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titled Document
주일말씀 성경별메시지 심포지엄 성경 검색
문제지 성경별문제지

다니엘 단5강(5장)하나님의 저울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섬김이
댓글 0건 조회 4,805회 작성일 03-02-03 14:49

본문

2001년 가을 다니엘서 제 5 강                                                                                   
말씀 / 다니엘서 5:1-31
요절 / 다니엘서 5:27

하나님의 저울
“데겔은 왕이 저울에 달려서 부족함이 뵈었다 함이요.”

우리는 가벼움을 추구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플라스틱의 발명과 이로 인한 자재들은 다 가볍습니다. 그리고 인스턴트 식품들은 가볍게 먹을 수 있는 음식입니다. 우리가 접하는 문화도 경량화, 경박화 되어 가고 있습니다. 인터넷 등으로 인해서 정보 유통이 빨라지다 보니 가볍게 읽을 거리들이 인기가 있습니다. 인간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유우머가 있고 부담없이 사귈 수 있는 교제를 선호합니다.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가벼워져야 한다는 부담을 느끼며 살고 있습니다. 저도 한때는 메시지를 가볍게 전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시대의 유행과는 달리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행동을 하나님의 저울에 달아 보십니다. 하나님께서 심판자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사람의 저울이 아니라 하나님의 저울에 기준을 맞추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에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가벼운 사람이 있고 어떤 폭풍에도 날라가지 않는 무거운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저울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Ⅰ. 가벼운 벨사살 왕(1-16)

벨사살 왕이 그 나라의 귀족들과 장성들 일천 명을 위하여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우리가 그 당시 상황을 생각해 볼 때 벨사살 왕이 왜 이런 잔치를 하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전쟁 상황이었습니다. 메대와 파사의 연합군이 바벨론과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장군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서 이런 피로연을 열게 된 것입니다. 벨사살 왕은 그 일천 명 앞에서 술을 마시는데 술이 어느 정도 취하자 가공할 만한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것은 그 부친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취하여 온 금, 은 그릇을 가져다가 왕과 귀인들과 왕후들과 빈궁들로 더불어 그것으로 술을 마시려 함이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 자신들이 신의 후예들인 양 허세를 부렸습니다. 그는 큰 소리를 쳤지만 껍데기였습니다. 그는 자기가 하나님보다 더 높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는 사단 같은 교만이었습니다. 시인 하이네는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서 해골로 술을 마셨다고 합니다. 벨사살 왕은 전쟁에 이기기 위해서 성전 제사에 쓰는 그릇으로 술을 마셨습니다. 그는 느부갓네살도 하지 않은 짓을 겁 없이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것도 부족하여 술을 마시고 나서 금, 은, 동, 철, 나무와 돌로 만든 자기 신들을 찬양하였습니다. 이는 위기 상황에서 우상들의 힘을 의지하고자 하는 몸부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교만한 태도는 멸망을 재촉할 뿐이었습니다.

이를 볼 때 바벨론이 멸망하게 된 것은 외적인 요인이 아니라  내적인 요인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벨론 성벽은 안쪽 방어벽은 두께가 6.4m, 바깥 성벽은 두께가 3.3m, 높이가 91m, 망대의 높이가 128m였습니다. 그리고 성벽에서 바깥 쪽으로 1.8m되는 거리에 유프라테스 강에서 물을 끌어 들여 흐르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요새마다 많은 곡물을 저장하여 20년은 버틸 수 있었다고 합니다. 바벨론의 외적인 모습은 매우 강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내면은 썩어 있었습니다. 당시 왕후들과 빈궁들은 남자들의 잔칫자리에 참석하지 않는 법이었습니다(에1:9). 그런데 이들이 함께 있었다는 것은 이날 행사 양식이 매우 음란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들의 도덕적 타락과 참람한 행동은 하나님의 분노를 격발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사람이 술을 먹으면 입이 가벼워 입니다. 그래서 하지 말아야 할 말들을 내뱉습니다. 자기 기준에 맞추어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신자들을 욕합니다. 우리 나라는 술 소비량이 세계 1위 입니다. 특히 여대생들의 술 소비량이 남자보다 높습니다. 이것은 망조입니다. 여자들은 남자에 비해서 술에 3배나 빨리 취할 수 있는 신체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술에 취하여 엄청난 실수를 저지른 사람들을 수없이 보아왔습니다. 성경에서는 그 한 예가 헤롯 왕입니다. 그는 연회 중에 취하였을 때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가 춤추는 것을 보았습니다. 음탕한 마음에 사로잡힌 그는 그녀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주겠다고 말해 버렸습니다. 세례 요한에게 원한이 사무쳐 있던 헤로디아의 사주를 받고 그 딸은 그에게 요한의 머리를 달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헤롯 왕은 무죄한 피를 흘리는 무서운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막6:27). 또 한 가지는 노아의 경우입니다. 그는 당대에 의인으로 인정받았습니다. 그러나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취한 후 장막 안에서 벌거벗고 누워있게 되었습니다. 이때 그의 막둥이 함이 아비의 하체를 범하였습니다. 술취함은 의인조차도 큰 고통에 빠뜨리는 요인이 됩니다. 술은 사람을 기만에 빠뜨립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술을 마십니다. 시간이 지나면 술이 술을 마시게 하고 나중에는 술이 사람을 마셔 버립니다. 결국 술취한 사람은 마귀 새끼같이 되어 버립니다. 술은 사람을 가볍게 만들어 여러 가지 무서운 죄에 빠뜨립니다.

