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강 2000년 성탄메시지 제 2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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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성탄메시지 제 2 강
말씀/마태복음 2:1-11
요절/마태복음 2:2
왕이 나셨도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성탄절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건 믿지 않는 사람이건 모두가 즐거워하고 들떠서 지내는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 사람들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되셨습니다. 죄와 죽음의 세력에 붙잡혀서 멸망해 가던 우리들에게 구원자가 오신 것은 얼마나 큰 기쁨입니까? 예수님이 오심으로 우리의 인생 문제들이 해결되고 죽었던 우리가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이 시간 동방박사들이 베들레헴에 탄생하신 유대인의 왕을 경배하기 위해서 어떤 수고를 했는가를 배우고 우리도 온전한 경배를 드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왕으로 나신 이 (1-8)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때의 시대 분위기는 매우 어두웠습니다. 헤롯 대왕이 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본래 명석하고 대담한 장군이었습니다. 그의 이름의 뜻은 '영웅의 아들'인데 B.C. 37-4년까지 통치했습니다. 그는 25세에 갈릴리의 총독을 역임하고 B.C.40년에 로마황제 아구스도에 의해 유대 왕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이두메 사마리아 갈릴리 지방을 쳐서 B.C.37년에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유대 왕으로 군림하였습니다. 그는 많은 공공 사업을 하고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에 착수하였습니다. 그는 열 명의 아내를 두고 많은 자녀를 두었습니다. 그는 성격이 강인하고 또 현명한 재질을 가졌으나 매우 잔인한 행위도 하였습니다. 그는 권력을 위해서 자기의 아들과 아내도 죽이고 장인도 죽였습니다. 그리고 처남도 시기심으로 죽였습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듣고 불안을 느껴 베들레헴의 두 살 이하의 아이들을 살해하였습니다. 그러다가 B.C. 4년에 악질에 걸려 70세로 죽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습니다. 지금도 베들레헴은 아득한 시대의 특성을 거의 변함없이 전원적으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곳은 올리브와 삼나무가 널려 있고 거칠고 바위가 많은 언덕에 위치한 하얀 마을입니다. 성스러운 마을인 베들레헴에는 오늘날까지도 넓은 목장 위에 짙은색 옷과 그들의 전형적인 머리띠를 멘 양치기 의해 인도되는 양과 염소들이 풀을 뜯으며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축하 사절단이 동방으로부터 예루살렘에 왔습니다. 그들은 박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별을 관측하고 기상을 살펴서 징조를 찾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창1:14절에는 하나님께서 궁창에 별을 만드시면서 그 광명으로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을 이루라고 하셨습니다. 징조란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미루어 알게 하는 일이나 현상, 조짐을 말합니다. 그들이 어떻게 예루살렘에 오게 되었습니까? 2절을 보십시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그의 별은 민수기 민 24:17에 예언되어 있었습니다. "내가 그를 보아도 이 때의 일이 아니며 내가 그를 바라보아도 가까운 일이 아니로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모압을 이편에서 저편까지 쳐서 파하고 또 소동하는 자식들을 다 멸하리로다." 이 별은 유대인의 왕이 탄생했다는 것을 알리는 별이었습니다. 그는 소동하는 자식들을 다 멸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3절을 보십시오.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우리는 여기서 유대인의 왕에게 경배하러 온 동방 박사들과 소동하는 사람들이 대조되어 나옴을 볼 수 있습니다. 성탄 연합 예배를 같은 장소에서 같은 내용으로 보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데 반대로 소동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이방인들로서 매우 멀리 지금의 이란인 페르샤에서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헤롯왕과 예루살렘 사람들은 베들레헴에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마태는 맨 처음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러 온 사람들로 이방인인 동방 박사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자기 땅에 자기 백성들에게 오셨지만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십니다. 동방박사들은 유대인의 왕에게 경배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그들은 박사요 왕의 모사로서 부와 명예와 권력을 소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갖춘 그들이 왜 유대인의 왕을 찾아 경배하고자 할까요? 그들이 영혼을 가진 존재로서 소유로 만족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들은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다 가진 후에는 목표를 상실했습니다. 그들의 절망은 원하던 것을 소유하기 전보다 더욱 컸습니다. 그들은 늙은 사람들이었는데 인생의 목표를 상실하자 더욱 늙어버렸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바벨론 시대부터 전수되었던 유대인의 왕이 탄생할 때에 나타난다는 야곱의 별을 발견하자 인생의 참된 목표가 생겼습니다. 그것은 유대인의 왕을 찾아 경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의 왕에게 경배하기 위해서 보배합을 준비하고 여행을 떠날 채비를 했습니다. 그들의 삶에는 생기가 돌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내면이 밤과 같이 어두웠는데 야곱의 별이 떠오르자 어두움이 물러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별의 인도함을 받아 여행을 할 때 수많은 어려움들이 있었습니다. 