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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아브라함 2000 제 4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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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섬김이
댓글 0건 조회 3,722회 작성일 03-01-17 18:37

본문

아브라함 2000 제 4 강
창세기 18:1-20:18
요 절 18:17,18

아브라함을 동역자로 삼으신 하나님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우리는 지난 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열국의 아비가 되도록 소망을 심으신 것을 배웠습니다. 오늘은 아브라함이 열국의 아비다운 삶을 살아나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의 섬기는 생활과 죄인들을 위한 중보기도를 통해서 열국의 아비다운 생활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언제까지나 양으로만 생각하시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성장과 함께 구속 역사의 비밀을 숨김없이 말씀해 주시고 그를 동역자로 삼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구원역사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저희들에게 섬김과 중보기도에서 자라게 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Ⅰ. 아브라함을 동역자로 삼으신 하나님(18:1-33)

 여호와 하나님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오정 즈음에 장막 문에 있는 그늘에 앉아서 쉼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가 눈을 들어보니 사람 셋이 맞은 편에 서 있었습니다. 그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들을 보자 마자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손님들에게 몸을 땅에 굽혀 인사를 하고 영접하였습니다.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컨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옵시고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서 쉬소서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쾌활케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 그는 손님들이 자기 집에 오셨을 때 겸손한 마음으로 영접하였습니다. 손님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자 물을 조금, 떡도 조금 대접할테니 쉬었다가 가시라고 하였습니다. 손님들이 "네 말대로 그리하라."고 하였습니다. 손님들이 말하는 태도를 볼 때 아브라함은 평범한 분들이 아님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는 급히 장막에 들어가서 사라에게 부탁했습니다. "속히 고운 가루 한 말을 가져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어주세요." 사라는 미리 연락을 하고 손님을 모시든지 하지 않고 이렇게 급히 다그치면 어떻게 해요 하며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사라는 나이가 많지만 열국의 어미답게 손님을 섬기는 일에 마음을 다하였습니다. 남편의 말에 토씨를 달지 않고 순종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짐승 떼에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끌고와서 하인들에게 주며 급히 바비큐를 만들도록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뻐터와 우유와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손님들 앞에 진설하고 나무 아래 모셔 섰습니다. 그리고 음식이 떨어질 때마다 접시를 채우고 물이 떨어지면 컵을 채웠습니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서 나무 그늘 속에서 식사를 하는 분들을 기쁘게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섬김을 묵상할 때 뻣뻣한 자신이 부끄럽습니다. 아브라함은 섬김에 있어서 민첩하였습니다. 거의 100세나 되었지만 뛰어다니면서 섬겼습니다. 무슨 일을 시키면 엉금 엉금 기어다니면서 자기 할 일 다하면서 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겉모습은 청년인데 행동이 늙은이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종들은 숨이 차도록 뛰어다니며 일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는 그런 스피릿이 필요합니다. 또한 아브라함은 가진 것이 많은 것도 있겠지만 그 마음이 참으로 풍성하였습니다. 롯의 경우를 볼 때 사람이 많이 가졌다고 해서 마음이 풍요로운 것은 아닙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의 축복을 믿는 믿음이 있고 사랑이 있을 때 풍요로움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기쁜 마음으로 섬기는 사람의 섬김을 받으면 마음이 행복합니다. 그런데 자기 의로 가득찬 마음으로 섬기는 사람의 섬김을 받으면 부담스럽습니다. 하나님은 뜨거운 대낮에 시원한 나무 그늘 속에서 아브라함의 풍성한 대접을 받으시자 기분이 매우 좋으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9,10)." 사라가 장막 문에서 이를 듣고 속으로 웃었습니다.