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002년 김포여름수양회 주제강의 제3강(2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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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말씀/요한복음21:1-25
요절/요한복음21:15
“저희가 조반을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본문 말씀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실의에 빠져 있는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해변가에서 숯불구이 조반을 나누시는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세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고 물으심으로 베드로와 사랑의 관계성을 회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사랑고백을 기초로 그를 양무리의 목자로 세우시고 하나님의 거룩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주님은 이 시간 저희와도 온전한 사랑의 관계성을 맺기를 원하십니다. 본문말씀을 통해 변함없는 사랑으로 저희를 만나주시기 원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기도합니다.
I. 와서 조반을 먹으라(1-14)
1절을 보십시오.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이 이러하니라.” 여기서 그 후란 요한복음 20장에 기록한대로 예수께서 여러사람들에게 나타난 이후를 말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셔서 그녀의 마음의 눈물을 닦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평강과 성령을 주셨습니다. 또한 의심많은 도마에게 나타나셔서 상처입은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고 의심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이때 제자들의 영적상태가 어떠했습니까? 제자들은 장래 안정문제로 염려가 가득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갈릴리에 모여 서로를 의지하며 함께 있었습니다. 며칠후 그들은 세상의 냉혹한 현실을 직면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을 좇을 때는 사모님들과 자매님들이 맛있는 서빙으로 섬겨주었지만 그들은 이제 스스로 먹고 살길을 찾아야 했습니다. 베드로는 제자모임을 열고 다른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그러자 그들도 말했습니다. “우리도 같이 가세” 그래서 그들은 디베랴 바다로 나가 배를 띄웠습니다. 밤새 그물을 던졌지만 야속한 고기들은 요리조리 잘도 빠져나갔습니다. 그 밤에 그들은 한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갈릴리는 제자들이 예수님께 부르심을 받고 제자생활을 시작한 곳입니다. 3년전 어느날 아침 베드로는 이곳에서 그물을 열심히 씻고 있었습니다. 그는 밤새 고기를 잡았지만 한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는 피곤하고 배가 고팠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무리들에게 말씀을 마치신 후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이 말은 참 납득안되는 말이었습니다. 고기는 밤에 잡는 것이지 해가 뜬 낮에 잡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그의 동역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했을 때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게 되었습니다 (눅5:1-11)
과거 베드로는 꿈이 없는 소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저 태어났기 때문에 살았고 먹고 살기 위해 열심히 일한 평범한 어부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갈릴리 바다에서 많은 고기를 잡은 후 예수님에게서 많은 권능을 보고 체험하면서 그에겐 꿈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는 장차 이스라엘이 회복될 날을 기다렸고 예수님께서 지상 메시아왕국을 건설하면 국무총리 한자리 정도는 할 것으로 기대가 부풀어 올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사 처참하게 돌아가셨을 때 그의 인간적인 꿈도 산산히 부서지고 말았습니다. 그가 받은 충격과 실망은 너무 컸습니다. 예수님을 따랐던 3년간은 헛된 나날들 같이 보였습니다. 더구나 그는 예수님을 세번이나 부인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부인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깊은 절망에 빠졌습니다. 그래도 먹고 살아야 했습니다. 그가 배운 것이라고는 고기잡이 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는 제자들과 같이 바다에 나가 밤새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러나 밤이 새도록 한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도 실패했는데 어부로서도 실패했다는 실패감이 엄습했습니다. 또한 불안한 장래에 대한 염려는 먹구름처럼 몰려왔습니다. 베드로에게는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이것이 당신의 제자들을 도울 수 있는 새로운 시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이 부활하신 후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약속하신대로(마26:32) 해변가에 와서 서 계셨습니다. 그러나 고기잡이를 마치고 돌아오는 제자들은 거기 서 계신 분이 예수님이신지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실패를 다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밤새도록 지치고 피곤한 마음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실패를 만회시키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지금 시각은 고기잡이에 적당한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졌습니다. 그런데 이게 왠 일입니까? 그물을 당기자 묵직한 느낌이 베드로의 손에 전해졌습니다. 베드로를 약올리며 도망갔던 고기들이 회개하고 그물 속으로 돌진하였습니다. 힘껏 당기자 팔뚝만큼이나 굵은 물고기가 그물에 가득하여 파닥 파닥 거리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의 얼굴에 간밤의 피로가 사라지고 생기가 돌고 웃음꽃이 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실패했다고 그를 벌주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그가 많은 고기를 잡도록 도와주심으로 실패를 만회하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실패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시면 실패는 승리로 바뀌어집니다. 누구든지 실패와 절망에 빠져있다면 예수님께로 나아오십시오. 예수님은 당신의 실패와 절망을 회복시키시고 새로운 삶을 살도록 해주십니다.
