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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000년 가을 창세기 공부 제 2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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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섬김이
댓글 0건 조회 3,767회 작성일 03-01-17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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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가을 창세기 공부 제 2 강
창세기 14:1-15:21
요 절 15:1
  지극히 큰 상급 되신 하나님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할 때 해결 받고자 하는 인생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신앙 생활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인생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믿음을 잃어버리고 세상으로 가기 쉽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브람도 그런 위기에 빠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찾아오시고 하나님께서 그의 지극히 큰 상급이 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바른 신앙 목표를 제시하셨습니다. 그리고 뭇별과 같은 자손과 애굽 강에서부터 유브라데 강까지 큰 땅을 유업으로 주겠다고 친히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아브람은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이 없고 손에 잡히는 것이 없었지만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시기고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셨습니다. 이 시간 우리가 무엇을 소망해야 하는가, 우리의 상급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고 하나님을 믿음으로 구원 역사를 줄기차게 섬기기를 기도합니다.

Ⅰ. 승리를 주신 하나님(14:1-24)

 아브람 당시 소도시 국가들인 소돔, 고모라, 아드마, 소알 왕은 12년 동안 지금의 이라크 지역에 있는 그돌라오멜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좀 살만해지자 섬기던 그돌라오멜을 13년째부터 조공을 바치지 아니하고 반역을 했습니다. 그런데 14년째 그돌라오멜은 그와 동맹한 왕들 즉 시날, 엘라살, 엘람 왕들과 함께 반역자들을 징계하기 위해서 팔레스타인으로 쳐들어 왔습니다. 엘람과 시날은 지급 이라크 지역인데 가나안 땅까지 군대를 이끌고 왔습니다. 그런데 그돌라오멜 왕은 예상되는 경로를 통해서 쳐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요단 동쪽 지역인 아스드롯과 가르나임과 기랴다임 지역을 치고 유다 남쪽 지방인 세일(=에돔)과 가데스와 아말렉 족속을 치고 남방으로부터 소돔과 고모라 왕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한마디로 정면으로 쳐들어오지 않고 빙 돌아서 뒤쪽에서 공격을 한 것입니다. 이를 볼 때 그의 전략은 매우 탁월했습니다. 소돔 왕과 고모라 왕과 아드마왕과 스보임왕과 벨라 곧 소알 왕이 나와서 싯딤 골짜기에서 그들과 접전했으나 결국 패배하였습니다. 소돔 왕과 고모라 왕은 도망을 치고 많은 군사가 역청 구덩이에 빠지고 나머지는 산으로 도망을 쳤습니다. 한마디로 소돔과 고모라는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한편 소돔에 거하던 아브람의 조카 롯은 소돔 성에서 잠시 죄악된 생활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들이닥친 적군들에 의해서 포로가 되고 그 많던 재산과 아내와 모든 것을 하루 아침에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전쟁 포로가 되면 평생 비참한 노예로 살아야 했습니다. 롯의 일생을 보면 죄를 추구하는 인생이 겪는 환란과 질고가 어떠한지 알 수 있습니다. 롯은 자기도 모르게 세계 역사의 소용돌이 가운데 빠져들었습니다. 아브람도 롯으로 인해서 세계사의 무대에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아브라함은 아모리 족속 마므레의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평화롭게 살고 있었습니다. 아브람의 집에는 318명의 군사들이 있었고 아브람은 마므레와 그 형제들인 에스골과 아넬 등과 동맹을 맺고 있었습니다. 전쟁에서 한 병사가 도망을 쳐서 아브람에게 와서 패전 소식을 전하면서 아브람의 조카 롯이 사로잡혀 갔다고 하였습니다. 아브람은 이때 318명의 정병들을 소집하여 즉시 출동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들은 헬몬산 기슭인 단까지 쫓아갔습니다. 적들은 승리에 도취하여 경계가 허술하였고 술에 취하여 곯아 떨어졌습니다. 아브람은 군대를 나누어 밤에 잠들기 시작한 적군을 향하여 기습 공격을 했습니다. 화들짝 놀란 적들이 형편없이 참패하였습니다. 아브람은 여세를 몰아 다메섹 좌편 호바까지 쫓아가면서 적군을 칼로 찌르고 발로 밟고 목을 베었습니다. 아브람은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 조카 롯과 그 재물과 또 부녀와 백성들을 다 찾아왔습니다. 이는 전사에 길이 남을만한 승리였습니다. 나중에 기드온이 삼백 용사로 미디안 군사 13만 오천명을 격파한 모델이 되었습니다. 아브람은 혁혁한 전과를 세우고 돌아오는 개선 장군이 되었습니다. 소돔 왕은 사웨 골짜기 곧 왕국에 나와서 그를 영접하였습니다.

