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야곱 제 1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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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 제 1 강
창세기 27:1-28:22
요 절 28:15
야곱을 택하신 하나님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택하시고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주신 축복을 계승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택하신 것은 은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에 대해서 많은 것을 다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를 깊이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도망자가 되어서 나그네 생활을 시작할 때에 비전을 주심으로 그의 일생을 인도하셨습니다. 우리에게도 어려움에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비전이 필요합니다. 이 시간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을 새롭게 하는 시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Ⅰ. 야곱을 택하신 하나님(25:21-26, 27:18-29)
이삭이 그 아내가 잉태하지 못하므로 그 아내를 위하여 20년을 간구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때가 되자 이삭의 기도를 들으시고 아들 쌍둥이를 주셨습니다. 이삭은 진정한 애처가였습니다. 아내가 아들을 낳지 못한다고 해서 구박하지 않고 그녀의 아픔을 감당해주면서 하나님께 나아가 끈질기게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리브가가 잉태하였는데 하루는 태 속에서 아이들이 서로 싸우는 것이었습니다. 리브가는 아픈 배를 잡고 산부인과로 가지 않고 먼저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였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리브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25:23)." 하나님께서는 모태에서부터 야곱에게 뜻을 두셨습니다. 그들이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은 인간의 행위나 조건에 근거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는 장자인 에서가 이삭으로부터 축복을 계승해야 할 것인데 차자인 야곱에게로 축복이 계승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불공평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누구를 택하느냐 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일이요 하나님께 속한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에서는 미워하였고 야곱은 사랑하셨다고 말라기 선지자는 말하였습니다(말1:2,3). 우리가 이런 것들을 보고 하나님께서 불공평하고 불합리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 생각과 다르시고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보다 높으십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의 은혜는 불가항력적인 은총입니다. 택함을 받지 못한 에서는 할 말이 없습니다. 자신이 장자의 명분을 팔아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왜 이렇게 하셨느냐고 따질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성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선하신 주권에 굴복해야 합니다.
리브가가 해산 기간이 차서 쌍둥이를 낳았는데 먼저 나온 자는 붉고 전신이 털옷 같아서 이름을 에서라 하였습니다. 나중에 야곱이 에서를 가장하기 위해서 염소털을 붙여야 했던 것을 보면 얼마나 털이 많았는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고 하였습니다. 야곱은 태어날 때부터 상당히 경쟁적이며 투쟁적인 성품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는 앉아서 축복을 기다리지 않는 적극적인 행동파였습니다. 그는 하나님 약속을 투쟁으로 쟁취하는 독특한 삶의 스타일을 보여준 인물입니다. 야곱의 신앙은 아브라함과 같이 묵묵히 기다림도 아니요, 이삭과 같이 순종으로 일관된 유순한 삶도 아니었습니다. 야곱의 신앙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약속된 하나님의 복을 믿는 것일 뿐 아니라 그것을 성취하기 위한 투쟁이기도 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을 앉아서 기다릴 수만은 없었습니다. 그는 일어나서 싸우고 행동으로 쟁취했습니다. 그는 척박한 현실에서 피나는 노력을 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복도 현실화 될 수 없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는 에서의 진노를 피해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간 타향살이를 하면서 아내를 넷이나 얻고 아들 열 둘과 많은 가축을 이끄는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야곱은 현실을 타개하고 원하는 것을 성취하기 위해 속이기도 하고 끈질기게 찾기도 하고 대들기도 하며 기회를 놓치지 않는 고투의 길을 걸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는 현대 사회가 요구하는 인간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야곱은 쌍둥이로 태어났지만 장자의 명분을 간발 차로 빼앗긴 것에 대해서 억울하였습니다. 그래서 호시탐탐 이것을 빼앗을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종용한 사람이었는데 속에는 야심이 들끓고 있었습니다. 