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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요15강(9:1-41). 눈을 뜨게 하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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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섬김이
댓글 0건 조회 2,849회 작성일 03-02-03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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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요한복음 15 강                                                         
말씀 / 요한복음 9:1-41
요절 / 요한복음 9:5

눈을 뜨게 하신 예수님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오늘 말씀에는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고치시는 예수님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으로서 모든 어두움을 물리치고 생명의 빛으로 충만하게 하십니다. 우리 마음에 빛이 비취일 때 운명주의와 불신과 슬픈 생각이 물러갑니다. 대신에 분명한 인생 방향과 할 일이 보입니다. 그리고 기쁨과 능력으로 충만해 집니다. 비록 어려운 상황이 개선되지 않을지라도 상황을 보는 관점이 달라지게 되면 우리는 어두움에서 나와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환경이 안되어도 우리는 현재 있는 재료에다가 믿음과 심정을 이겨서 일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이번 여름 수양회를 어떠한 자세로 섬겨야 하는지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I.            침으로 진흙을 이겨 일하시는 예수님(1-12)

 예수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셨습니다. 그는 날 때부터 소경으로 태어난 것도 억울하고 분한데 나이가 먹자 거지로 생계를 유지하였습니다. 그는 본다는 개념이 없었습니다. 처음에 그는 사람들이 다 자기와 같은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무지개 빛이 아름답다느니, 장미 꽃이 정열적이라느니 파란 하늘이 높다느니 하는 말들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나무를 본 적도 없고 자기의 얼굴도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빛 속에서 모든 만물들이 그 자태를 뽐낸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더군다나 그는 일생 동안 길가에 다 찢어진 담요와 겉옷을 깔고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구걸을 해야 했습니다. “한푼 줍쇼, 한푼 줍쇼.” 하며 구걸하는 그를 보고 사람들은 동전 몇 닢을 넣어 주었습니다. 제자들은 평소와 달리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돕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들의 형편을 볼 때 자기 연민이 생기고, 분개하는 마음이 들고 체념의 감정이 들어왔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은 우울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2)” 제자들은 인과응보적인 사고 방식에 젖어서 이 사람의 불행의 원인을 그 사람이나 부모의 죄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죄라고 하면 태어나기 전에 그가 무슨 죄를 지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 부모의 죄라면 그는 일생 동안 부모님을 원망하며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하나님께 대한 불신과 원망으로 가득 찬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돛을 옳게 달면 배가 바람을 타고 빨리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지만, 반대로 돛을 옳게 달지 못하면 바람이 배를 몰아 반대 방향으로 가게 하는 것과 똑같이 고난을 당할 때도 그 고난이 얼마나 맹렬하냐에 따라서가 아니라 그 고난에 대한 우리의 자세에 따라 더 많은 것들이 결정됩니다. 고난을 당하는 사람이 어떠한 자세를 취하든 그 자세는 평온한 때에 형성되어 문제가 올 때도 흔들리지 않는 각 개인의 믿음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들어갔다가 나온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은 무신론자가 되어 하나님을 대적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좋은 믿음의 사람이 되어 고난 당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위로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시는 증거로서 인간에게 있는 고난을 제거하는 것이라는 사상은 성경에 없습니다. 도리어 고난 가운데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한 사람들의 믿음이 성경에서 강력하게 증거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고난을 함께 느끼십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4:15).”

 제자들은 날 때부터 소경으로 태어난 사람의 고난이 누구의 죄 때문인가 하며 신학적인 논쟁을 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그들은 운명주의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마음이 어두워서 아무 일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슬프고 무기력했습니다. 성경은 아담의 죄로 인해서 이 세상에 질병과 저주와 죽음이 왔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질병이나 어려움이 죄로 말미암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은 애매하게 노예로 애굽에 팔려 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도자로 쓰시기 위해서 노예 생활, 감옥 생활을 하게 하셨고 억울한 누명도 쓰게 하셨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요셉과 항상 함께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삼층천을 보는 영적 체험을 하고 나서 너무 자고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질병을 주셨습니다(고후12:7). 욥의 경우는 하나님을 분명하게 알도록 하기 위해서 질병을 주셨습니다(욥42:5,6).

 우리 가운데도 많은 사람들이 슬프고 운명적인 환경에서 태어납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외모, 이해 받지 못하는 슬픔, 이혼한 부모님으로 인한 슬픔과 복잡한 집안 문제, 호전되지 않는 질병등 여러 모양의 인간 조건으로 인해서 고통합니다. 이로 인해 운명적이고 무기력하게 누구의 죄인가 따지고 있을 때 예수님은 어떤 관점을 가지고 문제를 보십니까?

