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요24강(18장)/진리의 왕되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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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요한복음 제 24 강
말씀 / 요한복음 18: 1-40
요절 / 요한복음 18: 37
진리의 왕 예수님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하신대.”
진리란 무엇인가? 알 듯 모를 듯 한 진리에 대한 사랑이 육신의 쾌락과 세상의 보잘 것 없는 일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영광스럽게 여겨졌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이 자리에 있는 줄 압니다. 진리를 알게 될 때 우리는 자유인이 됩니다. 진리를 알게 될 때 모든 것을 얻게 됩니다.
우리는 지난 주에 예수님의 대제사장적인 기도를 배웠습니다. 예수님은 일생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사셨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의 고난을 지고자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거룩한 사람들이 되도록 기도하셨고 무엇보다 하나가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이후에 예수님은 유다의 배반으로 체포되시고 심문을 받으셨습니다. 당시가 예수님의 생애에서 가장 어려운 때였습니다. 예수님은 실패자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장 어려운 때에 진리의 왕으로서 자신을 증거하심으로 어두운 밤하늘을 밝게 비추는 별처럼 빛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위해 사셨고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저희들도 진리를 위해서 살뿐만 아니라 진리를 증거하는 삶을 살도록 주님께서 함께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I. 내로라(1-11)
예수님은 다락방에서 말씀을 마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저편으로 나가셨습니다. 거기는 겟세마네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셨습니다. 이곳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가끔 모이시는 곳이므로 유다도 알고 있었습니다. 공관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 방울이 핏방울이 되기까지 간절히 기도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저자 요한은 반복을 피하기 위해서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를 생략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22:42)”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로 고난을 맞이할 준비를 하였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시험에 들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으면 사단의 까불림을 당하게 됩니다. 기도를 통하여 예수님은 자신의 연약함을 극복하였습니다. 그는 세상 죄를 위한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하나님께로부터 능력을 덧입었습니다. 기도는 예수님께서 죽으시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도록 하는 능력의 근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를 마치셨을 즈음에 유다가 군대와 및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하속들을 데리고 등과 훼와 병기를 가지고 그리로 왔습니다. 그들은 600-700명 이상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권능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대대병력이 무장을 하고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앞으로 당하게 될 고난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 의연하게 나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들이 나사렛 예수라고 하자 대뜸 “내로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내로라 하실 때에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졌습니다. 그들은 추풍낙엽처럼 땅에 굴러 떨어졌습니다. 이는 군대의 질서와 통제력을 상실할 정도로 그 행렬이 무너졌음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웅장한 목소리에 압도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었습니다. 저희가 나사렛 예수라고 하자 “너희에게 내로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의 가는 것을 용납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로서 제자들을 하나도 잃지 않고자 이렇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때 시몬 베드로는 도망을 가기보다 예수님께서 곁에서 감당해 주실 것을 믿고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렸습니다. 베드로의 이런 행동은 매우 충성스러워 보입니다. 그의 칼 솜씨가 괜찮았는지 말고의 오른편 귀를 베어버렸습니다. 베드로는 수제자로서 예수님을 사랑했고 또 충성을 다했습니다. 그의 행동은 사나이답게 보입니다. 그러나 그의 행동 이면에는 두려움과 인간적인 열심이 숨어 있었습니다. 그는 기도해야 할 때 잠만 자가다 막상 일을 당했을 때는 인간적인 혈기로 대항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지금 무엇을 원하시는지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지 생각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검을 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여기서 우리는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베드로와 같이 검을 쓰는 방법과 예수님과 같이 잔을 마시는 방법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검을 쓰는 방법은 인간적인 방법으로서 혈과 육의 방법이라면 잔을 마시는 것은 하나님의 방법이요 영적인 방법입니다. 검을 쓰는 것은 무력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때문에 강하게 보이고 또 문제가 빨리 시원스럽게 해결되는 것 같이 보입니다. 반면 잔을 마시는 것은 소극적이고 약하고 어리석게 보입니다. 그래서 인기가 없습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잔을 마시는 것보다 검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자 합니다. 