 우리는 아브람이 뺑돌이 양과 같은 롯을 구출하기 위해서 그돌라오멜 동맹군을 기습하는 장면을 보면 몇가지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먼저 그의 용기입니다. 그는 애굽에 내려갔을 때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리고 졸장부가 되어 아내도 빼앗기고 애굽 왕에게 책망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의 편이 되셔서 애굽 왕을 징계하시는 사건을 체험하고 나서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세상은 약육강식의 논리가 무섭게 적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계 역사는 힘에 의해서만 결정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관자가 되셔서 믿는 자들을 통해서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십니다. 아브람은 이제 세계 열왕들을 부수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축복하는 자를 축복하시고 아브람을 저주하는 자를 저주하시겠다는 언약의 성취였습니다. 또한 그에게는 양을 구원하기 위해서 엄청난 재산과 가장 귀중한 생명까지도 내놓고 싸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롯에 대한 목자의 심정을 가지고 싸웠을 때 기적적인 승리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가운데서도 사단의 밥이 되어 헤매는 양들을 돕기 위해서 희생적으로 투쟁하는 목자님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울 때 하나님께서 기적적인 승리를 주실 줄 믿습니다. 이번 가을 성경 학교가 적진에서 양들을 구출하여 믿음의 승리를 체험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브람이 개선할 때에 그를 영접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살렘 왕 멜기세덱이었습니다. 살렘 왕은 평강의 왕으로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습니다. 히브리서 7:1절에서는 그는 아비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다고 했습니다. 멜기세덱이란 의의 왕이란 뜻입니다. 그는 참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였습니다. 멜기세덱은 아브람을 영접하기 위해서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는 전쟁에 지친 병사들에게 떡과 포도주를 먹여 힘과 위로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전쟁에서 승리한 아브람이 교만해지지 않도록 도왔습니다. 즉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대적을 아브람의 손에 붙이셨으니 그를 찬송하자고 권면했습니다. 멜기세덱은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신 것을 깨우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도왔습니다. 그러자 아브람도 이를 영접하고 그 얻은 것에서 십일조를 멜기세덱 제사장에게 주었습니다. 아브람은 감사가 충만한 가운데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이것이 십일조의 효시입니다. 십일조는 복받기 위해서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온전히 십일조를 내는 자세입니다.

 소돔 왕은 빈손으로 개선하는 아브람을 영접하면서 뻔뻔스러운 요구를 했습니다.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취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전쟁 규례에 의하면 전쟁에서 승리한 자는 포로들과 재물을 다 차지할 권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돔 왕은 패장인 주제에 선심을 쓰듯이 물품은 네가 취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천지의 주재시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케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들메라도 내가 취하지 아니하리라(22,23)"고 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지키기 위해서 불신자의 물질을 포기했습니다. 또 죄인과 관계성을 맺지 않고자 했습니다. 그는 신자로서 물질에 매이지 않는 비범성을 보였습니다. 이를 볼 때 아브람은 물질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을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는 물질 때문에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거나 머뭇거리지 않았습니다. 뺑돌이 롯을 구출하기 위해서 막대한 물질을 과감하게 투자했습니다. 또 하나님께 바쳐야 할 물질은 기쁨으로 감사한 마음으로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명예와 자신의 영적인 생활을 위해서 소돔 왕의 호의를 단호히 거절하면서도 균형잡힌 생각을 가지고 동료들의 분깃을 제하고 소돔 왕에게 물질을 돌려주었습니다. 이를 볼 때 그는 애굽에 내려갔던 처음 실패를 거울삼아 확고한 물질관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축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우리도 부정한 물질은 과감히 물리쳐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생명을 구하는 일에 물질을 과감히 쓸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드려야할 물질은 기쁨으로 드려야 하겠습니다.

