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요12강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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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요한복음 제 12 강
말씀 / 요한복음 7:1-53
요절 / 요한복음 7:38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우리는 지난 주에 세계 선교 보고 대회를 통해서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의 소망을 새롭게 덧입고 앞으로 40년 내에 10만명의 선교사를 233개국에 파송하고자 하는 기도 제목을 잡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선교사님들과 현지인 목자님들과 교제를 하면서 선교 현장의 스피릿을 덧입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월드컵에서 첫 승이라는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여러 모양으로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치는 은혜가 있었습니다. 이런 가운데서도 어떤 사람에게는 영혼의 목마름이 있습니다. 영혼의 목마름은 예수님 이외에는 만족시켜 줄 수 없습니다. 영혼의 목마름은 죄문제에서 비롯된 것이고 죄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은 예수님 외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이 예수님을 믿고 바른 관계를 맺음으로 계속해서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과 캠퍼스의 목마름을 해갈시켜주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I. 세상 명예에 목마른 형제들(1-36)
7장은 5장 사건의 연속입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셨습니다. 이는 안식일에 38년된 병자를 고친 사건으로 유대인들이 죽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거하실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의 악함을 지적하고 회개하도록 하자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추상적인 이야기만 하면 별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사람들의 악함을 지적하면 고난을 각오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데도 유대로 갈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 형제들이 “형님, 형님의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라고 권했습니다. 이는 그 형제들이 생각할 때 예수님의 행동이 답답하게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말씀 한마디로 38년된 병자를 고치고 오병이어로 오 천명을 먹이는 사건을 보면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러한 능력을 행하심으로 유명인사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도 형님 덕분에 세상에서 출세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능력을 과시하면 대권을 잡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사람이 큰 일을 하려면 큰 물에서 놀아야 하고 유명 인사들과 인맥도 쌓고 기회를 잘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세상 명예에 목이 말라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형제들은 세속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형제들이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예수님에게서 듣고 보고 잘 배울 수 있는 특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에 영적인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이 없었고 예수님을 인간적으로 판단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맏형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아직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명절에 올라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때는 늘 준비되어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지 못하지만 예수님을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시면서 갈릴리에 머물러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비겁하다고 비난 받는 것에 개의치 않으시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때를 찾았습니다. 예수님은 형제들이 명절에 올라간 후에 자기도 올라가시되 나타내지 않고 비밀히 하셨습니다. 그리고 명절의 중간이 되어 성전에 올라가서 가르치셨습니다. 명절 중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어디에 있는지 찾았습니다. 무리들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드러내 놓고 그들의 믿음을 이야기 하지 않았습니다. 종교 경찰들의 삼엄한 감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들의 관심이 그에게서 멀어졌을 때 기습적으로 나타나서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중앙 돌파를 하셨고 시간차 공격을 하셨습니다. 이를 통해서 유대인들의 위협을 피하면서 복음을 전하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지혜로우시면서도 대담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형제들의 세계와 예수님의 세계가 전혀 다름을 보게 됩니다. 행동하는 동기도 다르고, 삶의 목적도 다르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도 다릅니다. 형제들은 예루살렘에 올라갈 때 초막절을 즐기고 세상에서 출세할 수 있는 기회를 잡기 위해 올라갔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올라가셨습니다. 형제들은 세상에서 출세하여 이름을 날리는 것이 삶의 목적이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을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형제들은 자기를 기쁘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형제들은 세상의 인정을 구하였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인정을 구하셨습니다. 형제들은 세상을 좋게 보고 세상과 짝하여 살았지만, 예수님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하심으로 세상을 거슬러 사셨습니다. 형제들은 세상의 때와 사람들의 동향에 민감하였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때와 하나님의 동향에 민감하셨습니다. 형제들이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그들에게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후에 형제들이 믿음을 갖게 되었을 때 영적인 눈을 뜨고 가치관이 완전히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형제 중에서 야고보는 그의 서신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약 2:1)”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약 4:4b)” 이와 같이 믿음을 가진 자와 믿음이 없는 자는 전혀 딴 세계에서 살아갑니다. 믿음이 없는 자는 세상에서 출세하기 위해 몸부림칩니다. 세상의 여론에 민감합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에 따라 움직입니다. 이들은 세상의 흐름을 읽고 세상의 흐름을 좇아가기에 힘씁니다. 결국 그들은 세상을 사랑하여 세상과 짝하여 살아갑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자는 세상이 얼마나 거짓되고 죄악되고 그 결과가 얼마나 허무한지 잘 알기 때문에 세상의 인정과 칭찬을 구하지 않습니다. 세상과 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의 죄악과 싸우며 살아있는 물고기와 같이 세상을 거슬러 올라가기에 힘씁니다. 믿음이 있는 자는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세상의 죄악과 싸웁니다. 믿음이 있는 자는 사람을 기쁘게 하기 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애를 쓰기 때문에 때로는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받기도 하고 핍박과 미움을 받습니다. 믿음이 있는 자는 세상 일은 아무리 해도 헛되지만, 하나님의 일은 결코 헛되지 않은 줄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행하기에 힘씁니다.
