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요11강, 생명의 양식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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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요한복음 제 11 강
말씀 / 요한복음 6:16-71
요절 / 요한복음 6:35
생명의 양식 예수님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요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우리는 지난 주에 오병이어로 오 천명을 먹이신 예수님을 배웠습니다. 무리들은 이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생각하고 한 단계 믿음이 성장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떡을 먹고 배가 부르자 영적인 소원을 상실하고 걱정하지 않고 배부르게 살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썩는 양식을 위해서 살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서 살라고 하셨습니다.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서 사는 것은 믿음으로 사는 것이요 예수님을 얻기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떡으로서 그를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그를 따르는 자들이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영생을 누리기를 원하였습니다. 이 시간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동기가 무엇인가를 점검해 보고 예수님 자체를 얻고자 힘쓰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연합된 삶을 통해서 참 만족과 행복을 누리며 사명인의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I. 썩는 양식을 위해서 일하지 말라(16-29)
16-21절은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신 사건입니다. 이는 요한복음에 나타난 일곱 가지 표적 중 다섯번 째로서 제자들의 믿음을 견고케 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천명을 배불리 먹이신 후 무리들이 억지로 왕 삼으려는 것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가셨습니다. 날이 저물자 제자들은 바다에 내려가서 배를 타고 가버나움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났습니다. 제자들은 큰 역사를 섬긴 후라 심신이 지쳐서 파도와 싸울 힘이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이번 항해는 예수님이 함께 계시지 않으므로 더욱 불안하고 두려웠습니다. 제자들은 내적 외적으로 힘든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밤중에 그들을 돕기 위해 폭풍우 치는 물 위로 걸어 오셨습니다. 그들은 유령인가 하고 두려워했습니다(막 6:49).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어머니와 같은 자애로운 음성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내니 두려워 말라." 그들이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마음의 모든 불안과 염려와 두려움이 일순간에 사라지고 평화와 기쁨이 찾아 왔습니다. 그들은 기쁨으로 예수님을 영접하여 목적지까지 안전한 항해를 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없는 인생 항해는 불안하고 두렵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선장으로 모신 인생 항해는 어떤 역풍이 불어와도 안전합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신 사건은 예수님께서 생명의 떡임을 증거하는 표적이었습니다. 무리들은 여기서 한 단계 믿음이 자라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튿날 다시 배가 고파오자 예수님을 필사적으로 찾아 나섰습니다. 그들이 건너편에서 예수님을 만나자 아주 반가운 소리로 “랍비여 어느 때에 여기 오셨나이까?”하고 인사를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내면을 꿰뚫어 보시고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26)””
무리들이 처음에 예수님을 좇은 동기는 순수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떡을 먹고 배부르자 영적 소원을 잃고 예수님보다도 떡 자체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차원으로 올라가지 못하고 물질적이고 육신적인 차원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전락하게 된 것은 떡을 먹고 배불렀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배가 고프고 가진 것이 없을 때는 마음이 가난해져서 영적 소원을 가지고 겸손하게 투쟁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배가 부르게 되면 마음이 부요해져서 영적 소원을 잃고 타락하기 쉽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동물과 달리 육의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영의 것을 추구하는 존재입니다. 또한 하루 밥 세끼 먹고 살기 위해서 사는 존재가 아니라, 거룩한 사명을 가지고 사는 사명의 존재입니다. 인간은 위엣 것을 사모하고 거룩한 사명을 가지고 살 때 비로소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고 참된 영혼의 기쁨과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이 좀 어렵다고 해서 땅에 코를 박고 땅의 것만 생각하고 땅의 것만 추구할 때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상실하고 동물과 같은 육체로 전락해 버리고 맙니다.