그는 장막에 거하면서 요리를 주로 하였고 형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인고로 들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루는 야곱이 죽을 쑤었는데 에서가 들에서부터 돌아와서 심히 곤비하여 야곱에게 부탁하였습니다. 내가 곤비하니 그 붉은 것을 나로 먹게 하라. 야곱은 이때 형의 장자의 명분을 내게 팔라고 흥정을 하였습니다. 그는 형이 배고프면 참지 못하는 성미와 피곤한 때를 이용하여 장자의 명분을 빼앗고자 했습니다. 이를 볼 때 그가 얼마나 장사꾼 스피릿이 충만한가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나중에 하나님과도 이런 식으로 거래를 하였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장자의 명분을 귀하게 여겼습니다. 장자의 명분은 아브라함과 이삭의 축복을 상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물줄기를 잇는 것입니다. 복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장자에게는 재산도 차자에 비해서 갑절이나 상속되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재산에 눈독을 들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상속 재산을 다 에서에게 주었습니다. 그렇지만 영적인 축복은 야곱이 가져갔습니다. 장자에게는 제사권이 있었습니다. 가정과 부족의 제사장으로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아주 중요한 직분이었습니다. 장자의 명분이 당장 유익이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귀히 쓰임 받고 하나님의 역사에 남는 것을 원했습니다. 그는 장자의 명분을 얻은 다음에 사랑을 얻고자 했고 그 다음에 물질을 얻고자 했습니다. 한마디로 그는 영적인 가치관이 분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에서는 가치관이 야곱과 달랐습니다. 그는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하고는 맹세를 하면서 까지 장자의 명분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아 먹었습니다. 히12:16절에 보면 에서를 망령된 자라고 하였습니다. 뒤에 보면 그는 야곱이 축복을 받은 것을 보고 대성 통곡하였는데 히브리서는 계속해서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히12:17)."고 했습니다. 그런데 더 정확한 번역은 그가 축복을 얻지 못한 것은 회개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해야 옳습니다. 그가 눈물로 구한 것은 회개가 아니라 축복이었습니다. 이처럼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축복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즉 회개해야 축복이 오는 것입니다. 야곱을 볼 때 근본적으로 축복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에서의 가치관은 자기에게 유익이 되면 선이고 해가 되면 악이었습니다. 그의 가치관은 결혼을 하는데서도 잘 나타납니다. 자기가 볼 때 마음에 드는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몇 명을 택하여 아내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아비 이삭을 기쁘게 못하자 이스마엘의 딸이요 느바욧의 누이인 마할랏을 아내로 삼았습니다. 그는 육신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이삭에게 축복을 받지만 속빈 것이었고 아브라함과 이삭의 축복은 야곱에게로 넘어갔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자의 명분, 목자의 명분을 귀중히 여겨야 함을 배우게 됩니다. 목자의 명분이 밥 먹여 주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것도 아닙니다. 도리어 시간과 물질을 희생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표현이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길입니다. 목자의 특권은 말씀을 배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양을 치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배울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을 돌아오게 하는 자는 하늘의 별과 같이 빛나게 됩니다. 우리는 이 직분을 무엇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에 기초해서 해야 합니다. 죄사함 받은 것만 해도 감사해서 감당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주셨습니다. 우리는 일생 동안 목자의 직분을 감당하면서 하나님의 축복을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야곱은 영적 가치관이 있는 것은 좋은데 좋지 않은 방법으로 에서의 축복을 가로챘습니다. 그는 어머니 리브가의 도움을 받아서 이삭을 속였습니다. 그런데 리브가가 이 모든 사건을 조작한 책임자였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때로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목적을 믿는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도움이 없이는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착각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을 분명히 믿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이루실 줄을 믿습니다. 그러나 가끔 하나님께서는 내 도움이 없이는 그 뜻을 이루실 수 없다고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도 그러한 착각 때문에 하나님을 도우려고 한 적이 있습니다. 사라는 그의 여종 하갈을 아브라함에게 아내로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라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주어 집안의 대를 잇게 하실 것을 믿었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리브가가 하나님을 도와드리려고 합니다. 