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002년 요한복음 제21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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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길이요
말씀:요한복음 14:1-31
요절:요한복음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우리는 불확실성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오늘도 근심을 안고 살고 내일을 생각하면 또 근심이 됩니다. 본문은 그 근본적인 이유와 해결책을 명쾌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근심과 걱정거리가 있습니까? 본문의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는 은혜의 시간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예수님은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 되십니다.(1-6)
제자들은 왜 근심을 했을까요? 1a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제자들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비전이 넘쳤습니다. 예수님의 능력과 날로 치솟는 예수님의 인기를 보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장관 자리 하나는 차지하리라는 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죽으실 것을 누차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너희 중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는 폭탄선언을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습니다. 지금까지 믿고 따르던 예수님이 몇 번씩이나 멀리 떠나가신다고 하니 그들은 근심에 싸이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따른 제자들이기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제자들은 퇴직금도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제자들 몰래 적금을 들어 놓으신 것도 없었습니다. 남은 것이라고는 무엇을 해서 먹고 살 것인가? 하는 근심거리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장래보장문제로 심히 근심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근심을 하는 제자들의 근본문제는 무엇입니까? 1b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예수님은 제자들의 문제가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문제임을 아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것을 믿지 못했습니다. 즉 제자들의 근심문제는 예수님의 절대주관과 권능에 대한 믿음이 없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근심의 출발은 믿음이 없는 것과 하나님 아버지 집을 잃고 이 땅에서 잘먹고 잘 살고자하는 소망을 두기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것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제자들의 근심은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문제입니다. 의식주에 관한 문제는 인류에게 있어서 가장 보편적인 근심중의 하나입니다. 경제문제 즉 물질로 인한 근심이 제일 많습니다. 서민들은 주인이 언제 집을 비워달라고 할지, 또 전세금이나 월세를 올려달라는 문제로 근심하고 있습니다. 우리 목자님 가정들도 이 근심을 안고 있습니다. 양이 없는 문제로 턱없이 모자라는 물질문제로, 자꾸 커가는 아이들을 볼 때 제대로 키울 수 있을까? 어떤 가정은 건강문제로 근심하고 있습니다. 학생들은 어떤 근심이 있습니까? 항상 좋지 않은 학점문제입니까? 등록금문제입니까? 취직 문제입니까? 아니면 자신의 성격 결함으로 인한 문제입니까? 부모님의 가정싸움으로 인한 문제입니까? 결혼 적령기에 접어든 목자님들은 결혼을 잘 할 수 있을까? 근심합니다. 예수님을 믿지 못할 때 부자이건 아니건, 빈부귀천,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두가 근심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근심에 싸여 있는 제자들을 주님은 어떻게 도우셨습니까? 2a을 다시 보십시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예수님은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예금 통장을 건네주시면서 “걱정하지마, 다 이때를 위해서 내가 적금을 들었지. 여기 1억원 짜리 통장이 있으니 이 돈을 찾아 장막을 얻어서 서로 섬기며 열심히 살아야 한다.” 얼마나 멋진 예수님이십니까? 감동적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렇게 인간적으로 도와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도 때로는 너무 어려울땐 1억짜리 복권이라도 당첨되게 해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땅에 소망을 두고 있는 제자들과 우리들에게 물질을 주시기보다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도록 도와주십니다. 예수님 자신을 믿도록 도와주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처소를 예비하시고 다시 돌아오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안전한 장래보장입니다. 즉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히 우리가 살 하나님 나라의 처소를 예비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 와서 하나님께로 가는 순례자입니다. 죄악된 세상에서 많이 살아야 100년 살다가 하나님께로 가야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살게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위해 이미 하나님나라에 궁궐과 같은 집을 다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믿어야겠습니다. 이것을 믿으면 근심이 눈 녹듯 사라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주권적인 역사를 믿어야 합니다. 내 손에 있는 물질과 눈에 보이는 환경을 의지하기 보다 모든 것을 주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어제 국민일보에는 “내집이 생겨서 너무 좋아요”라는 기사가 났습니다. 한국해비타트(사랑의 집짓기 운동)에서 무주택자에게 54가구를 지어 주었습니다. 주택헌정식을 가졌는데 성경과 열쇠를 입주자들에게 전달해 주었습니다. 입주자들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자원봉사자들은 “입주를 축하드립니다.”라는 환호성과 박수를 보냈습니다. 폭죽을 터뜨리고 축하케이크를 자르며 진심으로 축하를 해 주었습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을 불렀을 때 모든 입주자들의 눈에서는 눈물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것이 우리가 육신의 장막을 벗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우리집에 입주할 때의 모습이 아닌가 상상해보니 큰 은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군천사들로 우리의 입주식을 이보다 더 성대하게 치루어 주실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감격하고 또 감격할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슬픔과 아픔이 사라지는 영광의 순간입니다.