때로 불신자들 중에는 신자들을 약하고 어리숙한 사람으로 보고 이용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직장에서도 마음이 착하고 믿음이 좋은 것 같은 사람에게 부탁을 잘합니다. 그런데 목자로서 우리는 이들을 잘 섬기다가도 어떤 때는 “이 사람이 나를 물로 보는가?” 생각하며 은근히 화가 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한마디 해주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때 영적 권위를 가지고 책망을 해야지 감정을 부리게 되면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친구를 잃게 됩니다. 우리가 검을 쓰면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게 되고 상처를 입은 사람은 악심을 품게 되어 검은 검을 부르게 됩니다. 검을 쓰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 같지만 실상은 문제를 더욱 악화시키고 결국에는 검으로 망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마 26:52절에서 “검을 가진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검을 집에 꽂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방법을 좇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고 말씀하였습니다. ‘아버지께서 주신 잔’은 십자가의 쓴 잔을 의미합니다. 이는 고난의 잔이요 순종의 잔입니다. 예수님께서 잔을 마시는 것은 힘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영(한 영은 6000명으로 구성된 로마군단) 더 되는 천사들을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6:53). 예수님은 말씀 한 마디로 폭풍우를 잠잠케 하시고 죽은 나사로도 살리신 신적 권능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만일 검을 사용하신다면 원수들을 초개와 같이 쓰러뜨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서 일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마시고자 하셨습니다. 이로써 예수님께서는 인류 구속 역사를 이루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습니다. 우리가 문제 해결을 검을 사용하지 않고 잔을 마시는 것은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살아계셔서 이 세상 역사를 그 뜻대로 주관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지금도 줄기차게 인류 구원 역사를 이루어나가시며 결국에는 선악간에 세상을 심판하실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면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결하지 않고 하나님께 모든 문제를 맡기고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에 충성할 수 있습니다. 검은 죽이지만 사랑은 살립니다. 순종으로부터 오는 사랑은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강력한 방법입니다. 이 불경한 세상에서 우리의 일대일 공부나 기도는 어떤 일을 해결하는데 너무나 약해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섬기는데 가장 강력한 길임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사 하나님께 대한 순종에서 자라고 수많은 청년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기 위해 우리의 일생을 헌신하도록 도와주시기를 기도합니다.
II. 나는 아니라(12-27)
예수님은 마침내 체포되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결박하여 먼저 안나스에게 끌고 갔습니다.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으로서 막후에서 실력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가야바는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권고하던 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체포되시자 제자들은 다 도망갔습니다. 그러나 시몬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그런데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를 알아보고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베드로는 깜짝 놀라 “나는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 베드로의 마음은 썰렁했습니다. 그는 종과 하속들과 함께 불있는 곳으로 가까이 가서 꼽싸리를 꼈습니다. 베드로는 끼어서는 안될 곳에 끼어 있었습니다.
한편 예수님은 안나스로부터 심문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안나스는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해서 예수님을 심문했습니다. 안나스는 예수님의 배후 조직을 철저히 수배하여 그 씨를 없애고자 하고 또 예수님의 교훈에 이단성이 있는가 찾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제자들이 안식일 규례를 어기고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치료하고 말씀을 권세있게 증거하자 거짓 선지자들로 생각하고 죽이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 대해서는 함구를 하고 그의 교훈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20,2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드러내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의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히는 아무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 보라 저희가 나의 하던 말을 아느니라.” ‘드러내어 놓고’라는 단어는 ‘확신’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진리의 말씀 만을 가르치셨기 때문에 아무 것도 숨기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생활과 그의 가르침은 지하 감옥을 환하게 비추는 한 줄기 빛과 같았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문제의 본질을 드러내시고 단순하면서도 분명하고 힘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붕 꼭대기에서 소리쳐 전하기에 합당합니다.
예수님께서 안나스의 심문에 당당하게 말씀하시자 하속 하나가 건방지다고 손바닥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감정적으로 대하지 않으시고 그의 잘못을 분명히 지적하셨습니다.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거하라 잘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23)?” 예수님은 안나스에게 심문을 받으신 것이 아니라 진리로 거짓된 안나스를 심판하고 계셨습니다. 안나스는 예수님을 죽이고자 작심하고 가야바에게로 보냈습니다.
