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요23강(17장)/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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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요한복음 제 23 강
말씀 / 요한복음 17:1-26
요절 / 요한복음 17:1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ㅗ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체포되기 직전 하나님 아버지께 드린 기도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세상 만민을 마음에 품고 드리는 기도이므로 대제사장적인 기도입니다. 우리는 마태복음 6장에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를 ‘주기도문’이라 부릅니다. 그러나 정확히 따져보면 그것은 ‘제자들의 기도문’이라 할 수 있고, 오늘 말씀에 있는 주님의 기도야말로 진정한 ‘주기도문’입니다. 이 기도문은 그 내용이 너무나 웅대하고 오묘하며 깊고 넓어서 일생을 두고 묵상해도 부족하지만 오늘은 이 기도문을 통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조금이라도 더 배우고, 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배움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목자의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첫째는 예수님 자신을 위한 기도(1-5), 둘째는 열 한 제자들을 위한 기도(6-19), 셋째는 세상의 모든 믿는 자들을 위한 기도(20-26)입니다.
I. 예수님 자신을 위한 기도 (1-5)
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여기서 “때가 이르렀다”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세상 죄를 지고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가 이르렀음을 뜻합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첫 인간 아담의 타락 이후 끊임없이 흘러온 인류의 구속 역사가 드디어 완성되는 역사적 순간이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한 인간으로서 예수님의 눈 앞에 닥친 현실은 가장 잔인한 십자가의 죽음이었습니다.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 부딪치면 두려움과 절망과 슬픔에 빠집니다. 살 구멍을 찾는데 눈이 휘둥그래져서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기란 무척 어렵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셨는데 그 첫마디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였습니다. 이 기도는 예수님의 전 생애를 잘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다가오는 이 때를 항상 의식하시며 순간 순간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또 아버지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을 믿고 의지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1절을 다시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예수님의 자신을 위한 한 가지 기도 제목은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이 기도제목은 지금까지 살아오신 예수님의 인생 목적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4절에서 고백합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의 자신을 위한 유일한 기도 제목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사람은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이라 자기를 영화롭게 하기를 원합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과정에서도 은근히 자기의 영광을 추구합니다. 자기의 이름이 기대한대로 인정 받고 영화롭게 되지 않을 때 실망하고 불만이 생기고 남을 탓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가지 기도 제목으로 사셨는데 그것은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인정과 칭찬을 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을 가장 기쁘게 하고 만족하게 한 것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때였습니다. 한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고 영원한 생수를 마셨을 때 예수님은 너무나 기쁘고 만족하셔서 배고픈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니라(4:32,34).”
예수님은 현재 십자가를 코 앞에 두고 있습니다. 그 십자가는 고통과 수치와 저주의 비참한 죽음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내면에는 두려움 대신 하늘의 영광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시기를 “아버지여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1)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5).” 예수님을 잘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이는 예수님의 이기적인 기도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께 아들인 자신을 영화롭게 하옵소서 라는 기도는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창세 전부터 하늘 나라의 부귀와 영광, 권세와 위엄을 누렸습니다. 그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오셔서 인간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 처형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저주의 죽음이 아니요 영광의 죽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죽으신 지 3일 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사 창세 전에 누리셨던 하늘 나라의 영광을 다시 회복하실 것을 믿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유일한 기도 제목은 우리 인생의 근본 목적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줍니다. 우리가 목자로 사는 인생의 근본 목적이 무엇일까요? 열심히 양을 치고 많은 제자를 양성하여 큰 역사를 이루는 것일까요? 복음으로 세계를 정복하는 것일까요? 그것이 우리 인생의 목적이라면 우리는 곧 지치고 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실 수 있지 연약한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양, 제자, 또는 복음으로 세계를 정복하는 일 등이 목적이 되기 전에 우리는 우리 인생의 근본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임을 항상 확인해야 합니다. 기독교 소요리 문답 제 1 문을 보면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대신 자기 영광을 구할 때 비참해집니다. 