저희 가정은 7년째 지하방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결혼한지 22년 되었지만 내 집이 없습니다. 최소한 40대 중반이면 내집을 사서 늙으신 어머님을 모시고 다 큰 두 자녀들이 마음놓고 공부할 수 있는 방이 있는 집을 살 줄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50을 바라보는 지금 그렇지 못한 현실을 바라보면서 때론 회의적인 생각을 가지곤 했습니다. 특히 다 큰 요한이와 제임스에게 방한 칸 마련해 주지 못한 아버지가 된 것 같아 자녀들에게 미안한 감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저와 저희 가정이 이 세상에서 뿌리를 박고 아기자기하게 살지 않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두고 살도록 인도하심을 믿게 되었습니다. 두 자녀들 안에 하나님 나라의 소망이 자라도록 인도하심을 감사합니다. 또한 요한이 제임스가 이 시대를 본받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두며 이 땅에서 위대한 주님의 제자로서 열매를 맺을 줄로 믿고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면 하나님 나라의 우리 집은 어떤 곳일까요? 하늘에 입주할 우리의 집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완벽한 행복과 기쁨과 편리한 시설이 갖추어진 곳입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집은 황금보석으로 꾸며진 집이요, 시공을 초월한 안전시스템으로 만들어진 집입니다. 사시사철 무공해 과일, 무공해 식품들, 아름다운 꽃들로 수놓은 드넓은 정원, 에어컨과 보일러가 필요 없는 알맞은 온도, 도적이 없으므로 울타리 없는 개방된 집, 이것은 저의 상상력에 의한 집일뿐입니다. 실상은 우리들이 생각할 수 없는 너무 좋은 집입니다. 물론 내 집이기 때문에 월세 올려 달라, 집을 비워달라는 말을 듣지 않습니다. 양들을 100명을 초청해도 넉넉할 만큼 넓은 집입니다. 찬송을 마음껏 불러도, 통성 기도를 해도 누구하나 간섭함이 없는 자유가 보장된 집입니다. 이 집을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감격할 일입니까?
또한 하나님 나라는 환경오염문제, 건강문제, 물질문제, 소음문제, 각종 사고 위험 등의 문제들이 전혀 없는 태초에 만드신 에덴동산과 같습니다. 그 곳은 죽음이 없고 싸움이나 미움이 없고 어두움이 없는 곳입니다. 오직 행복과 기쁨과 사랑과 찬송과, 감사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우리가 근심, 걱정 없이 영원토록 주님과 함께 날마다 찬송을 부르며 살 곳입니다. 여러분 이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가지십시오. 영원한 나의 집을 날마다 사모하십시오. 신자는 오직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이 소망이 있을 때 우리는 유한한 이 땅에서 열심히 주와 복음을 위해 헌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비록 가난하게 살더라도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갖고 열심히 사명인의 삶, 제자의 삶을 감당하고자 결단해야 겠습니다.