예수님께서 심문을 받으실 때 베드로는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그는 원수의 소굴에서 계속 불을 쬐고 있었습니다. 불을 쬐고 있던 사람들이 베드로의 태도가 하도 불안하여 가만히 보니 틀림없이 예수님의 제자 중 하나였습니다. 사단은 불안과 두려움에 떠는 사람들을 공격합니다.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그러나 베드로는 이번에도 “나는 아니라”고 부인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하나는 베드로에게 귀를 베이운 말고의 친척이었습니다. 웬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더니 베드로는 꼼짝 못하고 시인해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베드로는 또 부인했습니다. 그가 세번째 부인했을 때 갑자기 새벽의 찬 공기를 가르면서 닭이 울었습니다. 닭은 베드로가 계속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을 도저히 참을 수 가 없어서 그가 회개하도록 촉구하기 위해 크게 울었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 심히 통곡하였습니다. 그 눈물은 진실된 회개의 눈물이었습니다. 그 후 베드로는 새벽에 닭이 울 때마다 회개의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일생 닭고기를 먹지 않았다고 합니다.
베드로는 이 사건을 통해서 자신의 연약함을 뼈저리게 깨달았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뜨거운 사랑을 깊이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자기의 진심을 몰라 주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실패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자기를 얼마나 깊이 알고 계시는가를 깨달았습니다. 베드로가 주를 배반할 것도 아시면서 변함없이 사랑하신 예수님을 생각할 때 뜨거운 회개의 눈물이 흘렀습니다. 베드로는 이 사건을 통해서 자기 의와 교만, 자기 확신이 깨어졌습니다. 베드로는 진리되신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다가 죽을 것 같았습니다. 그의 마음에 불신이 들어오자 그는 시험에 들고 말았습니다. 그는 이를 통해서 예수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알았습니다. 그는 실패를 통해서 연약한 사람들을 깊이 이해하고 섬길 수 있는 내면성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연약함을 다 아시고 감당해 주시고 사랑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실패의 날에 자학하고 드러누울 것이 아니라 회개하고 주님의 크신 사랑을 영접해야 합니다. 또 다른 사람의 허물과 약점을 끝까지 감당해서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 받도록 해야 합니다.
III. 진리의 왕되신 예수님(28-40)
그들은 예수님을 가야바에게서 빌라도가 있는 로마 관정으로 끌고 갔습니다. 때는 새벽이었는데 이는 불법 재판이었음을 말해 줍니다. 공회는 재판의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반드시 해가 뜬 후부터 해가 지기까지 모여야했습니다. 특히 사형에 대한 정죄는 밤에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목적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겨 준 후 자신들은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면 부정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관정에 들어가지 않고 유월절 잔치를 즐기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위선으로 가득 찬 자들이었습니다. 빌라도는 밖으로 나와서 무슨 일로 고소하느냐 너희가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자신들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어떠한 죽음으로 죽으실 것을 예언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만민의 구주가 되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셔야 했습니다.
빌라도는 유대인의 압력에 못 이겨 관정으로 들어가 예수님을 심문했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그러자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뇨 다른 사람이 나를 대하여 네게 한 말이뇨하고 물으셨습니다. 이는 빌라도가 예수님에 대해서 관심이 있는지 알아보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귀찮다는 듯이 “나는 유대인이 아니잖느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자신의 나라가 어디에 속하였는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36절을 보십시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다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여기서 우리는 세상 나라와 세상에 속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 제국은 가이사에 의해서 통치되고 있었습니다. 세상 나라는 일어났다가 사라집니다. 세상 나라에는 진리가 없습니다. 통치자들은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서 돈을 물 쓰듯이 하고 권력투쟁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께서 사랑과 진리와 평화로 다스리십니다. 그 나라는 영원합니다. 그 나라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의해서 세워졌습니다. 예수님은 이 영적인 나라의 왕이십니다.
37절을 보십시오.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진리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세상 왕들은 진리가 아니라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서 싸웁니다. 그들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진리를 밟아 뭉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진리를 세우시고 진리를 위해서 죽고자 하십니다. 예수님에게는 권력이 아니라 진리가 목적입니다.
