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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000년 가을 창세기 제 3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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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섬김이
댓글 0건 조회 3,727회 작성일 03-01-17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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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가을 창세기 제 3 강
창세기 16:1-17:27
요 절 17:4,5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찌라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지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지난 주에는 아브람이 고민에 빠졌는데 오늘 말씀에서는 사래가 문제에 빠졌습니다. 사래가 인간적인 지혜로 아들을 얻고자 했을 때 가정은 파탄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가정 문제를 어떻게 수습해 주셨습니까? 후반부에서는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꾸어 주신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소시민이 아니라 열국의 아비들로 성장하기를 소원하시고 그렇게 키우고자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소원을 영접하고 그렇게 살고자 결단하는 시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Ⅰ. 가정 문제를 수습하신 하나님(16:1-16)

사래의 고민이 무엇입니까? 여인으로서 가장 기본적인 애를 낳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여인들이 애를 낳지 못하게 되면 다른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았습니다. 사래는 많은 나날 동안 특히 아브람이 늙어갈수록 근심이 쌓여갔습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의 언약을 상속할 상속자를 낳아야 하는데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산부인과에도 가보고 임신하는데 좋다는 약은 다 먹어보고 여러 가지 방도들을 구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하나께서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는 약속의 말씀을 철썩같이 믿고 고향을 떠나온지도 10년이 넘게 지났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자신에게는 변한 것이 없었습니다. 사래는 열매없는 자신의 삶을 한탄하며 자책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래의 인내에 한계가 온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하나님께서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삼고자 하는 아브람을 찾아오셔서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자기 힘으로 이루어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자기의 몸종인 하갈을 아브람에게 주어서 아기를 갖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결정을 하기 까지 사래는 나름대로 고민을 많이 했을 것입니다. 한 여인으로서 남편의 사랑을 받으며 살아왔는데 이제 그 사랑을 다른 여자에게 내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러나 남편을 위하고 하나님을 위하는 길이라 생각하고 자기 딴에는 큰 희생을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시킨 것이었습니다. 하루는 사래가 아브람에게 미소를 보이면서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여보,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지 아니하셨으니 원컨대 나의 여종과 동침해 주세요. 애굽에서 데려온 하갈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사래의 말에 아브람은 귀가 솔깃했습니다. 사실 이 방법은 당시 불신자들이 행해오던 관습이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씨받이라는 것이 있어서 양반들은 이런 식으로 자손을 이어왔습니다. 그런데 사래의 이런 행동의 밑바닥에는 하나님께 대한 불신이 깔려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애를 안 주실 것이다라는 불신입니다. 나는 더 이상 자식을 낳을 수 없다는 운명주의입니다. 그가 이런 인간적인 생각을 하고 일을 추진했을 때 자신들의 계산과는 다른 불행한 일들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어리석어 보이지만 사실은 가장 빠르고 지혜로운 것입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또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중대한 결정을 할 때 사래의 말을 들었습니다. 사래는 자신이 늙어감에 따라 자식을 낳을 수 없다는 초조감과 불신에 시달렸습니다. 아브람은 사래가 믿음이 없이 흔들리고 있는 때에 불신에 기초한 말을 들었습니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었다는 표현은 3:17절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명한 나무의 실과를 아담이 따먹었을 때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는 표현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하와는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불신하여 뱀이 시키는대로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나무를 먹고 가정 파탄과 저주를 불러 들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육신의 감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따라서 행동했을 때 죄의 종노릇을 하고 파멸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는 사울이 전쟁에 나갔을 때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자기 눈에 보기 좋은 양과 소와 기름진 것들을 남겨놓았을 때 결국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삼상15:9). 