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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요11장,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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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섬김이
댓글 0건 조회 3,332회 작성일 03-02-03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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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부활절 특강                                                                                     
말씀/요한복음 11:1-44
요절/요한복음 11:25,26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의 모든 교리는 거짓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은 지 삼일 만에 부활하셔서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증명하셨습니다. 부활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소망이요 새 생명입니다. 종교 개혁자 루터는 고백하기를 “아무리 험한 시험과 역경이 몰아친다 할지라도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생각하면 새로운 소망과 용기가 넘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 안에서 생명을 노래할 수 있고 진정으로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 모두가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깊이 만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나사로의 가정(1-3). 마리아와 마르다 그리고 그 오빠인 나사로는 예루살렘 근교 베다니에서 오손도손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일찍 부모님을 여의었고 오빠 나사로는 평소에도 유약한 편이었습니다. 그래서 두 자매는 우울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오빠 나사로를 위해서 눈물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빠 나사로를 섬기다가 힘들 때면 숨어서 한참을 울었습니다. 그러나 햇빛이 나고 오빠의 건강이 좋을 때는 기쁨이 충만하였습니다. 그들은 이런 가운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가정의 목자가 되사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는 나사로의 집에 머물면서 식사도 하시고 은혜가 풍성한 말씀으로 섬겨주셨습니다. 그러면 마르다는 열심히 식사 준비를 하고 마리아는 말씀에 열중하였습니다. 그들은 제자들이 많은 양의 음식을 먹어 치웠지만 희생적으로 섬기는 것이 큰 기쁨이었습니다. 
 이렇게 행복한 가운데 사는 믿음의 가정에 짙은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나사로가 암과 같은 불치병에 걸려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빼빼 말라 죽어가는 것이었습니다. 나사로의 병세는 예사롭지가 않았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하늘이 무너지고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들은 부모님을 여의고 오빠 나사로까지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죽음에 대한 공포와 자신들의 장래에 대한 불안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함께 부둥켜 안고 울다가 한 줄기 빛이 그들의 머리 속에 들어왔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오신다면 기적을 베풀어서 낫게 해 주실 수 있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들은 즉시 그 동네에서 마라톤을 가장 잘하는 사람을 불러 메시지를 주어 예수님께 보냈습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만사를 제쳐두고 달려오실 줄 굳게 믿었습니다.
둘째,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4). 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은 이 병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나사로가 죽을 것을 아셨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하는 우리에게 예수님은 죽음 너머의 새로운 지평을 보여 주십니다. 바로 부활의 세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병을 불행으로 여기지 아니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사람과 육적인 사람이 갖는 관점의 차이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는 분명한 인생 목적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누구나 예외 없이 돈 몇푼 더 벌고 자기 이름을 내기 위해서 뼈빠지게 일하고 마음이 녹는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가 직면하는 모든 문제를 통해서 하나님을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는 목적의식이 분명하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예수님 안에는 죽음이 없다(5-16). 예수님께서는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나사로가 병들었다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셨습니다. 지금과 같이 다급한 상황에서는 만사를 제쳐두고 달려가야 할 것 같은데 예수님은 도리어 이틀이나 더 유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왜 이틀을 더 유하시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는 당장 달려가도 그가 죽음에 이를 줄 아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부활 신앙을 심어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의 진정한 소망은 나사로가 아니라 예수님이심을 가르쳐 주고자 하심이었습니다. 막무가내의 사랑은 사람을 병들게 하기 쉽습니다. 예수님께서 이틀을 유하시는 것은 사실 참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시면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셨습니다.