진리란 말은 헬라어로는 알레데이아인데 이는 감추인 것을 제거하고 사실을 드러낸다는 뜻입니다. 또 히브리어로는 허위가 아닌 믿을 만한 것을 뜻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진리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실재를 뜻하였습니다(8:40). 예수님은 하나님의 품 안에서 오셨으며(1:18), 진리는 그를 통하여 왔고(1:17), 하나님의 말씀이신 그 분은 진리로 충만하시며(1:14), 자기 안에 있는 진리를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셨고(8:31), 그가 떠나실 때 진리의 영을 제자들에게 주사 영원히 거하게 하셨습니다(14:17).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제자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16:13). 진리는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진리의 근원이십니다. 예수님은 선언하십니다.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라.” 예수님 안에 진리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진리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진리를 배울 수 있고 진리에 의해 다스림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리를 알지 못하면 각종 거짓에 속아 살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항상 속아 왔습니다. 현대를 디자인과 포장의 시대라고 합니다. 무엇이 어떻게 보이는가가 가장 중요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화려한 디자인으로 아름답게 포장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속습니다. 사람들은 대중 매체에 의해서도 속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이란 순간적인 쾌락을 즐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다 산 다음에야 속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모든 기회가 다 지나간 다음, 임종 직전에 그들은 속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님을 배우면 속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배울 때 하나님을 알게 되고 자신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진리를 알 때 부자가 되지는 못하지만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사람들은 항상 무엇엔가 잡혀 있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에 목을 매답니다.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립니다.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지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들은 원치 않게 정욕과 교만으로 인해 끌려 다닙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으로부터 진리를 배운다면 우리는 자유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참된 자유가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구원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앎으로서 우리는 자유로운 삶, 진실된 삶, 영원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리의 왕되신 예수님께 뿌리를 내리고 그의 다스림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진리를 증거하시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의 말보다 예수님의 말씀에 더 주의를 기울이고 배워야 합니다.
빌라도는 정치가로서 “진리가 무엇이냐”라고 물었습니다. 그가 물은 것은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라 보편적인 진리였습니다. 그는 진리가 다 무엇이냐며 진리를 조소했습니다. 그는 두려움에 매였습니다. 그는 세상적인 야심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그는 가이사가 자신의 장래를 보장해 줄 것이라고 믿음으로서 속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무죄라는 것을 세 번이나 공포했으면서도 십자가에 못박게 내어 주었습니다. 그의 모순된 행동은 결국 그가 진리를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유대인들은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 생명을 버리신 예수님보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해하는 강도 바라바를 택하였습니다. 그들도 진리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생각도 없이 바라바를 선택하였습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생명을 주는 의인보다 강도를 택하는 경우가 왜 그리 많은지요?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진리 안에서 우리는 자유와 구원을 얻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사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진리에서 자라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진리를 위해서 살 뿐만 아니라 진리에 의해서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요한복음 18: 1-40
요절 / 요한복음 18: 37
진리의 왕 예수님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하신대.”
진리란 무엇인가? 알 듯 모를 듯 한 진리에 대한 사랑이 육신의 쾌락과 세상의 보잘 것 없는 일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영광스럽게 여겨졌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이 자리에 있는 줄 압니다. 진리를 알게 될 때 우리는 자유인이 됩니다. 진리를 알게 될 때 모든 것을 얻게 됩니다.
우리는 지난 주에 예수님의 대제사장적인 기도를 배웠습니다. 예수님은 일생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사셨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의 고난을 지고자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거룩한 사람들이 되도록 기도하셨고 무엇보다 하나가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이후에 예수님은 유다의 배반으로 체포되시고 심문을 받으셨습니다. 당시가 예수님의 생애에서 가장 어려운 때였습니다. 예수님은 실패자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장 어려운 때에 진리의 왕으로서 자신을 증거하심으로 어두운 밤하늘을 밝게 비추는 별처럼 빛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위해 사셨고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저희들도 진리를 위해서 살뿐만 아니라 진리를 증거하는 삶을 살도록 주님께서 함께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I. 내로라(1-11)
