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002년 봄학기 요한복음 제 1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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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봄학기 요한복음 제 1 강 493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말씀/요한복음 1:1-18
요절/요한복음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새 봄학기부터 요한복음을 공부하게 되어 감사합니다. 요한복음은 생명의 복음이라고 합니다. 사도 요한이 이 복음서를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영생을 얻도록 하기 위함입니다(20:31). 요한 복음은 공관복음과 달리 연역적인 방법으로 기록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심을 선포하고 나서 증명해 가는 방법을 쓰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영적인 깊이와 웅장함이 탁월합니다. 하나님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우리에게 주셔서 하나님을 알고 영생을 맛보며 살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 말씀은 하나님이십니다.
1절을 보십시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한복음의 영적인 깊이와 웅장함이 1절부터 나타납니다. 다른 복음서들은 베들레헴으로부터 시작하지만 요한복음은 하나님 아버지의 품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여기서 말씀은 제 2위의 하나님이신 성자 예수님을 가리킵니다(14, 계19:13). 말씀은 헬라어로 로고스로 되어 있는데 이는 헬라인들이 우주 안에 형체를 만들고 지시하는 원리로 생각했습니다. 헬라인들이 생각한 로고스는 비 인격체입니다. 그리고 철학적인 원리입니다. 많은 사상가들은 우주의 기원에 대해서 흥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제일 원인이 무엇인가? 어떻게 사물이 존재하게 되었고 어떻게 비인격적인 것들이 인격적인 것들이 되었을까? 많은 사람들은 제일 원인을 어떤 비인격적인 것 즉 물, 불, 흙, 에너지 등으로 제시했습니다. 나중에 학자들은 인간의 제일 원인은 아메바였다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이론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된 수준에서 아메바 수준, 곤충 수준으로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어떤 철학자도 어떻게 비인격적인 것에서 인격적인 존재로 발전할 수 있는지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이러한 질문들에 답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2,3절을 보십시오.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말씀이신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골1:16절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하나님께서 창조주라는 대 전제는 인간의 근본문제들을 해결해 줍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나는 부모님으로부터 왔다.”고 말한다면 그의 인생은 우연이거나 오발탄이거나 실수일 뿐입니다. 아무도 창조주 하나님 없이 인생의 절대적인 의미를 찾을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운명주의에 빠져서 “왜 내가 태어났을까? 왜? 왜?”라는 질문을 계속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운명주의를 세상의 명예나 부를 얻음으로서 극복해 보고자 합니다. 그러나 통계학은 우리에게 그것은 올바른 길이 아님을 말해줍니다. 노벨상을 받은 많은 사람들 가운데 자살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가와바다 야스나리라든가, 헤밍웨이 그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의미를 찾지 못하여 자살하였고 자살을 시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지으시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창조하셨음을 믿을 때 우리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인 목적을 두고 나를 창조하셨습니다. 나는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요14:1-4). 나의 일생 동안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선한 일을 할 것입니다(엡2:10).” 창조 신앙을 가지면 산과 강물 조차도 존재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만약 우리가 한강에게 “왜 너는 흐르고 있니?”라고 물으면 한강은 “나는 하나님께서 흐르라고 하셨기 때문에 흐르는 것이야”라고 말할 것입니다. 또 우리가 와우산에게 “너는 왜 거기 있니?”하고 묻는다면 그는 “하나님께서 나를 이곳에 있게 하셨기 때문이야”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만물은 스스로 존재하게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실 때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창1:3)” 이와 같이 성부 하나님이 계획하셨다면 성자 예수님은 직접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학자들은 우주의 기원에 대해서 여러 가지 설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모두가 기존 물질에서 무엇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처나 마호멧과 근본적으로 다른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예배의 대상이십니다.
