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요3강,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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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봄학기 요한복음 제 3 강 505
말씀 / 요한복음 1:35-51
요절 / 요한복음 1:41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우리는 지난 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통해서 죄사함의 은혜를 풍성히 누리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이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도하는 내용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전도하시면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제자 양성을 하려면 기본적으로 전도를 많이 해야 합니다. 전도의 기초 위에 제자 양성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효과적인지, 예수님은 어떻게 복음을 전하셨는지 배우고자 합니다.
요한이 두 제자와 함께 섰다가 예수님께서 다니심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주위를 다니시면서 전도를 하고자 하셨습니다. 마치 우리가 전도를 하려면 캠퍼스를 이러 저리 돌아다녀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되도록 캠퍼스에서 지내면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주위를 거닐다 보면 양들을 만나게 됩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다니심을 보고 제자들에게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소개했습니다. 두 제자는 그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세례 요한은 참 전도자의 모델이었습니다. 그는 양들이 예수님께 가도록 인도한 점에서 훌륭합니다. 그는 양들을 자기 제자로 만들지 않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도록 안내를 했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서 사라져야 한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는 쇠하여야 하고 그는 흥하여야 한다고 고백한대로 살았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일하실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고 제자들을 보내주었습니다. 예수님을 처음에 따른 두 제자는 세례 요한이 보내준 안드레와 사도 요한이었습니다.
그들이 좇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은 돌이켜 물으셨습니다. “무엇을 구하느냐?”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예수님께 원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분명히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좇는 동기가 잘못되면 실망하고 배반하기 쉽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 생활을 하는 목적이 마음의 안정과 평화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인생 문제를 예수님 안에서 해결받고 싶어합니다. 물질적인 복을 구하는 사람도 있고 선거철에는 표를 구합니다. 소경은 보기를 원했고 문둥병자는 깨끗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면 나는 진정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구하고 있습니까?
그러면 제자들은 무엇을 구했습니까? 그들은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얼핏보면 이것은 동문서답 같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거하기를 구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거하면서 예수님을 배우고 싶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싶다는 고백입니다. 그들은 예수님 자신을 배우고 싶었습니다. 예수님 자신을 얻고 싶었습니다. 당시 제자 양성은 도제 교육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장막 생활을 하면서 예수님을 배웁니다. 함께 식사도 하고 함께 운동도 하고 함께 잠도 자면서 예수님을 배울 때 많은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이를 위해서 수양회도 하고 엠티(MT)도 합니다. 이렇게 하루 밤을 함께 지내면 인식이 달라집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진정한 소원을 보시고 “와 보라”고 하시며 초청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진리의 근원이시고 진리 자체이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하나님의 영광이 있는 지성소 안으로 초청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교제를 갖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을 만나서 하나님과 인간과 자연에 대해서 배운다는 것은 무한한 영광입니다. 그 안에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십니다. 요즈음은 사이버 세계가 발전되니까 인격적인 교제를 하기가 어렵습니다. 학생들이 자기 편리한 대로 잠깐 만나고 원룸으로 들어가서 생활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정과 장막으로 양들을 초청해서 함께 식사를 하고 교제를 하는 가운데 참된 사귐을 발전시켜야 합니다.
예수님의 초청을 받은 제자들은 그날 가서 계신 데를 보고 함께 거했습니다. 그때가 오후 4시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난 감격을 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시간까지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짧은 시간이었지만 예수님에게서 한없는 은혜를 누렸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까? 말씀을 공부하는 가운데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중심으로 소감을 쓰고 형제들과 교제를 나누는 가운데 주님이 함께 하심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세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자신도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제자들에게 개방하시고 완전히 계시해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그가 메시야이심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고백이 무엇입니까?