그녀는 약간의 속임수를 써서라도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였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걱정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방법대로 그의 목적을 이루십니다.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반드시 하십니다. 목적이 선하다고 해서 옳지 못한 수단을 사용해도 좋다는 잘못된 철학이 많이 번져 있습니다. 바울도 이 문제를 언급하기를 선을 이루기 위해서 악을 행하자고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그런 사람들은 정죄받는 것이 마땅하다(롬3:8)고 말했습니다. 야곱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도 팔았습니다. 자신을 에서로 꾸미고 축복을 가로챘습니다. 결국 그가 이삭에게서 축복을 받았지만 그로 인해 에서에게 미움을 받아서 밧단아람으로 도망을 가야 했습니다. 부모님과는 20년 동안 생이별을 해야 했습니다. 그는 속임수로 축복을 가로챘기 때문에 그에 합당한 인생 훈련을 받게 되었습니다. 또한 리브가는 잠시 동안만 떨어져 있으면 될 줄 알았는데 야곱이 하란에서 20년을 머물다가 돌아왔을 때 그녀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사랑하는 아들 야곱을 더 이상 보지 못하고 죽게 되는 비극을 자초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기까지 기다리고 하나님의 뜻을 알았다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을 지켜보고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가 앞서지 말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해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Ⅱ. 야곱에게 소망을 두신 하나님(28:1-22)
에서는 야곱에게 축복을 빼앗기자 야곱을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에서가 야곱을 죽여 한을 풀려고 하자 리브가는 야곱을 밧단아람에 있는 오라버니 라반에게 피신을 시키고자 하였습니다. 이삭에게는 야곱의 결혼을 구실 삼아 보내도록 하였습니다. 이삭은 야곱을 불러 축복을 하고 한가지 부탁을 하였습니다. "너는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취하지 말고 일어나 밧단아람으로 가서 너의 외조부 브두엘 집에 이르러 거기서 너의 외삼촌 라반의 딸 중에서 아내를 취하라.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어 너로 생육하고 번성케 하사 너로 여러 족속을 이루게 하시고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을 네게 주시되 너와 너와 함께 네 자손에게 주사 너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 곧 너의 우거하는 땅을 유업으로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28:2-4)." 야곱은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갔습니다. 개나리 봇짐 하나를 어깨에 매고 달렸습니다. 사냥을 잘 하는 에서가 쫓아와서 죽일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는 하루만에 64Km를 달렸습니다. 그의 마음은 두려움과 불안으로 가득했습니다. 어느덧 밤이 되어 그곳의 한 돌을 취하여 베개하고 거기 누워 잠을 잤습니다. 그는 꿈을 꾸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고" 사닥다리는 땅과 하늘을 잇고 있었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로서 임하실 것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요1:51절에서 나다나엘에게 이 꿈이 이루어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되십니다. 야곱은 이 꿈을 통해서 하나님과 교통하는 소원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닥다리 위에 서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서 동서 남북에 편만할찌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13-15)."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하셨던 약속과 같은 것입니다. 땅과 자손과 세계 만민을 향한 복의 근원으로 쓰시겠다는 것입니다. 지금 장래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이 꿈은 그의 일생을 지배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근거로 그를 인도하셨습니다. 그에게 현실 문제해결 보다 더 필요한 것이 비전이었습니다. 비전이 없으면 백성이 망한다고 하였습니다. 다른 영어 번역판은 '묵시가 없는 곳에 선 백성들은 구속을 벗어버린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집단적인 비전이 없이는 백성들은 혼돈과 무질서, 제약없는 방종, 또는 소용돌이의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한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비전이 없는 인생은 성공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꿈꾸는 사람들에 의해서 역사가 창조되어져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 피터 대제, 올리버 크롬웰, 조지 워싱턴등 이들은 모두 한결 같이 위대한 비전을 지녔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지불해야만 했던 대가는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많은 지도자들이 중상 모략을 받았거나 알렉산더처럼 일찍 죽었거나 시이저처럼 살해되거나 나폴레옹처럼 유배되거나 링컨처럼 암살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 나름의 비전을 위해서 대담하게 열심히 계속해서 일을 했습니다.
