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요18강(12:1-50)/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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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요한복음 제 18 강
말씀 / 요한복음 12:1-50
요절 / 요한복음 12:24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고 나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한 번 뿐인 인생을 통해서 풍성한 열매를 맺고 복된 삶을 살기 원합니다. 본문은 진정 열매 맺는 삶의 비밀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진리의 말씀에 순종하여 풍성한 열매를 맺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향유를 부은 마리아(1-11)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이르셨습니다. 이 곳은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입니다. 나사로와 마르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집으로 초청하여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려 주신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는 잔치였습니다. 잔치가 벌어지자 여전히 마르다는 일을 보며 분주하였고 나사로는 예수님과 함께 앉은 자 중에 있었습니다. 잔치가 무르익어 가고 있을 때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었습니다. 머리털은 여자의영광입니다(고전11:15). 그런데 마리아는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통째로 부은 것도 엄청난 일인데 자기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기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분이심을 드러낸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 자신의 모든 진심을 쏟아 부었습니다. 자신의 장래 꿈이 담긴 옥합을 깨트려 드렸습니다. 마리아에게 예수님은 자신의 모든 것 보다 귀한 분이었습니다. 마리아가 왜 이렇게 튀는 행동을 했을까요? 마리아는 내성적이고 말을 잘 하지 않는 여인입니다. 결코 충동적이지 않고 깊이 생각한 연후에 행동하는 여인이었던 같습니다. 그런데 가장 천한 종이 한다는 발 씻기는 일을 잔치의 주인인 그녀가 그것도 자기의 영광스러운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기는 것을 볼 때 예수님께 대한 감사가 얼마나 깊은가 알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본래 일곱 귀신이 들려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단의 끊임없는 공격으로 고통하였습니다. 죄의식으로 마음에는 평안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 말씀을 공부하고 죄사함을 받고 귀신이 쫓겨 나가고 마음에 말할 수 없는 평강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 물질과 마음을 다 바쳤습니다. 마리아가 부은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였습니다. 그 향기는 말씀을 통하여 지금 우리에게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때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님을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였습니다.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5).” 가룟 유다는 가난한 자들을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실상은 이를 빙자해서 자기욕심을 채우고자 했습니다. 그는 자선 사업가와 같고 박애주의자와 같은 모습을 취했지만 사실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었습니다. 자선 사업을 빙자해서 착복을 하는 자였습니다.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마리아가 향유 옥합을 통째로 예수님께 드렸다면 그것을 팔아서 얼마는 자기 호주머니로 넣을 참이었습니다. 그가 화를 내면서 이렇게 한 것을 보면 주님께 대한 마리아의 사랑에 대해서 몰라도 한참을 모르는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그녀가 죄로 인해서 얼마나 고통을 했던지 몰랐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서 그녀가 누린 평강과 생명의 풍성함을 알지 못했습니다. 대개 주님의 은혜를 체험하지 못한 인본주의적인 크리스챤들이 헌신하는 영적인 신자들을 핍박합니다. 이스마엘이 이삭을 핍박했던 것과 같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유다를 제지하셨습니다.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7).” 지금 예수님은 아무도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인해 고독했습니다. 심지어 마리아 조차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자신의 죽음을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자신의 장사할 날을 위해서 이를 두게 하라는 것은 자신의 장사를 준비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헌신을 자신의 죽음에 동참하는 것으로 받아주었습니다. 마리아의 희생적인 헌신과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신 것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마리아가 드린 헌신은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한 예표였습니다. 이로 인해 예수님께서는 위로를 받으셨고 사람들의 관심을 잔치에서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도록 돌리셨습니다. 여기서 볼 때 예수님은 우리가 드리는 헌신을 통해서 생명 구원 역사를 이루심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양을 칩니다. 양을 치는 가운데 목자는 자기 자신, 그가 갖고 있는 것 중 가장 소중한 것, 다시 말해서 생명을 줍니다. 이 말은 반드시 남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희생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 속에 살아 있는 것을 준다는 뜻입니다. 