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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요7강(4:31-54)/눈을 들어 밭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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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섬김이
댓글 0건 조회 3,863회 작성일 03-02-03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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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봄학기 요한복음 제 7 강                         
말씀/요한복음 4:31-54
요절/요한복음 4:35
눈을 들어 밭을 보라
“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의 변화를 통해서 사마리아 지역이 복음화될 비전을 보셨습니다. 우리가 영적인 눈을 떠서 이 시대를 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예수님의 양식(30-34).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하고 있을 때 제자들이 돌아왔습니다. 제자들이 음식을 권했을 때 예수님은 이상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32).” 제자들은 서로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사마리아 여인이 갖다 드렸는가? 그러자 예수님은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34).”고 말씀하셨습니다. 양식을 먹을 때 우리는 힘을 얻고 만족을 누리고 일할 의욕을 얻게 됩니다. 반대로 양식을 먹지 못하면 마음이 슬프고 힘이 없습니다. 또 오래 양식을 먹지 못하면 사단의 시험에 들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육의 양식과 함께 영의 양식을 때를 따라서 먹어야 합니다. 영의 양식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말씀을 신령한 양식이라고 하였습니다(벧전2:2).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으로 양식을 삼으셨습니다. 우리가 밥을 먹지 않으면 죽습니다. 예수님은 한 양을 먹임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자신의 생명 자체보다 더 중요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6:39,40).” 예수님은 잃어버린 자들을 찾으실 뿐 아니라 보전하는 일에 전념하셨습니다. 우리가 새양을 얻어서 일 대 일을 할 때 말할 수 없는 기쁨이 있습니다. 또 양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을 볼 때 기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대로 사는 것을 얼마나 기뻐하시는가 알 수 있습니다. 그때는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고 만족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한 사마리아 여인의 변화를 인하여 기뻐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회개하고 돌아올 때 하늘에서는 천국 잔치가 벌어진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서 일해야 합니다. 우리가 캠퍼스에서 복음을 전할 때 양들이 이를 잘 영접하면 기쁨이 있습니다. 그런데 거절하면 낙담이 됩니다. 상처가 됩니다. 절망이 됩니다. 그러나 이를 극복하고 다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힘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믿음으로 그 뜻에 순종할 때 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해서 어려움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는 중에 세번이나 상처를 받으셨습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9) 당신은 물 길을 그릇도 없잖아요(11).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12b)? 이와 같이 우리가 마음이 완악한 죄인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려면 속이 썩는 고통을 겪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서 치루어야 할 고난은 값진 것입니다. 그런 고난은 우리를 강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맛보게 합니다. 그런 고난을 겪은 사람들은 매우 겸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구속 역사를 이끌어 나가십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이 변화되는 것을 보고 큰 기쁨을 누리셨습니다. 사실 목자 생활만큼 재미있고 즐거운 삶도 없습니다.  우리 가운데서 언제나 기쁨이 충만한 사람들을 살펴보십시오. 그들은 양치는 기쁨으로 인하여 세상에서 받는 모든 스트레스를 이기고 복되게 살고 있습니다.

둘째, 눈을 들어 밭을 보라(35-38).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양식에 대해서 말씀하신 후 제자들에게 비전을 주시며 격려하셨습니다. 35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사마리아 인의 추수기는 4월 중순에서 5월 말경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파종을 전해 10월 중순에 합니다.  지금은 12월 쯤입니다. 제자들은 추수를 하려면 네 달은 더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지금이 추수기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생각할 때 사마리아는 아직 때가 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 있는 장벽은 매우 높았습니다. 그들은 사마리아 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지금이 추수기라고 하십니다.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추수하게 되었도다.” 밭은 처음에는 연두색이었다가 녹색으로 그 다음에는 황금색을 다음에는 희게 됩니다. 그러므로 희게 된 지금 추수를 하지 않으면 알곡이 떨어지고 새들이 먹어버리고 도둑놈들이 도적질을 해 갑니다. 그러므로 긴급하게 추수를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한 사마리아 여인의 변화는 동네 사람들의 변화로, 그 다음 오순절 이후 빌립이 가서 복음을 전했을 때에 사마리아는 복음이 편만하게 전해지고 성에 큰 기쁨이 있었습니다(행8:5-13).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의 변화를 통해서 전 세계의 모든 사마리아 여인들이 변화될 비전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기도의 어미요 선교사들이 될 비전을 보셨습니다.