예수님은 다락방에서 말씀을 마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저편으로 나가셨습니다. 거기는 겟세마네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셨습니다. 이곳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가끔 모이시는 곳이므로 유다도 알고 있었습니다. 공관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 방울이 핏방울이 되기까지 간절히 기도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저자 요한은 반복을 피하기 위해서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를 생략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22:42)”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로 고난을 맞이할 준비를 하였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시험에 들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으면 사단의 까불림을 당하게 됩니다. 기도를 통하여 예수님은 자신의 연약함을 극복하였습니다. 그는 세상 죄를 위한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하나님께로부터 능력을 덧입었습니다. 기도는 예수님께서 죽으시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도록 하는 능력의 근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를 마치셨을 즈음에 유다가 군대와 및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하속들을 데리고 등과 훼와 병기를 가지고 그리로 왔습니다. 그들은 600-700명 이상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권능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대대병력이 무장을 하고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앞으로 당하게 될 고난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 의연하게 나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들이 나사렛 예수라고 하자 대뜸 “내로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내로라 하실 때에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졌습니다. 그들은 추풍낙엽처럼 땅에 굴러 떨어졌습니다. 이는 군대의 질서와 통제력을 상실할 정도로 그 행렬이 무너졌음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웅장한 목소리에 압도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었습니다. 저희가 나사렛 예수라고 하자 “너희에게 내로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의 가는 것을 용납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로서 제자들을 하나도 잃지 않고자 이렇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때 시몬 베드로는 도망을 가기보다 예수님께서 곁에서 감당해 주실 것을 믿고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렸습니다. 베드로의 이런 행동은 매우 충성스러워 보입니다. 그의 칼 솜씨가 괜찮았는지 말고의 오른편 귀를 베어버렸습니다. 베드로는 수제자로서 예수님을 사랑했고 또 충성을 다했습니다. 그의 행동은 사나이답게 보입니다. 그러나 그의 행동 이면에는 두려움과 인간적인 열심이 숨어 있었습니다. 그는 기도해야 할 때 잠만 자가다 막상 일을 당했을 때는 인간적인 혈기로 대항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지금 무엇을 원하시는지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지 생각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검을 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여기서 우리는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베드로와 같이 검을 쓰는 방법과 예수님과 같이 잔을 마시는 방법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검을 쓰는 방법은 인간적인 방법으로서 혈과 육의 방법이라면 잔을 마시는 것은 하나님의 방법이요 영적인 방법입니다. 검을 쓰는 것은 무력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때문에 강하게 보이고 또 문제가 빨리 시원스럽게 해결되는 것 같이 보입니다. 반면 잔을 마시는 것은 소극적이고 약하고 어리석게 보입니다. 그래서 인기가 없습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잔을 마시는 것보다 검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자 합니다. 때로 불신자들 중에는 신자들을 약하고 어리숙한 사람으로 보고 이용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직장에서도 마음이 착하고 믿음이 좋은 것 같은 사람에게 부탁을 잘합니다. 그런데 목자로서 우리는 이들을 잘 섬기다가도 어떤 때는 “이 사람이 나를 물로 보는가?” 생각하며 은근히 화가 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한마디 해주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때 영적 권위를 가지고 책망을 해야지 감정을 부리게 되면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친구를 잃게 됩니다. 우리가 검을 쓰면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게 되고 상처를 입은 사람은 악심을 품게 되어 검은 검을 부르게 됩니다. 검을 쓰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 같지만 실상은 문제를 더욱 악화시키고 결국에는 검으로 망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마 26:52절에서 “검을 가진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검을 집에 꽂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방법을 좇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고 말씀하였습니다. ‘아버지께서 주신 잔’은 십자가의 쓴 잔을 의미합니다. 이는 고난의 잔이요 순종의 잔입니다. 예수님께서 잔을 마시는 것은 힘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영(한 영은 6000명으로 구성된 로마군단) 더 되는 천사들을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6:53). 예수님은 말씀 한 마디로 폭풍우를 잠잠케 하시고 죽은 나사로도 살리신 신적 권능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만일 검을 사용하신다면 원수들을 초개와 같이 쓰러뜨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서 일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마시고자 하셨습니다. 이로써 예수님께서는 인류 구속 역사를 이루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습니다. 우리가 문제 해결을 검을 사용하지 않고 잔을 마시는 것은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살아계셔서 이 세상 역사를 그 뜻대로 주관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지금도 줄기차게 인류 구원 역사를 이루어나가시며 결국에는 선악간에 세상을 심판하실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면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결하지 않고 하나님께 모든 문제를 맡기고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에 충성할 수 있습니다. 검은 죽이지만 사랑은 살립니다. 순종으로부터 오는 사랑은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강력한 방법입니다. 이 불경한 세상에서 우리의 일대일 공부나 기도는 어떤 일을 해결하는데 너무나 약해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섬기는데 가장 강력한 길임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사 하나님께 대한 순종에서 자라고 수많은 청년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기 위해 우리의 일생을 헌신하도록 도와주시기를 기도합니다.