그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유대로 다시 가자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이미 늦어서 상황이 끝났는데 가자고 하시는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방금 전에 유대인들의 돌 세례를 피해서 이곳으로 왔는데 또 짱돌을 들고 있는 그들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떨렸습니다. 『모래 시계』에서 최민수는 사형을 당하기 직전 친구에게 묻습니다. “나 떨고 있니?” 두려움을 모르는 것 같던 그도 죽음 앞에서는 떨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제자들에게 “낮이 열 두 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열 두 시간이란 인생의 기간을 말하고 실족한다는 말은 죽는다는 뜻이고 이 세상의 빛은 예수님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는 두려움 문제가 있었습니다. 믿음의 반대는 불신이 아니라 두려움입니다. 두려움이 있으면 대낮에도 일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내면의 두려움 문제를 극복하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다고 하시며 내가 깨우러 가노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가리킨 것이지만 그들은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시는 줄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에게 나사로가 죽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께서 죽음을 잠으로 보셨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사람들은 다시 깨어날 소망이 있기에 잠 자는 것을 좋아합니다. 잠을 자고 나면 상쾌하고 힘이 납니다. 열심히 일하고 난 다음에 잠깐 잠을 취하는 맛은 기가 막힙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죽음은 맛있는 잠과 같습니다. 예수님에게 죽음은 지상에서의 삶에 맞춘 육체가 하나님 나라의 환경에 맞추기 위하여 변화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예수님 안에 죽음은 없습니다. 성경은 여러 군데에서 죽음을 잠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마9:24절 “가라사대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행7:60절에서 스데반의 죽음을 잠으로 표현했습니다.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고전 15:6절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평화가 흘러넘칩니다. 예수님은 죽음이라는 마침표를 쉼표고 바꾸시고 단절을 이음표로, 끝을 시작으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살전 4:16,17절은 말씀합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예수님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이 그들에게 부활 신앙을 심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에 기뻐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고 하셨습니다. 이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디두모라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우리도 주와함께 죽으러 가자.” 도마는 원래 의심이 많은 사람인데 사람이 한번 죽는다는 것은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비장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따르다가 죽고자 했습니다. 사실 사람이 죽기 살기로 하면 못할 것이 없습니다. 죽기 살기로 덤비는 사람들은 무섭습니다. 조폭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사람은 죽기 살기로 싸우는 자라고 합니다. 허무주의자들은 자살을 통해서 죽음을 극복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 절망의 표현일 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을 때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매일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넷째, 나는 부활이요(17-34).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 되었습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2Km 정도 밖에 되지 않아서 많은 사람들이 위문하러 왔습니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마음은 슬픔과 애통한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 있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았지만 마리아는 집에 앉아 있었습니다. 요즈음 우리의 장례 풍습은 삼일 장을 치루고 나면 거의 끝이 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장사한 지 일주일 간의 위문 기간이 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많이 오는 것을 볼 때 나사로가 살아 생전에 선한 일을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보자 마자 원망을 했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21).” 마르다는 과거를 회상하면서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이렇게 슬프지는 않았을텐데.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너무 늦게 오셔서 이제는 나사로를 위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미안했던지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라고 덧붙였습니다.

 인간적으로 말해서 이렇게 되면 예수님은 “미안하다 내가 너무 늦었구나”라고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마르다에게 생명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그러나 마르다는 이 약속의 말씀을 믿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신학적인 교리로 받아들였습니다. 마르다가 말했습니다.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그녀에게는 과거와 미래만 있고 현재가 없었습니다. 현실적인 문제 해결에 믿음의 능력이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믿음이 현실의 문제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현재가 없이는 미래도 없는 것입니다. 말씀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고 예수님을 제한시키는 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마르다가 피상적인 성경 지식을 가지고 있음을 아셨습니다. 더구나 그녀는 죽음의 권세 앞에 떨고 있었습니다. 마르다는 죽음의 세력 앞에 운명적이 되었고 불신이 그 마음에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그녀에게 가장 영광스러운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25,2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은 현재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본래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천지 만물을 지으시고 그 안에 생명을 주어 숨쉬게 하신 권능의 주이십니다. 요한복음 저자는 서론에서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지금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하십니다. ’과거에 부활이었고 미래에 부활일 것이다‘가 아닙니다. 지금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나사로를 살리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에게 지금 생명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 자는 지금 살아납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바로 지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집니다. 지금 생명을 얻습니다. 지금 영생을 얻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산다고 하셨고,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믿음의 능력을 말해 줍니다. 믿음이란 신비스러운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생명의 구주로 영접하고 믿을 때 놀라운 일이 발생하게 됩니다. 우리는 사망의 세계에서 생명의 세계로 옮겨지게 됩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5:24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실 때 오른 편에 있던 강도가 간구했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그는 미래에 일어날 일을 가정하면서 은혜를 구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오늘 믿는 그에게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과거 사망 권세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살았습니다. 사망 권세는 우리를 두렵게 하고 허무하게 하고 슬프게 하고 운명의 노예가 되게 합니다. 사망권세는 인생들로부터 생명을 앗아가고, 꿈을 앗아가고, 기쁨을 앗아가고,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을 앗아갑니다. 그러나 생명의 세계에 들어가게 되면 상황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 때는 더 이상 사망 권세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고 생명이 우리를 지배하게 됩니다. 생명의 세계는 빛의 세계요, 기쁨의 세계요, 희망의 세계입니다. 생명의 세계에서 사는 자는 더 이상 허무에 시달리지 않습니다. 더 이상 운명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더 이상 한 맺힌 인생을 살지 않습니다. 더 이상 죄가 왕노릇하지 않습니다. 생명의 세계에서 사는 자는 운명을 개척할 수 있습니다. 한계를 극복하고 능력있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삶에 추진력이 생겨 창의적인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이렇게 말하니까 좀 위안이 되느냐?”고 하시지 않고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구체적인 부활신앙을 원하십니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 그러자 마르다는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내가 믿나이다(27).”