7절을 보십시오.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시라 하니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이 때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 요한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베드로에게 말했습니다. “주님이시다” 베드로는 주님이시다라는 말을 듣자마자 겉옷을 두른 후 바다로 뛰어 내렸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물속에 뛰어들 때 옷을 벗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옷을 벗고 있다가 오히려 겉옷을 두르고 물속에 뛰어들었습니다. 그의 행동은 무의식중이었지만 그가 예수님께 대한 깊은 경외심을 갖고 있고 또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한시라도 빨리 예수님이 보고싶어 물개같이 날쌔게 헤엄쳐 나갔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모두 작은 배를 타고 고기든 그물을 끌고 왔습니다.
사망권세를 파하신 만왕의 왕 예수님이 무엇이 아쉬워서 제길로 간 제자들을 찾아 이른 새벽 갈릴리 해변에 안타까운 심정으로 심방오셨단 말입니까?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신 거룩하신 주님께서 무엇 때문에 요리사가 되어 냄새나는 어부들의 조반을 섬겨주셔야 했단 말입니까? 그것은 주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주님은 세상에서 물고기 잡으며 헤맬 때에도 안타까운 마음으로 내 옆에 와계십니다. 사명을 감당하느라 던진 그물에 아무 것도 없이 빈그물을 들고 있는 나의 아픈 내면의 고통을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배반할지라도 주님은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나를 만나시기 위해 해변가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빈그물에 당신이 예비하신 고기를 채워주시기 원하십니다.
제자들이 육지에 올라왔을 때 예수님은 그들을 어떻게 맞이하셨습니까? 9절을 보십시오.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예수님 앞에는 빨갛게 달궈진 숯불이 자작자작 피어 있었습니다. 그 숯불 위에는 생선이 연기 속에서 지글지글 구수한 냄새를 풍기며 구워지고 있었습니다. 그 옆에 놓인 떡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피곤하고 지친 제자들을 위해서 아침식사를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은 그저 멋쩍게 서로 쳐다만 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머뭇거리는 제자들을 향해 지금 잡은 생선을 가져오라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그물을 육지에 끌어올리니 잡은 고기가 무려 153마리나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 말씀하셨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이 말씀은 자식을 위해 조반을 준비하시고 사랑하는 아들을 부르시는 어머니의 음성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자상하신 어머니와 같이 아침식사를 준비하시고 제자들을 식사에 초청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로마 군병들에게 잡혀가 고문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번이나 부인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벌하여야 마땅합니다. 예수님은 ‘이놈들 오리걸음 해볼래’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배반하고 떠난 제자들을 위해서 아름다운 Beach Party 를 준비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도 지난날의 제자들의 허물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연약한 제자들을 이해하시고 다 용서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주님 앞에 나오고 싶지만 선뜻 나오지 못하는 제자들의 마음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침식사를 준비하시고 먼저 제자들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와서 조반을 먹으라” 이 말씀은 제자들의 모든 허물과 실수와 죄악을 다 용서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제자들 중 어느 누구도 그 조반을 먹을 수 있는 이는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깊은 용서의 사랑은 알았지만 죄의식으로 한발자국도 나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친히 손으로 떡과 생선을 가져다가 제자들 하나 하나 친히 먹여 주셨습니다. 맨 마지막에 고개를 푹숙이고 있던 베드로에게 다가가셔서 “시몬아” 부르시며 그에게도 먹여주셨습니다. 그러자 그때까지 꾹 참고 있던 제자들이 목이 메어 울었습니다. 사랑하는 예수님을 배반한 죄의식에 눌리고 실패와 절망감에 짓눌렸던 제자들의 심령이 주님의 사랑으로 확 터지게 되었습니다. 한번 터진 눈물은 참으려 해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입안 가득히 있던 떡과 생선에 눈물이 고여 들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한 이 아침 식사는 용서와 은혜가 충만한 천국잔치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랑을 체험한 베드로는 후에 베드로전서4장8절에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II.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15-17)
제자들은 예수님이 차려주신 갈릴리 원조 숯불구이를 맛있게 먹고 생선초밥에 매운탕 그릇까지 깔끔하게 배워 배가 빵빵하게 불렀습니다. 아침식사를 마치신 후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예수님은 왜 이런 질문을 베드로에게 하셨을까요?