늙은이로서 먼 여행을 한다는 것은 육신이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들은 순례자와 같이 그 고통을 승화시켰습니다. 땅에 붙은 욕심을 떨어버리고 위엣 것을 찾아서 나아갔습니다. 별을 보는 생활은 별 볼일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스스로 스타가 되고자 합니다. 요즘 우리 시대는 진리보다는 실리가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그 영혼이 순수하고 높은 이상에 불타야할 대학 지성인들은 이제 더 이상 철학이나 문학, 역사, 수학 등을 자신의 전공으로 삼고자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것을 필요로 하는 곳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경영학과 공대, 컴퓨터공학, 벤처 관련 분야의 학과에 사람이 많이 몰립니다. 그러나 요즘은 이런 것을 전공했다고 해도 취직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전국적으로 50만 명의 대학생들이 휴학 상태에 있다고 합니다. 이들은 요즘 장래에 대한 비전이 없어 일단은 모두 군대 가고자 줄을 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금 군대에 가고자 신청하면 내년 10월에 입대할 수 있다고 합니다. 자매님들도 직장이 있어야지 그러지 않으면 결혼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런 때 성경공부를 한다며 성경책을 들고 다니면 정신 나간 사람 취급을 받기 쉽습니다. 이런 사람은 이 치열한 생존 경쟁 시대에 굶어죽기 딱 알맞은 사람으로 찍히기 쉽습니다. 이런 가운데 우리가 캠퍼스로 나가 대학생들에게 '성경을 공부해 보지 않겠습니까?' 하고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시대 분위기에 말려 몸을 움츠려 장래 걱정이나 하고 성경공부를 게을리 여긴다면 이는 슬픈 일입니다. 이럴 때 일수록 더욱 진리탐구에 몰두하며 올바른 인생관, 가치관을 세워가야 합니다. 이렇게 어둡고 답답한 때일수록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진리의 별인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동방박사들에게는 그의 별을 찾아 경배하는 것이 가장 의미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어 경배하고자하는 소원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미치도록 정열을 불태우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경배의 대상이 누구냐가 중요합니다. 동방박사들은 이제까지 자기 나라의 신에게 경배를 해왔습니다. 그들은 조로아스터교도로서 지혜의 신을 숭배하였습니다. 그들은 지혜의 신인 아후라 마즈다에게 경배를 많이 했을텐데 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에게 경배하러 왔을까요? 이는 그들이 참 경배의 대상을 찾아 왔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는 구원자요 창조주로서 우리를 다스리시는 왕이십니다. 그의 다스림을 받을 때 우리 마음에 평강과 진리와 사랑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헤롯 왕의 통치를 받았을 때 사람들은 두려움에 종노릇하고 마음이 소동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예수님께 경배할 때 참된 기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영광과 찬양과 보배합을 드림으로 경배했습니다.
그런데 헤롯 왕은 자신이 경배받기를 원했습니다. 자신이 영원한 스타가 되기를 바랬습니다. 죄의 뿌리는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않는 것입니다(롬1:21). 그리고 자신을 높이고 영화롭게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항상 요구하게 되고 불만족에 빠져서 살게 됩니다.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에 신경을 쓰다보면 사람의 종노릇을 하게 됩니다. 헤롯은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그가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으로서 백성들을 죄로부터 구원할 자이신 것을 알지 못하고 정치적인 왕으로 생각했을 때 소동했습니다. 그는 자기의 위치가 흔들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집착했습니다. 헤롯은 아기 예수님을 자신의 경쟁자로 오해하고 소동한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그는 예수님을 죽이고자 시도하였습니다. 살인욕으로 가득한 그의 마음은 마귀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정치 싸움을 하는 헤롯에 대한 두려움으로 소동하였습니다. 그들은 메시야를 기다리면서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소동하였습니다. 어두움을 사랑하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구원자가 아니라 심판자로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구약 성경에 예언된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십니까? 6절을 보십시오.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예수님은 목자 왕이십니다. 그는 백성들을 다스리시되 목자로서 다스리십니다. 목자는 양들을 잘 압니다. 양들의 형편을 잘 알기 때문에 그에 맞게 양들을 먹이고 인도하고 보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목자 왕으로서 우리에게 생명의 꼴을 먹이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자는 살아나게 됩니다. 예수님은 일생 말씀을 가르치셨는데 한번은 삼일 동안 오 천명의 무리들에게 쉬지 않고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가운데 사람들의 마음에 치료가 일어나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갖게 되고 거듭나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선한 목자 예수님은 그 양들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상처가 많은 인생들을 치료하시고 온전케 하셨습니다. 목자 왕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로 인해 우리가 건강하게 되었습니다. 목자 왕의 다스림을 받을 때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심령에 기쁨이 생기고 진리로 충만하게 됩니다.
