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요26강(20장)/부활하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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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요한복음 제 26 강 150
말씀 / 요한복음 20:1-31
요절 / 요한복음 20:17
부활하신 예수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
요한 복음 공부를 통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생명을 얻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기독교를 받치고 있는 두 기둥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우리는 살아계신 주님을 섬기고 동행하며 그의 인도함을 받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야말로 우리의 삶에 생명을 불어넣어 줄 뿐만 아니라 산 소망을 갖게 합니다. 이 시간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증거들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증인들을 만나보는 가운데 우리도 부활 신앙을 새롭게 덧입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마리아야(1-23)
안식 후 첫날 즉 주일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 간 것을 보았습니다. 이때 무덤에 간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외에도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가 있었는데 요한복음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초점을 맞추어서 기록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그녀가 부활의 첫 목격자이고 다른 여자들은 무서워서 아무 말도 못하였는데 그녀가 다른 사람들에게 부활의 소식을 증거한 첫 증인이기 때문입니다. 또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어 그의 장사를 미리 준비한 여인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막달라 마리아는 어떤 여인이었습니까? 그녀는 일곱 귀신이 들려 고통하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 내 주셔서 온전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귀신이 들리는 것은 병의 일반적인 원인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큰 병에 걸려 고통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녀는 육체적, 심리적, 도덕적으로 심한 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죄인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눅7:36).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서 죄사함을 받고 영육간에 온전함을 회복하게 되자 예수님과 제자들을 자기 소유로 섬겼습니다(눅8:1-3).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시는 것과 매장되기 까지 지켜 보았고, 죽은 지 삼일만에 시체에 바를 향유를 가지고 무덤에 갔습니다. 그런데 무덤 입구를 막고 있던 커다란 돌이 옮겨지고 시체가 없어진 것을 보고 요한과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에게 달려가서 말했습니다. “사람이 주를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2b).”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체를 부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무덤에 둔 것을 지켜 보았던 사람입니다(막15:47). 그러므로 다른 무덤에 가서 예수님의 시체를 찾았을 리는 없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원수들이 시체를 훔쳐갔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예수님께서 예언하신 대로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총독 빌라도에게 가서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해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들은 제자들이 시체를 도적질하여 가서 백성들에게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유혹이 전보다 더 될까 두려워 힘대로 파숫꾼들을 데려다가 굳게 지켰습니다. 그리고 무덤 입구를 막고 있던 돌을 인봉하고 굳게 지켰습니다(마27:62-66). 이런 상황을 볼 때 그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갔을 리는 없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증거할 때 여기 시체가 있지 않느냐고 증거하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죽은 지 삼일 째 되던 이른 아침에 큰 지진과 함께 주의 천사를 보내어 무덤에서 돌을 굴려 내고 예수님을 부활시키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를 통해서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졌다는 소식을 들은 베드로와 요한은 나가서 무덤으로 달음박질을 쳤습니다. 그런데 그 다른 제자인 요한이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 먼저 무덤에 이르렀습니다. 요한이 베드로보다 더 젊기 때문에 달리기도 더 잘했던 것 같습니다. 나이는 속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몸을 구푸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지만 들어가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시몬 베드로는 달려서 지체없이 무덤 문을 통과하여 시체를 뉘었던 곳에서야 멈추어 섰습니다. 이 두 사람의 성격이 대조적으로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는 현장에 있던 사람이 아니고는 이렇게 쓸 수 없는 것입니다. 이는 저자의 기록이 얼마나 진실된가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저자 요한도 그때서야 무덤에 들어가 보니 머리를 쌌던 수건이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었습니다(7). 예수님의 시체를 쌌던 세마포는 누에 고치가 빠져나간 것처럼 비어 있었고 머리를 쌌던 세마포는 잘 개켜 있었습니다. 이 상황은 누가 시체를 훔쳐 갔다고 볼 수 없습니다. 어떤 도둑놈이 시체를 몸뚱아리만 빼내서 가져가고 또 얼마나 여유가 있다고 머리를 쌌던 수건을 잘 개켜놓고 가겠습니까? 빈 무덤과 세마포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말없이 증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두 제자는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였습니다(9). 그들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것이라는 말씀은 들었지만 영적인 눈이 감겨서 눈에 보이는 상황을 보고도 해석하지를 못했습니다. 지식이 없는 사람은 눈뜬 봉사와 같을 때가 많습니다. 두 제자는 계속해서 이상한 일만 생기는 현실을 답답해 하면서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10).
