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요한16(10:1-42)/ 선한 목자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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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요한복음 제 16 강
말씀 / 요한복음 10:1-42
요절 / 요한복음 10:11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요한복음 10장은 9장의 연속입니다. 예수님은 날 때부터 소경으로 태어나서 거지로 살고 있던 그의 눈을 뜨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그의 증거를 믿지 않고 출교를 시켰습니다. 예수님이 볼 때 그들은 절도요강도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회개하도록 도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양들의 목자가 되어야 할 바리새인들에게 실망하셨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지 않고 영적 소경인 그들에게 참 목자상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삯꾼과 같은 요소들을 회개하고 선한 목자 예수님을 배우기를 원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좋은 양으로서 그를 따르고 본받는 가운데 풍성한 생명을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I. 양과 목자(1-6)
1,2절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목자와 강도는 양에게 접근하는 방법이 다릅니다. 목자는 바른 동기와 방법으로 양에게 당당하게 접근합니다. 그러나 절도와 강도는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담을 넘거나 개구멍으로 몰래 들어갑니다. 절도와 강도는 양을 훔쳐서 팔아 먹거나 털을 깍고 잡아먹고자 합니다. 그러나 목자는 양을 돌보고 보호하고 꼴을 먹이고자 다가 갑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양에게 다가가는 목적이 순수해야 함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습니다. 목자는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냅니다. 목자가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해 낸다는 것은 목자와 양의 인격적 관계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목자와 양은 주인과 재산의 관계가 아니라 사랑과 신뢰의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목자가 양을 치는 것은 삶의 수단 이상이기 때문입니다. 양은 목자를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목자는 자기의 생명이 위태로울 때도 양을 돌봅니다. 이런 관계에 기초해서 볼 때 목자는 한 마리의 양을 잃어버리면 99마리를 들판에 두고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마18:12). 사자가 양떼로부터 한 마리의 양을 물어갈 때 다윗은 그를 뒤쫓아가서 사자의 입으로부터 양을 구해내었습니다. 목자는 양을 사랑하고 양은 목자를 신뢰합니다.
목자는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갑니다. 그러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옵니다(4). 목자는 양이 따라 올 것을 믿고 앞서 나아갑니다. 양은 목자가 자신들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따라 갑니다. 목자는 마음을 드려서 양을 돌봐주기 때문에 양들이 잘 따릅니다. 돼지는 뒤에서 궁둥이를 매로 때려야 나아가지만 양은 두려움을 주면 더 꼼짝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목자가 앞서가면 안심하고 양이 따라 옵니다. 양은 본래 시력이 -10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1-2m 앞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99번 갔던 길도 100번째에 다시 데려가야 합니다. 그렇지만 청력은 대단히 뛰어나기 때문에 목자와 다른 사람의 말을 쉽게 구별해 냅니다(5). 다른 사람이 부르면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을 갑니다. 목자와 양은 신뢰로 맺어졌기 때문에 서로를 잘 감당해 줍니다. 양이 다른 목자를 따르는 것은 병들었을 때 그런다고 합니다. 또 말을 잘 듣지 않고 제 갈 길로 갈 때 양치기 개가 짖어서 바른 길로 안내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바리새인들에게 하셨으나 그들은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이는 그들이 예수님의 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II. 양과 목자(7-21)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알아듣지 못한다고 해서 그만 두지 않고 다시 선한 목자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선한 목자이십니까?