헤롯은 박사들로부터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물어서 태어난 왕의 나이를 알아 보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그에게 가서 경배하고자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동방박사들을 속인 것이었습니다. 그는 에돔 사람으로서 왕이 되었기 때문에 정통성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습니다. 그는 마귀와 같은 속성을 갖고 있었습니다. 마귀는 최고의 정보원입니다. 마귀는 우리의 연약함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틈타서 공격을 합니다. 그 목적은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입니다. 신자들이 믿음을 잃어버리도록 회의를 심고자 모든 지식과 정보를 동원합니다. 16절을 볼 때 헤롯은 결국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 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였습니다. 이로 인해서 베들레헴은 아이를 잃은 어머니들의 통곡 소리로 가슴을 후비게 되었습니다.
II. 경배하는 박사들 (9-11)
동방 박사들은 왕의 말을 듣고 베들레헴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섰습니다. 그들은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했습니다. 그들의 기쁨은 신령한 기쁨이었습니다. 그들의 기쁨은 경배해야 할 왕을 찾은 데서 온 것입니다. 그들의 기쁨은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이었습니다. 우리가 별의 인도함을 받아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때 이런 기쁨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샛별이 떠오르기까지 말씀에 주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기쁨은 말씀을 연구하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때 오는 것입니다.
집에 들어간 박사들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였습니다. 그리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습니다. 그들은 아기 예수님에게서 구원자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그 별의 인도함을 받아왔기 때문에 그가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경배를 드렸습니다. 경배란 무엇입니까?
첫째, 경배란 '예배'라는 뜻입니다. 경배란 의미는 '구푸려 엎드린다'는 뜻입니다. 무엇을 구푸려 엎드리는 것입니까? 나의 의지를 꺾고 엎드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입니다. 내가 나의 의지, 뜻을 꺾고 하나님의 뜻 앞에 엎드리면 하나님은 내가 그를 경배하는 것으로 간주하십니다. 우리는 눈을 감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으로는 하나님께 반항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경배의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무지한 사람들은 물질에 경배를 하고 천사들을 경배하고 죄악된 인간이나 사단에게 경배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것들에 경배하는 자들을 정죄하십니다. 물질을 하나님 위치에 두고 섬긴 마태는 그 공허함을 너무나 잘 알았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남편을 경배하다가 목말라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거라사 광인은 사단에게 경배하다가 미쳐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위엄과 능력, 그의 섭리와 인자하심, 그의 의로우심과 거룩하심에 대해 경배해야 합니다.
둘째, 경배란 말은 큰 사랑 혹은 큰 존경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합니다. 반면에 헤롯과 같은 사람들은 자기 죄로 인하여 하나님을 미워합니다. 그들은 시기심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들도 미워합니다. 그들은 교만하여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경외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리의 중심에 자신이 앉아 있기를 원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과 같이 되지만, 하나님을 사랑치 않는 자는 마귀의 자식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2:37절은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우리는 이 말씀을 들을 때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너무 많을 것을 요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인간의 행복을 위한 지름길임을 깨달아야겠습니다.
