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요14강(8:21-59)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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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요한복음 제14강 말씀 / 요한복음 8:21-59
요절 / 요한복음 8:31,32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우리는 생명 다음으로 귀중한 진리와 자유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이를 올바로 누리도록 진리를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면 하나님께 매이지 않을까 염려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 매이지 않으면 사람이나 돈이나 욕심 등 다른 것에 매이게 됩니다. 우리가 진리의 말씀에 순종할 때 참 제자가 되고,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가를 알게 됩니다. 정치적인 자유, 종교적인 자유, 언론 출판의 자유, 공포로부터의 자유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죄로부터의 자유가 더욱 중요합니다. 사람이 죄사함을 받고 죄로부터 자유하게 된다면 그 어디나 하늘 나라입니다. 이 시간 주님께서 제자로 살고자 하는 저희들에게 한 말씀을 깊이 허락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I. 죄 가운데서 죽지 말아야 합니다(21-30)
예수님은 간음 중에 잡힌 여자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생명의 빛되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거룩하게 사는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끊임없이 공격했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가 자결하려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어디에 강조를 두고 말씀하시는 지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다”고 하시며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셨습니다. “너희가 만일 내가 그 인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아담이 타락한 이후에 태어난 우리는 죄와 허물로 죽은 자들이었습니다(엡 2:1). 죄 가운데서 태어나서 죄로 인해서 고통하다가 죽어야 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죽음 이후에는 불과 유황으로 타는 불못에서 영원히 고통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죄 가운데 사는 인간의 비참함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구원자를 이 세상에 보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라(요3:16).”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면 자기의 죄 가운데서 죽어야 합니다. 죄와 그 형벌에서 구원받는 길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말하여 온 자이십니다. 그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순수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시고 또 자기 말보다 하나님께 가르침을 받은 대로 말씀하시며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분인 것을 알고 많은 사람이 믿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고 하나님 나라에 가야 합니다.
II. 참 제자가 되는 길(31-59)
예수님은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31,32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몇 가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 중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가운데 몇몇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따랐지만 온전히 헌신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로 인해서 흡족하지 않았기 때문에 도전하셨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고자 하면 예수님께 분명히 헌신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열매 없는 삶을 살게 되고 유혹에 쉽게 넘어지게 됩니다. 실제적인 행동이 없이 머리로만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끝까지 따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믿는 유대인들에게 참 제자가 되도록 도전하셨습니다.
둘째,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말씀을 듣는다고 해서 말씀 안에 거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한다는 것은 집을 짓고 그 속에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들을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을 마음에 심어야 합니다. 말씀을 마음에 심기 위해서 일대일로 성경을 공부하고 소감을 씁니다. 소감을 쓰는 것은 머리와 마음에 말씀을 새기는 작업입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가 한 말씀에 순종을 할 때 우리 몸에 그 말씀이 거하게 됩니다. 바리새인들은 말씀을 많이 공부하고 암송까지 했지만 말씀이 마음에 거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외식을 하고 거짓말을 하고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골 2:6,7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 성장하려면 예수님의 말씀 안에 거해야 합니다. 제자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거짓 제자가 있고 참 제자가 있습니다. 정말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자 한다면 그 말씀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 나라는 유교 사상에 뿌리가 깊어서 그 속에서 살았습니다. 우리의 선비들은 새벽 4시에 일어나서 밤 10시까지 무릎을 꿇거나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몸을 앞뒤로 흔들면서 50만 단어나 되는 공자의 책들을 암송했습니다. 공자의 가르침은 국가와 사회와 가정의 규범이 되었습니다. 조선은 600년 동안 공자의 가르침대로 살고자 노력했습니다. 