첫째, 예수님은 양의 문이기 때문에 선한 목자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예수님은 자신이 양의 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아이들은 밖에서 놀다가 나쁜 사람이 접근하면 자기 집으로 들어갑니다. 문을 통하여 자기 집으로 들어가면 안전합니다. 이와 같이 문되신 예수님을 통하여 들어가면 안전합니다. 구약에는 도피성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사고로 살인을 했을 때 도피성으로 들어가면 복수하고자 하는 사람이 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고가 고의로 한 것이 아님이 입증되면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그 성에서 안전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나는 양의 문이라고 하신 것은 그를 통하여 들어가면 안전하게 보호를 받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좁은 문이 됩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한 문이 되시기 때문에 선한 목자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시기 때문에 선한 목자입니다(9-10).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가며 꼴을 얻으리라” 약속하셨습니다. 들어가며 나가며 꼴을 얻는다는 것은 자유롭고 안전한 생활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양된 우리 인생들에게 참된 양식을 주시되 풍성하게 주십니다. 이 세상에 양식이 될 만한 것들은 많이 있습니다. 양서는 마음의 양식이 됩니다. 월급은 우리에게 육신의 양식을 공급합니다. 그러나 썩을 양식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먹었던 양식은 만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침마다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셔서 광야 생활을 하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그들은 젖과 꿀을 양식으로 삼았습니다. 이는 바로 산 양식입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은혜가 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 속에 있는 생명의 씨를 가지는 것입니다. 말씀은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으므로 우리의 병든 영혼을 깨워 일으킬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주십니다. 우리는 말씀을 먹되 그 속에 있는 생명의 씨앗을 함께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는 창조적인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먹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씨를 통해 싹을 틔우고 열매를 생산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썩을 양식이 아니라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구해야 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일하는 것입니다. 그때 참 만족을 누리게 됩니다. 또 그 안에 풍성한 삶이 있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도적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목적으로 오지만 예수님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고 오셨습니다. 생명을 풍성히 얻게 한다는 것은 양이 시달리고 있는 병에서 구원을 얻도록 치료를 해주고 죄문제들을 회개하도록 돕는 것도 포함됩니다. 양은 배불리 먹고 양들 간에 생긴 긴장이 풀리고 병이 나음 받아야 잠을 제대로 잔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양들이 양적으로 뿐만 아니라 질적으로 차고 넘치는 삶을 살도록 하십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2).”
셋째, 예수님은 양들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리기 때문에 선한 목자이십니다(11-13). 선한 목자와 삯꾼 목자는 하는 일이 똑같기 때문에 별로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삯꾼 목자는 양치는 것을 직업으로 삼기 때문에 목적이 돈에 있습니다. 삯꾼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납니다. 그렇게 되면 이리는 양을 늑탈하고 헤치게 됩니다. 삯꾼 목자가 어려운 때에 양들을 돌보지 않기 때문에 양들은 다 흩어집니다. 양이 흩어지는 것은 사단의 공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과 같은 목자가 되는 것을 매우 아름답고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벽에 걸려 있는 양을 안고 있는 목자 예수님의 모습을 목자의 이미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아름다운 이미지 뒤에 있는 목자의 희생에 대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는 것은 예수님의 삶의 목적이 양을 돌보는데 있음을 말해 줍니다. 그의 인생의 목적은 자신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성취나 인격 완성이 아니었습니다. 전적으로 그의 양들을 돌보는 것이 삶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목숨을 양들을 위해서 버리기 까지 양들을 사랑하고 섬깁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목자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4-6).” 예수님께서 자기 목숨을 버린다는 뜻은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많은 사람을 살리실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자기 양들을 사랑하기 위해서 자기것을 조금도 꾸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정말 순수하게 양들을 돌보셨습니다. 선한 목자 예수님은 양을 치기 위해서 시간과 물질과 자존심을 버리셨습니다. 예수님은 말구유에 태어나셨고 일생 동안 죄인들의 친구로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양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팔아먹고 배반하는 양들을 위해서도 기꺼이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고 그 사랑을 체험했을 때는 매우 뜨겁습니다. 그래서 양들을 위해서 자기를 버리는 목자의 삶을 살고자 결단합니다. 우리는 성경 선생이 되고자 결단을 했습니다. 의미있는 삶을 살고 열매가 맺힙니다. 그러나 점차로 숨겨진 야심과 이기심이 고개를 들기 시작합니다. 영적인 분야에서 자기 사업을 찾기 시작합니다. 양치는 목적이 자기 영광을 구하고 순수한 동기가 사그러듭니다. 하나님의 역사보다 자신과 가정이 앞서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소감 쓰기나 섬기는 일들이 형식적이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영적인 위험을 감지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어떤 이상이나 정치 체제를 위해서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그는 죄로 인해서 잃어버린 바 된 자기 양들을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사 양들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릴 수 있도록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수고를 하지만 열매가 맺히지 않는 이유는 결국 양을 위해서 죽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양을 위해서 죽지는 못할지라도 태만과 불필요한 대화와 일, 오락, 세속적인 욕망을 부인하고 성실하고 책임성있는 목자는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양을 위해서 죽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목자가 된 것이 부담이 됩니다. 그러나 부활 신앙이 있으면 기꺼이 희생할 수 있습니다(17).