41절을 보십시오.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안드레는 예수님께서 메시야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가장 먼저 형제 시몬을 찾아가서 그 감격을 나누었습니다. 안드레는 갈릴리 어부로 살다가 삶의 무의미에 시달렸습니다. 그는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알고 구원을 얻기 위해서 세례 요한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종교적인 열심을 가지고 말씀을 연구하고 기도했습니다. 금식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메시야의 선구자였지 메시야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라”라는 증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면서 이 세상의 죄를 지고 가기 위해 오신 메시야의 고뇌와 인격을 만났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서 말씀을 공부하고 교제를 나누는 가운데 자신의 죄문제가 해결됨을 체험했습니다. 우리 인생에는 여러 종류의 만남이 있습니다. 어머니와의 만남, 사랑하는 아내와의 만남, 스승과의 만남, 친구와의 만남 그리고 메시야와의 만남입니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메시야와의 만남입니다. 축구 국가 대표인 이영표 선수에게 한 기자가 물었습니다. “연봉도 많이 받고, 스타의 반열에 올랐는데, 이영표 선수에게 굳이 예수님이 필요한 이유는?” 이에 대해 “저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목표와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모든 걸 투자하고 있습니다. 저의 경우엔 제가 원하는 것을 이뤘을 때 거기서 오는 허탈감과 허망함이 컸거든요. 그런 것들에서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루었을 때의 그 허탈감과는 반대로 마르지 않는 기쁨 그것을 예수님에게서 찾았기 때문에 제가 노력해서 얻은 '스타' 같은 것은 예수님을 앎으로 얻은 것들과는 감히 비교가 안 되죠.” 이와 같이 안드레는 메시야를 만나고 기쁨이 충만해서 그 형제 시몬에게 감격을 전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의 감격이 있습니다. 이 감격을 가지고 캠퍼스의 친구들과 나의 형제들에게 전하기를 기도합니다.
메시야를 만난 후 안드레가 그 형제 시몬을 예수님께 데려왔을 때 예수님은 그를 보자 마자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게바는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시몬은 충동적이고 믿음직스럽지 못한 내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에게 듬직한 반석이 되리라는 소망을 두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목자가 양에게 소망을 두고 키우는 것이 중요함을 배우게 됩니다. 예수님은 사역의 초기부터 자신의 죽음 이후를 생각하시고 후계자를 양성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을 멀리 내다 보시고 제자로 키우셨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을 중심으로 사역을 섬기기 보다 제자 양성을 중심으로 인격적으로 일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소망대로 제자들은 초대 교회를 이끌어 나가는 지도자들이 되었습니다.
빌립은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까? 이튿날 예수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길을 가시다가 빌립을 만나서 “나를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빌립은 복잡한 생각을 하지 않고 단순하게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신적인 부르심이었기 때문에 거역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복잡한 지성인들에게 확신을 가지고 접근해야 함을 보게 됩니다. 지성인들이기 때문에 논리적이고 현학적으로 복음을 전하고 싶은 생각이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단순하게 전해야 합니다. 복음은 단순하게 전할 때 힘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게서 양을 받기도 하셨지만 직접 전도를 하셨습니다. 또 양이 양을 데려오는 역사도 있었습니다. 이를 볼 때 우리도 보다 적극적으로 전도를 해야 함을 배우게 됩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막1:38). 예수님은 길을 걸어가면서도 전도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하게 순종하면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우리가 저 사람에게 꼭 복음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주저하지 말고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집사 빌립도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성령께서 인도하실 때 광야로 나가서 에디오피아 내시를 만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랬을 그는 에디오피아를 복음화시키는데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전도를 받은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인 벳새다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잘 아는 친구들이었습니다. 빌립은 예수님을 따르면서 깨달은 바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자기 친구 나다나엘을 찾아가 전도했습니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 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그는 성경에 예언된 근거를 가지고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증거했습니다. 그런데 나다나엘의 반응은 시큰둥하였습니다. 빌립은 매우 박식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열심도 있습니다. 비록 예수님을 믿은 지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감격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우리는 신앙의 경륜이 많다고 복음을 잘 전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믿었더라도 내가 깨달은 바가 있으면 전도할 수 있습니다. 새롭게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이 구신자보다 더 많은 불신자 친구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전도하기가 훨씬 더 쉽습니다. 또 복음을 전할 때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고 진리의 말씀을 더 깊이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는 자체가 은혜요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심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빌립은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복음을 친구 나다나엘에게 전했습니다.