그런데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계속 울고 있었습니다. 울면서도 혹시 무덤 속에 무엇이 남아 있는가 생각하여 구푸려 무덤 속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그런데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아 있었습니다. 천사들이 마리아를 위로하였습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천사들이 볼 때 지금은 기뻐해야 할 때인데 울고 있는 것이 안쓰러웠습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하는 말이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님께서 서신 것을 보았지만 예수신 줄 알지 못하였습니다(14). 마리아가 계속해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기 때문에, 또는 아직 어두 컴컴한 새벽이라서 못 알아 보았을까요? 아마 그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울고 있는 마리아를 어떻게 도우셨습니까? 1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로 알고 가로되 주여 당신이 옮겨 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예수님께 대한 마리아의 사랑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 무거운 시체가 어디 있는지 가르쳐만 주신다면 자기가 가져가겠다는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시체를 막 달라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오직 예수님의 시체에만 마음이 가 있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으신 불쌍하신 예수님, 아무 죄 없으신 예수님이 왜 그렇게 죽으셔야 했는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한없이 슬퍼서 눈물만 흘러내렸습니다. 예수님은 슬픔에 압도되어 있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고 물었습니다. 이 말씀은 너는 더 이상 울 이유가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고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약속대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지금 부활하신 예수님은 왕의 왕이요 주의 주가 되셨습니다(계19:16). 그는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녀는 기뻐해야 합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기 때문에 계속해서 울고 있었습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날 리가 없다는 선입관을 강하게 가지고 있는 막달라 마리아의 눈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부활 신앙이 없을 때 막달라 마리아와 같이 울 수 밖에 없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 사랑하고 헌신했던 예수님이 없어졌을 때 그 빈자리는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었습니다. 시체라도 있으면 그나마 위안이 되었을텐데 시체마저 없어졌으니 바람을 잡으려는 사람처럼 허공을 쳤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힘이 빠지는 것은 당연해 보입니다. 자신이 주님께 헌신했던 과거에 대해서는 아무 미련이 없지만 앞으로 어떻게 살아간단 말인가 생각할 수가 없었습니다. 더 이상 살아갈 의미를 찾지 못했고 살아갈 힘도 없었습니다. 빨리 죽어서라도 예수님을 보고 싶을 뿐이었습니다. 때로 우리는 신앙 생활을 하다가 현실이 주는 무게 때문에 울고만 있을 때가 있습니다. 제자 생활에 비전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헌신한 결과가 헛되다고 생각할 때 절망의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나만 공연히 헛 고생을 해 온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변함없이 사랑하지만 상황을 변화시킬 힘이 없습니다. 이런 우리들을 예수님께서는 깊이 이해하시고 인격적으로 찾아오십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여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시며 자기 이름을 부르시자 그때서야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이와 같이 부활하신 예수님과 인격적인 만남이 있을 때 영적인 눈이 떠지게 됩니다. 엠마오 상의 두 제자도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걸어가면서 대화를 했지만 알아보지 못하다가 함께 식사를 하면서 영적인 눈이 떠지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사울아 사울아”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빛 가운데서 들었을 때에야 그 분이 바로 부활하신 나사렛 예수 주 그리스도이심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인해 우리에게 어떤 은혜가 임했는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그런데 죽음 자체보다 그 영향력이 주는 죽음의 요소들이 우리를 실제적으로 못쓰게 만듭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런 죽음의 요소들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음으로 생명력이 넘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죽기를 무서워하지 않으니 죽기 살기로 하면,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고 능력을 덧입게 됩니다. 