 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예수님은 누구의 죄인지는 말씀하지 않고 단지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에게 고난은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기회였고, 억지로 감당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는 재료였습니다.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신다는 말씀을 볼 때 예수님에게는 어두운 면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매우 밝고 긍정적이셨습니다. 예수님은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적으로 운명적인 상황에서도 적극적으로 일을 하고자 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의 생애에 두신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믿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살리고 온전케 하는 일을 하고자 하십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문둥병자를 깨끗하게 하고 저는 자들을 온전히 걷게 하는 것은 메시야의 사역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떻게 지금 일을 할 수 있는지 말씀하십니다. 4절을 보십시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제자들이 날 때부터 소경된 거지를 보고 일 할 수 없었던 것은 어려운 환경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에 빛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어두운 제자들의 눈에는 할 일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어둡기 때문에 그냥 누워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눈에는 할 일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어떻게 일해야 하는지 아셨습니다. 예수님께는 지금 신학적으로 따질 시간이 없었습니다. 사실 이론적으로 따지기만 하는 사람들이 실제적으로 일은 잘 하지 않습니다. 일을 하는 사람들은 믿음과 심정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고 하시면서 제자들이 빛되신 예수님을 믿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마음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밝아질 때 그들은 일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일을 해야 하는지를 제자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6,7절을 보십시오.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예수님이 그를 치료하고자 할 때 어떤 의료 장비도 없었습니다. 거즈나 일회용 반창고도 없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예수님은 땅에서 한 움큼의 흙을 움켜잡으시고 그 위에 침을 뱉으셨습니다. 한 번으로 안되니까 여러 번 뱉으셨습니다. 아마 그것도 부족하니 제자들에게 “애들아 뱉어”라고 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잘 이겨서 소경의 눈에 바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소경의 눈에 바르신 진흙은 그냥 진흙이 아니었습니다. 거기에는 예수님의 믿음과 목자의 심정이 담겨 있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불가능이 없었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말씀 만으로도 그를 고치실 수 있었습니다. “내가 원하노니 눈을 뜨라”,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만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하는지 시청각 교육을 하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불가능에 도전하는 믿음의 사람들이요 꿈을 이루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침을 뱉으실 때 소경은 “나를 모욕하는가?” “나를 조롱하는가?”라며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원래 자기 문제가 있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반응에 민감합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께서 자기 눈에 진흙을 붙여 주시고 나서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성전에서 실로암까지 약 2Km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불평 한 마디 하지 않고 거기 까지 가서 몸을 푹 담그고 눈을 씻었습니다. 그는 단순하게 순종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에 간절하고도 신실한 마음으로 순종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눈을 뜰 수 있다는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믿음으로 순종했을 때 육적인 눈뿐만 아니라 영적인 눈까지 뜨게 되었습니다. 그의 순종은 나아만 장군의 순종과 비교해 볼 매우 단순하였습니다. 순종하는 데는 군말이 필요 없습니다. 그가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푸른 하늘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연못에 자기 얼굴을 비추어 보았습니다. 그의 입에서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터져 나왔습니다. “오 나의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운명을 극복하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하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나를 어두움 속에 몰아 넣었던 운명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엄청난 일을 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부조리하고 어두운 세상을 확 바꾸어 놓을 엄청난 일을 해야 나를 얽어매고 있는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날 것 같은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무능력한 자신으로 인해 더욱 운명적인 생각에 빠져 버립니다. 그러나 우리가 운명을 극복하기 위해서 엄청난 일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처럼 믿음으로 진흙을 이기는 일을 하면 됩니다.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진흙은 다 있습니다. 믿음으로 하고자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일이 한가지 이상씩 반드시 있습니다. 사도행전 16장을 보면 사도 바울은 유럽 선교의 비젼 가운데 빌립보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곳은 회당이 없어 안식일에 예배는커녕 기도할 곳도 없는 척박한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런 환경 가운데서 낙망하거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진흙을 이기는 작업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강가에 가서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강가 빨래터에서 빨래하는 아낙네들에게 복음을 증거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자주 장사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 바울의 복음을 듣게 하셨습니다. 바로 이 여인의 가정이 빌립보 교회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그가 눈을 뜨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이웃 사람들과 및 전에 저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의 의견이 나뉘어졌습니다.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혹은 그 사람이라 하며 혹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아마 그 형제인 모양이다” 하면서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사람들은 눈을 감고 있던 그가 반짝이는 눈으로 응시할 때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제 말은 “내가 그로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과거에 소경 거지였다는 것을 덮어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은혜를 드러내기 위해서 과거의 자신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나 같은 자에게 임하신 주님의 크신 은혜와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는 자신의 과거를 인정하고 드러냈습니다.