아무리 좋은 일을 많이 한다 해도 자기영광을 위해 살 때 행복할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영혼이 번민과 고뇌로 끊임없이 고통하게 됩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면 순수해지고 겸손하게 되고 심령에 참 자유와 기쁨을 누리며 그 누구라도 영접하고 사랑하므로 진정으로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불멸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고귀한 존재로 지음 받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전 10:31절에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고 권면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왜 영화롭게 되어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믿는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기 위해서 영화롭게 돼야 했습니다. 영생을 주려면 죽음까지도 이길 수 있는 권세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를 위해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권세로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십니다. 영생이란 무엇입니까? 3절을 보십시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여기서 아는 것은 이성적인 이해가 아니라 인격적이고 체험적인 이해를 기초로 한 하나님과의 만남을 의미합니다. 한 때 사도 베드로는 유대인으로서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회당에도 열심히 나가고 기도도 하며 중요한 종교 의식에도 동참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을 때 예수님 앞에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가 처음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자신의 죄인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예수님을 아는 것은 이렇게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나의 죄악됨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자 예수님께 나오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 인생에는 결정적인 변화가 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각자를 찾아 오셔서 이렇게 영생을 주셨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하라고 주신 일에 충성하셨습니다. 그 일은 인류 구속 사업과 복음 역사를 계승할 제자를 양성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위해 제자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심으시고 마침내는 인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상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시며 운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온전히 이루심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였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목자로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면 목자로서의 부르심을 심령 깊이 영접하고 끝까지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나그네 인생의 마지막 날 예수님과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사도 바울도 그의 말년에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딤후 4:7)” 우리는 어떤 형편 가운데서도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마 6:33).
예수님은 창세 전에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영화롭게 해주시기를 간구합니다(5). 예수님은 상아와 같이 아름다운 곳에서 존귀와 영화로 옷 입으시고 세세토록 찬송과 경배를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죄를 그 몸으로 담당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많은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냄새 나는 죄인들을 섬기느라 그 고운 모양이 마른 넝쿨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제 사명을 완수하신 후에 다시 그 본래의 영광에 들어가고자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고난을 통해서 영원한 영광을 얻고자 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영광을 바라보시고 기쁨으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II. 열 한 제자를 위한 기도(6-19)
첫째,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경을 가르쳤습니다(6-8). 6-8절은 예수님께서 어떻게 제자 양성을 하셨는가 하나님께 보고하는 내용입니다. 6a절을 보십시오.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었습니다. 제자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았고 마음과 육신이 원하는 대로 죄의 소욕을 좇아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심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거룩하심과 전능하심과 사랑 등 하나님의 품성을 심었습니다. 그때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오늘날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사람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이름을 심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각자 자기 나름대로의 하나님 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백발이 성성한 흰 두루마리를 입은 산신령과 같은 분으로 생각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북두칠성을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그를 향하여 빌기를 잘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히틀러와 같이 잔인한 분으로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제각기 경험에 비추어서 자기 나름대로의 하나님 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공부해 보면 하나님께서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거룩하고 전능하시고 공의로운 분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한없이 은혜롭고 자비롭고 인애가 풍성한 분이십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독생자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죄인들을 위해 내어 주신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성경 공부를 통해서 사람들의 마음에 자리잡고 있는 모든 헛된 우상들을 제거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이름을 심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인격적으로 심고 또 말씀에 순종하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쉼이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집에서나 길에서나 들에서나 바닷가에서나 식사하실 때나 틈나는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사랑의 수고로 그들의 영적 눈이 떠져서 그들은 예수님께 있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 인줄 알게 되었고 또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되었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제자들을 황태자와 같이 귀히 여기셨습니다(9,10). 