아브람은 사래를 통해서 왜곡된 말씀을 들었을 때 기도를 해야 하는데 육신의 욕심에 기초해서 결정하였습니다. 그는 하갈을 첩으로 맞아들였습니다. 그는 사래가 자신보다 남편을 생각하고 여인으로서의 자존심을 꺽어가면서 이렇게 한 것을 사양하는 척 하면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태도는 사람이 보기에는 바르게 보였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사망의 길이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하기 보다 인간적인 지혜나 서툰 계산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더욱 빠져나올 수 없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우리는 인본주의와 혼합된 신앙 체계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알아야 합니다. 한국 천주교에서는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은 것을 회개하였습니다. 이것은 대표적인 혼합주의입니다. 성경이 분명하게 우상 숭배를 금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리아 상과 예수님상과 성인들의 상에 절을 하는 그들이 조상 숭배를 합리화하고 이제는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잘못된 것인양 몰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생활 가운데에서 이러한 인본주의와 혼합된 신앙을 분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믿고 순종하는 종들이 되어야 합니다.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한 지 십 년 후였습니다.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기다렸다는 듯이 잉태하였습니다. 하갈이 잉태하게 되자 가정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하갈이 여주인을 멸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평소에는 여주인에게 꼼짝 못하고 고분고분 순종을 잘 하던 하갈이 하루 아침에 얼굴 빛이 달라졌습니다. 여주인이 무엇을 시켜도 입덧을 하기 때문이라며 도리어 섬김을 받고자 했습니다. 아브람과 사래가 섬겨주어도 애굽에서 나는 '타이' 차가 먹고 싶다면서 투정을 부렸습니다. 사래가 보는 앞에서  나오는 배를 더 내밀었습니다. 그의 교만은 갈수록 기승을 부리더니 천박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사래는 그 이름이 말해주듯이 공주처럼 살았습니다. 세계의 최강대국 애굽 왕 바로의 후궁이 되었던 미모와 자존심이 있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감히 종년 주제에 사래를 멸시했으니 사래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래는 하갈을 학대하기 시작했습니다. 시기심이 질투로 질투가 증오로 발전하여 죽이고 싶도록 미워하였습니다. 우루-남무에는 오만한 노예 출신의 첩은 소금 한 사발로 그의 입을 문지르라는 법이 있고 함무라비 법전에는 이러한 여자들은 노예의 신분으로 강등시켜 노예의 표지를 달고 다니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마치 주홍글씨에 나오는 여자가 'A'자를 달고 다니는 것과 같이 말입니다. 아브람은 그 사이에서 방황하게 되었습니다. 누구의 편을 들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러자 사래가 하와에게 배운 대로 아브람에게 책임을 전가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받는 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아요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할 뿐이에요." 그렇게 평온하고 사랑스럽던 아브람의 가정은 지옥을 방불하게 되었습니다. 날마다 사래와 하갈이 비명을 지르며 싸우고 신경질을 부렸습니다. 찬바람이 씽씽 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결국 사래에게 말했습니다. "그대의 여종은 그대의 수중에 있으니 그대의 눈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그러자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여 하갈이 사래의 앞에서 도망하였습니다. 하갈이 가출을 한 것입니다. 아브람은 여종을 통해서 아들을 얻고자 했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고 상처만 남게 되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자기로서는 어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믿음으로 살다가 인내하지 못하면 엉뚱한 결정을 하게 되고 자신과 동역자에게 고통을 주게 됨을 보게 됩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 일을 추진했을 때 자기로서는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꼬이고 불화를 가져옴을 보게 됩니다.  아브람이 약속의 말씀을 붙들지 않았을 때 그는 미로 속에서 헤매게 되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어떻게 도와 주셨습니까? 하갈은 가출을 했지만 마땅히 갈만한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향인 애굽으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광야의 샘 곁 곧 술 길 샘물 곁에 배고픔을 물로 채우고 앉아 있을 때 하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하갈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나의 여 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여호와의 사자가 방향을 주었습니다. "네 여주인에게도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생각하사 가정 문제에 개입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의 가정의 목자가 되셨습니다. 가정의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 생명을 얻고 축복을 감당하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사자는 하갈로 하여금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 물으심으로 문제가 어디서부터 발생했는지 돌아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자기 위치로 돌아가도록 하셨습니다. 감정적이 되면 문제 해결이 잘 안보입니다. 