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특강 2003년 신년 메시지 에스겔서 제 1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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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신년 메시지 에스겔서 제 1 강
말씀/에스겔 1:1-3:3
요절/에스겔 3:1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고하라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받는 것을 먹으라 너는 이 두루마기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고하라 하시기로”
지금 이 시대는 에스겔이 살던 시대와 같이 영적으로 매우 황량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복음에는 귀를 막고 쾌락과 물질을 좇아갑니다. 목자들이 일년 동안 열심히 복음을 전해도 거듭난 제자 한 사람 얻기가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렵습니다. 이런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를 에스겔과 같이 말씀을 전하며 양들을 돌보는 목자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둡고 절망적인 생각을 하지 말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주시는 말씀을 받아 담대하게 증거하기를 원하십니다. 밝아온 2003년 새해에 우리 모두가 에스겔서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희망을 발견하고 사명을 힘차게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에스겔에게 보이신 하나님의 이상 (1장)
에스겔이 삼십 세 되던 해 사월 오일이었습니다. 에스겔은 다른 포로들과 같이 바벨론의 그발 강 가에 살고 있었습니다. 에스겔은 오년 전 유다가 바벨론의 침입을 받았을 때 여호야긴 왕과 일만 명의 동족들과 함께 이곳 바벨론으로 끌려 왔었습니다(왕하 24:12-15). 이때 그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들은 고향이 그리워 울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회복에 대한 소망을 잃어버리자 믿음을 잃어버리고 바벨론화 되었습니다. 포로 생활은 매우 고달팠습니다. 그가 포로로 끌려오지 않았다면 예루살렘 성전에서 열심히 하나님을 섬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포로 신세로서 하나님을 섬기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 졌습니다. 미국 내 한인 교회는 모두 3197곳인데 한인 교회가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던 요인은 ‘이민 생활의 어려움’(20.4%)이 가장 높게 나타났고 이어 ‘교회의 이민 사회 중추적 역할 감당’(17.7%), ‘모이기에 힘씀’(15.0%) 등의 순으로 조사됐습니다. 이와 같이 유대인들은 바벨론 포로생활 기간 동안 회당 중심의 생활을 하는 가운데 역사를 다시 정리하고 신앙의 회복을 이루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 까지 에스겔은 사방이 막힌 것 같고 끝없는 터널 속을 걷고 있는 기분이었습니다. 하늘도 닫힌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포로 생활 5년이 되던 해 사월 5일에 하늘이 열렸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희망이었습니다. 하늘이 열리면서 그는 세가지 하나님의 이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첫째, 네 생물의 이상이었습니다(4-14). 에스겔이 보니 북방에서부터 폭풍과 큰 구름이 오는데 그 속에서 불이 번쩍번쩍하여 빛이 그 사면에 비취며 그 불 가운데 단 쇠 같은 것이 나타나 보이고 그 속에서 네 생물의 형상이 나타났습니다. 이 생물들은 하나님 보좌 주위에 있는 그룹 천사들이었습니다(겔10:15). 그 천사들의 모양이 어떠했습니까? 흔히 ‘천사’ 하면 금발에다 귀여운 아기 얼굴에 하프를 든 모습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성경에 나타난 천사들은 아주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에스겔이 본 네 천사들의 전체적인 모양은 사람의 형상이었습니다. 그런데 각각 네 얼굴과 네 날개를 가지고 있었고 날개 밑에는 사람의 손이 있었습니다. 그 다리는 곧고 그 발바닥은 송아지 발바닥 같고 마광한 구리 같이 빛났습니다. 네 얼굴들의 모양은 에스겔이 보았을 때 앞쪽은 사람의 얼굴이요, 오른쪽은 사자의 얼굴이요, 왼쪽은 소의 얼굴이요, 뒤쪽은 독수리의 얼굴이었습니다. 이는 네 생물들이 사람처럼 지혜롭고, 사자처럼 용감하고, 소처럼 충성되고, 독수리처럼 빠른 천사들임을 시사합니다. 생물들의 날개는 공중으로 펴서 두 날개를 서로 맞대고 나머지 두 날개는 몸을 가리우고 있었습니다. 이를 볼 때 네 생물들은 항상 하나가 되어 합심동역하며 하나님 앞에 겸손한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손 발을 움직여 하나님을 올곧게 섬겼습니다. 네 생물들은 동서남북 어느 편으로 가든지 그 몸을 회전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전후좌우로 네 얼굴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신이 어느 편으로 가고자 결정만 내리면 그 쪽을 향해 일제히 앞으로 가면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신속히 날아가서 하나님의 사명을 수행하는 천사들이었습니다. 네 생물들의 모양은 숯불과 횃불 모양 같았습니다. 불이 그들 사이에서 오르락내리락 하였는데 그 불은 광채가 있었고 그 가운데서 번개가 반쩍 번쩍 튀어 나왔습니다. 이것은 천사들이 심판의 사명을 감당함을 말합니다. 