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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강 2000년 성탄메시지 제 1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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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섬김이
댓글 0건 조회 3,704회 작성일 03-01-17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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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성탄메시지 제 1 강
말씀/마태복음 1:1-25
요절/마태복음 1:23
임마누엘 예수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매리 크리스마스! 성탄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저희 같은 죄인들을 위해서 이 세상에 보내시고 희생 양으로 삼으셔서 구원하신 은혜를 찬양합니다. 우리는 마음을 다해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은혜를 묵상하고 양들과 가족들 그리고 이웃들과 함께 풍성히 누려야겠습니다. 이 시간 주님께서 저희들과 함께 하신 역사를 돌아보고 은혜를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I.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1-17)

 1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아브라함과 다윗과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 구원 역사에 있어서 뿌리요 줄기요 열매와 같습니다. 아브라함은 우리가 지난 5 주간에 걸쳐서 배웠듯이 믿음의 조상으로 세움을 받았습니다. 그는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드리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 죄를 위해 희생제물로 드리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체험하였습니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바칠 수 있는 아브라함의 마음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이는 감정이 없는 기계처럼 행동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충분히 생각하고 마음으로부터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는 고통과 슬픔을 감내하시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하셨습니다.
 다윗은 왕으로서 하나님과 마음이 합한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를 호칭할 때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삼하7:13절에서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심으로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주신 약속이 성취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족보를 매우 중요시 여깁니다. 족보가 없다는 것은 뿌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저자 마태는 예수님께서 메시야이심을 부인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의 뿌리를 알리고자 족보를 기록하였습니다. 이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성경에 약속되었고 또 유대인들이 그렇게 기다리던 메시야이심을 증명하고자 했습니다. 이를 통해 메시야의 정통성을 입증한 것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믿는 신자들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해주고 구원의 확신을 갖게 해 주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 당시는 유대교가 정통이고 기독교는 유대교의 아류라고 생각했습니다. 유대교 신자들은 기독교를 이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오실 것이라고 생각하며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자로 이미 오셨습니다. 천하에 다른 이름으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보통 족보에는 남자들만 기록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가 기록한 족보에는 특이하게도 다섯 명의 여인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에서 다윗 때까지의 족보에 나오는 여인들은 어떤 자들입니까? 첫째, 다말.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를 낳았습니다. 다말 이야기는 창세기 38장에 나옵니다. 유다는 가나안 여자와 결혼하여 아들 셋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장자 엘을 위하여 아내를 취하였는데 그녀가 바로 다말입니다. 그런데 장자 엘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하므로 하나님께서 그를 죽이셨습니다. 다말은 악한 남편이 죽자 그 동생 오난에게 가서 아들을 낳아 남편의 기업을 이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오난은 형수인 다말에게 아들을 낳게 해도 자신에게는 아무 유익이 없음을 보고 의무를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 일이 악하여 하나님께서는 오난도 죽이셨습니다. 다말은 재수없는 여자 같이 여겨집니다. 그런데 유다는 셋째 아들인 셀라마저도 죽을까 두려워서 다말을 친정 집으로 보내어 수절하게 했습니다. 다말은 일이 돌아가는 형편을 보니 자신은 청상과부로 늙을 뿐만 아니라 비록 수치스럽게 죽었지만 남편의 권리를 찾아줄 수도 없게 된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시아버지 유다가 양털을 깍으러 딤나로 왔을 때 창녀로 가장을 하여 동침을 하게 되었습니다. 석달 쯤 후에 며느리 다말이 행음을 하여 잉태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유다는 당시 법대로 불태워 죽이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다말이 유다에게서 받은 약조물을 내어 놓자 유다가 그것을 알아보고 말했습니다.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는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않았습니다(창38:26)." 다말은 불에 태워 죽을 수도 있었지만 도덕 관념을 넘어서 남편의 기업을 계승하였습니다. 이는 다말이 믿음으로 자신이 감당해야할 하나님의 역사를 성실하게 섬겼음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둘째, 라합. 라합의 이야기는 여호수아 2장에 나오는데 그녀는 여리고 기생이었습니다. 라합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줄을 알고 정탐꾼들을 숨겨주었습니다. 그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 하지에 하나님이심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민족을 배반하는 행동이었지만 하나님 편에 섰습니다. 그녀의 믿음으로 인해서 가족들을 구원하고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 받게 되었습니다. 라합은 살몬과 결혼하여 보아스를 낳았습니다. 그녀는 인정을 극복하고 하나님 편에 섰을 때 예수님의 족보에 오르는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셋째, 룻. 룻은 다윗의 증조 할머니였는데 룻기의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룻은 모압 여인이었습니다. 시어머니 나오미가 모압에 이민을 왔다가 남편도 잃고 아들들도 다 잃고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할 때 그녀의 믿음이 잘 드러났습니다. 나오미는 룻에게 친정으로 돌아가서 재혼을 하도록 강권하였습니다. 그러자 룻이 자기 심정을 토로했습니다.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고 거기 장사될 것이라(룻 1:16,17)." 하나님께서는 룻을 생명의 회복자요 일곱 아들보다 귀한 며느리로 삼으셨습니다. 룻은 보아스와 결혼하여 오벳을 낳았습니다. 우리는 룻과 보아스의 순애보를 잘 알고 있습니다. 룻의 믿음이 향기를 발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이야기에 빠져듭니다.