벨사살 왕이 우상을 찬양하기를 마치자마자 손에 잡고 있던 금 잔을 바닥에 “쨍그랑” 떨어뜨리고 말았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 때에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서 왕궁 촛대 맞은편 하얀 벽에 글자를 쓰는데 왕이 그 글자 쓰는 손가락을 보았습니다(5).” 이 광경을 본 왕은 즐기던 빛이 변하여 얼굴이 파랗게 질려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생각이 복잡해졌습니다. 그는 직감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임을 느꼈습니다. 그의 넓적다리 마디가 녹는 듯하고 그 무릎이 서로 부딪혔습니다. 그는 똑바로 서 있기도 어려웠습니다. 그는 오줌도 쌌을 것입니다. 또한 함께 있던 사람들도 공황 상태에 빠졌습니다. 어떤 빈궁들은 비명을 질렀습니다. 왕은 크게 소리를 하여 갈대아의 술객과 박사들과 점장이들을 불러오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무론 누구든지 이 글자를 읽고 그 해석을 내게 보이면 자주옷을 입히고 금사슬로 그 목에 드리우고 그로 나라의 셋째 치리자를 삼으리라(7)”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 글자를 읽지 못하며 그 해석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벨사살 왕이 크게 번민하여 그 낯빛이 변하였고 귀인들도 다 놀랐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세상의 박사들이 해석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세상 지식의 한계였습니다.

그런데 태후가 왕과 그 귀인들의 말로 인하여 잔치하는 궁에 들어왔습니다. 그녀는 사색으로 떨고 있는 왕의 모습이 멍청이 같이 보였습니다. 왕은 불안으로 고통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태후가 말했습니다. “왕이여 오래 사십시오. 그리고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태후는 느부갓네살의 아내로서 역사의 흐름을 잘 아는 나이든 여인이었습니다. 그녀가 잔치 자리에 마음대로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을 볼 때 매우 높은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녀는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는 왕에게 해결 방향을 제시했습니다. 이를 볼 때 우리는 원로들을 존경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원로들은 세상 경험이 있고 산전 수전을 다 겪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한 분야에서 문제를 관통하는 혜안을 가지고 있습니다. 중국 지도자 모택동은 고대 왕조들의 역사를 많이 읽고 중국을 통치했다고 합니다. 등소평도 어려운 일이 생기면 중국의 원로들을 찾아가서 세 번 절하고 그들의 자문을 구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 여론 조사에 의하면 한국의 청소년들은 아시아의 청소년들 중에서 어른을 존경하는 마음이 꼴찌라고 보고하였습니다. 이는 권위를 부정하는 우리의 모습을 잘 대변하고 있습니다. 대통령이 두 명씩이나 감옥에 가면서 나라는 권위에 대한 존경심을 잃어버렸습니다. 우리 나라는 원로들이 대접 받지 못하는 사회입니다. 물론 그들은 젊은이들에 비해서 정보 통신 시대에 컴퓨터를 잘 다루지 못하고 정보에 밝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인생 경험으로부터 축적된 지혜가 있습니다. 우리가 선배를 무시하면 자기도 후배들에게 무시를 받습니다. 우리는 윗사람에 대한 존경심을 유지해야 하겠습니다. 선배에 대한 존경심이 없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가벼운 사람입니다.