두려움을 극복하고 도전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죄의 삯인 사망을 깨뜨림으로ㅏ우리의 죄문제를 다 해결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부활 신앙이 있을 때 우리는 죄의 세력을 이기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진리에 기초한 삶, 의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 결과 영적 성장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영생을 줍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들이 됩니다. 환란 가운데서 강 같은 평화를 누리고 기뻐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생명의 환희를 누리게 됩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산 소망을 줍니다. 우리도 부활하여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주님과 함께 살게 될 것입니다. 마리아가 이런 의미를 다 몰랐다 할지라도 그녀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게 되니 너무나 기쁘고 어찌할 줄을 몰랐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이 세상에 막 붙잡아 두고 싶었습니다. 변화산 상의 제자들처럼 예수님을 꼭 붙잡아두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이 순간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17).”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마리아와 새로운 관계를 맺기를 원하십니다. 그는 더 이상 형제 목자가 아니라 만 왕의 왕이시오 주의 주이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 권세로 믿는 자들에게 영생을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시고 효과적으로 다스리십니다. 그는 하나님 우편에 앉으셔서 하나님의 의로우신 눈을 자기에게 향하게 하십니다. 그는 우리를 위해서 중보하심으로 비참한 죄인들이 공포로 가득 차 있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 보좌를 은혜와 관대함으로 채워주십니다. 예수님은 “내가 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라(요16:7)”고 증거하셨습니다. 그가 승천하시므로 그의 육체적인 임재는 우리의 육안에서 거두어 갔지만 하나님께 올라가심으로 제자들과 얼마나 친밀하게 되었는지 말씀하셨습니다. 승천하신 예수님은 믿는 자들과 성령으로 연합하십니다. 예수님의 승천으로 인해서 우리는 임마누엘의 은혜를 덧입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우리 안에 항상 함께 거하십니다. 살아서 우리를 도우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소망으로 가득하기를 바라십니다.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갖도록 하실 뿐 하니라 우리의 머리되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그가 승천하심으로 날마다 그 택한 백성들에게 신령한 양식으로 배부르게 해 주십니다. 그는 높이 하늘에 앉으사 우리를 그의 권능으로 변화시키고 영적 생명력으로 생기를 주시고 그의 성령으로 우리를 성화시켜 주시고 교회를 여러 가지 은사로 채워 주십니다. 그리고 그가 승천하심으로 원수들을 그 손의 강력으로 견제하시고 교회를 보호하시며 우리의 기도를 일일이 들어 응답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심으로 아담 때부터 계속 닫혀 있던 하늘 나라에 들어갈 길을 개통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승천하심으로 우리는 주님과 더욱 생생한 교제를 하고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으면서 사명인으로 끝까지 충성을 다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조금 일하고 잘 쉬고자 할 때 향락과 안일에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삶의 자세는 신앙 생활에는 독소입니다. 우리가 주 5일 근무제가 확산되는 이런 때에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굳게 붙잡고 주님을 위해서 더욱 헌신하는 토요일이 되도록 힘을 써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유럽 교회의 전철을 밟을 수 밖에 없습니다. 유럽 사회가 주 5일 근무제를 도입하면서 유럽 교회도 안일하고 타락하기 시작했고 교회는 텅텅 비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굳게 붙잡고 더욱 사명에 충성을 다 할 수 있도록 휴일을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부활의 증인이 되라는 사명을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모르고 상심한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랑의 표현으로서 구제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복음을 전해주는 것입니다.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는 복음을 전해서 제자들을 양육하고 훈련하여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나아가 부활의 복된 소식을 증거하라고 하십니다. 마리아는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고 증거했습니다. 또 주께서 자기에게 말씀하신 것들을 증거했습니다. 마리아의 얼굴은 빛이 났고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그녀는 살 맛이 났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마리아의 삶은 기쁨과 확신으로 가득 찼습니다.
