정을 안고 산에 오르사 밤새도록 기도하신 후 밝으매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셨습니다(13, 눅 6:12,13). 그리고 열 둘을 세우사 그들을 사도로 임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실 때 객관적인 기준을 내세워 시험을 보신 것이 아니라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자기의 원하는 자들이란 공동 번역에 보면 '마음에 두었던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을 섬기면서 몇몇 사람들을 사도로 키우고자 마음먹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볼 때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부르심은 일방적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원해서 제자가 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원하셨기 때문에 선택하시고 부르신 것입니다. 이는 부르심이 인간에게 있지 않고 예수님의 주권에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은 자격이 있어서 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원하셨기 때문에 된 것입니다. 이는 순전히 주님의 일방적인 은혜입니다. 부르심이 주님의 주권에 기초한 것이기 때문에 이는 어떤 경우에나 변개할 수 없습니다. 내가 비록 실수하고 죄를 범할지라도 이 부르심은 결코 취소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날도 그 주권대로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그의 제자로 부르십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택하사 우리에게 보내 주십니다. 이런 자들은 때로 비리 못난 자로서 내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키가 크고 얼굴이 잘 생기고 인간 기초가 있는 자들을 제자로 키우고 싶은데 주님께서는 인간 기초가 전혀 없고 죄로 인해 내면이 깊이 병든 자들을 보내 주십니다. 이때 우리는 내 마음에는 들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자들을 영접하고 귀히 여기며 키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실 때 그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3:13b절을 보십시오.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그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겸손히 응답했습니다. 시몬과 안드레는 이미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으며 야고보와 요한은 아비 세베데를 배에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1:18,20). 레위는 세리직을 버리고 즉시 일어나 좇았습니다(2:14). 그들은 모두 예수님께서 부르실 때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즉시 기쁨으로 부르심에 응답하였습니다. 그들은 믿음의 결단이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를 수 있었던 것은 그 부르심은 하나님의 아들의 부르심으로 불가항력적인 신적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부르심은 세상의 그 어떤 일과도 비교할 수 없는 절대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기본적이고도 가장 중요한 문제는 부르심입니다. 부르심이 없는 자는 핍박이나 유혹이 밀려오거나 어려운 일에 부딪치면 넘어지고 맙니다. 그러나 부르심이 분명한 자는 어떤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고 오히려 더 견고히 뿌리를 내리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고자 할 때 사람이나 단체가 시켜서 목자나 선교사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절대적인 주권과 섭리 가운데서 나를 부르셨다는 분명한 소명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부르심은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을 살펴 볼 때 그들은 각자 개성이 뚜렷합니다. 시몬 베드로는 큰 소리를 잘치는 사람으로서 입이 크고 강한 것 같으면서도 약합니다. 요한은 조용하지만 때로는 불같으며 약한 것 같으면서도 강합니다. 야고보는 인간적인 야심이 강하고 한번 물면 절대로 놓치지 않는 불개미 정신이 있습니다. 안드레는 단순하면서도 도전적이고 빌립은 복잡하면서도 부정적입니다. 세리 마태는 이기적이고 도마는 앉으나 서나 의심하는 자입니다. 또 바돌로매는 사색적이고 열혈당 시몬은 행동이 앞서는 사람입니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는 순진한 자요 반면 가룟 유다는 기회주의자입니다. 예수님은 제자 양성하신다고 그들의 개성을 무시하고 일률적으로 키우지 아니하셨습니다. 각자의 개성을 인정하시고 그 개성대로 키우셨습니다. 이는 그 족속의 목자로 삼고자 하심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열 두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만민 구속 역사를 위해 왜 많은 사람을 택하시지 않고 열 둘 만을 택하셨을까요?
첫째로, 이는 새 이스라엘을 세우고자 함이었습니다. 십이는 완전수요 온 이스라엘을 나타내고 더 나아가 모든 족속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열 두 제자들을 부르사 새 이스라엘을 건설하시고 이들을 통해 만민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원대한 계획을 가지셨습니다.
둘째로, 소수 정예를 양성코자 하셨습니다. 열 둘이라는 수는 세상 만민을 구원하기에는 너무 적은 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수의 많고 적음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이는 얼마나 하나님께서 쓰실 만한 빼어난 영적 지도자가 있는가 없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위대한 장군 한 사람은 수만의 병사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귀합니다. 예수님은 열 두명의 소수를 양성하셨지만 그들을 인류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은 위대한 사도들로 키우셨습니다. 저희 UBF 역사는 소수 정예를 키우는 제자 양성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숫자에 대한 욕심 때문에 한꺼번에 많은 사람을 키우고자 하다가 실패를 잘 합니다. 우리가 욕심을 부인하고 소수 정예를 양성할 때 위대한 역사를 창조할 수 있습니다.