네 생물들은 불로써 사람들의 죄와 악을 태워버리는 천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왕래는 번개같이 빨랐습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네 생물의 이상을 보여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에스겔로 하여금 절망의 먹구름 속에서 희망의 빛을 보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맨 처음 폭풍과 큰 구름이 몰려올 때는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것은 유다가 무시무시한 심판을 받을 것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폭풍과 거대한 구름 속에는 불만 있는 것이 아니라 빛과 단 쇠가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저희의 불의와 죄악에 대해 일단 무섭게 심판하시겠지만 그 후에는 저희를 연단하시고 빛의 새 역사를 이루실 것을 가리킵니다. 그 빛의 새 역사를 누가 대행합니까? 네 생물들이 합니다. 불과 광채와 번개 속에서 나타난 웅장한 네 생물들을 보았을 때 에스겔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아마도 그 옛날 미가 선지가가 말했던 것처럼 그도 이렇게 외쳤을 것입니다. “나의 대적이여 나로 인하여 기뻐하지 말지어다. 나는 엎드러질지라도 일어날 것이요 어두운데 앉을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의 빛이 되실 것임이로다. 내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니 주께서 나를 위하여 심판하사 신원하시기까지는 그의 노를 당하려니와 주께서 나를 인도하사 광명에 이르게 하시리니 내가 그의 의를 보리로다(미7:8,9).” 네 생물들의 이상은 에스겔의 마음에 빛을 비추어 주었습니다.
둘째, 바퀴의 이상이었습니다(15-21). 에스겔이 보니 그 네 생물 옆 땅바닥에 각각 바퀴가 있었습니다. 그 바퀴의 형상과 구조는 넷이 한결 같았습니다. 넷 다 황옥처럼 연한 황금빛 광채가 났고 바퀴 안에 바퀴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 바퀴가 행할 때에는 돌이키는 법이 없이 한 방향으로 갔습니다. 그 바퀴의 둘레는 높고 무서웠습니다. 무엇보다 특이한 것은 바퀴 둘레로 돌아가면서 눈이 가득했습니다. 바퀴들은 네 생물들과 마찬가지로 그들 가운데 있는 신을 따랐습니다. 또한 바퀴들은 생물들과 더불어 움직였습니다. 생물들이 행하면 바퀴들도 행하고 생물들이 그치면 바퀴들도 그치고 생물들이 땅에서 들릴 때에는 바퀴들로 그 곁에서 들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바퀴의 환상을 보여주셨는데 어떤 뜻이 있을까요? 이 환상은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이심을 가르쳐 줍니다. 언뜻 생각하기에 이 세상 역사의 수레바퀴는 강대국의 지도자들에 의해서 굴러가는 것 같습니다. 에스겔 당시에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천하를 호령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엡 1:11). 누구도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막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것처럼 이 땅에서도 이루어집니다. 바퀴의 둘레에 눈이 가득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철저히 감찰하고 계심을 말해줍니다. 그 누구도, 무엇도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 없습니다. 바퀴의 이상을 통해서 에스겔은 하나님께서 자신과 이스라엘의 어려운 형편을 모르신다고 불평하던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에스겔은 전지하신 하나님께서 이 땅의 모든 일들을 낱낱이 꿰뚫어보시며 당신의 뜻대로 역사를 이끌어가심을 굳게 믿게 되었습니다.
셋째, 하늘 보좌와 그 위에 계신 하나님의 영광의 형상이었습니다(22-28). 본문에 보면 하나님의 보좌와 하나님의 형상을 묘사하는데 있어서 무엇 무엇과 같다는 말이 아홉 번이나 반복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움을 사람의 말로는 정확하게 묘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 미대 출신 사모님은 이 형상을 그려보고 싶었지만 그 영광을 훼손할 것 같아서 차마 그릴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에스겔이 보니 생물들의 머리 위에 수정 같은 궁창이 있었고 그 궁창 위에 보좌가 있었습니다. 그 보좌의 형상 위에는 사람의 모양 같은 형상이 있었습니다. 그 허리 이상의 모양은 단 쇠 같아서 그 속과 주위가 불 같았습니다. 그 허리 이하의 모양도 불 같아서 사면으로 광채가 났습니다. 그 사면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았는데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었습니다. 에스겔은 하나님의 영광의 형상을 보고 곧 엎드리어 그 말씀하시는 자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구체적인 소명을 주시기 전에 먼저 놀라운 이상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본 자만이 소망과 확신 가운데 사명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세, 이사야, 바울, 요한 등 수많은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을 때 큰 어려움 가운데서도 힘있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이상은 몇몇 선지자들만 볼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요엘 선지자는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욜 2:28)” 이 말씀대로 오늘날 성령으로 거듭난 모든 성도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이상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볼 때 힘들고 어려운 시대에 주님과 복음을 위해서 어떤 수고도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볼 때 영적인 권위가 주어지고 하나님의 비전을 보게 됩니다. 절망 가운데 있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주심으로 위로하시고 함께 해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면서 제자 양성을 이루며 2040년까지 10만명의 선교사를 파송하기를 기도합니다.