셋째, 경배란 헌신의 뜻이 있습니다. 출 34:20보면 하나님께서는 "빈손으로 내 얼굴을 보지 말지니라."고 했습니다. 왕에게 나아갈 때 빈손으로 가는 것은 법도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헌금을 하는 것은 헌금이 예배의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동방박사들은 자신들에게 있어서 가장 귀한 보배합을 아기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그 보배합은 황금과 유향과 몰약이었습니다. 그러면 그것들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먼저 황금은 변치 않는 충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예수님이 왕이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으로서 세상 만물을 다스리십니다. 그는 영원한 왕으로서 그의 나라는 무궁합니다. 아무도 그의 통치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사단도 그의 왕권 앞에 무릎을 끓게 됩니다. 그는 사랑과 진리에 기초해서 다스리시기 때문에 그의 통치는 영원합니다. 유향은 대제사장께 드리기에 합당한 선물입니다. 몰약은 마취제로 쓰거나 장사지낼 때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서 썼습니다. 그래서 몰약은 구속주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심으로 우리의 죄값을 치루시고 우리의 질고를 지시고 평화를 주셨습니다. 이 보배합은 예수님께서 헤롯의 핍박을 피해 애굽으로 피난 가셨을 때 귀하게 쓰임받았습니다.
그들은 보배합을 드리고 나서 주님께 무엇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손해의식에 빠지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경배하고 기쁜 마음으로 고국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들의 경배 자세는 너무나 순수합니다. 마태가 이것을 기록한 것은 손익 계산이 분명했던 그에게 너무나 감동적인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손해보는 것을 눈뜨고 보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손은 갈퀴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돈을 모았어도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좇았습니다. 그는 예수님 안에서 자유함을 누렸고 마음이 가난한 자의 행복을 노래했습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받을 것만 생각하면 섭섭한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주님께 드릴 것을 생각하면 마음부터 부요해집니다. 그리고 심령에 감사할 것들이 많이 생겨납니다. 자족하는 마음이 듭니다. 우리가 동방박사들과 같이 내게 있어서 가장 귀한 보배합을 드려서 주님께 경배를 드려야겠습니다. 우리가 시간을 드려서 하나님 말씀을 공부하고 일대일을 해야겠습니다. 방학 동안 열심히 일대일을 하여서 하나님께 산 제사를 드려야겠습니다. 우리의 시간과 물질과 마음을 드려서 일대일을 하여 방황하는 인생들을 구원하고 그 영혼이 성장하여 생명의 풍요함을 누리게 하는 것보다 더 귀한 보배합은 없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북한의 결핵 환자들과 신수 센타 건축 지원과 선교사님들을 위해 나의 정성이 담긴 보배합을 드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씀/마태복음 2:1-11
요절/마태복음 2:2
왕이 나셨도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성탄절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건 믿지 않는 사람이건 모두가 즐거워하고 들떠서 지내는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 사람들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되셨습니다. 죄와 죽음의 세력에 붙잡혀서 멸망해 가던 우리들에게 구원자가 오신 것은 얼마나 큰 기쁨입니까? 예수님이 오심으로 우리의 인생 문제들이 해결되고 죽었던 우리가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이 시간 동방박사들이 베들레헴에 탄생하신 유대인의 왕을 경배하기 위해서 어떤 수고를 했는가를 배우고 우리도 온전한 경배를 드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왕으로 나신 이 (1-8)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때의 시대 분위기는 매우 어두웠습니다. 헤롯 대왕이 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본래 명석하고 대담한 장군이었습니다. 그의 이름의 뜻은 '영웅의 아들'인데 B.C. 37-4년까지 통치했습니다. 그는 25세에 갈릴리의 총독을 역임하고 B.C.40년에 로마황제 아구스도에 의해 유대 왕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이두메 사마리아 갈릴리 지방을 쳐서 B.C.37년에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유대 왕으로 군림하였습니다. 그는 많은 공공 사업을 하고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에 착수하였습니다. 그는 열 명의 아내를 두고 많은 자녀를 두었습니다. 그는 성격이 강인하고 또 현명한 재질을 가졌으나 매우 잔인한 행위도 하였습니다. 그는 권력을 위해서 자기의 아들과 아내도 죽이고 장인도 죽였습니다. 그리고 처남도 시기심으로 죽였습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듣고 불안을 느껴 베들레헴의 두 살 이하의 아이들을 살해하였습니다. 그러다가 B.C. 4년에 악질에 걸려 70세로 죽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습니다. 지금도 베들레헴은 아득한 시대의 특성을 거의 변함없이 전원적으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곳은 올리브와 삼나무가 널려 있고 거칠고 바위가 많은 언덕에 위치한 하얀 마을입니다. 성스러운 마을인 베들레헴에는 오늘날까지도 넓은 목장 위에 짙은색 옷과 그들의 전형적인 머리띠를 멘 양치기 의해 인도되는 양과 염소들이 풀을 뜯으며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축하 사절단이 동방으로부터 예루살렘에 왔습니다. 그들은 박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별을 관측하고 기상을 살펴서 징조를 찾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창1:14절에는 하나님께서 궁창에 별을 만드시면서 그 광명으로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을 이루라고 하셨습니다. 