비전은 환상이 아닙니다. 비전은 '자기 자신을 아는' 데서부터 시작하여 사회와 세계의 과거와 현재를 종합적으로 진단하고 보다 밝은 미래를 구상하는데서 얻어집니다. 믿음을 통해서 비전은 활기를 띠며 완성되는 것입니다. 미래는 꿈꾸며 준비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열려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에 비전이 생기고 내면이 치료될 때 비전이 생깁니다. 우리는 어떤 꿈을 꾸고 있습니까? 우리들에게 있어서 캠퍼스 선교와 세계 선교의 꿈은 허황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기초한 것입니다. 역사성이 있는 것입니다. 세계 선교에 대한 꿈을 꾸고 제자들이 들며 날며 성장할 꿈을 꾸고 많은 개척자들이 나올 꿈을 꿀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곳이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영역을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는 것을 압니다(롬14:17). 진리가 다스리고 공의가 충만한 나라를 만들어야 합니다. 정의로운 사회란 각 사람에게 자신의 공로와 생산성에 비례해서 마땅히 받아야 할 몫을 돌려주는 곳만이 아니라 사회적인 약자들이 인간다운 최소한의 기본적인 권리를 누리며 살 수 있도록 보호하고 긍휼을 베풀어 주는 사회입니다. 제가 지난 한 해를 볼 때 가난한 자들, 소외된 자들을 도울 수 있는 기회를 많이 저버렸음을 깨닫고 회개합니다. 앞으로 우리가 구제 사업에 더욱 힘을 써서 긍휼을 베풀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우리는 화평이 가득한 나라를 만들어야 합니다. 화평이란 마음과 마음이 화합되는 것인데 오직 성령만이 사람의 마음을 화합시킬 수 있습니다. 희락이란 하나님과 함께 하는 행복을 뜻합니다.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우리들은 진정한 기쁨, 진정한 행복의 원천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개인뿐만 아니라 우리의 공동체 속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더 나아가 남과 북이 하나님 안에서 하나가 될 꿈을 꾸어야 합니다. 남북 통일이 복음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세계 233개국에 예수님을 닮은 사람들로 가득차고 이 세계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도록 기도하고 선교사를 파송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비전을 가질 때 집중력을 가지게 됩니다. 집중력은 사람의 성패를 좌우합니다. 비전이 있는 사람은 선택을 용이하게 합니다. 자기가 하고자 하는 삶의 목적이 있기 때문에 그 비전과 잘 맞는 길은 선택하고 그렇지 못한 일은 과감하게 버릴 수 있습니다. 선택을 아무렇게나 하고 좋은 결과를 기대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니 비전이 있는 사람은 불필요한 낭비를 하지 않습니다. 일단 결정된 사안은 결코 지연시키지 않습니다. 곧 그것을 행동화합니다. 비전이 있는 사람은 누가 시켜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솔선해서 먼저 움직입니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생각하고 선택한 내면화한 가치에 모든 것을 종속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전이 있는 사람은 인내를 배웁니다. 그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에디슨은 필라멘트를 만들려고 2천번이나 실패를 거듭하였습니다. 그러나 비전은 그의 열정을 꺼트릴 수 없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을 품고 수많은 어려움들을 이겨냈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주신 이 약속들은 하나 하나가 엄청나게 큰 것들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자신의 현실 문제가 너무 커 보였기 때문에 꼬랑지 것만 붙들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자신에게 먹을 것과 입을 옷을 주시고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오게 하시면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서원 기도하였습니다. 그는 하루 전만 해도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불안과 초조와 두려움이 그를 엄습하였고 미래에 대한 염려와 걱정 뿐이었습니다. 그는 여행 끝에 피곤에 지쳐 외로움 속에서 홀로 밤을 보내야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꿈을 꾼 후에 그가 깨어난 지금 야곱은 그곳에 하나님이 계신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우리가 가장 어려운 처지에 처했을 때, 우리가 궁지에 몰릴 때 느껴지는 것입니다. 불안과 초조, 두려움에 쌓여 절망에 빠질 때 바로 그 순간이 하나님의 임재를 강하게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공아브라함선교사님을 독일로 파송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과 함께 하셨듯이 그와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야곱을 택하시고 그에게 비전을 주신 하나님을 배웠습니다. 저희가 집단적인 비전을 구체화시킬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 그에 합당한 댓가를 지불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그 비전을 붙잡고 올 한해 이를 성취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창세기 27:1-28:22
요 절 28:15