II. 두루마리 책을 먹이신 하나님 (2:1-3:3)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무슨 사명을 주셨습니까? 패역한 백성들에게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3,4절을 보십시오.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자손 곧 패역한 백성, 나를 배반하는 자에게 보내노라 그들과 그 열조가 내게 범죄하여 오늘날까지 이르렀나니 이 자손은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강퍅한 자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내노니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이렇게 패역하고 뻔뻔하게 되었을까요?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수없이 들었지만 마음으로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겼지만 마음으로는 가나안의ㅏ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불순종하고 음란했기에 죄를 죄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바벨론을 통해서 심판하셨지만 곧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심판의 메시지를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믿는 구석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매를 많이 맞았지만 마음을 더욱 강퍅하게 하였습니다.
한번 완악해진 양들에게 다가가서 인사를 건넨다는 것은 쉽지 않은데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하나님께서는 패역한 백성이라도 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에스겔을 보내셨습니다. 우리는 할 수 있으면 순한 양들에게 가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누구에게 보내든지 우리는 순종할 뿐입니다. 사실 가만히 생각하면 세상에 순한 양은 없습니다. 변화되기 전에는 누구나 패역하고 강퍅합니다. 우리 자신도 그랬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새해에는 패역하고 강퍅한 양들에게 나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겠습니다.
우리가 패역한 양들에게 가서 말씀을 전하는 사명을 감당할 때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합니까? ㅊ
첫째,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6절을 보십시오. “인자야 너는 비록 가시와 찔레와 함께 처하며 전갈 가운데 거할지라도 그들을 두려워 말고 그 말을 두려워 말지어다.” 패역한 사람들은 가시와 찔레와 같습니다. 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가시와 찔레와 함께 처하며 전갈 가운데 거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의 비방을 받고 반대에 직면하고 공격을 받게 됩니다. 그들 중에는 독기를 품고 기회만 잡으면 쏘아대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런 자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것은 매우 두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되 그들을 두려워 말라고 하십니다. 그 말을 두려워 말라고 하십니다. 패역한 백성들은 말씀을 들을 때 ‘아멘’으로 영접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요 말씀을 전하는 사람에게 아주 독한 말로 대적합니다. 하나님을 믿느니 내 주먹을 믿겠다, 내 노력을 믿겠다고 합니다. 어떤 때는 ‘너도 목자냐’고 합니다. 심한 경우는 가두고 때리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아시면서도 당신의 종들을 그들에게로 보내십니다. 그러면서 그들을 두려워 말고 그들의 말을 두려워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들을 두려워 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친히 저희를 돌보시기 때문입니다. 혹시 우리 가운데 복음 전하다가 매를 맞은 분이 있습니까?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다녀오신 분이 있습니까? 복음을 전하다가 해를 당하신 분이 있습니까? 주님은 참새 한 마리도 나의 허락이 없으면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두려워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고 하셨습니다(마10:29,30). 또한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10:28)”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을 때 패역한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도리어 악인을 지옥에 멸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을 생각할 때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죽도록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이런 사랑으로 복음을 전합시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을 고해야 합니다. 7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심히 패역한 자라 듣든지 아니 듣든지 너는 내 말로 고할찌어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너는 “내 말로” 고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증거하지 않고 가감해서 자기 말을 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것처럼 하면서 실은 자기 주장, 자기 철학, 자기 사상을 말할 수도 있습니다. 특히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워낙 적대적인 것 같을 때, 그들이 듣기 좋은 말로 바꾸어 증거하고픈 유혹이 찾아 옵니다. 오늘날 이런 유혹에 넘어가 복음을 증거한다고 하지만 사실 인본적이 된 메시지들이 많습니다. 요즈음은 모든 것을 재미있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메신저는 할 수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영적인 권위를 가지고 감동적이고 재미있게 전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재미 좀 떨어지더라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너는 내 말로 고하라”고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을 들을 자는 들을 것이요 듣지 않을 자는 귀에 솜을 막고 듣지 않을 것입니다. 조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피곤해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안 듣는 자가 있다고 해서 마음이 약해져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말씀을 왜곡하면서까지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 것을 절대로 원치 않으십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결과를 내기 위해서 전하기 보다 늦더라도 말씀 그대로 전해야 합니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하고 사람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하나님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담대하게 증거해야 합니다. 우리의 메시지가 말씀 중심으로 전하고자 하다 보니 좀 딱딱한 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현실 문제에 대한 적용이 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더 깊이 연구하고 묵상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원저자의 뜻을 살려서 그대로 전하기를 힘을 씁시다.