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사라는 자신의 삶에서 1%의 소망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인간의 가능성은 실제로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습니다. 이런 절망 속에서 하나님은 사라에게 믿음을 심으시고 일을 계속하셨습니다. 인간이 절망할지라도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소망으로 충만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존재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창조력에 힘입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아브라함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 택함을 받고 그 역사에 쓰임 받는 것이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물으셨습니다.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여호와께 능치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그러자 사라가 두려워서 승인치 아니하였습니다.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고 하심으로 사라가 회개하도록 도우셨습니다. 그리하여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믿음으로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았기 때문입니다.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습니다. 당시 사라의 나이는 89세였습니다. 그가 불신을 회개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었을 때 회춘하여 잉태하는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여호와께는 능치 못하심이 없습니다. 그는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현재 자녀를 잉태할 힘이 없어서 포기하고 절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사라의 태를 여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나이가 문제가 아닙니다. 학생들에게 영적 소원이 없는 것도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영적 자녀를 주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불신을 회개하고 하나님을 믿어 잉태할 힘을 덧입어야 하겠습니다. 처녀 마리아의 몸에서 예수님을 잉태하신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들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가능케 되는 역사를 이루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찬을 끝내시고 일어나시면서 아브라함에게 한 가지 비밀을 털어 놓으셨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아브라함에게 보이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하고자 하시는 것을 우리들에게 밝히 드러내십니다. 물론 하나님에게는 신비한 것도 있고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는 것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선지자들에게 자신의 뜻을 보여 주십니다. 그의 뜻이 무엇인지 구하면 기쁜 마음으로 가르쳐 주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18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 이후 반역하는 마음으로 끊임없이 하나님을 반역하고 인정치 아니하며 하나님을 좇는데서 돌이켜 포학과 패역을 말하며 거짓말을 마음에 잉태하고 독사의 자식들을 낳는 세상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말씀을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는 새로운 민족을 이루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멸망시키는데 마음을 쓰기보다 새 사람을 만드는데 더욱 힘을 기울이십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키우고 번성케 하는데서 하나님은 기쁨을 누리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신의 뜻을 말씀해 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그를 동역자로 삼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양으로만 생각지 않으셨습니다. 이제 그의 성장과 함께 구속 역사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고 동참하도록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심판이라든가 구속의 경륜을 깊이 나누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는 것 자체가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을 기초로 아브라함은 중보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 계획을 백성들에게 알려야 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이 자연 재앙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임을 증거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경고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님의 역사를 세상에 증거할 책임이 있습니다.