야곱을 택하신 하나님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택하시고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주신 축복을 계승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택하신 것은 은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에 대해서 많은 것을 다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를 깊이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도망자가 되어서 나그네 생활을 시작할 때에 비전을 주심으로 그의 일생을 인도하셨습니다. 우리에게도 어려움에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비전이 필요합니다. 이 시간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을 새롭게 하는 시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Ⅰ. 야곱을 택하신 하나님(25:21-26, 27:18-29)
이삭이 그 아내가 잉태하지 못하므로 그 아내를 위하여 20년을 간구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때가 되자 이삭의 기도를 들으시고 아들 쌍둥이를 주셨습니다. 이삭은 진정한 애처가였습니다. 아내가 아들을 낳지 못한다고 해서 구박하지 않고 그녀의 아픔을 감당해주면서 하나님께 나아가 끈질기게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리브가가 잉태하였는데 하루는 태 속에서 아이들이 서로 싸우는 것이었습니다. 리브가는 아픈 배를 잡고 산부인과로 가지 않고 먼저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였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리브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25:23)." 하나님께서는 모태에서부터 야곱에게 뜻을 두셨습니다. 그들이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은 인간의 행위나 조건에 근거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는 장자인 에서가 이삭으로부터 축복을 계승해야 할 것인데 차자인 야곱에게로 축복이 계승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불공평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누구를 택하느냐 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일이요 하나님께 속한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에서는 미워하였고 야곱은 사랑하셨다고 말라기 선지자는 말하였습니다(말1:2,3). 우리가 이런 것들을 보고 하나님께서 불공평하고 불합리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 생각과 다르시고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보다 높으십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의 은혜는 불가항력적인 은총입니다. 택함을 받지 못한 에서는 할 말이 없습니다. 자신이 장자의 명분을 팔아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왜 이렇게 하셨느냐고 따질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성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선하신 주권에 굴복해야 합니다.
리브가가 해산 기간이 차서 쌍둥이를 낳았는데 먼저 나온 자는 붉고 전신이 털옷 같아서 이름을 에서라 하였습니다. 나중에 야곱이 에서를 가장하기 위해서 염소털을 붙여야 했던 것을 보면 얼마나 털이 많았는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고 하였습니다. 야곱은 태어날 때부터 상당히 경쟁적이며 투쟁적인 성품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는 앉아서 축복을 기다리지 않는 적극적인 행동파였습니다. 그는 하나님 약속을 투쟁으로 쟁취하는 독특한 삶의 스타일을 보여준 인물입니다. 야곱의 신앙은 아브라함과 같이 묵묵히 기다림도 아니요, 이삭과 같이 순종으로 일관된 유순한 삶도 아니었습니다. 야곱의 신앙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약속된 하나님의 복을 믿는 것일 뿐 아니라 그것을 성취하기 위한 투쟁이기도 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을 앉아서 기다릴 수만은 없었습니다. 그는 일어나서 싸우고 행동으로 쟁취했습니다. 그는 척박한 현실에서 피나는 노력을 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복도 현실화 될 수 없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는 에서의 진노를 피해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간 타향살이를 하면서 아내를 넷이나 얻고 아들 열 둘과 많은 가축을 이끄는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야곱은 현실을 타개하고 원하는 것을 성취하기 위해 속이기도 하고 끈질기게 찾기도 하고 대들기도 하며 기회를 놓치지 않는 고투의 길을 걸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는 현대 사회가 요구하는 인간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야곱은 쌍둥이로 태어났지만 장자의 명분을 간발 차로 빼앗긴 것에 대해서 억울하였습니다. 그래서 호시탐탐 이것을 빼앗을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종용한 사람이었는데 속에는 야심이 들끓고 있었습니다. 그는 장막에 거하면서 요리를 주로 하였고 형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인고로 들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루는 야곱이 죽을 쑤었는데 에서가 들에서부터 돌아와서 심히 곤비하여 야곱에게 부탁하였습니다. 내가 곤비하니 그 붉은 것을 나로 먹게 하라. 야곱은 이때 형의 장자의 명분을 내게 팔라고 흥정을 하였습니다. 