넷째로, 예수님은 자기 양을 아시기 때문에 선한 목자이십니다(3b, 14,15). 목자는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냅니다. 선한 목자는 자기 양을 알고 양도 그 목자를 아는 것이 아버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아시고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아시는 것과 같습니다. 이름은 그의 인격과 특징, 덕성, 단점 등 모든 것을 대표합니다. 그는 우리를 이해하시고 푸른 초창으로 인도하십니다. 목자의 자질은 양의 이름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한 목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양의 이름을 아는 데서 자라야 합니다. 양의 이름을 알기 위해서 소감을 나누고 개인적인 대화에 힘쓰고 함께 일하고 함께 놀고 마음으로 양을 알기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제가 일을 하면서도 목자님들과 개인적인 대화를 나누는데 힘쓰고자 방향을 잡게 되었습니다. 저는 메시지에서 수많은 말을 하는 것보다 일대일로 몇 마디 나누는 것이 더 효과적일 때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은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러해야 합니다. 우리가 일대일로 말씀을 공부하는 가운데 더욱 인격적으로 아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지요. 목자는 그의 양과 깊은 사랑의 관계성을 가진 사람입니다.
다섯째, 예수님은 양들에게 모범을 보이시기 때문에 선한 목자이십니다(4a,16). 선한 목자는 양의 우리에서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갑니다. 앞서 간다는 것은 본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목자는 양에게 나아갈 방향을 보여 주고 위험으로부터 양들을 보호해 줍니다. 양은 매우 겁이 많고 소심합니다. 그래서 목자의 손가락을 보는 것이 아니라 목자가 걸어가는 발을 보고 따라 갑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자기 양들을 가르칠 뿐만 아니라 본을 보이심으로 따라오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섬기는 종으로 오셨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우리 앞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는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을 인도하여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하십니다(16). 예수님은 세계 선교 면에서도 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완벽한 본을 보여 주었습니다.
여섯째, 예수님은 하나님의 좋은 양이셨기 때문에 선한 목자이셨습니다(14-18).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을 아시고 아버지께서 그를 아십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세상 죄를 위해서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목숨을 버릴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하기 위해 유월절 어린 양으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목숨을 버려서 하나님의 뜻을 섬기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좋은 양이심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좋은 양이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좋은 목자가 될 수 있는가 생각합니다. 답은 하나님께 좋은 양이 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우리의 양들에게 좋은 목자가 될 수 있습니다.
III.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19-42)
예수님께서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하시자 유대인 중에서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저가 귀신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은 귀신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 귀신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고 하였습니다.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서 다니시니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위협하면서 물었습니다.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케 하려나이까? 그리스도여든 밝히 말하시오(24).”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이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어늘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의 문제는 지적인데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마음으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에 대해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30)”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돌을 들어 치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어떤 일로 나를 치려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신성 모독으로 인하여 돌로 치려 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시82:6절을 기초로 율법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어찌 참람하다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구약에서는 재판관이나 왕과 같은 지도자들을 신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일을 행하셨습니다. 그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가 행하는 일들은 믿어야 합니다. 그때 아버지께서 예수님 안에 계시고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게 됩니다. 그들은 다시 예수님을 잡고자 하였으나 그 손에서 벗어나 나가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증거들을 충분히 제시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존심 때문에 믿지 않았습니다.
결론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양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불행합니다. 겉으로 볼 때 이 세상은 도적과 강도만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목자가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양으로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를 따라야 합니다. 그때 그는 우리를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시며 우리도 양들에게 성실하고 책임성 있는 목자가 되기까지 성장할 줄 믿습니다.