첫째, 예수님은 베드로와 사랑의 관계성을 회복하길 원하셨습니다. 여기서 ‘이사람들’ 이란 예수님외에 다른 것들 곧 베드로 자기 자신을 포함하여 다른 제자들뿐 아니라 그의 친구, 직업, 고기잡이배, 그물 등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질문은 베드로가 세상 어느 무엇보다 더 주님을 사랑하고 있는 물으셨습니다. 베드로의 대답이 어떠했습니까? 15b절을 보십시오. “가로되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그는 자신의 허물과 연약함을 깊이 인정하는데서 나오는 고백을 드리고 있습니다. 16절을 보면 예수님은 같은 질문을 하셨고 베드로는 같은 대답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한번더 질문을 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번째 질문하시자 베드로는 그가 예수님을 세번 부인했던 기억이 났는지 근심하여 슬픈얼굴로 대답했습니다. 17b를 보십시오.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여기서 모든 것은 특별히 그가 예수님을 부인한 사실을 말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서 더 이상 아무것도 숨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가 예수님의 사랑을 영접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사실 베드로는 누구보다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주님께서 잡히시기 전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다 주를 버릴찌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마26:33) 그리고 또 이렇게도 말했습니다.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요13:37) 그는 주님을 끝까지 좇겠다고 자신에 차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밤 세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세번 예수님을 부인한 사건은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에 가장 큰 걸림돌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베드로는 자기정죄감 속에 고통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영접하고 맛있는 조반으로 섬겨주셨지만 그는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용서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속삭였는지 모릅니다. “안돼 나는 용서받을 수 없어 제자로서 더 이상 자격이 없어 나는 제자가 아니야 어부란 말이야” 그의 정죄의식을 해결해주시기 위해 예수님은 세번이나 반복해서 베드로의 마음에 예수님의 사랑을 발견하도록 도와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발견하도록 하심으로 예수께서 원하시는 것은 다름 것이 아니라 베드로의 사랑인 것을 깨닫도록 도우셨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대한 사랑을 반복해서 고백하는 동안 그는 자기정죄감을 극복하고 예수님의 한결 같은 사랑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주님과 사랑의 관계성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면서 실패하기도하고 연약하여 죄를 범하기도 합니다. 때로 정욕과 교만과 분노의 종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때 우리는 예수님께 나아와 우리의 죄와 허물을 고백하고 주님의 사랑을 영접해야 합니다. 우리의 많은 허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있음을 아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영접하고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요한1서 4장19절은 말합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한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5장8절은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가 주님의 용서의 사랑을 영접하고 주님께 사랑고백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실수에 대해 변명하고자 합니다. 그들은 자존심 때문에 죄를 합리화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불평하고 예수님의 용서하는 사랑을 믿지 않습니다. 그들은 죄의식속에 갇히고 맙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의 죄를 용서하신 것은 알지만 그들 자신은 용서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속죄함을 멸시하는 그들이야 말로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 사랑고백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비록 허물과 죄악이 있지만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모진 고통을 당하시고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의 용서의 사랑을 눈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가 주님께 드린 것은 허물과 죄악 뿐인 것을 보게 됩니다. 새해초 새롭게 주님과 양떼들을 섬기겠다고 결심합니다. 새벽기도를 결단하고 신입생 제자양성 기도제목을 내걸고 투쟁하겠다 합니다. 그러나 절반이 지난 지금 뒤돌아 보면 여러 결단들이 지켜지지 않고 주님께 드린 것은 허물과 죄악뿐인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게 올해만 이러면 괜찮은데 2년, 3년 아니 5년째 바닥을 기고 있는 자신의 허물을 생각하면 주님께 나갈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주님을 배반하고 범한 죄를 생각하면 더이상 목자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내가 그럴지라도 나를 변함없이 사랑하고 계십니다. 주님과의 첫사랑을 기억하고 사랑의 관계성을 회복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진심을 다 아십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흠없는 모습이 아닙니다. 나에게 예수님을 부인한 사건이 있습니까? 주님은 우리가 당신께 사랑고백을 함으로 주님과 견고한 사랑의 관계성을 맺기를 원하십니다. 이시간 우리에게 질문하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우리가 이 질문에 힘내어 사랑고백 해보겠습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둘째,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양을 치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베드로의 사랑고백을 들으신 예수님은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15b를 보십시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16b를 보십시오. “내 양을 치라” 17b를 보십시오. “내 양을 먹이라” 예수님께서는 이런식으로 누구에게 부담을 주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예수님께서 매우 진지하였습니다. 