예수님은 이제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9절을 보십시오.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얼마나 귀히 여기셨는가를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아버지께서 보내신 아버지의 소유로 생각하고 그들을 귀히 여기셨습니다. 복음서를 읽어볼 때 제자들은 사랑스러운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비린내 나는 비천한 어부 출신들이었고 악명 높은 세리 출신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약소 민족 이스라엘의 멸시 받는 갈릴리 촌사람들로서 학식도 없고 교양도 없는 인간 기초가 부족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천한 자들이라 생각하고 무시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깨달음이 둔했지만 예수님은 인내하심으로 그들을 제자로 세웠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황태자와 같이 귀히 여기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존경과 사랑으로 대하시고 겸손과 온유로 섬기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있어서 영광이었고 기쁨이요 소망이요 면류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습니다(10). 예수님의 마음을 품은 사도 바울도 양들을 참으로 귀히 여겼습니다. 그에게는 양이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었습니다. 그는 빌 4:1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안에 서라.” 저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참 선배이신 목자님께서 항상 존댓말을 해 주시기 때문에 말씀을 낮추시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목자님이 계속해서 존댓말을 써서 대화를 해주셨기 때문에 낮은 자존감이 치료가 되고 그에 걸 맞는 삶을 살고자 투쟁하게 되었습니다. 목자님이 나를 황태자와 같이 여긴다고 해서 목자님과 맘먹을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도리어 마음을 낮추고 훌륭한 동역자로 성장해야 합니다. 또 목자가 양들을 사랑하고 귀히 여길 때 훌륭한 동역자로 성장하게 됩니다.
셋째, 예수님은 제자들이 하나가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11). 11절을 보십시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하나가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사단의 역사는 사람들의 마음에 회의와 불신과 두려움을 심어서 분열하게 하고 분쟁하게 하고 불화하게 만듭니다. 사단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사소한 일로 서로 미워하고 다툴 때 박수를 치며 기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심습니다. 무엇보다 하나가 되기에 힘쓰고 어떤 손해가 있더라도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에 힘씁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에 순종하여 하나가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서로 하나가 됨으로 세계를 복음으로 정복하기를 원하였습니다.
넷째, 예수님은 제자들이 악에 빠지지 않도록 보전해 주시기를 기도하셨습니다(12-16). 1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있을 때 그들을 아버지의 이름으로 보전하여 지키었습니다. ‘지킨다’는 뜻은 부단히 살피고 훈련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세상의 악영향에 물들지 않도록 끊임없이 말씀을 가르치고 기도하심으로 그들의 내면을 훈련하셨습니다. 그 중에 하나도 악에 빠지지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인 가룟 유다만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러나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가시기 때문에 더 이상 제자들을 도우실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악의 세력이 얼마나 강한가를 잘 아시기 때문에 전능하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악의 세력으로부터 지켜주시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세상에서 도피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양과 같은 제자들을 이리 같은 세상에 내보내시고 세상의 죄악과 도전하여 싸우는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18).
다섯째, 제자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시도록 기도하셨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거룩하게 한다는 것은 세상과 구별된 성별된 생활을 한다는 뜻입니다. 제자들은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벧전 1:4-6). 하나님의 백성들은 돈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세상 유행이나 죄의 소욕을 좇아 살아서는 안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도 역시 세상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육의 소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편히 쉬고 싶고 인생을 즐기고 싶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성별된 생활을 할 수 있습니까? 혈서를 쓰고 아무리 굳게 결심해도 안됩니다. 오직 진리의 말씀을 좇을 때만이 가능합니다. 시 119:9절은 말씀합니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좇아 삼갈 것이니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을 때 거룩하게 살아야 할 기준이 없기 때문에 죄의 소욕을 좇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아니할 때 죄와 사단의 노예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어떤 젊은이는 그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기 때문에 정욕의 노예가 되어 그 내면이 창기와 같음을 보게 됩니다. 또 어떤 분들은 전도하고 사명을 감당할 힘이 없습니다. 이들의 문제는 그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세력을 얻지 못하고 죄의 소욕이 그 마음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들은 결코 하나님을 볼 수 없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게 됩니다(골 3:5,6).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살므로 죄의 세력과 피 흘리기 까지 싸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파멸하게 됩니다. 우리가 말씀을 좇아 순결한 생활을 할 때 그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또한 순결한 생활을 할 때 불의와 싸울 수 있는 참된 용기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영력을 덧입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살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에서 더러워진 우리 영혼을 순결하게 합니다. 또한 세상적인 가치관을 변화시키사 우리를 영적인 사람이 되게 합니다. 성결은 하나님의 백성이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하여 거룩한 생활을 하심으로 친히 본을 보여 주었습니다.