예수님은 전락한 무리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27).” 이 말씀은 인간이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가 하는 인생목적을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은 먼저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직장도 다니지 말고 장사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썩어 없어질 것에다 인생의 목적과 소망을 두고 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썩는 양식은 물질만이 아니라 사람들의 인정이나 권세일 수도 있고 학문이나 고상한 예술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있는 것은 아무리 고상하다 할찌라도 결국에는 썩고 쇠하여지고 없어질 것입니다(벧전 1:24). 이런 것들은 삶의 수단은 될 수 있을지언정 삶의 목적은 될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짐승과 달리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는 고귀한 존재입니다. 인간이 고귀한 만큼 우리의 인생 목적도 고귀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물질적인 만족을 얻고 풍요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돈과 시간과 마음을 아낌없이 쓰지만, 영생에 이르는 일에 대해서는 인색합니다. 육신의 복지에는 많은 신경을 쓰지만 영적 복지에는 무관심합니다. 만일 우리가 암에 걸려 사형선고를 받고 6개월 후에 죽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먹고 사는 문제에만 매달린다거나, 돈을 버는데 혈안이 된다거나, 권세와 명예를 얻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다거나, 자기만을 위해 이기적으로 살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을 찾게 되고, 무엇보다도 사후의 일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영생을 추구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집사님 한 분이 어느 날 몸이 이상하여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게 되었습니다. 검사를 받고 병실에 누워있는데 병실 밖에서 가족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검사 결과가 나왔는데 병명은 암이고 몇 달 밖에 살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무척 놀랐지만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 때부터 그는 자신의 삶을 하나하나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동안 못 만났던 사람들을 만나고, 용서를 구해야 하는 사람에게는 용서를 구하고, 자신의 죄를 낱낱이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전 재산을 털어 불우한 이웃에게 나누어주고 유서까지 써 놓았습니다. 그런데 병원에서 암을 선고한지 여섯 달이 지났는데도 자신의 몸이 멀쩡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상해서 다른 큰 병원에 가서 다시 검사를 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전 병원의 암 진단이 오진으로 밝혀졌습니다.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주변사람들은 그가 병원의 오진도 모르고 그 동안 모아놓은 재산을 거의 다 써버린 것에 대하여 안타까워하며 그의 심정을 물어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6개월 동안의 시한부 인생이 이때까지의 저의 삶 중에서 가장 진지하고 보람있고 가치 있게 살았던 순간이었습니다.”
세상에 있는 것들은 결국 다 썩어 없어질 것이기 때문에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세상 일은 아무리 열심히 해도 지내놓고 보면 남는 것이 없습니다. 남는 것이라고는 피곤과 허무와 좌절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우리에게 참 만족과 기쁨을 주며 생명을 줍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에게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고 하셨습니다.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은 예수님과 복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주와 복음을 위해서 몸과 마음을 바쳐 일해야 합니다. 이때 영혼의 참 만족과 기쁨을 누리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내가 왜 예수님을 따르고 있으며,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 진지하게 검토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무리들은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만 얻을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지 할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행위가 수반되는 활동으로 생각했습니다. 무리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일은 복수이지만 예수님이 말씀하는 하나님의 일은 단수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이용해서 자기 목적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면 전도하고 1대1 하고 섬기는 것 등 행위가 수반되는 활동으로 생각합니다. 많은 분들이 양 문제로 인해 문제에 빠지고 믿음을 상실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내 양을 먹이라”고 부탁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힘써 양을 쳐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양을 치는 것도 믿음으로 해야 되고 또 양 치는 것을 통해서 믿음을 배워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믿음에서 시작해서 믿음으로 끝납니다(롬 1:17). 시작도 믿음이요 과정도 믿음이요 마지막도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믿음의 역사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무엇 무엇을 해 주시면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말합니다. 시험 공부하는 사람은 “시험에 합격시켜 주시면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러나 시험에 합격하기 전까지는 시험공부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잠시 유보해야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런 사람은 시험에 합격해도 하나님의 일을 우선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시험에 합격하면 또 다른 급한 일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일은 고사하고 항상 자기 일을 하기에만 급급하다가 인생을 다 소비해 버립니다. 그러나 정말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시험 공부하는 사람은 시험 공부하는 중에서도 상황을 핑계하지 않고 어떤 모양으로든지 하나님의 일을 하고자 애를 씁니다. 