사도 요한은 세상 영광을 구하는 마음 때문에 늘 마음이 시끄러웠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와의 경쟁심 때문에 뼈가 썩는 고통을 맛보았습니다. 어느 날은 형 야고보와 연합전선을 펴서 예수님께 영광 중에 영의정과 좌의정 자리를 구하다가 동료들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그가 믿음을 갖고 영적 눈을 뜨게 되었을 때 세상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요일 2:15-17)” 우리 믿는 자들은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고, 세상 가치관을 좇아 살지 아니합니다. 세상의 본질을 알고 세상에 대해 분명한 자세를 갖고 세상의 죄악과 싸웁니다. 그리고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써 세상을 정화하기에 힘씁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세상에 대해 분명한 자세를 갖도록 도와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명절 중간이 되어 예수님은 성전에 올라가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그의 가르침이 매우 권세가 있었고 해석이 뛰어 났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다 기이히 여겼습니다.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그들은 예수님께서 정규 신학교도 나오지 않았고 박사학위도 없는데 어떻게 그렇게 말씀을 명쾌하고 권세있게 전하시는지 알고 놀랐습니다. 예수님은 놀라는 그들에게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16,17).”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진리로서 순금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금반지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려면 감정을 해 봐야 알 수 있듯이, 예수님의 말씀이 진리인지 아닌지를 알려면 순종을 해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인간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임을 알 수 있는 비결도 말씀을 실제 생활에서 실천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무디는 “순종이 하나님의 뜻을 배우는 가장 좋은 학교”라고 하였습니다.
또 어떤 사람이 참된 사람인가 아닌가를 분별하는 기준이 무엇일까요? 18절을 보십시오.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 자기 영광을 구하는 자는 자기 말을 합니다. 모든 것을 자기를 중심으로 해서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자기에서 시작해서 자기로 끝납니다. 이런 자는 아무리 자신이 참된 자인 것처럼 꾸며도 근본적으로 거짓됩니다. 죄는 자아 중심성이기 때문에 자기 중심적인 것은 근본적으로 죄악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하나님으로 시작해서 하나님으로 끝납니다. 일하는 동기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합니다. 1대1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고, 공부를 하거나 직장을 다니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합니다. 청소를 할 때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고, 먹고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합니다(고전 10:31).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는 자는 근본적으로 참되며 불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자기 생각, 자기 주장, 자기 계획, 자기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참되다는 말은 ‘a man of truth’ 진리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진리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는 자기가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자신을 온전히 비우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빌 2:6-8).
예수님은 그들이 모세가 준 할례 법을 어기지 않기 위해서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주는 반면에 자신이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케 한 것으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것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된 원인은 외모로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안식일을 지키라는 계명을 맹목적으로 지켰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38년된 병자를 고친 것을 보고 즉시 모세의 법을 어긴 죄인이라고 정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안식일 법의 정신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들은 스피릿을 잃어버리고 율법적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24). 공의의 판단이란 올바른 판단입니다. 그들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었던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 그 속에 불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올바른 판단을 하려면 순수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구해야 합니다.