그는 자신의 기쁨, 자신의 관심, 자신의 이해, 자신의 지식, 자신의 유머, 자신의 슬픔 등 자기 자신 속에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줍니다. 이렇게 자신을 줌으로써 양의 생명을 풍요하게 만들고 자시 자신의 생동감을 고양함으로써 양의 생명력을 고양시킵니다. 그는 받기 위해서 주는 것이 아닙니다. 주는 자체가 절묘한 기쁨이 됩니다. 실용주의 가치관에 기초해서 모든 것을 보는 사람들은 주님께 헌신을 드려도 남는 것이 없으면 헛짓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스스로도 열심히 수고하고 헌신했는데 남는 열매가 없으면 공연히 수고했다 생각하고 실의에 빠지게 됩니다. 어린애의 사랑은 얻기 위해서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숙한 사랑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양을 섬기는 기간 동안 주는 기쁨, 헌신하는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우리는 일정 기간 동안 그 양을 섬긴 것으로 인해서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그 기간 동안 우리가 드린 헌신은 주님께서 보실 때 아름다운 일입니다. 또 주님은 우리의 헌신을 받으시고 상급을 주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진심을 다 받아주십니다. 주님을 사랑을 맛본 자로서 사랑 받기 위해서 주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는 것은 다른 사람을 주는 사람으로 만들고 생명을 탄생시키는 기쁨에 참여하게 합니다.
둘째, 이스라엘의 왕(9-19)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집에 계신 줄 알고 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볼 뿐만 아니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나사로도 보고자 함이었습니다. 대제사장들은 나사로까지 죽이고자 모의했습니다. 이는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들이 가서 예수님을 믿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오신다 함을 듣고 대대적인 환영 준비를 하였습니다. 그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쳤습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그들은 진심으로 메시야 왕국의 도래를 기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호산나를 외침으로써 메시야 왕국이 빛과 지식으로 오며 권세와 능력 가운데 도래하기를 기원했습니다. 그들은 메시야 왕국이 모든 원수들을 정복하기를 소원했습니다. 더 나아가 그들은 메시야 왕국이 계속되기를 기원했습니다. 호산나는 “왕이여 영원히 무궁하옵소서”라는 의미입니다. 그들의 예수님에 대한 기대는 이번 월드컵 16강 진출 때 전국민들의 응원 마냥 뜨거웠습니다. 무리들 중에는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사람들도 있어 증거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이 표적 행하심을 듣고 더욱 열광적으로 예수님을 맞이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서로 말했습니다.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저를 좇는도다(19).” 이는 예수님 생애의 절정이었습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의 왕으로 영접하고 충성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왕이셨습니까?
14절 보십시오. 예수님은 한 어린 나귀를 만나서 타셨습니다. 이는 스가랴 9:9절에 예언된 말씀을 응하려 함이었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님에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님께 이같이 한 것인 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이요, 겸손한 왕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왕으로서 우리를 죄와 사단의 권세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진리와 평화와 사랑으로 다스려주십니다.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은 진정한 생명과 행복을 누립니다.
셋째, 많은 열매를 맺는 길(20-50)
명절에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유대교로 개종한 헬라인들이있었습니다. 헬라인들의 특징은 지혜를 찾는데 가장 새로이 되는 것을 말하고 듣는데 시간을 아낌없이 쓴다는 것입니다((1Co 1:22, Ac 17:21). 그들은 지식을 통해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죽음의 장벽을 뛰어 넘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죽은 지 나흘 된 나사로를 살리셨다는 소문을 듣고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존재와 죽음에 대해서 고민하다가 예수님에게서 길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들은 먼저 헬라 이름을 갖고 있고 헬라 말을 잘하는 빌립에게 가서 청했습니다.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그러자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님께 가서 여짜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말을 듣고 대답하셨습니다.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23).” 일반적으로 영광을 얻는다는 말은 갈채를 받는 것, 인정받는 것인데 예수님은 영광을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으로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기 절정일 때 십자가를 통한 만민 구속역사를 보셨습니다.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고 복음 역사가 왕성하게 일어날 것을 보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희생과 십자가를 통해서 선교 비전을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붕붕 뜨게 됩니다. 십자가를 통한 영광이 참된 영광입니다.