그는 형이 배고프면 참지 못하는 성미와 피곤한 때를 이용하여 장자의 명분을 빼앗고자 했습니다. 이를 볼 때 그가 얼마나 장사꾼 스피릿이 충만한가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나중에 하나님과도 이런 식으로 거래를 하였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장자의 명분을 귀하게 여겼습니다. 장자의 명분은 아브라함과 이삭의 축복을 상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물줄기를 잇는 것입니다. 복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장자에게는 재산도 차자에 비해서 갑절이나 상속되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재산에 눈독을 들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상속 재산을 다 에서에게 주었습니다. 그렇지만 영적인 축복은 야곱이 가져갔습니다. 장자에게는 제사권이 있었습니다. 가정과 부족의 제사장으로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아주 중요한 직분이었습니다. 장자의 명분이 당장 유익이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귀히 쓰임 받고 하나님의 역사에 남는 것을 원했습니다. 그는 장자의 명분을 얻은 다음에 사랑을 얻고자 했고 그 다음에 물질을 얻고자 했습니다. 한마디로 그는 영적인 가치관이 분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에서는 가치관이 야곱과 달랐습니다. 그는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하고는 맹세를 하면서 까지 장자의 명분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아 먹었습니다. 히12:16절에 보면 에서를 망령된 자라고 하였습니다. 뒤에 보면 그는 야곱이 축복을 받은 것을 보고 대성 통곡하였는데 히브리서는 계속해서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히12:17)."고 했습니다. 그런데 더 정확한 번역은 그가 축복을 얻지 못한 것은 회개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해야 옳습니다. 그가 눈물로 구한 것은 회개가 아니라 축복이었습니다. 이처럼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축복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즉 회개해야 축복이 오는 것입니다. 야곱을 볼 때 근본적으로 축복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에서의 가치관은 자기에게 유익이 되면 선이고 해가 되면 악이었습니다. 그의 가치관은 결혼을 하는데서도 잘 나타납니다. 자기가 볼 때 마음에 드는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몇 명을 택하여 아내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아비 이삭을 기쁘게 못하자 이스마엘의 딸이요 느바욧의 누이인 마할랏을 아내로 삼았습니다. 그는 육신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이삭에게 축복을 받지만 속빈 것이었고 아브라함과 이삭의 축복은 야곱에게로 넘어갔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자의 명분, 목자의 명분을 귀중히 여겨야 함을 배우게 됩니다. 목자의 명분이 밥 먹여 주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것도 아닙니다. 도리어 시간과 물질을 희생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표현이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길입니다. 목자의 특권은 말씀을 배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양을 치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배울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을 돌아오게 하는 자는 하늘의 별과 같이 빛나게 됩니다. 우리는 이 직분을 무엇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에 기초해서 해야 합니다. 죄사함 받은 것만 해도 감사해서 감당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주셨습니다. 우리는 일생 동안 목자의 직분을 감당하면서 하나님의 축복을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야곱은 영적 가치관이 있는 것은 좋은데 좋지 않은 방법으로 에서의 축복을 가로챘습니다. 그는 어머니 리브가의 도움을 받아서 이삭을 속였습니다. 그런데 리브가가 이 모든 사건을 조작한 책임자였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때로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목적을 믿는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도움이 없이는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착각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을 분명히 믿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이루실 줄을 믿습니다. 그러나 가끔 하나님께서는 내 도움이 없이는 그 뜻을 이루실 수 없다고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도 그러한 착각 때문에 하나님을 도우려고 한 적이 있습니다. 사라는 그의 여종 하갈을 아브라함에게 아내로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라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주어 집안의 대를 잇게 하실 것을 믿었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리브가가 하나님을 도와드리려고 합니다. 