그런데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며 예수님을 무시했습니다. 그는 지역 감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나다나엘은 열등감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열등감이나 질투심, 지역 감정 등이 있을 때 편견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대하게 됩니다. 나다나엘은 부정적인 생각의 소유자였습니다. 빌립은 나다나엘이 쉽게 따라올 줄 알았는데 잘 되지 않자 예수님의 방법대로 “와 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나다나엘은 순순히 예수님께로 왔습니다. 빌립은 전도하는 것을 예수님에게서 자연스럽게 배웠습니다. 우리는 길이 막힐 때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셨는가, 또는 목자님께서 어떻게 하셨는가를 생각해 보면 많은 도움을 얻게 됩니다. 빌립이 믿음으로 나다나엘을 전도하여 예수님께 데려갔을 때 예수님께서 친히 도우셨습니다. 우리가 주일 예배에 양들을 데려다가 앉히면 주님께서 친히 말씀을 주시고 내면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빌립이 데리고 나온 나다나엘을 어떻게 도우셨습니까? 예수님은 나다나엘이 자신을 무시하는 말을 한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화를 내거나 속으로 판단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47)”라고 칭찬하셨습니다. 간사한 것이 없다는 말은 꾸밈이 없다, 속기 쉽게 다루다, 섞음질을 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나다나엘은 마음이 순수해서 정직하다는 것입니다. 참 이스라엘 사람인 증거는 할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실성에 있습니다. 신앙적인 진실성, 정직성이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표입니다. 이를 볼 때 예수님은 나다나엘로부터 상처를 받기보다 그의 장점을 살려 주시고 격려 해주심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의 인정을 받을 때 나다나엘은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은 선으로 악을 이긴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나다나엘은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라며 자신을 인정했습니다. 자신을 알아주시는 예수님께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그의 내면에 있는 열등감이 펴지고 편견이 치료되었습니다.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이는 자기 긍정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게 되자 그의 인생이 회복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각 사람 속에 있는 위대성을 끌어 내어 키워 주는 분이십니다. 각 사람은 단점이 있는 반면에 위대한 장점이 있습니다. 목자는 그 장점을 발견하여 키워주는 사람입니다. 특히 성령이 충만할 때 장점은 살아나고 단점은 감추어 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다나엘이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라고 물었을 때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 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다고 하셨습니다. 나다나엘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묵상을 하고 있었습니다. 나다나엘은 예수님의 답변을 듣고 놀라운 고백을 했습니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49).”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야곱이 꿈에 보았던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꿈이 예수님을 통해서 실현되었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과 인간이 교제하는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들의 한결 같은 고백이 “내가 메시야를 만났다”는 것이고 그 속에는 감격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증인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감격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복음을 어떻게 전해야 하는가를 배우게 됩니다.
첫째, 감격을 가지고 확신있게 전해야 합니다. 전도 방법이 문제가 아니라 복음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빌립은 성경에 기초해서 논리적으로 전했지만 나다나엘은 반발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대한 감격을 가지고 와보라고 했을 때 복음을 영접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둘째, 관계전도가 중요합니다. 안드레는 형제 시몬을 데려 오고 빌립은 친구 나다나엘을 데리고 왔습니다. 사도 요한의 형제 야고보 등을 보면 형제나 친구 등 관계성이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께 쉽게 나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최소한 일곱명 이상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개인은 300명 정도와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고 합니다. 이를 볼 때 우리는 한 사람은 300명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찾아 보면 내 주위에 복음을 전해야 할 친구, 형제들이 많이 있습니다. 케냐의 막윤 선교사님은 사 형제가 다 선교사로 나갔습니다. 이디모데선교사님도 동생인 나안드레 사모님이 센터에 나와서 목자로 헌신하고 있습니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구원하기를 기뻐하십니다(고전1:21).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신앙을 갖는다는 것이 어리석게 보입니다. 연약하고 힘이 없는 사람들이나 믿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또 그들에게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것도 매우 이상합니다. 그래서 본성적으로 거부감을 느낍니다. 우리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그들 편에서 미련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방식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구원의 방법에 있어서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인간의 지혜보다 훨씬 더 지혜롭습니다. 우리가 봄학기에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양을 얻고 제자 양성을 하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캠퍼스에 진리의 빛으로 충만하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요한복음 1:35-51
요절 / 요한복음 1:41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우리는 지난 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통해서 죄사함의 은혜를 풍성히 누리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이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도하는 내용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전도하시면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제자 양성을 하려면 기본적으로 전도를 많이 해야 합니다. 전도의 기초 위에 제자 양성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효과적인지, 예수님은 어떻게 복음을 전하셨는지 배우고자 합니다.