징조란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미루어 알게 하는 일이나 현상, 조짐을 말합니다. 그들이 어떻게 예루살렘에 오게 되었습니까? 2절을 보십시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그의 별은 민수기 민 24:17에 예언되어 있었습니다. "내가 그를 보아도 이 때의 일이 아니며 내가 그를 바라보아도 가까운 일이 아니로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모압을 이편에서 저편까지 쳐서 파하고 또 소동하는 자식들을 다 멸하리로다." 이 별은 유대인의 왕이 탄생했다는 것을 알리는 별이었습니다. 그는 소동하는 자식들을 다 멸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3절을 보십시오.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우리는 여기서 유대인의 왕에게 경배하러 온 동방 박사들과 소동하는 사람들이 대조되어 나옴을 볼 수 있습니다. 성탄 연합 예배를 같은 장소에서 같은 내용으로 보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데 반대로 소동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이방인들로서 매우 멀리 지금의 이란인 페르샤에서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헤롯왕과 예루살렘 사람들은 베들레헴에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마태는 맨 처음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러 온 사람들로 이방인인 동방 박사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자기 땅에 자기 백성들에게 오셨지만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십니다. 동방박사들은 유대인의 왕에게 경배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그들은 박사요 왕의 모사로서 부와 명예와 권력을 소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갖춘 그들이 왜 유대인의 왕을 찾아 경배하고자 할까요? 그들이 영혼을 가진 존재로서 소유로 만족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들은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다 가진 후에는 목표를 상실했습니다. 그들의 절망은 원하던 것을 소유하기 전보다 더욱 컸습니다. 그들은 늙은 사람들이었는데 인생의 목표를 상실하자 더욱 늙어버렸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바벨론 시대부터 전수되었던 유대인의 왕이 탄생할 때에 나타난다는 야곱의 별을 발견하자 인생의 참된 목표가 생겼습니다. 그것은 유대인의 왕을 찾아 경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의 왕에게 경배하기 위해서 보배합을 준비하고 여행을 떠날 채비를 했습니다. 그들의 삶에는 생기가 돌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내면이 밤과 같이 어두웠는데 야곱의 별이 떠오르자 어두움이 물러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별의 인도함을 받아 여행을 할 때 수많은 어려움들이 있었습니다. 늙은이로서 먼 여행을 한다는 것은 육신이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들은 순례자와 같이 그 고통을 승화시켰습니다. 땅에 붙은 욕심을 떨어버리고 위엣 것을 찾아서 나아갔습니다. 별을 보는 생활은 별 볼일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스스로 스타가 되고자 합니다. 요즘 우리 시대는 진리보다는 실리가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그 영혼이 순수하고 높은 이상에 불타야할 대학 지성인들은 이제 더 이상 철학이나 문학, 역사, 수학 등을 자신의 전공으로 삼고자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것을 필요로 하는 곳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경영학과 공대, 컴퓨터공학, 벤처 관련 분야의 학과에 사람이 많이 몰립니다. 그러나 요즘은 이런 것을 전공했다고 해도 취직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전국적으로 50만 명의 대학생들이 휴학 상태에 있다고 합니다. 이들은 요즘 장래에 대한 비전이 없어 일단은 모두 군대 가고자 줄을 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금 군대에 가고자 신청하면 내년 10월에 입대할 수 있다고 합니다. 자매님들도 직장이 있어야지 그러지 않으면 결혼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런 때 성경공부를 한다며 성경책을 들고 다니면 정신 나간 사람 취급을 받기 쉽습니다. 이런 사람은 이 치열한 생존 경쟁 시대에 굶어죽기 딱 알맞은 사람으로 찍히기 쉽습니다. 이런 가운데 우리가 캠퍼스로 나가 대학생들에게 '성경을 공부해 보지 않겠습니까?' 하고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시대 분위기에 말려 몸을 움츠려 장래 걱정이나 하고 성경공부를 게을리 여긴다면 이는 슬픈 일입니다. 이럴 때 일수록 더욱 진리탐구에 몰두하며 올바른 인생관, 가치관을 세워가야 합니다. 이렇게 어둡고 답답한 때일수록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진리의 별인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동방박사들에게는 그의 별을 찾아 경배하는 것이 가장 의미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어 경배하고자하는 소원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미치도록 정열을 불태우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경배의 대상이 누구냐가 중요합니다. 동방박사들은 이제까지 자기 나라의 신에게 경배를 해왔습니다. 그들은 조로아스터교도로서 지혜의 신을 숭배하였습니다. 그들은 지혜의 신인 아후라 마즈다에게 경배를 많이 했을텐데 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에게 경배하러 왔을까요? 이는 그들이 참 경배의 대상을 찾아 왔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는 구원자요 창조주로서 우리를 다스리시는 왕이십니다. 그의 다스림을 받을 때 우리 마음에 평강과 진리와 사랑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헤롯 왕의 통치를 받았을 때 사람들은 두려움에 종노릇하고 마음이 소동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예수님께 경배할 때 참된 기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영광과 찬양과 보배합을 드림으로 경배했습니다.