24절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한 알의 밀을 가을에 심으면 2-3일이 지나서 배젖에서 뿌리와 싹이 나옵니다. 배젖에 있는 영양분이 묽어져서 씨눈을 자라게 합니다. 이런 과정을 지나서 줄기가 자라고 잎이 나오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습니다. 대개 한 알의 밀에서 120개의 열매가 맺힌다고 합니다. 우리는 열매가 맺히는 과정을 통해서 영적 교훈을 찾을 수 있습니다.
먼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묻혀야 합니다. 씨가 묻히면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먼저 떨어지는 생애를 사셨습니다. 그는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지셨습니다. 끊임없이 아래로 내려가기를 힘쓰셔서 구유에 까지 내려오셨습니다. 세상 권력자들의 소원은 가장 높이 올라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평판이 중요하고 인기가 중요하고 인정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꾸 아래로 내려오셨습니다. 우리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먼저 아래로 내려가야 합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진 다음에 씨앗이 싹이 나고 열매를 맺으려면 먼저 땅 속에 감추어져야 합니다. 싹이 나기 전에 드러나면 새가 와서 먹든지 뜨거운 태양빛에 말라 버리고 맙니다. 땅에 떨어지기가 무섭게 나를 좀 알아달라고 야단을 한다거나,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무슨 보상이 없을까 얄팍하게 생각한다면 어찌 열매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 씨앗은 땅에 머물러 썩어야 합니다. 썩어서 싹이 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밖으로 나오기 전에 먼저 감추어야 합니다. 자신을 일찍 드러내는 사람은 인기는 있을지 몰라도 열매가 풍성하지는 않습니다. 드러내기를 좋아하는 것은 주님의 모습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베들레헴에 사는 촌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성장하신 곳은 나사렛이었습니다. 대단한 인물을 기대할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주로 갈릴리에서 일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문둥병자와 각종 병자를 치료해 주신 후에도 자신이 그 병을 고쳐주었음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켰을 때에도 자기를 왕 삼으려는 무리를 떠나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홀로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알리는 것을 최고로 생각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내가 하는 사역을 드러내기를 원하고 성취한 것을 드러내길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과시를 기뻐하지 아니하십니다. 때가 되어 하나님께서 높이시면 섬기는 기회로 사용해야 합니다. 내면이 풍성한 사람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힘쓰지 않습니다. 존재 자체가 이미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 풍성한 생명이 충만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기를 드러내려 하기 보다 내면이 생명의 열매로 채워지도록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열매를 찾으시는 이유는 그 열매 안에 감추어진 생명 때문입니다. 열매 속에는 놀라운 가능성이 숨어 있습니다.
