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요한10강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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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요한복음 제 10 강
말씀 / 요한복음 6:1-15
요절 / 요한복음 6:11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많은 무리들을 섬기셨지만 주된 일은 열 두 제자를 지도자요 목자로 양성하는 일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지도자론이요 목자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굶주린 이 시대 양무리들을 어떻게 먹일 수 있는가 배우기를 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내 코가 석자인데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고 먹일 수 있는가 생각하고 자기와 자기 가족만을 위해 살아갑니다. 한 때 얼굴 없는 시인으로 불리었던 박노해 시인은 그의 책 "오늘은 다르게"에서 '나쁜 사람'을 '나뿐인 사람'으로 정의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생각지 않고 나만 생각하는 나뿐인 사람은 결국 나쁜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충북 음성군에 꽃동네가 있습니다. 이곳은 세상에서 의지할 곳 없고 얻어먹을 힘조차 없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봐주는 곳입니다. 이곳은 1976년 9월 12일 오웅진 신부님이 무극천 다리 밑에서 최기동 할아버지를 만남으로써 시작되었습니다. 최기동 할아버지는 자신도 걸인이지만 자기만을 위해 살지 않고 남의 밥을 얻어다가 동냥할 기력도 없는 걸인들을 먹여 주는 생활을 무려 40년 동안이나 감당했습니다. 오 신부님은 이에 충격을 받고 그날 즉시 주머니 돈 1,300원을 털어 시멘트를 사서 사랑의 집을 짓기 시작하여 무극촌 다리 밑에서 살던 걸인 18인을 맞아들이면서 꽃동네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크리스천은 이 시대의 목자요 영적 지도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어떻게 이 시대의 굶주린 영혼들을 먹일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축복하시고 귀히 쓰시는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I. 빌립을 시험하신 예수님(1-7)
그 후에 예수님은 갈릴리 바다 곧 디베랴 바다 건너편으로 가셨습니다. 그 후란 마가복음을 참고해 볼 때 제자들에게 전도 여행을 보내시고 그들이 돌아와 보고를 한 후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쉼이 필요함을 아시고 바다 건너편으로 가서 쉼을 갖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바다 건너편으로 건너가 산에 오르셨는데 그 곳은 지금의 골란 고원 남부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장소는 벳세다 광야라고도 부르는 고원으로서 산이 높지 않고 아늑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웠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가야 하는데 예수님께로 몰려 나왔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병인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동기는 표적을 보고자 함이었습니다. 표적은 예수님을 따르는 동기는 될 수 있지만 목적은 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붙잡고 예수님 자체를 배우고 믿는 단계로 나아가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고 표적만을 구하게 되면 영적으로 음란해지고 부패하게 됩니다. 요한복음은 그들이 표적을 보고 따른 결과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결국 다 떠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표적보다 말씀에 기초한 신앙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고 배우는 데서 자라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산에 앉아 있었는데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막 6:34절에 의하면 예수님은 자신에게 나아오는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로 가르치셨습니다. 목자 없는 양은 오늘날 엄마 없는 아이와 같습니다. 아이에게 엄마가 없으면 어떻게 될까요? 아이에게 어머니의 돌봄은 절대적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을 받으면서 자라지 못하는 아이는 반항적이 됩니다. 내면이 거칠어지고 황폐하게 됩니다. 또 육신적으로도 잔병에 시달리게 됩니다. 이와 같이 당시의 무리들은 영적인 양식이 없어 굶주리고 귀신들리고 거짓 선지자들에게 속아 넘어가고 방황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불쌍히 여기사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심으로 생명의 양식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육신적으로도 배고픔을 아시고 먹이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빌립에게 물으셨습니다.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5b)?” 예수님께서 이렇게 질문하신 목적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었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시험하고자 하셨을까요? 대개 시험 문제에는 함정도 있지만 힌트도 있습니다. 여기서 함정은 ‘어디서 살 것인가’ 입니다. 힌트는 ‘우리가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입니다. 어떤 시험이든 시험은 우리를 떨리게 합니다. 운전 면허 시험도 떨려서 떨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빌립을 시험하신 것은 일반적인 시험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이는 그를 곤경에 빠뜨리거나 그에게 불이익을 주고자 함이 아니라 그를 영적으로 업그레이드 시켜서 쓰실만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키우고자 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시험을 통해서 빌립이 얼마나 예수님을 믿고 있는가를 알아보고자 하였습니다. 선생님들은 시험을 통해서 자신이 학생들에게 올바로 가르쳤는가를 알아볼 수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과 표적을 통해서 자신이 누구인가를 끊임없이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빌립의 믿음이 얼마나 자랐는가를 알아보고자 하셨습니다. 빌립은 예수님께서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든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가까이에서 따르면서 그의 능력도 보았고 신성도 체험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나아온 오천 명을 먹여야 하는 실제 문제들을 통해서 그의 믿음이 시험을 받게 되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이 시험을 통해서 빌립에게 목자의 심정이 얼마나 있는가 알고 싶었습니다. 빌립은 매우 지성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지성인들은 그 많은 능력을 가지고 자기 만을 위해서 쓰고자 생각하기 쉽습니다. 즉 머리는 큰데 가슴은 빈약하기 쉽습니다. 예수님은 빌립이 이 시험을 통해서 자기 발견을 하고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바랐습니다.
