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아브라함 2000 제 5 강
페이지 정보

본문
아브라함 2000 제 5 강
창세기 21:1-22:19
요 절 22:2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하나님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이요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시기 위해서 이제까지 그를 가르치시고 훈련하셨습니다. 이제 때가 되어 아브라함은 가장 어려운 졸업 시험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시험 내용은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서 지시하는 산에서 번제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해서 확인하고자하신 것은 무엇일까요? 아브라함은 이를 어떻게 감당했습니까?
Ⅰ. 약속을 성취하신 하나님(21:1-34)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대로 기한이 이르자 사라에게 아들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100세요 사라는 90세였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난 지 25년 만에 이루어진 일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에게는 참으로 긴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간은 결코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정확한 시간에 그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가 간절히 기도하고 소원하는 바를 빨리 들어주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신실한 양을 구하는데 안 들어 주시고, 선교사로 빨리 나가고자 하는데 안 들어 주십니다. 이는 아직 하나님의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일 빨리 들어주시면 쉽게 자족하고 교만해져서 믿음의 성장이 막히고 쓸모없게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이 자라 축복을 감당할 만한 내면의 그릇이 준비되고, 하나님의 때가 되면, 반드시 기도를 응답해 주셔서 가장 좋은 것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최고야!"(God is best) 이것이 믿는 자들의 신앙 고백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가장 좋은 것을 받으려면 믿음으로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또한 천지는 변해도 하나님의 말씀은 변치 않습니다. 1-2절에는 하나님께서 말씀대로 하셨다는 단어가 세 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신앙 생활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력이 있어서 죽은 것 같던 사라를 살리시고 아이를 낳고 잉태할 힘을 주시고 젖을 먹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 조건을 초월하여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는 지금 나의 상황 조건이 어떠하든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루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름을 이삭이라 짓고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8일 만에 할례를 행했습니다. 아들을 낳은 사라의 소감이 어떠하였습니까? 6절을 보십시오. "사라가 가로되 하나님이 나로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사라는 너무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은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기쁨을 주었습니다. 사라는 이제까지 깊은 슬픔과 절망을 수없이 경험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수없이 많은 여인들이 슬픔과 절망을 맛보고 있습니다. 사라는 열국의 어미로서 여인들의 슬픔을 알았기 때문에 그들의 위로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사는 자를 최후에 웃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최후에 웃는 자가 승리자입니다. 사라의 기쁨은 믿음으로 사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기쁨이요 언약을 성취하신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기쁨입니다. 사라의 기쁨은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체험한 기쁨이요 영적 싸움에서 승리한 기쁨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체험할 때 영혼의 깊은 곳으로부터 샘솟는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를 결코 부끄럽게 하지 않으십니다.
아이 이삭이 자라서 젖을 떼는 날이 되자 아브라함은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아마 이삭의 나이가 세 살 정도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잔치의 주인공인 이삭을 시기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복형인 이스마엘이었습니다. 이스마엘의 나이는 16세 정도 되었습니다. 그는 이제까지 아브라함과 가족의 사랑을 독차지 하였는데 이삭이 태어나면서부터 사정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사랑과 관심은 이삭에게 집중되었고 유업도 이삭에게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이스마엘은 시기심이 생겨서 이삭을 희롱하였습니다. 희롱하였다는 것은 모욕했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에서는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했다고 표현을 했습니다(갈4:29). 이스마엘은 기회만 생기면 이삭을 괴롭혔습니다. 이삭, 벼이삭, 밀이삭, 메롱. 