요한이 두 제자와 함께 섰다가 예수님께서 다니심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주위를 다니시면서 전도를 하고자 하셨습니다. 마치 우리가 전도를 하려면 캠퍼스를 이러 저리 돌아다녀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되도록 캠퍼스에서 지내면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주위를 거닐다 보면 양들을 만나게 됩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다니심을 보고 제자들에게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소개했습니다. 두 제자는 그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세례 요한은 참 전도자의 모델이었습니다. 그는 양들이 예수님께 가도록 인도한 점에서 훌륭합니다. 그는 양들을 자기 제자로 만들지 않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도록 안내를 했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서 사라져야 한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는 쇠하여야 하고 그는 흥하여야 한다고 고백한대로 살았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일하실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고 제자들을 보내주었습니다. 예수님을 처음에 따른 두 제자는 세례 요한이 보내준 안드레와 사도 요한이었습니다.
그들이 좇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은 돌이켜 물으셨습니다. “무엇을 구하느냐?”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예수님께 원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분명히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좇는 동기가 잘못되면 실망하고 배반하기 쉽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 생활을 하는 목적이 마음의 안정과 평화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인생 문제를 예수님 안에서 해결받고 싶어합니다. 물질적인 복을 구하는 사람도 있고 선거철에는 표를 구합니다. 소경은 보기를 원했고 문둥병자는 깨끗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면 나는 진정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구하고 있습니까?
그러면 제자들은 무엇을 구했습니까? 그들은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얼핏보면 이것은 동문서답 같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거하기를 구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거하면서 예수님을 배우고 싶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싶다는 고백입니다. 그들은 예수님 자신을 배우고 싶었습니다. 예수님 자신을 얻고 싶었습니다. 당시 제자 양성은 도제 교육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장막 생활을 하면서 예수님을 배웁니다. 함께 식사도 하고 함께 운동도 하고 함께 잠도 자면서 예수님을 배울 때 많은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이를 위해서 수양회도 하고 엠티(MT)도 합니다. 이렇게 하루 밤을 함께 지내면 인식이 달라집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진정한 소원을 보시고 “와 보라”고 하시며 초청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진리의 근원이시고 진리 자체이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하나님의 영광이 있는 지성소 안으로 초청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교제를 갖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을 만나서 하나님과 인간과 자연에 대해서 배운다는 것은 무한한 영광입니다. 그 안에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십니다. 요즈음은 사이버 세계가 발전되니까 인격적인 교제를 하기가 어렵습니다. 학생들이 자기 편리한 대로 잠깐 만나고 원룸으로 들어가서 생활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정과 장막으로 양들을 초청해서 함께 식사를 하고 교제를 하는 가운데 참된 사귐을 발전시켜야 합니다.
예수님의 초청을 받은 제자들은 그날 가서 계신 데를 보고 함께 거했습니다. 그때가 오후 4시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난 감격을 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시간까지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짧은 시간이었지만 예수님에게서 한없는 은혜를 누렸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까? 말씀을 공부하는 가운데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중심으로 소감을 쓰고 형제들과 교제를 나누는 가운데 주님이 함께 하심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세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자신도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제자들에게 개방하시고 완전히 계시해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그가 메시야이심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고백이 무엇입니까?