빌립은 예수님께서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고 물으셨을 때 핵심을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핵심은 먹이는 것인데 빌립은 어디서 살 것인가로 고민했습니다. 그는 벳세다 사람이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이 지역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빌립은 IQ와 JQ는 높은데 EQ가 낮았습니다. 그는 무리들을 먹이고자 하는 마인드가 없었습니다. 빌립의 대답이 어떠했습니까? 7절을 보십시오.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그의 계산으로 당장에 2천만원의 돈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공동 기금에는 잔액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가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을 했지만 자기에게 없는 것만 생각했을 때 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빌립은 통계학적인 비관론자였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우리가 먹이게 하겠느냐고 물으셨는데 빌립은 예수님을 계산에 넣지 않고 생각했습니다. 빌립이 예수님을 생각했었더라면 생각하는 방향이 크게 달라졌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얼마 전에 가나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가 모자랐을 때 물로 포도주를 세 드럼 통이나 만들어 주시고 잔치를 풍성하게 하셨습니다. 이를 볼 때 빌립은 역사 의식이 부족했습니다. 그가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되자 예수님마저도 포기하시도록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빌립이 예수님의 마음을 파악하지 못했을 때 그의 머리는 안 되는 이유, 먹일 수 없는 이유, 할 수 없는 이유를 찾기에 바빴습니다. 우리도 양을 먹이고 싶은데 나에게는 시간이 없다, 돈이 없다, 능력이 없다, 지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해도 안 된다는 부정적인 생각 때문에 아예 도전할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늘 없는 것만 생각하고 자학하느라고 귀중한 시간을 다 허비해 버립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자를 쓰실 수 없고 축복하실 수 없습니다.
II. 안드레의 오병이어를 드리는 믿음(8-9)
안드레 하면 어딘지 모르게 멍하고 나사가 빠진 사람 같이 생각됩니다. 그러나 그는 위기의 순간에 믿음으로 위기를 타개해 나가는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빌립과 같이 스마트하지 못하고 외모나 인간 조건이 지도자답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가 시몬 베드로를 예수님께 데리고 왔을 때 예수님은 시몬에게는 큰 소망을 두시고 "장차 게바라 하리라"고 말씀하셨지만, 안드레는 본체만체 하셨습니다. 본문에서도 예수님께서 빌립에게는 말씀하셨지만 안드레에게는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안드레는 자학하거나 예수님께 섭섭한 감정을 품지 않았습니다. 그는 항상 믿음으로 생각하고 믿음으로 행동했습니다. 그는 곁에서 예수님과 빌립의 대화를 엿듣고 있다가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빌립이 안된다는 생각으로 고민에 빠져 있는 동안 안드레는 무리 가운데를 두루 찾아 다녔습니다. 그리고 한 어린 아이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무리들을 어찌하든지 먹이고자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시라면 하실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어린 아이가 먹기 위해서 가지고 온 것을 주님께 드리도록 설득을 했습니다. 어린 아이와 안드레는 순진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안드레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은 없지만 한 아이를 설득하여 오병이어를 주님께 드리도록 도왔습니다. 그는 오병이어를 예수님께 드리고 그 다음은 예수님께 맡겼습니다.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사실 안드레도 오천 명에 비해서 오병이어는 코딱지 만도 못한 분량이라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몇 사람이나 나누어 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심정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금융위기를 당했을 때 국민들이 금 모으기 운동에 동참했습니다. 그 운동을 통해서 국민들의 마음이 하나가 되었을 때 우리 나라는 금융 위기를 극복하고 놀라운 회복을 이루었습니다. 우리는 안드레가 주님께 드린 것이 사실 보잘것없는 것임을 잘 압니다. 그가 드린 떡은 개떡이었습니다. 고기도 어부가 값이 될 만한 것은 챙기고 버린 것을 가난한 사람들이 주워다가 먹는 것이었습니다. 또 그가 드린 것은 사실 자기 것도 아니었습니다. 한 어린 아이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작은 것을 주님께 드리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주님께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했습니다.
