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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요2강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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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섬김이
댓글 0건 조회 3,323회 작성일 03-02-03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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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봄학기 요한복음 제 2 강                                               
말씀 / 요한복음 1:19-34
요절 / 요한복음 1:29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을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우리는 오늘날 죄로 인해서 고통을 하면서도 죄에 대해서 그렇게 깊은 문제의식이 없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죄 속에 태어나서 죄 가운데서 살다가 죄로 인해서 죽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에 대해서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성공하기 위해서는 죄라는 것을 지어도 괜찮다는 식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죄의 삯은 사망이요 심판입니다. 심판의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심판주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죄를 가볍게 여기면 정말로 소망이 없는 사회가 됩니다. 저와 여러분이 죄 문제를 심각하게 여기고 이를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결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너는 누구냐?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면서 예수님의 오시는 길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을 통한 회개 운동은 광야에서부터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으로 퍼져나갔습니다(마3:5,6). 세례 요한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그가 혹시 그리스도가 아닌가 생각했습니다(눅3:15). 유대인들은 세례 요한에 대한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 최고 종교 회의에 조사를 부탁했습니다. 조사단들이 요단 강으로 와서 심문하기 시작했습니다. “네가 누구냐?” 세례 요한은 그들이 질문하는 저의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분명하게 대답했습니다. 20a절은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였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소리와 같이 사라져야 한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세례 요한의 이런 태도에 조사관들은 좀 실망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러면 무엇, 네가 엘리야냐?” 예수님께서도 그를 엘리야라고 말씀하셨고(마17:12) 그의 행적이 말라기 선지자가 오리라 예언한 엘리야의 모습과 같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왜 자신은 엘리야도 아니라고 말했을까요? 그는 자신에 대해서 어떤 오해의 꼬투리도 주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세례 요한은 세상 인기의 헛됨을 잘 알았습니다. 물론 그도 옥에 갇혀서 죽음을 기다려야 할 때는 자신의 삶에 대해서 회의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리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게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하시며 나로 인하여 실족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얻고자 자신을 적극 부인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는 세상의 좋은 것들을 배설물로 여기고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면서 약대 털 한 벌로 평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스피릿이 충만했고 예수님의 오시는 길을 준비하기 위해서 그 시대를 움직였습니다. 사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스피릿이 없습니다. 왜 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기 보다 세상에 사랑하는 것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 세상에 의지하는 것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능력의 근원은 하나님이신데 우리는 너무나 하찮은 것들에 의지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말씀을 믿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불가능한 것도 가능하게 할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자신은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라고 하자 그들은 그래도 무언가 아쉬웠는지 “네가 그 선지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 세례 요한의 대답은 갈수록 적어지고 분명해졌습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나는 아니라, 아니라.” 그들은 이제 솔직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22)” 그들은 조사관으로 왔는데 상부에 보고할 거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무엇이라고 보고해야 하는지 거리를 달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요한은 자기의 정체성을 밝히고 있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가로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소리는 사라져야 하는 존재입니다. 소리는 수단이지 목적이 아닙니다. 세례 요한은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다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그는 예수님의 들러리가 되는 것으로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들러리가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주인공이 되고 싶고 썸씽(something)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그는 낫씽(nothing)이 되는 것으로 기뻐했습니다. 