 소돔 고모라의 멸망을 안 아브라함은 기도를 드리기 시작합니다.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 그 성 중에 의인 오십이 있어도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치 아니하시리이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의로우신 분인 것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의에 기초해서 심판을 하십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불가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의인 오십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경을 용서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끈질기게 기도하였습니다. 그래서 50-45-40-30-20-10까지 깍았습니다. 그는 흥정의 천재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그가 이렇게 기도할 수 있었던 힘이 무엇이었을까요? 사실 우리가 일하다보면 위에 계신 분들의 마음을 돌리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분들도 다 자기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상대로 다섯 번까지 하나님의 뜻을 바꾸시도록 하였습니다. 그는 소돔과 고모라가 죄악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죄악은 하늘에 사무쳤습니다. 죄라는 것은 밝혀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심판자의위치에서 남의 죄를 밝히는데 혈안이 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죄가 밝혀진다고 해서 인간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죄는 솟구쳐내는 흙탕물과 같이 계속해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죄인들의 마음은 아무리 파헤쳐야 선한 것이 나올 수 없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매주 소감을 쓰지만 회개할 것이 나오지 않습니까? 우리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아브라함은 죄인들의 연약함을 잘 알았습니다. 사실 자신도 거짓말을 잘하는 죄인이요 불신의 죄인이요 불순종하기를 잘한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소망을 두시고 그를 키워주셨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나아가 죄인들 편에 서서 용서의 기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위대한 것은 죄인들의 연약함을 품고 하나님께 나아가 긍휼을 구한 것입니다. 그는 죽이는 것보다 살리는데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롯에 대한 불타는 목자의 심정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모세의 중보기도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가 십계명을 받기 위해서 시내 산에 올라갔는데 그가 더디 내려오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절하며 춤추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 대한 진노가 극심하여 그들을 다 멸하고 모세로부터 큰 나라를 다시 시작하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께 나아가 중보기도를 드렸습니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애굽 사람으로 이르기를 여호와가 화를 내려 그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고 인도하여 내었다 하게 하려 하시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주를 가리켜 그들에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나의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영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출32:11-14)." 모세는 산으로 내려와서 백성들이 금송아지 앞에 절하고 춤추는 모습을 보고 두돌판을 던져서 금송아지를 깨트리고 그것을 갈아서 백성들에게 마시게 했습니다. 그리고 레위 자손을 중심으로 자체 심판을 행하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허리에 칼을 차고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그 친구를 각 사람이 그 이웃을 도륙하라는 것입니다. 이로인해 삼천명 가량이 죽었습니다. 이튿날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큰 죄를 범하였도다 내가 이제 여호와께로 올라가노니 혹 너희의 죄를 속할까 하노라 하고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받으시고 패역한 이스라엘을 멸망시키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 위에서 중보기도를 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주님은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면서 우리를 위해서 중보기도하고 계십니다. 사도 바울도 자기 민족의 구원을 위해서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라고 기도하였습니다(롬9:3). 우리는 아브라함의 이러한 중보기도를 통해서 롯이 구원받았음을 압니다. 우리는 홍익대 지성인들의 구원을 위해서 중보기도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양들을 위해서 중보기도할 때에 구원의 역사가 활발하게 이루어 질 줄 믿습니다. 또한 우리는 고난 당하는 자들을 위해서, 병든 자들을 위해서, 죄 가운데 있는 자들을 위해서, 시험에 든 자들을 위해서, 주의 종들을 위해서, 이 민족을 위해서, 선교사님들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우리의 특권이요 능력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일하십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기도를 통해서 의인의 중요성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 열명만 있어도 심판받아 마땅한 소돔과 고모라 성을 유지시키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경건한 의인들이 튀지 않기 때문에 별 가치가 없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의인들 덕택에 그나마 유지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룩하고 경건하게 산다고해서 이 세상이 크게 변화되는 것은 아니지만 심판을 지연시킬 수는 있습니다. 그 시간 동안 많은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우리 나라는 조선 시대에 선비들이 이 사회를 버티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올곧음, 청빈, 학문에 대한 열정 등이 이 사회를 유지했는데 지금 우리 나라를 유지하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정치가도, 경제인도 아니고 순수한 대학생들과 신앙인들이 힘을 합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열명의 의인을 한나라와 바꾸지 않습니다.