둘째, 도마의 신앙 고백(19-31)
안식 후 첫날 저녁 그러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신 그날 저녁에 제자들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막달라 마리아에게 들었지만 여전히 두려웠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졌다고 자신들을 잡아서 족칠 것만 같았습니다. 부활 신앙이 없으면 자매님들은 슬픔에, 형제들은 두려움에 종노릇합니다. 슬픔과 두려움은 죽음의 권세입니다. 남자의 상징은 용감무쌍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한때 ‘내가 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겠나이다’라고 용감하게 맹세했습니다(13:37). 그러나 지금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자 다른 제자들도 두려움으로 떨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노크 소리만 나도 깜짝 깜짝 놀랐습니다. 그들은 두려움으로 인해서 손발이 굳어 버리고 머리도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두려움은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두려움은 사람을 쓸모없게 만듭니다. 사람에게 두려움이 생길 때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징은 마음의 문을 꽉 닫아버리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성을 단절하고 폐쇄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이것이 심할 경우에 대인공포증, 광장공포증, 자폐증이 일어납니다. 그 정도 까지는 아니더라도 소심하고 무기력하게 의욕상실에 걸려서 지내는 경우도 많습니다. 청년으로서의 기백과 용기를 상실하고 다 죽어가는 노인네처럼 힘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불면증과 악령에 시달립니다. 사실 제자들은 두려워할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죽음 권세를 파하시고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여전히 사시나무 떨 듯 떨고 있었습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을 예수님은 어떻게 도와주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찾아오셔서 말할 수 없는 평강을 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닫힌 문들을 통과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은 영광스러운 몸이요 신령한 몸이요 강하고 썩지 않는 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은 하늘 나라에서 살기에 합당한 변화된 몸입니다. 장차 우리도 영화롭게 될 때 이런 몸을 덧입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운데 서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하시며 손과 옆구리를 보이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제자들의 마음은 한없이 평화롭고 기뻤습니다. 새 생명을 얻으신 예수님을 보는 제자들의 마음에는 새 소망이 움텄습니다. 두려움이 사라지고 새 힘이 생겼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자신을 보인 후에 또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에 있던 두려움을 깨끗이 제거하기 위해서 이렇게 반복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하시며 제자들을 전도자요 선교사로 세상에 파송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오순절에 받게 될 성령의 역사를 예표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을 때 담대하게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죄사함을 선포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죄를 사하는 권세는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께서 이루신 구속 역사에 기초해서 죄사함의 역사가 일어나는데 성령께서는 사람을 통해서 사죄의 복음을 전하시고, 받는 사람이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을 때 사죄를 받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믿는 모든 자에게 주신 것입니다. 신자끼리의 이런 사죄 권이란 어디까지나 부차적이요 종속적입니다. 그것이 홀로 하나님만이 죄를 사하신다는 원리에 저촉되지 않습니다.
열 두 제자 중에 하나인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예수님이 오셨을 때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비참하게 죽으신 것을 비관한 나머지 홀로 어디 가서 우수에 잠겨 있다가 돌아왔습니다. 그가 돌아오니 제자들이 한결같이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고 증거하는 것이었습니다. 도마는 이런 제자들이 무슨 환영을 보았던지 돌았다 생각하고 말했습니다.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25).” 그는 의심이 많은 사람이라 자기 손으로 만져보고 자기 눈으로 보아야만 믿겠다고 완고하게 말하였습니다. 증거 없이는 믿을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는 제자들의 증거를 믿지 못하는 불신과 교만이 있었습니다. 이 때의 도마의 태도야 말로 신앙을 떠난 과학자, 실증론자, 합리주의자들의 태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도마를 돕기 위해서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오셨습니다. 제자들의 모임에 오셔서 가운데 서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도마에게 이르셨습니다. 27절을 보십시오.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예수님은 도마를 인격적으로 도우셔서 의심과 불신을 깨치고 믿음의 사람이 되도록 섬기셨습니다.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옆구리에 손가락을 넣어볼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도마는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신앙 고백을 하였습니다. 그는 모든 회의론자, 의심병자, 실증주의자들의 대부격이었습니다. 도마가 믿었다는 것은 앞으로 수많은 회의론자들이 주님께 돌아올 것을 예견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이런 사람들도 주님을 위해서 순교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신앙 고백을 받으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29).” 보고서도 믿지 못하는 자들은 가장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보고서 믿는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입니다. 정말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빈무덤과 세마포, 증인들의 증거를 통해서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증거에 기초해서 믿음을 갖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믿음을 주십니다. 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일곱 가지 기적만을 기록함은 우리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우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세상의 빛 되신 주 안에서 거닐며, 교제하는 생활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빛 안에서 거닌다는 것은 그의 사랑에 거한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은 빛과 사랑과 생명의 복음이요 믿음의 복음입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풍성한 생명을 누리시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요한복음 20:1-31