도마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도대체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 도마는 이 땅의 소망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를 볼 때 하나님 나라의 소망과 세상 소망은 반비례 관계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도마는 하나님 나라의 소망이 없기에 인생의 종착지가 어디인지 알지를 못했습니다. 자신이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지 못하는 사람은 가장 불행한 사람입니다. 나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습니까? 또 무엇을 하기 위해 그 길을 가고 있습니까? 지금 이 시간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어디로 가고 있는가? 무엇을 위해 가고 있느냐? 에 따라 행복과 불행이 나뉘어 집니다. 영생과 심판으로 나뉘어 집니다. 자신이 가고 있 는 길이 잘못된 길이라면 우리는 지금이라도 그 길을 바꾸어야 합니다. 영원한 나의 집이 있는 하늘 나라로 바꾸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구체적으로 제자들이 어떤 길을 가야하는지를 제시하셨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은 제자들과 우리의 최종 목적지가 하나님 아버지께 있어야 함을 선포하십니다. 이 최종목적지인 하나님께로 가기 위한 유일한 길이 바로 자신임을 선포하십니다. 길은 크게 우리가 늘 다니는 눈에 보이는 길과 보이지는 않지만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가는 길이 있습니다. 길은 최종적인 목적지까지 안내를 하는 역할을 합니다. 사람이 어떤 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고생을 하기도 하고 고생을 하지 않기도 합니다. 잘 포장된 길로 가면 편안히 목적지까지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포장되어 있지 않은 길로 가면 참으로 많은 고생이 됩니다. 이와 같이 인생 길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을 택하면 평탄하고 행복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길을 택하면 참으로 힘이 들고 지쳐서 남는 건 질병과 허무와 죽음뿐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조카 롯과 같이 신앙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런데 롯은 나중에 물질적인 가치관의 길을 갔습니다. 그 결과 비참한 삶을 살았습니다. 반면 아브라함은 곁길로 가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길을 따라 갔습니다. 그 결과 그는 위대한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양자택일의 선택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요즈음 학생들은 과거와는 달리 진리를 추구하는 것을 고리타분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즉흥적이고 쾌락적이며 재미있고 쉬운 길을 갑니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자기가 가는 길이 옳다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교수의 길을 , 어떤 사람은 사업가의 길을, 어떤 사람은 정치인의 길을 , 어떤 사람은 연예인의 길을, 어떤 사람은 고시의 길을, 각각 정해 놓고 앞만 보고 달려갑니다. 나름대로 성공의 길, 행복의 길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세상에서의 길은 참으로 많습니다. 그런데 어떤 길을 가느냐하는 결정을 내리는 데 그 기준이 각각 다릅니다. 절대적 기준이 아닌 상대적인 기준에 의해 길을 선택합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나름대로 높고 고매한 이상과 목표를 정해 놓고 목표를 향해 가지만 그 끝은 모두 허무하다는 것이 이 세상 사람들의 가는 길입니다. 근본적으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덧입었기 때문에 하나님께로 가고자 하는 열망이 있습니다. 거룩한 진리의 길을 가고자하는 소원이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공자나 석가는 옳은 길을 가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도 하나님께로 이르는 길을 알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사상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가는데 걸림돌로 오히려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불교에 심취해 보기도 하고, 사서삼경을 읽기도 하고, 어려운 철학책에서 길을 찾고자 합니다. 심지어 이단사상에서 길을 찾으려합니다. 사단은 우리로 하여금 상대적인 길로, 합리적인 길, 쉬운 길로 가도록 유혹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제각기 길을 가지만 그 길의 최후는 심판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는 오직 두길 영생을 얻는 길이 아니면 심판으로 가는 길뿐입니다.
사도바울이 진정 위대하고 똑똑한 사람이라는 것은 바로,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길 정도로 예수님을 좇는 길이야말로 가장 고상한 길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주님을 따르는 길, 영생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제자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사도바울 못지 않은 똑똑한 사람들입니다.