둘째, 예수님은 생명의 주관자이십니다. 4절을 보십시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는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생명의 근원이시요, 생명의 수여자시요, 생명의 주인이심을 말해줍니다. 생명이란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생명의 현상에 대해서는 많은 말을 하지만 생명의 기원이나 본질에 대해서는 오리무중을 헤맵니다. 생명이란 참으로 신비스러운 것입니다. 나무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 봄이 되면 죽은 듯한 마른 나뭇가지에서 파릇파릇 새싹이 돋아나고 아름다운 꽃을 피웁니다. 사람에게 생명이 있기 때문에 활동하고 생각하고 사랑하고 미워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생명이 끊어지면 일순간에 모든 활동이 정지되고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가 버리고 맙니다. 이 생명이 도대체 어디서 온 것입니까? 생명의 기원에 관해서 생성론, 자연 발생설, 단백질 기원론 등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설일 뿐 그 이상의 아무것도 아닙니다. 생명이 단백질과 DNA로 구성되어 있다고 해서 그것만 모으면 생명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은 물질적인 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혼이 그 속에 있습니다. 사람은 생명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생명은 생명에서만 나옵니다. L. 파스퇴르는 1862년 미생물도 역시 어버이 없이는 자연 발생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생명은 반드시 생명에게서만 나온다는 생명 속전설을 입증하였습니다. 결국 모든 생명은 무한히 거슬러 올라가면 생명의 근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모든 생명의 근원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말씀은 생명의 기원에 관한 모든 논쟁을 불식시키고 예수님이 생명의 근원임을 엄숙히 선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근원이 되시고 생명의 수여자가 되실 뿐만 아니라 생명의 주인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각자에게 어느 기간 동안 생명을 부여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10년, 어떤 사람에게는 40년, 어떤 사람에게는 70년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명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내 자신의 생명과 나와는 어떤 관계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청지기입니다. 창조 신앙은 사람의 근본적인 생명문제를 해결해 줍니다. 마귀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덮칩니다. 그들이 악령의 다스림을 받을 때 가위에 눌려 삽니다. 마귀는 두려움을 심어 중풍병자가 되게 하고 끊임없이 염려하게 만듭니다.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계획에 따라서 주시기도 하시고 취하기도 하십니다. 우리의 생명은 근본적으로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만이 책임질 수 있으므로 예수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러면 이 생명이 사람들에게 어떤 역할을 합니까? 4절 하반부를 보십시오.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우리 안에 예수님의 생명을 갖게 될 때 우리는 사람들의 빛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은 사람들에게 빛의 역할을 합니다. 예수님 없이 인생이 절대적인 의미를 가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 없이 우리가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없다면 태양 아래서 하는 우리의 모든 수고가 너무나 고통스럽고 무의미합니다. 인생들에게는 빛이 필요합니다. 빛은 어두움을 물리치고 길을 제시해 줍니다. 또한 생명력을 공급해 주고 희망을 줍니다. 사람이 어두움 가운데서 예수님으로부터 생명의 빛을 받을 때 비로소 생명이 살아나게 됩니다. 그때 무기력한 인생에서 생명력이 넘치는 인생을 살게 되고, 절망적인 인생에서 희망찬 인생을 살게 됩니다. 또한 어둡고 운명적인 인생에서 환한 섭리의 인생을 살게 됩니다. 빛은 모든 것을 아름답게 합니다. 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빛을 어떻게 다룰 수 있는가 하는데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빛이 우리 마음에 비추일 때 그 사람의 내면이 밝아집니다. 생각이 밝아지고 긍정적이 됩니다. 그의 얼굴이 환해지고 삶이 밝아지고 그 주위가 밝아집니다. 그는 세상에서 빛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빛은 또한 살균 작용을 합니다. 그래서 어두운 가운데서 자라나는 죄의 병들을 몰아내고 죽입니다. 빛 가운데 사는 사람은 건강하고 밝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무기력한 인생, 어두운 인생, 운명적인 인생을 사는 근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생명의 빛을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생명의 빛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공부하는 가운데 생명의 근원되시는 예수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의 시들고 죽어가는 생명이 살아나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생명의 특징은 활동성과 재생산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은 그 안에 행복이 내포되어 있고 생명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악에 저항하는 힘, 세상의 물결을 이기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은 자라나서 번식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또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생명의 반대는 죽음인데 죽음은 분리를 의미합니다. 육적인 죽음은 몸과 영혼의 분리이고 영적인 죽음은 하나님과의 분리입니다. 하나님과 관계없이 살았다면 살았으나 죽은 삶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명력이 충만하려면 하나님과 연합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허물과 죄로 인해 죽었던 우리가 예수님으로 인해 생명을 얻었으면 거룩한 삶을 살도록 힘써야 합니다.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기 때문에 이 생명을 얻은 사람은 인생이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 지를 알고 인생의 목적과 의미를 알게 됩니다. 빛 가운데서 살기 때문에 그런 사람의 행동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본이 됩니다.