41절을 보십시오.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안드레는 예수님께서 메시야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가장 먼저 형제 시몬을 찾아가서 그 감격을 나누었습니다. 안드레는 갈릴리 어부로 살다가 삶의 무의미에 시달렸습니다. 그는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알고 구원을 얻기 위해서 세례 요한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종교적인 열심을 가지고 말씀을 연구하고 기도했습니다. 금식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메시야의 선구자였지 메시야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라”라는 증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면서 이 세상의 죄를 지고 가기 위해 오신 메시야의 고뇌와 인격을 만났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서 말씀을 공부하고 교제를 나누는 가운데 자신의 죄문제가 해결됨을 체험했습니다. 우리 인생에는 여러 종류의 만남이 있습니다. 어머니와의 만남, 사랑하는 아내와의 만남, 스승과의 만남, 친구와의 만남 그리고 메시야와의 만남입니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메시야와의 만남입니다. 축구 국가 대표인 이영표 선수에게 한 기자가 물었습니다. “연봉도 많이 받고, 스타의 반열에 올랐는데, 이영표 선수에게 굳이 예수님이 필요한 이유는?” 이에 대해 “저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목표와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모든 걸 투자하고 있습니다. 저의 경우엔 제가 원하는 것을 이뤘을 때 거기서 오는 허탈감과 허망함이 컸거든요. 그런 것들에서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루었을 때의 그 허탈감과는 반대로 마르지 않는 기쁨 그것을 예수님에게서 찾았기 때문에 제가 노력해서 얻은 '스타' 같은 것은 예수님을 앎으로 얻은 것들과는 감히 비교가 안 되죠.” 이와 같이 안드레는 메시야를 만나고 기쁨이 충만해서 그 형제 시몬에게 감격을 전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의 감격이 있습니다. 이 감격을 가지고 캠퍼스의 친구들과 나의 형제들에게 전하기를 기도합니다.
메시야를 만난 후 안드레가 그 형제 시몬을 예수님께 데려왔을 때 예수님은 그를 보자 마자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게바는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시몬은 충동적이고 믿음직스럽지 못한 내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에게 듬직한 반석이 되리라는 소망을 두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목자가 양에게 소망을 두고 키우는 것이 중요함을 배우게 됩니다. 예수님은 사역의 초기부터 자신의 죽음 이후를 생각하시고 후계자를 양성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을 멀리 내다 보시고 제자로 키우셨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을 중심으로 사역을 섬기기 보다 제자 양성을 중심으로 인격적으로 일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소망대로 제자들은 초대 교회를 이끌어 나가는 지도자들이 되었습니다.
빌립은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까? 이튿날 예수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길을 가시다가 빌립을 만나서 “나를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빌립은 복잡한 생각을 하지 않고 단순하게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신적인 부르심이었기 때문에 거역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복잡한 지성인들에게 확신을 가지고 접근해야 함을 보게 됩니다. 지성인들이기 때문에 논리적이고 현학적으로 복음을 전하고 싶은 생각이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단순하게 전해야 합니다. 복음은 단순하게 전할 때 힘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게서 양을 받기도 하셨지만 직접 전도를 하셨습니다. 또 양이 양을 데려오는 역사도 있었습니다. 이를 볼 때 우리도 보다 적극적으로 전도를 해야 함을 배우게 됩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막1:38). 예수님은 길을 걸어가면서도 전도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하게 순종하면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우리가 저 사람에게 꼭 복음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주저하지 말고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집사 빌립도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성령께서 인도하실 때 광야로 나가서 에디오피아 내시를 만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랬을 그는 에디오피아를 복음화시키는데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전도를 받은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인 벳새다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잘 아는 친구들이었습니다. 빌립은 예수님을 따르면서 깨달은 바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자기 친구 나다나엘을 찾아가 전도했습니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 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그는 성경에 예언된 근거를 가지고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증거했습니다. 그런데 나다나엘의 반응은 시큰둥하였습니다. 빌립은 매우 박식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열심도 있습니다. 비록 예수님을 믿은 지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감격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우리는 신앙의 경륜이 많다고 복음을 잘 전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믿었더라도 내가 깨달은 바가 있으면 전도할 수 있습니다. 새롭게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이 구신자보다 더 많은 불신자 친구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전도하기가 훨씬 더 쉽습니다. 또 복음을 전할 때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고 진리의 말씀을 더 깊이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는 자체가 은혜요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심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빌립은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복음을 친구 나다나엘에게 전했습니다.