안드레는 매우 엉뚱한 사람 같습니다. 그러나 이런 엉뚱한 사람들이 일할 수 있는 분위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새로운 역사 창조가 이루어집니다. 그는 사실 가만히 있어도 될 것 같은데 일을 찾아서 했습니다. 그는 자발적으로 주님의 뜻을 찾아서 섬겼습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어서 귀히 쓰임받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없는 것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현재 가지고 있는 것을 찾아 보면 많은 가능성에 놀라게 됩니다.
우리에게는 빌립적인 요소와 안드레적인 요소가 동시에 있습니다. 처음에는 안드레와 같이 믿음으로 도전하다가 잘 안되면 빌립과 같이 되기 쉽습니다. 우리는 합리적인 세계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안드레와 같이 되는 것은 쉽지 않지만 빌립과 같이 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나에게 없는 200 데나리온을 생각하고 부정적이고 운명적인 생각에 사로잡히기 쉽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오병이어를 찾아야 합니다. 오병이어는 누구에게나 다 있습니다. 우리가 오병이어를 발견하고자 하면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 앞에 내 놓기가 부끄럽고 쑥스러워서 내 놓지 않는 것이 문제일 뿐입니다. 우리 가운데 평신도 목자님들은 토요일 오후 휘싱 역사를 오병이어를 드리는 마음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어떤 목자님은 새벽기도의 오병이어를 드리고 있습니다. 어떤 목자님은 물질을 오병이어로 드립니다. 어떤 목자님은 청소하는 오병이어를 드려서 공동체를 섬기고 있습니다. 이들이 매주 드리는 청소의 오병이어로 인해서 우리는 쾌적한 환경 가운데서 예배를 드립니다. 함께 일할 동역자가 없다고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섬길 양이 없다고 생각하기 보다 양을 얻기 위해서 찾도록 찾아야 합니다. 있는 꼬투리를 가지고 계속해서 복음을 전하다 보면 하나님께서 신실한 양을 붙여 주십니다. 선교 보고 대회 초청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찾아보면 초청할 사람이 한 두 사람은 반드시 있습니다. 환경 조건이 문제가 아니라 스피릿이 문제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내 자신이 바로 오병이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한없이 연약하고 부족한 자신을 바라보고 절망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백 데나리온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병이어를 원하시는 것을 통해 큰 힘을 얻습니다. 나는 부족하고 보잘것없는 자이지만 믿음으로 있는 모습 그대로 내 자신을 주님께 드리기만 하면 주님께서 이를 받으시고 축사하신다는 것을 생각할 때 이 한 몸 기쁨으로 드릴 수 있습니다. 내 자신을 주님께 드림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주님께 귀히 쓰임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II. 오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 (10-15)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어떻게 이 역사에 동참시키셨습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고 하심으로 안내 위원들로 쓰셨습니다. 오천 명을 오십씩, 백씩 자리에 앉히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먹이실 것을 믿고 제자들은 질서 정연하게 사람들을 자리에 앉혔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로 하여금 역사 환경을 만들도록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빌립이 허튼 소리를 했다고 저리로 가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도 함께 일하는 가운데 믿음을 배우도록 도우셨습니다.