II. 생수의 강 되신 성령님(37-53)
이제 초막절의 끝날이 이르렀습니다. 이 날은 명절 중의 절정으로서 큰 날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날에는 제단 주위를 일곱 번 돌며 호산나를 불렀습니다. 절기가 계속되는 7일 동안은 매일 아침 제사장이 금으로 만든 주전자를 들고 실로암 못에 가서 물을 길어 부었습니다. 이때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고 백성들은 이사야 12:3절을 노래했습니다.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이러한 의식은 조상들이 광야에서 목말라 울부짖고 있을 때 반석에서 나온 샘물로 목마름 문제를 해결한 것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비유적으로 하면 반석은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샘물은 성령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이렇게 함으로써 메마른 땅에 물을 공급하사 추수하게 하신 하나님에게 감사하고, 다음 추수 때에도 풍성한 비를 주시도록 간구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때 서서 상한 심정으로 크게 외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37b,38)”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진리를 배웁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인생의 목마름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명절 끝 날에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초청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명절 끝 날은 장막을 거두고 집으로 돌아가는 날입니다. 사람들은 축제를 즐기는 중에는 공허함을 느끼지 못하지만, 축제가 끝나면 공허함을 느낍니다. 그래서 채워지지 않은 빈 가슴을 안고 방황하다가 죄를 짓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의 채워지지 않는 영혼의 갈증을 보시고 그들을 초청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광야와 같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목마른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겉으로 볼 때 만족한 인생을 사는 것 같이 보이지만 조금만 그 내면을 파고 들어가 보면 목마른 인생 문제로 고통하며 신음합니다. 사람에게는 여러 종류의 목마름이 있습니다. 사랑에 대한 목마름이 가장 심합니다. 또한 인정에 대한 목마름, 돈에 대한 목마름이 있습니다. 돈에 대한 목마름 때문에 그 돈을 받으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거액의 돈을 받아 쇠고랑을 찹니다. 목마름 문제는 반드시 해결되어야 합니다.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는가가 문제입니다. 건강을 유지하려면 물을 많이 마셔야 합니다. 하루에 적어도 8잔 이상을 마셔야 된다고 합니다. 그것도 미네랄과 같은 영양분이 풍부한 생수를 마셔야 한다고 하면서 정수기를 선전합니다. 우리가 육신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 생수를 마셔야 되는 것과 같이, 영혼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생수를 마셔야 합니다. 생수에는 미네랄과 같은 영양분이 풍부한 것과 같이, 성령의 생수에는 온갖 영양분이 풍성하게 들어 있습니다. 사람은 2%가 부족하면 갈증을 느끼고 생수를 찾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영혼이 2%가 부족할 때 성령의 생수를 무한정 공급해 주시는 예수님을 찾아야 합니다. 생수를 마시려면 돈이 필요하지만, 성령의 생수는 믿는 자에게 거저 주십니다. 까다로운 율법을 지킬 필요도 없이 회개하고 믿기만 하면 아무 값없이 거저 주십니다. 인생의 목마름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 주시는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믿는 자에게 생수의 강이 흘러나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날 것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그 배에서’란 ‘within him’, 즉, ‘심령 깊이에서’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진실되게 죄를 고백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할 때 죄사함을 얻게 되고 성령을 선물로 받습니다(행 2:38). 그때 내면 깊이에서 하늘 나라의 기쁨이 솟아나게 됩니다. 그리고 죄의식과 정죄와 심판의 두려움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자유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요 20:22,23). 뿐만 아니라 죄의 열매만을 맺을 수밖에 없는 데서 사랑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와 같은 성령의 열매를 맺고 우리의 인격이 변화됩니다(갈 5:22,23). 더 나아가 현실 문제에 얽매이지 않고 비전에 불타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행 2:17).