사라는 이것을 보고 여종 하갈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고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였습니다. 사라가 이스마엘을 내어 쫓으라고 한 것을 볼 때 이스마엘이 이삭을 못살게 구는 것이 정도에 지나쳐서 이삭이 성장하는데 큰 위협이 되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이삭은 주눅이 들어 말도 어눌해지고 얼굴에는 긁힌 자국과 시퍼렇게 멍든 자국을 달고 다녔을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대로 아담의 가정에서 가인은 동생 아벨을 시기심 때문에 돌로 쳐 죽였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아들을 위하여 그 일이 깊이 근심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편에서 볼 때 이스마엘이 비록 자신의 불신앙으로 맺어진 종의 자식이지만 자신의 피를 타고 난 자식으로서 책임을 져야 했습니다. 또한 이스마엘에게 16년 동안 소망을 두고 살았습니다. 이스마엘은 건장하고 장성하여 이삭보다 더 쓸모가 있어 보입니다. 이런 이스마엘을 쫓아내야 한다는 것은 생각만해도 가슴 아픈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아이나 네 여종을 위하여 근심치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 사라의 말이 아브라함의 가정을 위한 하나님의 목적에 부합했기 때문에 이런 방향을 주셔서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마엘도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고 그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실제로 코란에서는 이스마엘을 자기들의 조상이라고 부릅니다.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나 떡과 물 한가죽 부대를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 그 자식을 이끌고 가게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마엘이 목이 말라 죽는 소리를 할 때에 하갈의 기도를 들으시고 광야에서 샘물이 터져 살게 해 주시고 그로 아랍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스마엘을 내어 쫓으라고 하신 것입니까? 이는 이삭이 제대로 성장하도록 할 뿐 아니라 이삭에게 유업을 물려주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볼 때 이스마엘은 인본주의의 대표입니다. 인본주의란 하나님 중심이기보다 인간 중심의 사고체계입니다. 인간의 영광을 위해서, 인간을 위해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최고의 권위도 인간의 이성이고 하나님은 들러리입니다. 내 안에 있는 인본주의는 무엇입니까? 자기 중심적인 것들은 무엇입니까? 육신의 안락을 위해서 산다든가, 고난을 회피하는 것, 혼합주의, 진리보다 인정에 기초해서 하는 것 등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는 비록 역사가 좀 더디게 성장하고 심지어 줄더라도 내실이 있는 역사를 이루고 영적인 종들을 키워야 합니다. 돈 많고 세상에서 잘 나가는 사람이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양들을 사랑하고 이를 위해서 희생적인 종들이 존귀히 여김을 받아야 합니다. 말만 잘하고 행함이 없는 자들이 아니라 말은 어눌할지라도 진실되게 행하는 분들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가치관을 가지고 사람을 평가하지 말고 하나님 기준의 평가를 해야 합니다. 목소리가 크고 자기 고집이 센 사람들의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 순종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말이 더욱 귀하게 여기고 받아들이는 모임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 이상과 꿈, 세상 소망에 충만한 능력있는 사람보다 하나님 나라의 소망으로 충만하여 헌신하는 사람들을 귀하게 여기어야 합니다. 교수목자보다 존경해야 하지만 이를 배설물로 여기고 헌신하는 사람을 더욱 귀히 여겨야 신앙의 야성이 살아납니다. 실리를 추구하기 보다 손해를 보더라도 영적인 질서가 분명한 사람을 귀하게 여깁시다. 자녀들을 양육하되 사명인으로서 감당해야 할 아픔이 있습니다. 자식을 수양회 때에 떼어 놓는다거나 아카데미 때에 남의 집에 맡기는 것 등도 아프지만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이스마엘을 내어 쫓는 것은 마음이 아프지만 영적으로는 시원합니다. 우리는 의리보다 진리를 앞세워야 합니다. 육체의 소욕은 항상 성령을 거스립니다(갈5:1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고, 하나님의 법에 굴복할 수도 없습니다(롬8:7,8). 그러므로 인본주의적인 생각과 정과 욕심에 근거한 인간적인 생각을 단호하게 끊어내야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올바로 섬길 수 있습니다.
22-34절은 아비멜렉과 아브라함 사이에 평화조약이 맺어지는 내용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사건 이후에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는 영원하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체험하고 영원토록 변함없으신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에 깊이 감사하여 경배를 드렸습니다.
Ⅱ.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하나님(22:1-19)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모든 약속이 성취되어 축복을 받고 소원이 성취된 후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시험하셨습니다. 이 시험은 그를 죄에 빠지게 하는 의도가 아니라 연단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즉 신앙을 키우고 가장 좋은 것을 주기 위해서 시험하신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더욱 깊은 사랑과 순종의 관계를 맺고자 하셨습니다. 아브라함 편에서는 너무 견디기 힘든 시련이었습니다. 불로 연단한 후에 정금이 나오는 것과 같았습니다. 시험은 우리 마음 속에 있는 것을 알아내기 위해서(신8:2,16, 13:3, 출16:4, 20:20)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시험이 무엇입니까?