 목자의 심정을 가진 사람의 눈에는 사마리아도 추수 때라고 보이는데 어떤 사람들의 눈에는 아직 멀었다고 생각이 됩니다. 일을 하고자 하는 열정에 따라서 추수 때가 달라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안 되는 것만 보면 불신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마음 준비가 안된 사람은 여러 번을 전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준비된 사람은 누가 나를 데리러 오지 않나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준비된 사람들을 찾아야 합니다. 김베스 선교사님은 홍익대학에 입학하자 하나님께 자신을 헌신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2학년이 다 되도록 자기를 초청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벤치에 누워 자기도 하고 요란한 옷차림을 하고 다녔기 때문에 사람들이 외모로 판단하고 접근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속 마음은 사마리아 여인이 메시야를 찾듯이 하나님을 찾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사마리아를 보고 그냥 지나가는 곳으로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힘써 일해야 할 곳으로 보셨습니다. 35절을 NIV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I tell you, open your eyes and look at the fields! They are ripe for harvest.” 우리가 눈을 떠서 추수하게 된 밭을 보아야 합니다.  한국 캠퍼스의 현실은 7,80년대에 비해서 영적으로 황폐화되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면서 느끼는 것은 사람들의 관심이 복음에서 매우 멀어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선교사님들이 날라가는 새를 손으로 잡고자 하는 것과 같이 휘싱하기가 어렵다는 말을 실감하게 됩니다. 늦가을 감나무 꼭대기에 몇 개의 열매가 남아 있는 것 같이 새 양을 얻기가 어렵습니다. 이제 학생 선교 단체로서의 명색을 유지하기도 어렵게 되었습니다. 학생들보다 학사들이 월등히 많기 때문입니다. 아니 시간이 지나면서 이것은 당연한 것이기도 하지만 상대적으로 학생들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위기의식을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가운데 힘써야 할 것은 한 사람의 변화를 통해서 큰 비전을 보신 예수님을 배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한 양은 한 민족입니다. 그 한 사람의 변화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실 지 아무도 모릅니다. 에디오피아는 빌립이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준 한 내시에 의해서 복음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지금도 아프리카에서 에디오피아에 가장 많은 크리스챤이 있습니다. 우리는 김다니엘 선교사 한 사람의 변화를 통해서 미국 버클리 대학에 어떠한 변화가 올지 모르지만 큰 기대를 갖습니다. 그가 방향을 잡고 성장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디모데 선교사님의 변화를 통해서 나아지리아 가운데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안인철목자님의 변화를 통해서 태국에 얼마나 큰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릅니다. 우리는 기대와 소망을 갖고 사람을 섬깁니다. 예수님의 비전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비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복음 역사를 섬기다 보면 열매를 쉽게 거두는 자가 있는 반면에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열매를 거두지 못한 사람은 낙담하고 거두는 사람은 의기 양양하기 쉽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어떻게 아름다운 동역을 하며 함께 즐거워 할 수 있는지 말씀하십니다. 36,37절을 보십시오.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열매를 거두는 자는 이미 씨를 뿌리기 위해서 수고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또한 씨를 뿌리는 자는 내가 모든 것을 다 거두어야 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씨를 뿌리고 결과는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거두는 자는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두는 자체가 은혜요 축복입니다. 한국은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흘림과 수많은 성도들이 산과 골짜기에서, 기도 굴에서, 집에서 밤낮 부르짖어 기도한 수고 위에서 부흥의 열매를 거두었습니다.

 38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로 노력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노력한 것에 참여하였느니라.” 예수님은 구약의 수 많은 선지자들로부터 세례 요한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그들이 얼마나 많은 수고를 했는가 아시고 감사하셨습니다. 열매를 거두는 자는 뿌리는 자들의 수고에 대해서 감사한 마음으로 거두어야 합니다. 개척자들의 수고와 눈물로 씨를 뿌리는 역사가 있었기 때문에 거두는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제는 미래를 위해서 새롭게 씨를 뿌려야 할 때입니다. 청교도 목회자들의 수고를 보면 50년 사역에 한 두 명의 열매밖에 거두지 못했다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버마의 역사를 보면 아도니람 저드슨은 6년이라는 기나 긴 세월이 지난 후에야 한 영혼을 그리스도께 인도할 수가 있었습니다. 1819년 6월 27일, 저드슨은 구원 받은 첫 번째 버마 사람인 멍나우(Moung Nau)에게 침례를 베풀었습니다.  저드슨은 그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오, 오늘을 기점으로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버마 사람들이 끝임없이 회심하고 침례를 받을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십시오.” 구원 받는 사람들의 숫자는 2명, 3명, 6명, 18명으로 천천히 늘어갔습니다. 그는 38년 동안 버마에서 보냈는데 그의 말년에 버마 교회는 7000명의 교인들이 있었고 163명의 선교사들을 감독하였습니다. 리처드 박스터는 성인이 2천명이 사는 곳에서 사역을 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돌아왔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그런 은혜를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열매를 거둘 때에 뒤에서 남모르게 수고한 사람들의 노력을 알고 겸손해야 합니다. 