 넷째,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 밧세바는 다윗과 죄를 짓고 영웅 우리야를 죽게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회개한 다윗을 사랑하사 밧세바가 나은 아들 솔로몬을 다윗의 후계자로 삼으셨습니다. 아도니야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밧세바는 나단 선지자와 동역하여 하나님의 언약이 바로 시행되게 하였습니다.
 이상에서 이방 여인이요 인간적으로 부도덕한 여인들이었지만 그들의 믿음을 받으시고 구속 역사에 귀히 쓰시는 하나님은 은혜와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죄인들이 회개하고 믿음으로 나올 때에 귀히 쓰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선민이라는 자부심으로 사는 유대인들에게 겸손한 마음을 갖도록 이런 여인들을 예수님의 족보에 기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십니다. 알량한 자기 의를 주장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우리는 오직 은혜로 구원받고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나의 인생에 대해서 운명적인 생각에 빠질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지은 과거의 죄에 매여서도 안됩니다. 오직 은혜와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섬겨야 하겠습니다. 또한 사람을 볼 때 부분적인 죄를 가지고 평가하지 말고 그의 믿음과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아야 하겠습니다.

 II.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18-25)

1장의 앞부분은 아브라함부터 다윗 때까지 열 네 대를 기록하였고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열 네 대를 기록하고 바벨론으로 이거한 이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 네 대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셨다는 것은 창3:15절에 예언한 대로 여자의 후손이 사단의 머리를 박살내기 위해서 오셨음을 알리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이 마리아에게 초점을 맞추어서 예수님의 탄생을 기록했다면 마태복음은 요셉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을 하고 동거하기 전이었습니다. 정혼은 결혼과 같은 효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일년 동안 준비기간을 갖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준비 기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습니다. 마리아가 잉태한 것을 알았을 때 요셉이 받은 충격이 어떠했을까요? 대개 군대간 사이에 여자가 다른 남자와 사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배반감으로 탈영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좀 심하면 너 죽고 나 죽자고 사고를 칩니다. 요셉은 이 사실을 알았을 때 망치로 애매히 나무만 때렸을 것입니다. 그는 삶의 의욕을 잃어버리고 앞으로 결혼을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도 했습니다. 여자의 마음은 갈대라더니 마리아도 감정적이 되어서 어떤 제비족에게 넘어갔는가 라고 생각했습니다. 요셉은 못 믿을 것은 여자의 마음이려니 생각하고 정리를 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정리하고자 했습니까? 그는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했습니다. 그는 이 일을 생각할 때 심히 고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는 가운데 마리아를 생각해서 이 문제를 드러내지 않고자 했습니다. 그렇다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는 이런 고통 가운데 두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생각했습니다. 그는 고민 고민하다가 잠이 들었는데 놀라운 꿈을 꾸었습니다. 그 꿈은 너무 생생하였습니다.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놀라운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하셨다는 것은 아담의 피를 이어받지 않으신 죄 없으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그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완전한 중보자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자기 백성의 죄는 1-17절에 나온 역사가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거룩한 백성이요 제사장 나라로서의 소망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이를 위해서 애굽에서 건져내시고 광야에서 40년간 훈련하시고 계속해서 선지자들을 보내사  말씀으로 양육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욕하고 그 사자를 비웃었습니다. 왕들 가운데 선한 왕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하나님 앞에서 겸비치 않았습니다. 특히 솔로몬으로부터 시작된 우상 숭배의 죄로 인해 선민들은 더러워졌습니다. 그들은 자기 남편을 두고 다른 남자와 음란을 행하는 여인과 같았습니다. 제사장들도 크게 범죄하여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 같지만 내용을 살펴보면 성전 안에서 우상에게 절하였습니다. 백성들은 더욱 무지하여 담대하게 우상을 숭배하고 말씀을 멸시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만회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 회개하고 변화되는 것 같았지만 말라기서에 보면 얼마 있지 아니하여 종교적 회의주의에 빠지게 되고 하나님께 돌이킬 힘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믿음을 잃어버리고 자기 한 몸이나 잘 먹고 잘사는데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지도자들도 백성들을 책임성있게 돌보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이방인들에게 끌려 다니게 되었습니다. 말라기 이후 400년 동안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지 않았습니다. 어둠의 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런 절망과 고통 가운데 구원자에 대한 열망은 뜨거워졌습니다. 이 기간 동안 하나님께서는 헬라에 의해서 복음을 세계화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셨습니다. 즉 언어의 통일을 이루고 로마에 의해서 도로를 닦아놓고 정치적 안정을 이루셨습니다.

