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요8강(5:1-15)/일어나 걸어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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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요한복음 제 8 강
말씀 / 요한복음 5:1-15
요절 / 요한복음 5:8
일어나 걸어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우리는 요한복음에서 대표적인 사람들이 나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니고데모는 모든 지성인들의 대표이고 사마리아 여인은 목마른 사람들의 대표이고 본문에 나오는 38병자는 모든 병자들의 대표격입니다. 그는 38년 동안 누워서 지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모든 것을 다스리라."고 하셨는데 그는 병, 약함, 무력함으로 인해 번성하지 못하고 충만하지 못하고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를 회복하기 위해서 찾아오셨습니다. 그가 건강해져서 생육하고 정복하는 인생을 살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고치기 전에 먼저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으로 그를 고치셨습니다. 이 시간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서 오래된 병에서 나음을 받고 생육하며 번성하고 정복하는 새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명절이 있어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이 명절은 오순절이라고 하는데 칠칠절이나 맥추절로도 부릅니다. 이는 밀을 추수하는 것을 감사해서 지낸 명절입니다. 후기의 유대교에서는 모세가 율법을 받은 것을 기념하여 만들어졌다고 재해석을 하였습니다. 맥추절은 우리 나라의 추석과 같이 모든 것이 풍성한 명절이었습니다. 이런 명절에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는 못이 있는데 거기에 가셨습니다. 그곳은 행각 다섯이 있었습니다. 이 못은 가로 100m 세로 60m나 되는 간헐천이었습니다. 이 곳에는 네 귀퉁이와 가운데, 행각 다섯이 있었습니다. 행각은 지붕과 기둥만 있고 벽은 없는 쉼터였습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연못의 아름다움을 즐기기 위해서 온 행락객들 대신 수많은 병자들이 누워 있었습니다.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물의 동함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불치병 환자들이었습니다. 이곳에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되었습니다. 가끔 가다 물이 동할 때에 들어가면 낫는다고 해서 이곳 이름이 베데스다 곧 자비의 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의 분위기는 그렇게 자비롭지 못했습니다. 가끔 물이 동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항상 긴장하고 있어야 했습니다. 서로 가장 먼저 물에 들어가기 위해서 경쟁해야 했습니다. 평소에 사이가 좋더라도 물이 동할 때만큼은 한치도 양보할 수 없었습니다. 이로 인해 사람들 사이에 불신이 생기고 눈치를 보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기적이고 사랑이 메마른 비정한 사회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명절이 되어 바깥 세상이 축제 분위기인데 비해서 자신들을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고질병으로 누워 있어서 사람들에게 부담만 된다는 생각을 하니 명절이 더욱 싫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명절에 소외된 그들을 찾아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찾아가셨다는 자체가 복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곳에 가보니 병자들이 물 가까이에 몰려서 누워 있었습니다. 그들은 물이 동하는 낌새만 나도 연못 속에 뛰어 들었습니다. 물이 한번 동할 때마다 연못 속은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연못 속에 먼저 들어가고자 다이빙하고 구르고 기는 사람들의 소리와 경쟁하는 모습은 치열하였습니다. 그리고 승리의 V자를 그리며 웃음띤 얼굴을 하고 나오는 한 사람이 있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패배감 속에 흙탕물을 먹으며 나와야 했습니다. 흙탕물을 먹으면서 살려달라고 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러기를 몇 차례씩 하면서 사람들의 웃음 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나중에는 창피해서 시도도 하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베데스다의 못 가는 여러 가지 점에서 인간 세상의 모습과 같습니다. 경쟁을 하다가 간발의 차이로 못 들어 가기 때문에 사람들은 다시 도전을 하다가 인생을 허비합니다. 그리고 그런 경쟁에서 낙오한 사람들은 대부분 누워 있게 됩니다. 경쟁이 없는 데는 무덤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은 경쟁에서 승리를 해도 힘이 듭니다. 승리자를 넘어뜨리고자 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도전을 끊임없이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가운데 오노와 같은 경쟁자도 있습니다. 그리고 2등은 울어야 하는 사회입니다. 2등은 별로 인정을 받지 못하기때문입니다. 이러한 경쟁으로 인해서 사회는 불신과 배신, 경계하는 마음과 미움이 생깁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속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꽃들에게 희망』을 이라는 이야기에서 보듯이 꼭대기에 올라갈수록 사람들은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조용하고 움직이지를 않습니다. 위에 있는 사람을 떨어뜨려야만 올라갈 수 있기 때문에 살벌합니다. 우리 사회는 글로벌 경쟁 체제가 되면서 더욱 피곤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경쟁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 주말에는 광란의 밤을 보냅니다.