저는 우리 센타에 나오는 형제자매들을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길 되신 주님을 알고자 1:1 성경 공부를 하고 괴롭지만 소감을 쓰고, 팀 모임에 참석하고, 예배에 참석하는 여러분들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현명한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자부심을 갖고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6)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 되신다고 스스로 선포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오직 예수님 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은 한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예수라.” (딤전2:5).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오사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기목숨을 십자가에 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막혔던 길을 다시 여신 유일한 분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 되십니다. 하나님께로서 왔기 때문에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만이 하나님께로 갈 수 있습니다. 성경은 엄히 경고하십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전4:12) 석가나 공자나 문선명이나 정명석이나 이 세상 그 어떤 이름이나 노력이나, 선함이 구원으로 이르게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생명을 얻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하나님께로 가는 길은 오직 예수님을 따르는 길밖에 없습니다. 이 분명한 믿음을 가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길 되신 예수님을 알지 못해 방황하며 심판의 길로 갈 수밖에 없는 불쌍한 영혼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열심히 증거 해야겠습니다.
예수님은 진리의 길이 되십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진리는 참되고 영원하고 보편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세상에 이런 진리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내가 진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진리의 속성을 다 충족시키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하나님께로서 오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서 모든 것을 사실대로 말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다 믿을 수 있도록 겸손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인생의 길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진리는 바로 예수님 자체입니다. 예수님을 알 때 진리를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길이십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부여자시요 주관자이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길이 되시기 때문에 가장 안전한 길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이 길을 가셨고 개척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이 길은 제자의 길입니다. 목자의 길, 선교사의 길, 1:1성경 선생의 길입니다. 이 세상 이 길만큼 영광스런 길은 없습니다. 이 길 만큼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길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가장 현명한 사람이요 행복한 사람입니다. 우리의 길이 되시며 또한 우리가 이 길을 가도록 인도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2.제자들에게 주시는 축복의 약속(7-31)
첫째 기도의 능력으로 주님보다 더 큰일을 하게 됩니다.(10-13)
빌립은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했다가 예수님께 혼이 났습니다. 그러나 10,11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위로와 힘이 되는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더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믿음이 없는 제자들이지만 이들이 장차 전세계에 나아가 복음을 전파하는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이룰 것을 보셨습니다.
제자들이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을까요? 13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이 안 계시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힘입어 기도할 때 큰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실제로 사도행전의 역사를 이루어 냈습니다.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큰 일을 해 낼 수 있습니다. 내 안에 있는 불신을 극복하고 풍성한 열매를 맺는 세계적인 목자요 선교사요 성경선생이 될 수 있습니다.
둘째 보혜사 성령으로 영원히 함께하십니다.(16-18,26)
16,17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제자들을 두고 떠나시지만 그들과 영원토록 함께 하실 보혜사 성령을 대신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보혜사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며 우리와 늘 함께 하십니다. 보혜사 성령은 우리에게 필요한 지혜를 주십니다. 죄를 깨닫게 합니다.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도록 도우십니다. 성령은 우리의 아픔을 감싸주시고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성령은 우리의 참된 위로자가 되시며 힘이 되십니다. 늘 곁에 계셔서 우리의 갈 길 즉 하나님께로 가기까지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26절을 보십시오. 성령은 성경선생이 되사 말씀을 깨닫도록 인도하십니다. 우리에게 이런 은혜를 입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놀랍고 큰 축복입니까? 성령은 아무나 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우리에게 영원히 함께 하시는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셋째 평안을 선물로 받습니다.(27)
27절을 보십시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제자들은 지금 근심으로 꽉차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평안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에게 평안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 평안은 세상에 주는 것과 차원이 다릅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은 일시적이며 상황에 따라 변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영원토록 변함이 없고 절대적입니다. 우리에게 근심대신 평안을 선물로 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상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장 확실한 하나님 나라의 처소를 예비해 주셨음을 알았습니다. 또한 우리의 가는 길이 행복의 길이요 진리의 길이요 생명의 길임을 확신시켜 주셨습니다. 주님은 믿고 따르는 제자들에게 보혜사 성령을 주시고, 기도하게 하시며 평안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믿고 나아갈 때 우리에게 있는 모든 근심을 떨쳐 버릴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최종목적지인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갖고 위대한 사명인의 길을 주님과 함께 완주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소망과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돌립니다.
