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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요22강(요 16:1-33 ) /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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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섬김이
댓글 0건 조회 3,312회 작성일 03-02-03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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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요한복음 제 22 강
말씀 / 요한복음 16:1-33       
요절 / 요한복음 16:13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어디론가 간다 하시고 또 그들이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고 하시자 근심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하시며 내 안에 거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가시면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본문은 성령님이 어떤 분이시며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본문을 통해서 진리의 성령님에 대해서 잘 알고 진리를 좇으며 거룩한 제자의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장차 고난 받게 될 제자들(1-7)
 예수님께서는 15:18-27절에서 장차 제자들이 연고 없이 세상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 여기에는 미워하다는 말이 여덟번이나 나옵니다. 제자들은 아무 연고없이 미움을 받게 될 때 신앙 생활에 회의가 들기 쉽습니다. 예수님을 잘 섬기는데 왜 이런 일이 생기는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고난 자체를 싫어하기 때문에 핍박을 받으면 세상과 타협하기 쉽습니다. 또한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죄를 지적하고 회개하도록 하면 미움을 받게 됩니다. 신자와 불신자의 세계관이 다르기 때문에 미움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장차 있을 핍박을 말씀하심으로 제자들이 실족하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받게 될 핍박은 아주 극심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제자들을 출회할 뿐 아니라 때가 되면 제자들을 죽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고 할 것입니다. 같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핍박을 당할 때는 정말 힘이 듭니다. 회의가 듭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말하지만 실상 그들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핍박을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하지만 실상은 영적으로 무지합니다. 사울은 하나님을 위한 열심으로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가두고 죽이는 일에 동참했습니다. 지금도 정교회 신자들이 많은 동유럽에서는 복음을 전하는 개신교 선교사들을 이단이라고 핍박합니다.

 예수님은 핍박을 당하는 제자들에게 핍박을 없애주지 않았습니다. 또 핍박이 없는 곳으로 데려 가지도 않았습니다. 핍박하는 사람들을 당장 징계하지도 않으셨습니다. 핍박을 통해서 제자들의 내면을 강하게 연단하시고 순수하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소망으로 가득하게 하셨습니다. 유럽의 기독교가 핍박을 받았을 때는 깨어 있으면서 강했습니다. 그러나 적이 없어지자 안일해지고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신자들이 고난을 받는 가운데 깨어 복음을 전하도록 했습니다. 교회사를 공부해 보면 교회는 고난 속에서 강해졌고 번성했습니다. 반대로 경제적인 풍요와 적이 사라지면 안일해지고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고난 속에서 제자들을 강하게 키우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 겪는 여러 모양의 고난을 인해서 감사해야 합니다. 4절을 보면 핍박을 당할 때에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자립적인 믿음을 가져야 함을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을 때 고난을 이길 힘을 덧입게 됩니다. 그리고 말씀을 믿을 때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고난 속에 있는 제자들을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습니다. 반드시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 고난에 함께 참여하십니다. 덩치는 큰데 체질이 연약한 교회는 성장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작지만 강한 교회는 계속해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각 사람이 먼저 강한 믿음을 가질 때 계속해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사자같이 강한 믿음의 사람들이 되도록 고난을 통해서 훈련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시는데 제자들 중에서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느냐고 묻는 자가 없고 도리어 이 말을 하므로 그들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영접하고 생각하기 보다 자기 문제에 갇혀 있었습니다. 자기의 장래와 내면 문제에 갇혀 있을 때 믿음을 배우지 못하고 도리어 근심이 가득하였습니다. 그들은 의지할 대상이신 예수님이 떠나간다고 하자 이럴 줄 몰랐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실상을 알려 주셨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후 승천하십니다. 그 후에 다른 보혜사를 보내 주십니다. 보혜사란 위로자, 상담자, 도움을 주는 자, 변호인, 강하게 하는 자, 후원자를 뜻합니다. 최초의 보혜사이신 예수님은 두번째 보혜사의 활동을 통해서 당신의 사역을 계속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한 분이십니다.

 제자들은 눈에 보이는 예수님을 의지해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육신의 몸을 입으심으로 시공간의 제약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오심으로 제자들은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서나 도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성령님께서 오셔서 하실 일이 무엇입니까?

둘째, 성령의 사역(8-15). 8절을 보십시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책망한다는 말은 깨닫게 하다, 납득시키다, 확신을 갖게 한다는 뜻입니다. 성령하면 사람들은 신비롭고, 황홀한 체험을 하고 또 방언이나 은사나 능력을 많이 생각합니다. 물론 그런 체험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주된 사역은 먼저 죄에 대하여 책망하는 일입니다.

