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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특강 2002년 신년 메시지 에스겔 제 2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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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섬김이
댓글 0건 조회 3,837회 작성일 03-01-17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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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신년 메시지 에스겔 제 2강                                                                                       
말씀 / 에스겔 3:4-27
요절 / 에스겔 3:17

내가 너를 파수꾼으로 세웠노라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에스겔 선지자는 어려운 시대에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나라는 망하고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 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그발 강가에서 친히 영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영광은 사면으로 무지개 빛 광채가 나고 단 쇠 같이 희게 빛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셔서 여전히 세상 만민을 주관하고 계셨습니다. 또 포로된 백성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에스겔에게 말씀을 주셔서 받아 먹도록 하시고 사명을 감당할 준비를 시키셨습니다.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서 그가 해야 할 일은 백성들을 깨우쳐서 그 악한 마음과 행위에서 돌이키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캠퍼스의 파수꾼으로 불러 세우셨습니다. 이 시간 파수꾼으로의 부르심과 파수꾼의 특권과 책임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에스겔 당시 이스라엘의 형편(4-11)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내시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들에게 고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를 방언이 다르거나 말이 어려운 백성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내는 것 입니다. 이스라엘 족속은 같은 말을 쓰고 같은 문화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는 감정까지도 그대로 전달할 수 있습니다. 선교사들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할 때 어려운 문제 중 하나는 바로 언어 문제입니다. 몇 년씩 언어를 공부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권세있게 전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영적 형편이 어떠하다고 하십니까? 6,7절을 보십시오. “너를 방언이 다르거나 말이 어려워 네가 알아듣지 못할 열국에 보내는 것이 아니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내었더면 그들은 정녕 네 말을 들었으리라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강퍅하여 네 말을 듣고자 아니하리니 이는 내 말을 듣고자 아니함이니라.”이스라엘 백성들은 불신자인 이방인보다도 더 영적으로 좋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의 말을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 니느웨와 같은 이방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통회 자복하고 돌아올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강퍅하여 네 말을 듣고자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왜 그들의 마음이 이렇게 강퍅해졌을까요?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에스겔이 잡혀온 것은 2차 포로 때였습니다. 에스겔은 예레미야를 통해서 주신 말씀을 받아들이고 심판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지금이 BC593년인데 아직 예루살렘은 망하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다가 망하지 않을 것이고 자신들은 곧 돌아갈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들은 거짓 선지자들의 말을 믿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7년 뒤인 BC586년에는 망하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들은 아직도 믿는 구석이 있을 때 회개하지 않습니다. 깨져도 팍 깨져야, 소망이 없어져야, 그때서야 하나님께 돌아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때까지 기다리십니다. 비록 고통스럽지만 기다리십니다. 또한 사람들은 자기가 바라는 것이 쉽게 성취되지 않으면 하나님을 불신하고 마음이 완악해집니다. 하나님이 주권자라는 것을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에스겔서의 전체 주제는 하나님이 주권자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경외심이 없고 자기 죄를 회개하지 않고 형식적이 되면 마음이 완악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수없이 들었지만 삶에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했습니다. 특히 자신들의 우상 숭배와 불순종의 죄로 인해서 심판을 받았지만 마음을 낮추지 않고 죽일테면 죽여보라는 심보로 더욱 완악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의 사명을 받았는데 세상에 대한 욕심 때문에 사명을 감당하지 못했을 때 마음이 완악해졌습니다. 그들은 선민으로서 특권 의식과 헛된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완악한 그들을 어떻게 섬기라고 하십니까?