요절 / 요한복음 20:17
부활하신 예수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
요한 복음 공부를 통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생명을 얻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기독교를 받치고 있는 두 기둥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우리는 살아계신 주님을 섬기고 동행하며 그의 인도함을 받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야말로 우리의 삶에 생명을 불어넣어 줄 뿐만 아니라 산 소망을 갖게 합니다. 이 시간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증거들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증인들을 만나보는 가운데 우리도 부활 신앙을 새롭게 덧입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마리아야(1-23)
안식 후 첫날 즉 주일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 간 것을 보았습니다. 이때 무덤에 간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외에도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가 있었는데 요한복음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초점을 맞추어서 기록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그녀가 부활의 첫 목격자이고 다른 여자들은 무서워서 아무 말도 못하였는데 그녀가 다른 사람들에게 부활의 소식을 증거한 첫 증인이기 때문입니다. 또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어 그의 장사를 미리 준비한 여인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막달라 마리아는 어떤 여인이었습니까? 그녀는 일곱 귀신이 들려 고통하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 내 주셔서 온전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귀신이 들리는 것은 병의 일반적인 원인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큰 병에 걸려 고통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녀는 육체적, 심리적, 도덕적으로 심한 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죄인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눅7:36).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서 죄사함을 받고 영육간에 온전함을 회복하게 되자 예수님과 제자들을 자기 소유로 섬겼습니다(눅8:1-3).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시는 것과 매장되기 까지 지켜 보았고, 죽은 지 삼일만에 시체에 바를 향유를 가지고 무덤에 갔습니다. 그런데 무덤 입구를 막고 있던 커다란 돌이 옮겨지고 시체가 없어진 것을 보고 요한과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에게 달려가서 말했습니다. “사람이 주를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2b).”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체를 부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무덤에 둔 것을 지켜 보았던 사람입니다(막15:47). 그러므로 다른 무덤에 가서 예수님의 시체를 찾았을 리는 없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원수들이 시체를 훔쳐갔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예수님께서 예언하신 대로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총독 빌라도에게 가서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해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들은 제자들이 시체를 도적질하여 가서 백성들에게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유혹이 전보다 더 될까 두려워 힘대로 파숫꾼들을 데려다가 굳게 지켰습니다. 그리고 무덤 입구를 막고 있던 돌을 인봉하고 굳게 지켰습니다(마27:62-66). 이런 상황을 볼 때 그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갔을 리는 없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증거할 때 여기 시체가 있지 않느냐고 증거하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죽은 지 삼일 째 되던 이른 아침에 큰 지진과 함께 주의 천사를 보내어 무덤에서 돌을 굴려 내고 예수님을 부활시키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를 통해서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졌다는 소식을 들은 베드로와 요한은 나가서 무덤으로 달음박질을 쳤습니다. 그런데 그 다른 제자인 요한이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 먼저 무덤에 이르렀습니다. 요한이 베드로보다 더 젊기 때문에 달리기도 더 잘했던 것 같습니다. 나이는 속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몸을 구푸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지만 들어가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시몬 베드로는 달려서 지체없이 무덤 문을 통과하여 시체를 뉘었던 곳에서야 멈추어 섰습니다. 이 두 사람의 성격이 대조적으로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는 현장에 있던 사람이 아니고는 이렇게 쓸 수 없는 것입니다. 이는 저자의 기록이 얼마나 진실된가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저자 요한도 그때서야 무덤에 들어가 보니 머리를 쌌던 수건이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었습니다(7). 예수님의 시체를 쌌던 세마포는 누에 고치가 빠져나간 것처럼 비어 있었고 머리를 쌌던 세마포는 잘 개켜 있었습니다. 이 상황은 누가 시체를 훔쳐 갔다고 볼 수 없습니다. 어떤 도둑놈이 시체를 몸뚱아리만 빼내서 가져가고 또 얼마나 여유가 있다고 머리를 쌌던 수건을 잘 개켜놓고 가겠습니까? 빈 무덤과 세마포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말없이 증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두 제자는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였습니다(9). 그들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것이라는 말씀은 들었지만 영적인 눈이 감겨서 눈에 보이는 상황을 보고도 해석하지를 못했습니다. 지식이 없는 사람은 눈뜬 봉사와 같을 때가 많습니다. 두 제자는 계속해서 이상한 일만 생기는 현실을 답답해 하면서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10).