제자들이 무리들을 자리에 앉혔을 때 예수님은 무엇을 하였습니까? 1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 예수님은 안드레가 가져온 오병이어를 받으시고 하나님에게 감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안드레의 것을 받지 않으셨다면 제자들은 이렇게 하면 안되는구나라고 생각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아주 작은 것이라도 받으셨을 때 안드레도 힘을 얻고 제자들도 이렇게 일해야 하는구나 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아무리 적은 것이라도 주님께 드릴 수 있고 주님께서 쓰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적은 것 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우리에게 큰 은혜요 힘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를 축복하신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희망이 됩니까? 우리는 현재 가지고 있는 오병이어를 무시하기가 얼마나 쉽습니까? 우리가 부스러기 같은 사람이라도 주님께서 위대하게 쓰신 예를 수 없이 많이 보아왔습니다. 또 부스러기 같은 은사라도 주님께서는 이것을 꼬투리로 큰 역사를 이루십니다. 문제는 힘든 시대 상황이 문제가 아니라 내 자신이 문제입니다. 런던 타임스에서 "무엇이 이 세상의 문제인가?”라는 주제로 원고를 청탁했을 때 체스터튼은 가장 간단하면서도 문제의 핵심을 짚어낸 글을 이렇게 써 보냈습니다. "편집장 귀하 ‘바로 내가 문제입니다.' 체스터튼 드림.” 나의 믿음이 없는 것이 문제요, 나의 기도가 부족한 것이 문제입니다. 내가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것이 문제요, 나의 목자의 심정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이를 회개하고 믿음으로 오병이어를 찾아서 주님께 드릴 때 주님께서 우리의 오병이어를 기쁘게 받으시고 넘치도록 축복해 주십니다.
이사무엘 선교사님은 미국과 독일을 개척할 당시에 이민가려는 사람들을 데려다가 지부장으로 세우고 선교 후보훈련을 시켜서 파송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무엘 선교사님의 오병이어를 받으시고 86개국 개척이라는 엄청난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우리가 큰 것만 하려고 하지 말고 작은 것이라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작은 요회라도 얼마든지 내용이 있게 운영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사정을 잘 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내라고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작은 선교 헌금, 십일조가 모여서 캠퍼스 개척과 세계 선교를 이루도록 축복하십니다. 우리가 이번에 세계 선교 보고 대회를 위해서 작정한 대로 헌금을 드리기를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이를 축사하시고 은혜가 넘치도록 축복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런데 안드레가 드린 것이 작다고 해서 성의없이 드린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그의 최선이었습니다. 그의 믿음과 헌신이 담긴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안드레가 드린 오병이어를 받으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자 제자들은 예수님께 받아서 무리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고기도 그렇게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자 제자들이 무리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결국 제자들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오천 명의 무리들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작고 보잘것없는 보리떡, 작은 물고기가 예수님의 손에 들려지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은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무리들은 허리띠를 풀고 마음껏 먹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푸른 잔디 위에서 먹는 음식 맛은 기가 막히게 맛있었습니다. 이런 풍성함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바로 예수님의 나누어 주는 정신에서 온 것입니다. UBF 정신은 나누어 주는 정신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을 열심히 나누어 줄 때 하나님께서는 이를 넘치게 축복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리들을 배불리 먹이신 후 제자들로 하여금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남은 빵과 고기를 모았을 때 열 두 광주리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했습니다.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그리고 억지로 예수님을 잡아 임금을 삼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빵의 메시야로 삼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위험성을 인식하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빵문제를 해결하러 오신 분이 아니라 인류를 죄와 사망 권세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믿고 영명을 얻도록 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기 절정의 때에 사람들의 요구보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을 위해서 고독하게 되셨습니다. 큰 일을 마친 이후에 예수님은 홀로 산에 가서 기도하심으로 하나님과 교제하시고 영적인 힘을 덧입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개인 기도 시간, 하나님과만 보내는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지치지 않고 구속 역사를 섬길 수 있었습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역사 방법과 제자 훈련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리보다 제자들을 키우는데 깊은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목자의 심정을 가진 사람들이요 믿음의 사람들이요 시대에 대한 책임감을 가진 지도자들이 되도록 키우셨습니다. 우리가 이번에 세계 선교 보고 대회를 오병이어를 드리는 믿음과 심정으로 섬겨서 6500명을 먹이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여름 수양회 초청 역사를 잘 준비하여 캠퍼스 지성인들을 생명의 양식으로 먹이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요한복음 6:1-15