ㅠ9절을 보십시오. “네 이마로 화석보다 굳은 금강석같이 하였으니 그들이 비록 패역한 족속이라도 두려워 말며 그 얼굴을 무서워 말라 하시고”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의 이마로 화석보다 굳은 금강석같이 하였다고 하셨습니다. 화석은 차돌로서 부싯돌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 돌도 매우 강합니다. 그러나 물질 중에 가장 강한 것은 다이아몬드를 만드는 금강석이죠. 이것으로 쇠까지도 깍아냅니다. 금강석에 부딪치면 그 어떤 것이라도 깨지고 박살이 납니다. 하나님께서 그처럼 에스겔 선지자의 심령을 강하게 하시고, 어떤 영혼도 상대할 수 있는 자신감과 영적 투지를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에스겔이란 뜻은 ‘하나님께서 강하게 하신다’ 입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에게는 ‘내가 너로 그 땅 백성 앞에 견고한 성읍이요, 쇠기둥이요, 놋성벽이 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렘 1:18). 하나님께서는 패역한 시대를 섬기는 주의 종들에게 이와 같은 말씀을 동일하게 주십니다. 제자들에게는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입지 아니하며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전도할 때 양들의 얼굴 빛을 살피면서 접근하기를 주저 주저합니다. 그들에게서 거절을 받고 무시와 상처를 받을까봐 두려워합니다. 인본적인 이 시대에 제자 양성을 위해 책망하는 것도 두렵습니다. 마치 가시와 찔레와 전갈 가운데 처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가시와 찔레와 전갈이라면, 우리는 금강석과 같습니다. 가시와 찔레와 전갈은 금강석을 뚫고 들어올 수 없습니다.    목자가 무너지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른 외적 요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무너지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양의 상처 주는 한마디에 스스로 무너집니다. 그래서 절망하고 낙담하여 좀처럼 양을 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그 얼굴과 이마를 금강석처럼 굳게하셨음을 믿어야 합니다. 프로레슬러 중에 김일 선수가 있습니다. 그의 장기는 박치기입니다. 역도산이 그의 스승이었는데  하루는 문 뒤에 숨었다가 홍두깨로 그의 이마를 쳤다고 합니다. 그런데 김일 선수의 머리가 깨진 것이 아니라 홍두깨가 깨져 버렸습니다. 이와 같이 목자는 어떤 패역한 사람과 붙어도 깨지지 않고 부숴지지 않아야 합니다. 도리어 심령을 강하고 담대하게 하여 그 악한 영혼이 회개하도록 섬겨야 합니다.  목자는  금강석 같은 이마와 얼굴을 소유하고 양이 무시하거나 상처를 주더라도 무너지지 않는 자입니다. 우리가 이 시대를 잘 섬기려면 우리 이마를 금강석 같게 하신다는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말씀을 통해서 또 성령의 능력으로 무장을 시키십니다. 우리가 처음 복음을 전할 때는 매우 두렵습니다. 무슨 말을 할까 고민하다가 돌아서기 쉽습니다. 그러나 외국어를 잘 하려면 얼굴에 철판을 깔아야 하듯이 우리가 믿음으로 복음을 계속 전하고 많은 거절을 당하면 거절당하는 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우리가 제자 양성가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인간적인 것에 대해서는 금강석같이 되어서 안면몰수해야 합니다. 또한 사람을 대할 때 의무감으로 한다거나 사업적으로 한다면 상처를 받게 되지만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대하면 상처를 받지 않게 됩니다. 우리 마음에 사랑의 자세가 부족할 때, 또 내 영혼에 치료받지 않은 문제가 있을 때 쉽게 상처를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강하게 하시고 복음의 투사로 만들어 주십니다. 우리를 강하게 하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10,11절을 보십시오.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를 모든 말을 너는 마음으로 받으며 귀로 듣고 사로잡힌 네 민족에게로 가서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 하시더라.” 하나님의 종은 단순히 말씀을 전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도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마음으로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고 말해야 합니다. 말씀을 전하되 영적인 예리함을 가지고 전해야 합니다.

둘째, 에스겔을 파수꾼으로 세우신 하나님(12-21).
