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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001년 야곱 3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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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섬김이
댓글 0건 조회 3,348회 작성일 03-01-17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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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야곱 3 강
말씀/ 창세기 32:1-33:20
요절/ 창세기 32:28
      야곱의 환도뼈를 치신 하나님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하나님을 삶에서 깊이 체험한다는 것은 놀라운 축복입니다. 야곱은 인생에서 가장 절망적인 때에 하나님께 나아가 단독자로 서서 영적인 씨름을 하는 가운데 이런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다 얻었지만 죄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만나서 그의 존재가 변화되었습니다. 그는 진정한 축복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만나서 죄문제가 해결되자 형 에서와 20년 묵은 갈등도 해결되었습니다. 그는 형 에서와 뜨거운 해후를 할 수 있었습니다. 이 시간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깨어져야 할 환도뼈는 무엇인가 발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귀히 쓰임 받으려면 어떤 존재로 변화되어야 하는지 배우고자 합니다. 

I. 야곱의 환도뼈를 치신 하나님(32:1-32)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하나님의 사자들을 만났습니다. 야곱이 볼 때 그들은 하나님의 군대였습니다. 그는 그 땅의 이름을 마하나임이라고 하였습니다. 마하나임이란 두 진지란 뜻인데 하나는 라반의 군대요 하나는 하나님의 군대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군대를 보내셔서 야곱의 일행을 보호하셨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하나님께서 왜 그 군대를 그에게 보내셨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군대 옆이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했는지 그곳에 자리를 잡고 사자들을 세일 땅에 있는 형 에서에게 보냈습니다.  그리고 비굴할 정도로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그는 내 주 에서라고 부르면서 주의 종 야곱이 지금까지 라반에게 붙여 살았는데 이제 내 주께 은혜받기를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자들이 야곱에게 돌아와서는 에서가 사백인을 거느리고 오고 있다고 전하였습니다. 야곱은 심히 두렵고 답답하였습니다. 야곱이 왜 이렇게 두렵고 답답한 것입니까? 이것은 분명히 에서가 20년 전의 일을 잊지 않고 자신을 죽이고자 달려오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20년 전에 에서를 속이고 아버지의 축복을 가로챈 것이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죄문제는 시간이 지난다고 잊혀지지 않습니다. 어디로 도망을 간다고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 죄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20년 동안 밧단아람에서 모은 모든 재산과 아내와 자식들이 다 허사가 될 판이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이런 위기의 순간에도 머리가 잘 돌아가서 자기와 함께 한 종자와 양과 소와 약대를 둘로 나누고 한 떼를 치면 한 떼는 피하리라고 조치하였습니다. 또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그는 막연하게 기도하지 않고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였습니다.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리를 조금이라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기도를 하였습니다.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하옴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냄이니이다." 그의 기도는 솔직하였습니다. 그는 자기의 소원을 돌려서 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단순하게 구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진실을 토하였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정녕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그는 하나님이 주신 비전과 축복을 붙잡고 긴구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기도에는 회개가 없습니다.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지만 마음 속에 있는 죄를 토설하지 않고서는 기도가 응답될 수 없습니다. 그의 기도는 형식은 다 갖추었는데 하나님의 보호에 대한 믿음이 빠져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보다 자기의 능력을 더 신뢰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기도를 드리고 나서 형의 감정을 풀기 위한 노력을 다 했습니다.