III. 모든 믿는 자들을 위한 기도 (20-26)
예수님은 이제 제자들의 말씀 증거를 통해 믿게 될 모든 신자들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그 기도제목이 무엇입니까?
첫째, 모든 믿는 자들이 하나가 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믿는 자들이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될 때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게 될 것입니다. 또한 믿는 자들이 하나가 될 때 하나님의 사랑이 세상에 전파될 수 있습니다(23). 그때 우리는 예수님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믿는 자들이 사소한 일로 서로 중상모략하고 싸우므로 세상 사람들에게 비방거리가 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워지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심히 슬프시게 하는 것입니다. 분쟁과 분열이 있는 곳에 성령이 역사하실 수 없고 사단이 역사하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되지 못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도 한 분이시요 예수 그리스도도 한 분이시요 성령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소망도 하나요 사명도 하나이기 때문입니다(엡 4:4-6).
둘째, 예수님은 모든 신자들이 그의 영광에 참예하기를 원합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예수님은 모든 믿는 자들이 이 세상에서 순례의 길을 끝낸 후에 하나님의 나라에서 예수님과 함께 있어 그의 영광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할 때 장차 주님의 영광에도 동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하나님의 사랑이 모든 믿는 자들의 마음에 거하기를 원합니다(26).
이상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를 통해서 예수님의 깊고 넓은 내면을 배웠습니다. 또 예수님의 인생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었고 우리 각자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인생 목적을 분명히 해야 함을 배웠습니다. 예수님의 부름 받은 목자로서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이 악한 세상에서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힘있게 증거함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말씀 / 요한복음 17:1-26
요절 / 요한복음 17:1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ㅗ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체포되기 직전 하나님 아버지께 드린 기도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세상 만민을 마음에 품고 드리는 기도이므로 대제사장적인 기도입니다. 우리는 마태복음 6장에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를 ‘주기도문’이라 부릅니다. 그러나 정확히 따져보면 그것은 ‘제자들의 기도문’이라 할 수 있고, 오늘 말씀에 있는 주님의 기도야말로 진정한 ‘주기도문’입니다. 이 기도문은 그 내용이 너무나 웅대하고 오묘하며 깊고 넓어서 일생을 두고 묵상해도 부족하지만 오늘은 이 기도문을 통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조금이라도 더 배우고, 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배움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목자의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첫째는 예수님 자신을 위한 기도(1-5), 둘째는 열 한 제자들을 위한 기도(6-19), 셋째는 세상의 모든 믿는 자들을 위한 기도(20-26)입니다.
I. 예수님 자신을 위한 기도 (1-5)
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여기서 “때가 이르렀다”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세상 죄를 지고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가 이르렀음을 뜻합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첫 인간 아담의 타락 이후 끊임없이 흘러온 인류의 구속 역사가 드디어 완성되는 역사적 순간이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한 인간으로서 예수님의 눈 앞에 닥친 현실은 가장 잔인한 십자가의 죽음이었습니다.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 부딪치면 두려움과 절망과 슬픔에 빠집니다. 살 구멍을 찾는데 눈이 휘둥그래져서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기란 무척 어렵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셨는데 그 첫마디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였습니다. 이 기도는 예수님의 전 생애를 잘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다가오는 이 때를 항상 의식하시며 순간 순간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또 아버지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을 믿고 의지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1절을 다시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예수님의 자신을 위한 한 가지 기도 제목은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이 기도제목은 지금까지 살아오신 예수님의 인생 목적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4절에서 고백합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의 자신을 위한 유일한 기도 제목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사람은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이라 자기를 영화롭게 하기를 원합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과정에서도 은근히 자기의 영광을 추구합니다. 자기의 이름이 기대한대로 인정 받고 영화롭게 되지 않을 때 실망하고 불만이 생기고 남을 탓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가지 기도 제목으로 사셨는데 그것은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인정과 칭찬을 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을 가장 기쁘게 하고 만족하게 한 것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때였습니다. 한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고 영원한 생수를 마셨을 때 예수님은 너무나 기쁘고 만족하셔서 배고픈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니라(4:32,34).”