말씀 / 요한복음 10:1-42
요절 / 요한복음 10:11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요한복음 10장은 9장의 연속입니다. 예수님은 날 때부터 소경으로 태어나서 거지로 살고 있던 그의 눈을 뜨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그의 증거를 믿지 않고 출교를 시켰습니다. 예수님이 볼 때 그들은 절도요강도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회개하도록 도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양들의 목자가 되어야 할 바리새인들에게 실망하셨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지 않고 영적 소경인 그들에게 참 목자상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삯꾼과 같은 요소들을 회개하고 선한 목자 예수님을 배우기를 원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좋은 양으로서 그를 따르고 본받는 가운데 풍성한 생명을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I. 양과 목자(1-6)
1,2절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목자와 강도는 양에게 접근하는 방법이 다릅니다. 목자는 바른 동기와 방법으로 양에게 당당하게 접근합니다. 그러나 절도와 강도는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담을 넘거나 개구멍으로 몰래 들어갑니다. 절도와 강도는 양을 훔쳐서 팔아 먹거나 털을 깍고 잡아먹고자 합니다. 그러나 목자는 양을 돌보고 보호하고 꼴을 먹이고자 다가 갑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양에게 다가가는 목적이 순수해야 함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습니다. 목자는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냅니다. 목자가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해 낸다는 것은 목자와 양의 인격적 관계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목자와 양은 주인과 재산의 관계가 아니라 사랑과 신뢰의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목자가 양을 치는 것은 삶의 수단 이상이기 때문입니다. 양은 목자를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목자는 자기의 생명이 위태로울 때도 양을 돌봅니다. 이런 관계에 기초해서 볼 때 목자는 한 마리의 양을 잃어버리면 99마리를 들판에 두고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마18:12). 사자가 양떼로부터 한 마리의 양을 물어갈 때 다윗은 그를 뒤쫓아가서 사자의 입으로부터 양을 구해내었습니다. 목자는 양을 사랑하고 양은 목자를 신뢰합니다.
목자는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갑니다. 그러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옵니다(4). 목자는 양이 따라 올 것을 믿고 앞서 나아갑니다. 양은 목자가 자신들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따라 갑니다. 목자는 마음을 드려서 양을 돌봐주기 때문에 양들이 잘 따릅니다. 돼지는 뒤에서 궁둥이를 매로 때려야 나아가지만 양은 두려움을 주면 더 꼼짝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목자가 앞서가면 안심하고 양이 따라 옵니다. 양은 본래 시력이 -10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1-2m 앞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99번 갔던 길도 100번째에 다시 데려가야 합니다. 그렇지만 청력은 대단히 뛰어나기 때문에 목자와 다른 사람의 말을 쉽게 구별해 냅니다(5). 다른 사람이 부르면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을 갑니다. 목자와 양은 신뢰로 맺어졌기 때문에 서로를 잘 감당해 줍니다. 양이 다른 목자를 따르는 것은 병들었을 때 그런다고 합니다. 또 말을 잘 듣지 않고 제 갈 길로 갈 때 양치기 개가 짖어서 바른 길로 안내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바리새인들에게 하셨으나 그들은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이는 그들이 예수님의 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II. 양과 목자(7-21)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알아듣지 못한다고 해서 그만 두지 않고 다시 선한 목자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선한 목자이십니까?