공자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맹목적인 순종을 가르쳤습니다. 신하는 왕에게, 자식은 부모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후배는 선배에게 일방적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그 결과 우리 사회는 권위주의가 득세하게 되었습니다. 형식주의, 외식이 난무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나라는 개방과 6.25 동란을 겪으면서 유교의 가르침이 무너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많은 교회가 세워지고 신자는 천만을 넘어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 제자가 적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함으로 참 제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말씀 안에 거한다는 말을 NIV 영어성경에서는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Jesus said, If you hold to my teaching, you are really my disciples.” 말씀을 붙잡는 생활은 우리로 시대 사조에 흔들리지 않게 합니다. 전철을 타고 갈 때 손잡이를 붙잡지 않으면 이리 흔들 저리 흔들하며 심하면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손잡이를 잡으면 안정감을 찾게 됩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을 때 우리는 세상 풍조에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붙잡기 위해서 소감을 씁니다. 쓰는 것은 듣는 것보다 몇배의 사고력과 집중력을 필요로 하며 생각을 구체화하고 오래 기억하도록 해 주기 때문에 말씀 안에 거하게 해 줍니다. 어떤 목자님은 일용할 양식을 쓰고 나서 한 말씀을 암송하며 하루를 지냈을 때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소감을 쓰면서 말씀을 묵상하고 한 말씀을 붙잡으면 주님과 바른 관계를 맺게 되고 기쁨이 생기고 방향이 생깁니다. 그리고 생각들이 정리가 됩니다. 우리가 말씀을 붙잡을 때 시대 풍조에 밀려 떠내려 가지 않게 됩니다. 히 2:1절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 혹 흘러 떠내려 갈까 염려하노라.” 우리는 제자 양성을 위해서 많은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 안에 거하면 제자로 성장하게 된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목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있고 분명하게 심어야 합니다. 제자 양성에서 말씀을 심지 않는 프로그램이나 노력은 헛된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가르치기를 힘써야 합니다. 실제로 꾸준하게 믿음이 성장하는 분들을 보면 그 안에 말씀이 살아 있습니다. 말씀이 풍성하기 때문에 부딪치는 문제들을 영적으로 풀어갑니다. 말씀을 붙잡고 선택을 합니다. 우리가 사실 말씀을 붙잡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너무나 재미있는 것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고백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우리가 월드컵 기간이든, 방학 기간이든, 일을 하든 언제라도 말씀을 붙잡는 투쟁에 힘쓰는 가운데 시절을 좇아서 과실을 맺으며 번성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산 예를 아브라함에게서 발견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75세의 늙은 나이에 신앙 생활을 시작하면서 한 말씀을 받았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창12:2).” 여태까지 아기가 없는 그가 이 말씀을 붙잡고 산다는 것은 정말로 어리석게 보입니다. 그러나 그는 위대한 어리석음을 가졌습니다. 그는 이 한 말씀을 줄기차게 붙잡았습니다. 히 11:9절은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아브라함이 한 말씀을 붙잡고 살았을 때 큰 민족을 이루고 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오 천명을 배가 부르도록 먹이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휴양회를 갖고자 하는데 까지 따라왔습니다. 예수님의 휴양회는 취소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정말로 그들에게 생명의 양식을 주기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20명씩, 열명씩, 다섯명씩, 두 명씩, 한 명씩 떠나더니 결국 제자들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상황에 너무나 잘 흔들렸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그러나 시몬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어디로 가오리이까?” 베드로는 영생의 말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막14:28).” 예수님과 제자들은 십자가 사건을 경험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난 후에 부활하시고 다시 사실 것을 믿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 말씀을 붙잡음으로 제자가 되었습니다. 현재 여러분이 붙잡고 있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셋째,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진리를 안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공자는 “내가 아침에 도를 깨우치면 저녁에 죽어도 한이 없겠다”고 했습니다. 키엘케고르는 “진리, 그것을 위해 살 수 있고 또 그것을 위해 죽을 수 있는 확실한 진리를 알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진리란 무엇입니까? 진리의 속성은 참되고 영원불변하며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 것입니다. 또한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가치 있는 보편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세상 어디에 그런 진리가 있습니까? 세상 모든 철학과 사상은 유한한 사람에게서 나왔기 때문에 상대적이고 가변적입니다. 세상 모든 것들은 썩고 쇠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 절대 진리란 절대로 없다는 회의주의에 빠져 절망합니다. 슈바이처는 현 세대를 가르쳐 “회의의 나무에서 진리의 열매를 따려는 세대”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불가능합니다. 회의의 나무에서는 회의의 열매만 딸 수 있고 진리라는 열매는 진리의 나무에서만 딸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그 말씀은 진리입니다. 