예수님은 현재 십자가를 코 앞에 두고 있습니다. 그 십자가는 고통과 수치와 저주의 비참한 죽음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내면에는 두려움 대신 하늘의 영광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시기를 “아버지여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1)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5).” 예수님을 잘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이는 예수님의 이기적인 기도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께 아들인 자신을 영화롭게 하옵소서 라는 기도는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창세 전부터 하늘 나라의 부귀와 영광, 권세와 위엄을 누렸습니다. 그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오셔서 인간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 처형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저주의 죽음이 아니요 영광의 죽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죽으신 지 3일 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사 창세 전에 누리셨던 하늘 나라의 영광을 다시 회복하실 것을 믿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유일한 기도 제목은 우리 인생의 근본 목적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줍니다. 우리가 목자로 사는 인생의 근본 목적이 무엇일까요? 열심히 양을 치고 많은 제자를 양성하여 큰 역사를 이루는 것일까요? 복음으로 세계를 정복하는 것일까요? 그것이 우리 인생의 목적이라면 우리는 곧 지치고 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실 수 있지 연약한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양, 제자, 또는 복음으로 세계를 정복하는 일 등이 목적이 되기 전에 우리는 우리 인생의 근본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임을 항상 확인해야 합니다. 기독교 소요리 문답 제 1 문을 보면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대신 자기 영광을 구할 때 비참해집니다. 아무리 좋은 일을 많이 한다 해도 자기영광을 위해 살 때 행복할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영혼이 번민과 고뇌로 끊임없이 고통하게 됩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면 순수해지고 겸손하게 되고 심령에 참 자유와 기쁨을 누리며 그 누구라도 영접하고 사랑하므로 진정으로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불멸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고귀한 존재로 지음 받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전 10:31절에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고 권면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왜 영화롭게 되어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믿는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기 위해서 영화롭게 돼야 했습니다. 영생을 주려면 죽음까지도 이길 수 있는 권세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를 위해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권세로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십니다. 영생이란 무엇입니까? 3절을 보십시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여기서 아는 것은 이성적인 이해가 아니라 인격적이고 체험적인 이해를 기초로 한 하나님과의 만남을 의미합니다. 한 때 사도 베드로는 유대인으로서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회당에도 열심히 나가고 기도도 하며 중요한 종교 의식에도 동참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을 때 예수님 앞에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가 처음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자신의 죄인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예수님을 아는 것은 이렇게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나의 죄악됨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자 예수님께 나오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 인생에는 결정적인 변화가 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각자를 찾아 오셔서 이렇게 영생을 주셨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하라고 주신 일에 충성하셨습니다. 그 일은 인류 구속 사업과 복음 역사를 계승할 제자를 양성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위해 제자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심으시고 마침내는 인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상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시며 운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온전히 이루심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였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목자로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면 목자로서의 부르심을 심령 깊이 영접하고 끝까지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나그네 인생의 마지막 날 예수님과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사도 바울도 그의 말년에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딤후 4:7)” 우리는 어떤 형편 가운데서도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마 6:33).