한 알의 밀은 땅에 떨어져 죽어야 열매를 맺히게 됩니다. 씨앗의 생명은 그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것이 깨뜨려질 때 생명이 드러나 싹이 나고 열매를 맺게 됩니다. 우리의 자아, 옛사람, 육이 죽어야 영원한 생명,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능력이 흘러 나옵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에게 이르셨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9:23).”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자아를 십자가에 못박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고 고백했습니다. 자아가 깨어진 바울에게서 하나님의 능력이 끝없이 흘러 나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열매 맺기 위해서는 예수님처럼, 바울처럼 깨어지는 아픔을 경험해야합니다. 그 깨어지는 아픔을 통해서 풍성한 열매를 맺는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맺히게 될 열매를 보았습니다. 그 열매가 세상을 덮게 될 것을 보셨습니다. 이를 볼 때 한 알의 밀이 죽는다는 것은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재창조를 위한 희생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 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희생적인 사랑을 체험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 또 아무 대가 없이 희생을 합니다. 우리는 스데반 집사의 희생을 통해서 바울의 완악한 마음에 금이 간 사실을 압니다. 스데반의 죽음을 통해서 수백만명이 주님께 돌아왔습니다. 우리 모임이 이렇게 성장하기까지는 이사무엘 선교사님과 그레이스 선교사님의 헌신, 마더 배리 선교사님께서 결혼을 포기하시고 청춘을 드려 섬긴 예가 있습니다. 그리고 평신도 목자님들과 사모님, 그리고 형제 자매목자님들의 희생이 있었습니다. 우리 센터가 성장하기 까지 자신의 욕심을 부인하고 희생적으로 양들을 감당한 목자님들의 헌신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열매를 맺고 성장하려면 생명을 주는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특히 캠퍼스에 올라가서 전도를 하는 것은 자기를 죽이는 것입니다. 전도하지 않는데 양을 얻을 수 없습니다. 또 우리는 깊이 있는 기도 생활을 위해서 자기가 죽어야 합니다. 한 알의 썩는 밀알이 되어 기도에 헌신해야 합니다. 말씀 연구를 위해서 썩어야 합니다. 이기적인 자아가 깨어지면 생명을 살리는 사랑이 풍성하게 흘러 나옵니다. 우리가 죽으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살리시고 은혜로 풍성한 열매를 주십니다. 어떤 때는 자기를 죽이고 드렸는데도 당장 눈에 보이는 열매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중에 우리의 내면에 성령의 열매를 맺히십니다. 인격의 변화라는 열매를 맺히십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이 말씀은 역설적인 진리입니다. 여기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 버리고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한다고 하셨습니다. 자기 생명이란 죄악된 자신, 이기적인 자신, 자기 중심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신이 죽어야 참 자신을 얻게 됩니다. 우리는 최소의 희생으로 최대의 유익을 얻고자 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계산하다가 실제적인 희생을 하지 못합니다. 희생을 싫어하는 대신에 현실에 자족하고 자기 만을 위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런 삶에는 생명과 비전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에는 자기 부인, 희생 등이 따릅니다. 26절을 보십시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예수님을 섬기고자 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삶의 발자취를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의 자기 희생의 삶을 따를 때 하나님 나라를 얻게 되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십니다.
예수님이라고 기쁘게 죽으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생각할 때 마음이 민망하여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는 ‘고민하고 슬퍼하’셨습니다(마 26:37). 누구나 자기 희생을 피하고 싶어합니다. 죽고 희생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두렵고 어려운 일입니다. 밀알의 진리는 아름답지만 실천하고자 하면 괴롭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죽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27,28).” 예수님께서도 우리와 똑 같은 육신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에 한 알의 밀로서 죽는다는 것이 힘드셨습니다. 그러나 기도하심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으셨습니다. 이를 볼 때 희생하는 삶은 기도를 통해서능력을 덧입어야 가능하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희생은 믿음 있는 자가 하는 것이요, 강한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죽음 이후에 일어나게 될 비전을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로 이끌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자신의 죽음이 패배가 아니라 도리어 이 세상 임금을 좇아내는 승리임을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적인 눈으로 자신의 죽음을 보셨습니다.