정베드로 목자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미국 공인 회계사 시험을 보고자 결심했습니다. 그는 시험을 준비하는 중에 매일 일용할 양식을 먹고, 새벽기도를 열심히 하고, 양을 치고, 중요한 모임에는 꼭 참석하여 먼저 그의 나라를 구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그를 보고 언제 공부를 하는가? 저렇게 하다가 시험에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염려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합격했습니다. 그는 시험에 합격한 후 직장을 얻기 위해서 열심히 원서를 넣고 있는 중에도 세계 선교 보고 대회초청 역사를 열심히 섬기고 일대일에 진심을 드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요회는 우리 센터에서 두번째로 많은 양들을 초청했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상황을 핑계하지 않습니다.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믿음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고자 애를 씁니다. 먼저 그의 나라를 구합니다. 사람들은 돈이 있어야 하나님의 일도 잘 할 수 있다 생각하고 먼저 돈을 벌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제가 지금은 조금밖에 드리지 못하지만 돈을 많이 벌면 많이 드리겠습니다. 그때까지만 기다려 주십시오.”라고 기도합니다. 이런 사람은 돈을 많이 벌면 절대로 많이 드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돈을 많이 벌게 되면 욕심이 생겨 생각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욕심이 생기지 않더라도 돈이 생기면 생기는 대로 씀씀이가 커져서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없게 됩니다. 우리는 현재 없으면 없는 대로 먼저 주님께 드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믿음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II. 생명의 떡이 되신 예수님(30-59)
예수님은 무리들에게 믿음을 심고자 하였지만 무리들은 믿을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떡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인 표적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표적을 요구했습니다. 그들은 모세가 40년 동안 만나를 먹인 것 같이, 그들에게도 한 번만 아니라 계속해서 양식을 주어야 메시아로 인정할 수 있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나를 주신 영적인 뜻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존재임을 깨닫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신 8:3). 예수님은 만나는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셨으며, 이 하나님께서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참 양식을 주심을 가르쳐 주셨습니다(32,33). 그러자 무리들은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하며 간청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생명의 양식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35절을 보십시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은 내가 곧 생명의 양식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생명의 본질로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자시요, 생명을 유지시키는 자이심을 말해 줍니다. 양식은 없어서는 안될 꼭 필요한 음식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인생들에게 없어서는 안될 꼭 필요한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없이는 영적인 생명을 얻을 수도 없고 유지시킬 수도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육신의 배고픔과 영적 배고픔이 있습니다. 배고픔은 사람을 슬프게 하고 비참하게 합니다. 배고프면 먹을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습니다. 배고프면 힘이 없고 무엇을 하나 만족과 기쁨이 없게 됩니다. 이와 같이 영적으로 배고픈 사람은 영력이 없고 무엇을 하나 만족이 없고 참된 영혼의 기쁨이 없습니다. 세상에는 육신적으로는 부족함이 없지만 영적으로 굶주린 자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이런 자들은 내면에 항상 허무를 느낍니다. 무슨 일을 열심히 하다가도 그 후에 찾아오는 허무 때문에 삶의 의욕을 상실하고 곤고한 인생을 살아갑니다. 이는 영적으로 굶주렸기 때문입니다. 이 영적인 굶주림은 영의 양식을 먹을 때만이 해소됩니다. 예수님은 영혼의 굶주림을 채워 주시는 생명의 양식이 됩니다. 35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내게’, ‘나를’ 이라고 하심으로써 예수님께 나아가야 인생의 근본 배고픔 문제와 목마름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인생의 배고픈 문제와 목마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늘 배고프고 목마른 인생을 사는 것은 문제의 해결자 되신 예수님께 나아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36절을 보십시오. 무리들은 예수님을 보고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자체보다도 예수님을 통해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얻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목적으로 삼지 않고 수단으로 삼았습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영적으로 막혀 예수님이 주고자 하는 진정한 축복을 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믿음으로 나아오는 자를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시고 다 영접해 주십니다(37). 그리고 근본적으로 그 인생을 책임져 주시고 마지막 날에는 살려 주십니다(39b,40).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38,39a). 하나님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늘로서 온 양식이라고 하자 무리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습니다(41). 그리고 예수님이 요셉의 아들이라는 인간조건을 보고 배척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예수님께 올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아버지께서 이끄시는 자는 아버지께 듣고 배운 자들로서 겸손한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영적 소원이 없는 그들을 포기치 않으시고 계속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47,48).” 조상들은 만나를 먹고 죽었지만 예수님은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기 때문에 먹으면 영생하게 됩니다. 이는 바로 세상의 생명을 위한 예수님의 살입니다.