 먼저 2억 5천만원 상당의 물질을 네 떼로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한 무리를 보내고 다음에 또 한 무리를 보내고 그 다음에 또 한 무리를 보냈습니다. 암염소가 이백이요 숫염소가 이십이요 암양이 이백이요 숫양이 이십이요 젖나는 약대 삼십과 그 새끼요 암소가 사십이요 황소가 열이요 암나귀가 이십이요 그 새끼나귀가 열이었습니다. 그리고 각 떼를 따라가는 종들에게 이런 말을 넣어 주었습니다.  "이것은 주의 종 야곱의 것이요 자기 주 에서에게로 보내는 예물이오며 야곱도 우리 뒤에 있나이다." 야곱은  예물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대면하면 형이 혹시 나를 받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은밀한 선물은 노를 쉬게 하고 품의 뇌물은 맹렬한 분을 그치게 하느니라(잠 21:14)."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모든 인간적인 노력을 다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평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밤을 무리 가운데서 지내다가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 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내고 그 소유도 건네었습니다. 만약 강을 낮에 건널 때에 에서가 공격하면 피하지도 못하고 전멸할 것을 예측했기 때문입니다. 얍복강 도하 작전을 끝내고 나서 야곱은 다시 얍복 나루를 건너와서 홀로 남아있었습니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야곱은 미치도록 고독하였습니다. 외로웠습니다. 아무도 자신의 고뇌와 함께 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실존입니다. 인간은 한계 상황에 막혀 버려 스스로 좌절할 수 밖에 없을 때 인간 본래의 실존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한계상황은 고뇌, 죽음, 싸움, 죄등에서 나타나게 됩니다. 외국에서 혼자 있을 때 이런 고독감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지도자들은 중대 결정을 할 때 이런 고독감을 느낍니다. 실패 앞에서 고독감을 느낍니다. 노총각, 노처녀들이 고독감을 잘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독을 즐기면서 그 속에 안주해 버립니다. 그러나 인간은 한계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고독을 극복하고 사랑으로 서로 교통하는 존재가 됩니다.

 야곱이 홀로 남았을 때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였습니다. 이 분은 성육신하신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과  영적 씨름을 하셨습니다.  야곱이 고독할 때에 함께 씨름을 해주심으로 그가 자기를 발견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죄문제를 함께 씨름해 주심으로 그를 제자로 양성하셨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자기가 매우 강한 사람인지라 꺾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항복하지 않으려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환도뼈를 치매 야곱의 환도뼈가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위골되었습니다. 환도뼈는 엉덩이뼈인데 이것이 위골되었으니 그는 이제 더 이상 도망갈 수도 없었습니다. 이제 꼼짝없이 에서에게 당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이제야 하나님 앞에 항복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서 환도뼈는 야곱을 지탱해주고 있는 그의 강한 인간성을 말해 줍니다. 우리에게 있는 환도뼈는 무엇입니까? 변화되지 않는 본성, 강한 자기 의, 의지, 건강, 성실, 지식, 고집, 배우지 않는 마음, 착한 마음씨, 이기심, 자존심, 정욕, 하면 된다는 생각 등등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질병이라든가, 실패를 통해서, 목자의 강한 책망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강한 환도뼈를 치십니다.

 환도뼈를 맞은 야곱의 하나님을 향한 자세가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26절을 보십시오. "그 사람이 가로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가로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야곱은 이제까지 많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무슨 축복을 더 원하는 것입니까? 그가 생각하는 진정한 축복은 무엇입니까? 그는 두려움을 극복하고 죄사함을 받고 싶었습니다. 그를 짓누르고 있던 죄문제를 해결받고 싶었습니다. 그의 가슴을 돌로 누르던 것 같은 답답함에서 해방되고 싶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는 그의 존재를 물으시는 것입니다. 네가 누구냐는 것입니다. 이에 야곱이 대답했습니다. 야곱이니이다. 저는 사기꾼입니다. 저는 속이는 자입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저는 심판받아 마땅한 협잡꾼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문제를 고백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야곱은 울며 간구하였습니다(호12:4).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그는 자신의 존재가 변화받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다운 내면성을 갖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그의 이름을 어떻게 고쳐주셨습니까?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그는 이스라엘이란 이름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는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습니다. 에서와 라반과 싸워 이겼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습니다. 그러나 야곱이 이기었다고 한 것은 그의 고집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항복과 기도를 통해서 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이기는 유일한 방법은 눈물과 기도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의 울음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우리 마음이 찢기고 상하여 절망 가운데 울부짖는 그 순간이 바로 하나님을 이기는 순간입니다. 이처럼 승리의 기도는 상한 마음과 눈물을 동반합니다. 자기의 무력함과 무지함과 불구임을 하나님 앞에 인정하고 하나님께 도와주십사고 간청해야 합니다. 이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져 주십니다. 좌절과 무기력과 두려움 가운데 처한 우리를 축복하시고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그는 이제까지는 움켜쥐고자만 했는데 앞으로는 나누어주는 삶을 살게 됩니다. 자기의 자녀들을 축복하고 애굽 왕 바로를 축복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황태자다운 내면성을 갖게 되는 방향 전환을 이루었습니다. 그의 이름이 이스라엘인데 이는 더 이상 자기의 지혜와 노력으로 자족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 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에 의해 지배받는 것이야말로 최상의 축복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야곱은 바로 이 축복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이 축복을 어떻게 해서 얻을 수 있었습니까? 자기 재주로 얻었습니까? 아닙니다. 그 축복은 하나님에 의해 그의 환도뼈가 위골당하고 결국 하나님께 완전히 항복했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벌써부터 그에게 그 축복을 주시고자 했지만 야곱 편에서 그럴 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를 절름발이로 만들고 나서 그가 항복하는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그를 축복하실 수 있었습니다. 완전한 항복,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밤새도록 야곱과 씨름하셨지만 야곱은 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고집을 부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원치 않으셨지만 할수없이 그의 환도뼈를 치신 것입니다. 이 일은 야곱이 자초한 것입니다. 그의 고집 때문에 일어났던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과 다투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불구가 되기 전에 빨리 항복하는 것이 제일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선한 최고의 축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잘 아시고 우리에게 제일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알고 계시기 때문에 그것을 주시고자 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모르고 하나님과 씨름을 벌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시려면 우리를 쳐서 온전히 항복하게 하시는 수 밖에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강한 능력은 우리의 나약함을 통해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얼굴이란 뜻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 환도뼈로 인하여 절었습니다. 그는 내면이 해같이 밝아졌습니다. 모든 어두움이 사라졌습니다. 자신의 내면 문제가 하나님 앞에서 해결되자 에서를 만날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사실 그의 죄문제는 에서와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문제였습니다. 그가 용감하게 또 겸손하게 하나님과 영적인 씨름을 하였을 때 진정한 축복을 덧입게 되었습니다.