태후는 놀란 왕에게 다니엘을 소개했습니다. “왕의 나라에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 있는데 그는 왕의 부친 때에도 섬기던 사람입니다. 그는 명철과 총명과 지혜가 있어 신들의 지혜와 같은 자이온데 느부갓네살 왕이 그를 세워 박사들의 어른을 삼으셨으니 왕이 벨드사살이라 이름한 이 다니엘입니다. 그는  마음이 민첩하고 지식과 총명이 있어 능히 꿈을 해석하고 은밀한 말을 밝히며 의문을 파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다니엘을 부르시오 그리하시면 그가 그 해석을 알려 드리리이다(11,12).” 태후의 해석에 의하면 바벨론의 박사들은 물 박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잔치에 초대받지 못한 사람이었고 야인으로 돌아갔었지만 아직도 명철과 총명이 있었습니다. 이때 다니엘의 나이가 80은 되었을 것입니다. 이 나이가 되면 영력을 상실하기 쉽습니다. 노인정이나 가서 장기나  두면서 시간을 소일하기 쉬웠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하나님 앞에 살면서 기도에 힘쓰고 항상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 시대가 필요로 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위기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다니엘과 같이 하나님의 영이 있고 지혜가 충만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대학생들을 기르는데 기술자로서 사회에 이바지 하는 사람이 아니라 영적인 사람으로 길러야 합니다. 이 시대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미국에 발생한 테러로 인해서 우리 나라 사람들도 인생에 대해서 더욱 많은 의문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삶과 죽음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진리를 가르쳐야 합니다. 또한 사회의 현상들을 해석하고 방향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니엘이 부름을 입어 왕 앞에 나아오매 왕은 그가 부왕 때에 사로잡혀 온 전쟁 포로임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왕은 두려워 떨고 있지만 무게를 잡고 말했습니다.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즉 네 안에는 신들의 영이 있으므로 네가 명철과 총명과 비상한 지혜가 있다 하도다 지금 여러 박사와 술객을 내 앞에 불러다가 그들로 이 글을 읽고 그 해석을 내게 알게 하라 하였으나 그들이 다 능히 그 해석을 내게 보이지 못하였느니라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즉 너는 해석을 잘하고 의문을 파한다 하도다 그런즉 이제 네가 이 글을 읽고 그 해석을 내게 알게 하면 네게 자주옷을 입히고 금사슬을 네 목에 드리우고 너로 나라의 셋째 치리자를 삼으리라(14-16).” 벨사살 왕은 교만을 부리다가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자 하나님의 사람 다니엘을 찾고 있습니다. 그가 다니엘을 찾았지만 이제 돌이키기에는 때가 너무 늦었습니다.

Ⅱ. 바람에 날려가는 벨사살 왕(17-31)

다니엘은 왕에게 상급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혔습니다. “왕의 예물은 왕이 스스로 취하시며 왕의 상급은 다른 사람에게 주옵소서 그럴지라도 내가 왕을 위하여 이 글을 읽으며 그 해석을 아시게 하리이다.” 벨사살 왕은 그 글을 읽고 해석해 주면 다니엘에게 많은 선물과 높은 지위를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왕으로부터 어떤 예물이나 상급도 받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다니엘은 하나님을 대적한 벨사살 왕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은 죄인에게 받는 선물은 욕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망할 나라의 셋째 치리자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다니엘은 벨사살과 같이 비열한 인간에게서 어떤 호의를 받는다는 것이 부끄러웠습니다. 이번에 사우디 왕자가 뉴욕에 기탁한 1천만달러(약 1백30억원)의 테러 복구 지원 성금을 루돌프 줄리아니 뉴욕 시장이 거부했습니다. 줄리아니 시장은 이날 알 왈리드 왕자측이 성금을 건네면서 "미국의 잘못된 중동정책이 테러 사건의 한 원인"이라는 내용의 보도 자료를 뿌린 것에 분개하여 성금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밝혔습니다. 줄리아니 시장은 "5천~6천명의 무고한 생명을 앗아간 테러는 어떤 식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며 "알 왈리드 왕자가 주고 간 수표를 현금으로 바꿔 사용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와 같이 다니엘은 하나님과 그 백성을 사랑했기 때문에 벨사살로부터 어떤 예물도 받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다니엘은 영적가치관이 분명했습니다. 다니엘은 영적가치관이 분명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소망하던 왕의 예물과 상급조차도 받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그 글의 해석을 왕에게 알려주고자 했습니다. 이를 통해서 왕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알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한 것입니다. 또한 우상을 찬양한 일천명의 귀인들에게도 하나님의 심판을 알리고 그를 경외하도록 돕고자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은사를 사용하는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맡겨진 사명에 충성할 때 무게가 나가는 인물이 됩니다. 요즈음은 제사보다 젯밥에 더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상급과 인정에 연연하지 않고 하나님의 메시지를 담대하게 선포해야 하겠습니다.