예수님은 창세 전에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영화롭게 해주시기를 간구합니다(5). 예수님은 상아와 같이 아름다운 곳에서 존귀와 영화로 옷 입으시고 세세토록 찬송과 경배를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죄를 그 몸으로 담당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많은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냄새 나는 죄인들을 섬기느라 그 고운 모양이 마른 넝쿨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제 사명을 완수하신 후에 다시 그 본래의 영광에 들어가고자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고난을 통해서 영원한 영광을 얻고자 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영광을 바라보시고 기쁨으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II. 열 한 제자를 위한 기도(6-19)
첫째,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경을 가르쳤습니다(6-8). 6-8절은 예수님께서 어떻게 제자 양성을 하셨는가 하나님께 보고하는 내용입니다. 6a절을 보십시오.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었습니다. 제자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았고 마음과 육신이 원하는 대로 죄의 소욕을 좇아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심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거룩하심과 전능하심과 사랑 등 하나님의 품성을 심었습니다. 그때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오늘날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사람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이름을 심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각자 자기 나름대로의 하나님 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백발이 성성한 흰 두루마리를 입은 산신령과 같은 분으로 생각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북두칠성을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그를 향하여 빌기를 잘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히틀러와 같이 잔인한 분으로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제각기 경험에 비추어서 자기 나름대로의 하나님 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공부해 보면 하나님께서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거룩하고 전능하시고 공의로운 분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한없이 은혜롭고 자비롭고 인애가 풍성한 분이십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독생자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죄인들을 위해 내어 주신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성경 공부를 통해서 사람들의 마음에 자리잡고 있는 모든 헛된 우상들을 제거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이름을 심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인격적으로 심고 또 말씀에 순종하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쉼이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집에서나 길에서나 들에서나 바닷가에서나 식사하실 때나 틈나는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사랑의 수고로 그들의 영적 눈이 떠져서 그들은 예수님께 있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 인줄 알게 되었고 또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되었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제자들을 황태자와 같이 귀히 여기셨습니다(9,10). 예수님은 이제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9절을 보십시오.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얼마나 귀히 여기셨는가를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아버지께서 보내신 아버지의 소유로 생각하고 그들을 귀히 여기셨습니다. 복음서를 읽어볼 때 제자들은 사랑스러운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비린내 나는 비천한 어부 출신들이었고 악명 높은 세리 출신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약소 민족 이스라엘의 멸시 받는 갈릴리 촌사람들로서 학식도 없고 교양도 없는 인간 기초가 부족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천한 자들이라 생각하고 무시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깨달음이 둔했지만 예수님은 인내하심으로 그들을 제자로 세웠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황태자와 같이 귀히 여기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존경과 사랑으로 대하시고 겸손과 온유로 섬기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있어서 영광이었고 기쁨이요 소망이요 면류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습니다(10). 예수님의 마음을 품은 사도 바울도 양들을 참으로 귀히 여겼습니다. 그에게는 양이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었습니다. 그는 빌 4:1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안에 서라.” 저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참 선배이신 목자님께서 항상 존댓말을 해 주시기 때문에 말씀을 낮추시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목자님이 계속해서 존댓말을 써서 대화를 해주셨기 때문에 낮은 자존감이 치료가 되고 그에 걸 맞는 삶을 살고자 투쟁하게 되었습니다. 목자님이 나를 황태자와 같이 여긴다고 해서 목자님과 맘먹을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도리어 마음을 낮추고 훌륭한 동역자로 성장해야 합니다. 또 목자가 양들을 사랑하고 귀히 여길 때 훌륭한 동역자로 성장하게 됩니다.
셋째, 예수님은 제자들이 하나가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11). 11절을 보십시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하나가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사단의 역사는 사람들의 마음에 회의와 불신과 두려움을 심어서 분열하게 하고 분쟁하게 하고 불화하게 만듭니다. 사단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사소한 일로 서로 미워하고 다툴 때 박수를 치며 기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심습니다. 무엇보다 하나가 되기에 힘쓰고 어떤 손해가 있더라도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에 힘씁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에 순종하여 하나가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서로 하나가 됨으로 세계를 복음으로 정복하기를 원하였습니다.