반대로 관원 중에서 예수님을 믿는 자가 많았지만 바리새인들을 인하여 드러나게 말하지 못했습니다. 이는 출회를 당할까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했습니다. 사람의 인정과 칭찬에 매이면 희생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인정을 구하는 마음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생명을 걸고 따라야 합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마리아가 순전한 나드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털로 씻기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을 때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아름다운 꽃이 아니라 열매입니다. 꽃은 아름답고 향기도 있고 귀하지만 그 속에 생명이 없습니다. 열매는 투박하고 향기가 없지만 그 속에 생명이 있습니다. 꽃이 떨어지고 나야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가 죽기 싫어서 이리 저리 굴러 다니지 말고, 땅에 떨어지고 묻혀서 싹을 틔우고 자라 풍성한 성령의 열매, 생명의 열매를 맺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요한복음 12:1-50
요절 / 요한복음 12:24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고 나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한 번 뿐인 인생을 통해서 풍성한 열매를 맺고 복된 삶을 살기 원합니다. 본문은 진정 열매 맺는 삶의 비밀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진리의 말씀에 순종하여 풍성한 열매를 맺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향유를 부은 마리아(1-11)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이르셨습니다. 이 곳은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입니다. 나사로와 마르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집으로 초청하여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려 주신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는 잔치였습니다. 잔치가 벌어지자 여전히 마르다는 일을 보며 분주하였고 나사로는 예수님과 함께 앉은 자 중에 있었습니다. 잔치가 무르익어 가고 있을 때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었습니다. 머리털은 여자의영광입니다(고전11:15). 그런데 마리아는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통째로 부은 것도 엄청난 일인데 자기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기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분이심을 드러낸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 자신의 모든 진심을 쏟아 부었습니다. 자신의 장래 꿈이 담긴 옥합을 깨트려 드렸습니다. 마리아에게 예수님은 자신의 모든 것 보다 귀한 분이었습니다. 마리아가 왜 이렇게 튀는 행동을 했을까요? 마리아는 내성적이고 말을 잘 하지 않는 여인입니다. 결코 충동적이지 않고 깊이 생각한 연후에 행동하는 여인이었던 같습니다. 그런데 가장 천한 종이 한다는 발 씻기는 일을 잔치의 주인인 그녀가 그것도 자기의 영광스러운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기는 것을 볼 때 예수님께 대한 감사가 얼마나 깊은가 알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본래 일곱 귀신이 들려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단의 끊임없는 공격으로 고통하였습니다. 죄의식으로 마음에는 평안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 말씀을 공부하고 죄사함을 받고 귀신이 쫓겨 나가고 마음에 말할 수 없는 평강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 물질과 마음을 다 바쳤습니다. 마리아가 부은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였습니다. 그 향기는 말씀을 통하여 지금 우리에게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때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님을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였습니다.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5).” 가룟 유다는 가난한 자들을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실상은 이를 빙자해서 자기욕심을 채우고자 했습니다. 그는 자선 사업가와 같고 박애주의자와 같은 모습을 취했지만 사실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었습니다. 자선 사업을 빙자해서 착복을 하는 자였습니다.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마리아가 향유 옥합을 통째로 예수님께 드렸다면 그것을 팔아서 얼마는 자기 호주머니로 넣을 참이었습니다. 그가 화를 내면서 이렇게 한 것을 보면 주님께 대한 마리아의 사랑에 대해서 몰라도 한참을 모르는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그녀가 죄로 인해서 얼마나 고통을 했던지 몰랐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서 그녀가 누린 평강과 생명의 풍성함을 알지 못했습니다. 대개 주님의 은혜를 체험하지 못한 인본주의적인 크리스챤들이 헌신하는 영적인 신자들을 핍박합니다. 이스마엘이 이삭을 핍박했던 것과 같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유다를 제지하셨습니다.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7).” 지금 예수님은 아무도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인해 고독했습니다. 심지어 마리아 조차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자신의 죽음을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자신의 장사할 날을 위해서 이를 두게 하라는 것은 자신의 장사를 준비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헌신을 자신의 죽음에 동참하는 것으로 받아주었습니다. 마리아의 희생적인 헌신과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신 것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마리아가 드린 헌신은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한 예표였습니다. 이로 인해 예수님께서는 위로를 받으셨고 사람들의 관심을 잔치에서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도록 돌리셨습니다. 