예수님께서 심방하신 곳에 38년된 병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38년 동안이나 앓고 있으면서 서른 여덟번의 진절머리 나는 봄 여름 가을과 겨울을 고통과 질병 가운데서 견뎌내야만 했습니다. 그는 베데스다 못가에서 다른 사람들이 병이 나아 기뻐하며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아왔습니다. 그러나 자신에게는 치유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친구도 없고 스스로도 어찌할 도리가 없이 아무런 희망도 없이 기적이 일어나는 연못가에 누워있었습니다. 그는 살았으나 사실은 죽은 자였습니다. 그는 죄 아래 있는 인간의 모습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를 어떻게 도우셨습니까?
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예수님은 그의 누운 폼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문제가 무엇인가를 보시고 물으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를 원어로 보면 “네가 낫고자 하는 의지가 있느냐?”하는 뜻으로서 낫고자 하는 소원을 심어주는 질문입니다. 이 사람의 문제는 낫고자 하는 소원을 잃어버린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고질병에서 고침을 받으려면 낫고자 하는 소원이 있어야 합니다. 강한 소원은 평범한 사람을 비범한 사람으로 변화시킵니다. 벤 호간이란 사람은 골프 선수였는데 게임의 절정기에 교통 사고를 당했습니다. 의사는 그에게 당신은 전문적인 골프 선수로서의 생활은 끝났으며 다시 걷게 되면 그것 만으로도 천만 다행한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의사는 벤 호간의 의지와 소원을 계산에 넣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는 처음 고통스러운 몇 걸음을 걸을 수 있게 되자마자 위대한 골프선수가 되겠다는 꿈을 소생시켰습니다. 그는 두 손으로 끊임없이 연습을 했습니다. 집에서 겨우 설 수 있는 정도의 두 다리로 버티고 서서 골프채를 휘두르는 연습을 했습니다. 그는 결국 골프계로 복귀하게 되었습니다. 강렬한 소원은 평범한 사람과 챔피언을 구별지어주는 요소입니다. 예수님은 38병자의 마음에 낫고자 하는 소원을 강렬하게 일으키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하는 예수님의 질문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소망을 보게 됩니다. 이 질문은 마치 꺼져가는 심지에 불을 지르는 것과 같았습니다. 예수님은 병든 사람을 결코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만약 병든 자 보고 왜 이렇게 병이 들었느냐고 책망한다면 그는 찌그러 들고 말 것입니다. 그는 오랫동안 실패를 반복하는 가운데 나는 해도 안된다는 생각에 지배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 물으심으로 그가 자기 발견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질문을 받고 절망이 되었습니다. 낫고자 하는 소원을 잃어버린 자신을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신에 대해서 절망을 해야 믿음을 갖게 됩니다. 낫고자 하는 소원 조차도 없는 자신을 발견했을 때 그는 충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시간 내가 나음 받아야 하는 병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질문에 대한 그 병자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7절을 보십시오.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우리는 이것을 “패배자의 변명”이라고 부릅니다. 그는 “예, 낫고 싶습니다. 나를 도와주십시오.”라고 말해야 하지만 불평으로 가득 찬 말을 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문제가 나를 도와 줄 사람이 없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물이 동할 때에 누가 이런 사람을 못에 넣어 주겠습니까? 그는 사람에 대한 의존심과 잘못된 기대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는 사람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합니다. “만일 누가 내게 큰 상금을 준다면 일시에 빚을 다 갚고도 은행에 일억원을 예금할 수 있게 된다면 나는 남은 인생은 내 스스로 살아갈 수 있을텐데” 불행한 일은 많은 사람들이 이 말을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누군가가 다가와서 그들에게 그런 출발을 하게 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자기를 팍팍 밀어주는 사람이 없어서 자신은 성공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동역자가 없어서 하나님의 일을 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기를 도와주지 않는 불특정 다수를 원망합니다. 그는 사람을 모르고, 자기를 모르기 때문에 이렇게 무기력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자기보다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는 것이 문제라고 말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잘하기 때문에 자기가 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는 패배적인 생각입니다.