 마리아는 어떠하였습니까?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자기를 부르신다는 말을 듣고 일어나 달려왔습니다. 그리고 그 발 아래 엎드려 매우 유감스럽게 말했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32).” 그녀는 예수님과 일대일로 성경을 공부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마음으로부터 그 말씀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 마리아는 오빠의 죽음 앞에 슬피 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위문 온 모든 동네 사람들이 다 울었습니다. 전문적으로 울어주는 사람이 와서 더욱 슬픈 소리로 울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전통이었습니다. 어쨌든 그들은 모두가 죽음의 권세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인간은 예수님 없이 죽음 문제를 해결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 안에서 진정한 승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부활은 죽음에 대한 승리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권세에 대항하여 승리하신 유일한 분이십니다. 
다섯째, 네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38-44). 불신의 분위기가 압도하고 있을 때에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마리아의 우는 것과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를 어디 두었느냐 물으시고 시체를 둔 데를 가서 보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35).” 이는 매우 짧은 내용이지만 많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권세 아래 고통하는 마리아를 불쌍히 여기고 우셨습니다. 이는 마리아의 슬픔에 동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에 감동을 받은 마리아는 마음이 열려 믿음을 갖게 되고 나중에는 향유를 예수님께 붓고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겼습니다. 예수님은 외향적인 마르다와 내향적인 마리아를 돕는 방법이 다르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인생들을 포로와 같이 다루고 있는 죽음의 권세에 대한 울분을 가지고 통분히 여기셨습니다. 또한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 앞에서 믿음이 없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슬퍼하셨습니다. 믿음이 없는 이들을 돕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마르다가 가로 막으며 말했습니다.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39).” 시체 썩는 냄새가 나자 마르다의 믿음은 흔들렸습니다. 마치 요동치는 바다 위에 떠 있는 배와 같았습니다. 그녀는 만세반석이신 예수님의 말씀 위에 뿌리를 내리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져야 했습니다. 말씀보다 현실만 바라보니 믿음이 왔다 갔다 했습니다. 마르다의 마음에 있는 불신을 옮기기 위해서 예수님은 책망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40).” 우리는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기 위해서 마음 속에 있는 불신의 돌을 옮겨 놓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믿음과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자 하는 열망을 가져야 합니다.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예수님은 믿음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믿음이란 불신과의 싸움이요 불순종과의 싸움입니다. 현실의 막막함과 싸워야 합니다.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굳게 붙잡고 나가야 합니다.
 그들이 돌을 옮겨 놓자 예수님은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셨습니다. 그러자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왔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권세로부터, 원망과 불평으로부터, 무기력과 절망으로부터, 허무와 죄의 무덤으로부터, 의존심과 패배감의 무덤으로부터 우리를 불러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여 다른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99.9%는 실패 합니다. 그 이유는 기도하기 보다 자기 열심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적인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하심으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기적의 역사를 보이셨습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믿을 때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일으켜 세우신 목적은 그에게 생명을 줄 뿐만 아니라 그 백성들에게 믿음을 심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는 마음에 있는 불신의 돌을 옮기기 위해서 머리를 땅에 조아리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 세상의 모든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썩고 쇠하고 사라지지만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영원히 남아 있고 우리에게 영생과 하나님 나라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두려움을 극복하고 승리하는 인생을 살며 세계 선교와 캠퍼스 제자 양성 역사에 헌신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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