여기서 볼 때 예수님은 우리가 드리는 헌신을 통해서 생명 구원 역사를 이루심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양을 칩니다. 양을 치는 가운데 목자는 자기 자신, 그가 갖고 있는 것 중 가장 소중한 것, 다시 말해서 생명을 줍니다. 이 말은 반드시 남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희생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 속에 살아 있는 것을 준다는 뜻입니다. 그는 자신의 기쁨, 자신의 관심, 자신의 이해, 자신의 지식, 자신의 유머, 자신의 슬픔 등 자기 자신 속에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줍니다. 이렇게 자신을 줌으로써 양의 생명을 풍요하게 만들고 자시 자신의 생동감을 고양함으로써 양의 생명력을 고양시킵니다. 그는 받기 위해서 주는 것이 아닙니다. 주는 자체가 절묘한 기쁨이 됩니다. 실용주의 가치관에 기초해서 모든 것을 보는 사람들은 주님께 헌신을 드려도 남는 것이 없으면 헛짓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스스로도 열심히 수고하고 헌신했는데 남는 열매가 없으면 공연히 수고했다 생각하고 실의에 빠지게 됩니다. 어린애의 사랑은 얻기 위해서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숙한 사랑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양을 섬기는 기간 동안 주는 기쁨, 헌신하는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우리는 일정 기간 동안 그 양을 섬긴 것으로 인해서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그 기간 동안 우리가 드린 헌신은 주님께서 보실 때 아름다운 일입니다. 또 주님은 우리의 헌신을 받으시고 상급을 주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진심을 다 받아주십니다. 주님을 사랑을 맛본 자로서 사랑 받기 위해서 주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는 것은 다른 사람을 주는 사람으로 만들고 생명을 탄생시키는 기쁨에 참여하게 합니다.
둘째, 이스라엘의 왕(9-19)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집에 계신 줄 알고 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볼 뿐만 아니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나사로도 보고자 함이었습니다. 대제사장들은 나사로까지 죽이고자 모의했습니다. 이는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들이 가서 예수님을 믿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오신다 함을 듣고 대대적인 환영 준비를 하였습니다. 그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쳤습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그들은 진심으로 메시야 왕국의 도래를 기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호산나를 외침으로써 메시야 왕국이 빛과 지식으로 오며 권세와 능력 가운데 도래하기를 기원했습니다. 그들은 메시야 왕국이 모든 원수들을 정복하기를 소원했습니다. 더 나아가 그들은 메시야 왕국이 계속되기를 기원했습니다. 호산나는 “왕이여 영원히 무궁하옵소서”라는 의미입니다. 그들의 예수님에 대한 기대는 이번 월드컵 16강 진출 때 전국민들의 응원 마냥 뜨거웠습니다. 무리들 중에는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사람들도 있어 증거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이 표적 행하심을 듣고 더욱 열광적으로 예수님을 맞이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서로 말했습니다.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저를 좇는도다(19).” 이는 예수님 생애의 절정이었습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의 왕으로 영접하고 충성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왕이셨습니까?
14절 보십시오. 예수님은 한 어린 나귀를 만나서 타셨습니다. 이는 스가랴 9:9절에 예언된 말씀을 응하려 함이었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님에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님께 이같이 한 것인 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이요, 겸손한 왕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왕으로서 우리를 죄와 사단의 권세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진리와 평화와 사랑으로 다스려주십니다.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은 진정한 생명과 행복을 누립니다.
셋째, 많은 열매를 맺는 길(20-50)
명절에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유대교로 개종한 헬라인들이있었습니다. 헬라인들의 특징은 지혜를 찾는데 가장 새로이 되는 것을 말하고 듣는데 시간을 아낌없이 쓴다는 것입니다((1Co 1:22, Ac 17:21). 그들은 지식을 통해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죽음의 장벽을 뛰어 넘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죽은 지 나흘 된 나사로를 살리셨다는 소문을 듣고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존재와 죽음에 대해서 고민하다가 예수님에게서 길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들은 먼저 헬라 이름을 갖고 있고 헬라 말을 잘하는 빌립에게 가서 청했습니다.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그러자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님께 가서 여짜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말을 듣고 대답하셨습니다.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23).” 일반적으로 영광을 얻는다는 말은 갈채를 받는 것, 인정받는 것인데 예수님은 영광을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으로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기 절정일 때 십자가를 통한 만민 구속역사를 보셨습니다.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고 복음 역사가 왕성하게 일어날 것을 보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희생과 십자가를 통해서 선교 비전을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붕붕 뜨게 됩니다. 십자가를 통한 영광이 참된 영광입니다.