그녀는 약간의 속임수를 써서라도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였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걱정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방법대로 그의 목적을 이루십니다.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반드시 하십니다. 목적이 선하다고 해서 옳지 못한 수단을 사용해도 좋다는 잘못된 철학이 많이 번져 있습니다. 바울도 이 문제를 언급하기를 선을 이루기 위해서 악을 행하자고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그런 사람들은 정죄받는 것이 마땅하다(롬3:8)고 말했습니다. 야곱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도 팔았습니다. 자신을 에서로 꾸미고 축복을 가로챘습니다. 결국 그가 이삭에게서 축복을 받았지만 그로 인해 에서에게 미움을 받아서 밧단아람으로 도망을 가야 했습니다. 부모님과는 20년 동안 생이별을 해야 했습니다. 그는 속임수로 축복을 가로챘기 때문에 그에 합당한 인생 훈련을 받게 되었습니다. 또한 리브가는 잠시 동안만 떨어져 있으면 될 줄 알았는데 야곱이 하란에서 20년을 머물다가 돌아왔을 때 그녀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사랑하는 아들 야곱을 더 이상 보지 못하고 죽게 되는 비극을 자초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기까지 기다리고 하나님의 뜻을 알았다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을 지켜보고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가 앞서지 말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해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Ⅱ. 야곱에게 소망을 두신 하나님(28:1-22)
에서는 야곱에게 축복을 빼앗기자 야곱을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에서가 야곱을 죽여 한을 풀려고 하자 리브가는 야곱을 밧단아람에 있는 오라버니 라반에게 피신을 시키고자 하였습니다. 이삭에게는 야곱의 결혼을 구실 삼아 보내도록 하였습니다. 이삭은 야곱을 불러 축복을 하고 한가지 부탁을 하였습니다. "너는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취하지 말고 일어나 밧단아람으로 가서 너의 외조부 브두엘 집에 이르러 거기서 너의 외삼촌 라반의 딸 중에서 아내를 취하라.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어 너로 생육하고 번성케 하사 너로 여러 족속을 이루게 하시고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을 네게 주시되 너와 너와 함께 네 자손에게 주사 너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 곧 너의 우거하는 땅을 유업으로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28:2-4)." 야곱은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갔습니다. 개나리 봇짐 하나를 어깨에 매고 달렸습니다. 사냥을 잘 하는 에서가 쫓아와서 죽일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는 하루만에 64Km를 달렸습니다. 그의 마음은 두려움과 불안으로 가득했습니다. 어느덧 밤이 되어 그곳의 한 돌을 취하여 베개하고 거기 누워 잠을 잤습니다. 그는 꿈을 꾸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고" 사닥다리는 땅과 하늘을 잇고 있었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로서 임하실 것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요1:51절에서 나다나엘에게 이 꿈이 이루어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되십니다. 야곱은 이 꿈을 통해서 하나님과 교통하는 소원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닥다리 위에 서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서 동서 남북에 편만할찌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13-15)."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하셨던 약속과 같은 것입니다. 땅과 자손과 세계 만민을 향한 복의 근원으로 쓰시겠다는 것입니다. 지금 장래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이 꿈은 그의 일생을 지배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근거로 그를 인도하셨습니다. 그에게 현실 문제해결 보다 더 필요한 것이 비전이었습니다. 비전이 없으면 백성이 망한다고 하였습니다. 다른 영어 번역판은 '묵시가 없는 곳에 선 백성들은 구속을 벗어버린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집단적인 비전이 없이는 백성들은 혼돈과 무질서, 제약없는 방종, 또는 소용돌이의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한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비전이 없는 인생은 성공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꿈꾸는 사람들에 의해서 역사가 창조되어져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 피터 대제, 올리버 크롬웰, 조지 워싱턴등 이들은 모두 한결 같이 위대한 비전을 지녔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지불해야만 했던 대가는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많은 지도자들이 중상 모략을 받았거나 알렉산더처럼 일찍 죽었거나 시이저처럼 살해되거나 나폴레옹처럼 유배되거나 링컨처럼 암살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 나름의 비전을 위해서 대담하게 열심히 계속해서 일을 했습니다.