사람들 사이에 생긴 반목과 질시, 갈등과 미움 등은 당사자를 떼어놓는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문제가 생겼을 때 그것을 회비하려하거나 잊으려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미루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문제가 생겼을 때 광야로 나아가 하나님을 만나야합니다.  하나님을 찾아야 문제가 해결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만나야 자기를 이길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는 하갈에게 약속의 말씀도 주셨습니다. "내가 네 자손으로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잉태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하갈은 자기가 만난 하나님의 이름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감찰하시는 하나님은 약자를 돌보시는 분이십니다. 고통하는 자들, 버림 받은 자들, 슬픈 자들, 상처받은 자들을 돌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 때에 수고는 죽도록 하고 인정받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인정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해로 인해서 미움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이 세상에서 주와 복음을 위해서 수고하고 이 세상에서 인정과 칭찬을 받으면 하나님 나라에서는 받을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충성하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큰 상급을 받는 것이 더욱 지혜로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십니다. 하나님이 알아주시면 그 이상 무엇이 더 필요합니까? 내가 누구를 기쁘게 하고자 이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께 판단을 맡기고 우리는 각자의 위치에서 충성을 다하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보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묵상함으로 힘과 위로를 받기를 바랍니다. 또한 하나님은 아브람의 실수와 허물을 감당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산다고 하지만 많은 허물과 실수를 남길 수 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이때 자학하고  믿음의 길을 가기를 포기하지 말고 복의 근원으로 부르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Ⅱ.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찌라(17:1-27)

  아브람이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얻은 때는 그 나이 86세였습니다. 그런데 아브람의 99세 때에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17:18절에 아브람은 하나님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서 살기를 원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볼 때 아브람은 당시 이스마엘에게 폭 빠져 지내고 있었습니다. 이스마엘의 나이는 13세였습니다. 성경 기록에는 아브람의 이 인생 13년이 빠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관계없이 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는 더 이상 상속자 문제로 고민하지도 않았습니다. 체넘에서 오는 평안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목자로 살면서 아이들 키우고 애들이 재롱을 부리고 말도 배우고 씩씩하게 자라나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립니다. 아이들 키우는 것이 힘들게 느껴지지만 잠깐입니다. 우리가 소시민적인 삶을 살다보면 세월가는 줄 모릅니다. 세상의 잔재미에 취해서 사는 것이 그렇게 빨리 지나갑니다. 허무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의 이런 삶을 참아주셨습니다.
 그러나 때가 되자 그를 찾아오사 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전능하신 하나님은 믿음의 기초입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잊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대한 불신을 갖고 13년을 지내었습니다. 또한 그는 하나님 앞에서 살지 않고 이스마엘 앞에서 살았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절대적인 충성심을 가지고 순종하는 삶을 살도록 촉구하십니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출현과 임재를 의식하고 그가 명하시는 것은 무조건 순종하는 사람이 되도록 명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항상 하나님의 눈초리를 의식하여 생각하고 행동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완전하라는 것은 흠이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책망할 것이 없는 흠이 없는 사람이 되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완전하라는 것은 약속을 믿는 믿음과 약속의 말씀에 근거하여 살라는 것입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이스마엘은 약속의 자녀가 아니었습니다(갈4:22,23). 육체의 소욕을 따라서 낳은 종의 자식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으로 하여금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약속의 자녀를 낳도록 격려하신 것입니다. 믿음을 회복하도록 도와주시는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시 아브람에게 언약을 새롭게 하셨습니다. 그로 심히 번성케 하며 가나안 일경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4,5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지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은 아브람의 부르심의 회복해 주셨습니다. 또 언약의 말씀을 새겨 주시기 위해서 이름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아브람은 고상한 아비인데 여기서 아브라함 즉 열국의 아버지로 살도록 비전을 주셨습니다. 아브람의 삶이냐 아브라함의 삶이냐? 우리에게는 고상한 아버지로 살고 싶은 욕망이 있다. 작은 행복에 매여 살기 쉽습니다. 