셋째로,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자신이 먼저 말씀을 풍성하게 먹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을 패역한 백성들에게 보내시기 전에 먼저 무엇을 명하셨습니까? 8절을 보십시오.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듣고 그 패역한 족속같이 패역하지 말고 네 입을 벌리고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먹으라 하시기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대개 먹는 것을 좋아합니다. 먹는 것이라면 사양하지 않고 주는 대로 먹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먹으라’고 하시는 것은 보통 먹는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에스겔이 무엇을 먹으라고 하시는가 보았더니 한 손이 그를 향하여 펴지고 그 손에 두루마리 책 즉 성경책이었습니다. 두루마기 책은 그 안팎으로 글이 있었는데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심판의 메시지였습니다. 우리 시대는 책망하는 말씀이 필요합니다. 8절을 보면 에스겔도 사실 그 말씀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습니다.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듣고 그 패역한 족속같이 패역하지 말고 네 입을 벌리고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그 패역한 족속같이 패역하지 말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종은 심판의 말씀을 소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 말씀을 소화하지 못하면 양들에게 독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마음으로 영접하고 회개하고 나서 전해야 합니다. 마음에 불만과 원망을 품고 전하면 그 독이 양들에게 심겨집니다. 그러므로 에스겔이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것이 투쟁이 되었습니다. 이런 영적 투쟁에서 승리해야 양들에게 심판의 메시지를 전해도 독이 되지 않고 약이 됩니다.
3:1절을 보십시오.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받는 것을 먹으라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고하라 하시기로”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으라.”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이 두루마리를 “눈으로만 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잘 기억해 두라”고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깊이 묵상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먹으라!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먼저 자신부터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먹는다는 것은 음식을 입에 넣고 씹어서 삼키는 것입니다. 말씀을 먹는다는 것은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소화하여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말씀을 머리로만 받으면 안됩니다. 말씀을 이해한 정도로 만족하면 안됩니다. 말씀을 읽은 것으로 끝나면 안됩니다. 말씀 앞에 마음이 떨리고 감동이 되고 이 말씀은 정말 진리라는 것을 깨닫고 그래서 이 말씀을 전하지 않고는 못 배길 만큼 간절한 심령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그대로 순종해서 내 몸으로 체험해야 합니다. 그래야 말씀을 먹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육체는 먹어야 힘이 납니다. 먹지 않으면 쉽게 지치고 피곤해 하고 힘을 쓸 수 없습니다. 우리 영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을 먹지 않으면 영적으로 무기력해집니다. 왜 주님과 복음을 향한 열정이 식어집니까? 말씀을 안 먹기 때문입니다. 왜 양들에게 다가갈 심정이 생기지 않습니까? 말씀을 안 먹기 때문입니다. 왜 말씀을 공부하는데 졸립고 피곤합니까? 말씀을 안 먹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먹지 않으면 마음에 회의라는 바이러스가 침투하고 마음에 병이 생깁니다.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영력을 얻으려면 말씀을 먹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힘있게 또 즐겁게 감당하려면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먹어도 아주 풍성하게 먹어야 합니다. 다채롭게 먹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먹는 사람들을 보면 얼굴에 빛이 있고 삶에 아주 힘이 있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로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먹이시면서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고 하십니다. 밥으로만 창자를 채우지 말고 말씀으로 창자를 채워야 합니다. 그렇다고 양적으로만 풍성하게 먹으면 안되고 질적으로도 그 말씀의 뜻을 온전히 소화할 때까지 깊이 먹어야 합니다.
에스겔이 말씀을 먹었을 때 맛이 어떠했습니까? 3절을 보십시오.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에스겔이 먹은 말씀은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었습니다. 그것은 너무나 분명한 심판의 말씀이었기 때문에 쓴내가 나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에스겔은 그 말씀이 꿀같이 달았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소화했기 때문입니다. 비록 겉으로만 보면 애가와 애곡과 재앙은 슬픔의 말씀이었지만 깊이 소화해보니 그 속에 하나님의 공의가 있고 연단의 손길이 있고 그 후에 저희를 구원하시려는 사랑이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에 그 말씀들이 꿀처럼 달게 느껴졌던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먹을 때에는 항상 단 맛을 느낍니다. 시119:103절은 말씀합니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
2003년 새해에도 우리는 변함없이 캠퍼스 양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주의 복음을 들고 그들에게 가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에게 가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두루마리를 ‘먹고’ 그 다음에 ‘가서’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말씀을 먹는 것이 최우선입니다. 말씀을 먹되 날마다 먹어야 합니다. 충분히 먹어야 합니다. 깊이 먹어야 합니다. 말씀은 우리 영혼의 양식입니다. 우리가 일용할 양식과 주일 소감을 쓰면서 깊이 먹을 때 우리 영은 힘을 얻게 되고 일대일과 제자 양성도 힘있게 섬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과 형편만 바라보고 낙심하기 잘하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이상을 보여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상을 보며 주님과 복음 역사를 섬겨야겠습니다. 우리가 한국과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먼저 이 성경을 먹어야 합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내 것으로 소화된 말씀을 전할 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말씀/에스겔 1:1-3:3