2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명령하셨습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이는 청천벽력과 같은 말씀이었습니다. 이것이 과연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의 음성인가? 자식을 불태워 죽이는 가나안의 거짓 종교와 무엇이 다른가? 사탄의 음성은 아닌가 하는 회의도 생겼을 것입니다. 이스마엘을 쫓아낼 때는 하나님께서 "이삭으로 말미암은 자라야 네 씨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분명히 약속하셨는데 이삭을 번제로 바치면 이삭에게 주신 약속은 어떻게 되는가? 아브라함은 이성을 초월한 하나님의 말씀 앞에 두렵고 떨렸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듯이 밤새도록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내적인 투쟁 후에 하나님이 주신 이삭은 하나님의 선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식했습니다. 백세된 나에게 이삭을 주신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람을 살려내지 못하시겠는가 하는 부활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제까지 자신을 인도해 오신 것을 되돌아보고 하나님의 사랑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튿날 아침 일찍이 일어나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하나님이 지시한 곳으로 떠났습니다. 그곳에서 모리아 산까지는 사흘 길이었습니다. 이 시간 동안 충분히 생각하고 돌이킬 수도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데 우물쭈물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사라와 상의하지도 않았습니다. 참으로 외롭고 고통스러운 길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사환들을 산기슭에 머물러 두고 이삭의 어깨에 번제 나무를 지우고 자신은 칼과 불을 가지고 가는데 이삭이 아브라함에게 물었습니다. "내 아버지여,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이 말은 순진한 말이었지만 아브라함의 심령을 강타하는 시험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마음 속에 잠재해 있던 정과 욕심이 불길같이 타올랐습니다.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을 느꼈을 것입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아브라함은 바위와 같이 요동치 않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도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번제할 어린 양을 친히 준비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우리는 이 말에서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을 어떤 존재로 보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자기 아들로만 보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서 친히 준비하신 어린 양'으로 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와 자기 아들이 세상 사람에 대해서 복의 근원으로 부르심 받은 것을 알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와 자기 아들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을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아브라함은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알았고 죄의 댓가는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임을 소돔성의 멸망을 통해서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는 세상은 하나님의 복이 아니라 저주의 심판을 받아야 함을 알았습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천하 만민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그 자손을 인해 복을 받게 됩니까? 이를 위해 누군가가 세상 죄를 짊어져야만 했습니다. 아브라함이나 이삭, 그 후손이 세상 죄를 짊어져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이삭이 바로 그런 존재였습니다. 이삭이 세상 죄를 위해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신 어린 양이요 희생제물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그런 존재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삭은 완전한 희생제물이 아니라 다만 뒤에 오실 완전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였습니다.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이 말을 한 아브라함은 이삭에게서 장차 오실 완전한 희생양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 양으로 바치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하나님 아버지의 슬픔을 생각했습니다. 본문에서 아브라함은 부활신앙을 가지고 태연하게 외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드리고자 했지만 그 마음의 아픔은 말로 다할 수 없었습니다. 차라지 자기가 번제로 드려지는 것이 낫지 외아들을 번제로 드린다는 것은 정말 고통스러웠습니다. 자기 손으로 아들을 잡아 태운다는 것은 너무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순간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으실 하나님의 마음과 아픔을 생각했으며 그 아픔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러 가는 아브라함은 그 순간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박으신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는 또한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 곧 독생자를 희생하심으로써 천하 만민을 축복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생각했습니다. 또한 악한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을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안 아브라함은 아프지만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릴 수 있었습니다.
어떤 목자님은 교수 목자로서 뻗어나갈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고 사도 훈련을 받고 선교사로 나갈 수 있는 기회를 하나님께 드리고 본국 역사에 동역자로 남았습니다. 어떤 목자님은 진급하는데 유리한 근무지를 포기하고 캠퍼스 양떼들을 섬기기 위해서 한직을 택하였습니다. 우리 가운데 수많은 분들이 자기의 꿈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캠퍼스 양들을 감당하기 위해서 자기의 이삭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우리의 역사는 그런 믿음과 희생 위에서 성장해 왔습니다. 지금 당신은 당신의 사랑하는 것, 소중한 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소중한 것을 바쳐야 할 때 무슨 생각을 합니까? 아깝다는 생각만 듭니까? 그때 우리는 자기 생명을 버리신 예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죄인들을 위해 독생자를 바치신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하고 하나님과 한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곳에 이르러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고자 하였습니다. 이는 완전한 단념이요 완전한 순종이었습니다. 이때 이삭은 반항하지 않고 순종하여 그 아버지에 그 아들임을 나타냈습니다. 그는 이때 놀래서 그 후로 말이 없고 묵상을 즐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또 내 아버지는 육신의 아버지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라는 것을 깊이 깨닫고 개인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이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고 했습니다.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고 기록하였습니다(히11:17-19).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실 것을 믿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또한 부활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오 가져가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잡으려고 하자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급히 불렀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이는 아브라함이 시험을 통과했다는 합격 통지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인정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실재성을 느끼고 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연합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경외했기 때문에 온전히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여러 가지 변명을 하면서 이삭을 바치지 않았다면 그의 믿음은 가짜인 것이 드러났을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선생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침으로써 그 믿음이 온전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약2:26).