 첫째로, 성령께서는 죄에 대해서 깨닫도록 하십니다. 잘못을 알도록 하십니다. 우리가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의 자각이나 노력에 의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께서 내 속에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듭난 신자라면 죄를 지으면 견딜 수가 없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내주하고 계시기 때문에 죄에 대해서 민감하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슬퍼하시는 죄와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분별하게 하십니다. 성령님께서 우리를 깨우치실 때 우리는 세상의 악에 대해서, 죄의 심각성에 대해서, 하늘 나라에 대해서, 온전한 지식을 가지게 됩니다. 죄악에 오염된 세상은 죄에 대한 자각이 없습니다. 심지어 죄를 지으면서 그것을 자랑합니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그들이 범한 죄를 단순히 알리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그들로 죄를 깨닫게 하여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나오게 하려고 오신 것입니다. 즉 성령께서는 세상의 죄를 입증할 뿐 아니라, 그들로 자신들의 죄를 시인하도록 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런데 9절을 볼 때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라고 했습니다. 즉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불신이 큰 죄인 것을 깨닫게 합니다. 불신은 지옥행 1호에 해당하는 죄입니다. 모든 죄악의 뿌리는 불신앙입니다. 불신은 엄청난 결과를 초래합니다. 사단이 처음 아담을 타락하게 할 때 사용했던 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불신하도록 한 것입니다. 불신이 심겨지면 사단은 마음껏 그 사람을 요리합니다. 우리는 성령님께서 말씀과 양심을 통하여 우리의 죄에 대해서 책망하시고 깨닫게 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대의 명분을 반대한 적대자들을 꼼짝 못하게 만드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담대히 복음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사람의 마음 문을 열게 하사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가 전하는 말씀을 듣고 깨닫게 하시며 회개하게 하십니다.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있는 곳에 회개하는 역사가 왕성하게 일어 납니다.

 둘째로, 성령께서는 의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십니다. 여기서 의는 그리스도의 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의'는 모든 말씀 가운데 나타나고 있으며, 주님의 행동 속에 잘 표출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의를 알려주시는 것은 인간은 절대로 의로운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 줄 뿐 아니라(롬 3:10),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음으로 우리들이 의로운 존재로 변화되게 함에 있는 것입니다(빌 1:11). 우리에게는 의가 없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의롭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주어진 선물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엡 2:8). 이런 믿음을 소유할 때 우리는 진정 겸손한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로 성결한 삶을 살도록 인도하십니다. 성결의 배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칭의 다시 말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심으로 우리는 용서를 받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속 사정은 어떠합니까? 정욕, 위선, 비열함, 교만, 거짓, 시기, 탐욕, 남을 착취해 먹으려는 생각, 불순한 동기, 그리고 자신만 아는 모든 수치스러운 일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더욱 더 거룩해진다는 표현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해서 더욱 민감해 지고 따라서 자신의 죄악과 결점을 더욱 분명히 파악하게 되고 그래서 하나님의 용서와 깨끗하게 하시는 은혜가 끊임없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점점 더 강하게 깨닫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볼 때 자기 만족의 성결이나 스스로 의롭게 여기는 성결, 하나님이 주시는 의가 그다지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성결은 모두 기만적이며 사람을 호리는 불경한 생각입니다.
 