그 만큼 세례 요한은 순수하게 하나님을 사랑했고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그는 자기의 사명과 정체성을 말씀에서 찾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회적인 지위나 사람들의 인정이나 일의 성과에서 존재의미를 찾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단지 말씀에 대한 믿음에서부터 자신의 존재의미를 찾았습니다. 우리도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나의 정체성을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견고히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럴 때 여러 어려움들을 잘 극복하고 믿음의 전진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양들에게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철저하게 자기를 부인하자 그들은 화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를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세례를 주느냐(25)?” 이는 네가 무슨 자격증을 가지고 있기에 제사장들이나 할 수 있는 세례를 주느냐는 것입니다. 자신들한테서 공부한 적도 없는데 네가 무슨 자격으로 세례를 주느냐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주장하면서 너는 무슨 권세로 일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들과 논쟁을 하기 보다 예수님을 증거하기 시작합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네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27).”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둘째, 하나님의 어린 양
 29절을 보십시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모태에서부터 성령이 충만했던 세례 요한은 당시 어떤 사람보다도 세상 죄에 대해 민감하였습니다. 세상 죄는 배반하는 죄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그렇게 많이 받고도 배반하였습니다. 인간은 참으로 교만한 죄인입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께 감사치도 않고 영화롭게도 하지 않았습니다(롬1:21). 마음이 어둡고 허무하게 되자 우상을 숭배하였습니다. 우상 숭배는 결국 정욕 죄로 흐르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율법을 만들었습니다. 죄의 유형들을 정하고 조목조목 금지하는 법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규정들을 지키고자 투쟁했지만 사람들은 더욱 율법의 짐에 눌리게 됩니다. 사도 바울도 율법적인 투쟁을 하다가 지쳐서 탄식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롬7:24).” 모든 인간은 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피나는 투쟁을 하지만 결국은 죄의 세력에 패배하고 죽음으로 치달을 수 밖에 없습니다. 여기에 인간의 절망이 있습니다. 아무도 해결할 수 없는 죄의 무게로 인하여 인간은 불행한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죄를 짓고 양심의 공격을 받을 때 이를 방어할 능력이 없어서 자기 방어 기제가 발동하여 변명만 합니다. 인간은 자기의 죄를 합리화하고 변명하는데 생득적인 능력이 있습니다. 이는 조상 아담에게서 물려 받은 것입니다. 좀 고상한 사람들은 심리학이나 사회학의 이름으로 죄를 합리화합니다. 사회 환경이 어렵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합리화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술이나 마약으로 잊고자 합니다. 그러나 술과 마약에서 깨어나면 다시 생각이 나고 죄문제는 해결되어 있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일이나 성취를 통해서 잊고자 하지만 더욱 피곤한 인생이 될 뿐입니다. 선행을 통해서도 죄는 상쇄될 수 없습니다. 세례 요한은 죄로 고통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도록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감격하였습니다. “보라!” 그러면 무엇이 그로 하여금 감격하게 하였습니까? 이는 예수님께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이 말에서 “지고 가는” 이란 지고 가서 버린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멀리 가서는 그 죄들을 다 버리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어린양”은 아사셀 염소’혹은 희생의 어린양’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아사셀 염소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일년에 한 번씩 대 속죄 일에 흠없고 점없는 염소 한 마리를 잡아다가 그 머리에 안수하고는 사람이 살지 않는 광야로 내보냈습니다. 그러면 그 염소는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무인광야로 가서는 죄와 함께 죽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율법에 죄를 지은 백성이 하나님 앞으로 나와서 죄를 용서받는 길을 열어 놓으셨는데, 그것이 일년 된 어린양을 희생제물로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일년 된 어린양은 사람의 죄를 지고 사람 대신 희생되었습니다. 그 때의 어린양은 사람이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란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고 말할 때 가리킨 바로 그 어린 양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신 어린양이었습니다. 요한은 감격하여 외쳤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세례 요한은 세상 죄와 싸우면서 죄가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죄로 인한 사람들의 고통을 더 잘 알게 되었습니다. 죄의 세력은 정말로 끈질깁니다. 그래서 쉽게 끊어지지 않습니다. 마음을 다해서 사랑하고 섬긴 양으로부터 욕을 먹을 때 목자 생활에 대해서 힘든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때도 우리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죄를 묵상할 때 마음이 무거워지고 낙심하게 됩니다. 그래서 소감 쓰는 것도 부담스럽습니다. 그래서 소감을 쓰려고 책상 앞에 앉으면 이상하게 잠만 옵니다. 그러나 우리가 나의 죄를 다 해결하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 마음이 가벼워지고 심령이 밝아집니다. 소감도 쓰고 싶어 집니다. 죄사함을 받으면 얼굴이 환해지고 은혜를 전하고 싶어 집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2000년 전의 예수님께서 세상 죄를 지고 가신 것이 지금의 내 죄하고 무슨 상관이야”하고 반문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지고 간다”는 동사는 현재 분사로서 계속해서 지고 간다는 역동적인 개념이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2000년 전 십자가에서 한 번으로 완전하고도 영원한 속죄의 역사를 이루셨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계속해서 속죄의 역사를 이루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한 번에 다 지시고 그 다음부터는 우리 마음대로 살라고 하셨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요? 