요절/에스겔 3:1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고하라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받는 것을 먹으라 너는 이 두루마기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고하라 하시기로”
지금 이 시대는 에스겔이 살던 시대와 같이 영적으로 매우 황량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복음에는 귀를 막고 쾌락과 물질을 좇아갑니다. 목자들이 일년 동안 열심히 복음을 전해도 거듭난 제자 한 사람 얻기가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렵습니다. 이런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를 에스겔과 같이 말씀을 전하며 양들을 돌보는 목자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둡고 절망적인 생각을 하지 말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주시는 말씀을 받아 담대하게 증거하기를 원하십니다. 밝아온 2003년 새해에 우리 모두가 에스겔서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희망을 발견하고 사명을 힘차게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에스겔에게 보이신 하나님의 이상 (1장)
에스겔이 삼십 세 되던 해 사월 오일이었습니다. 에스겔은 다른 포로들과 같이 바벨론의 그발 강 가에 살고 있었습니다. 에스겔은 오년 전 유다가 바벨론의 침입을 받았을 때 여호야긴 왕과 일만 명의 동족들과 함께 이곳 바벨론으로 끌려 왔었습니다(왕하 24:12-15). 이때 그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들은 고향이 그리워 울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회복에 대한 소망을 잃어버리자 믿음을 잃어버리고 바벨론화 되었습니다. 포로 생활은 매우 고달팠습니다. 그가 포로로 끌려오지 않았다면 예루살렘 성전에서 열심히 하나님을 섬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포로 신세로서 하나님을 섬기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 졌습니다. 미국 내 한인 교회는 모두 3197곳인데 한인 교회가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던 요인은 ‘이민 생활의 어려움’(20.4%)이 가장 높게 나타났고 이어 ‘교회의 이민 사회 중추적 역할 감당’(17.7%), ‘모이기에 힘씀’(15.0%) 등의 순으로 조사됐습니다. 이와 같이 유대인들은 바벨론 포로생활 기간 동안 회당 중심의 생활을 하는 가운데 역사를 다시 정리하고 신앙의 회복을 이루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 까지 에스겔은 사방이 막힌 것 같고 끝없는 터널 속을 걷고 있는 기분이었습니다. 하늘도 닫힌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포로 생활 5년이 되던 해 사월 5일에 하늘이 열렸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희망이었습니다. 하늘이 열리면서 그는 세가지 하나님의 이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첫째, 네 생물의 이상이었습니다(4-14). 에스겔이 보니 북방에서부터 폭풍과 큰 구름이 오는데 그 속에서 불이 번쩍번쩍하여 빛이 그 사면에 비취며 그 불 가운데 단 쇠 같은 것이 나타나 보이고 그 속에서 네 생물의 형상이 나타났습니다. 이 생물들은 하나님 보좌 주위에 있는 그룹 천사들이었습니다(겔10:15). 그 천사들의 모양이 어떠했습니까? 흔히 ‘천사’ 하면 금발에다 귀여운 아기 얼굴에 하프를 든 모습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성경에 나타난 천사들은 아주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에스겔이 본 네 천사들의 전체적인 모양은 사람의 형상이었습니다. 그런데 각각 네 얼굴과 네 날개를 가지고 있었고 날개 밑에는 사람의 손이 있었습니다. 그 다리는 곧고 그 발바닥은 송아지 발바닥 같고 마광한 구리 같이 빛났습니다. 네 얼굴들의 모양은 에스겔이 보았을 때 앞쪽은 사람의 얼굴이요, 오른쪽은 사자의 얼굴이요, 왼쪽은 소의 얼굴이요, 뒤쪽은 독수리의 얼굴이었습니다. 이는 네 생물들이 사람처럼 지혜롭고, 사자처럼 용감하고, 소처럼 충성되고, 독수리처럼 빠른 천사들임을 시사합니다. 생물들의 날개는 공중으로 펴서 두 날개를 서로 맞대고 나머지 두 날개는 몸을 가리우고 있었습니다. 이를 볼 때 네 생물들은 항상 하나가 되어 합심동역하며 하나님 앞에 겸손한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손 발을 움직여 하나님을 올곧게 섬겼습니다. 네 생물들은 동서남북 어느 편으로 가든지 그 몸을 회전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전후좌우로 네 얼굴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신이 어느 편으로 가고자 결정만 내리면 그 쪽을 향해 일제히 앞으로 가면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신속히 날아가서 하나님의 사명을 수행하는 천사들이었습니다. 네 생물들의 모양은 숯불과 횃불 모양 같았습니다. 불이 그들 사이에서 오르락내리락 하였는데 그 불은 광채가 있었고 그 가운데서 번개가 반쩍 번쩍 튀어 나왔습니다. 이것은 천사들이 심판의 사명을 감당함을 말합니다. 네 생물들은 불로써 사람들의 죄와 악을 태워버리는 천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왕래는 번개같이 빨랐습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네 생물의 이상을 보여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에스겔로 하여금 절망의 먹구름 속에서 희망의 빛을 보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맨 처음 폭풍과 큰 구름이 몰려올 때는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것은 유다가 무시무시한 심판을 받을 것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폭풍과 거대한 구름 속에는 불만 있는 것이 아니라 빛과 단 쇠가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저희의 불의와 죄악에 대해 일단 무섭게 심판하시겠지만 그 후에는 저희를 연단하시고 빛의 새 역사를 이루실 것을 가리킵니다. 그 빛의 새 역사를 누가 대행합니까? 네 생물들이 합니다. 불과 광채와 번개 속에서 나타난 웅장한 네 생물들을 보았을 때 에스겔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아마도 그 옛날 미가 선지가가 말했던 것처럼 그도 이렇게 외쳤을 것입니다. “나의 대적이여 나로 인하여 기뻐하지 말지어다. 나는 엎드러질지라도 일어날 것이요 어두운데 앉을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의 빛이 되실 것임이로다. 내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니 주께서 나를 위하여 심판하사 신원하시기까지는 그의 노를 당하려니와 주께서 나를 인도하사 광명에 이르게 하시리니 내가 그의 의를 보리로다(미7:8,9).” 네 생물들의 이상은 에스겔의 마음에 빛을 비추어 주었습니다.