다니엘은 벨사살 왕에게 말했습니다. 18-21절을 보십시오. “왕이여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왕의 부친 느부갓네살에게 나라와 큰 권세와 영광과 위엄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백성들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들이 그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는 임의로 죽이며 임의로 살리며 임의로 높이며 임의로 낮추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마음이 높아지며 뜻이 강퍅하여 교만을 행하므로 그 왕위가 폐한 바 되며 그 영광을 빼앗겼습니다. 그는 쫓겨나서 그 마음이 들짐승의 마음과 같았고 또 들나귀와 함께 거하며 또 소처럼 풀을 먹으며 그 몸이 하늘 이슬에 젖었습니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우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다니엘은 글자를 해석하기 전에 먼저 선왕 느부갓네살이 교만하여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던 역사적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벨사살이 하나님이 주시는 교훈를 받게 하고자 함이었습니다. 벨사살은 너무나 교만하여 역사로부터 아무 것도 배우지 못했습니다. 실상 그가 역사적 사실을 몰랐던 것이 아닙니다. 그는 역사적인 사실에 대한 깊은 고찰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벨사살 왕의 배우지 않는 마음을 꾸짖었습니다. 22,23절을 보십시오. “벨사살이여 왕은 그의 아들이 되어서 이것을 다 알고도 오히려 마음을 낮추지 아니하였습니다. 도리어 스스로 높여서 하늘의 주재를 거역하고 그 전 그릇을 왕의 앞으로 가져다가 왕과 귀인들과 왕후들과 빈궁들이 다 그것으로 술을 마셨습니다. 또  왕이 보지도 듣지도 알지도 못하는 금, 은, 동, 철과 나무와 돌로 만든 신상들을 찬양하였습니다. 반대로 왕의 호흡을 주장하시고 왕의 모든 길을 작정하시는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였습니다.” 왕이 역사로부터 아무 것도 배우지 않았을 때 그는 부왕의 전철을 밟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람이 배우는 마음이 없을 때 무지하게 됩니다. 역사로부터 배우지 않으면 실패를 반복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역사인식이 없는 국가나 개인은 파멸을 자초하게 되어 있습니다. 역사를 왜곡하는 일본 백성들이 불쌍한 것은 그들이 조상들의 굴욕적인 전철을 밟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역사로부터 배우지 않으면 한일 합방 때의 비참한 꼴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100년전 상황을 꼽씹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특별히 성경의 기록들이 우리의 경계로 기록된 것임을 기억하고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워야 하겠습니다(고전10:11). 성경은 우리의 거울이 되고 말세를 당한 우리에게 경계로 주신 것입니다. 사사기라든가, 열왕기서를 보면 역사로부터 배우지 못하고 멸망해가는 모습을 생생하게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정말 배워야 할 것은 안배우고 배우지 말아야 할 것들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잘 배웁니다. 즉 겸손은 잘 배우지 않으면서 교만은 잘 배웁니다. 선한 행실은 잘 배우지 않으면서 악한 행동은 잘 배웁니다. 우리는 역사로부터 배우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반드시 배운 것을 적용해야 합니다. 우리는 매주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소감을 쓰면서 회개할 것은 회개하고 새로운 방향을 잡습니다. 이렇게 자기를 돌아보는 것은 참으로 뼈아픈 작업임에 틀림없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목자님들과 말씀을 공부하고 소감을 나누는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을 배웁니다. 또 동역자의 조심스러운 충고를 듣고 자기 발견을 많이 합니다. 제가 동역자들과 성령의 도우심을 덧입어서 마음과 생각이 민첩해지고, 완악한 이 시대에 하나님의 역사를 힘차게 섬기기를 기도합니다. 