첫째, 예수님은 양의 문이기 때문에 선한 목자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예수님은 자신이 양의 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아이들은 밖에서 놀다가 나쁜 사람이 접근하면 자기 집으로 들어갑니다. 문을 통하여 자기 집으로 들어가면 안전합니다. 이와 같이 문되신 예수님을 통하여 들어가면 안전합니다. 구약에는 도피성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사고로 살인을 했을 때 도피성으로 들어가면 복수하고자 하는 사람이 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고가 고의로 한 것이 아님이 입증되면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그 성에서 안전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나는 양의 문이라고 하신 것은 그를 통하여 들어가면 안전하게 보호를 받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좁은 문이 됩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한 문이 되시기 때문에 선한 목자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시기 때문에 선한 목자입니다(9-10).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가며 꼴을 얻으리라” 약속하셨습니다. 들어가며 나가며 꼴을 얻는다는 것은 자유롭고 안전한 생활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양된 우리 인생들에게 참된 양식을 주시되 풍성하게 주십니다. 이 세상에 양식이 될 만한 것들은 많이 있습니다. 양서는 마음의 양식이 됩니다. 월급은 우리에게 육신의 양식을 공급합니다. 그러나 썩을 양식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먹었던 양식은 만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침마다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셔서 광야 생활을 하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그들은 젖과 꿀을 양식으로 삼았습니다. 이는 바로 산 양식입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은혜가 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 속에 있는 생명의 씨를 가지는 것입니다. 말씀은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으므로 우리의 병든 영혼을 깨워 일으킬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주십니다. 우리는 말씀을 먹되 그 속에 있는 생명의 씨앗을 함께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는 창조적인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먹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씨를 통해 싹을 틔우고 열매를 생산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썩을 양식이 아니라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구해야 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일하는 것입니다. 그때 참 만족을 누리게 됩니다. 또 그 안에 풍성한 삶이 있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도적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목적으로 오지만 예수님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고 오셨습니다. 생명을 풍성히 얻게 한다는 것은 양이 시달리고 있는 병에서 구원을 얻도록 치료를 해주고 죄문제들을 회개하도록 돕는 것도 포함됩니다. 양은 배불리 먹고 양들 간에 생긴 긴장이 풀리고 병이 나음 받아야 잠을 제대로 잔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양들이 양적으로 뿐만 아니라 질적으로 차고 넘치는 삶을 살도록 하십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2).”
셋째, 예수님은 양들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리기 때문에 선한 목자이십니다(11-13). 선한 목자와 삯꾼 목자는 하는 일이 똑같기 때문에 별로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삯꾼 목자는 양치는 것을 직업으로 삼기 때문에 목적이 돈에 있습니다. 삯꾼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납니다. 그렇게 되면 이리는 양을 늑탈하고 헤치게 됩니다. 삯꾼 목자가 어려운 때에 양들을 돌보지 않기 때문에 양들은 다 흩어집니다. 양이 흩어지는 것은 사단의 공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과 같은 목자가 되는 것을 매우 아름답고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벽에 걸려 있는 양을 안고 있는 목자 예수님의 모습을 목자의 이미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아름다운 이미지 뒤에 있는 목자의 희생에 대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는 것은 예수님의 삶의 목적이 양을 돌보는데 있음을 말해 줍니다. 그의 인생의 목적은 자신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성취나 인격 완성이 아니었습니다. 전적으로 그의 양들을 돌보는 것이 삶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목숨을 양들을 위해서 버리기 까지 양들을 사랑하고 섬깁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목자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4-6).” 예수님께서 자기 목숨을 버린다는 뜻은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많은 사람을 살리실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자기 양들을 사랑하기 위해서 자기것을 조금도 꾸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정말 순수하게 양들을 돌보셨습니다. 선한 목자 예수님은 양을 치기 위해서 시간과 물질과 자존심을 버리셨습니다. 예수님은 말구유에 태어나셨고 일생 동안 죄인들의 친구로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양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팔아먹고 배반하는 양들을 위해서도 기꺼이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고 그 사랑을 체험했을 때는 매우 뜨겁습니다. 그래서 양들을 위해서 자기를 버리는 목자의 삶을 살고자 결단합니다. 우리는 성경 선생이 되고자 결단을 했습니다. 의미있는 삶을 살고 열매가 맺힙니다. 그러나 점차로 숨겨진 야심과 이기심이 고개를 들기 시작합니다. 영적인 분야에서 자기 사업을 찾기 시작합니다. 양치는 목적이 자기 영광을 구하고 순수한 동기가 사그러듭니다. 하나님의 역사보다 자신과 가정이 앞서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소감 쓰기나 섬기는 일들이 형식적이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영적인 위험을 감지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어떤 이상이나 정치 체제를 위해서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그는 죄로 인해서 잃어버린 바 된 자기 양들을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사 양들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릴 수 있도록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수고를 하지만 열매가 맺히지 않는 이유는 결국 양을 위해서 죽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양을 위해서 죽지는 못할지라도 태만과 불필요한 대화와 일, 오락, 세속적인 욕망을 부인하고 성실하고 책임성있는 목자는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양을 위해서 죽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목자가 된 것이 부담이 됩니다. 그러나 부활 신앙이 있으면 기꺼이 희생할 수 있습니다(17).