할렐루야!
말씀:요한복음 14:1-31
요절:요한복음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우리는 불확실성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오늘도 근심을 안고 살고 내일을 생각하면 또 근심이 됩니다. 본문은 그 근본적인 이유와 해결책을 명쾌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근심과 걱정거리가 있습니까? 본문의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는 은혜의 시간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예수님은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 되십니다.(1-6)
제자들은 왜 근심을 했을까요? 1a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제자들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비전이 넘쳤습니다. 예수님의 능력과 날로 치솟는 예수님의 인기를 보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장관 자리 하나는 차지하리라는 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죽으실 것을 누차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너희 중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는 폭탄선언을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습니다. 지금까지 믿고 따르던 예수님이 몇 번씩이나 멀리 떠나가신다고 하니 그들은 근심에 싸이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따른 제자들이기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제자들은 퇴직금도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제자들 몰래 적금을 들어 놓으신 것도 없었습니다. 남은 것이라고는 무엇을 해서 먹고 살 것인가? 하는 근심거리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장래보장문제로 심히 근심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근심을 하는 제자들의 근본문제는 무엇입니까? 1b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예수님은 제자들의 문제가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문제임을 아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것을 믿지 못했습니다. 즉 제자들의 근심문제는 예수님의 절대주관과 권능에 대한 믿음이 없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근심의 출발은 믿음이 없는 것과 하나님 아버지 집을 잃고 이 땅에서 잘먹고 잘 살고자하는 소망을 두기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것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제자들의 근심은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문제입니다. 의식주에 관한 문제는 인류에게 있어서 가장 보편적인 근심중의 하나입니다. 경제문제 즉 물질로 인한 근심이 제일 많습니다. 서민들은 주인이 언제 집을 비워달라고 할지, 또 전세금이나 월세를 올려달라는 문제로 근심하고 있습니다. 우리 목자님 가정들도 이 근심을 안고 있습니다. 양이 없는 문제로 턱없이 모자라는 물질문제로, 자꾸 커가는 아이들을 볼 때 제대로 키울 수 있을까? 어떤 가정은 건강문제로 근심하고 있습니다. 학생들은 어떤 근심이 있습니까? 항상 좋지 않은 학점문제입니까? 등록금문제입니까? 취직 문제입니까? 아니면 자신의 성격 결함으로 인한 문제입니까? 부모님의 가정싸움으로 인한 문제입니까? 결혼 적령기에 접어든 목자님들은 결혼을 잘 할 수 있을까? 근심합니다. 예수님을 믿지 못할 때 부자이건 아니건, 빈부귀천,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두가 근심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근심에 싸여 있는 제자들을 주님은 어떻게 도우셨습니까? 2a을 다시 보십시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예수님은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예금 통장을 건네주시면서 “걱정하지마, 다 이때를 위해서 내가 적금을 들었지. 여기 1억원 짜리 통장이 있으니 이 돈을 찾아 장막을 얻어서 서로 섬기며 열심히 살아야 한다.” 얼마나 멋진 예수님이십니까? 감동적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렇게 인간적으로 도와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도 때로는 너무 어려울땐 1억짜리 복권이라도 당첨되게 해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땅에 소망을 두고 있는 제자들과 우리들에게 물질을 주시기보다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도록 도와주십니다. 예수님 자신을 믿도록 도와주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처소를 예비하시고 다시 돌아오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안전한 장래보장입니다. 즉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히 우리가 살 하나님 나라의 처소를 예비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 와서 하나님께로 가는 순례자입니다. 죄악된 세상에서 많이 살아야 100년 살다가 하나님께로 가야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살게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위해 이미 하나님나라에 궁궐과 같은 집을 다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믿어야겠습니다. 이것을 믿으면 근심이 눈 녹듯 사라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주권적인 역사를 믿어야 합니다. 내 손에 있는 물질과 눈에 보이는 환경을 의지하기 보다 모든 것을 주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어제 국민일보에는 “내집이 생겨서 너무 좋아요”라는 기사가 났습니다. 한국해비타트(사랑의 집짓기 운동)에서 무주택자에게 54가구를 지어 주었습니다. 주택헌정식을 가졌는데 성경과 열쇠를 입주자들에게 전달해 주었습니다. 입주자들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자원봉사자들은 “입주를 축하드립니다.”라는 환호성과 박수를 보냈습니다. 폭죽을 터뜨리고 축하케이크를 자르며 진심으로 축하를 해 주었습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을 불렀을 때 모든 입주자들의 눈에서는 눈물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것이 우리가 육신의 장막을 벗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우리집에 입주할 때의 모습이 아닌가 상상해보니 큰 은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군천사들로 우리의 입주식을 이보다 더 성대하게 치루어 주실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감격하고 또 감격할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슬픔과 아픔이 사라지는 영광의 순간입니다.