사람들은 이와 같이 베데스다적인 사고 방식에 물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힘을 얻어서 일등으로 못에 들어가고자 하는 생각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부정적인 생각, 소극적인 생각을 극복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방법으로 일하십니다. 예수님 안에서는 경쟁할 필요가 없이 누구나 나음을 받을 수 있고 승리자가 될 수 있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이 말씀은 3중 명령으로 되어 있습니다. “일어나라! 네 자리를 들어라! 그리고 걸어가라!” 이 가운데 특별히 “일어나라!”는 명령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음성은 생명을 주는 음성이요 선한 목자의 상한 심정에서 나오는 음성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 사람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대가라도 치루고자 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일어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가 하나님만 믿고 자립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자립하는 것이 가장 행복한 삶을 사는 지름길 입니다. 왜냐하면 자립적인 믿음이 있을 때 무엇이든지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이 말씀 가운데는 그에게 두신 예수님의 소망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사람을 의존하고 불평하며 무기력하게 누워있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가 패배주의와 운명주의에 빠져 있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슬프시게 하고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는 쓸모없는 자가 되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일어나 자립적이고 개척적인 인생,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인생,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나누어주는 위대한 사명인의 인생을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면 움직일 수도 없는 그가 어떻게 일어날 수 있습니까? 우선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렇게 된 자신을 생각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음과 동시에 믿음으로 순종했습니다. 그가 순종했을 때 온 몸에 힘이 생겼습니다. 그는 치료되었습니다. 그는 쓸모없는 사람이었지만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일어났습니다. 그는 운명주의를 물리치고 예수님으로부터 새 생명을 받았습니다. 그는 의존심과 패배와 운명의 돗자리를 들고 당당히 걸어갔습니다. 그는 하나님 만을 의지하고 힘차게 믿음으로 걸어갔습니다. 5:25절은 말씀합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저는 한 가지를 하면 꾸준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성적도 한번에 팍 뛰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올라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게는 적당주의가 있었습니다. 양을 치는 것이나 제자 양성하는 것이나 영어를 공부하는 것이나 강렬한 열망을 가지고 하기 보다 적당히 하였습니다. 시작하면 끝장을 보는 자세로 일하는 것이 부족하였습니다. 우리가 펌프질을 시작하다가 물이 나오지 않는다고 적당히 하면 물이 올라오다가 밑으로 빠져 버립니다. 그러나 물을 붓고 빠른 속도로 그리고 꾸준히 하다 보면 물이 콸콸 흘러 나옵니다. 일단 물이 흘러 나오기 시작하면 일정한 압력을 유지하기만 해도 원하는 물을 모두 얻을 수 있습니다. 기관차를 출발하게 하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일단 움직이기 시작하면 계속 가기는 출발할 때보다 훨씬 적은 연료가 듭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당장 일어나라고 하셨습니다. 누운 자리를 번쩍 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힘차게 걸어가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휘싱을 하든지 제자 양성을 하든지 영어를 공부하든지 강렬한 소원을 가지고 열심히 그리고 꾸준히 하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쓸만한 주님의 일꾼들을 키우고 본국에 찾아오는 이방 목자들과 영어로 일 대 일을 하고 메시지를 전하는 수준으로까지 자라기를 기도합니다.