Ⅱ. 소돔 고모라를 멸하신 하나님(19:1-38)

 날이 저물자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렀는데 마침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아 있었습니다. 당시 성문은 사업과 상업 활동의 중심지였습니다. 또한 재판이 행하여졌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성문에 앉았다는 것은 그가 상당한 지위에 있었음을 말해줍니다. 아마 재판관이었던 모양입니다. 아브라함이 전쟁에 잡혀갔던 소돔 성 사람들을 구해주고 재산을 다 돌려주었기 때문에 그런 대우를 받았던 것 같습니다. 이때 롯은 손님들을 집으로 초청하여 발을 씻고 주무시고 일찍이 일어나 갈 길을 가도록 하였습니다. 그가 간청하자 그들은 그제서야 돌이켜서 그 집으로 들어왔습니다. 롯은 그들을 위하여 식탁을 베푸는데 딱딱하고 메마른 무교병을 대접하였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라면을 대접한 것입니다. 그의 아내는 뭐하는지 코빼기도 내밀지 않았습니다. 그의 가정은 썰렁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눕기 전에 그 성 사람들이 늙은이로부터 젊은이까지 사방에서 모여 그 집을 에워쌌습니다. 그리고 저녁에 네게 온 사람을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동성연애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공개적으로 소리를 지르는 것을 보면 동성연애가 보편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도 이 시대는 멸망을 향해 치닫고 있습니다.
 게이들이 몰려와 행패를 부리자 롯은 딸들을 그들에게 주어 손님들을 보호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천사들은 폭도들의 눈을 멀게함으로 문을 찾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롯에게 심판을 알려주고 가족들을 성밖으로 이끌어 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14절을 보십시오. "롯이 나가서 그 딸들과 정혼한 사위들에게 고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 곳에서 떠나라 하되 그 사위들이 농담으로 여겼더라." 장인이 심판에 대해서 다급해서 말을 하는데도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습니다. 이는 롯이 평소에 사위들에게 좋은 영향력을 끼치지 못했음을 반증하는것입니다. 그리고 사위들이 세상에 깊이 물들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에 관한 말씀을 농담으로 여기는 자들은 지금도 많이 있습니다. 벧후 3:3-7절은 말씀합니다.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이로 말미암아 그 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그렇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의 재림을 농담으로 여기고 하나님의 불심판을 조롱하는 자들에게 소돔과 고모라에 내렸던 유황불 심판이 내려질 것입니다. 역사는 반복됩니다. 역사로부터 배우지 못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천사들은 롯이 세상에 대한 미련 때문에 지체하는 것을 보고 롯의 손과 그 아내의 손과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성밖에 두고 돌아보거나 들에 머루르거나 하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함을 면하라고 엄히 경고하였습니다(17). 그런데 롯은 "내 주여 그리 마옵소서"라고 토씨를 붙여서 마음으로부터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 생각대로 자기 생각만큼만 순종하였습니다. 19-22절에 나타난 롯의 행동을 볼 때 천사들은 심히 답답하였습니다. 이렇게 자기가 생각이 강한 사람이 있는가 생각이 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즉각 즉각 순종하는 것과 매우 대조가 됩니다. 그러나 천사들은 다시 그에게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그들이 소알 성에 이르기 까지는 어떤 행동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롯이 소알 성에 들어갈 때에 해가 돋았습니다. 이때부터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유황과 불을 비 같이 소돔과 고모라에 내리셨습니다. 원자폭탄을 맞은 것 같이 강한 빛이 번쩍거리고 열기가 후끈거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성과 온 들과 성에 거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들을 다 엎어 멸하셨습니다. 그 곳은 지금의 사해로서 물고기조차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이 지구를 원폭으로 25번 이상 불태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폭파시키실 때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 본고로 소금 기둥이 되었습니다. 이 여자는 평소에 하나님의 말씀을 경홀히 여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말씀 공부 시간에는 이리 저리 핑계를 대고 소감도 쓰지 않고 세상의 재물들과 딸들을 결혼시킬 것에만 마음이 가 있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불탈 때에도 두고 온 재물과 사위들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없었습니다. 마음이 세상 것에 빼앗겼을 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뒤를 돌아봄으로 눈이 삭아버리고 몸은 소금 기둥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눅17장에서 재림 때에 일어날 일들을 말씀하셨습니다.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짓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오듯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 인자의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그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 세간이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오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이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것이니라. 롯의 처를 생각하라.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얻으리라(눅17:28-33).

 롯은 결국 소알 성에서 나와 산으로 가서 동굴에 거하였습니다. 그리고 죄악의 씨를 낳았습니다.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 양다리를 걸치고 사는 자의 삶이 이와 같습니다. 그는 아브라함과 함께 신앙 출발을 했습니다. 그는 죄를 사모하여 소돔 성에 들어갔고 거기서 돈도 많이 벌고 집도 사고 자식들도 결혼시켰습니다. 그 사회에서 인정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죄인들과 죄악된 생활을 하는 그의 마음은 상해있었습니다(벧후2:8). 그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축복을 믿지 못했기 그곳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결국 집과 재산도 다 잃고 사위도 잃고 아내도 소금 기둥이 되고 죄의 열매만 남겨놓은 채 비참한 최후를 마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우직하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복받는 길이요 의의 열매를 맺는 삶이요 복받은 자의 삶입니다. 우리가 어떤 경우에도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의 뜻을 섬기며 중보기도하는 종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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