 그 때에 주의 신이 에스겔을 들어 올려 데리고 가시는데 여호와의 권능이 힘있게 그를 감동시켰습니다. 그런데 그는 근심하고 분한 마음으로 행하였습니다. 그의 근심은 동족 이스라엘의 죄에 대한 근심이요, 그의 분함은 영혼 구원에 대한 분함이었습니다. ‘분한 마음’은 ‘뜨거운 마음(heat)으로서, 이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말합니다. 에스겔은 비록 패역하고 강팍한 족속이지만, 자기 동족의 구원에 대한 간절한 목자의 심정이 있었습니다. 이런 그를 여호와의 권능이 힘있게 감동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로 하여금 그 백성을 사랑하도록 힘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는 패역한 백성들에게 나아갈 것을 생각하니 마음에 근심이 되었고 이 어려운 때에 심판의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분한 마음도 생겼습니다. 백성들의 죄악에 대한 그의 심정은 답답하고 안타까웠습니다. 그러나 그가 사로잡힌 백성 중에 나아갔을 때 어떻게 되었습니까? 15절을 보십시오. “이에 내가 델아빕에 이르러 그 사로잡힌 백성 곧 그발 강 가에 거하는 자들에게 나아가 그 중에서 민답히 칠 일을 지내니라.” 민답히 지냈다는 말은 압도되어 지냈다, 얼이 빠진 상태에서 꼼짝 않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볼 때 백성들의 영적인 상태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일을 하기 전에 잠잠히 기다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칠일 후에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그의 직분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16,17절을 보십시오. “칠 일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파수꾼은(Watchman)은 ‘감시자’, ‘지키는 자’라는 뜻으로서 성벽의 망대에 올라가서 적이 침입해 오는 지를 살피는 자입니다. 그리고 징후가 보이면 나팔을 불거나 소리를 치거나 경고의 메시지를 전함으로 적의 침입에 대비케 하는 자입니다. 군대에서는 보초를 서는 초병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을 이스라엘의 영적 파수꾼으로 세우셨습니다. ‘세우셨다’는 것은 주권적으로 임명하신 것을 말합니다. 이는 그의 인간조건과 형편과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세우신 것을 말합니다. 또 이는 불가항력적인 것으로서 인간 편에서 좋으면 하고, 싫으면 그만 두는 것이 아님을 말해 줍니다. 이런 파수꾼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라 말씀하셨습니다(17b). 영적인 파숫군은 먼저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 잘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그대로 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파수꾼은 자기 생각이나 자기 견해나 자기 사상을 말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경고를 전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영혼을 회개시키고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있습니다. 파수꾼은 양들에게 인기를 얻기 위해 다른 말을 하고자 하는 유혹을 받을 수 있습니다. 강퍅한 양들 앞에서는 진실되게 말씀을 전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처럼 양들이 듣기 좋은 말만 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적으로 섞인 말, 변질된 말은 영혼을 깨어나게 할 수도, 구원에 이르게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파수꾼은 이 시대와 양떼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소유하기 위해 부지런히 들어야 합니다. 자신이 먼저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소유해야 합니다. 나아가 그 하나님의 말씀을 충실히 이해하고 영접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잘 먹고 소화해서 영혼의 피와 살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먼저 자신의 영혼을 흔들어 깨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깨어있는 자만이 잠든 영혼을 깨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파수꾼은 항상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어 있는 자입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을 대신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깨우쳐야 합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17c). ‘나를 대신하여’란 ‘나로부터(from me)’ 곧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란 뜻입니다. 파숫군은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백성들을 깨우치는 자입니다.  또 ‘깨우친다’는 것은 ‘경고하다, 가르치다’는 뜻으로서 ‘경고하고 가르침으로 깨닫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파수꾼은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침으로 양떼들을 깨우치고 돌이켜야 합니다. ‘깨우친다’는 것은 양떼들이 깊은 영적 무지와 어두움 가운데 있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여기에 파수꾼의 필요성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자신들이 어떤 형편에 처해 있는지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완전 멸망에 처했지만, 멸망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징계를 받았지만 징계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두 해 정도만 버티면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겠지 하는 거짓 희망에 붙들려 있었습니다(렘28:3). 그래서 적국에 포로로 잡혀왔지만, 아직도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여전히 강퍅한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자신들의 영적 현실을 깨닫게 해주어야 합니다. 왜 이스라엘이 망하게 되었는지, 자신들은 왜 포로로 끌려와야 했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포기치 않는 사랑이 어떠한지를 깨우쳐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돌이켜, 하나님의 사랑을 영접하고 구원을 얻도록 도와 주어야 합니다.