둘째, 바퀴의 이상이었습니다(15-21). 에스겔이 보니 그 네 생물 옆 땅바닥에 각각 바퀴가 있었습니다. 그 바퀴의 형상과 구조는 넷이 한결 같았습니다. 넷 다 황옥처럼 연한 황금빛 광채가 났고 바퀴 안에 바퀴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 바퀴가 행할 때에는 돌이키는 법이 없이 한 방향으로 갔습니다. 그 바퀴의 둘레는 높고 무서웠습니다. 무엇보다 특이한 것은 바퀴 둘레로 돌아가면서 눈이 가득했습니다. 바퀴들은 네 생물들과 마찬가지로 그들 가운데 있는 신을 따랐습니다. 또한 바퀴들은 생물들과 더불어 움직였습니다. 생물들이 행하면 바퀴들도 행하고 생물들이 그치면 바퀴들도 그치고 생물들이 땅에서 들릴 때에는 바퀴들로 그 곁에서 들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바퀴의 환상을 보여주셨는데 어떤 뜻이 있을까요? 이 환상은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이심을 가르쳐 줍니다. 언뜻 생각하기에 이 세상 역사의 수레바퀴는 강대국의 지도자들에 의해서 굴러가는 것 같습니다. 에스겔 당시에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천하를 호령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엡 1:11). 누구도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막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것처럼 이 땅에서도 이루어집니다. 바퀴의 둘레에 눈이 가득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철저히 감찰하고 계심을 말해줍니다. 그 누구도, 무엇도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 없습니다. 바퀴의 이상을 통해서 에스겔은 하나님께서 자신과 이스라엘의 어려운 형편을 모르신다고 불평하던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에스겔은 전지하신 하나님께서 이 땅의 모든 일들을 낱낱이 꿰뚫어보시며 당신의 뜻대로 역사를 이끌어가심을 굳게 믿게 되었습니다.
셋째, 하늘 보좌와 그 위에 계신 하나님의 영광의 형상이었습니다(22-28). 본문에 보면 하나님의 보좌와 하나님의 형상을 묘사하는데 있어서 무엇 무엇과 같다는 말이 아홉 번이나 반복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움을 사람의 말로는 정확하게 묘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 미대 출신 사모님은 이 형상을 그려보고 싶었지만 그 영광을 훼손할 것 같아서 차마 그릴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에스겔이 보니 생물들의 머리 위에 수정 같은 궁창이 있었고 그 궁창 위에 보좌가 있었습니다. 그 보좌의 형상 위에는 사람의 모양 같은 형상이 있었습니다. 그 허리 이상의 모양은 단 쇠 같아서 그 속과 주위가 불 같았습니다. 그 허리 이하의 모양도 불 같아서 사면으로 광채가 났습니다. 그 사면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았는데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었습니다. 에스겔은 하나님의 영광의 형상을 보고 곧 엎드리어 그 말씀하시는 자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구체적인 소명을 주시기 전에 먼저 놀라운 이상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본 자만이 소망과 확신 가운데 사명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세, 이사야, 바울, 요한 등 수많은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을 때 큰 어려움 가운데서도 힘있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이상은 몇몇 선지자들만 볼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요엘 선지자는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욜 2:28)” 이 말씀대로 오늘날 성령으로 거듭난 모든 성도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이상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볼 때 힘들고 어려운 시대에 주님과 복음을 위해서 어떤 수고도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볼 때 영적인 권위가 주어지고 하나님의 비전을 보게 됩니다. 절망 가운데 있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주심으로 위로하시고 함께 해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면서 제자 양성을 이루며 2040년까지 10만명의 선교사를 파송하기를 기도합니다.