38병자가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자 유대인들이 병나은 사람을 판단했습니다.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진 놀라운 역사를 보고도 하나님께 감사하기 보다 장로들의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병 나은 사람더러 계속해서 누워있으라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병 나은 사람이 다시 힘들면 누울 수 있기 때문에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한 것입니다. 그 사람은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했다고 대답했습니다. 이때 유대인들은 “너더러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한 사람이 누구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미 피하셨기 때문에 그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 후에 그는 성전에 가서 건강진단을 받고 하나님께 감사제를 드리고자 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그를 만나셨습니다. 만났다는 것은 헬라어로 예수님께서 간절히 찾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믿음이 자라도록 계속해서 돌봐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한가지 경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이 말씀을 볼 때 구원의 은혜를 감당하는 것이 중요함을 배우게 됩니다. 은혜를 배반하는 것은 가장 큰 죄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병에서 나음을 입고 나서 적극적으로 자기와의 투쟁을 해야 했습니다. 의지적인 투쟁을 해야 했습니다. 은혜를 받고 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나서 투쟁하는 법을 모르기 때문에 믿음이 성장하지 못하고 비참해 집니다. 은혜를 받고 나서 자기가 감당해야 할 것을 감당할 때 어미의 심정, 목자의 심정을 배우고 고난과 십자가를 사랑하게 됩니다. 중풍병자는 나음을 받은 후에 무기력하게 누워있지 말고 적극적으로 감사하며 사명을 감당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15절을 보십시오.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그는 유대인들의 압박을 견디지 못해서 예수님을 고자질했습니다. 그는 자기 손해를 보지 않으려고 배은망덕한 행동을 했습니다. 이를 볼 때 감사하는 생활, 은혜를 기억하는 생활이 얼마나 중요한가 배우게 됩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은 후에 또 나음 받은 후에 시련이 옵니다. 그 시련은 사실 믿음의 연단을 주고 성장하는 계기가 됩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병든 사회 병든 인간에게 오셔서 치료하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이 시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말씀 / 요한복음 5:1-15
요절 / 요한복음 5:8
일어나 걸어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우리는 요한복음에서 대표적인 사람들이 나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니고데모는 모든 지성인들의 대표이고 사마리아 여인은 목마른 사람들의 대표이고 본문에 나오는 38병자는 모든 병자들의 대표격입니다. 그는 38년 동안 누워서 지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모든 것을 다스리라."고 하셨는데 그는 병, 약함, 무력함으로 인해 번성하지 못하고 충만하지 못하고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를 회복하기 위해서 찾아오셨습니다. 그가 건강해져서 생육하고 정복하는 인생을 살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고치기 전에 먼저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으로 그를 고치셨습니다. 이 시간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서 오래된 병에서 나음을 받고 생육하며 번성하고 정복하는 새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명절이 있어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이 명절은 오순절이라고 하는데 칠칠절이나 맥추절로도 부릅니다. 이는 밀을 추수하는 것을 감사해서 지낸 명절입니다. 후기의 유대교에서는 모세가 율법을 받은 것을 기념하여 만들어졌다고 재해석을 하였습니다. 맥추절은 우리 나라의 추석과 같이 모든 것이 풍성한 명절이었습니다. 이런 명절에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는 못이 있는데 거기에 가셨습니다. 그곳은 행각 다섯이 있었습니다. 이 못은 가로 100m 세로 60m나 되는 간헐천이었습니다. 