셋째, 참 빛 되신 예수님.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는 어두움이 빛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행위가 드러날까 두려워서 빛을 미워합니다. 사람들은 자기 행위가 악하기 때문에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했습니다. 정말 이 세상에서 의롭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결국 빛으로 나오게 됩니다. 9절을 보십시오.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보통 소크라테스는 촛불에 비유되고 석가는 등불에 비유됩니다. 현대 과학은 형광등과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참빛이 되십니다. 참빛의 특성은 각 사람에게 비췬다는 것입니다. 각 사람에게 인격적으로 비추입니다. 사람들은 각자의 어두움이 있습니다. 니고데모, 중풍병자, 사마리아 여인, 그리고 나의 어두움이 다 다릅니다. 예수님은 각자의 어두움을 말씀의 빛으로 몰아내시고 생명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예수님은 인종과 시대를 초월해서 모든 사람의 어두움을 해결해 주셨습니다.
넷째,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더 나아가서 그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전도자가 복음을 전할 때 이를 거부하는 사람도 있지만 영접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영접하는 자에게는 생명되신 예수님이 그 속에 있으므로 영생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실로 놀라운 특권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란 힘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명분을 넘어서서 자녀답게 살아 갈 수 있는 힘이 주어집니다. 죄를 이기는 힘, 어두움을 이기는 힘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되어갑니다. 세상 자녀들은 죄와 어두움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은 무력합니다. 죄의 종이기 때문에 죄에 끌려 다니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어지는 특권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보호를 받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그 자녀들의 필요를 공급해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그 자녀들을 징계도 하십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훈련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다운 면모를 지니게 합니다. 훈련이 없으면 사생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질병으로, 사고로, 물질 문제 등 여러 모양으로 우리를 훈련하십니다. 우리는 훈련의 때일수록 더욱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혈통으로도 안됩니다. 부모가 예수님을 잘 믿기 때문에 자식들이 자연히 구원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것입니다. 또 인간의 의지로는 안됩니다. 내가 지금부터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겠다고 굳게 결심해도 안됩니다. 또한 사람의 힘으로도 안됩니다. 남편이 아내를 변화 시킬 수 없으며, 부모가 자식을, 선배가 후배를, 스승이 제자를, 목자가 양을 새 사람되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심리학이나 교육으로도 안됩니다. 이는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이 가능합니다. 사람이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중생의 역사는 오직 성령께서 하실 수 있는 하나님 고유의 일입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때 성령께서 역사하사 변하여 새 사람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사 함께 거하게 하셨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것은 엄청난 자기 비하입니다. 사성 장군인 사령관이 이등병이 되는 것은 엄청난 수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영광과 특권을 버리고 육신을 입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천군 천사들의 호위와 찬양을 받으시면서 일하실 수 있는데 아담의 타락한 육신을 입으시고 친히 죄인들과 함께 사셨습니다. 그렇게 영광스러운 분이 죄인들과 함께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연약함과 질병과 질고를 다 체험하셨습니다. 예수님도 배가 고프셨고 피로하셨습니다. 그는 일하다가 지쳐 쓰러질 때도 있었습니다. 더구나 그는 인간의 슬픔과 기쁨을 아십니다. 그도 몸살을 앓으시고 삭신이 쑤시는 고통을 체험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기 위해서 채찍에 맞으시고 욕을 먹으시고 가시 면류관을 쓰셨습니다. 그는 인간의 취약점을 지니고 있는 육신을 입으셨기 때문에 우리의 연약함을 잘 이해하십니다. 