 사마리아 인들은 처음에 그 사마리아 여인의 전도를 받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사마리아 여인은 휘싱 목자였습니다. 그 사마리아 여인은 자신의 과거를 말하면서 간증적으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녀의 열정은 자신의 신분을 잊게 했습니다. 이와 같이 자기의 간증을 전하는 것은 매우 효과적입니다. 사마리아 인들은 이제 예수님을 만나게 되자 자기들과 함께 유하기를 청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이틀을 유하시면서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인하여 믿는 자가 더욱 많아졌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직접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알게 되었습니다(42). 이것을 보면 사마리아 인들의 마음이 매우 개방적임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 열린 자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적인 장벽을 넘어서서 그들과 사랑의 교제를 가지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들이 개인 신앙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처음에 사마리아 여인의 간증을 듣고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분위기 신앙이요 단체 신앙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말씀을 공부하고 나서 그들은 개인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믿음은 매우 개인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 나라에 가야만 합니다. 부모의 믿음에 의해서 자녀들이 하나님 나라에 갈 수는 없습니다. 아내의 믿음에 의해서 그 남편이 하나님 나라에 갈 수는 없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었습니다. 죤 낙스(1515-1572)는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 스코틀랜드는 카톨릭과 영국 성공회의 영향 아래 있었습니다. 그는 믿는다는 것이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래서 부지런히 성경을 공부했고 의문이 생길 때 마다 제네바에 있는 죤 칼빈을 찾아가서 대화를 하는 가운데 의문들이 풀렸습니다. 그는 청교도들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의 개인 신앙은 당시 여왕을 폐위시킬 정도로 영향력이 컸습니다. 한 사람이 개인 신앙을 갖게 되면 언제나 위대한 영적 각성 운동이 일어납니다. 

셋째, 말씀을 믿는 믿음(43-54). 예수님께서 이틀을 사마리아에 머무시다가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이 갈릴리에 이르시자 갈릴리인들이 영접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는 명절에 예루살렘에 갔다가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지명도를 기초로 그를 영접했습니다. 한마디로 그들이 예수님을 영접한 동기는 사마리아 인들과 달랐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성을 맺는데 약했습니다. 그들은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못할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표적 신앙을 바로 잡아 말씀을 믿는 믿음을 갖도록 한 사건을 통해 도와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셨습니다. 이곳은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입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든 기적이 그 동네에 널리 퍼졌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그런 표적이 또 나타나기를 기대했습니다. 거기 왕의 신하가 있는데 그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에 오심을 듣고 가서 청했습니다.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이는 그 아들이 거의 죽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아들은 독자였을 것이고 얼마나 사랑스러웠겠습니까? 왕의 신하는 예수님을 만나자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 오소서”라고 간청했습니다. 사실 그에게는 한시가 급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빨리 내려 오셔서 안수를 해 주시든지 기도를 해주시든지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었지만 자기가 생각하는 방식으로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5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하신대 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예수님은 표적 신앙에 대해 도전을 하셨습니다.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그 사람은 다만 예수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갔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믿음이었습니다. 시공간의 한계를 뛰어넘어서 죽어가는 자를 살리는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을 찬양합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믿는 자들을 치료하시고 살리십니다. 그런데 신하가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았다고 하였습니다. 그 낫기 시작할 때를 물어보니 어제 제 칠 시에 열기가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고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이 다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은 그 즉시 나타났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능력의 말씀, 병든 자를 치료하는 말씀이 역사할 때 그 가족들이 다 나와서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믿는 믿음의 사람들에 대해서 수많은 예를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창12:2절 말씀을 믿고 순종하여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사렙다 과부는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하나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비가 올 때까지 엘리야와 그 식구를 먹여 살렸습니다. 나아만 장군은 엘리사의 “가서 요단 강에서 일곱 번 씻으라”는 말에 순종하여 문둥병에서 나음을 입었습니다. 베드로는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두 배 가득히 고기를 잡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한 백부장은 사랑하는 병든 하인을 고치기 위해서 예수님께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내려 오려고 하시자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리하면 내 하인이 낫겠삽니이다.”라고 함으로 하인이 나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려면 내 자존심, 교만, 자기 생각을 제어해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 죽어가는 양들을 살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새롭게 말씀을 믿는 믿음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어서 죽은 자를 살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서 하나님 자신을 계시합니다. 우리가 말씀 공부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눈을 떠서 말씀을 찾아 헤매는 양들을 보고 이들에게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치기를 기도합니다. 또 그 한 사람의 변화를 통해 세계가 변화될 비전을 가져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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