요절 / 요한복음 6:11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많은 무리들을 섬기셨지만 주된 일은 열 두 제자를 지도자요 목자로 양성하는 일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지도자론이요 목자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굶주린 이 시대 양무리들을 어떻게 먹일 수 있는가 배우기를 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내 코가 석자인데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고 먹일 수 있는가 생각하고 자기와 자기 가족만을 위해 살아갑니다. 한 때 얼굴 없는 시인으로 불리었던 박노해 시인은 그의 책 "오늘은 다르게"에서 '나쁜 사람'을 '나뿐인 사람'으로 정의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생각지 않고 나만 생각하는 나뿐인 사람은 결국 나쁜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충북 음성군에 꽃동네가 있습니다. 이곳은 세상에서 의지할 곳 없고 얻어먹을 힘조차 없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봐주는 곳입니다. 이곳은 1976년 9월 12일 오웅진 신부님이 무극천 다리 밑에서 최기동 할아버지를 만남으로써 시작되었습니다. 최기동 할아버지는 자신도 걸인이지만 자기만을 위해 살지 않고 남의 밥을 얻어다가 동냥할 기력도 없는 걸인들을 먹여 주는 생활을 무려 40년 동안이나 감당했습니다. 오 신부님은 이에 충격을 받고 그날 즉시 주머니 돈 1,300원을 털어 시멘트를 사서 사랑의 집을 짓기 시작하여 무극촌 다리 밑에서 살던 걸인 18인을 맞아들이면서 꽃동네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크리스천은 이 시대의 목자요 영적 지도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어떻게 이 시대의 굶주린 영혼들을 먹일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축복하시고 귀히 쓰시는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I. 빌립을 시험하신 예수님(1-7)
그 후에 예수님은 갈릴리 바다 곧 디베랴 바다 건너편으로 가셨습니다. 그 후란 마가복음을 참고해 볼 때 제자들에게 전도 여행을 보내시고 그들이 돌아와 보고를 한 후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쉼이 필요함을 아시고 바다 건너편으로 가서 쉼을 갖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바다 건너편으로 건너가 산에 오르셨는데 그 곳은 지금의 골란 고원 남부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장소는 벳세다 광야라고도 부르는 고원으로서 산이 높지 않고 아늑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웠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가야 하는데 예수님께로 몰려 나왔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병인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동기는 표적을 보고자 함이었습니다. 표적은 예수님을 따르는 동기는 될 수 있지만 목적은 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붙잡고 예수님 자체를 배우고 믿는 단계로 나아가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고 표적만을 구하게 되면 영적으로 음란해지고 부패하게 됩니다. 요한복음은 그들이 표적을 보고 따른 결과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결국 다 떠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표적보다 말씀에 기초한 신앙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고 배우는 데서 자라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산에 앉아 있었는데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막 6:34절에 의하면 예수님은 자신에게 나아오는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로 가르치셨습니다. 목자 없는 양은 오늘날 엄마 없는 아이와 같습니다. 아이에게 엄마가 없으면 어떻게 될까요? 아이에게 어머니의 돌봄은 절대적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을 받으면서 자라지 못하는 아이는 반항적이 됩니다. 내면이 거칠어지고 황폐하게 됩니다. 또 육신적으로도 잔병에 시달리게 됩니다. 이와 같이 당시의 무리들은 영적인 양식이 없어 굶주리고 귀신들리고 거짓 선지자들에게 속아 넘어가고 방황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불쌍히 여기사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심으로 생명의 양식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육신적으로도 배고픔을 아시고 먹이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빌립에게 물으셨습니다.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5b)?” 예수님께서 이렇게 질문하신 목적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었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시험하고자 하셨을까요? 대개 시험 문제에는 함정도 있지만 힌트도 있습니다. 여기서 함정은 ‘어디서 살 것인가’ 입니다. 힌트는 ‘우리가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입니다. 어떤 시험이든 시험은 우리를 떨리게 합니다. 운전 면허 시험도 떨려서 떨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빌립을 시험하신 것은 일반적인 시험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이는 그를 곤경에 빠뜨리거나 그에게 불이익을 주고자 함이 아니라 그를 영적으로 업그레이드 시켜서 쓰실만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키우고자 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시험을 통해서 빌립이 얼마나 예수님을 믿고 있는가를 알아보고자 하였습니다. 선생님들은 시험을 통해서 자신이 학생들에게 올바로 가르쳤는가를 알아볼 수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과 표적을 통해서 자신이 누구인가를 끊임없이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빌립의 믿음이 얼마나 자랐는가를 알아보고자 하셨습니다. 빌립은 예수님께서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든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가까이에서 따르면서 그의 능력도 보았고 신성도 체험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나아온 오천 명을 먹여야 하는 실제 문제들을 통해서 그의 믿음이 시험을 받게 되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이 시험을 통해서 빌립에게 목자의 심정이 얼마나 있는가 알고 싶었습니다. 빌립은 매우 지성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지성인들은 그 많은 능력을 가지고 자기 만을 위해서 쓰고자 생각하기 쉽습니다. 즉 머리는 큰데 가슴은 빈약하기 쉽습니다. 예수님은 빌립이 이 시험을 통해서 자기 발견을 하고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바랐습니다.