예수님은 성령이 생수의 강 같이 흘러나리라고 하였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특정한 사람에게 성령을 제한적으로 주셨습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 와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부활로 복음을 완성하신 후에 모든 믿는 자에게 성령을 부어 주십니다. 그것도 겨우 목만 축일 정도로 조금 부어 주시는 것이 아니라 강 같이 풍성하게 부어 주십니다. 죄 사함의 은혜만 하더라도 과거에는 죄를 지을 때마다 짐승의 피를 흘려 번거롭게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이후 성령이 임하게 되었을 때 언제, 어디서든지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고, 또 죄 사함의 은혜도 풍성히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히 4:16; 10:19,20). 죄 사함의 은혜뿐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도 풍성히 누리고, 평화도 풍성히 누리고, 기쁨과 자유도 풍성히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기심과 탐욕으로 인해 사랑이 메마르고 은혜가 메마르고 기쁨이 메마른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할 때 메마른 세상에서 풍성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또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고 하신 것은 나만 은혜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서 내 가정과 캠퍼스와 온 세계에까지 흘러 넘치게 된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인정과 명예심과 권세에 목말라 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틈만 나면 “누가 크냐” 하며 도토리 키재기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그들에게 임했을 때 그들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생수의 강이 온 세상에 흘러 넘치게 되었습니다. 고 이사무엘 선교사님은 난지 8달만에 어머니를 여의고 어머니의 사랑에 목말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받게 되자 하나님의 사랑이 생수의 강이 되어 전 세계 수많은 지성인들의 심령에 흘러 넘치게 되었습니다.
세상에는 예수님을 믿는 데도 여전히 목마른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사랑에 목말라 하고 인정에 목말라 합니다. 인간의 인정과 박수갈채가 허무한 줄 잘 알면서도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에 얽매여 살아갑니다. 이런 자들은 사랑을 받고 인정을 받으면 신이 나서 일하지만, 사랑과 인정을 받지 못하면 힘들어합니다. 목자님으로부터 그렇게 많은 사랑을 받고도 만족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사랑 깡통을 차고 사랑을 구걸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사랑은 결코 우리를 만족시켜 주지 못합니다. 이 문제는 예수님에게 나아갈 때만이 해결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만이 해결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목마름 문제로 고통하고 있는 인생들을 간절히 초청하십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 생수의 강이 나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해서 가정과 캠퍼스와 전 세계에 흘러 넘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요한복음 7:1-53
요절 / 요한복음 7:38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우리는 지난 주에 세계 선교 보고 대회를 통해서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의 소망을 새롭게 덧입고 앞으로 40년 내에 10만명의 선교사를 233개국에 파송하고자 하는 기도 제목을 잡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선교사님들과 현지인 목자님들과 교제를 하면서 선교 현장의 스피릿을 덧입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월드컵에서 첫 승이라는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여러 모양으로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치는 은혜가 있었습니다. 이런 가운데서도 어떤 사람에게는 영혼의 목마름이 있습니다. 영혼의 목마름은 예수님 이외에는 만족시켜 줄 수 없습니다. 영혼의 목마름은 죄문제에서 비롯된 것이고 죄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은 예수님 외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이 예수님을 믿고 바른 관계를 맺음으로 계속해서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과 캠퍼스의 목마름을 해갈시켜주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I. 세상 명예에 목마른 형제들(1-36)
7장은 5장 사건의 연속입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셨습니다. 이는 안식일에 38년된 병자를 고친 사건으로 유대인들이 죽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거하실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의 악함을 지적하고 회개하도록 하자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추상적인 이야기만 하면 별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사람들의 악함을 지적하면 고난을 각오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데도 유대로 갈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 형제들이 “형님, 형님의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라고 권했습니다. 이는 그 형제들이 생각할 때 예수님의 행동이 답답하게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말씀 한마디로 38년된 병자를 고치고 오병이어로 오 천명을 먹이는 사건을 보면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러한 능력을 행하심으로 유명인사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도 형님 덕분에 세상에서 출세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능력을 과시하면 대권을 잡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사람이 큰 일을 하려면 큰 물에서 놀아야 하고 유명 인사들과 인맥도 쌓고 기회를 잘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세상 명예에 목이 말라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형제들은 세속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형제들이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예수님에게서 듣고 보고 잘 배울 수 있는 특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에 영적인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이 없었고 예수님을 인간적으로 판단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맏형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아직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명절에 올라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때는 늘 준비되어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지 못하지만 예수님을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시면서 갈릴리에 머물러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비겁하다고 비난 받는 것에 개의치 않으시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때를 찾았습니다. 