저희 가정은 7년째 지하방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결혼한지 22년 되었지만 내 집이 없습니다. 최소한 40대 중반이면 내집을 사서 늙으신 어머님을 모시고 다 큰 두 자녀들이 마음놓고 공부할 수 있는 방이 있는 집을 살 줄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50을 바라보는 지금 그렇지 못한 현실을 바라보면서 때론 회의적인 생각을 가지곤 했습니다. 특히 다 큰 요한이와 제임스에게 방한 칸 마련해 주지 못한 아버지가 된 것 같아 자녀들에게 미안한 감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저와 저희 가정이 이 세상에서 뿌리를 박고 아기자기하게 살지 않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두고 살도록 인도하심을 믿게 되었습니다. 두 자녀들 안에 하나님 나라의 소망이 자라도록 인도하심을 감사합니다. 또한 요한이 제임스가 이 시대를 본받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두며 이 땅에서 위대한 주님의 제자로서 열매를 맺을 줄로 믿고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면 하나님 나라의 우리 집은 어떤 곳일까요? 하늘에 입주할 우리의 집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완벽한 행복과 기쁨과 편리한 시설이 갖추어진 곳입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집은 황금보석으로 꾸며진 집이요, 시공을 초월한 안전시스템으로 만들어진 집입니다. 사시사철 무공해 과일, 무공해 식품들, 아름다운 꽃들로 수놓은 드넓은 정원, 에어컨과 보일러가 필요 없는 알맞은 온도, 도적이 없으므로 울타리 없는 개방된 집, 이것은 저의 상상력에 의한 집일뿐입니다. 실상은 우리들이 생각할 수 없는 너무 좋은 집입니다. 물론 내 집이기 때문에 월세 올려 달라, 집을 비워달라는 말을 듣지 않습니다. 양들을 100명을 초청해도 넉넉할 만큼 넓은 집입니다. 찬송을 마음껏 불러도, 통성 기도를 해도 누구하나 간섭함이 없는 자유가 보장된 집입니다. 이 집을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감격할 일입니까?
또한 하나님 나라는 환경오염문제, 건강문제, 물질문제, 소음문제, 각종 사고 위험 등의 문제들이 전혀 없는 태초에 만드신 에덴동산과 같습니다. 그 곳은 죽음이 없고 싸움이나 미움이 없고 어두움이 없는 곳입니다. 오직 행복과 기쁨과 사랑과 찬송과, 감사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우리가 근심, 걱정 없이 영원토록 주님과 함께 날마다 찬송을 부르며 살 곳입니다. 여러분 이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가지십시오. 영원한 나의 집을 날마다 사모하십시오. 신자는 오직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이 소망이 있을 때 우리는 유한한 이 땅에서 열심히 주와 복음을 위해 헌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비록 가난하게 살더라도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갖고 열심히 사명인의 삶, 제자의 삶을 감당하고자 결단해야 겠습니다.