지금까지 베드로는 예수님의 양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에수님은 베드로의 모든 연약함을 감당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함으로 예수님은 목자의 삶이 어떤 것인가 그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베드로를 하나님의 양무리들의 목자로 세우고자 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승천하시 전 한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목자없는 양들을 두고 떠난다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예수님께 몰려올 때 예수님은 그들을 목자없는 양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겼습니다.(막6:34) 예수님의 어린 양은 과거 베드로가 그랬던 것처럼 죄와 인생의 무의미로 고통하는 자들입니다.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가지만 인생의 목표가 없이 허무하게 하루하루 살아갑니다. 그들은 자신의 죄문제로 고통하고 있으며 어떻게 죄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몰라 괴로워합니다. 그들은 세상의 쾌락주의와 물질주의의 조류에 방치되어 있어 쉽게 유혹에 넘어가 사단의 종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양들을 먹이기를 부탁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세번씩이나 이렇게 당신의 양무리를 먹이라고 하신 것은 그에게 부담을 주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베드로를 양무리의 목자로 세우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베드로 네양이라 안하고 내양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보배로운 피로 사신 모든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양들을 먹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예수님의 아픔은 우리의 아픔이 됩니다. 예수님의 슬픔은 우리의 슬픔이 되고 예수님의 마음이 우리의 마음이 됩니다. 주님을 사랑하게 되면 양들을 사랑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어주셨기 때문에 우리도 예수님의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어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예수님의 양을 먹일 때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귀한 양들을 돌볼 때 우리는 예수님과 사랑의 관계성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양을 돌보는 목자의 삶을 살 때 예수님의 풍성한 사랑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양무리의 목자가 하는 일이 무엇일까요? 목자는 항상 양들을 먹일 꼴을 준비해야 합니다. 목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준비되어 있어야 하며 때마다 양들을 먹여야 합니다. 잘 소화하지 못하는 양들을 위해서는 잘근잘근 씹어서 만든 이유식을 주어야 합니다. 입맛을 잃은 양들을 위해서는 특별식을 준비하여 입맛을 돋구어 주어야 합니다. 양들이 위협을 받는 인본주의나 물질주의 이단사항으로부터 양들을 보호해 주어야 합니다. 양들이 사단의 공격으로 드러누웠을 때는 신약과 구약을 골고루 섞어 만든 보약을 다려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어린 양이 강건하고 자립적인 양이 되기까지 늘 관찰하고 보살펴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자에게 양들을 맡기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듯이 목자의 삶은 늘 낭만적인 것만이 아닙니다. 어린 양을 먹여야 하기 때문에 늘 희생하고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때로는 사랑으로 섬겨주어도 목자의 사랑을 받지 않고 마음에 상처를 주고 떠나는 양으로 인해 고통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목자의 삶은 보람과 기쁨과 동시에 희생과 고통이 따르는 삶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면 감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을 품을 때 주께서 맡기신 어린 양들을 끝까지 감당하며 희생하며 고통을 감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의 사랑과 섬김을 바라는 양들을 희생적으로 섬기고 사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은 실의에 빠져있는 제자들을 심방오사 그들을 만나주시고 사랑의 관계성을 회복하셨습니다. 비치파티를 준비하시고 주님을 배반하고 도망간 제자들을 섬겨주심으로 제자들의 허물과 죄악을 용서하시고 모든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여 주셨습니다. 세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와는 사랑의 관계성을 회복하시고 당신의 양무리들을 맡겨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시간 우리의 실패와 절망을 치유하시고 만회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또 우리의 허물과 죄악으로 깨어졌던 사랑의 관계성을 회복하기를 원하십니다. 이 시간 저희가 예수님의 사랑의 음성을 듣고 진심으로 사랑고백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씀/요한복음21:1-25
요절/요한복음21:15
“저희가 조반을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본문 말씀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실의에 빠져 있는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해변가에서 숯불구이 조반을 나누시는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세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고 물으심으로 베드로와 사랑의 관계성을 회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사랑고백을 기초로 그를 양무리의 목자로 세우시고 하나님의 거룩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주님은 이 시간 저희와도 온전한 사랑의 관계성을 맺기를 원하십니다. 본문말씀을 통해 변함없는 사랑으로 저희를 만나주시기 원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기도합니다.