 칭기스칸 시대에 정복한 땅(777만 평방킬로미터)은 알렉산더 대왕(384만Km²), 나폴레옹(115만), 히틀러(219만), 세 정복자가 차지한 땅을 합친 것보다 넓습니다. 그가 이렇게 넓은 땅을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은 꿈을 공유하고 총력전을 펼쳤기 때문입니다. 몽골 유목 군대의 파수꾼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카르피니 출신 수도사가 쓴 「카르피니의 몽골 여행기」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 수도사는 칭기스칸 제국의 3대 칸인 구육칸의 즉위식을 참관하러 서양에서 파견되었습니다. <킵챠크칸국 수도 사라이를 둘러싸고 있는 경계 초소에서 경비를 서던 병사가 졸다가 그만 잠이 들었습니다. 누구한테 들킨 것도 아니지만 잠에서 깨어난 병사는 스스로 깜짝 놀라 친위대장에게 자백했습니다. 마침 동행한 존 수사가 그 병사의 처형식을 구경하다, “아무도 모르는 사실을 굳이 밝힐 필요가 있느냐”고 병사에게 물었습니다. 그 병사는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습니다. “내가 잠든 시간에 적이 쳐들어 왔더라면 우리 바투칸이 위험했을지도 모른다. 경계 중에 잠들었다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 그 병사는 친위대장 명에 따라 그날로 처형됐습니다. > 이 이야기는 인구 100만-200만에 지나지 않는 몽골 군이 어떻게 1-2억 인구를 통치하고, 4만 몽골군이 어떻게 2500만 유럽인을 정복 통치할 수 있었는지 설명해줍니다. “작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할 수 있어도 경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할 수 없다.”는 말은 맥아더 장군이 쓴 유명한 말입니다. 우리가 복음으로 캠퍼스를 깨우고 세계를 정복하기 위해서는 파수꾼으로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영적인 파수꾼입니다. 파수꾼은 밤을 새워서 근무하기 때문에 졸기 쉽습니다. 파수꾼이 헛 생각을 하면 집중이 안되어 경계에 실패하기 쉽습니다.  사탄은 방학이 없습니다. 사탄이 어떤 계락을 짜고 어떻게 공격해 올지 깨어서 지켜야 합니다. 사탄의 공격을 영적으로 깨어서 예민하게 파악을 해야 합니다. 요즈음은 정보전입니다. 우리 군은 전쟁 징후를 일주일 전에 파악할 수 있다고 합니다. 지금은 북한이 핵무기까지 가지고 공격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한반도는 그런 점에서 위험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영적으로도 사단은 사방에서 우리를 공격해 오고 있습니다. 사단은 인터넷을 통해서 음란물을 통해서 언제든지 공격을 합니다. 사탄이 안목의 정욕을 통해서 공격하기 때문에 눈을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음란한 문화 속에 살면서 문제의식이 별로 없습니다. 사람들은 돈벌이가 되면 다 좋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악하다고 하는 것을 악하다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선하다고 하는 것은 선하다고 해야 합니다. 파수꾼은 먼저 선악에 대한 분명한 분별력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 시대 사람들의 선악에 대해서 분명한 판단력을 가져야 합니다. 이 시대가 어디로 흘러 가는지 알아야 합니다. 파수꾼은 시대의 흐름에 떠밀려 가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특히 새벽 기도를 하는 가운데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요즈음은 새벽 기도에 늦게 나오면 자리가 없습니다. 많은 목자님들이 깨어서 영적인 투쟁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든 리더들이 새벽을 깨워 기도할 때 사단의 공격을 사전에 차단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막힌 문제들을 뚫고 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파수꾼으로서 이 시대를 말씀으로 깨우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법들을 연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원리 면에서 낡은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예수님의 제자 양성 원리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목자의 심정과 기도, 1:1 말씀공부, 순종과 자기희생으로 깨우치는 역사는 몇 천년 전부터 있었던 낡은 원리이지만, 삶을 변화시키고 생명을 얻게 하는 최고의 방법입니다. 말씀에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말씀을 가르치되 사상성 있는 말씀을 가르쳐야 합니다. 사상이란 생각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많은 내용들을 담고 있습니다. 그것을 잘 드러낼 때 죄인들이 죄에 대해서 인식하고 깨우치게 됩니다. 말씀을 가르치되 신학적으로, 지식적으로 전하는 것보다 믿어 순종하도록 가르쳐 지키게 해야 합니다. 지식으로만 가르치는 것은 소용이 없고 믿어 지키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확신있게 가르치면 그 사람이 깨우치고 못 깨우치고는 하나님께 달린 것입니다. 파수꾼은 자기의 할 바를 다 하면 됩니다.