그런데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계속 울고 있었습니다. 울면서도 혹시 무덤 속에 무엇이 남아 있는가 생각하여 구푸려 무덤 속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그런데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아 있었습니다. 천사들이 마리아를 위로하였습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천사들이 볼 때 지금은 기뻐해야 할 때인데 울고 있는 것이 안쓰러웠습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하는 말이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님께서 서신 것을 보았지만 예수신 줄 알지 못하였습니다(14). 마리아가 계속해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기 때문에, 또는 아직 어두 컴컴한 새벽이라서 못 알아 보았을까요? 아마 그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울고 있는 마리아를 어떻게 도우셨습니까? 1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로 알고 가로되 주여 당신이 옮겨 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예수님께 대한 마리아의 사랑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 무거운 시체가 어디 있는지 가르쳐만 주신다면 자기가 가져가겠다는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시체를 막 달라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오직 예수님의 시체에만 마음이 가 있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으신 불쌍하신 예수님, 아무 죄 없으신 예수님이 왜 그렇게 죽으셔야 했는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한없이 슬퍼서 눈물만 흘러내렸습니다. 예수님은 슬픔에 압도되어 있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고 물었습니다. 이 말씀은 너는 더 이상 울 이유가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고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약속대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지금 부활하신 예수님은 왕의 왕이요 주의 주가 되셨습니다(계19:16). 그는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녀는 기뻐해야 합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기 때문에 계속해서 울고 있었습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날 리가 없다는 선입관을 강하게 가지고 있는 막달라 마리아의 눈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부활 신앙이 없을 때 막달라 마리아와 같이 울 수 밖에 없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 사랑하고 헌신했던 예수님이 없어졌을 때 그 빈자리는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었습니다. 시체라도 있으면 그나마 위안이 되었을텐데 시체마저 없어졌으니 바람을 잡으려는 사람처럼 허공을 쳤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힘이 빠지는 것은 당연해 보입니다. 자신이 주님께 헌신했던 과거에 대해서는 아무 미련이 없지만 앞으로 어떻게 살아간단 말인가 생각할 수가 없었습니다. 더 이상 살아갈 의미를 찾지 못했고 살아갈 힘도 없었습니다. 빨리 죽어서라도 예수님을 보고 싶을 뿐이었습니다. 때로 우리는 신앙 생활을 하다가 현실이 주는 무게 때문에 울고만 있을 때가 있습니다. 제자 생활에 비전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헌신한 결과가 헛되다고 생각할 때 절망의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나만 공연히 헛 고생을 해 온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변함없이 사랑하지만 상황을 변화시킬 힘이 없습니다. 이런 우리들을 예수님께서는 깊이 이해하시고 인격적으로 찾아오십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여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시며 자기 이름을 부르시자 그때서야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이와 같이 부활하신 예수님과 인격적인 만남이 있을 때 영적인 눈이 떠지게 됩니다. 엠마오 상의 두 제자도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걸어가면서 대화를 했지만 알아보지 못하다가 함께 식사를 하면서 영적인 눈이 떠지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사울아 사울아”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빛 가운데서 들었을 때에야 그 분이 바로 부활하신 나사렛 예수 주 그리스도이심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인해 우리에게 어떤 은혜가 임했는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그런데 죽음 자체보다 그 영향력이 주는 죽음의 요소들이 우리를 실제적으로 못쓰게 만듭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런 죽음의 요소들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음으로 생명력이 넘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죽기를 무서워하지 않으니 죽기 살기로 하면,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고 능력을 덧입게 됩니다. 