I. 와서 조반을 먹으라(1-14)
1절을 보십시오.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이 이러하니라.” 여기서 그 후란 요한복음 20장에 기록한대로 예수께서 여러사람들에게 나타난 이후를 말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셔서 그녀의 마음의 눈물을 닦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평강과 성령을 주셨습니다. 또한 의심많은 도마에게 나타나셔서 상처입은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고 의심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이때 제자들의 영적상태가 어떠했습니까? 제자들은 장래 안정문제로 염려가 가득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갈릴리에 모여 서로를 의지하며 함께 있었습니다. 며칠후 그들은 세상의 냉혹한 현실을 직면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을 좇을 때는 사모님들과 자매님들이 맛있는 서빙으로 섬겨주었지만 그들은 이제 스스로 먹고 살길을 찾아야 했습니다. 베드로는 제자모임을 열고 다른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그러자 그들도 말했습니다. “우리도 같이 가세” 그래서 그들은 디베랴 바다로 나가 배를 띄웠습니다. 밤새 그물을 던졌지만 야속한 고기들은 요리조리 잘도 빠져나갔습니다. 그 밤에 그들은 한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갈릴리는 제자들이 예수님께 부르심을 받고 제자생활을 시작한 곳입니다. 3년전 어느날 아침 베드로는 이곳에서 그물을 열심히 씻고 있었습니다. 그는 밤새 고기를 잡았지만 한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는 피곤하고 배가 고팠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무리들에게 말씀을 마치신 후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이 말은 참 납득안되는 말이었습니다. 고기는 밤에 잡는 것이지 해가 뜬 낮에 잡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그의 동역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했을 때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게 되었습니다 (눅5:1-11)
과거 베드로는 꿈이 없는 소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저 태어났기 때문에 살았고 먹고 살기 위해 열심히 일한 평범한 어부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갈릴리 바다에서 많은 고기를 잡은 후 예수님에게서 많은 권능을 보고 체험하면서 그에겐 꿈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는 장차 이스라엘이 회복될 날을 기다렸고 예수님께서 지상 메시아왕국을 건설하면 국무총리 한자리 정도는 할 것으로 기대가 부풀어 올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사 처참하게 돌아가셨을 때 그의 인간적인 꿈도 산산히 부서지고 말았습니다. 그가 받은 충격과 실망은 너무 컸습니다. 예수님을 따랐던 3년간은 헛된 나날들 같이 보였습니다. 더구나 그는 예수님을 세번이나 부인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부인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깊은 절망에 빠졌습니다. 그래도 먹고 살아야 했습니다. 그가 배운 것이라고는 고기잡이 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는 제자들과 같이 바다에 나가 밤새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러나 밤이 새도록 한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도 실패했는데 어부로서도 실패했다는 실패감이 엄습했습니다. 또한 불안한 장래에 대한 염려는 먹구름처럼 몰려왔습니다. 베드로에게는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이것이 당신의 제자들을 도울 수 있는 새로운 시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이 부활하신 후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약속하신대로(마26:32) 해변가에 와서 서 계셨습니다. 그러나 고기잡이를 마치고 돌아오는 제자들은 거기 서 계신 분이 예수님이신지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실패를 다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밤새도록 지치고 피곤한 마음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실패를 만회시키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지금 시각은 고기잡이에 적당한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졌습니다. 그런데 이게 왠 일입니까? 그물을 당기자 묵직한 느낌이 베드로의 손에 전해졌습니다. 베드로를 약올리며 도망갔던 고기들이 회개하고 그물 속으로 돌진하였습니다. 힘껏 당기자 팔뚝만큼이나 굵은 물고기가 그물에 가득하여 파닥 파닥 거리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의 얼굴에 간밤의 피로가 사라지고 생기가 돌고 웃음꽃이 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실패했다고 그를 벌주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그가 많은 고기를 잡도록 도와주심으로 실패를 만회하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실패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시면 실패는 승리로 바뀌어집니다. 누구든지 실패와 절망에 빠져있다면 예수님께로 나아오십시오. 예수님은 당신의 실패와 절망을 회복시키시고 새로운 삶을 살도록 해주십니다.