빌립은 예수님께서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고 물으셨을 때 핵심을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핵심은 먹이는 것인데 빌립은 어디서 살 것인가로 고민했습니다. 그는 벳세다 사람이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이 지역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빌립은 IQ와 JQ는 높은데 EQ가 낮았습니다. 그는 무리들을 먹이고자 하는 마인드가 없었습니다. 빌립의 대답이 어떠했습니까? 7절을 보십시오.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그의 계산으로 당장에 2천만원의 돈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공동 기금에는 잔액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가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을 했지만 자기에게 없는 것만 생각했을 때 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빌립은 통계학적인 비관론자였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우리가 먹이게 하겠느냐고 물으셨는데 빌립은 예수님을 계산에 넣지 않고 생각했습니다. 빌립이 예수님을 생각했었더라면 생각하는 방향이 크게 달라졌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얼마 전에 가나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가 모자랐을 때 물로 포도주를 세 드럼 통이나 만들어 주시고 잔치를 풍성하게 하셨습니다. 이를 볼 때 빌립은 역사 의식이 부족했습니다. 그가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되자 예수님마저도 포기하시도록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빌립이 예수님의 마음을 파악하지 못했을 때 그의 머리는 안 되는 이유, 먹일 수 없는 이유, 할 수 없는 이유를 찾기에 바빴습니다. 우리도 양을 먹이고 싶은데 나에게는 시간이 없다, 돈이 없다, 능력이 없다, 지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해도 안 된다는 부정적인 생각 때문에 아예 도전할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늘 없는 것만 생각하고 자학하느라고 귀중한 시간을 다 허비해 버립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자를 쓰실 수 없고 축복하실 수 없습니다.
II. 안드레의 오병이어를 드리는 믿음(8-9)
안드레 하면 어딘지 모르게 멍하고 나사가 빠진 사람 같이 생각됩니다. 그러나 그는 위기의 순간에 믿음으로 위기를 타개해 나가는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빌립과 같이 스마트하지 못하고 외모나 인간 조건이 지도자답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가 시몬 베드로를 예수님께 데리고 왔을 때 예수님은 시몬에게는 큰 소망을 두시고 "장차 게바라 하리라"고 말씀하셨지만, 안드레는 본체만체 하셨습니다. 본문에서도 예수님께서 빌립에게는 말씀하셨지만 안드레에게는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안드레는 자학하거나 예수님께 섭섭한 감정을 품지 않았습니다. 그는 항상 믿음으로 생각하고 믿음으로 행동했습니다. 그는 곁에서 예수님과 빌립의 대화를 엿듣고 있다가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빌립이 안된다는 생각으로 고민에 빠져 있는 동안 안드레는 무리 가운데를 두루 찾아 다녔습니다. 그리고 한 어린 아이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무리들을 어찌하든지 먹이고자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시라면 하실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어린 아이가 먹기 위해서 가지고 온 것을 주님께 드리도록 설득을 했습니다. 어린 아이와 안드레는 순진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안드레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은 없지만 한 아이를 설득하여 오병이어를 주님께 드리도록 도왔습니다. 그는 오병이어를 예수님께 드리고 그 다음은 예수님께 맡겼습니다.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사실 안드레도 오천 명에 비해서 오병이어는 코딱지 만도 못한 분량이라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몇 사람이나 나누어 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심정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금융위기를 당했을 때 국민들이 금 모으기 운동에 동참했습니다. 그 운동을 통해서 국민들의 마음이 하나가 되었을 때 우리 나라는 금융 위기를 극복하고 놀라운 회복을 이루었습니다. 우리는 안드레가 주님께 드린 것이 사실 보잘것없는 것임을 잘 압니다. 그가 드린 떡은 개떡이었습니다. 고기도 어부가 값이 될 만한 것은 챙기고 버린 것을 가난한 사람들이 주워다가 먹는 것이었습니다. 또 그가 드린 것은 사실 자기 것도 아니었습니다. 한 어린 아이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작은 것을 주님께 드리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주님께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했습니다.