벧전 1:24,25절에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고 하였습니다. 천지는 없어질지라도 예수님의 말씀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히13:8).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하나님께로 가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들은 것을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14:6).” 예수님의 말씀 안에 거할 때 진리를 알 수 있습니다. 말씀 안에 거할 때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알게 되고 인생의 진정한 가치와 행복을 알게 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사랑과 참되심을 알게 되고 영생을 얻으며 하나님 나라에 이르는 길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진리를 알게 될 때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합니다. 사람들은 자유를 갈망하며 자유로운 삶을 살기 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무의 간섭도 받지 않고 자기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을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참된 자유는 진리 안에서만 누릴 수 있습니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는 자유를 누릴 수 없는 것 같이 사람도 진리를 떠나서는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라고 하였습니다(고후 13:8). 사람이 진리의 말씀을 좇아 사는 것이 얽매이는 것 같이 생각되어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 떠나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여러분들이 저보다 더 잘 아시기 때문에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한 목자님이 일용할 양식을 먹지 않고 얼마나 살 수 있을까 실험을 했습니다. 그는 처음 몇 일은 살 것 같았습니다. 자유인과 같이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6주째가 되면서 마음에 말씀이 없자 죄의 소욕이 끓어 오르는 것을 견디기 힘들어 하였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큰 죄를 범할 것 같은 두려움이 들어 회개하고 말씀 안에 거하는 생활을 기쁨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진리의 말씀을 떠나면 자유로울 것 같지만 다른 것에 얽매이게 됩니다. 요즈음 어떤 분들은 월드컵에 매여 있습니다. 그래서 눈을 감았다 하면 축구 공이 왔다 갔다 하고 조용한 가운데 있으면 “대 ∼한민국” 소리가 귀에 쟁쟁거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실 때 축복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월드컵 경기를 보는 것에서도 자유할 수 있어야 합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어린 양을 먹이라”는 말씀을 붙잡고 양들을 여름 수양회에 힘써 초청하기를 기도합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33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그들의 역사를 볼 때 이집트, 바벨론, 바사, 헬라, 로마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마음으로는 결코 굴복한 적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긍지와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예수님은 그들이 죄의 종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어떻게 해야 자유하게 될 수 있습니까? 36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예수님 자신이 진리이므로 예수님께서 그들을 자유케 할 때 참으로 자유할 수 있습니다. 노예는 자기 힘으로 자유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속전을 내야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그 속전을 일전도 남김없이 다 치루셨습니다.
35-47절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 속에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아브라함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로 구분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37절을 보십시오.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예수님은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을 인정하셨습니다. 그들은 육신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은 아브라함과 같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매우 겸손하였고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떠났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했을 때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 순종함으로 하나님을 감동시켰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 안에는 말씀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교만한 생각과 반발심을 다스릴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불신과 불순종의 노예들이었습니다. 그들 속에 진리가 없기 때문에 거짓을 말하고 진리를 말하는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을 경외함으로 순종하는 자들입니다.
마음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그들은 마귀의 자식들이었습니다. 42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 나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 그들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께로 나지 않고 마귀에게서 났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욕심대로 행하는 마귀의 자녀였습니다. 마귀는 거짓말쟁이요, 살인자입니다. 마귀는 진리가 그 속에 없기 때문에 하는 말을 종합해 보면 모두 거짓말입니다(44). 그러나 예수님은 진리의 근원이심으로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47).