그런데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며 예수님을 무시했습니다. 그는 지역 감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나다나엘은 열등감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열등감이나 질투심, 지역 감정 등이 있을 때 편견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대하게 됩니다. 나다나엘은 부정적인 생각의 소유자였습니다. 빌립은 나다나엘이 쉽게 따라올 줄 알았는데 잘 되지 않자 예수님의 방법대로 “와 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나다나엘은 순순히 예수님께로 왔습니다. 빌립은 전도하는 것을 예수님에게서 자연스럽게 배웠습니다. 우리는 길이 막힐 때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셨는가, 또는 목자님께서 어떻게 하셨는가를 생각해 보면 많은 도움을 얻게 됩니다. 빌립이 믿음으로 나다나엘을 전도하여 예수님께 데려갔을 때 예수님께서 친히 도우셨습니다. 우리가 주일 예배에 양들을 데려다가 앉히면 주님께서 친히 말씀을 주시고 내면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빌립이 데리고 나온 나다나엘을 어떻게 도우셨습니까? 예수님은 나다나엘이 자신을 무시하는 말을 한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화를 내거나 속으로 판단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47)”라고 칭찬하셨습니다. 간사한 것이 없다는 말은 꾸밈이 없다, 속기 쉽게 다루다, 섞음질을 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나다나엘은 마음이 순수해서 정직하다는 것입니다. 참 이스라엘 사람인 증거는 할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실성에 있습니다. 신앙적인 진실성, 정직성이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표입니다. 이를 볼 때 예수님은 나다나엘로부터 상처를 받기보다 그의 장점을 살려 주시고 격려 해주심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의 인정을 받을 때 나다나엘은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은 선으로 악을 이긴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나다나엘은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라며 자신을 인정했습니다. 자신을 알아주시는 예수님께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그의 내면에 있는 열등감이 펴지고 편견이 치료되었습니다.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이는 자기 긍정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게 되자 그의 인생이 회복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각 사람 속에 있는 위대성을 끌어 내어 키워 주는 분이십니다. 각 사람은 단점이 있는 반면에 위대한 장점이 있습니다. 목자는 그 장점을 발견하여 키워주는 사람입니다. 특히 성령이 충만할 때 장점은 살아나고 단점은 감추어 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다나엘이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라고 물었을 때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 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다고 하셨습니다. 나다나엘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묵상을 하고 있었습니다. 나다나엘은 예수님의 답변을 듣고 놀라운 고백을 했습니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49).”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야곱이 꿈에 보았던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꿈이 예수님을 통해서 실현되었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과 인간이 교제하는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들의 한결 같은 고백이 “내가 메시야를 만났다”는 것이고 그 속에는 감격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증인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감격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복음을 어떻게 전해야 하는가를 배우게 됩니다.
첫째, 감격을 가지고 확신있게 전해야 합니다. 전도 방법이 문제가 아니라 복음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빌립은 성경에 기초해서 논리적으로 전했지만 나다나엘은 반발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대한 감격을 가지고 와보라고 했을 때 복음을 영접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둘째, 관계전도가 중요합니다. 안드레는 형제 시몬을 데려 오고 빌립은 친구 나다나엘을 데리고 왔습니다. 사도 요한의 형제 야고보 등을 보면 형제나 친구 등 관계성이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께 쉽게 나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최소한 일곱명 이상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개인은 300명 정도와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고 합니다. 이를 볼 때 우리는 한 사람은 300명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찾아 보면 내 주위에 복음을 전해야 할 친구, 형제들이 많이 있습니다. 케냐의 막윤 선교사님은 사 형제가 다 선교사로 나갔습니다. 이디모데선교사님도 동생인 나안드레 사모님이 센터에 나와서 목자로 헌신하고 있습니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구원하기를 기뻐하십니다(고전1:21).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신앙을 갖는다는 것이 어리석게 보입니다. 연약하고 힘이 없는 사람들이나 믿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또 그들에게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것도 매우 이상합니다. 그래서 본성적으로 거부감을 느낍니다. 우리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그들 편에서 미련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방식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구원의 방법에 있어서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인간의 지혜보다 훨씬 더 지혜롭습니다. 우리가 봄학기에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양을 얻고 제자 양성을 하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캠퍼스에 진리의 빛으로 충만하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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