넷째로, 예수님은 자기 양을 아시기 때문에 선한 목자이십니다(3b, 14,15). 목자는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냅니다. 선한 목자는 자기 양을 알고 양도 그 목자를 아는 것이 아버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아시고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아시는 것과 같습니다. 이름은 그의 인격과 특징, 덕성, 단점 등 모든 것을 대표합니다. 그는 우리를 이해하시고 푸른 초창으로 인도하십니다. 목자의 자질은 양의 이름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한 목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양의 이름을 아는 데서 자라야 합니다. 양의 이름을 알기 위해서 소감을 나누고 개인적인 대화에 힘쓰고 함께 일하고 함께 놀고 마음으로 양을 알기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제가 일을 하면서도 목자님들과 개인적인 대화를 나누는데 힘쓰고자 방향을 잡게 되었습니다. 저는 메시지에서 수많은 말을 하는 것보다 일대일로 몇 마디 나누는 것이 더 효과적일 때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은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러해야 합니다. 우리가 일대일로 말씀을 공부하는 가운데 더욱 인격적으로 아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지요. 목자는 그의 양과 깊은 사랑의 관계성을 가진 사람입니다.
다섯째, 예수님은 양들에게 모범을 보이시기 때문에 선한 목자이십니다(4a,16). 선한 목자는 양의 우리에서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갑니다. 앞서 간다는 것은 본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목자는 양에게 나아갈 방향을 보여 주고 위험으로부터 양들을 보호해 줍니다. 양은 매우 겁이 많고 소심합니다. 그래서 목자의 손가락을 보는 것이 아니라 목자가 걸어가는 발을 보고 따라 갑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자기 양들을 가르칠 뿐만 아니라 본을 보이심으로 따라오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섬기는 종으로 오셨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우리 앞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는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을 인도하여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하십니다(16). 예수님은 세계 선교 면에서도 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완벽한 본을 보여 주었습니다.
여섯째, 예수님은 하나님의 좋은 양이셨기 때문에 선한 목자이셨습니다(14-18).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을 아시고 아버지께서 그를 아십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세상 죄를 위해서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목숨을 버릴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하기 위해 유월절 어린 양으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목숨을 버려서 하나님의 뜻을 섬기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좋은 양이심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좋은 양이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좋은 목자가 될 수 있는가 생각합니다. 답은 하나님께 좋은 양이 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우리의 양들에게 좋은 목자가 될 수 있습니다.
III.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19-42)
예수님께서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하시자 유대인 중에서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저가 귀신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은 귀신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 귀신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고 하였습니다.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서 다니시니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위협하면서 물었습니다.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케 하려나이까? 그리스도여든 밝히 말하시오(24).”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이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어늘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의 문제는 지적인데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마음으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에 대해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30)”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돌을 들어 치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어떤 일로 나를 치려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신성 모독으로 인하여 돌로 치려 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시82:6절을 기초로 율법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어찌 참람하다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구약에서는 재판관이나 왕과 같은 지도자들을 신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일을 행하셨습니다. 그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가 행하는 일들은 믿어야 합니다. 그때 아버지께서 예수님 안에 계시고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게 됩니다. 그들은 다시 예수님을 잡고자 하였으나 그 손에서 벗어나 나가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증거들을 충분히 제시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존심 때문에 믿지 않았습니다.
결론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양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불행합니다. 겉으로 볼 때 이 세상은 도적과 강도만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목자가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양으로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를 따라야 합니다. 그때 그는 우리를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시며 우리도 양들에게 성실하고 책임성 있는 목자가 되기까지 성장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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