그러자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사마리아 사람이다, 또는 귀신들렸다”하며 예수님을 무시했습니다(48,49). 이런 모욕을 참는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를 참으실 수 있었던 것은 사람의 인정보다 하나님의 인정을 바라고, 하나님께 모든 판단을 맡기셨기 때문입니다(50). 예수님은 대적하는 그들을 포기할 수 밖에 없지만 포기치 아니하시고 영생에로 초대하셨습니다. 51절을 보십시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 사단은 말씀을 빼앗아 가고자 갖은 수단을 다 쓰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영생합니다. 영적인 투쟁은 말씀을 붙잡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안에 거하면 참 제자가 되고 그 말씀은 우리로 자유하게 합니다. 우리가 말씀 안에 거하면서 여름 수양회를 준비하고 또 말씀을 심는 수양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또 우리의 성경 공부를 통해서 많은 젊은이들이 죄에서 자유함을 얻고 제자로 자라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진리를 알고 자유를 누리며 제자의 삶을 살게 하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요절 / 요한복음 8:31,32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우리는 생명 다음으로 귀중한 진리와 자유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이를 올바로 누리도록 진리를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면 하나님께 매이지 않을까 염려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 매이지 않으면 사람이나 돈이나 욕심 등 다른 것에 매이게 됩니다. 우리가 진리의 말씀에 순종할 때 참 제자가 되고,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가를 알게 됩니다. 정치적인 자유, 종교적인 자유, 언론 출판의 자유, 공포로부터의 자유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죄로부터의 자유가 더욱 중요합니다. 사람이 죄사함을 받고 죄로부터 자유하게 된다면 그 어디나 하늘 나라입니다. 이 시간 주님께서 제자로 살고자 하는 저희들에게 한 말씀을 깊이 허락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I. 죄 가운데서 죽지 말아야 합니다(21-30)
예수님은 간음 중에 잡힌 여자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생명의 빛되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거룩하게 사는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끊임없이 공격했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가 자결하려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어디에 강조를 두고 말씀하시는 지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다”고 하시며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셨습니다. “너희가 만일 내가 그 인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아담이 타락한 이후에 태어난 우리는 죄와 허물로 죽은 자들이었습니다(엡 2:1). 죄 가운데서 태어나서 죄로 인해서 고통하다가 죽어야 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죽음 이후에는 불과 유황으로 타는 불못에서 영원히 고통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죄 가운데 사는 인간의 비참함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구원자를 이 세상에 보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라(요3:16).”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면 자기의 죄 가운데서 죽어야 합니다. 죄와 그 형벌에서 구원받는 길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말하여 온 자이십니다. 그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순수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시고 또 자기 말보다 하나님께 가르침을 받은 대로 말씀하시며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분인 것을 알고 많은 사람이 믿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고 하나님 나라에 가야 합니다.
II. 참 제자가 되는 길(31-59)
예수님은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31,32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몇 가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 중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가운데 몇몇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따랐지만 온전히 헌신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로 인해서 흡족하지 않았기 때문에 도전하셨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고자 하면 예수님께 분명히 헌신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열매 없는 삶을 살게 되고 유혹에 쉽게 넘어지게 됩니다. 실제적인 행동이 없이 머리로만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끝까지 따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믿는 유대인들에게 참 제자가 되도록 도전하셨습니다.