52절을 보십시오. 유대인들은 “이 사람이 어찌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우리를 식인종으로 아는가?” 하며 서로 다투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영적으로 꽉 막힌 이들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에게 십자가의 진리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진리만이 사람을 근본적으로 살리기 때문입니다. 53-55절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고귀한 살을 찢기시고 보배로운 피를 흘리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살은 참된 양식이요 예수님의 피는 참된 음료입니다.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실 때 예수님의 생명이 내 속에 거하게 되어 허물과 죄로 죽었던 영적 생명이 살아나게 됩니다. 먹고 마시는 것은 한 사람이 구원을 얻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믿을 때 일어나는 것, 즉 그리스도의 희생을 받아들이는 것 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죄와 죄성을 느끼면서 그리스도를 붙잡고, 그리스도의 죽음으로써 자신을 위해 이루어진 속죄를 신뢰할 때마다, 그는 즉시 인자의 살을 먹고 그의 피를 마십니다. 그의 영혼은 그의 육체가 밥을 먹는 것과 똑같이, 믿음으로써 그리스도의 희생을 먹습니다. 믿을 때 그는 먹는 것이며, 믿을 때 그는 마시는 것입니다. 그가 먹고 마실 때 그리스도께서 갈보리에서 죽으심으로써 이루신 그의 죄에 대한 속죄를 체험합니다.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이는 내 살이라, 이는 내 피라”하시면서 주신 주님의 떡과 잔을 먹고 마심으로, 주의 십자가를 바라 본 제자들의 가슴은 이제야 주님을 이해하기 시작하였을 것입니다(눅22:19-20). 십자가 위에서 찢으신 살과 흘리신 피의 속죄가 없이는 참 생명이 있을 수 없습니다. 또한 믿음으로 먹고 마실 때 예수님과 연합하게 되어 예수님께서 내 안에 계시게 되고 나도 예수님 안에 거하게 됩니다. 이때 우리는 내 안에 거하시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죽음도 맛보지 아니하고 영원히 살게 됩니다(58). 이렇게 십자가의 진리는 우리에게 생명을 줍니다. 우리는 십자가 말씀을 전하면 사람들이 부담스러워서 도망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할 수 있는 대로 좋은 말만 전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정반대입니다. 십자가 신앙이 없는 사람은 언젠가는 단물만 빨아먹고 도망갑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부담스러워할지라도 십자가를 영접하고 십자가에 기초한 신앙을 갖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것이 사람을 진정으로 돕는 길입니다.
III.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60-71)
예수님은 육의 것에 얽매여 있는 무리들에게 십자가의 비밀을 가르쳐 주심으로 그들이 영적인 눈을 뜨고 영생 얻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이해할 수 있는가” 하며 배척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걸림이 된 것은 영을 추구하지 않고 육을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63절을 보십시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앞에 영은 성령을 의미하고 뒤의 영은 영적이라는 뜻입니다. 육의 것은 허물과 죄로 죽은 죄인들을 살리는 중생의 역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죽은 영혼을 살리는 것은 오직 성령이십니다. 또 성령은 사람을 살리는 일을 위해 말씀을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영이요 생명이 되십니다.
결국 제자 중 많은 사람이 예수님에게서 더 이상 별 볼일 없다 생각하고 물러갔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떠난 것은 예수님을 목적으로 삼지 않고 수단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영을 추구하지 않고 육을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예수님을 믿으면 유익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예수님을 믿습니다. 마음의 평안도 얻고,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목자님들을 통하여 사랑도 받고 위로와 힘도 얻고, 진실된 사람들과 교제도 나누기 때문에 인생을 살아가는데 여러모로 도움이 된다 생각하고 예수님을 좇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사명을 감당하고 십자가를 지고 희생하고 헌신해야 된다고 생각되면 속으로 손익계산을 따지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서 신앙생활 하다가는 손해보겠다는 생각이 들면 “이 말씀은 어렵도다.” 하며 사명을 버리고 슬그머니 자기 갈 길로 가버립니다.