넷째, 예수님은 제자들이 악에 빠지지 않도록 보전해 주시기를 기도하셨습니다(12-16). 1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있을 때 그들을 아버지의 이름으로 보전하여 지키었습니다. ‘지킨다’는 뜻은 부단히 살피고 훈련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세상의 악영향에 물들지 않도록 끊임없이 말씀을 가르치고 기도하심으로 그들의 내면을 훈련하셨습니다. 그 중에 하나도 악에 빠지지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인 가룟 유다만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러나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가시기 때문에 더 이상 제자들을 도우실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악의 세력이 얼마나 강한가를 잘 아시기 때문에 전능하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악의 세력으로부터 지켜주시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세상에서 도피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양과 같은 제자들을 이리 같은 세상에 내보내시고 세상의 죄악과 도전하여 싸우는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18).
다섯째, 제자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시도록 기도하셨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거룩하게 한다는 것은 세상과 구별된 성별된 생활을 한다는 뜻입니다. 제자들은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벧전 1:4-6). 하나님의 백성들은 돈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세상 유행이나 죄의 소욕을 좇아 살아서는 안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도 역시 세상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육의 소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편히 쉬고 싶고 인생을 즐기고 싶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성별된 생활을 할 수 있습니까? 혈서를 쓰고 아무리 굳게 결심해도 안됩니다. 오직 진리의 말씀을 좇을 때만이 가능합니다. 시 119:9절은 말씀합니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좇아 삼갈 것이니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을 때 거룩하게 살아야 할 기준이 없기 때문에 죄의 소욕을 좇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아니할 때 죄와 사단의 노예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어떤 젊은이는 그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기 때문에 정욕의 노예가 되어 그 내면이 창기와 같음을 보게 됩니다. 또 어떤 분들은 전도하고 사명을 감당할 힘이 없습니다. 이들의 문제는 그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세력을 얻지 못하고 죄의 소욕이 그 마음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들은 결코 하나님을 볼 수 없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게 됩니다(골 3:5,6).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살므로 죄의 세력과 피 흘리기 까지 싸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파멸하게 됩니다. 우리가 말씀을 좇아 순결한 생활을 할 때 그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또한 순결한 생활을 할 때 불의와 싸울 수 있는 참된 용기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영력을 덧입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살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에서 더러워진 우리 영혼을 순결하게 합니다. 또한 세상적인 가치관을 변화시키사 우리를 영적인 사람이 되게 합니다. 성결은 하나님의 백성이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하여 거룩한 생활을 하심으로 친히 본을 보여 주었습니다.
III. 모든 믿는 자들을 위한 기도 (20-26)
예수님은 이제 제자들의 말씀 증거를 통해 믿게 될 모든 신자들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그 기도제목이 무엇입니까?
첫째, 모든 믿는 자들이 하나가 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믿는 자들이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될 때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게 될 것입니다. 또한 믿는 자들이 하나가 될 때 하나님의 사랑이 세상에 전파될 수 있습니다(23). 그때 우리는 예수님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믿는 자들이 사소한 일로 서로 중상모략하고 싸우므로 세상 사람들에게 비방거리가 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워지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심히 슬프시게 하는 것입니다. 분쟁과 분열이 있는 곳에 성령이 역사하실 수 없고 사단이 역사하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되지 못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도 한 분이시요 예수 그리스도도 한 분이시요 성령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소망도 하나요 사명도 하나이기 때문입니다(엡 4:4-6).
둘째, 예수님은 모든 신자들이 그의 영광에 참예하기를 원합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예수님은 모든 믿는 자들이 이 세상에서 순례의 길을 끝낸 후에 하나님의 나라에서 예수님과 함께 있어 그의 영광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할 때 장차 주님의 영광에도 동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하나님의 사랑이 모든 믿는 자들의 마음에 거하기를 원합니다(26).
이상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를 통해서 예수님의 깊고 넓은 내면을 배웠습니다. 또 예수님의 인생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었고 우리 각자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인생 목적을 분명히 해야 함을 배웠습니다. 예수님의 부름 받은 목자로서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이 악한 세상에서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힘있게 증거함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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