둘째,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말씀을 듣는다고 해서 말씀 안에 거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한다는 것은 집을 짓고 그 속에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들을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을 마음에 심어야 합니다. 말씀을 마음에 심기 위해서 일대일로 성경을 공부하고 소감을 씁니다. 소감을 쓰는 것은 머리와 마음에 말씀을 새기는 작업입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가 한 말씀에 순종을 할 때 우리 몸에 그 말씀이 거하게 됩니다. 바리새인들은 말씀을 많이 공부하고 암송까지 했지만 말씀이 마음에 거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외식을 하고 거짓말을 하고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골 2:6,7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 성장하려면 예수님의 말씀 안에 거해야 합니다. 제자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거짓 제자가 있고 참 제자가 있습니다. 정말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자 한다면 그 말씀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 나라는 유교 사상에 뿌리가 깊어서 그 속에서 살았습니다. 우리의 선비들은 새벽 4시에 일어나서 밤 10시까지 무릎을 꿇거나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몸을 앞뒤로 흔들면서 50만 단어나 되는 공자의 책들을 암송했습니다. 공자의 가르침은 국가와 사회와 가정의 규범이 되었습니다. 조선은 600년 동안 공자의 가르침대로 살고자 노력했습니다. 공자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맹목적인 순종을 가르쳤습니다. 신하는 왕에게, 자식은 부모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후배는 선배에게 일방적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그 결과 우리 사회는 권위주의가 득세하게 되었습니다. 형식주의, 외식이 난무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나라는 개방과 6.25 동란을 겪으면서 유교의 가르침이 무너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많은 교회가 세워지고 신자는 천만을 넘어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 제자가 적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함으로 참 제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말씀 안에 거한다는 말을 NIV 영어성경에서는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Jesus said, If you hold to my teaching, you are really my disciples.” 말씀을 붙잡는 생활은 우리로 시대 사조에 흔들리지 않게 합니다. 전철을 타고 갈 때 손잡이를 붙잡지 않으면 이리 흔들 저리 흔들하며 심하면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손잡이를 잡으면 안정감을 찾게 됩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을 때 우리는 세상 풍조에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붙잡기 위해서 소감을 씁니다. 쓰는 것은 듣는 것보다 몇배의 사고력과 집중력을 필요로 하며 생각을 구체화하고 오래 기억하도록 해 주기 때문에 말씀 안에 거하게 해 줍니다. 어떤 목자님은 일용할 양식을 쓰고 나서 한 말씀을 암송하며 하루를 지냈을 때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소감을 쓰면서 말씀을 묵상하고 한 말씀을 붙잡으면 주님과 바른 관계를 맺게 되고 기쁨이 생기고 방향이 생깁니다. 그리고 생각들이 정리가 됩니다. 우리가 말씀을 붙잡을 때 시대 풍조에 밀려 떠내려 가지 않게 됩니다. 히 2:1절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 혹 흘러 떠내려 갈까 염려하노라.” 우리는 제자 양성을 위해서 많은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 안에 거하면 제자로 성장하게 된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목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있고 분명하게 심어야 합니다. 제자 양성에서 말씀을 심지 않는 프로그램이나 노력은 헛된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가르치기를 힘써야 합니다. 실제로 꾸준하게 믿음이 성장하는 분들을 보면 그 안에 말씀이 살아 있습니다. 말씀이 풍성하기 때문에 부딪치는 문제들을 영적으로 풀어갑니다. 말씀을 붙잡고 선택을 합니다. 우리가 사실 말씀을 붙잡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너무나 재미있는 것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고백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우리가 월드컵 기간이든, 방학 기간이든, 일을 하든 언제라도 말씀을 붙잡는 투쟁에 힘쓰는 가운데 시절을 좇아서 과실을 맺으며 번성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산 예를 아브라함에게서 발견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75세의 늙은 나이에 신앙 생활을 시작하면서 한 말씀을 받았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창12:2).” 여태까지 아기가 없는 그가 이 말씀을 붙잡고 산다는 것은 정말로 어리석게 보입니다. 그러나 그는 위대한 어리석음을 가졌습니다. 그는 이 한 말씀을 줄기차게 붙잡았습니다. 히 11:9절은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아브라함이 한 말씀을 붙잡고 살았을 때 큰 민족을 이루고 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오 천명을 배가 부르도록 먹이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휴양회를 갖고자 하는데 까지 따라왔습니다. 예수님의 휴양회는 취소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정말로 그들에게 생명의 양식을 주기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20명씩, 열명씩, 다섯명씩, 두 명씩, 한 명씩 떠나더니 결국 제자들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상황에 너무나 잘 흔들렸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그러나 시몬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어디로 가오리이까?” 베드로는 영생의 말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막14:28).” 예수님과 제자들은 십자가 사건을 경험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난 후에 부활하시고 다시 사실 것을 믿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 말씀을 붙잡음으로 제자가 되었습니다. 