하나님께서는 친히 한 수양을 준비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돌아보니 한 수 양이 수풀에 걸려 있었습니다. 그는 이것을 잡아 번제로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수 양은 장차 이곳에서 죽임을 당하실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하기 위한 죽음을 죽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독생자를 주시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체험하고 그 역사에 조상으로 쓰임받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독생자를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야 하나님의 역사를 제대로 섬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절대적인 사랑과 충성을 축복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요구한 것은 근본적으로 이삭보다 이삭을 바칠 수 있는 믿음과 사랑과 순종이었습니다. 이를 통해서 아브라함이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고 살 수 있는 믿음을 갖기를 원하셨고 또 그가 마음과 성품과 뜻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하나님을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준비하시고 책임져 주십니다. 이는 일생을 돌아본 아브라함의 신앙 간증이기도 하였습니다. 그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났지만 하나님께서 다 채워주셨습니다. 또한 이레란 본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자기에게 예배를 드리러 오는 사람들을 보시고 필요한 것을 준비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예배할 때 우리의 필요를 보시고 준비해 두셨다가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영적 축복을 스스로 맹세하면서 확정하셨습니다.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레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리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순종을 기뻐하시고 맹세까지 하시면서 그를 축복하셨습니다. 그의 후손 가운데서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배웠습니다. 우리가 내가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이삭을 하나님께서 원하실 때에 하나님께 드리고 독생자를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소유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인정받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창세기 21:1-22:19
요 절 22:2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하나님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이요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시기 위해서 이제까지 그를 가르치시고 훈련하셨습니다. 이제 때가 되어 아브라함은 가장 어려운 졸업 시험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시험 내용은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서 지시하는 산에서 번제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해서 확인하고자하신 것은 무엇일까요? 아브라함은 이를 어떻게 감당했습니까?
Ⅰ. 약속을 성취하신 하나님(21:1-34)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대로 기한이 이르자 사라에게 아들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100세요 사라는 90세였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난 지 25년 만에 이루어진 일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에게는 참으로 긴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간은 결코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정확한 시간에 그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가 간절히 기도하고 소원하는 바를 빨리 들어주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신실한 양을 구하는데 안 들어 주시고, 선교사로 빨리 나가고자 하는데 안 들어 주십니다. 이는 아직 하나님의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일 빨리 들어주시면 쉽게 자족하고 교만해져서 믿음의 성장이 막히고 쓸모없게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이 자라 축복을 감당할 만한 내면의 그릇이 준비되고, 하나님의 때가 되면, 반드시 기도를 응답해 주셔서 가장 좋은 것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최고야!"(God is best) 이것이 믿는 자들의 신앙 고백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가장 좋은 것을 받으려면 믿음으로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또한 천지는 변해도 하나님의 말씀은 변치 않습니다. 1-2절에는 하나님께서 말씀대로 하셨다는 단어가 세 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신앙 생활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력이 있어서 죽은 것 같던 사라를 살리시고 아이를 낳고 잉태할 힘을 주시고 젖을 먹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 조건을 초월하여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는 지금 나의 상황 조건이 어떠하든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루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름을 이삭이라 짓고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8일 만에 할례를 행했습니다. 아들을 낳은 사라의 소감이 어떠하였습니까? 6절을 보십시오. "사라가 가로되 하나님이 나로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사라는 너무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은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기쁨을 주었습니다. 사라는 이제까지 깊은 슬픔과 절망을 수없이 경험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수없이 많은 여인들이 슬픔과 절망을 맛보고 있습니다. 사라는 열국의 어미로서 여인들의 슬픔을 알았기 때문에 그들의 위로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사는 자를 최후에 웃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최후에 웃는 자가 승리자입니다. 사라의 기쁨은 믿음으로 사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기쁨이요 언약을 성취하신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기쁨입니다. 사라의 기쁨은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체험한 기쁨이요 영적 싸움에서 승리한 기쁨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체험할 때 영혼의 깊은 곳으로부터 샘솟는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를 결코 부끄럽게 하지 않으십니다.