그런데 헤롯 왕은 자신이 경배받기를 원했습니다. 자신이 영원한 스타가 되기를 바랬습니다. 죄의 뿌리는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않는 것입니다(롬1:21). 그리고 자신을 높이고 영화롭게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항상 요구하게 되고 불만족에 빠져서 살게 됩니다.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에 신경을 쓰다보면 사람의 종노릇을 하게 됩니다. 헤롯은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그가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으로서 백성들을 죄로부터 구원할 자이신 것을 알지 못하고 정치적인 왕으로 생각했을 때 소동했습니다. 그는 자기의 위치가 흔들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집착했습니다. 헤롯은 아기 예수님을 자신의 경쟁자로 오해하고 소동한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그는 예수님을 죽이고자 시도하였습니다. 살인욕으로 가득한 그의 마음은 마귀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정치 싸움을 하는 헤롯에 대한 두려움으로 소동하였습니다. 그들은 메시야를 기다리면서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소동하였습니다. 어두움을 사랑하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구원자가 아니라 심판자로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구약 성경에 예언된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십니까? 6절을 보십시오.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예수님은 목자 왕이십니다. 그는 백성들을 다스리시되 목자로서 다스리십니다. 목자는 양들을 잘 압니다. 양들의 형편을 잘 알기 때문에 그에 맞게 양들을 먹이고 인도하고 보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목자 왕으로서 우리에게 생명의 꼴을 먹이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자는 살아나게 됩니다. 예수님은 일생 말씀을 가르치셨는데 한번은 삼일 동안 오 천명의 무리들에게 쉬지 않고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가운데 사람들의 마음에 치료가 일어나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갖게 되고 거듭나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선한 목자 예수님은 그 양들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상처가 많은 인생들을 치료하시고 온전케 하셨습니다. 목자 왕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로 인해 우리가 건강하게 되었습니다. 목자 왕의 다스림을 받을 때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심령에 기쁨이 생기고 진리로 충만하게 됩니다.
헤롯은 박사들로부터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물어서 태어난 왕의 나이를 알아 보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그에게 가서 경배하고자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동방박사들을 속인 것이었습니다. 그는 에돔 사람으로서 왕이 되었기 때문에 정통성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습니다. 그는 마귀와 같은 속성을 갖고 있었습니다. 마귀는 최고의 정보원입니다. 마귀는 우리의 연약함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틈타서 공격을 합니다. 그 목적은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입니다. 신자들이 믿음을 잃어버리도록 회의를 심고자 모든 지식과 정보를 동원합니다. 16절을 볼 때 헤롯은 결국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 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였습니다. 이로 인해서 베들레헴은 아이를 잃은 어머니들의 통곡 소리로 가슴을 후비게 되었습니다.
II. 경배하는 박사들 (9-11)
동방 박사들은 왕의 말을 듣고 베들레헴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섰습니다. 그들은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했습니다. 그들의 기쁨은 신령한 기쁨이었습니다. 그들의 기쁨은 경배해야 할 왕을 찾은 데서 온 것입니다. 그들의 기쁨은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이었습니다. 우리가 별의 인도함을 받아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때 이런 기쁨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샛별이 떠오르기까지 말씀에 주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기쁨은 말씀을 연구하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때 오는 것입니다.