예수님은 형제들이 명절에 올라간 후에 자기도 올라가시되 나타내지 않고 비밀히 하셨습니다. 그리고 명절의 중간이 되어 성전에 올라가서 가르치셨습니다. 명절 중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어디에 있는지 찾았습니다. 무리들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드러내 놓고 그들의 믿음을 이야기 하지 않았습니다. 종교 경찰들의 삼엄한 감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들의 관심이 그에게서 멀어졌을 때 기습적으로 나타나서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중앙 돌파를 하셨고 시간차 공격을 하셨습니다. 이를 통해서 유대인들의 위협을 피하면서 복음을 전하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지혜로우시면서도 대담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형제들의 세계와 예수님의 세계가 전혀 다름을 보게 됩니다. 행동하는 동기도 다르고, 삶의 목적도 다르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도 다릅니다. 형제들은 예루살렘에 올라갈 때 초막절을 즐기고 세상에서 출세할 수 있는 기회를 잡기 위해 올라갔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올라가셨습니다. 형제들은 세상에서 출세하여 이름을 날리는 것이 삶의 목적이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을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형제들은 자기를 기쁘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형제들은 세상의 인정을 구하였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인정을 구하셨습니다. 형제들은 세상을 좋게 보고 세상과 짝하여 살았지만, 예수님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하심으로 세상을 거슬러 사셨습니다. 형제들은 세상의 때와 사람들의 동향에 민감하였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때와 하나님의 동향에 민감하셨습니다. 형제들이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그들에게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후에 형제들이 믿음을 갖게 되었을 때 영적인 눈을 뜨고 가치관이 완전히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형제 중에서 야고보는 그의 서신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약 2:1)”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약 4:4b)” 이와 같이 믿음을 가진 자와 믿음이 없는 자는 전혀 딴 세계에서 살아갑니다. 믿음이 없는 자는 세상에서 출세하기 위해 몸부림칩니다. 세상의 여론에 민감합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에 따라 움직입니다. 이들은 세상의 흐름을 읽고 세상의 흐름을 좇아가기에 힘씁니다. 결국 그들은 세상을 사랑하여 세상과 짝하여 살아갑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자는 세상이 얼마나 거짓되고 죄악되고 그 결과가 얼마나 허무한지 잘 알기 때문에 세상의 인정과 칭찬을 구하지 않습니다. 세상과 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의 죄악과 싸우며 살아있는 물고기와 같이 세상을 거슬러 올라가기에 힘씁니다. 믿음이 있는 자는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세상의 죄악과 싸웁니다. 믿음이 있는 자는 사람을 기쁘게 하기 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애를 쓰기 때문에 때로는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받기도 하고 핍박과 미움을 받습니다. 믿음이 있는 자는 세상 일은 아무리 해도 헛되지만, 하나님의 일은 결코 헛되지 않은 줄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행하기에 힘씁니다.
사도 요한은 세상 영광을 구하는 마음 때문에 늘 마음이 시끄러웠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와의 경쟁심 때문에 뼈가 썩는 고통을 맛보았습니다. 어느 날은 형 야고보와 연합전선을 펴서 예수님께 영광 중에 영의정과 좌의정 자리를 구하다가 동료들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그가 믿음을 갖고 영적 눈을 뜨게 되었을 때 세상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요일 2:15-17)” 우리 믿는 자들은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고, 세상 가치관을 좇아 살지 아니합니다. 세상의 본질을 알고 세상에 대해 분명한 자세를 갖고 세상의 죄악과 싸웁니다. 그리고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써 세상을 정화하기에 힘씁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세상에 대해 분명한 자세를 갖도록 도와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명절 중간이 되어 예수님은 성전에 올라가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그의 가르침이 매우 권세가 있었고 해석이 뛰어 났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다 기이히 여겼습니다.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그들은 예수님께서 정규 신학교도 나오지 않았고 박사학위도 없는데 어떻게 그렇게 말씀을 명쾌하고 권세있게 전하시는지 알고 놀랐습니다. 예수님은 놀라는 그들에게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16,17).”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진리로서 순금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금반지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려면 감정을 해 봐야 알 수 있듯이, 예수님의 말씀이 진리인지 아닌지를 알려면 순종을 해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인간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임을 알 수 있는 비결도 말씀을 실제 생활에서 실천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무디는 “순종이 하나님의 뜻을 배우는 가장 좋은 학교”라고 하였습니다.