예수님은 육에 얽매여서 영적인 것을 버리고 물러가는 그들을 “제발 도망가지 말라”고 붙잡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다 도망가더라도 그들과 타협 지 않으시고 분명하게 복음 진리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남아 있는 제자들도 예수님을 따르는 근본 동기와 목적을 분명히 하도록 하셨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이 질문은 “너희도 갈 테면 가라”는 뜻이 아니라, “너희는 떠나기를 원치 않겠지, 그렇지”(You do not want to leave too, do you?)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따르는 동기와 목적을 새롭게 하고 예수님께 뿌리를 내리도록 결단을 촉구하는 질문입니다. 이때 시몬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다같이 68,69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이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이요 믿음의 결단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이 영생의 말씀임을 알았습니다. 그는 영생의 말씀을 맛보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떠날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복지 사회 건설이라는 미명 아래 물질에 최고의 가치를 두고 육의 양식을 추구합니다. 사람들은 육의 양식을 추구하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행복은커녕 피곤과 권태와 영혼의 불안만이 쌓일 뿐입니다. 인간에게는 육의 양식 이상의 것, 즉 영의 양식이 필요합니다. 인간은 생명의 양식을 먹을 때만이 진정한 만족과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수단으로 삼지 않고 목적으로 삼고, 육을 추구하지 않고 영을 추구함으로써 참된 영혼의 만족과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요한복음 6:16-71
요절 / 요한복음 6:35
생명의 양식 예수님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요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우리는 지난 주에 오병이어로 오 천명을 먹이신 예수님을 배웠습니다. 무리들은 이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생각하고 한 단계 믿음이 성장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떡을 먹고 배가 부르자 영적인 소원을 상실하고 걱정하지 않고 배부르게 살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썩는 양식을 위해서 살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서 살라고 하셨습니다.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서 사는 것은 믿음으로 사는 것이요 예수님을 얻기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떡으로서 그를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그를 따르는 자들이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영생을 누리기를 원하였습니다. 이 시간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동기가 무엇인가를 점검해 보고 예수님 자체를 얻고자 힘쓰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연합된 삶을 통해서 참 만족과 행복을 누리며 사명인의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I. 썩는 양식을 위해서 일하지 말라(16-29)
16-21절은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신 사건입니다. 이는 요한복음에 나타난 일곱 가지 표적 중 다섯번 째로서 제자들의 믿음을 견고케 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천명을 배불리 먹이신 후 무리들이 억지로 왕 삼으려는 것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가셨습니다. 날이 저물자 제자들은 바다에 내려가서 배를 타고 가버나움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났습니다. 제자들은 큰 역사를 섬긴 후라 심신이 지쳐서 파도와 싸울 힘이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이번 항해는 예수님이 함께 계시지 않으므로 더욱 불안하고 두려웠습니다. 제자들은 내적 외적으로 힘든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밤중에 그들을 돕기 위해 폭풍우 치는 물 위로 걸어 오셨습니다. 그들은 유령인가 하고 두려워했습니다(막 6:49).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어머니와 같은 자애로운 음성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내니 두려워 말라." 그들이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마음의 모든 불안과 염려와 두려움이 일순간에 사라지고 평화와 기쁨이 찾아 왔습니다. 그들은 기쁨으로 예수님을 영접하여 목적지까지 안전한 항해를 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없는 인생 항해는 불안하고 두렵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선장으로 모신 인생 항해는 어떤 역풍이 불어와도 안전합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신 사건은 예수님께서 생명의 떡임을 증거하는 표적이었습니다. 무리들은 여기서 한 단계 믿음이 자라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튿날 다시 배가 고파오자 예수님을 필사적으로 찾아 나섰습니다. 그들이 건너편에서 예수님을 만나자 아주 반가운 소리로 “랍비여 어느 때에 여기 오셨나이까?”하고 인사를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내면을 꿰뚫어 보시고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26)””
무리들이 처음에 예수님을 좇은 동기는 순수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떡을 먹고 배부르자 영적 소원을 잃고 예수님보다도 떡 자체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차원으로 올라가지 못하고 물질적이고 육신적인 차원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전락하게 된 것은 떡을 먹고 배불렀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배가 고프고 가진 것이 없을 때는 마음이 가난해져서 영적 소원을 가지고 겸손하게 투쟁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배가 부르게 되면 마음이 부요해져서 영적 소원을 잃고 타락하기 쉽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동물과 달리 육의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영의 것을 추구하는 존재입니다. 또한 하루 밥 세끼 먹고 살기 위해서 사는 존재가 아니라, 거룩한 사명을 가지고 사는 사명의 존재입니다. 인간은 위엣 것을 사모하고 거룩한 사명을 가지고 살 때 비로소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고 참된 영혼의 기쁨과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이 좀 어렵다고 해서 땅에 코를 박고 땅의 것만 생각하고 땅의 것만 추구할 때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상실하고 동물과 같은 육체로 전락해 버리고 맙니다.