이 곳에는 네 귀퉁이와 가운데, 행각 다섯이 있었습니다. 행각은 지붕과 기둥만 있고 벽은 없는 쉼터였습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연못의 아름다움을 즐기기 위해서 온 행락객들 대신 수많은 병자들이 누워 있었습니다.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물의 동함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불치병 환자들이었습니다. 이곳에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되었습니다. 가끔 가다 물이 동할 때에 들어가면 낫는다고 해서 이곳 이름이 베데스다 곧 자비의 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의 분위기는 그렇게 자비롭지 못했습니다. 가끔 물이 동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항상 긴장하고 있어야 했습니다. 서로 가장 먼저 물에 들어가기 위해서 경쟁해야 했습니다. 평소에 사이가 좋더라도 물이 동할 때만큼은 한치도 양보할 수 없었습니다. 이로 인해 사람들 사이에 불신이 생기고 눈치를 보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기적이고 사랑이 메마른 비정한 사회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명절이 되어 바깥 세상이 축제 분위기인데 비해서 자신들을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고질병으로 누워 있어서 사람들에게 부담만 된다는 생각을 하니 명절이 더욱 싫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명절에 소외된 그들을 찾아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찾아가셨다는 자체가 복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곳에 가보니 병자들이 물 가까이에 몰려서 누워 있었습니다. 그들은 물이 동하는 낌새만 나도 연못 속에 뛰어 들었습니다. 물이 한번 동할 때마다 연못 속은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연못 속에 먼저 들어가고자 다이빙하고 구르고 기는 사람들의 소리와 경쟁하는 모습은 치열하였습니다. 그리고 승리의 V자를 그리며 웃음띤 얼굴을 하고 나오는 한 사람이 있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패배감 속에 흙탕물을 먹으며 나와야 했습니다. 흙탕물을 먹으면서 살려달라고 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러기를 몇 차례씩 하면서 사람들의 웃음 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나중에는 창피해서 시도도 하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베데스다의 못 가는 여러 가지 점에서 인간 세상의 모습과 같습니다. 경쟁을 하다가 간발의 차이로 못 들어 가기 때문에 사람들은 다시 도전을 하다가 인생을 허비합니다. 그리고 그런 경쟁에서 낙오한 사람들은 대부분 누워 있게 됩니다. 경쟁이 없는 데는 무덤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은 경쟁에서 승리를 해도 힘이 듭니다. 승리자를 넘어뜨리고자 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도전을 끊임없이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가운데 오노와 같은 경쟁자도 있습니다. 그리고 2등은 울어야 하는 사회입니다. 2등은 별로 인정을 받지 못하기때문입니다. 이러한 경쟁으로 인해서 사회는 불신과 배신, 경계하는 마음과 미움이 생깁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속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꽃들에게 희망』을 이라는 이야기에서 보듯이 꼭대기에 올라갈수록 사람들은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조용하고 움직이지를 않습니다. 위에 있는 사람을 떨어뜨려야만 올라갈 수 있기 때문에 살벌합니다. 우리 사회는 글로벌 경쟁 체제가 되면서 더욱 피곤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경쟁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 주말에는 광란의 밤을 보냅니다.
예수님께서 심방하신 곳에 38년된 병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38년 동안이나 앓고 있으면서 서른 여덟번의 진절머리 나는 봄 여름 가을과 겨울을 고통과 질병 가운데서 견뎌내야만 했습니다. 그는 베데스다 못가에서 다른 사람들이 병이 나아 기뻐하며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아왔습니다. 그러나 자신에게는 치유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친구도 없고 스스로도 어찌할 도리가 없이 아무런 희망도 없이 기적이 일어나는 연못가에 누워있었습니다. 그는 살았으나 사실은 죽은 자였습니다. 그는 죄 아래 있는 인간의 모습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를 어떻게 도우셨습니까?