아이 이삭이 자라서 젖을 떼는 날이 되자 아브라함은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아마 이삭의 나이가 세 살 정도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잔치의 주인공인 이삭을 시기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복형인 이스마엘이었습니다. 이스마엘의 나이는 16세 정도 되었습니다. 그는 이제까지 아브라함과 가족의 사랑을 독차지 하였는데 이삭이 태어나면서부터 사정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사랑과 관심은 이삭에게 집중되었고 유업도 이삭에게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이스마엘은 시기심이 생겨서 이삭을 희롱하였습니다. 희롱하였다는 것은 모욕했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에서는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했다고 표현을 했습니다(갈4:29). 이스마엘은 기회만 생기면 이삭을 괴롭혔습니다. 이삭, 벼이삭, 밀이삭, 메롱. 사라는 이것을 보고 여종 하갈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고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였습니다. 사라가 이스마엘을 내어 쫓으라고 한 것을 볼 때 이스마엘이 이삭을 못살게 구는 것이 정도에 지나쳐서 이삭이 성장하는데 큰 위협이 되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이삭은 주눅이 들어 말도 어눌해지고 얼굴에는 긁힌 자국과 시퍼렇게 멍든 자국을 달고 다녔을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대로 아담의 가정에서 가인은 동생 아벨을 시기심 때문에 돌로 쳐 죽였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아들을 위하여 그 일이 깊이 근심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편에서 볼 때 이스마엘이 비록 자신의 불신앙으로 맺어진 종의 자식이지만 자신의 피를 타고 난 자식으로서 책임을 져야 했습니다. 또한 이스마엘에게 16년 동안 소망을 두고 살았습니다. 이스마엘은 건장하고 장성하여 이삭보다 더 쓸모가 있어 보입니다. 이런 이스마엘을 쫓아내야 한다는 것은 생각만해도 가슴 아픈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아이나 네 여종을 위하여 근심치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 사라의 말이 아브라함의 가정을 위한 하나님의 목적에 부합했기 때문에 이런 방향을 주셔서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마엘도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고 그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실제로 코란에서는 이스마엘을 자기들의 조상이라고 부릅니다.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나 떡과 물 한가죽 부대를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 그 자식을 이끌고 가게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마엘이 목이 말라 죽는 소리를 할 때에 하갈의 기도를 들으시고 광야에서 샘물이 터져 살게 해 주시고 그로 아랍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스마엘을 내어 쫓으라고 하신 것입니까? 이는 이삭이 제대로 성장하도록 할 뿐 아니라 이삭에게 유업을 물려주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볼 때 이스마엘은 인본주의의 대표입니다. 인본주의란 하나님 중심이기보다 인간 중심의 사고체계입니다. 인간의 영광을 위해서, 인간을 위해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최고의 권위도 인간의 이성이고 하나님은 들러리입니다. 내 안에 있는 인본주의는 무엇입니까? 자기 중심적인 것들은 무엇입니까? 육신의 안락을 위해서 산다든가, 고난을 회피하는 것, 혼합주의, 진리보다 인정에 기초해서 하는 것 등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는 비록 역사가 좀 더디게 성장하고 심지어 줄더라도 내실이 있는 역사를 이루고 영적인 종들을 키워야 합니다. 돈 많고 세상에서 잘 나가는 사람이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양들을 사랑하고 이를 위해서 희생적인 종들이 존귀히 여김을 받아야 합니다. 말만 잘하고 행함이 없는 자들이 아니라 말은 어눌할지라도 진실되게 행하는 분들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가치관을 가지고 사람을 평가하지 말고 하나님 기준의 평가를 해야 합니다. 목소리가 크고 자기 고집이 센 사람들의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 순종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말이 더욱 귀하게 여기고 받아들이는 모임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 이상과 꿈, 세상 소망에 충만한 능력있는 사람보다 하나님 나라의 소망으로 충만하여 헌신하는 사람들을 귀하게 여기어야 합니다. 교수목자보다 존경해야 하지만 이를 배설물로 여기고 헌신하는 사람을 더욱 귀히 여겨야 신앙의 야성이 살아납니다. 실리를 추구하기 보다 손해를 보더라도 영적인 질서가 분명한 사람을 귀하게 여깁시다. 자녀들을 양육하되 사명인으로서 감당해야 할 아픔이 있습니다. 자식을 수양회 때에 떼어 놓는다거나 아카데미 때에 남의 집에 맡기는 것 등도 아프지만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이스마엘을 내어 쫓는 것은 마음이 아프지만 영적으로는 시원합니다. 우리는 의리보다 진리를 앞세워야 합니다. 육체의 소욕은 항상 성령을 거스립니다(갈5:1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고, 하나님의 법에 굴복할 수도 없습니다(롬8:7,8). 그러므로 인본주의적인 생각과 정과 욕심에 근거한 인간적인 생각을 단호하게 끊어내야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올바로 섬길 수 있습니다.