성육신하신 하나님께서 죄인들과 함께 하는 것은 구약의 성막에 대한 완전한 성취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고 자고 만져보고 느끼는 가운데 그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했습니다. 은혜는 값없이 주는 선물입니다. 그는 죄인들을 용납하시고 값없이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십니다. 또한 그에게는 진리가 충만하십니다. 그에게는 지혜와 지식의 말씀이 충만하십니다. 그 말씀은 사람을 살리는 영의 양식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자기보다 6개월 늦게 태어났지만 자기보다 먼저 계셨다고 증거함으로 그가 하나님이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입니다(16). 그는 생명이 충만하시고 빛이 충만하시고 힘이 충만하십니다. 그는 사랑이 충만하십니다. 우리는 받는 삶을 삽니다. 우리는 소모하기만 하므로 예수님으로부터 계속해서 충전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에게서 생명을 받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말라져서 밖에 버리워지게 됩니다. 우리가 사는 길을 예수님께 접붙임을 받아서 끊임없이 생명의 진액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에게서 생명뿐만 아니라 은혜도 받습니다. 그런데 과거에 받은 구원의 은혜, 죄사함의 은혜뿐만 아니라 또 다른 은혜를 주십니다. 언제나 끊임없이 베풀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과거에 받은 은혜에만 매여 있으면 안됩니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봅니다. 예수님은 계시의 완성자이십니다. 또한 마지막 계시자이십니다. 독생하신 예수님은 하나님을 설명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일찌기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고 빛이시므로 아무도 볼 수 없습니다(딤전6:16).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께 와서 그를 개인적인 구주로 영접하면 하나님을 볼 수 있고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게 됩니다. 우리는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참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풍성하기를 기도합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말씀/요한복음 1:1-18
요절/요한복음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새 봄학기부터 요한복음을 공부하게 되어 감사합니다. 요한복음은 생명의 복음이라고 합니다. 사도 요한이 이 복음서를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영생을 얻도록 하기 위함입니다(20:31). 요한 복음은 공관복음과 달리 연역적인 방법으로 기록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심을 선포하고 나서 증명해 가는 방법을 쓰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영적인 깊이와 웅장함이 탁월합니다. 하나님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우리에게 주셔서 하나님을 알고 영생을 맛보며 살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 말씀은 하나님이십니다.
1절을 보십시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한복음의 영적인 깊이와 웅장함이 1절부터 나타납니다. 다른 복음서들은 베들레헴으로부터 시작하지만 요한복음은 하나님 아버지의 품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여기서 말씀은 제 2위의 하나님이신 성자 예수님을 가리킵니다(14, 계19:13). 말씀은 헬라어로 로고스로 되어 있는데 이는 헬라인들이 우주 안에 형체를 만들고 지시하는 원리로 생각했습니다. 헬라인들이 생각한 로고스는 비 인격체입니다. 그리고 철학적인 원리입니다. 많은 사상가들은 우주의 기원에 대해서 흥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제일 원인이 무엇인가? 어떻게 사물이 존재하게 되었고 어떻게 비인격적인 것들이 인격적인 것들이 되었을까? 많은 사람들은 제일 원인을 어떤 비인격적인 것 즉 물, 불, 흙, 에너지 등으로 제시했습니다. 나중에 학자들은 인간의 제일 원인은 아메바였다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이론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된 수준에서 아메바 수준, 곤충 수준으로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어떤 철학자도 어떻게 비인격적인 것에서 인격적인 존재로 발전할 수 있는지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이러한 질문들에 답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2,3절을 보십시오.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말씀이신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골1:16절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하나님께서 창조주라는 대 전제는 인간의 근본문제들을 해결해 줍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나는 부모님으로부터 왔다.”고 말한다면 그의 인생은 우연이거나 오발탄이거나 실수일 뿐입니다. 