 악인에게 하나님의 말로 일러서 그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하게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 죄악 중에서 죽지만 그 피 값은 파수꾼에게서 찾으십니다. 파수꾼이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 죄악 중에서 죽지만 파수꾼은 생명을 보존하게 됩니다. 또 의인이 그 의에서 돌이켜 악을 행할 때에 그를 깨우치지 아니하면 그는 그 죄 중에서 죽지만 그 피 값을 파수꾼에게서 찾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그 의인을 깨우쳐 범죄치 않게 하므로 그가 범죄치 아니하면 그도 살고 파수꾼도 살게 됩니다.  여기서 볼 때 악인이나 의인이나 다 파수꾼이 필요합니다. 인간은 연약한 존재이고 언제 악을 행할 지 알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도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로다”라고 하였습니다(고전 9:16). 특히 그 시대의 리더들은 다가오는 위기를 알리는 파수꾼입니다(호 9:8a).
 파수꾼에게 이런 책임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특권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먼저 알게 되고 생명을 살릴 때, 깨우칠 때 무한한 기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섬기는 가운데 자기가 먼저 깨어 있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파수꾼에게 이를 감당할 은혜와 능력과 위로를 주십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줄기차게 전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은 절망할 때에 하나님의 빛으로 찾아오게 됩니다. 

셋째, 에스겔을 벙어리 되게 하신 하나님(22-27)
  22,23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거기서 내게 임하시고 또 내게 이르시되 일어나 들로 나아가라 내가 거기서 너와 말하리라 하시기로 내가 일어나 들로 나아가니 여호와의 영광이 거기 머물렀는데 내가 전에 그발 강 가에서 보던 영광과 같은지라 내가 곧 엎드리니” 하나님께서는 권능으로 임하사 에스겔 선지자를 들로 데리고 나가셨습니다. 들에서 너와 말하리라고 하십니다. 들은 조용하게 하나님과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입니다. 에스겔이 들로 나가니 여호와의 영광이 거기 머물러 있었습니다. 이 영광은 그가 전에 그발 강가에서 보던 영광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반복해서 선지자 에스겔에게 보여주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에스겔이 자꾸 연약해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에스겔도 육신을 입은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위로와 격려가 계속해서 필요했습니다. 힘들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자신의 영광을 보여주심으로 용기를 북돋아 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예배를 통해서, 찬송하는 가운데,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에스겔에게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24,25절을 보십시오. “주의 신이 내게 임하사 나를 일으켜 세우시고 내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너는 가서 네 집에 들어가 문을 닫으라 인자야 무리가 줄로 너를 동여매리니 네가 그들 가운데서 나오지 못할 것이라.” 패역한 이스라엘 족속이 하도 말씀을 듣지 아니하니까 그들에게 대한 경고로 집에 들어가게 하십니다. 그들은 에스겔 선지자를 줄로 동여매고자 했습니다. 그들이 선지자를 박해하기 때문에 집에 있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에스겔 선지자의 혀로 그 입천장에 붙게 하여 벙어리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에스겔로 더 이상 패역한 이스라엘 족속의 책망자가 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들이 듣지 아니할 때는 아주 입을 닫아 버리십니다. 에스겔은 당분간 공적 사역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시지 않으면 두문불출해야 합니다. 파수꾼은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시는 대로만 말할 있습니다. 에스겔은 7년 동안 벙어리 상태로 있었습니다(24:27, 33:22). 예루살렘이 함락되자 그때부터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말씀을 주시고 예언하게 하셨습니다(27).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들을 자는 들을 것이요 듣기 싫은 자는 듣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들을 귀를 가지고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캠퍼스의 파수꾼으로 세우셨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세상 잔재미와 안일에 빠져서 영혼의 잠을 잘 사람들이 아니라 세상을 깨워야 할 사람들입니다. 우리 각자는 이 시대의 파수꾼으로서 악한 길로 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히 증거하여 돌이키도록 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일대일 말씀 공부를 통해서 한 사람 한 사람을 깨우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공동체를 귀하게 여기는 믿음의 사람들을 우리를 통해서 세우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이 시대 파수꾼의 역할을 잘 감당하여 캠퍼스에서 생명을 구원하고 우리 공동체도 더욱 건강하게 보존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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