 때가 차자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처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자기 백성들이 하나님의 소망과 부르심을 저버리고 슬프게 하였지만 그들에게 요구하지 않으시고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사 구원역사를 시작하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죄는 우리 스스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만큼 죄가 크고 죄의 세력이 강합니다. 우리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압니다. 우리는 교만하고 음란하고 거짓되고 부패하였습니다. 우리의 죄를 주관하고 공격하는 존재는 무엇보다 사단입니다. 우리가 죄의 세력에 붙잡히면 초죽음이 되어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사탄은 성도들의 죄를 확대시킵니다. 사탄이 헐뜯고자 하는 대상은 죄가 아니라 성도들입니다.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그가 즐겨 사용하는 방법은 성령의 행동인 것처럼 위장하여 성도들의 죄를 지적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을 향한 하나님의 관대하심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양심의 가책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사탄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징계로 오인하게끔 성도들에게 교활한 공격을 시도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의 견책과 사탄의 악의에 찬 고소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그러한 책망이 영적으로 성령의 역사와 상충되는가 아닌가를 시험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서로 모순되는 점이 있다면 그것은 사탄의 짓입니다. 사탄의 의도는 우리의 죄를 강조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자신이 성도라 불리울 수 없는 위선자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탄은 단 일격으로 모든 것을 산산조각 내고 수년 동안 쌓아 온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각별한 역사를 악의에 찬 한마디로 붕괴시키고자 합니다. 그러나 사탄은 아수라장을 만들어 놓은 채 떠나면서 그 모든 잘못은 당신에게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런 사탄의 궤계를 파하시고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구원하여 하나님 나라로 옮기실 분이 오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생명의 역사를 이루실 분이 오셨습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면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어떻게 구원하십니까? 23절을 보십시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들과 함께 하심으로서 구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심으로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위로가 되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은 역사를 볼 때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버렸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의 죄로 인해서 멸망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절망 가운데 무기력하게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친히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의 고난에 동참하셔서 위로하시고 친히 그 죄의 대가를 지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은 말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이는 연약한 아기에게 어머니가 함께 있는가 없는가와 같은 차이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한다고 할 때 함께 한다는 말은 요한복음 1:1절에 나오는 것과 다릅니다. 요한복음1:1절은 프로스로서 서로를 향하여 사랑의 교제를 역동적으로 나누고 있는 상태라면 마태복음 1:23절의 함께는 메타로서 우리 가운데, 우리 사이에 계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메타라는 동사가 강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광야 생활을 할 때 성막을 짓게 하셨습니다. 성막은 하나님께서 백성 가운데 계신다는 증거였습니다. 이 성막은 솔로몬 시대에 성전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심으로 건물이라는 성전의 기능은 상실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성전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후 삼일 만에 부활 승천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을 때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거하시면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는 말씀과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과 함께 합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우리에게 죄사함의 역사를 적용하시고 친히 인도해 주십니다. 지난 한 해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이루신 일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영국의 한 자매님은 예술가로 인정을 받기만 한다면 행복하리라 생각했습니다. 이를 위해서 유학을 하고 미친 듯이 작품을 하여 상도 여러 개 타고 사람들이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한 남자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죄의식으로 고통하였습니다. 우울증에 시달리고 수면제가 없이는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유명하게 된다면 그와의 관계도 정당화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우울증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할 수 없게 되었고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있으면서 사랑도 무의미하고 작업도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보였습니다.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면서 예술 세계에서 작은 성공을 거두었지만 자신은 육체적 욕망과 미움과 시기와 탐욕으로 상해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왜 이렇게 비참하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에 있는 친구가 영국 UBF에 가서 성경을 공부해보라는 제의를 하였습니다. 그녀가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했을 때 성경은 힘이 있었습니다. 창세기 공부를 통해서 자신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게 되었고 인생의 주인이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는 말씀을 듣는 가운데 기이한 빛이 죄의 세포들을 몰아냄을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았을 때 모든 죄를 회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우울증에서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심령에 평화가 충만하고 예수님의 치유를 체험하고 그 은혜를 증거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을 때 다른 사람들에게 복의 근원으로 쓰임받게 되었습니다. 이와같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우리를 각종 죄악으로부터 구원해 주셨습니다. 신구약 성경을 볼 때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신다"고 할 때는 그에게 부르심과 함께 사명을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으로 우리의 복주실 뿐 아니라 거룩한 삶을 살면서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주님이 함께 하심으로 우리는 날마다 주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기 위해서 우리는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을 섬겨야 합니다. 요셉은 잠을 깨어 일어나서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 아내 마리아를 데려왔습니다. 그러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였습니다. '예수' 그 이름만 들어도 우리는 안도의 숨을 내 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를 모든 악과 시험에서 보호하시고 생명의 길, 복된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지난 한 해 우리와 함께 하신 주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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