II. 두루마리 책을 먹이신 하나님 (2:1-3:3)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무슨 사명을 주셨습니까? 패역한 백성들에게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3,4절을 보십시오.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자손 곧 패역한 백성, 나를 배반하는 자에게 보내노라 그들과 그 열조가 내게 범죄하여 오늘날까지 이르렀나니 이 자손은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강퍅한 자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내노니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이렇게 패역하고 뻔뻔하게 되었을까요?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수없이 들었지만 마음으로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겼지만 마음으로는 가나안의ㅏ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불순종하고 음란했기에 죄를 죄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바벨론을 통해서 심판하셨지만 곧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심판의 메시지를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믿는 구석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매를 많이 맞았지만 마음을 더욱 강퍅하게 하였습니다.
한번 완악해진 양들에게 다가가서 인사를 건넨다는 것은 쉽지 않은데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하나님께서는 패역한 백성이라도 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에스겔을 보내셨습니다. 우리는 할 수 있으면 순한 양들에게 가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누구에게 보내든지 우리는 순종할 뿐입니다. 사실 가만히 생각하면 세상에 순한 양은 없습니다. 변화되기 전에는 누구나 패역하고 강퍅합니다. 우리 자신도 그랬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새해에는 패역하고 강퍅한 양들에게 나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겠습니다.
우리가 패역한 양들에게 가서 말씀을 전하는 사명을 감당할 때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합니까? ㅊ
첫째,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6절을 보십시오. “인자야 너는 비록 가시와 찔레와 함께 처하며 전갈 가운데 거할지라도 그들을 두려워 말고 그 말을 두려워 말지어다.” 패역한 사람들은 가시와 찔레와 같습니다. 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가시와 찔레와 함께 처하며 전갈 가운데 거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의 비방을 받고 반대에 직면하고 공격을 받게 됩니다. 그들 중에는 독기를 품고 기회만 잡으면 쏘아대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런 자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것은 매우 두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되 그들을 두려워 말라고 하십니다. 그 말을 두려워 말라고 하십니다. 패역한 백성들은 말씀을 들을 때 ‘아멘’으로 영접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요 말씀을 전하는 사람에게 아주 독한 말로 대적합니다. 하나님을 믿느니 내 주먹을 믿겠다, 내 노력을 믿겠다고 합니다. 어떤 때는 ‘너도 목자냐’고 합니다. 심한 경우는 가두고 때리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아시면서도 당신의 종들을 그들에게로 보내십니다. 그러면서 그들을 두려워 말고 그들의 말을 두려워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들을 두려워 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친히 저희를 돌보시기 때문입니다. 혹시 우리 가운데 복음 전하다가 매를 맞은 분이 있습니까?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다녀오신 분이 있습니까? 복음을 전하다가 해를 당하신 분이 있습니까? 주님은 참새 한 마리도 나의 허락이 없으면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두려워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고 하셨습니다(마10:29,30). 또한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10:28)”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을 때 패역한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도리어 악인을 지옥에 멸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을 생각할 때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죽도록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이런 사랑으로 복음을 전합시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을 고해야 합니다. 7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심히 패역한 자라 듣든지 아니 듣든지 너는 내 말로 고할찌어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너는 “내 말로” 고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증거하지 않고 가감해서 자기 말을 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것처럼 하면서 실은 자기 주장, 자기 철학, 자기 사상을 말할 수도 있습니다. 특히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워낙 적대적인 것 같을 때, 그들이 듣기 좋은 말로 바꾸어 증거하고픈 유혹이 찾아 옵니다. 오늘날 이런 유혹에 넘어가 복음을 증거한다고 하지만 사실 인본적이 된 메시지들이 많습니다. 요즈음은 모든 것을 재미있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메신저는 할 수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영적인 권위를 가지고 감동적이고 재미있게 전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재미 좀 떨어지더라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너는 내 말로 고하라”고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을 들을 자는 들을 것이요 듣지 않을 자는 귀에 솜을 막고 듣지 않을 것입니다. 조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피곤해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안 듣는 자가 있다고 해서 마음이 약해져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말씀을 왜곡하면서까지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 것을 절대로 원치 않으십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결과를 내기 위해서 전하기 보다 늦더라도 말씀 그대로 전해야 합니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하고 사람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하나님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담대하게 증거해야 합니다. 우리의 메시지가 말씀 중심으로 전하고자 하다 보니 좀 딱딱한 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현실 문제에 대한 적용이 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더 깊이 연구하고 묵상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원저자의 뜻을 살려서 그대로 전하기를 힘을 씁시다.