II. 나는 아니라(12-27)
예수님은 마침내 체포되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결박하여 먼저 안나스에게 끌고 갔습니다.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으로서 막후에서 실력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가야바는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권고하던 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체포되시자 제자들은 다 도망갔습니다. 그러나 시몬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그런데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를 알아보고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베드로는 깜짝 놀라 “나는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 베드로의 마음은 썰렁했습니다. 그는 종과 하속들과 함께 불있는 곳으로 가까이 가서 꼽싸리를 꼈습니다. 베드로는 끼어서는 안될 곳에 끼어 있었습니다.
한편 예수님은 안나스로부터 심문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안나스는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해서 예수님을 심문했습니다. 안나스는 예수님의 배후 조직을 철저히 수배하여 그 씨를 없애고자 하고 또 예수님의 교훈에 이단성이 있는가 찾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제자들이 안식일 규례를 어기고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치료하고 말씀을 권세있게 증거하자 거짓 선지자들로 생각하고 죽이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 대해서는 함구를 하고 그의 교훈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20,2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드러내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의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히는 아무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 보라 저희가 나의 하던 말을 아느니라.” ‘드러내어 놓고’라는 단어는 ‘확신’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진리의 말씀 만을 가르치셨기 때문에 아무 것도 숨기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생활과 그의 가르침은 지하 감옥을 환하게 비추는 한 줄기 빛과 같았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문제의 본질을 드러내시고 단순하면서도 분명하고 힘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붕 꼭대기에서 소리쳐 전하기에 합당합니다.
예수님께서 안나스의 심문에 당당하게 말씀하시자 하속 하나가 건방지다고 손바닥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감정적으로 대하지 않으시고 그의 잘못을 분명히 지적하셨습니다.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거하라 잘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23)?” 예수님은 안나스에게 심문을 받으신 것이 아니라 진리로 거짓된 안나스를 심판하고 계셨습니다. 안나스는 예수님을 죽이고자 작심하고 가야바에게로 보냈습니다.
예수님께서 심문을 받으실 때 베드로는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그는 원수의 소굴에서 계속 불을 쬐고 있었습니다. 불을 쬐고 있던 사람들이 베드로의 태도가 하도 불안하여 가만히 보니 틀림없이 예수님의 제자 중 하나였습니다. 사단은 불안과 두려움에 떠는 사람들을 공격합니다.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그러나 베드로는 이번에도 “나는 아니라”고 부인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하나는 베드로에게 귀를 베이운 말고의 친척이었습니다. 웬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더니 베드로는 꼼짝 못하고 시인해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베드로는 또 부인했습니다. 그가 세번째 부인했을 때 갑자기 새벽의 찬 공기를 가르면서 닭이 울었습니다. 닭은 베드로가 계속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을 도저히 참을 수 가 없어서 그가 회개하도록 촉구하기 위해 크게 울었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 심히 통곡하였습니다. 그 눈물은 진실된 회개의 눈물이었습니다. 그 후 베드로는 새벽에 닭이 울 때마다 회개의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일생 닭고기를 먹지 않았다고 합니다.
베드로는 이 사건을 통해서 자신의 연약함을 뼈저리게 깨달았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뜨거운 사랑을 깊이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자기의 진심을 몰라 주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실패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자기를 얼마나 깊이 알고 계시는가를 깨달았습니다. 베드로가 주를 배반할 것도 아시면서 변함없이 사랑하신 예수님을 생각할 때 뜨거운 회개의 눈물이 흘렀습니다. 베드로는 이 사건을 통해서 자기 의와 교만, 자기 확신이 깨어졌습니다. 베드로는 진리되신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다가 죽을 것 같았습니다. 그의 마음에 불신이 들어오자 그는 시험에 들고 말았습니다. 그는 이를 통해서 예수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알았습니다. 그는 실패를 통해서 연약한 사람들을 깊이 이해하고 섬길 수 있는 내면성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연약함을 다 아시고 감당해 주시고 사랑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실패의 날에 자학하고 드러누울 것이 아니라 회개하고 주님의 크신 사랑을 영접해야 합니다. 또 다른 사람의 허물과 약점을 끝까지 감당해서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 받도록 해야 합니다.
III. 진리의 왕되신 예수님(28-40)
그들은 예수님을 가야바에게서 빌라도가 있는 로마 관정으로 끌고 갔습니다. 때는 새벽이었는데 이는 불법 재판이었음을 말해 줍니다. 공회는 재판의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반드시 해가 뜬 후부터 해가 지기까지 모여야했습니다. 특히 사형에 대한 정죄는 밤에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목적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겨 준 후 자신들은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면 부정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관정에 들어가지 않고 유월절 잔치를 즐기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위선으로 가득 찬 자들이었습니다. 빌라도는 밖으로 나와서 무슨 일로 고소하느냐 너희가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자신들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어떠한 죽음으로 죽으실 것을 예언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만민의 구주가 되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셔야 했습니다.