예수님은 전락한 무리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27).” 이 말씀은 인간이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가 하는 인생목적을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은 먼저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직장도 다니지 말고 장사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썩어 없어질 것에다 인생의 목적과 소망을 두고 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썩는 양식은 물질만이 아니라 사람들의 인정이나 권세일 수도 있고 학문이나 고상한 예술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있는 것은 아무리 고상하다 할찌라도 결국에는 썩고 쇠하여지고 없어질 것입니다(벧전 1:24). 이런 것들은 삶의 수단은 될 수 있을지언정 삶의 목적은 될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짐승과 달리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는 고귀한 존재입니다. 인간이 고귀한 만큼 우리의 인생 목적도 고귀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물질적인 만족을 얻고 풍요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돈과 시간과 마음을 아낌없이 쓰지만, 영생에 이르는 일에 대해서는 인색합니다. 육신의 복지에는 많은 신경을 쓰지만 영적 복지에는 무관심합니다. 만일 우리가 암에 걸려 사형선고를 받고 6개월 후에 죽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먹고 사는 문제에만 매달린다거나, 돈을 버는데 혈안이 된다거나, 권세와 명예를 얻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다거나, 자기만을 위해 이기적으로 살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을 찾게 되고, 무엇보다도 사후의 일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영생을 추구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집사님 한 분이 어느 날 몸이 이상하여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게 되었습니다. 검사를 받고 병실에 누워있는데 병실 밖에서 가족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검사 결과가 나왔는데 병명은 암이고 몇 달 밖에 살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무척 놀랐지만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 때부터 그는 자신의 삶을 하나하나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동안 못 만났던 사람들을 만나고, 용서를 구해야 하는 사람에게는 용서를 구하고, 자신의 죄를 낱낱이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전 재산을 털어 불우한 이웃에게 나누어주고 유서까지 써 놓았습니다. 그런데 병원에서 암을 선고한지 여섯 달이 지났는데도 자신의 몸이 멀쩡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상해서 다른 큰 병원에 가서 다시 검사를 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전 병원의 암 진단이 오진으로 밝혀졌습니다.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주변사람들은 그가 병원의 오진도 모르고 그 동안 모아놓은 재산을 거의 다 써버린 것에 대하여 안타까워하며 그의 심정을 물어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6개월 동안의 시한부 인생이 이때까지의 저의 삶 중에서 가장 진지하고 보람있고 가치 있게 살았던 순간이었습니다.”
세상에 있는 것들은 결국 다 썩어 없어질 것이기 때문에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세상 일은 아무리 열심히 해도 지내놓고 보면 남는 것이 없습니다. 남는 것이라고는 피곤과 허무와 좌절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우리에게 참 만족과 기쁨을 주며 생명을 줍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에게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고 하셨습니다.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은 예수님과 복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주와 복음을 위해서 몸과 마음을 바쳐 일해야 합니다. 이때 영혼의 참 만족과 기쁨을 누리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내가 왜 예수님을 따르고 있으며,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 진지하게 검토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무리들은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만 얻을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지 할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행위가 수반되는 활동으로 생각했습니다. 무리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일은 복수이지만 예수님이 말씀하는 하나님의 일은 단수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이용해서 자기 목적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면 전도하고 1대1 하고 섬기는 것 등 행위가 수반되는 활동으로 생각합니다. 많은 분들이 양 문제로 인해 문제에 빠지고 믿음을 상실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내 양을 먹이라”고 부탁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힘써 양을 쳐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양을 치는 것도 믿음으로 해야 되고 또 양 치는 것을 통해서 믿음을 배워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믿음에서 시작해서 믿음으로 끝납니다(롬 1:17). 시작도 믿음이요 과정도 믿음이요 마지막도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믿음의 역사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무엇 무엇을 해 주시면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말합니다. 시험 공부하는 사람은 “시험에 합격시켜 주시면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러나 시험에 합격하기 전까지는 시험공부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잠시 유보해야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런 사람은 시험에 합격해도 하나님의 일을 우선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시험에 합격하면 또 다른 급한 일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일은 고사하고 항상 자기 일을 하기에만 급급하다가 인생을 다 소비해 버립니다. 그러나 정말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시험 공부하는 사람은 시험 공부하는 중에서도 상황을 핑계하지 않고 어떤 모양으로든지 하나님의 일을 하고자 애를 씁니다. 