비전은 환상이 아닙니다. 비전은 '자기 자신을 아는' 데서부터 시작하여 사회와 세계의 과거와 현재를 종합적으로 진단하고 보다 밝은 미래를 구상하는데서 얻어집니다. 믿음을 통해서 비전은 활기를 띠며 완성되는 것입니다. 미래는 꿈꾸며 준비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열려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에 비전이 생기고 내면이 치료될 때 비전이 생깁니다. 우리는 어떤 꿈을 꾸고 있습니까? 우리들에게 있어서 캠퍼스 선교와 세계 선교의 꿈은 허황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기초한 것입니다. 역사성이 있는 것입니다. 세계 선교에 대한 꿈을 꾸고 제자들이 들며 날며 성장할 꿈을 꾸고 많은 개척자들이 나올 꿈을 꿀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곳이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영역을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는 것을 압니다(롬14:17). 진리가 다스리고 공의가 충만한 나라를 만들어야 합니다. 정의로운 사회란 각 사람에게 자신의 공로와 생산성에 비례해서 마땅히 받아야 할 몫을 돌려주는 곳만이 아니라 사회적인 약자들이 인간다운 최소한의 기본적인 권리를 누리며 살 수 있도록 보호하고 긍휼을 베풀어 주는 사회입니다. 제가 지난 한 해를 볼 때 가난한 자들, 소외된 자들을 도울 수 있는 기회를 많이 저버렸음을 깨닫고 회개합니다. 앞으로 우리가 구제 사업에 더욱 힘을 써서 긍휼을 베풀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우리는 화평이 가득한 나라를 만들어야 합니다. 화평이란 마음과 마음이 화합되는 것인데 오직 성령만이 사람의 마음을 화합시킬 수 있습니다. 희락이란 하나님과 함께 하는 행복을 뜻합니다.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우리들은 진정한 기쁨, 진정한 행복의 원천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개인뿐만 아니라 우리의 공동체 속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더 나아가 남과 북이 하나님 안에서 하나가 될 꿈을 꾸어야 합니다. 남북 통일이 복음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세계 233개국에 예수님을 닮은 사람들로 가득차고 이 세계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도록 기도하고 선교사를 파송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비전을 가질 때 집중력을 가지게 됩니다. 집중력은 사람의 성패를 좌우합니다. 비전이 있는 사람은 선택을 용이하게 합니다. 자기가 하고자 하는 삶의 목적이 있기 때문에 그 비전과 잘 맞는 길은 선택하고 그렇지 못한 일은 과감하게 버릴 수 있습니다. 선택을 아무렇게나 하고 좋은 결과를 기대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니 비전이 있는 사람은 불필요한 낭비를 하지 않습니다. 일단 결정된 사안은 결코 지연시키지 않습니다. 곧 그것을 행동화합니다. 비전이 있는 사람은 누가 시켜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솔선해서 먼저 움직입니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생각하고 선택한 내면화한 가치에 모든 것을 종속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전이 있는 사람은 인내를 배웁니다. 그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에디슨은 필라멘트를 만들려고 2천번이나 실패를 거듭하였습니다. 그러나 비전은 그의 열정을 꺼트릴 수 없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을 품고 수많은 어려움들을 이겨냈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주신 이 약속들은 하나 하나가 엄청나게 큰 것들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자신의 현실 문제가 너무 커 보였기 때문에 꼬랑지 것만 붙들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자신에게 먹을 것과 입을 옷을 주시고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오게 하시면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서원 기도하였습니다. 그는 하루 전만 해도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불안과 초조와 두려움이 그를 엄습하였고 미래에 대한 염려와 걱정 뿐이었습니다. 그는 여행 끝에 피곤에 지쳐 외로움 속에서 홀로 밤을 보내야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꿈을 꾼 후에 그가 깨어난 지금 야곱은 그곳에 하나님이 계신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우리가 가장 어려운 처지에 처했을 때, 우리가 궁지에 몰릴 때 느껴지는 것입니다. 불안과 초조, 두려움에 쌓여 절망에 빠질 때 바로 그 순간이 하나님의 임재를 강하게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공아브라함선교사님을 독일로 파송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과 함께 하셨듯이 그와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야곱을 택하시고 그에게 비전을 주신 하나님을 배웠습니다. 저희가 집단적인 비전을 구체화시킬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 그에 합당한 댓가를 지불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그 비전을 붙잡고 올 한해 이를 성취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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