7절을 보십시오.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시라 하니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이 때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 요한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베드로에게 말했습니다. “주님이시다” 베드로는 주님이시다라는 말을 듣자마자 겉옷을 두른 후 바다로 뛰어 내렸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물속에 뛰어들 때 옷을 벗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옷을 벗고 있다가 오히려 겉옷을 두르고 물속에 뛰어들었습니다. 그의 행동은 무의식중이었지만 그가 예수님께 대한 깊은 경외심을 갖고 있고 또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한시라도 빨리 예수님이 보고싶어 물개같이 날쌔게 헤엄쳐 나갔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모두 작은 배를 타고 고기든 그물을 끌고 왔습니다.
사망권세를 파하신 만왕의 왕 예수님이 무엇이 아쉬워서 제길로 간 제자들을 찾아 이른 새벽 갈릴리 해변에 안타까운 심정으로 심방오셨단 말입니까?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신 거룩하신 주님께서 무엇 때문에 요리사가 되어 냄새나는 어부들의 조반을 섬겨주셔야 했단 말입니까? 그것은 주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주님은 세상에서 물고기 잡으며 헤맬 때에도 안타까운 마음으로 내 옆에 와계십니다. 사명을 감당하느라 던진 그물에 아무 것도 없이 빈그물을 들고 있는 나의 아픈 내면의 고통을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배반할지라도 주님은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나를 만나시기 위해 해변가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빈그물에 당신이 예비하신 고기를 채워주시기 원하십니다.
제자들이 육지에 올라왔을 때 예수님은 그들을 어떻게 맞이하셨습니까? 9절을 보십시오.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예수님 앞에는 빨갛게 달궈진 숯불이 자작자작 피어 있었습니다. 그 숯불 위에는 생선이 연기 속에서 지글지글 구수한 냄새를 풍기며 구워지고 있었습니다. 그 옆에 놓인 떡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피곤하고 지친 제자들을 위해서 아침식사를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은 그저 멋쩍게 서로 쳐다만 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머뭇거리는 제자들을 향해 지금 잡은 생선을 가져오라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그물을 육지에 끌어올리니 잡은 고기가 무려 153마리나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 말씀하셨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이 말씀은 자식을 위해 조반을 준비하시고 사랑하는 아들을 부르시는 어머니의 음성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자상하신 어머니와 같이 아침식사를 준비하시고 제자들을 식사에 초청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로마 군병들에게 잡혀가 고문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번이나 부인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벌하여야 마땅합니다. 예수님은 ‘이놈들 오리걸음 해볼래’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배반하고 떠난 제자들을 위해서 아름다운 Beach Party 를 준비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도 지난날의 제자들의 허물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연약한 제자들을 이해하시고 다 용서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주님 앞에 나오고 싶지만 선뜻 나오지 못하는 제자들의 마음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침식사를 준비하시고 먼저 제자들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와서 조반을 먹으라” 이 말씀은 제자들의 모든 허물과 실수와 죄악을 다 용서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제자들 중 어느 누구도 그 조반을 먹을 수 있는 이는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깊은 용서의 사랑은 알았지만 죄의식으로 한발자국도 나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친히 손으로 떡과 생선을 가져다가 제자들 하나 하나 친히 먹여 주셨습니다. 맨 마지막에 고개를 푹숙이고 있던 베드로에게 다가가셔서 “시몬아” 부르시며 그에게도 먹여주셨습니다. 그러자 그때까지 꾹 참고 있던 제자들이 목이 메어 울었습니다. 사랑하는 예수님을 배반한 죄의식에 눌리고 실패와 절망감에 짓눌렸던 제자들의 심령이 주님의 사랑으로 확 터지게 되었습니다. 한번 터진 눈물은 참으려 해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입안 가득히 있던 떡과 생선에 눈물이 고여 들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한 이 아침 식사는 용서와 은혜가 충만한 천국잔치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랑을 체험한 베드로는 후에 베드로전서4장8절에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II.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15-17)
제자들은 예수님이 차려주신 갈릴리 원조 숯불구이를 맛있게 먹고 생선초밥에 매운탕 그릇까지 깔끔하게 배워 배가 빵빵하게 불렀습니다. 아침식사를 마치신 후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예수님은 왜 이런 질문을 베드로에게 하셨을까요?