아무도 창조주 하나님 없이 인생의 절대적인 의미를 찾을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운명주의에 빠져서 “왜 내가 태어났을까? 왜? 왜?”라는 질문을 계속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운명주의를 세상의 명예나 부를 얻음으로서 극복해 보고자 합니다. 그러나 통계학은 우리에게 그것은 올바른 길이 아님을 말해줍니다. 노벨상을 받은 많은 사람들 가운데 자살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가와바다 야스나리라든가, 헤밍웨이 그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의미를 찾지 못하여 자살하였고 자살을 시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지으시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창조하셨음을 믿을 때 우리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인 목적을 두고 나를 창조하셨습니다. 나는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요14:1-4). 나의 일생 동안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선한 일을 할 것입니다(엡2:10).” 창조 신앙을 가지면 산과 강물 조차도 존재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만약 우리가 한강에게 “왜 너는 흐르고 있니?”라고 물으면 한강은 “나는 하나님께서 흐르라고 하셨기 때문에 흐르는 것이야”라고 말할 것입니다. 또 우리가 와우산에게 “너는 왜 거기 있니?”하고 묻는다면 그는 “하나님께서 나를 이곳에 있게 하셨기 때문이야”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만물은 스스로 존재하게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실 때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창1:3)” 이와 같이 성부 하나님이 계획하셨다면 성자 예수님은 직접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학자들은 우주의 기원에 대해서 여러 가지 설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모두가 기존 물질에서 무엇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처나 마호멧과 근본적으로 다른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예배의 대상이십니다.
둘째, 예수님은 생명의 주관자이십니다. 4절을 보십시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는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생명의 근원이시요, 생명의 수여자시요, 생명의 주인이심을 말해줍니다. 생명이란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생명의 현상에 대해서는 많은 말을 하지만 생명의 기원이나 본질에 대해서는 오리무중을 헤맵니다. 생명이란 참으로 신비스러운 것입니다. 나무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 봄이 되면 죽은 듯한 마른 나뭇가지에서 파릇파릇 새싹이 돋아나고 아름다운 꽃을 피웁니다. 사람에게 생명이 있기 때문에 활동하고 생각하고 사랑하고 미워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생명이 끊어지면 일순간에 모든 활동이 정지되고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가 버리고 맙니다. 이 생명이 도대체 어디서 온 것입니까? 생명의 기원에 관해서 생성론, 자연 발생설, 단백질 기원론 등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설일 뿐 그 이상의 아무것도 아닙니다. 생명이 단백질과 DNA로 구성되어 있다고 해서 그것만 모으면 생명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은 물질적인 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혼이 그 속에 있습니다. 사람은 생명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생명은 생명에서만 나옵니다. L. 파스퇴르는 1862년 미생물도 역시 어버이 없이는 자연 발생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생명은 반드시 생명에게서만 나온다는 생명 속전설을 입증하였습니다. 결국 모든 생명은 무한히 거슬러 올라가면 생명의 근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모든 생명의 근원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말씀은 생명의 기원에 관한 모든 논쟁을 불식시키고 예수님이 생명의 근원임을 엄숙히 선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근원이 되시고 생명의 수여자가 되실 뿐만 아니라 생명의 주인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각자에게 어느 기간 동안 생명을 부여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10년, 어떤 사람에게는 40년, 어떤 사람에게는 70년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명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내 자신의 생명과 나와는 어떤 관계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청지기입니다. 창조 신앙은 사람의 근본적인 생명문제를 해결해 줍니다. 마귀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덮칩니다. 