Ⅱ. 뭇별을 보여 주신 하나님 (15:1-21)

 전쟁터에서 돌아온 아브람의 생활은 어떠했습니까? 승리한 후 아브람은 연합군의 보복이 두려웠습니다. 대개 전쟁이 끝나면 후유증이 있습니다. 공포심이라든가, 무의미, 무력증 등에 시달립니다. 아브람은 그돌라오멜 동맹군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했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이름뿐이었습니다. 포획물도 포기하고 포로되었던 사람들도 다 돌려 주었습니다. 그에게 남은 것은 영광의 상처뿐이었습니다. 롯을 구해온 것으로 감사했지만 자신의 형편을 보니 한편으로는 씁쓸했습니다. 이 나이가 되도록 자식 하나 없이 지내야 하는 것과 상속자가 없음으로 인해서 생의 의미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아브람은 후손들에게 물려줄 것이 많이 있었습니다. 믿음, 재산, 약속의 말씀, 명예 등등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산을 물려받을 상속자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후배들이나 후손들에게 물려줄 것들이 있습니까? 가진 것이 없습니까? 재산보다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유산들을 물려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립 신앙, 개척 정신, 말씀에 대한 절대 순종과 선교 신앙들을 물려주어야 합니다.
 아브람이 내면 문제로 장막에 누워 있을 때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였습니다.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하나님께서는 두려움에 빠져 있는 아브람에게 두려워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의 방패가 되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친히 지극히 큰 상급이 되어 주신다고 약속했습니다. 상급이란 보상해준다는 뜻입니다. 즉 아브람이 롯을 구출하기 위해서 드린 희생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양보한 포획물과 사람에 대해서 보상애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구원 역사를 희생한 것이 없이 상급만 구한다면 이는 도둑놈 심보입니다. 여러분이 주와 복음을 위해서 희생한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면서 상급 문제는 심각한 것입니다. 누구나 궁극적으로 손해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재산상의 손해를 보더라도 명예로 보상받기를 원합니다. 살아서 손해를 보더라도 죽어서는  자손이라도 보상을 받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진정한 보상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주와 복음을 위해서 살면서 손해를 볼 때에 여러 모양으로 보상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주와 복음을 위해서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고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막10:30)"고 하셨습니다. 히11:6절에서는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진정 소망해야할 것은 무엇일까요? 아브람은 상속자와 땅을 원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지극히 큰 상급이 된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자식도 안주고 물질도 안줄테니 오직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며 살라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영육간에 넘치게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에게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친히 그의 공급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이 하나님을 얻는 것을 목표로 신앙 생활을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각자 소망하는 것이 있습니다. 좋은 친구를 얻는 것, 마음에 맞는 동역자를 맞이하여 결혼하는 것, 많은 영육간의 후손들, 4대 독자 집안에 아들 낳는 것, 건강 회복, 재산, 명예, 역사에 이름 석자를 남기는 것을 비롯해서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우리에게 주기를 원하십니다. 모세에게도 가나안 땅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주기를 원하셨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쓰임 받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는 것보다 더 큰 상급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모세에게 주셨습니다. 레위인들에게도 하나님을 섬기면서 재산도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은 남의 지파에 땅을 조금 얻고 그들이 주는 십일조로 생활하도록 하셨습니다. 당연히 그들은 가난한 자들과 나그네와 과부와 고아와 같은 수준의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신14:29). 사람은 대개 배가 부르면 교만해지고 안일해지고 방탕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배가 고프면 심령이 가난해 지고 겸손해 집니다. 사도 바울은 죽을 때 가죽으로 된 성경과 겉옷 한 벌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일생 동안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고 달음박질하였습니다(빌3:8,10,11). 그런데 이것은 지도자만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추구해야 할 목표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일시적인 것을 목표로 삼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축복하기 원하시고 우리가 복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신앙 투쟁은 논리와 정답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감성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아브람의 불평이 무엇입니까?  2,3절을 보십시오.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 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 것이니이다." 저는 이상하게도 이런 아브람의 대답이 마음에 듭니다. 제가 하고 싶었던 것을 제 대신 하나님께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브람의 이런 연약한 점 때문에 저는 그를 사랑합니다. 그와 같은 감정을 공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런 아브람을 변함없이 사랑하시고 감당해주시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세계 선교가 주님의 뜻이기 때문에 줄기차게 선교사를 파송했습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는 말씀을 붙잡고 주기를 힘썼습니다. 그런데 역사는 쉽게 부흥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께 이렇게 불평을 했습니다.