다니엘은 그 글자를 어떻게 읽고 해석했습니까? “기록한 글자는 이것이니 곧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입니다. 그 뜻을 해석하건대 메네는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 함이요, 데겔은 왕이 저울에 달려서 부족함이 뵈었다 함이요, 베레스는 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와 바사 사람에게 준 바 되었다 함이니이다(25-28).” 하나님은 인생의 무게를 달아보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지식의 하나님으로서 사람의 행동을 달아보십니다(삼상2:3). 하나님의 저울은 공평합니다. 하나님의 저울은 우리의 인격을 달아 봅니다. 시편 1편을 볼 때 악인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가볍습니다. 교만한 자, 오만한 자, 자기를 높이는 사람들은 껍데기 입니다. 분별력이 없이 말이 많은 사람도 떠도는 먼지 같이 가볍습니다. 말을 바꾸는 사람, 변덕이 심한 사람들은 깃털처럼 가볍습니다. 허세를 부리는 사람도 역시 가볍습니다. 유행에 따라서 사는 사람은 낙엽처럼 가볍습니다. 이기적인 사람,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도 가볍습니다. 게으른 사람은 몸무게가 많이 나갈지라도 가벼운 사람입니다. 누가 서운한 말 한 마디라도 하면 견디지 못하고 분을 터뜨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물질 앞에 무릎을 꿇는 사람, 작은 어려움이나 슬픔을 참지 못하고 마는 가벼운 사람들도 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저울에 달아 보았을 때 무게가 나가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아르헨티나 코르도바주에 거주하는 카를로스 미겔 트라이코(32)는 몸무게가 400㎏ 이상 나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엄청난 체중 때문에 지난 수년간 침대에 앉거나 누운채 부모의 보살핌을 받으며 지내오다 결국 사망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체중은 헤비급이지만 하나님의 저울에 달아보면 모스키토급에 해당됩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진정 마음의 무게가 나가는 사람일까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앞에서 정직히 행하는 사람입니다. 고난을 받은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무게가 나갑니다. 그들은 순수하고 연단된 인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진심과 겸손,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무게가 나갑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두려워 떨고 순종하는 사람들은 심판의 바람 앞에 날려가지 않습니다. 목에 힘을 준다고 무게가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벌고 권세가 있고 학식이 많으면 은근히 무게를 잡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것을 우습게 여기십니다. 우리가 죄를 회개하는 마음을 갖고 마음을 비울 때 도리어 무게가 나갑니다. 우리는 세상 것들을 비우고 하나님의 것들로 마음을 채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것은 가난한 자들을 불쌍히 여겨 나누어 주는 것이요 잃어버린 영혼들을 찾기 위해서 자기의 가진 것들을 희생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임이 인간 중심적인 교육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의 역사 교육을 시킬 때 각 사람이 무게가 나갈 줄 믿습니다. 

 다니엘의 해석을 듣고 벨사살 왕은 다니엘에게 자주색 옷을 입히게 하며 금사슬로 그의 목에 드리우게 하고 나라의 셋째 치리자를 삼았습니다. 그러나 그 날 밤에 벨사살은 죽음을 당하였고 메대 사람 다리오가 나라를 얻었습니다. 역사에 의하면 고레스는 오랫동안 바벨론을 공격하기 위하여 준비했으며 결국 유브라데 강물을 돌려서 그의 군사들이 범람하는 강물을 건널 수 있었다고 합니다. 바벨론 성은 연회가 진행되고 있었을 때 함락되었습니다. 그리고 고브리아스 장군이 왕궁에 침입하여 왕을 죽였습니다. 그의 부왕 나보니더스는 고레스에게 패하여 항복하고 유랑 생활을 하다가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신속히 이루어졌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세상 역사를 주관하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아무도 그를 대적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에 바람에 나는 겨 같이 날려가지 않기 위해서 속을 채워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지 말고 도리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말씀과 동역자들과 사건 속에서 끊임없이 배우고 성장함으로 무게가 나가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Total 1,323건 85 페이지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