도마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도대체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 도마는 이 땅의 소망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를 볼 때 하나님 나라의 소망과 세상 소망은 반비례 관계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도마는 하나님 나라의 소망이 없기에 인생의 종착지가 어디인지 알지를 못했습니다. 자신이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지 못하는 사람은 가장 불행한 사람입니다. 나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습니까? 또 무엇을 하기 위해 그 길을 가고 있습니까? 지금 이 시간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어디로 가고 있는가? 무엇을 위해 가고 있느냐? 에 따라 행복과 불행이 나뉘어 집니다. 영생과 심판으로 나뉘어 집니다. 자신이 가고 있 는 길이 잘못된 길이라면 우리는 지금이라도 그 길을 바꾸어야 합니다. 영원한 나의 집이 있는 하늘 나라로 바꾸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구체적으로 제자들이 어떤 길을 가야하는지를 제시하셨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은 제자들과 우리의 최종 목적지가 하나님 아버지께 있어야 함을 선포하십니다. 이 최종목적지인 하나님께로 가기 위한 유일한 길이 바로 자신임을 선포하십니다. 길은 크게 우리가 늘 다니는 눈에 보이는 길과 보이지는 않지만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가는 길이 있습니다. 길은 최종적인 목적지까지 안내를 하는 역할을 합니다. 사람이 어떤 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고생을 하기도 하고 고생을 하지 않기도 합니다. 잘 포장된 길로 가면 편안히 목적지까지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포장되어 있지 않은 길로 가면 참으로 많은 고생이 됩니다. 이와 같이 인생 길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을 택하면 평탄하고 행복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길을 택하면 참으로 힘이 들고 지쳐서 남는 건 질병과 허무와 죽음뿐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조카 롯과 같이 신앙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런데 롯은 나중에 물질적인 가치관의 길을 갔습니다. 그 결과 비참한 삶을 살았습니다. 반면 아브라함은 곁길로 가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길을 따라 갔습니다. 그 결과 그는 위대한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양자택일의 선택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요즈음 학생들은 과거와는 달리 진리를 추구하는 것을 고리타분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즉흥적이고 쾌락적이며 재미있고 쉬운 길을 갑니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자기가 가는 길이 옳다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교수의 길을 , 어떤 사람은 사업가의 길을, 어떤 사람은 정치인의 길을 , 어떤 사람은 연예인의 길을, 어떤 사람은 고시의 길을, 각각 정해 놓고 앞만 보고 달려갑니다. 나름대로 성공의 길, 행복의 길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세상에서의 길은 참으로 많습니다. 그런데 어떤 길을 가느냐하는 결정을 내리는 데 그 기준이 각각 다릅니다. 절대적 기준이 아닌 상대적인 기준에 의해 길을 선택합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나름대로 높고 고매한 이상과 목표를 정해 놓고 목표를 향해 가지만 그 끝은 모두 허무하다는 것이 이 세상 사람들의 가는 길입니다. 근본적으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덧입었기 때문에 하나님께로 가고자 하는 열망이 있습니다. 거룩한 진리의 길을 가고자하는 소원이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공자나 석가는 옳은 길을 가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도 하나님께로 이르는 길을 알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사상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가는데 걸림돌로 오히려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불교에 심취해 보기도 하고, 사서삼경을 읽기도 하고, 어려운 철학책에서 길을 찾고자 합니다. 심지어 이단사상에서 길을 찾으려합니다. 사단은 우리로 하여금 상대적인 길로, 합리적인 길, 쉬운 길로 가도록 유혹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제각기 길을 가지만 그 길의 최후는 심판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는 오직 두길 영생을 얻는 길이 아니면 심판으로 가는 길뿐입니다.
사도바울이 진정 위대하고 똑똑한 사람이라는 것은 바로,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길 정도로 예수님을 좇는 길이야말로 가장 고상한 길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주님을 따르는 길, 영생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제자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사도바울 못지 않은 똑똑한 사람들입니다.