Ⅱ. 형 에서와 화해한 야곱(33:1-20)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야곱은 내면이 해같이 밝아졌습니다. 야곱이 눈을 들어 보니 에서가 사백 인을 거느리고 오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식들을 나누어 레아와 라헬과 두 여종에게 맡기고 여종과 그 자식들은 앞에 두고 레아와 그 자식들은 다음에 두고 라헬과 요셉은 뒤에 두고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 형 에서에게 가까이 하였습니다. 어제 밤만 해도 그는 맨 뒤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맨 앞장을 섰습니다. 그리고 왕이 신하에게 예의를 표하듯 일곱 번 절하고 에서를 맞이하였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안고 목을 어긋맞기고 그와 입맞추며 서로 울었습니다. 이것은 남북한의 이산 가족들이 만나서 부둥켜 안고 눈물을 흘리는 것과 같았습니다. 에서는 야곱의 가족들과 상견례를 가졌습니다. 그리고 나의 만난 바 이 모든 떼는 무슨 까닭이냐고 물었습니다. 야곱이 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함이니이다고 하자 에서는 사양하면서 말했습니다. "내 동생아 내게 있는 것이 족하니 네 소유는 네게 두라." 그러나 야곱은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형님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청컨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푸셨고 나의 소유도 족하오니 청컨대 내가 형님께 드리는 예물을 받으소서 하고 그에게 강권하매 받았습니다."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는 말과 같이 야곱의 마음이 변화되자 원수같던 에서도 이제는 하나님의 얼굴과 같이 보였습니다. 이와같이 그의 마음에 하나님의 얼굴 빛이 비추이자 자기를 미워하는 형제도 사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에서는 이제 야곱의 앞잡이가 되어 안내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자식들이 유약하고 또 양떼와 소떼가 새끼를 데렸기 때문에 하루만 과히 몰면 모든 떼가 죽을 것이 염려되어 천천히 가고자 한다고 하면서 사양하였습니다. 이 날에 에서는 세일로 회정하고 야곱은 숙곳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벧엘로 올라가지 않고 요단강 변에 있는 넓은 목초지를 보고는 그곳에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짐승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주저 앉았습니다. 이제 문제가 조금 해결되니 현실적이 된 것입니다. 그는 그 장막 친 밭을 세겜의 아비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은 일백 개로 사고 거기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야곱을 보면 어찌 우리와 그렇게 똑같은지요. 그래서 그는 밉지 않습니다. 우리와 너무나 똑같기  때문입니다. 그를 보고 있으면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쓸모없는 죄인들을 훈련하시고 사랑하사 복의 근원으로 키우십니다. 소망 가운데 우리를 믿음의 조상으로 키우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진정한 축복이 무엇인가 배우게 되었습니다. 진정한 축복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 눈물과 간구로 영적인 씨름을 하는 가운데 존재가 변화되는 축복을 체험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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