24절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한 알의 밀을 가을에 심으면 2-3일이 지나서 배젖에서 뿌리와 싹이 나옵니다. 배젖에 있는 영양분이 묽어져서 씨눈을 자라게 합니다. 이런 과정을 지나서 줄기가 자라고 잎이 나오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습니다. 대개 한 알의 밀에서 120개의 열매가 맺힌다고 합니다. 우리는 열매가 맺히는 과정을 통해서 영적 교훈을 찾을 수 있습니다.
먼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묻혀야 합니다. 씨가 묻히면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먼저 떨어지는 생애를 사셨습니다. 그는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지셨습니다. 끊임없이 아래로 내려가기를 힘쓰셔서 구유에 까지 내려오셨습니다. 세상 권력자들의 소원은 가장 높이 올라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평판이 중요하고 인기가 중요하고 인정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꾸 아래로 내려오셨습니다. 우리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먼저 아래로 내려가야 합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진 다음에 씨앗이 싹이 나고 열매를 맺으려면 먼저 땅 속에 감추어져야 합니다. 싹이 나기 전에 드러나면 새가 와서 먹든지 뜨거운 태양빛에 말라 버리고 맙니다. 땅에 떨어지기가 무섭게 나를 좀 알아달라고 야단을 한다거나,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무슨 보상이 없을까 얄팍하게 생각한다면 어찌 열매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 씨앗은 땅에 머물러 썩어야 합니다. 썩어서 싹이 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밖으로 나오기 전에 먼저 감추어야 합니다. 자신을 일찍 드러내는 사람은 인기는 있을지 몰라도 열매가 풍성하지는 않습니다. 드러내기를 좋아하는 것은 주님의 모습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베들레헴에 사는 촌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성장하신 곳은 나사렛이었습니다. 대단한 인물을 기대할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주로 갈릴리에서 일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문둥병자와 각종 병자를 치료해 주신 후에도 자신이 그 병을 고쳐주었음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켰을 때에도 자기를 왕 삼으려는 무리를 떠나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홀로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알리는 것을 최고로 생각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내가 하는 사역을 드러내기를 원하고 성취한 것을 드러내길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과시를 기뻐하지 아니하십니다. 때가 되어 하나님께서 높이시면 섬기는 기회로 사용해야 합니다. 내면이 풍성한 사람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힘쓰지 않습니다. 존재 자체가 이미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 풍성한 생명이 충만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기를 드러내려 하기 보다 내면이 생명의 열매로 채워지도록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열매를 찾으시는 이유는 그 열매 안에 감추어진 생명 때문입니다. 열매 속에는 놀라운 가능성이 숨어 있습니다.