안드레는 매우 엉뚱한 사람 같습니다. 그러나 이런 엉뚱한 사람들이 일할 수 있는 분위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새로운 역사 창조가 이루어집니다. 그는 사실 가만히 있어도 될 것 같은데 일을 찾아서 했습니다. 그는 자발적으로 주님의 뜻을 찾아서 섬겼습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어서 귀히 쓰임받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없는 것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현재 가지고 있는 것을 찾아 보면 많은 가능성에 놀라게 됩니다.
우리에게는 빌립적인 요소와 안드레적인 요소가 동시에 있습니다. 처음에는 안드레와 같이 믿음으로 도전하다가 잘 안되면 빌립과 같이 되기 쉽습니다. 우리는 합리적인 세계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안드레와 같이 되는 것은 쉽지 않지만 빌립과 같이 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나에게 없는 200 데나리온을 생각하고 부정적이고 운명적인 생각에 사로잡히기 쉽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오병이어를 찾아야 합니다. 오병이어는 누구에게나 다 있습니다. 우리가 오병이어를 발견하고자 하면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 앞에 내 놓기가 부끄럽고 쑥스러워서 내 놓지 않는 것이 문제일 뿐입니다. 우리 가운데 평신도 목자님들은 토요일 오후 휘싱 역사를 오병이어를 드리는 마음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어떤 목자님은 새벽기도의 오병이어를 드리고 있습니다. 어떤 목자님은 물질을 오병이어로 드립니다. 어떤 목자님은 청소하는 오병이어를 드려서 공동체를 섬기고 있습니다. 이들이 매주 드리는 청소의 오병이어로 인해서 우리는 쾌적한 환경 가운데서 예배를 드립니다. 함께 일할 동역자가 없다고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섬길 양이 없다고 생각하기 보다 양을 얻기 위해서 찾도록 찾아야 합니다. 있는 꼬투리를 가지고 계속해서 복음을 전하다 보면 하나님께서 신실한 양을 붙여 주십니다. 선교 보고 대회 초청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찾아보면 초청할 사람이 한 두 사람은 반드시 있습니다. 환경 조건이 문제가 아니라 스피릿이 문제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내 자신이 바로 오병이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한없이 연약하고 부족한 자신을 바라보고 절망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백 데나리온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병이어를 원하시는 것을 통해 큰 힘을 얻습니다. 나는 부족하고 보잘것없는 자이지만 믿음으로 있는 모습 그대로 내 자신을 주님께 드리기만 하면 주님께서 이를 받으시고 축사하신다는 것을 생각할 때 이 한 몸 기쁨으로 드릴 수 있습니다. 내 자신을 주님께 드림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주님께 귀히 쓰임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II. 오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 (10-15)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어떻게 이 역사에 동참시키셨습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고 하심으로 안내 위원들로 쓰셨습니다. 오천 명을 오십씩, 백씩 자리에 앉히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먹이실 것을 믿고 제자들은 질서 정연하게 사람들을 자리에 앉혔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로 하여금 역사 환경을 만들도록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빌립이 허튼 소리를 했다고 저리로 가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도 함께 일하는 가운데 믿음을 배우도록 도우셨습니다.