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아브람에게 자식 문제가 인생 문제라면 저는 역사의 성장이 인생 문제였습니다. 저는 밤낮으로 이것을 생각했으며 이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부족하지만 일년 내내 일했습니다. 그런데 일년이 지나고 나면 늦가을 감나무 꼭대기에 있는 감 마냥 몇 사람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올해 감을 많이 땄는데 새양들인 루카스팀이 예년과 다르게 많이 남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또 제 안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을 연구하는 기쁨을 주셨습니다. 제가 하나님께서 지극히 큰 상급을 주실 것을 믿고 더욱 힘써 복음을 전하고 제자 양성을 하고 세계 선교 역사를 섬기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가운데 결혼 적령기가 되었는데 결혼을 안하신 분들은 결혼 늦게 한다고 불평하지 마세요. 저는 32살에 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니 자식도 넷이나 나아서 자식 부자가 되었습니다. 우리 오믿음목자님 보세요. 믿음의 중심을 지키고 있으니 하나님께서 축복하셔서 믿음이 좋은 김열국목자님과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김열국목자님은 혼수를 준비할 아무 것도 없었지만 오직 믿음으로 순종했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채워주고 계시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을 아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지극히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시고 복을 주시고자 작정하시고 택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본심입니다. 이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아브람의 속 마음이 어떠했습니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 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 것이니이다." 아브람은 하나님께 협박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식을 안주시면 나도 다 생각이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어떤 양은 "목자님 그러시면 나 일대일 안할래요. 나 UBF 떠납니다."라고 자기 계획을 세웁니다. 신앙 생활을 10년 동안 했는데 주님께 드린 것이 무엇입니까? 생명을 바쳐서 주님을 섬겼는데도 손에 잡히는 것이 없다면 불평을 할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아브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요즈음 서울의 밤하늘을 보고 별을 세어보면 많아야 50개 정도가 보입니다. 아마 하나님께서 서울에있는 현대의 아브람에게 말씀하신다면 눈을 들어 자동차를 세어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팔레스틴 광야에 서 있는 아브람이 하늘에서 반짝거리고 있는 무수한 별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그 마음에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과 그 큰 위엄과 창조주로서 세상 만물을 다스리시는 것이 새삼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흙으로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자기 같이 늙은 몸에서도 자손을 낳게 하실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심령이 어려울 때 땅만 쳐다보지 말고 하늘을 바라보고 자연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물질문제로 염려하는 제자들에게 공중에 나는 까마귀를 보고 들에 핀 백합화를 보고 생각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이 연약해질 때 말씀으로 찾아오시고 뭇별을 세어봄으로 믿음을 갖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이에 대한 아브람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6절을 보십시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아브람은 아멘!으로 화답하였습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겠지만 특별히 하나님 자신을 믿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인격적인 신앙입니다. 신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고 하면서 살아 계신 하나님 자신을 믿지 못한다면 그것은 알맹이가 빠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이 하나님을 믿었을 때 이것을  그의 의로 여기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구원의 의가 되어 주셨습니다. 또한 그리스도는 우리의 의가 되셔서 그를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 속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에서 여긴다는 것은 그 무엇이 그렇지 못함에도 불구하고그렇다고 간주하여 주는 것입니다. 인간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예수 그리스도만 믿으면 하나님께서는 그를 의롭다고 간주하여 주십니다. 바울은 롬4:5절에서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라고 말하였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구원이시며 영생이십니다. 이로인해서 아브람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의롭게 하실 뿐만 아니라 땅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 땅은 애굽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이고 가나안 열 족속의 땅이었습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친히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시면서 약속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람으로 하여금 600년 뒤에 일어날 후손들의 장래까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의 내면을 넓혀 주셨습니다. 뭇별과 같은 자손들을 주실 것과 광대한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심으로 그가 현실 문제로 마음이 쪼그라들지 않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 때 당장 눈 앞에 보이는 것만 보지 말고 최소한도 60년 앞을 내다 보고 살아야 합니다. 또한 좁은 한국 땅만 바라보지 말고 세계를 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원대하신 뜻을 섬길 수 있습니다.

 이상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신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에게 지극히 큰 상급이 되신 주님을 바라보고 믿음의 경주를 끝까지 잘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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