22-34절은 아비멜렉과 아브라함 사이에 평화조약이 맺어지는 내용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사건 이후에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는 영원하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체험하고 영원토록 변함없으신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에 깊이 감사하여 경배를 드렸습니다.
Ⅱ.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하나님(22:1-19)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모든 약속이 성취되어 축복을 받고 소원이 성취된 후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시험하셨습니다. 이 시험은 그를 죄에 빠지게 하는 의도가 아니라 연단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즉 신앙을 키우고 가장 좋은 것을 주기 위해서 시험하신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더욱 깊은 사랑과 순종의 관계를 맺고자 하셨습니다. 아브라함 편에서는 너무 견디기 힘든 시련이었습니다. 불로 연단한 후에 정금이 나오는 것과 같았습니다. 시험은 우리 마음 속에 있는 것을 알아내기 위해서(신8:2,16, 13:3, 출16:4, 20:20)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시험이 무엇입니까?
2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명령하셨습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이는 청천벽력과 같은 말씀이었습니다. 이것이 과연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의 음성인가? 자식을 불태워 죽이는 가나안의 거짓 종교와 무엇이 다른가? 사탄의 음성은 아닌가 하는 회의도 생겼을 것입니다. 이스마엘을 쫓아낼 때는 하나님께서 "이삭으로 말미암은 자라야 네 씨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분명히 약속하셨는데 이삭을 번제로 바치면 이삭에게 주신 약속은 어떻게 되는가? 아브라함은 이성을 초월한 하나님의 말씀 앞에 두렵고 떨렸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듯이 밤새도록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내적인 투쟁 후에 하나님이 주신 이삭은 하나님의 선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식했습니다. 백세된 나에게 이삭을 주신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람을 살려내지 못하시겠는가 하는 부활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제까지 자신을 인도해 오신 것을 되돌아보고 하나님의 사랑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튿날 아침 일찍이 일어나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하나님이 지시한 곳으로 떠났습니다. 그곳에서 모리아 산까지는 사흘 길이었습니다. 이 시간 동안 충분히 생각하고 돌이킬 수도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데 우물쭈물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사라와 상의하지도 않았습니다. 참으로 외롭고 고통스러운 길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사환들을 산기슭에 머물러 두고 이삭의 어깨에 번제 나무를 지우고 자신은 칼과 불을 가지고 가는데 이삭이 아브라함에게 물었습니다. "내 아버지여,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이 말은 순진한 말이었지만 아브라함의 심령을 강타하는 시험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마음 속에 잠재해 있던 정과 욕심이 불길같이 타올랐습니다.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을 느꼈을 것입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아브라함은 바위와 같이 요동치 않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도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번제할 어린 양을 친히 준비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우리는 이 말에서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을 어떤 존재로 보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자기 아들로만 보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서 친히 준비하신 어린 양'으로 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와 자기 아들이 세상 사람에 대해서 복의 근원으로 부르심 받은 것을 알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와 자기 아들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을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아브라함은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알았고 죄의 댓가는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임을 소돔성의 멸망을 통해서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는 세상은 하나님의 복이 아니라 저주의 심판을 받아야 함을 알았습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천하 만민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그 자손을 인해 복을 받게 됩니까? 이를 위해 누군가가 세상 죄를 짊어져야만 했습니다. 아브라함이나 이삭, 그 후손이 세상 죄를 짊어져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이삭이 바로 그런 존재였습니다. 이삭이 세상 죄를 위해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신 어린 양이요 희생제물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그런 존재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삭은 완전한 희생제물이 아니라 다만 뒤에 오실 완전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였습니다.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이 말을 한 아브라함은 이삭에게서 장차 오실 완전한 희생양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 양으로 바치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하나님 아버지의 슬픔을 생각했습니다. 본문에서 아브라함은 부활신앙을 가지고 태연하게 외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드리고자 했지만 그 마음의 아픔은 말로 다할 수 없었습니다. 차라지 자기가 번제로 드려지는 것이 낫지 외아들을 번제로 드린다는 것은 정말 고통스러웠습니다. 자기 손으로 아들을 잡아 태운다는 것은 너무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순간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으실 하나님의 마음과 아픔을 생각했으며 그 아픔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러 가는 아브라함은 그 순간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박으신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는 또한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 곧 독생자를 희생하심으로써 천하 만민을 축복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생각했습니다. 또한 악한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을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안 아브라함은 아프지만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릴 수 있었습니다.