빌라도는 유대인의 압력에 못 이겨 관정으로 들어가 예수님을 심문했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그러자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뇨 다른 사람이 나를 대하여 네게 한 말이뇨하고 물으셨습니다. 이는 빌라도가 예수님에 대해서 관심이 있는지 알아보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귀찮다는 듯이 “나는 유대인이 아니잖느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자신의 나라가 어디에 속하였는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36절을 보십시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다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여기서 우리는 세상 나라와 세상에 속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 제국은 가이사에 의해서 통치되고 있었습니다. 세상 나라는 일어났다가 사라집니다. 세상 나라에는 진리가 없습니다. 통치자들은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서 돈을 물 쓰듯이 하고 권력투쟁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께서 사랑과 진리와 평화로 다스리십니다. 그 나라는 영원합니다. 그 나라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의해서 세워졌습니다. 예수님은 이 영적인 나라의 왕이십니다.
37절을 보십시오.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진리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세상 왕들은 진리가 아니라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서 싸웁니다. 그들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진리를 밟아 뭉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진리를 세우시고 진리를 위해서 죽고자 하십니다. 예수님에게는 권력이 아니라 진리가 목적입니다.
진리란 말은 헬라어로는 알레데이아인데 이는 감추인 것을 제거하고 사실을 드러낸다는 뜻입니다. 또 히브리어로는 허위가 아닌 믿을 만한 것을 뜻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진리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실재를 뜻하였습니다(8:40). 예수님은 하나님의 품 안에서 오셨으며(1:18), 진리는 그를 통하여 왔고(1:17), 하나님의 말씀이신 그 분은 진리로 충만하시며(1:14), 자기 안에 있는 진리를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셨고(8:31), 그가 떠나실 때 진리의 영을 제자들에게 주사 영원히 거하게 하셨습니다(14:17).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제자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16:13). 진리는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진리의 근원이십니다. 예수님은 선언하십니다.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라.” 예수님 안에 진리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진리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진리를 배울 수 있고 진리에 의해 다스림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리를 알지 못하면 각종 거짓에 속아 살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항상 속아 왔습니다. 현대를 디자인과 포장의 시대라고 합니다. 무엇이 어떻게 보이는가가 가장 중요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화려한 디자인으로 아름답게 포장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속습니다. 사람들은 대중 매체에 의해서도 속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이란 순간적인 쾌락을 즐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다 산 다음에야 속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모든 기회가 다 지나간 다음, 임종 직전에 그들은 속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님을 배우면 속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배울 때 하나님을 알게 되고 자신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진리를 알 때 부자가 되지는 못하지만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사람들은 항상 무엇엔가 잡혀 있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에 목을 매답니다.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립니다.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지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들은 원치 않게 정욕과 교만으로 인해 끌려 다닙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으로부터 진리를 배운다면 우리는 자유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참된 자유가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구원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앎으로서 우리는 자유로운 삶, 진실된 삶, 영원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리의 왕되신 예수님께 뿌리를 내리고 그의 다스림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진리를 증거하시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의 말보다 예수님의 말씀에 더 주의를 기울이고 배워야 합니다.
빌라도는 정치가로서 “진리가 무엇이냐”라고 물었습니다. 그가 물은 것은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라 보편적인 진리였습니다. 그는 진리가 다 무엇이냐며 진리를 조소했습니다. 그는 두려움에 매였습니다. 그는 세상적인 야심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그는 가이사가 자신의 장래를 보장해 줄 것이라고 믿음으로서 속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무죄라는 것을 세 번이나 공포했으면서도 십자가에 못박게 내어 주었습니다. 그의 모순된 행동은 결국 그가 진리를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유대인들은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 생명을 버리신 예수님보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해하는 강도 바라바를 택하였습니다. 그들도 진리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생각도 없이 바라바를 선택하였습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생명을 주는 의인보다 강도를 택하는 경우가 왜 그리 많은지요?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진리 안에서 우리는 자유와 구원을 얻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사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진리에서 자라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진리를 위해서 살 뿐만 아니라 진리에 의해서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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