제자들이 무리들을 자리에 앉혔을 때 예수님은 무엇을 하였습니까? 1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 예수님은 안드레가 가져온 오병이어를 받으시고 하나님에게 감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안드레의 것을 받지 않으셨다면 제자들은 이렇게 하면 안되는구나라고 생각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아주 작은 것이라도 받으셨을 때 안드레도 힘을 얻고 제자들도 이렇게 일해야 하는구나 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아무리 적은 것이라도 주님께 드릴 수 있고 주님께서 쓰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적은 것 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우리에게 큰 은혜요 힘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를 축복하신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희망이 됩니까? 우리는 현재 가지고 있는 오병이어를 무시하기가 얼마나 쉽습니까? 우리가 부스러기 같은 사람이라도 주님께서 위대하게 쓰신 예를 수 없이 많이 보아왔습니다. 또 부스러기 같은 은사라도 주님께서는 이것을 꼬투리로 큰 역사를 이루십니다. 문제는 힘든 시대 상황이 문제가 아니라 내 자신이 문제입니다. 런던 타임스에서 "무엇이 이 세상의 문제인가?”라는 주제로 원고를 청탁했을 때 체스터튼은 가장 간단하면서도 문제의 핵심을 짚어낸 글을 이렇게 써 보냈습니다. "편집장 귀하 ‘바로 내가 문제입니다.' 체스터튼 드림.” 나의 믿음이 없는 것이 문제요, 나의 기도가 부족한 것이 문제입니다. 내가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것이 문제요, 나의 목자의 심정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이를 회개하고 믿음으로 오병이어를 찾아서 주님께 드릴 때 주님께서 우리의 오병이어를 기쁘게 받으시고 넘치도록 축복해 주십니다.
이사무엘 선교사님은 미국과 독일을 개척할 당시에 이민가려는 사람들을 데려다가 지부장으로 세우고 선교 후보훈련을 시켜서 파송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무엘 선교사님의 오병이어를 받으시고 86개국 개척이라는 엄청난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우리가 큰 것만 하려고 하지 말고 작은 것이라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작은 요회라도 얼마든지 내용이 있게 운영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사정을 잘 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내라고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작은 선교 헌금, 십일조가 모여서 캠퍼스 개척과 세계 선교를 이루도록 축복하십니다. 우리가 이번에 세계 선교 보고 대회를 위해서 작정한 대로 헌금을 드리기를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이를 축사하시고 은혜가 넘치도록 축복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런데 안드레가 드린 것이 작다고 해서 성의없이 드린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그의 최선이었습니다. 그의 믿음과 헌신이 담긴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안드레가 드린 오병이어를 받으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자 제자들은 예수님께 받아서 무리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고기도 그렇게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자 제자들이 무리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결국 제자들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오천 명의 무리들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작고 보잘것없는 보리떡, 작은 물고기가 예수님의 손에 들려지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은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무리들은 허리띠를 풀고 마음껏 먹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푸른 잔디 위에서 먹는 음식 맛은 기가 막히게 맛있었습니다. 이런 풍성함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바로 예수님의 나누어 주는 정신에서 온 것입니다. UBF 정신은 나누어 주는 정신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을 열심히 나누어 줄 때 하나님께서는 이를 넘치게 축복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리들을 배불리 먹이신 후 제자들로 하여금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남은 빵과 고기를 모았을 때 열 두 광주리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했습니다.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그리고 억지로 예수님을 잡아 임금을 삼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빵의 메시야로 삼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위험성을 인식하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빵문제를 해결하러 오신 분이 아니라 인류를 죄와 사망 권세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믿고 영명을 얻도록 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기 절정의 때에 사람들의 요구보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을 위해서 고독하게 되셨습니다. 큰 일을 마친 이후에 예수님은 홀로 산에 가서 기도하심으로 하나님과 교제하시고 영적인 힘을 덧입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개인 기도 시간, 하나님과만 보내는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지치지 않고 구속 역사를 섬길 수 있었습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역사 방법과 제자 훈련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리보다 제자들을 키우는데 깊은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목자의 심정을 가진 사람들이요 믿음의 사람들이요 시대에 대한 책임감을 가진 지도자들이 되도록 키우셨습니다. 우리가 이번에 세계 선교 보고 대회를 오병이어를 드리는 믿음과 심정으로 섬겨서 6500명을 먹이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여름 수양회 초청 역사를 잘 준비하여 캠퍼스 지성인들을 생명의 양식으로 먹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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