그들이 악령의 다스림을 받을 때 가위에 눌려 삽니다. 마귀는 두려움을 심어 중풍병자가 되게 하고 끊임없이 염려하게 만듭니다.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계획에 따라서 주시기도 하시고 취하기도 하십니다. 우리의 생명은 근본적으로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만이 책임질 수 있으므로 예수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러면 이 생명이 사람들에게 어떤 역할을 합니까? 4절 하반부를 보십시오.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우리 안에 예수님의 생명을 갖게 될 때 우리는 사람들의 빛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은 사람들에게 빛의 역할을 합니다. 예수님 없이 인생이 절대적인 의미를 가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 없이 우리가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없다면 태양 아래서 하는 우리의 모든 수고가 너무나 고통스럽고 무의미합니다. 인생들에게는 빛이 필요합니다. 빛은 어두움을 물리치고 길을 제시해 줍니다. 또한 생명력을 공급해 주고 희망을 줍니다. 사람이 어두움 가운데서 예수님으로부터 생명의 빛을 받을 때 비로소 생명이 살아나게 됩니다. 그때 무기력한 인생에서 생명력이 넘치는 인생을 살게 되고, 절망적인 인생에서 희망찬 인생을 살게 됩니다. 또한 어둡고 운명적인 인생에서 환한 섭리의 인생을 살게 됩니다. 빛은 모든 것을 아름답게 합니다. 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빛을 어떻게 다룰 수 있는가 하는데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빛이 우리 마음에 비추일 때 그 사람의 내면이 밝아집니다. 생각이 밝아지고 긍정적이 됩니다. 그의 얼굴이 환해지고 삶이 밝아지고 그 주위가 밝아집니다. 그는 세상에서 빛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빛은 또한 살균 작용을 합니다. 그래서 어두운 가운데서 자라나는 죄의 병들을 몰아내고 죽입니다. 빛 가운데 사는 사람은 건강하고 밝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무기력한 인생, 어두운 인생, 운명적인 인생을 사는 근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생명의 빛을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생명의 빛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공부하는 가운데 생명의 근원되시는 예수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의 시들고 죽어가는 생명이 살아나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생명의 특징은 활동성과 재생산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은 그 안에 행복이 내포되어 있고 생명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악에 저항하는 힘, 세상의 물결을 이기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은 자라나서 번식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또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생명의 반대는 죽음인데 죽음은 분리를 의미합니다. 육적인 죽음은 몸과 영혼의 분리이고 영적인 죽음은 하나님과의 분리입니다. 하나님과 관계없이 살았다면 살았으나 죽은 삶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명력이 충만하려면 하나님과 연합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허물과 죄로 인해 죽었던 우리가 예수님으로 인해 생명을 얻었으면 거룩한 삶을 살도록 힘써야 합니다.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기 때문에 이 생명을 얻은 사람은 인생이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 지를 알고 인생의 목적과 의미를 알게 됩니다. 빛 가운데서 살기 때문에 그런 사람의 행동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본이 됩니다.
셋째, 참 빛 되신 예수님.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는 어두움이 빛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행위가 드러날까 두려워서 빛을 미워합니다. 사람들은 자기 행위가 악하기 때문에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했습니다. 정말 이 세상에서 의롭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결국 빛으로 나오게 됩니다. 9절을 보십시오.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보통 소크라테스는 촛불에 비유되고 석가는 등불에 비유됩니다. 현대 과학은 형광등과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참빛이 되십니다. 참빛의 특성은 각 사람에게 비췬다는 것입니다. 각 사람에게 인격적으로 비추입니다. 사람들은 각자의 어두움이 있습니다. 니고데모, 중풍병자, 사마리아 여인, 그리고 나의 어두움이 다 다릅니다. 예수님은 각자의 어두움을 말씀의 빛으로 몰아내시고 생명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예수님은 인종과 시대를 초월해서 모든 사람의 어두움을 해결해 주셨습니다.