또 어떤 사람이 참된 사람인가 아닌가를 분별하는 기준이 무엇일까요? 18절을 보십시오.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 자기 영광을 구하는 자는 자기 말을 합니다. 모든 것을 자기를 중심으로 해서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자기에서 시작해서 자기로 끝납니다. 이런 자는 아무리 자신이 참된 자인 것처럼 꾸며도 근본적으로 거짓됩니다. 죄는 자아 중심성이기 때문에 자기 중심적인 것은 근본적으로 죄악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하나님으로 시작해서 하나님으로 끝납니다. 일하는 동기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합니다. 1대1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고, 공부를 하거나 직장을 다니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합니다. 청소를 할 때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고, 먹고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합니다(고전 10:31).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는 자는 근본적으로 참되며 불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자기 생각, 자기 주장, 자기 계획, 자기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참되다는 말은 ‘a man of truth’ 진리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진리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는 자기가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자신을 온전히 비우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빌 2:6-8).
예수님은 그들이 모세가 준 할례 법을 어기지 않기 위해서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주는 반면에 자신이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케 한 것으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것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된 원인은 외모로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안식일을 지키라는 계명을 맹목적으로 지켰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38년된 병자를 고친 것을 보고 즉시 모세의 법을 어긴 죄인이라고 정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안식일 법의 정신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들은 스피릿을 잃어버리고 율법적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24). 공의의 판단이란 올바른 판단입니다. 그들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었던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 그 속에 불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올바른 판단을 하려면 순수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구해야 합니다.
II. 생수의 강 되신 성령님(37-53)
이제 초막절의 끝날이 이르렀습니다. 이 날은 명절 중의 절정으로서 큰 날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날에는 제단 주위를 일곱 번 돌며 호산나를 불렀습니다. 절기가 계속되는 7일 동안은 매일 아침 제사장이 금으로 만든 주전자를 들고 실로암 못에 가서 물을 길어 부었습니다. 이때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고 백성들은 이사야 12:3절을 노래했습니다.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이러한 의식은 조상들이 광야에서 목말라 울부짖고 있을 때 반석에서 나온 샘물로 목마름 문제를 해결한 것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비유적으로 하면 반석은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샘물은 성령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이렇게 함으로써 메마른 땅에 물을 공급하사 추수하게 하신 하나님에게 감사하고, 다음 추수 때에도 풍성한 비를 주시도록 간구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때 서서 상한 심정으로 크게 외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37b,38)”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진리를 배웁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인생의 목마름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명절 끝 날에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초청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명절 끝 날은 장막을 거두고 집으로 돌아가는 날입니다. 사람들은 축제를 즐기는 중에는 공허함을 느끼지 못하지만, 축제가 끝나면 공허함을 느낍니다. 그래서 채워지지 않은 빈 가슴을 안고 방황하다가 죄를 짓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의 채워지지 않는 영혼의 갈증을 보시고 그들을 초청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광야와 같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목마른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겉으로 볼 때 만족한 인생을 사는 것 같이 보이지만 조금만 그 내면을 파고 들어가 보면 목마른 인생 문제로 고통하며 신음합니다. 사람에게는 여러 종류의 목마름이 있습니다. 사랑에 대한 목마름이 가장 심합니다. 또한 인정에 대한 목마름, 돈에 대한 목마름이 있습니다. 돈에 대한 목마름 때문에 그 돈을 받으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거액의 돈을 받아 쇠고랑을 찹니다. 