우리는 육신의 연약함과 사단의 시험에 빠져서 더욱 고통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날마다 우리 죄를 지고 가십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한 쓰레기가 나오게 되어 있듯이, 우리가 육신을 입고 살아 가는 한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다시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마는 현실이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자기 영광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만 구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마는 자칫하면 자기의 영광을 구합니다. 육신의 정욕이 다시는 우리를 괴롭히지 않는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마는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더 거룩하게 살려고 하면 할수록 오히려 죄는 더 드러납니다. 도대체 죄라는 것이 마치 양파 껍질을 벗기는 것과 같아서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날마다 우리 죄짐을 지고 가십니다. 마치 적어도 이틀에 한 번씩은 쓰레기차가 와서 모아놓은 쓰레기를 가져다가 버리듯이 예수님은 고백하는 우리의 죄를 그렇게 가져다가 버리십니다. 우리가 할 일은 날마다 회개하고 눈을 들어 예수님을 보는 것입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믿음으로 바라 보기만 하면 거기에 죄로부터의 구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되신 예수님은 우리의 죄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셨습니까?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기 전에 뿔달린 채찍으로 120대를 맞으셨습니다. 그의 몸은 쓰라렸습니다. 군병들은 그의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꾹 눌러 씌웠습니다. 거기서 피가 나서 이마 위를 지나서 볼 위로 흘러 내렸습니다. 그는 몸이 상하실 뿐만 아니라 마음도 상하셨습니다. 그가 장차 영광받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대제사장의 한 종은 손바닥으로 그의 뺨을 때렸습니다. 인간적으로 견디기 힘든 수모를 그는 다 당하셨습니다. 사람들에게 침뱉음을 당하셨습니다. 나중에 그의 옆구리는 창으로 깊이 찔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죄를 그의 어깨 위에 지우시고 십자가에서 수없이 까무라치면서 서서히 죽어가게 하셨습니다. 그는 내가 받아야 할 진노를 대신 받으시고 내가 받아야 할 욕을 대신 먹으시고 내 얼굴에 뱉어져야 할 침을 대신 받으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내가 받은 상처를 싸매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깊이 파인 상처를 치료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죄로 문들어진 형상을 회복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내 안에 하늘로부터 오는 평화를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가 내 대신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습니다.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나음을 입었도다. 나음을 입었도다. 내 대신 죄를 지고 가신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많은 문제가 있음을 압니다. 이 나라의 정치를 보면 소망을 두기 어렵다고 합니다. 경제는 조금 소망이 보입니다. 문화를 보면 어떠합니까? 도덕 불감증이 만연합니다. 그런데 도덕의 뿌리는 인간의 양심입니다. 그런데 양심이 하나님과의 분리로 인하여 부패되어 있습니다. 도덕성의 회복은 개개인의 죄문제가 해결되고 거룩함에 이르는 가운데 성취될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좋아지면 경제도, 정치도 다 잘 됩니다. 이 나라에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고 공평과 정의가 실현될 때 세계에 대해서 제사장 나라, 거룩한 나라가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 개개인도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게 될 때 참으로 복된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서 죄인들과 이 세상을 바라볼 때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단순하게 하나님의 어린 양되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 나를 그토록 짓누르던 죄의 짐이 벗겨지고 참 자유와 기쁨과 생명력이 넘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셋째, 성령 세례를 주시는 예수님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서 계속 말했습니다. “내가 보니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나도 그를 알지 못했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심으로 죄 문제를 해결하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성령 세례를 주심으로 세상 죄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하십니다. 요한의 물세례는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발견하고 깨닫게는 하지만 죄를 없애지는 못했습니다. 사람 자체를 바꾸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성령 세례는 사람 자체를 바꿉니다. 성령은 사람을 육적인 존재에서 영적인 존재로, 세속적인 존재에서 거룩한 존재로 새로 태어나게 합니다.  성령은 바람과 같습니다. 우리가 바람을 느낄 수는 있지만 볼 수는 없습니다. 성령님은 바람이 나무를 흔들고 풍력 발전기를 돌려서 에너지를 만들어 내듯이 사람을 변화시켜서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힘을 주십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평화를 주십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기쁨과 절제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주시는 성령 세례가 사람의 죄 문제를 뿌리로부터 해결함을 배우게 됩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내가 누구인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는 목자요, 캠퍼스 선교사입니다. 캠퍼스에서 주의 길을 예비하도록 외치는 소리입니다. 우리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바라보도록 외쳐야 합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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