첫째, 예수님은 베드로와 사랑의 관계성을 회복하길 원하셨습니다. 여기서 ‘이사람들’ 이란 예수님외에 다른 것들 곧 베드로 자기 자신을 포함하여 다른 제자들뿐 아니라 그의 친구, 직업, 고기잡이배, 그물 등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질문은 베드로가 세상 어느 무엇보다 더 주님을 사랑하고 있는 물으셨습니다. 베드로의 대답이 어떠했습니까? 15b절을 보십시오. “가로되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그는 자신의 허물과 연약함을 깊이 인정하는데서 나오는 고백을 드리고 있습니다. 16절을 보면 예수님은 같은 질문을 하셨고 베드로는 같은 대답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한번더 질문을 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번째 질문하시자 베드로는 그가 예수님을 세번 부인했던 기억이 났는지 근심하여 슬픈얼굴로 대답했습니다. 17b를 보십시오.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여기서 모든 것은 특별히 그가 예수님을 부인한 사실을 말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서 더 이상 아무것도 숨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가 예수님의 사랑을 영접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사실 베드로는 누구보다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주님께서 잡히시기 전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다 주를 버릴찌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마26:33) 그리고 또 이렇게도 말했습니다.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요13:37) 그는 주님을 끝까지 좇겠다고 자신에 차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밤 세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세번 예수님을 부인한 사건은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에 가장 큰 걸림돌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베드로는 자기정죄감 속에 고통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영접하고 맛있는 조반으로 섬겨주셨지만 그는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용서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속삭였는지 모릅니다. “안돼 나는 용서받을 수 없어 제자로서 더 이상 자격이 없어 나는 제자가 아니야 어부란 말이야” 그의 정죄의식을 해결해주시기 위해 예수님은 세번이나 반복해서 베드로의 마음에 예수님의 사랑을 발견하도록 도와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발견하도록 하심으로 예수께서 원하시는 것은 다름 것이 아니라 베드로의 사랑인 것을 깨닫도록 도우셨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대한 사랑을 반복해서 고백하는 동안 그는 자기정죄감을 극복하고 예수님의 한결 같은 사랑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주님과 사랑의 관계성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면서 실패하기도하고 연약하여 죄를 범하기도 합니다. 때로 정욕과 교만과 분노의 종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때 우리는 예수님께 나아와 우리의 죄와 허물을 고백하고 주님의 사랑을 영접해야 합니다. 우리의 많은 허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있음을 아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영접하고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요한1서 4장19절은 말합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한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5장8절은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가 주님의 용서의 사랑을 영접하고 주님께 사랑고백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실수에 대해 변명하고자 합니다. 그들은 자존심 때문에 죄를 합리화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불평하고 예수님의 용서하는 사랑을 믿지 않습니다. 그들은 죄의식속에 갇히고 맙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의 죄를 용서하신 것은 알지만 그들 자신은 용서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속죄함을 멸시하는 그들이야 말로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 사랑고백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비록 허물과 죄악이 있지만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모진 고통을 당하시고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의 용서의 사랑을 눈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가 주님께 드린 것은 허물과 죄악 뿐인 것을 보게 됩니다. 새해초 새롭게 주님과 양떼들을 섬기겠다고 결심합니다. 새벽기도를 결단하고 신입생 제자양성 기도제목을 내걸고 투쟁하겠다 합니다. 그러나 절반이 지난 지금 뒤돌아 보면 여러 결단들이 지켜지지 않고 주님께 드린 것은 허물과 죄악뿐인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게 올해만 이러면 괜찮은데 2년, 3년 아니 5년째 바닥을 기고 있는 자신의 허물을 생각하면 주님께 나갈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주님을 배반하고 범한 죄를 생각하면 더이상 목자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내가 그럴지라도 나를 변함없이 사랑하고 계십니다. 주님과의 첫사랑을 기억하고 사랑의 관계성을 회복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진심을 다 아십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흠없는 모습이 아닙니다. 나에게 예수님을 부인한 사건이 있습니까? 주님은 우리가 당신께 사랑고백을 함으로 주님과 견고한 사랑의 관계성을 맺기를 원하십니다. 