두려움을 극복하고 도전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죄의 삯인 사망을 깨뜨림으로ㅏ우리의 죄문제를 다 해결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부활 신앙이 있을 때 우리는 죄의 세력을 이기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진리에 기초한 삶, 의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 결과 영적 성장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영생을 줍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들이 됩니다. 환란 가운데서 강 같은 평화를 누리고 기뻐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생명의 환희를 누리게 됩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산 소망을 줍니다. 우리도 부활하여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주님과 함께 살게 될 것입니다. 마리아가 이런 의미를 다 몰랐다 할지라도 그녀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게 되니 너무나 기쁘고 어찌할 줄을 몰랐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이 세상에 막 붙잡아 두고 싶었습니다. 변화산 상의 제자들처럼 예수님을 꼭 붙잡아두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이 순간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17).”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마리아와 새로운 관계를 맺기를 원하십니다. 그는 더 이상 형제 목자가 아니라 만 왕의 왕이시오 주의 주이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 권세로 믿는 자들에게 영생을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시고 효과적으로 다스리십니다. 그는 하나님 우편에 앉으셔서 하나님의 의로우신 눈을 자기에게 향하게 하십니다. 그는 우리를 위해서 중보하심으로 비참한 죄인들이 공포로 가득 차 있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 보좌를 은혜와 관대함으로 채워주십니다. 예수님은 “내가 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라(요16:7)”고 증거하셨습니다. 그가 승천하시므로 그의 육체적인 임재는 우리의 육안에서 거두어 갔지만 하나님께 올라가심으로 제자들과 얼마나 친밀하게 되었는지 말씀하셨습니다. 승천하신 예수님은 믿는 자들과 성령으로 연합하십니다. 예수님의 승천으로 인해서 우리는 임마누엘의 은혜를 덧입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우리 안에 항상 함께 거하십니다. 살아서 우리를 도우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소망으로 가득하기를 바라십니다.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갖도록 하실 뿐 하니라 우리의 머리되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그가 승천하심으로 날마다 그 택한 백성들에게 신령한 양식으로 배부르게 해 주십니다. 그는 높이 하늘에 앉으사 우리를 그의 권능으로 변화시키고 영적 생명력으로 생기를 주시고 그의 성령으로 우리를 성화시켜 주시고 교회를 여러 가지 은사로 채워 주십니다. 그리고 그가 승천하심으로 원수들을 그 손의 강력으로 견제하시고 교회를 보호하시며 우리의 기도를 일일이 들어 응답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심으로 아담 때부터 계속 닫혀 있던 하늘 나라에 들어갈 길을 개통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승천하심으로 우리는 주님과 더욱 생생한 교제를 하고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으면서 사명인으로 끝까지 충성을 다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조금 일하고 잘 쉬고자 할 때 향락과 안일에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삶의 자세는 신앙 생활에는 독소입니다. 우리가 주 5일 근무제가 확산되는 이런 때에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굳게 붙잡고 주님을 위해서 더욱 헌신하는 토요일이 되도록 힘을 써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유럽 교회의 전철을 밟을 수 밖에 없습니다. 유럽 사회가 주 5일 근무제를 도입하면서 유럽 교회도 안일하고 타락하기 시작했고 교회는 텅텅 비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굳게 붙잡고 더욱 사명에 충성을 다 할 수 있도록 휴일을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부활의 증인이 되라는 사명을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모르고 상심한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랑의 표현으로서 구제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복음을 전해주는 것입니다.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는 복음을 전해서 제자들을 양육하고 훈련하여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나아가 부활의 복된 소식을 증거하라고 하십니다. 마리아는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고 증거했습니다. 또 주께서 자기에게 말씀하신 것들을 증거했습니다. 마리아의 얼굴은 빛이 났고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그녀는 살 맛이 났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마리아의 삶은 기쁨과 확신으로 가득 찼습니다.