 성결의 뿌리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다고 했습니다(롬8:7). 중생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마음과 뜻과 목숨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 모두 능력 밖의 일입니다. 하지만 믿음과 성령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에게는 거룩한 동기가 자연스럽게 우러 나옵니다. 이는 거듭날 때 ‘하나님을 추구하는 마음’이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 가까이 가며, 하나님을 추구하고,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깊고 지속적인 욕망이 생겨납니다. 우리로 하여금 성결을 추구하게 하는 주체는 성령님이십니다. 성령께서는 성경의 진리, 기도, 교제, 예배, 성찬 등의 객관적인 은혜의 도구와 더불어 생각하기, 경청하기, 자문하기, 자신을 살피기, 자책하기, 심중에 있는 생각을 다른 사람과 나누기, 신중하게 행동하기, 소감 쓰기 등 우리 자신을 열어 변화하게 만드는 은혜의 도구를 가지고 일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어떻게 우리 안에서 당신의 능력을 보이실까요? 환상을 보여 주거나, 어떤 느낌을 갖게 하거나 직접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단지 일반적인 도구들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게 만들어 우리를 좀더 개선시키고, 더욱 지혜롭게 만드십니다. 거룩한 습관은 자신을 자제하며 올바른 행동을 계속할 때 생겨 납니다. 성령의 열매는 일련의 습관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는 모두 습관적인 기질입니다. 이런 거룩한 습관이란 자기 절제와 노력으로 자연스럽게 형성되지만 결코 자연스러운 결과물은 아닙니다. 거룩한 습관을 위한 절제와 노력은 성령의 축복을 받아야만 합니다. 성결은 자기 노력으로 생긴 자기 성화가 아니라 성령의 방법을 그대로 이해하고 그분과 동행하는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에 자신을 푹 담그는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결하고자 노력할 때 갈등을 체험하게 됩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5:17).” 이 말씀은 우리가 거룩하게 살고자 긴장하고 노력하는 일이 필요하며 성취한 모든 것이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실제로 이런 갈등은 이 세상에서 내가 거룩한 삶을 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것은 계속되는 고된 싸움이요 격렬한 전투입니다. 우리가 외적으로든 내적으로든 간에 세상에서 성결을 추구함으로 갈등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하는 모든 발상은 도피주의자의 망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결을 추구하면서 환멸을 느끼고 의기소침해 집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앞서 행하셨던 것처럼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합니다. 우리가 깨어 기도하고 기도하며 경계하지 않는 한, 우리는 세상과 우리 안에 거하는 죄와, 악한 자에게 대항해서 굳건하게 설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농간과 감언에 희생될 뿐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성결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율법이 요구하는 전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사랑이 성령의 첫 열매이며, 사랑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이라는 주장이 아무런 설득력이 없다고 말합니다. 사랑은 규정과 원칙을 넘어 사람 자체를 바라보며, 상대의 행복과 영광을 추구합니다. 사랑은 무엇인가를 하고, 주는 것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3:16-18).” 사랑을 실천하려면 엄청난 희생이 따릅니다. 사랑이 없으면서 거룩한 척 하는 것은 그 어떤 것도 하나님보시기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속이 텅 빈 속임수입니다.

 셋째로, 성령님께서는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십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이 세상의 임금이 심판을 받았다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사탄을 이기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마귀는 사람들의 영혼에서 추방된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경건한 성도들에게는 크나큰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재난의 원인이 되는 사탄의 권세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굴복됨으로 우리는 사망의 권세에서 놓임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능력을 행하게 됩니다. 성령께서는 악의 권세에 대항할 수 있는 능력을 줍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담대함을 줍니다. 사도행전 1:8절은 말씀합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따라서 선을 행하다가, 십자가를 지고 가다가 낙심하거나 좌절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 행하신 대로 보응하시고,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참조, 갈 6:7).
 
 성령님께서 세상을 책망하는 것이 복음 역사를 섬기는 제자들과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가 부족하여도 성령께서 함께 하실 때 복음 전파와 제자양성 역사와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멀쩡한 사람이 죄인임을 깨닫고 예수님의 의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며 제자의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은 성령께서 함께하실 때 가능한 일입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복음 역사에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또 하나님 나라가 우리 사회의 모든 영역으로 확장될 비전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 하나님을 의지하여 위대한 일을 이루어 나가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힘으로도 안되고 능으로도 안되고 오직 성령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 가능합니다. 이를 위해서 간절히 믿음으로 기도합시다.

 넷째로,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성령님(12-15).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직도 이를 것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감당하지 못합니다. 제자들이 다 이해하지 못하고 다 받아들이지 못하고 소화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여기서 모든 진리란 ‘알 만한 것은 무엇이건 전부’가 아니라 ‘예수님에 관해 알 필요가 있는 모든 것’을 뜻합니다. 그는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제자들에게 알리십니다(13). 여기서 “장래 일”은 ‘제자들에게 닥칠 일’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닥칠 일’, 즉 십자가, 부활, 통치, 재림 등의 모든 것을 회복시킨다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성령님은 제자들이 예수님이 직접 하셨던 말씀을 기억하게 하고 이해하도록 이끄시는 식으로 가르치십니다.