이시간 우리에게 질문하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우리가 이 질문에 힘내어 사랑고백 해보겠습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둘째,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양을 치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베드로의 사랑고백을 들으신 예수님은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15b를 보십시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16b를 보십시오. “내 양을 치라” 17b를 보십시오. “내 양을 먹이라” 예수님께서는 이런식으로 누구에게 부담을 주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예수님께서 매우 진지하였습니다. 지금까지 베드로는 예수님의 양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에수님은 베드로의 모든 연약함을 감당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함으로 예수님은 목자의 삶이 어떤 것인가 그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베드로를 하나님의 양무리들의 목자로 세우고자 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승천하시 전 한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목자없는 양들을 두고 떠난다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예수님께 몰려올 때 예수님은 그들을 목자없는 양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겼습니다.(막6:34) 예수님의 어린 양은 과거 베드로가 그랬던 것처럼 죄와 인생의 무의미로 고통하는 자들입니다.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가지만 인생의 목표가 없이 허무하게 하루하루 살아갑니다. 그들은 자신의 죄문제로 고통하고 있으며 어떻게 죄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몰라 괴로워합니다. 그들은 세상의 쾌락주의와 물질주의의 조류에 방치되어 있어 쉽게 유혹에 넘어가 사단의 종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양들을 먹이기를 부탁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세번씩이나 이렇게 당신의 양무리를 먹이라고 하신 것은 그에게 부담을 주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베드로를 양무리의 목자로 세우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베드로 네양이라 안하고 내양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보배로운 피로 사신 모든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양들을 먹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예수님의 아픔은 우리의 아픔이 됩니다. 예수님의 슬픔은 우리의 슬픔이 되고 예수님의 마음이 우리의 마음이 됩니다. 주님을 사랑하게 되면 양들을 사랑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어주셨기 때문에 우리도 예수님의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어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예수님의 양을 먹일 때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귀한 양들을 돌볼 때 우리는 예수님과 사랑의 관계성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양을 돌보는 목자의 삶을 살 때 예수님의 풍성한 사랑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양무리의 목자가 하는 일이 무엇일까요? 목자는 항상 양들을 먹일 꼴을 준비해야 합니다. 목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준비되어 있어야 하며 때마다 양들을 먹여야 합니다. 잘 소화하지 못하는 양들을 위해서는 잘근잘근 씹어서 만든 이유식을 주어야 합니다. 입맛을 잃은 양들을 위해서는 특별식을 준비하여 입맛을 돋구어 주어야 합니다. 양들이 위협을 받는 인본주의나 물질주의 이단사항으로부터 양들을 보호해 주어야 합니다. 양들이 사단의 공격으로 드러누웠을 때는 신약과 구약을 골고루 섞어 만든 보약을 다려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어린 양이 강건하고 자립적인 양이 되기까지 늘 관찰하고 보살펴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자에게 양들을 맡기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듯이 목자의 삶은 늘 낭만적인 것만이 아닙니다. 어린 양을 먹여야 하기 때문에 늘 희생하고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때로는 사랑으로 섬겨주어도 목자의 사랑을 받지 않고 마음에 상처를 주고 떠나는 양으로 인해 고통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목자의 삶은 보람과 기쁨과 동시에 희생과 고통이 따르는 삶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면 감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을 품을 때 주께서 맡기신 어린 양들을 끝까지 감당하며 희생하며 고통을 감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의 사랑과 섬김을 바라는 양들을 희생적으로 섬기고 사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은 실의에 빠져있는 제자들을 심방오사 그들을 만나주시고 사랑의 관계성을 회복하셨습니다. 비치파티를 준비하시고 주님을 배반하고 도망간 제자들을 섬겨주심으로 제자들의 허물과 죄악을 용서하시고 모든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여 주셨습니다. 세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와는 사랑의 관계성을 회복하시고 당신의 양무리들을 맡겨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시간 우리의 실패와 절망을 치유하시고 만회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또 우리의 허물과 죄악으로 깨어졌던 사랑의 관계성을 회복하기를 원하십니다. 이 시간 저희가 예수님의 사랑의 음성을 듣고 진심으로 사랑고백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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