넷째,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더 나아가서 그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전도자가 복음을 전할 때 이를 거부하는 사람도 있지만 영접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영접하는 자에게는 생명되신 예수님이 그 속에 있으므로 영생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실로 놀라운 특권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란 힘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명분을 넘어서서 자녀답게 살아 갈 수 있는 힘이 주어집니다. 죄를 이기는 힘, 어두움을 이기는 힘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되어갑니다. 세상 자녀들은 죄와 어두움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은 무력합니다. 죄의 종이기 때문에 죄에 끌려 다니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어지는 특권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보호를 받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그 자녀들의 필요를 공급해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그 자녀들을 징계도 하십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훈련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다운 면모를 지니게 합니다. 훈련이 없으면 사생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질병으로, 사고로, 물질 문제 등 여러 모양으로 우리를 훈련하십니다. 우리는 훈련의 때일수록 더욱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혈통으로도 안됩니다. 부모가 예수님을 잘 믿기 때문에 자식들이 자연히 구원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것입니다. 또 인간의 의지로는 안됩니다. 내가 지금부터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겠다고 굳게 결심해도 안됩니다. 또한 사람의 힘으로도 안됩니다. 남편이 아내를 변화 시킬 수 없으며, 부모가 자식을, 선배가 후배를, 스승이 제자를, 목자가 양을 새 사람되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심리학이나 교육으로도 안됩니다. 이는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이 가능합니다. 사람이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중생의 역사는 오직 성령께서 하실 수 있는 하나님 고유의 일입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때 성령께서 역사하사 변하여 새 사람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사 함께 거하게 하셨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것은 엄청난 자기 비하입니다. 사성 장군인 사령관이 이등병이 되는 것은 엄청난 수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영광과 특권을 버리고 육신을 입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천군 천사들의 호위와 찬양을 받으시면서 일하실 수 있는데 아담의 타락한 육신을 입으시고 친히 죄인들과 함께 사셨습니다. 그렇게 영광스러운 분이 죄인들과 함께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연약함과 질병과 질고를 다 체험하셨습니다. 예수님도 배가 고프셨고 피로하셨습니다. 그는 일하다가 지쳐 쓰러질 때도 있었습니다. 더구나 그는 인간의 슬픔과 기쁨을 아십니다. 그도 몸살을 앓으시고 삭신이 쑤시는 고통을 체험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기 위해서 채찍에 맞으시고 욕을 먹으시고 가시 면류관을 쓰셨습니다. 그는 인간의 취약점을 지니고 있는 육신을 입으셨기 때문에 우리의 연약함을 잘 이해하십니다. 성육신하신 하나님께서 죄인들과 함께 하는 것은 구약의 성막에 대한 완전한 성취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고 자고 만져보고 느끼는 가운데 그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했습니다. 은혜는 값없이 주는 선물입니다. 그는 죄인들을 용납하시고 값없이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십니다. 또한 그에게는 진리가 충만하십니다. 그에게는 지혜와 지식의 말씀이 충만하십니다. 그 말씀은 사람을 살리는 영의 양식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자기보다 6개월 늦게 태어났지만 자기보다 먼저 계셨다고 증거함으로 그가 하나님이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입니다(16). 그는 생명이 충만하시고 빛이 충만하시고 힘이 충만하십니다. 그는 사랑이 충만하십니다. 우리는 받는 삶을 삽니다. 우리는 소모하기만 하므로 예수님으로부터 계속해서 충전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에게서 생명을 받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말라져서 밖에 버리워지게 됩니다. 우리가 사는 길을 예수님께 접붙임을 받아서 끊임없이 생명의 진액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에게서 생명뿐만 아니라 은혜도 받습니다. 그런데 과거에 받은 구원의 은혜, 죄사함의 은혜뿐만 아니라 또 다른 은혜를 주십니다. 언제나 끊임없이 베풀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과거에 받은 은혜에만 매여 있으면 안됩니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봅니다. 예수님은 계시의 완성자이십니다. 또한 마지막 계시자이십니다. 독생하신 예수님은 하나님을 설명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일찌기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고 빛이시므로 아무도 볼 수 없습니다(딤전6:16).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께 와서 그를 개인적인 구주로 영접하면 하나님을 볼 수 있고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게 됩니다. 우리는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참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풍성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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