 영적으로 말해서 모든 사람들은 죄로 인해서 날 때부터 소경으로 태어났습니다. 비록 사람들이 빛과 본다는 것에 대해서 듣고 있지만 이러한 개념을 잡지 못합니다. 그들은 본다는 것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공부하지 않는 한 빛의 존재에 대해서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어두움 가운데서 사는 것이 정상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이나 정욕이나 세상 쾌락에 또 겉으로 볼 때 굉장해 보이는 과학에 눈이 멀어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더 어두움에 잡혀 있습니다. 그들은 실로암에 가서 눈을 씻어야 합니다. 그들의 죄, 편견, 교만, 무지를 씻어낼 때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빛에 의해서 펼쳐지는 아름다운 세계를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영적인 실로암으로서 우리는 그에게 가서 영적 눈을 떠야 하겠습니다.

II.            한 가지 아는 것(13-41)

 이웃 사람들은 전에 소경되었던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갔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 어떻게 보게 된 것을 물었습니다. 그는 “그 사람이 진흙을 내 눈에 바르매 내가 씻고 보나이다”라고 담담하게 증거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혹은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서 온 자가 아니라 하며 혹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피차 쟁론이 되었습니다. 이에 그들은 다시 물었습니다.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그러자 그는 선지자라고 대답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의 말과 소경으로 있다가 보게 된 사실을 믿지 아니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기 싫었습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사실을 인정하면 그리스도로 고백해야 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불신을 드러내야 하는 것이 부담스러웠습니다. 그들은 시기심과 교만으로 영적인 소경이 되었습니다. 그들 안에 예수님의 빛이 거하지 않기 때문에 어두움에 거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당사자의 말과 이루어진 사실을 믿지 않고 그 부모를 불러 물었습니다. “이는 너희 말에 소경으로 났다 하는 너희 아들이냐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되어 보느냐” 그 부모는 이가 우리 아들인 것과 소경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그러나 “지금 어떻게 되어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저에게 물어 보시오 저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라고 말하며 발뺌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바리새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무서워했습니다. 출교를 당하면 2m이내의 접근이 금지되고 죽었을 때는 애곡하는 것도 금지 됩니다. 출교를 당한 사람은 사회에서 완전히 매장을 당합니다. 그러므로 부모는 계속해서 두려워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유대인들은 소경되었던 사람을 두 번째 불러 ‘너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 우리는 저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고 윽박질렀습니다. 이에 대한 그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25절을 보십시오.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그는 자기가 받은 바 한가지 은혜를 붙잡았습니다. 이는 그가 체험한 사실이었습니다. 내가 소경으로 있었는데 지금은 봅니다. 그가 주님께로부터 받은 한 가지를 분명하게 붙잡았을 때에 핍박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 소외, 고독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이를 볼 때 한가지 은혜를 붙잡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보게 됩니다. 우리가 한 말씀을 붙잡을 때 변화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또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서는 한 사람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는 가장 강력한 숫자입니다. 월드컵에서 승리도 한 골로 결정납니다. 그가 한 가지 아는 것을 분명하게 했을 때 비난하는 사람들의 입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더 나아가 그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도록 바리새인들을 권면하였습니다.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28)” 그들은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사납게 욕질을 했습니다. 그는 차분하게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이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창세 이후로 소경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29-32).” 이는 삼척 동자라도 다 아는 사실입니다.

 소경되었던 사람이 믿음의 중심을 지킴으로 인해 그는 출교를 당하였습니다. 그는 안정된 직장을 잃어버렸습니다. 주님께 받은 은혜가 컸지만 믿음이 어린 그가 당해야 하는 어려움도 컸습니다. 그는 새로운 운명주의에 빠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선한 목자 예수님은 그가 쫓겨 났다는 말을 들으시고 그를 찾아가 만나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인자를 믿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는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예수님은 그에게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그러자 그는 “주여 내가 믿나이다”하고 경배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어려움을 당한 그에게 인간적인 도움을 주기보다 믿음을 분명히 하도록 도와 주셨습니다.  그는 11절에서는 예수님을 한 사람으로, 17절에서는 선지자로, 31절에서는 경건하여 그 뜻대로 행하는 자로 고백하다가 이제는 주로 고백하고 경배하였습니다. 그의 영적인 눈이 점점 밝아져 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어려운 가운데서도 믿음이 더욱 강해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교만하여 본다고 하는 자들은 보지 못하게 하시고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였습니다. 소경은 예수님을 봄으로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는 뛰어난 신학적 지식이나 철학적 사고는 없었지만 한 가지 아는 것을 기초로 예수님께 대한 풍성한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사람들은 영적인 소경으로 태어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빛을 받고 하나님의 선한 섭리에 기초해서 우리 인생을 보아야 합니다. 양들이나 내가 당하는 고난을 보아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이런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기회를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일대일의 진흙과 기도의 침에 다가 믿음과 심정을 이겨서 눈먼 지성인들의 눈을 뜨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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