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예수님은 그의 누운 폼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문제가 무엇인가를 보시고 물으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를 원어로 보면 “네가 낫고자 하는 의지가 있느냐?”하는 뜻으로서 낫고자 하는 소원을 심어주는 질문입니다. 이 사람의 문제는 낫고자 하는 소원을 잃어버린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고질병에서 고침을 받으려면 낫고자 하는 소원이 있어야 합니다. 강한 소원은 평범한 사람을 비범한 사람으로 변화시킵니다. 벤 호간이란 사람은 골프 선수였는데 게임의 절정기에 교통 사고를 당했습니다. 의사는 그에게 당신은 전문적인 골프 선수로서의 생활은 끝났으며 다시 걷게 되면 그것 만으로도 천만 다행한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의사는 벤 호간의 의지와 소원을 계산에 넣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는 처음 고통스러운 몇 걸음을 걸을 수 있게 되자마자 위대한 골프선수가 되겠다는 꿈을 소생시켰습니다. 그는 두 손으로 끊임없이 연습을 했습니다. 집에서 겨우 설 수 있는 정도의 두 다리로 버티고 서서 골프채를 휘두르는 연습을 했습니다. 그는 결국 골프계로 복귀하게 되었습니다. 강렬한 소원은 평범한 사람과 챔피언을 구별지어주는 요소입니다. 예수님은 38병자의 마음에 낫고자 하는 소원을 강렬하게 일으키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하는 예수님의 질문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소망을 보게 됩니다. 이 질문은 마치 꺼져가는 심지에 불을 지르는 것과 같았습니다. 예수님은 병든 사람을 결코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만약 병든 자 보고 왜 이렇게 병이 들었느냐고 책망한다면 그는 찌그러 들고 말 것입니다. 그는 오랫동안 실패를 반복하는 가운데 나는 해도 안된다는 생각에 지배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 물으심으로 그가 자기 발견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질문을 받고 절망이 되었습니다. 낫고자 하는 소원을 잃어버린 자신을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신에 대해서 절망을 해야 믿음을 갖게 됩니다. 낫고자 하는 소원 조차도 없는 자신을 발견했을 때 그는 충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시간 내가 나음 받아야 하는 병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질문에 대한 그 병자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7절을 보십시오.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우리는 이것을 “패배자의 변명”이라고 부릅니다. 그는 “예, 낫고 싶습니다. 나를 도와주십시오.”라고 말해야 하지만 불평으로 가득 찬 말을 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문제가 나를 도와 줄 사람이 없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물이 동할 때에 누가 이런 사람을 못에 넣어 주겠습니까? 그는 사람에 대한 의존심과 잘못된 기대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는 사람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합니다. “만일 누가 내게 큰 상금을 준다면 일시에 빚을 다 갚고도 은행에 일억원을 예금할 수 있게 된다면 나는 남은 인생은 내 스스로 살아갈 수 있을텐데” 불행한 일은 많은 사람들이 이 말을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누군가가 다가와서 그들에게 그런 출발을 하게 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자기를 팍팍 밀어주는 사람이 없어서 자신은 성공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동역자가 없어서 하나님의 일을 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기를 도와주지 않는 불특정 다수를 원망합니다. 그는 사람을 모르고, 자기를 모르기 때문에 이렇게 무기력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자기보다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는 것이 문제라고 말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잘하기 때문에 자기가 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는 패배적인 생각입니다.
사람들은 이와 같이 베데스다적인 사고 방식에 물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힘을 얻어서 일등으로 못에 들어가고자 하는 생각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부정적인 생각, 소극적인 생각을 극복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방법으로 일하십니다. 예수님 안에서는 경쟁할 필요가 없이 누구나 나음을 받을 수 있고 승리자가 될 수 있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이 말씀은 3중 명령으로 되어 있습니다. “일어나라! 네 자리를 들어라! 그리고 걸어가라!” 이 가운데 특별히 “일어나라!”는 명령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음성은 생명을 주는 음성이요 선한 목자의 상한 심정에서 나오는 음성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 사람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대가라도 치루고자 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일어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가 하나님만 믿고 자립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자립하는 것이 가장 행복한 삶을 사는 지름길 입니다. 