정베드로 목자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미국 공인 회계사 시험을 보고자 결심했습니다. 그는 시험을 준비하는 중에 매일 일용할 양식을 먹고, 새벽기도를 열심히 하고, 양을 치고, 중요한 모임에는 꼭 참석하여 먼저 그의 나라를 구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그를 보고 언제 공부를 하는가? 저렇게 하다가 시험에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염려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합격했습니다. 그는 시험에 합격한 후 직장을 얻기 위해서 열심히 원서를 넣고 있는 중에도 세계 선교 보고 대회초청 역사를 열심히 섬기고 일대일에 진심을 드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요회는 우리 센터에서 두번째로 많은 양들을 초청했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상황을 핑계하지 않습니다.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믿음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고자 애를 씁니다. 먼저 그의 나라를 구합니다. 사람들은 돈이 있어야 하나님의 일도 잘 할 수 있다 생각하고 먼저 돈을 벌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제가 지금은 조금밖에 드리지 못하지만 돈을 많이 벌면 많이 드리겠습니다. 그때까지만 기다려 주십시오.”라고 기도합니다. 이런 사람은 돈을 많이 벌면 절대로 많이 드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돈을 많이 벌게 되면 욕심이 생겨 생각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욕심이 생기지 않더라도 돈이 생기면 생기는 대로 씀씀이가 커져서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없게 됩니다. 우리는 현재 없으면 없는 대로 먼저 주님께 드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믿음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II. 생명의 떡이 되신 예수님(30-59)
예수님은 무리들에게 믿음을 심고자 하였지만 무리들은 믿을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떡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인 표적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표적을 요구했습니다. 그들은 모세가 40년 동안 만나를 먹인 것 같이, 그들에게도 한 번만 아니라 계속해서 양식을 주어야 메시아로 인정할 수 있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나를 주신 영적인 뜻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존재임을 깨닫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신 8:3). 예수님은 만나는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셨으며, 이 하나님께서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참 양식을 주심을 가르쳐 주셨습니다(32,33). 그러자 무리들은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하며 간청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생명의 양식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35절을 보십시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은 내가 곧 생명의 양식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생명의 본질로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자시요, 생명을 유지시키는 자이심을 말해 줍니다. 양식은 없어서는 안될 꼭 필요한 음식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인생들에게 없어서는 안될 꼭 필요한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없이는 영적인 생명을 얻을 수도 없고 유지시킬 수도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육신의 배고픔과 영적 배고픔이 있습니다. 배고픔은 사람을 슬프게 하고 비참하게 합니다. 배고프면 먹을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습니다. 배고프면 힘이 없고 무엇을 하나 만족과 기쁨이 없게 됩니다. 이와 같이 영적으로 배고픈 사람은 영력이 없고 무엇을 하나 만족이 없고 참된 영혼의 기쁨이 없습니다. 세상에는 육신적으로는 부족함이 없지만 영적으로 굶주린 자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이런 자들은 내면에 항상 허무를 느낍니다. 무슨 일을 열심히 하다가도 그 후에 찾아오는 허무 때문에 삶의 의욕을 상실하고 곤고한 인생을 살아갑니다. 이는 영적으로 굶주렸기 때문입니다. 이 영적인 굶주림은 영의 양식을 먹을 때만이 해소됩니다. 예수님은 영혼의 굶주림을 채워 주시는 생명의 양식이 됩니다. 35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내게’, ‘나를’ 이라고 하심으로써 예수님께 나아가야 인생의 근본 배고픔 문제와 목마름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인생의 배고픈 문제와 목마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늘 배고프고 목마른 인생을 사는 것은 문제의 해결자 되신 예수님께 나아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36절을 보십시오. 무리들은 예수님을 보고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자체보다도 예수님을 통해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얻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목적으로 삼지 않고 수단으로 삼았습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영적으로 막혀 예수님이 주고자 하는 진정한 축복을 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믿음으로 나아오는 자를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시고 다 영접해 주십니다(37). 그리고 근본적으로 그 인생을 책임져 주시고 마지막 날에는 살려 주십니다(39b,40).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38,39a). 하나님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늘로서 온 양식이라고 하자 무리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습니다(41). 그리고 예수님이 요셉의 아들이라는 인간조건을 보고 배척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예수님께 올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아버지께서 이끄시는 자는 아버지께 듣고 배운 자들로서 겸손한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영적 소원이 없는 그들을 포기치 않으시고 계속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47,48).” 조상들은 만나를 먹고 죽었지만 예수님은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기 때문에 먹으면 영생하게 됩니다. 이는 바로 세상의 생명을 위한 예수님의 살입니다.