어떤 목자님은 교수 목자로서 뻗어나갈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고 사도 훈련을 받고 선교사로 나갈 수 있는 기회를 하나님께 드리고 본국 역사에 동역자로 남았습니다. 어떤 목자님은 진급하는데 유리한 근무지를 포기하고 캠퍼스 양떼들을 섬기기 위해서 한직을 택하였습니다. 우리 가운데 수많은 분들이 자기의 꿈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캠퍼스 양들을 감당하기 위해서 자기의 이삭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우리의 역사는 그런 믿음과 희생 위에서 성장해 왔습니다. 지금 당신은 당신의 사랑하는 것, 소중한 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소중한 것을 바쳐야 할 때 무슨 생각을 합니까? 아깝다는 생각만 듭니까? 그때 우리는 자기 생명을 버리신 예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죄인들을 위해 독생자를 바치신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하고 하나님과 한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곳에 이르러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고자 하였습니다. 이는 완전한 단념이요 완전한 순종이었습니다. 이때 이삭은 반항하지 않고 순종하여 그 아버지에 그 아들임을 나타냈습니다. 그는 이때 놀래서 그 후로 말이 없고 묵상을 즐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또 내 아버지는 육신의 아버지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라는 것을 깊이 깨닫고 개인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이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고 했습니다.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고 기록하였습니다(히11:17-19).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실 것을 믿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또한 부활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오 가져가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잡으려고 하자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급히 불렀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이는 아브라함이 시험을 통과했다는 합격 통지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인정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실재성을 느끼고 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연합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경외했기 때문에 온전히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여러 가지 변명을 하면서 이삭을 바치지 않았다면 그의 믿음은 가짜인 것이 드러났을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선생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침으로써 그 믿음이 온전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약2:26).
하나님께서는 친히 한 수양을 준비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돌아보니 한 수 양이 수풀에 걸려 있었습니다. 그는 이것을 잡아 번제로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수 양은 장차 이곳에서 죽임을 당하실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하기 위한 죽음을 죽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독생자를 주시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체험하고 그 역사에 조상으로 쓰임받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독생자를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야 하나님의 역사를 제대로 섬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절대적인 사랑과 충성을 축복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요구한 것은 근본적으로 이삭보다 이삭을 바칠 수 있는 믿음과 사랑과 순종이었습니다. 이를 통해서 아브라함이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고 살 수 있는 믿음을 갖기를 원하셨고 또 그가 마음과 성품과 뜻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하나님을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준비하시고 책임져 주십니다. 이는 일생을 돌아본 아브라함의 신앙 간증이기도 하였습니다. 그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났지만 하나님께서 다 채워주셨습니다. 또한 이레란 본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자기에게 예배를 드리러 오는 사람들을 보시고 필요한 것을 준비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예배할 때 우리의 필요를 보시고 준비해 두셨다가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영적 축복을 스스로 맹세하면서 확정하셨습니다.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레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리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순종을 기뻐하시고 맹세까지 하시면서 그를 축복하셨습니다. 그의 후손 가운데서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배웠습니다. 우리가 내가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이삭을 하나님께서 원하실 때에 하나님께 드리고 독생자를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소유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인정받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