왜냐하면 자립적인 믿음이 있을 때 무엇이든지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이 말씀 가운데는 그에게 두신 예수님의 소망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사람을 의존하고 불평하며 무기력하게 누워있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가 패배주의와 운명주의에 빠져 있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슬프시게 하고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는 쓸모없는 자가 되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일어나 자립적이고 개척적인 인생,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인생,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나누어주는 위대한 사명인의 인생을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면 움직일 수도 없는 그가 어떻게 일어날 수 있습니까? 우선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렇게 된 자신을 생각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음과 동시에 믿음으로 순종했습니다. 그가 순종했을 때 온 몸에 힘이 생겼습니다. 그는 치료되었습니다. 그는 쓸모없는 사람이었지만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일어났습니다. 그는 운명주의를 물리치고 예수님으로부터 새 생명을 받았습니다. 그는 의존심과 패배와 운명의 돗자리를 들고 당당히 걸어갔습니다. 그는 하나님 만을 의지하고 힘차게 믿음으로 걸어갔습니다. 5:25절은 말씀합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저는 한 가지를 하면 꾸준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성적도 한번에 팍 뛰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올라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게는 적당주의가 있었습니다. 양을 치는 것이나 제자 양성하는 것이나 영어를 공부하는 것이나 강렬한 열망을 가지고 하기 보다 적당히 하였습니다. 시작하면 끝장을 보는 자세로 일하는 것이 부족하였습니다. 우리가 펌프질을 시작하다가 물이 나오지 않는다고 적당히 하면 물이 올라오다가 밑으로 빠져 버립니다. 그러나 물을 붓고 빠른 속도로 그리고 꾸준히 하다 보면 물이 콸콸 흘러 나옵니다. 일단 물이 흘러 나오기 시작하면 일정한 압력을 유지하기만 해도 원하는 물을 모두 얻을 수 있습니다. 기관차를 출발하게 하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일단 움직이기 시작하면 계속 가기는 출발할 때보다 훨씬 적은 연료가 듭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당장 일어나라고 하셨습니다. 누운 자리를 번쩍 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힘차게 걸어가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휘싱을 하든지 제자 양성을 하든지 영어를 공부하든지 강렬한 소원을 가지고 열심히 그리고 꾸준히 하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쓸만한 주님의 일꾼들을 키우고 본국에 찾아오는 이방 목자들과 영어로 일 대 일을 하고 메시지를 전하는 수준으로까지 자라기를 기도합니다.
38병자가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자 유대인들이 병나은 사람을 판단했습니다.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진 놀라운 역사를 보고도 하나님께 감사하기 보다 장로들의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병 나은 사람더러 계속해서 누워있으라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병 나은 사람이 다시 힘들면 누울 수 있기 때문에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한 것입니다. 그 사람은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했다고 대답했습니다. 이때 유대인들은 “너더러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한 사람이 누구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미 피하셨기 때문에 그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 후에 그는 성전에 가서 건강진단을 받고 하나님께 감사제를 드리고자 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그를 만나셨습니다. 만났다는 것은 헬라어로 예수님께서 간절히 찾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믿음이 자라도록 계속해서 돌봐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한가지 경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이 말씀을 볼 때 구원의 은혜를 감당하는 것이 중요함을 배우게 됩니다. 은혜를 배반하는 것은 가장 큰 죄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병에서 나음을 입고 나서 적극적으로 자기와의 투쟁을 해야 했습니다. 의지적인 투쟁을 해야 했습니다. 은혜를 받고 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나서 투쟁하는 법을 모르기 때문에 믿음이 성장하지 못하고 비참해 집니다. 은혜를 받고 나서 자기가 감당해야 할 것을 감당할 때 어미의 심정, 목자의 심정을 배우고 고난과 십자가를 사랑하게 됩니다. 중풍병자는 나음을 받은 후에 무기력하게 누워있지 말고 적극적으로 감사하며 사명을 감당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15절을 보십시오.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그는 유대인들의 압박을 견디지 못해서 예수님을 고자질했습니다. 그는 자기 손해를 보지 않으려고 배은망덕한 행동을 했습니다. 이를 볼 때 감사하는 생활, 은혜를 기억하는 생활이 얼마나 중요한가 배우게 됩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은 후에 또 나음 받은 후에 시련이 옵니다. 그 시련은 사실 믿음의 연단을 주고 성장하는 계기가 됩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병든 사회 병든 인간에게 오셔서 치료하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이 시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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