저는 우리 센타에 나오는 형제자매들을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길 되신 주님을 알고자 1:1 성경 공부를 하고 괴롭지만 소감을 쓰고, 팀 모임에 참석하고, 예배에 참석하는 여러분들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현명한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자부심을 갖고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6)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 되신다고 스스로 선포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오직 예수님 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은 한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예수라.” (딤전2:5).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오사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기목숨을 십자가에 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막혔던 길을 다시 여신 유일한 분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 되십니다. 하나님께로서 왔기 때문에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만이 하나님께로 갈 수 있습니다. 성경은 엄히 경고하십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전4:12) 석가나 공자나 문선명이나 정명석이나 이 세상 그 어떤 이름이나 노력이나, 선함이 구원으로 이르게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생명을 얻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하나님께로 가는 길은 오직 예수님을 따르는 길밖에 없습니다. 이 분명한 믿음을 가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길 되신 예수님을 알지 못해 방황하며 심판의 길로 갈 수밖에 없는 불쌍한 영혼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열심히 증거 해야겠습니다.
예수님은 진리의 길이 되십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진리는 참되고 영원하고 보편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세상에 이런 진리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내가 진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진리의 속성을 다 충족시키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하나님께로서 오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서 모든 것을 사실대로 말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다 믿을 수 있도록 겸손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인생의 길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진리는 바로 예수님 자체입니다. 예수님을 알 때 진리를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길이십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부여자시요 주관자이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길이 되시기 때문에 가장 안전한 길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이 길을 가셨고 개척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이 길은 제자의 길입니다. 목자의 길, 선교사의 길, 1:1성경 선생의 길입니다. 이 세상 이 길만큼 영광스런 길은 없습니다. 이 길 만큼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길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가장 현명한 사람이요 행복한 사람입니다. 우리의 길이 되시며 또한 우리가 이 길을 가도록 인도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2.제자들에게 주시는 축복의 약속(7-31)
첫째 기도의 능력으로 주님보다 더 큰일을 하게 됩니다.(10-13)
빌립은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했다가 예수님께 혼이 났습니다. 그러나 10,11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위로와 힘이 되는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더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믿음이 없는 제자들이지만 이들이 장차 전세계에 나아가 복음을 전파하는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이룰 것을 보셨습니다.
제자들이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을까요? 13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이 안 계시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힘입어 기도할 때 큰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실제로 사도행전의 역사를 이루어 냈습니다.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큰 일을 해 낼 수 있습니다. 내 안에 있는 불신을 극복하고 풍성한 열매를 맺는 세계적인 목자요 선교사요 성경선생이 될 수 있습니다.
둘째 보혜사 성령으로 영원히 함께하십니다.(16-18,26)
16,17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제자들을 두고 떠나시지만 그들과 영원토록 함께 하실 보혜사 성령을 대신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보혜사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며 우리와 늘 함께 하십니다. 보혜사 성령은 우리에게 필요한 지혜를 주십니다. 죄를 깨닫게 합니다.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도록 도우십니다. 성령은 우리의 아픔을 감싸주시고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성령은 우리의 참된 위로자가 되시며 힘이 되십니다. 늘 곁에 계셔서 우리의 갈 길 즉 하나님께로 가기까지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26절을 보십시오. 성령은 성경선생이 되사 말씀을 깨닫도록 인도하십니다. 우리에게 이런 은혜를 입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놀랍고 큰 축복입니까? 성령은 아무나 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우리에게 영원히 함께 하시는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셋째 평안을 선물로 받습니다.(27)
27절을 보십시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제자들은 지금 근심으로 꽉차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평안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에게 평안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 평안은 세상에 주는 것과 차원이 다릅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은 일시적이며 상황에 따라 변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영원토록 변함이 없고 절대적입니다. 우리에게 근심대신 평안을 선물로 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상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장 확실한 하나님 나라의 처소를 예비해 주셨음을 알았습니다. 또한 우리의 가는 길이 행복의 길이요 진리의 길이요 생명의 길임을 확신시켜 주셨습니다. 주님은 믿고 따르는 제자들에게 보혜사 성령을 주시고, 기도하게 하시며 평안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믿고 나아갈 때 우리에게 있는 모든 근심을 떨쳐 버릴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최종목적지인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갖고 위대한 사명인의 길을 주님과 함께 완주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소망과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돌립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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