목마름 문제는 반드시 해결되어야 합니다.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는가가 문제입니다. 건강을 유지하려면 물을 많이 마셔야 합니다. 하루에 적어도 8잔 이상을 마셔야 된다고 합니다. 그것도 미네랄과 같은 영양분이 풍부한 생수를 마셔야 한다고 하면서 정수기를 선전합니다. 우리가 육신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 생수를 마셔야 되는 것과 같이, 영혼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생수를 마셔야 합니다. 생수에는 미네랄과 같은 영양분이 풍부한 것과 같이, 성령의 생수에는 온갖 영양분이 풍성하게 들어 있습니다. 사람은 2%가 부족하면 갈증을 느끼고 생수를 찾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영혼이 2%가 부족할 때 성령의 생수를 무한정 공급해 주시는 예수님을 찾아야 합니다. 생수를 마시려면 돈이 필요하지만, 성령의 생수는 믿는 자에게 거저 주십니다. 까다로운 율법을 지킬 필요도 없이 회개하고 믿기만 하면 아무 값없이 거저 주십니다. 인생의 목마름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 주시는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믿는 자에게 생수의 강이 흘러나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날 것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그 배에서’란 ‘within him’, 즉, ‘심령 깊이에서’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진실되게 죄를 고백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할 때 죄사함을 얻게 되고 성령을 선물로 받습니다(행 2:38). 그때 내면 깊이에서 하늘 나라의 기쁨이 솟아나게 됩니다. 그리고 죄의식과 정죄와 심판의 두려움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자유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요 20:22,23). 뿐만 아니라 죄의 열매만을 맺을 수밖에 없는 데서 사랑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와 같은 성령의 열매를 맺고 우리의 인격이 변화됩니다(갈 5:22,23). 더 나아가 현실 문제에 얽매이지 않고 비전에 불타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행 2:17).
예수님은 성령이 생수의 강 같이 흘러나리라고 하였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특정한 사람에게 성령을 제한적으로 주셨습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 와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부활로 복음을 완성하신 후에 모든 믿는 자에게 성령을 부어 주십니다. 그것도 겨우 목만 축일 정도로 조금 부어 주시는 것이 아니라 강 같이 풍성하게 부어 주십니다. 죄 사함의 은혜만 하더라도 과거에는 죄를 지을 때마다 짐승의 피를 흘려 번거롭게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이후 성령이 임하게 되었을 때 언제, 어디서든지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고, 또 죄 사함의 은혜도 풍성히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히 4:16; 10:19,20). 죄 사함의 은혜뿐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도 풍성히 누리고, 평화도 풍성히 누리고, 기쁨과 자유도 풍성히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기심과 탐욕으로 인해 사랑이 메마르고 은혜가 메마르고 기쁨이 메마른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할 때 메마른 세상에서 풍성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또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고 하신 것은 나만 은혜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서 내 가정과 캠퍼스와 온 세계에까지 흘러 넘치게 된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인정과 명예심과 권세에 목말라 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틈만 나면 “누가 크냐” 하며 도토리 키재기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그들에게 임했을 때 그들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생수의 강이 온 세상에 흘러 넘치게 되었습니다. 고 이사무엘 선교사님은 난지 8달만에 어머니를 여의고 어머니의 사랑에 목말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받게 되자 하나님의 사랑이 생수의 강이 되어 전 세계 수많은 지성인들의 심령에 흘러 넘치게 되었습니다.
세상에는 예수님을 믿는 데도 여전히 목마른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사랑에 목말라 하고 인정에 목말라 합니다. 인간의 인정과 박수갈채가 허무한 줄 잘 알면서도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에 얽매여 살아갑니다. 이런 자들은 사랑을 받고 인정을 받으면 신이 나서 일하지만, 사랑과 인정을 받지 못하면 힘들어합니다. 목자님으로부터 그렇게 많은 사랑을 받고도 만족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사랑 깡통을 차고 사랑을 구걸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사랑은 결코 우리를 만족시켜 주지 못합니다. 이 문제는 예수님에게 나아갈 때만이 해결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만이 해결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목마름 문제로 고통하고 있는 인생들을 간절히 초청하십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 생수의 강이 나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해서 가정과 캠퍼스와 전 세계에 흘러 넘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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