3:31-35절에는 예수님께서 부르신 제자들을 가족으로 삼으신 내용입니다. 이는 예수님과 제자의 관계가 사무적인 관계가 아니라 아버지와 자식과 같이 예수님의 피로 맺어진 관계임을 말해줍니다. 또한 의리나 지연으로 맺어진 인간적인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중심으로 맺어진 영적인 관계임을 말해 줍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제자 양성은 하나님의 뜻을 중심으로 가족적인 분위기 속에서 시작되었습니다.
Ⅱ. 택하신 목적
3:14,15절에는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들을 택하신 목적이 분명히 명시되어 있습니다. 제자 양성을 하는데 있어서 목적을 분명히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목적이 분명하지 아니할 때 방향을 잃고 헤매게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택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첫째, 예수님을 배우는 자(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실 때 "나를 따라 오너라(1:17)", "나를 좇으라(2:14)"고 하셨습니다. 이는 세상을 향해 있던 그들의 마음을 예수님께로 돌리는 인생의 큰 방향 전환입니다. 또한 자기를 중심한 생활에서 예수님을 중심한 생활로 바꾸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을 수단으로 삼지 않고 목적으로 삼고 예수님 자체를 배우는 생활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인격과 목자의 심정과 사상과 그의 십자가와 부활 등 예수님 전부를 배우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아 작은 예수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예수님으로부터 지식이나 기술이나 사상을 전수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예수님의 심정을 배워서 예수님을 본받고 닮아 나가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점점 성숙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되 부분적으로가 아니라 생활의 전부로서 따르도록 자기와 함께 있게 하셨습니다(3:14). 다시 말하자면 제자들과 공동 생활을 하셨습니다. 이것은 말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거룩하신 하나님이요 제자들은 냄새나는 죄인들입니다. 예수님은 성육신하사 그들의 문제에 동참하시고 종의 모습이 되사 그들을 섬기신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임한 은혜 중의 은혜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제자들을 자기와 함께 있게 하셨을까요? 이는 24시간 그들과 함께 있어 양육하시고 그들의 병든 내면을 치료하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렇게 해야 그들에게 산 교육이 될 수 있고 더 나아가 그들을 세상의 악 영향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거하는 가운데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실제 상황에서 체험적으로 배우기를 원하셨습니다. 제자들이 후에 무리들과 달리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함께 한 생활 때문이었습니다(8:29).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은 개인적인 말씀 공부나 일용할 양식을 먹는 시간이나 기도 시간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 시간을 통해서 예수님과 인격적인 사귐을 가질 수 있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제자 양성을 하고자 할 때 예수님과 같이 제자들과 함께 있는 시간을 많이 가져야 함을 배웁니다. 우리는 일대일 말씀 공부 시간 뿐만 아니라 식사할 때, 심방할 때, 또 때로는 축구나 농구와 같은 운동을 함으로서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모양으로든지 함께 할 때 인격과 인격이 맞부딪히는 산 교육이 될 수 있습니다.
둘째, 전도자(보내사 전도도 하며)
예수님은 첫 번째 제자들을 부르실 때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1:17)"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열 두 제자들을 부르실 때는 보내사 전도도 하게 하심이었습니다(3:14b).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택하신 목적은 그들을 사람 낚는 사명인으로 삼고자 하심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전도인으로 삼고자 하심이었습니다. 전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람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자입니다. 전도인은 죄와 사망의 바다에서 구원하는 자입니다. 고기 낚는 어부가 고기에 깊은 관심을 가지듯이 사람낚는 어부는 사람의 영혼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사람들은 영적으로 무지합니다. 인생의 목적과 의미를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심으로 영적인 세계를 알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예수님과 같이 말씀을 가르치는 성경 선생으로 키우셨습니다.
셋째, 영적 권세자(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택하신 세 번째 목적은 양들을 사로잡고 있는 악령의 세력을 파할 수 있는 영적 권세자로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인간을 괴롭히고 못쓰게 만드는 것은 인간이나 사회 제도나 환경이 아니라 사단입니다. 귀신이 거라사인의 마음에 들어갔을 때 밤낮 무덤이나 산에서 소리를 지르며 자기 몸을 상하게 했습니다(막5:5). 사단은 우리를 두렵게 하고 불안하게 하고 쉼이 없게 합니다. 사단은 우리를 정욕의 노예가 되게 하고 시기심과 미움의 노예가 되게 합니다. 이러한 사단의 세력을 파하기 위해서는 위로부터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위로부터 성령의 능력을 덧입고 악령의 세력을 물리치는 영적 권세자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그들이 기도의 사람이요 겸손하게 성령을 의지하는 영적인 사람으로 키우셨습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부족한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들에게 큰 소원을 두고 키우셨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배우는 좋은 제자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성경 선생이요 악령의 세력과 싸우는 영적인 권세자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날도 우리를 그의 제자로 부르시고 큰 소원을 두고 키우십니다. 예수님은 가장 위대한 제자 양성가이십니다. 우리를 이 시대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시고 제자 양성가로 키우시는 주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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