집에 들어간 박사들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였습니다. 그리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습니다. 그들은 아기 예수님에게서 구원자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그 별의 인도함을 받아왔기 때문에 그가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경배를 드렸습니다. 경배란 무엇입니까?
첫째, 경배란 '예배'라는 뜻입니다. 경배란 의미는 '구푸려 엎드린다'는 뜻입니다. 무엇을 구푸려 엎드리는 것입니까? 나의 의지를 꺾고 엎드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입니다. 내가 나의 의지, 뜻을 꺾고 하나님의 뜻 앞에 엎드리면 하나님은 내가 그를 경배하는 것으로 간주하십니다. 우리는 눈을 감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으로는 하나님께 반항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경배의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무지한 사람들은 물질에 경배를 하고 천사들을 경배하고 죄악된 인간이나 사단에게 경배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것들에 경배하는 자들을 정죄하십니다. 물질을 하나님 위치에 두고 섬긴 마태는 그 공허함을 너무나 잘 알았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남편을 경배하다가 목말라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거라사 광인은 사단에게 경배하다가 미쳐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위엄과 능력, 그의 섭리와 인자하심, 그의 의로우심과 거룩하심에 대해 경배해야 합니다.
둘째, 경배란 말은 큰 사랑 혹은 큰 존경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합니다. 반면에 헤롯과 같은 사람들은 자기 죄로 인하여 하나님을 미워합니다. 그들은 시기심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들도 미워합니다. 그들은 교만하여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경외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리의 중심에 자신이 앉아 있기를 원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과 같이 되지만, 하나님을 사랑치 않는 자는 마귀의 자식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2:37절은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우리는 이 말씀을 들을 때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너무 많을 것을 요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인간의 행복을 위한 지름길임을 깨달아야겠습니다.
셋째, 경배란 헌신의 뜻이 있습니다. 출 34:20보면 하나님께서는 "빈손으로 내 얼굴을 보지 말지니라."고 했습니다. 왕에게 나아갈 때 빈손으로 가는 것은 법도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헌금을 하는 것은 헌금이 예배의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동방박사들은 자신들에게 있어서 가장 귀한 보배합을 아기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그 보배합은 황금과 유향과 몰약이었습니다. 그러면 그것들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먼저 황금은 변치 않는 충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예수님이 왕이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으로서 세상 만물을 다스리십니다. 그는 영원한 왕으로서 그의 나라는 무궁합니다. 아무도 그의 통치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사단도 그의 왕권 앞에 무릎을 끓게 됩니다. 그는 사랑과 진리에 기초해서 다스리시기 때문에 그의 통치는 영원합니다. 유향은 대제사장께 드리기에 합당한 선물입니다. 몰약은 마취제로 쓰거나 장사지낼 때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서 썼습니다. 그래서 몰약은 구속주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심으로 우리의 죄값을 치루시고 우리의 질고를 지시고 평화를 주셨습니다. 이 보배합은 예수님께서 헤롯의 핍박을 피해 애굽으로 피난 가셨을 때 귀하게 쓰임받았습니다.
그들은 보배합을 드리고 나서 주님께 무엇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손해의식에 빠지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경배하고 기쁜 마음으로 고국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들의 경배 자세는 너무나 순수합니다. 마태가 이것을 기록한 것은 손익 계산이 분명했던 그에게 너무나 감동적인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손해보는 것을 눈뜨고 보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손은 갈퀴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돈을 모았어도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좇았습니다. 그는 예수님 안에서 자유함을 누렸고 마음이 가난한 자의 행복을 노래했습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받을 것만 생각하면 섭섭한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주님께 드릴 것을 생각하면 마음부터 부요해집니다. 그리고 심령에 감사할 것들이 많이 생겨납니다. 자족하는 마음이 듭니다. 우리가 동방박사들과 같이 내게 있어서 가장 귀한 보배합을 드려서 주님께 경배를 드려야겠습니다. 우리가 시간을 드려서 하나님 말씀을 공부하고 일대일을 해야겠습니다. 방학 동안 열심히 일대일을 하여서 하나님께 산 제사를 드려야겠습니다. 우리의 시간과 물질과 마음을 드려서 일대일을 하여 방황하는 인생들을 구원하고 그 영혼이 성장하여 생명의 풍요함을 누리게 하는 것보다 더 귀한 보배합은 없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북한의 결핵 환자들과 신수 센타 건축 지원과 선교사님들을 위해 나의 정성이 담긴 보배합을 드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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