52절을 보십시오. 유대인들은 “이 사람이 어찌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우리를 식인종으로 아는가?” 하며 서로 다투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영적으로 꽉 막힌 이들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에게 십자가의 진리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진리만이 사람을 근본적으로 살리기 때문입니다. 53-55절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고귀한 살을 찢기시고 보배로운 피를 흘리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살은 참된 양식이요 예수님의 피는 참된 음료입니다.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실 때 예수님의 생명이 내 속에 거하게 되어 허물과 죄로 죽었던 영적 생명이 살아나게 됩니다. 먹고 마시는 것은 한 사람이 구원을 얻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믿을 때 일어나는 것, 즉 그리스도의 희생을 받아들이는 것 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죄와 죄성을 느끼면서 그리스도를 붙잡고, 그리스도의 죽음으로써 자신을 위해 이루어진 속죄를 신뢰할 때마다, 그는 즉시 인자의 살을 먹고 그의 피를 마십니다. 그의 영혼은 그의 육체가 밥을 먹는 것과 똑같이, 믿음으로써 그리스도의 희생을 먹습니다. 믿을 때 그는 먹는 것이며, 믿을 때 그는 마시는 것입니다. 그가 먹고 마실 때 그리스도께서 갈보리에서 죽으심으로써 이루신 그의 죄에 대한 속죄를 체험합니다.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이는 내 살이라, 이는 내 피라”하시면서 주신 주님의 떡과 잔을 먹고 마심으로, 주의 십자가를 바라 본 제자들의 가슴은 이제야 주님을 이해하기 시작하였을 것입니다(눅22:19-20). 십자가 위에서 찢으신 살과 흘리신 피의 속죄가 없이는 참 생명이 있을 수 없습니다. 또한 믿음으로 먹고 마실 때 예수님과 연합하게 되어 예수님께서 내 안에 계시게 되고 나도 예수님 안에 거하게 됩니다. 이때 우리는 내 안에 거하시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죽음도 맛보지 아니하고 영원히 살게 됩니다(58). 이렇게 십자가의 진리는 우리에게 생명을 줍니다. 우리는 십자가 말씀을 전하면 사람들이 부담스러워서 도망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할 수 있는 대로 좋은 말만 전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정반대입니다. 십자가 신앙이 없는 사람은 언젠가는 단물만 빨아먹고 도망갑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부담스러워할지라도 십자가를 영접하고 십자가에 기초한 신앙을 갖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것이 사람을 진정으로 돕는 길입니다.
III.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60-71)
예수님은 육의 것에 얽매여 있는 무리들에게 십자가의 비밀을 가르쳐 주심으로 그들이 영적인 눈을 뜨고 영생 얻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이해할 수 있는가” 하며 배척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걸림이 된 것은 영을 추구하지 않고 육을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63절을 보십시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앞에 영은 성령을 의미하고 뒤의 영은 영적이라는 뜻입니다. 육의 것은 허물과 죄로 죽은 죄인들을 살리는 중생의 역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죽은 영혼을 살리는 것은 오직 성령이십니다. 또 성령은 사람을 살리는 일을 위해 말씀을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영이요 생명이 되십니다.
결국 제자 중 많은 사람이 예수님에게서 더 이상 별 볼일 없다 생각하고 물러갔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떠난 것은 예수님을 목적으로 삼지 않고 수단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영을 추구하지 않고 육을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예수님을 믿으면 유익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예수님을 믿습니다. 마음의 평안도 얻고,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목자님들을 통하여 사랑도 받고 위로와 힘도 얻고, 진실된 사람들과 교제도 나누기 때문에 인생을 살아가는데 여러모로 도움이 된다 생각하고 예수님을 좇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사명을 감당하고 십자가를 지고 희생하고 헌신해야 된다고 생각되면 속으로 손익계산을 따지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서 신앙생활 하다가는 손해보겠다는 생각이 들면 “이 말씀은 어렵도다.” 하며 사명을 버리고 슬그머니 자기 갈 길로 가버립니다.
예수님은 육에 얽매여서 영적인 것을 버리고 물러가는 그들을 “제발 도망가지 말라”고 붙잡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다 도망가더라도 그들과 타협 지 않으시고 분명하게 복음 진리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남아 있는 제자들도 예수님을 따르는 근본 동기와 목적을 분명히 하도록 하셨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이 질문은 “너희도 갈 테면 가라”는 뜻이 아니라, “너희는 떠나기를 원치 않겠지, 그렇지”(You do not want to leave too, do you?)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따르는 동기와 목적을 새롭게 하고 예수님께 뿌리를 내리도록 결단을 촉구하는 질문입니다. 이때 시몬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다같이 68,69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이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이요 믿음의 결단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이 영생의 말씀임을 알았습니다. 그는 영생의 말씀을 맛보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떠날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복지 사회 건설이라는 미명 아래 물질에 최고의 가치를 두고 육의 양식을 추구합니다. 사람들은 육의 양식을 추구하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행복은커녕 피곤과 권태와 영혼의 불안만이 쌓일 뿐입니다. 인간에게는 육의 양식 이상의 것, 즉 영의 양식이 필요합니다. 인간은 생명의 양식을 먹을 때만이 진정한 만족과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수단으로 삼지 않고 목적으로 삼고, 육을 추구하지 않고 영을 추구함으로써 참된 영혼의 만족과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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