 14절을 보십시오.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라.” 성령은 그리스도를 증거하십니다. 범죄자로 십자가에 못 박혔지만 그분은 결코 죄인이 아니며, 성부의 영광으로 되돌아가심으로 그분의 의로움이 실제로 입증되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심판으로 ‘이 세상의 사악한 임금(12:31)’을 권좌에서 쫓아 내셔서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으로서 그 역할을 담당하기 시작했다고 증거하십니다. 또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으면 바로 불신앙의 죄라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리십니다. 이와 같이 성령께서는 영광스러운 구세주께 영광을 돌려 예수님에 관한 진리를 명확하게 이해시키는 해설자 역할과 무지한 영혼이 그 진리를 받아들이도록 조명하는 역할을 감당하십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성령 사역의 중심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서울 시내 중심에 있는 광화문이라든가 남대문을 밤에 보면 투광 조명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조명이 없다면 어두워서 보이지 않았을 건물을 보이게 만드는 일이며, 건물의 세부적인 부분까지 눈에 띄게 만들어 건물의 위용을 극대화시킴으로서 건물을 제대로 볼 수 있도록 하는 일이 투광 조명입니다. 투광 조명이 잘 되면 조명등 자체는 안 보이는 법입니다. 조명이 어디서 나오는지 몰라야 정상입니다. 우리 눈에는 투광조명이 비취는 건물만이 보일 뿐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비추는 이른바 숨겨진 투광조명등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 가운데 방언이나 병고치는 은사가 활발하지 않기 때문에 성령의 역사가 없는 것은 아닌가 오해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령의 사역을 너무나 자주 자신의 결핍과 필요에만 결부시키고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시려고 이곳에 와 계시며, 우리에게 예수님의 임재를 전달하는 일이며, 예수님을 온전히 알려주어서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것이라는 신뢰를 가지게 만든다는 생각은 충분히 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성령의 사역을 그리스도 중심이 아니라 인간 중심의 견해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우리가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매년 봄학기에 복음서를 공부하는 것은 매우 잘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로서 우리의 제자도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게 준비시키는 것은 바로 복음서에 나오는 그리스도를 공부하는 가운데 주 예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 전체를 읽되 특별히 사 복음서를 끊임없이 묵상해야 합니다. 이 일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무엇인지 배울 수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충만한 곳에 예수님의 인격을 깨닫고 그의 임재를 느끼며 예수님을 닮아가는 역사가 왕성합니다.  예수님이 드러나지 않고 성령 자체에만 매달리는 성령의 역사는 사단의 교묘한 술책에 말려 들 수 있습니다. 지금 수많은 기도원이 기도하는 곳이 아니라 크리스챤 점쟁이들이 그리스도인들을 상대로 점을 봐주는 곳이 되었습니다. 이는 불교가 샤머니즘에 넘어갔듯이 기독교가 샤머니즘에 넘어가고 있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아는 데서 성령을 아는 것으로 옮겨 간다면 머리를 붙들지 아니함으로 점점 더 영적으로 약해 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무관하고, 실제 존재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다만 사탄이 던지는 기만의 그물과 진리와 선에 대한 끝없는 왜곡 가운데 존재하는 가짜 ‘영적’인 감정과 몽상의 세계에 빠져 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깨어서 말씀을 깊이 그리고 제대로 공부하는 가운데 예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며 제자의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죽음과 부활에 대한  예언(16-33). 예수님이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고, 조금 있으면 나를 본다’고 하시자 제자들은 무슨 수수께끼를 하시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에게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리니 세상이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20)”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십니다. 이를 해산의 과정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서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합니다(21). 지금은 그들이 근심하나 예수님을 다시 보게 되면 그들의 마음이 기쁠 것이요 그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말씀하시고 나서 기도하도록 권면하셨습니다. 23,24절을 보십시오.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26,27절에서도 “그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나를 하나님께로서 온 줄 믿은 고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니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나와서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시는 줄 믿게 되었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하나님께로 오신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되었다는 것이요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유일한 그리스도이심을 믿었다는 뜻입니다. 제자들은 이로써 예수님께 신앙 고백을 하였습니다. “이로써 주께서 하나님께로서 나오심을 우리가 믿삽나이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자신이 제자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셨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이 할 수 있는 제자 양성은 다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고 물으시고는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리라(32).”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제자들에게 무안을 주려고 하심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연약함을 누구보다도 잘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비록 세상에서는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에 우리도 예수님 안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상에서 고난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그리고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우리가 핍박과 환란 가운데서 염려하기 보다 기도하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함으로 이를 극복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제자로서 성령 하나님을 의지하고 거룩한 삶을 살며 예수님을 증거하는 가을 학기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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