현실에 만족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과 소망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평신도목자님들이 처음 직장 생활 할 때는 나름대로 성취감도 있고 재미도 있습니다. 공부하는 것도 그렇고 돈버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이런 잔재미에 쏙 빠져서 살 때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사명을 성취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이 나이가 들자 현실에 안주하고자 하는 것을 아시고 이름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이름이란 그 사람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그의 속 사람을 바꾸는 것입니다. 진정한 변화는 속 사람이 변화되어야 옵니다. 우리도 훈련네임을 줌으로 내적인 투쟁을 하도록 돕습니다. 겸손, 경외, 열국, 자기 부인, 시다 등등 이름을 들을 때마다 내적인 투쟁이 됩니다. 어떤 사람은 하도 분주하고 정신이 없어서 포인트라고 부르기도 하고 어찌하든지 일을 성취해보라고 '어찌'라고도 합니다. 우리가 훈련을 위해서 이름이라도 바꾸어 내적인 투쟁을 함으로 아브라함과 같은 열국의 아비다운 내면성을 덧입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열국의 아비가 될찌라고 하셨지만 당장 그에게 그러한 열국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먼저 열국의 아비다운 내면성을 갖도록 키워주셨습니다. 요셉을 애굽의 국무총리로 세워서 구원역사를 섬기기에 앞서 하나님은 그와 동행하시면서 섬김의 도를 익히도록 하셨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섭리를 믿도록 도우셨습니다. 이삭과 야곱을 열국의 아비로 키우실 때에도 먼저 그들이 한 말씀에 순종하도록 도우셨습니다. 우리가 열국의 아비다운 내면성을 갖고자 힘쓰면 때가 되어 열국의 아비가 되는 현실로 다가옵니다. 우리 요회목자님들이 열국이 아비가 되고자 하는 비전을 가지고 내적인 투쟁을 힘쓰기를 기도합니다. 한 두명을 먹이는데 자족하지 말고 열국을 먹이고자 하는 소원을 덧입고 내면 투쟁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과 언약을 세우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아브라함과 그의 대대 후손 사이에 영원한 언약을 삼고 아브라함과 그 후손의 하나님이 되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을 소개시킬 때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은 역사의 하나님이시오 개인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은 바로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이를 통해서 창조 질서를 회복하시고 만유의 주가 되고자 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요 아브라함의 자손이 됩니다(롬4:13).

 하나님께서는 이 언약을 인치기 위해서 할례를 행하라고 하십니다. 할례란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었습니다. 그래서 대대로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혹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요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무론하고 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할례를 행하는 것은 부도덕한 삶을 청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서 정결하게 살겠다는 외적인 표시입니다. 오늘날은 세례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예수님과 연합하여  죽고 예수님과 연합하여 장사되고 예수님과 연합하여 새 생명을 얻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이름만 바꾸어 주신 것이 아니라 사래도 사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사래란 나의 공주라는 뜻인데 열국의 어미라는 뜻의 사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사라가 아들을 낳아 주게 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당시 사라는 90세의 할머니였습니다. 본래 잉태하지 못한다는 여자였습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은 그를 통해서 열왕들이 나리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 말씀을 듣자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었습니다. 그리고 마음 속으로 "백세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하고는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웃기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형편을 바라보니 더 이상 가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한발자국도 물러나지 않으시고 그에게 믿음을 심으셨습니다. "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19)." 이삭은 웃음이란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에게 웃음을 주십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듣고 비록 웃었지만 바로 그 날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신 대로 자신과 이스마엘과 집에서 자란 모든 자와 돈으로 산 모든 자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순종은 지체없이 절대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만큼 그의 믿음이 자란 것입니다. 그는 13년 동안의 소시민적인 생활을 청산하고 열국의 아비가 되라는 말씀대로 살고자 결단하였습니다. 자기 뜻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는 표시요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겠다는 결심이었습니다.

 우리는 이상에서 소시민적인 꿈을 간직하며 살고 있는 아브람을 열국의 아비로 세우기 위해서 믿음을 심으시고 할례를 행하게 하시고 이름을 바꾸어 주시는 하나님의 훈련을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하기 위해서 마음으로부터 말씀에 순종하고 마음을 넓혀서 열국의 아비요, 열국의 어미로 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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