셋째로,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자신이 먼저 말씀을 풍성하게 먹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을 패역한 백성들에게 보내시기 전에 먼저 무엇을 명하셨습니까? 8절을 보십시오.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듣고 그 패역한 족속같이 패역하지 말고 네 입을 벌리고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먹으라 하시기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대개 먹는 것을 좋아합니다. 먹는 것이라면 사양하지 않고 주는 대로 먹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먹으라’고 하시는 것은 보통 먹는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에스겔이 무엇을 먹으라고 하시는가 보았더니 한 손이 그를 향하여 펴지고 그 손에 두루마리 책 즉 성경책이었습니다. 두루마기 책은 그 안팎으로 글이 있었는데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심판의 메시지였습니다. 우리 시대는 책망하는 말씀이 필요합니다. 8절을 보면 에스겔도 사실 그 말씀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습니다.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듣고 그 패역한 족속같이 패역하지 말고 네 입을 벌리고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그 패역한 족속같이 패역하지 말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종은 심판의 말씀을 소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 말씀을 소화하지 못하면 양들에게 독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마음으로 영접하고 회개하고 나서 전해야 합니다. 마음에 불만과 원망을 품고 전하면 그 독이 양들에게 심겨집니다. 그러므로 에스겔이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것이 투쟁이 되었습니다. 이런 영적 투쟁에서 승리해야 양들에게 심판의 메시지를 전해도 독이 되지 않고 약이 됩니다.
3:1절을 보십시오.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받는 것을 먹으라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고하라 하시기로”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으라.”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이 두루마리를 “눈으로만 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잘 기억해 두라”고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깊이 묵상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먹으라!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먼저 자신부터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먹는다는 것은 음식을 입에 넣고 씹어서 삼키는 것입니다. 말씀을 먹는다는 것은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소화하여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말씀을 머리로만 받으면 안됩니다. 말씀을 이해한 정도로 만족하면 안됩니다. 말씀을 읽은 것으로 끝나면 안됩니다. 말씀 앞에 마음이 떨리고 감동이 되고 이 말씀은 정말 진리라는 것을 깨닫고 그래서 이 말씀을 전하지 않고는 못 배길 만큼 간절한 심령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그대로 순종해서 내 몸으로 체험해야 합니다. 그래야 말씀을 먹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육체는 먹어야 힘이 납니다. 먹지 않으면 쉽게 지치고 피곤해 하고 힘을 쓸 수 없습니다. 우리 영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을 먹지 않으면 영적으로 무기력해집니다. 왜 주님과 복음을 향한 열정이 식어집니까? 말씀을 안 먹기 때문입니다. 왜 양들에게 다가갈 심정이 생기지 않습니까? 말씀을 안 먹기 때문입니다. 왜 말씀을 공부하는데 졸립고 피곤합니까? 말씀을 안 먹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먹지 않으면 마음에 회의라는 바이러스가 침투하고 마음에 병이 생깁니다.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영력을 얻으려면 말씀을 먹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힘있게 또 즐겁게 감당하려면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먹어도 아주 풍성하게 먹어야 합니다. 다채롭게 먹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먹는 사람들을 보면 얼굴에 빛이 있고 삶에 아주 힘이 있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로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먹이시면서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고 하십니다. 밥으로만 창자를 채우지 말고 말씀으로 창자를 채워야 합니다. 그렇다고 양적으로만 풍성하게 먹으면 안되고 질적으로도 그 말씀의 뜻을 온전히 소화할 때까지 깊이 먹어야 합니다.
에스겔이 말씀을 먹었을 때 맛이 어떠했습니까? 3절을 보십시오.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에스겔이 먹은 말씀은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었습니다. 그것은 너무나 분명한 심판의 말씀이었기 때문에 쓴내가 나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에스겔은 그 말씀이 꿀같이 달았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소화했기 때문입니다. 비록 겉으로만 보면 애가와 애곡과 재앙은 슬픔의 말씀이었지만 깊이 소화해보니 그 속에 하나님의 공의가 있고 연단의 손길이 있고 그 후에 저희를 구원하시려는 사랑이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에 그 말씀들이 꿀처럼 달게 느껴졌던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먹을 때에는 항상 단 맛을 느낍니다. 시119:103절은 말씀합니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
2003년 새해에도 우리는 변함없이 캠퍼스 양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주의 복음을 들고 그들에게 가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에게 가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두루마리를 ‘먹고’ 그 다음에 ‘가서’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말씀을 먹는 것이 최우선입니다. 말씀을 먹되 날마다 먹어야 합니다. 충분히 먹어야 합니다. 깊이 먹어야 합니다. 말씀은 우리 영혼의 양식입니다. 우리가 일용할 양식과 주일 소감을 쓰면서 깊이 먹을 때 우리 영은 힘을 얻게 되고 일대일과 제자 양성도 힘있게 섬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과 형편만 바라보고 낙심하기 잘하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이상을 보여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상을 보며 주님과 복음 역사를 섬겨야겠습니다. 우리가 한국과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먼저 이 성경을 먹어야 합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내 것으로 소화된 말씀을 전할 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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