한 알의 밀은 땅에 떨어져 죽어야 열매를 맺히게 됩니다. 씨앗의 생명은 그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것이 깨뜨려질 때 생명이 드러나 싹이 나고 열매를 맺게 됩니다. 우리의 자아, 옛사람, 육이 죽어야 영원한 생명,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능력이 흘러 나옵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에게 이르셨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9:23).”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자아를 십자가에 못박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고 고백했습니다. 자아가 깨어진 바울에게서 하나님의 능력이 끝없이 흘러 나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열매 맺기 위해서는 예수님처럼, 바울처럼 깨어지는 아픔을 경험해야합니다. 그 깨어지는 아픔을 통해서 풍성한 열매를 맺는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맺히게 될 열매를 보았습니다. 그 열매가 세상을 덮게 될 것을 보셨습니다. 이를 볼 때 한 알의 밀이 죽는다는 것은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재창조를 위한 희생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 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희생적인 사랑을 체험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 또 아무 대가 없이 희생을 합니다. 우리는 스데반 집사의 희생을 통해서 바울의 완악한 마음에 금이 간 사실을 압니다. 스데반의 죽음을 통해서 수백만명이 주님께 돌아왔습니다. 우리 모임이 이렇게 성장하기까지는 이사무엘 선교사님과 그레이스 선교사님의 헌신, 마더 배리 선교사님께서 결혼을 포기하시고 청춘을 드려 섬긴 예가 있습니다. 그리고 평신도 목자님들과 사모님, 그리고 형제 자매목자님들의 희생이 있었습니다. 우리 센터가 성장하기 까지 자신의 욕심을 부인하고 희생적으로 양들을 감당한 목자님들의 헌신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열매를 맺고 성장하려면 생명을 주는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특히 캠퍼스에 올라가서 전도를 하는 것은 자기를 죽이는 것입니다. 전도하지 않는데 양을 얻을 수 없습니다. 또 우리는 깊이 있는 기도 생활을 위해서 자기가 죽어야 합니다. 한 알의 썩는 밀알이 되어 기도에 헌신해야 합니다. 말씀 연구를 위해서 썩어야 합니다. 이기적인 자아가 깨어지면 생명을 살리는 사랑이 풍성하게 흘러 나옵니다. 우리가 죽으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살리시고 은혜로 풍성한 열매를 주십니다. 어떤 때는 자기를 죽이고 드렸는데도 당장 눈에 보이는 열매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중에 우리의 내면에 성령의 열매를 맺히십니다. 인격의 변화라는 열매를 맺히십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이 말씀은 역설적인 진리입니다. 여기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 버리고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한다고 하셨습니다. 자기 생명이란 죄악된 자신, 이기적인 자신, 자기 중심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신이 죽어야 참 자신을 얻게 됩니다. 우리는 최소의 희생으로 최대의 유익을 얻고자 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계산하다가 실제적인 희생을 하지 못합니다. 희생을 싫어하는 대신에 현실에 자족하고 자기 만을 위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런 삶에는 생명과 비전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에는 자기 부인, 희생 등이 따릅니다. 26절을 보십시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예수님을 섬기고자 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삶의 발자취를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의 자기 희생의 삶을 따를 때 하나님 나라를 얻게 되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십니다.
예수님이라고 기쁘게 죽으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생각할 때 마음이 민망하여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는 ‘고민하고 슬퍼하’셨습니다(마 26:37). 누구나 자기 희생을 피하고 싶어합니다. 죽고 희생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두렵고 어려운 일입니다. 밀알의 진리는 아름답지만 실천하고자 하면 괴롭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죽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27,28).” 예수님께서도 우리와 똑 같은 육신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에 한 알의 밀로서 죽는다는 것이 힘드셨습니다. 그러나 기도하심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으셨습니다. 이를 볼 때 희생하는 삶은 기도를 통해서능력을 덧입어야 가능하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희생은 믿음 있는 자가 하는 것이요, 강한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죽음 이후에 일어나게 될 비전을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로 이끌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자신의 죽음이 패배가 아니라 도리어 이 세상 임금을 좇아내는 승리임을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적인 눈으로 자신의 죽음을 보셨습니다.
반대로 관원 중에서 예수님을 믿는 자가 많았지만 바리새인들을 인하여 드러나게 말하지 못했습니다. 이는 출회를 당할까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했습니다. 사람의 인정과 칭찬에 매이면 희생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인정을 구하는 마음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생명을 걸고 따라야 합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마리아가 순전한 나드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털로 씻기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을 때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아름다운 꽃이 아니라 열매입니다. 꽃은 아름답고 향기도 있고 귀하지만 그 속에 생명이 없습니다. 열매는 투박하고 향기가 없지만 그 속에 생명이 있습니다. 꽃이 떨어지고 나야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가 죽기 싫어서 이리 저리 굴러 다니지 말고, 땅에 떨어지고 묻혀서 싹을 틔우고 자라 풍성한 성령의 열매, 생명의 열매를 맺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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