둘째, 도마의 신앙 고백(19-31)
안식 후 첫날 저녁 그러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신 그날 저녁에 제자들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막달라 마리아에게 들었지만 여전히 두려웠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졌다고 자신들을 잡아서 족칠 것만 같았습니다. 부활 신앙이 없으면 자매님들은 슬픔에, 형제들은 두려움에 종노릇합니다. 슬픔과 두려움은 죽음의 권세입니다. 남자의 상징은 용감무쌍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한때 ‘내가 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겠나이다’라고 용감하게 맹세했습니다(13:37). 그러나 지금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자 다른 제자들도 두려움으로 떨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노크 소리만 나도 깜짝 깜짝 놀랐습니다. 그들은 두려움으로 인해서 손발이 굳어 버리고 머리도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두려움은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두려움은 사람을 쓸모없게 만듭니다. 사람에게 두려움이 생길 때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징은 마음의 문을 꽉 닫아버리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성을 단절하고 폐쇄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이것이 심할 경우에 대인공포증, 광장공포증, 자폐증이 일어납니다. 그 정도 까지는 아니더라도 소심하고 무기력하게 의욕상실에 걸려서 지내는 경우도 많습니다. 청년으로서의 기백과 용기를 상실하고 다 죽어가는 노인네처럼 힘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불면증과 악령에 시달립니다. 사실 제자들은 두려워할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죽음 권세를 파하시고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여전히 사시나무 떨 듯 떨고 있었습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을 예수님은 어떻게 도와주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찾아오셔서 말할 수 없는 평강을 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닫힌 문들을 통과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은 영광스러운 몸이요 신령한 몸이요 강하고 썩지 않는 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은 하늘 나라에서 살기에 합당한 변화된 몸입니다. 장차 우리도 영화롭게 될 때 이런 몸을 덧입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운데 서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하시며 손과 옆구리를 보이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제자들의 마음은 한없이 평화롭고 기뻤습니다. 새 생명을 얻으신 예수님을 보는 제자들의 마음에는 새 소망이 움텄습니다. 두려움이 사라지고 새 힘이 생겼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자신을 보인 후에 또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에 있던 두려움을 깨끗이 제거하기 위해서 이렇게 반복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하시며 제자들을 전도자요 선교사로 세상에 파송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오순절에 받게 될 성령의 역사를 예표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을 때 담대하게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죄사함을 선포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죄를 사하는 권세는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께서 이루신 구속 역사에 기초해서 죄사함의 역사가 일어나는데 성령께서는 사람을 통해서 사죄의 복음을 전하시고, 받는 사람이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을 때 사죄를 받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믿는 모든 자에게 주신 것입니다. 신자끼리의 이런 사죄 권이란 어디까지나 부차적이요 종속적입니다. 그것이 홀로 하나님만이 죄를 사하신다는 원리에 저촉되지 않습니다.
열 두 제자 중에 하나인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예수님이 오셨을 때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비참하게 죽으신 것을 비관한 나머지 홀로 어디 가서 우수에 잠겨 있다가 돌아왔습니다. 그가 돌아오니 제자들이 한결같이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고 증거하는 것이었습니다. 도마는 이런 제자들이 무슨 환영을 보았던지 돌았다 생각하고 말했습니다.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25).” 그는 의심이 많은 사람이라 자기 손으로 만져보고 자기 눈으로 보아야만 믿겠다고 완고하게 말하였습니다. 증거 없이는 믿을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는 제자들의 증거를 믿지 못하는 불신과 교만이 있었습니다. 이 때의 도마의 태도야 말로 신앙을 떠난 과학자, 실증론자, 합리주의자들의 태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도마를 돕기 위해서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오셨습니다. 제자들의 모임에 오셔서 가운데 서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도마에게 이르셨습니다. 27절을 보십시오.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예수님은 도마를 인격적으로 도우셔서 의심과 불신을 깨치고 믿음의 사람이 되도록 섬기셨습니다.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옆구리에 손가락을 넣어볼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도마는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신앙 고백을 하였습니다. 그는 모든 회의론자, 의심병자, 실증주의자들의 대부격이었습니다. 도마가 믿었다는 것은 앞으로 수많은 회의론자들이 주님께 돌아올 것을 예견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이런 사람들도 주님을 위해서 순교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신앙 고백을 받으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29).” 보고서도 믿지 못하는 자들은 가장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보고서 믿는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입니다. 정말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빈무덤과 세마포, 증인들의 증거를 통해서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증거에 기초해서 믿음을 갖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믿음을 주십니다. 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일곱 가지 기적만을 기록함은 우리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우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세상의 빛 되신 주 안에서 거닐며, 교제하는 생활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빛 안에서 거닌다는 것은 그의 사랑에 거한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은 빛과 사랑과 생명의 복음이요 믿음의 복음입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풍성한 생명을 누리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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