현재 여러분이 붙잡고 있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셋째,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진리를 안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공자는 “내가 아침에 도를 깨우치면 저녁에 죽어도 한이 없겠다”고 했습니다. 키엘케고르는 “진리, 그것을 위해 살 수 있고 또 그것을 위해 죽을 수 있는 확실한 진리를 알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진리란 무엇입니까? 진리의 속성은 참되고 영원불변하며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 것입니다. 또한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가치 있는 보편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세상 어디에 그런 진리가 있습니까? 세상 모든 철학과 사상은 유한한 사람에게서 나왔기 때문에 상대적이고 가변적입니다. 세상 모든 것들은 썩고 쇠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 절대 진리란 절대로 없다는 회의주의에 빠져 절망합니다. 슈바이처는 현 세대를 가르쳐 “회의의 나무에서 진리의 열매를 따려는 세대”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불가능합니다. 회의의 나무에서는 회의의 열매만 딸 수 있고 진리라는 열매는 진리의 나무에서만 딸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그 말씀은 진리입니다. 벧전 1:24,25절에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고 하였습니다. 천지는 없어질지라도 예수님의 말씀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히13:8).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하나님께로 가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들은 것을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14:6).” 예수님의 말씀 안에 거할 때 진리를 알 수 있습니다. 말씀 안에 거할 때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알게 되고 인생의 진정한 가치와 행복을 알게 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사랑과 참되심을 알게 되고 영생을 얻으며 하나님 나라에 이르는 길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진리를 알게 될 때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합니다. 사람들은 자유를 갈망하며 자유로운 삶을 살기 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무의 간섭도 받지 않고 자기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을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참된 자유는 진리 안에서만 누릴 수 있습니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는 자유를 누릴 수 없는 것 같이 사람도 진리를 떠나서는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라고 하였습니다(고후 13:8). 사람이 진리의 말씀을 좇아 사는 것이 얽매이는 것 같이 생각되어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 떠나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여러분들이 저보다 더 잘 아시기 때문에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한 목자님이 일용할 양식을 먹지 않고 얼마나 살 수 있을까 실험을 했습니다. 그는 처음 몇 일은 살 것 같았습니다. 자유인과 같이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6주째가 되면서 마음에 말씀이 없자 죄의 소욕이 끓어 오르는 것을 견디기 힘들어 하였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큰 죄를 범할 것 같은 두려움이 들어 회개하고 말씀 안에 거하는 생활을 기쁨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진리의 말씀을 떠나면 자유로울 것 같지만 다른 것에 얽매이게 됩니다. 요즈음 어떤 분들은 월드컵에 매여 있습니다. 그래서 눈을 감았다 하면 축구 공이 왔다 갔다 하고 조용한 가운데 있으면 “대 ∼한민국” 소리가 귀에 쟁쟁거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실 때 축복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월드컵 경기를 보는 것에서도 자유할 수 있어야 합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어린 양을 먹이라”는 말씀을 붙잡고 양들을 여름 수양회에 힘써 초청하기를 기도합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33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그들의 역사를 볼 때 이집트, 바벨론, 바사, 헬라, 로마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마음으로는 결코 굴복한 적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긍지와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예수님은 그들이 죄의 종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어떻게 해야 자유하게 될 수 있습니까? 36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예수님 자신이 진리이므로 예수님께서 그들을 자유케 할 때 참으로 자유할 수 있습니다. 노예는 자기 힘으로 자유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속전을 내야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그 속전을 일전도 남김없이 다 치루셨습니다.
35-47절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 속에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아브라함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로 구분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37절을 보십시오.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예수님은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을 인정하셨습니다. 그들은 육신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은 아브라함과 같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매우 겸손하였고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떠났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했을 때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 순종함으로 하나님을 감동시켰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 안에는 말씀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교만한 생각과 반발심을 다스릴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불신과 불순종의 노예들이었습니다. 그들 속에 진리가 없기 때문에 거짓을 말하고 진리를 말하는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을 경외함으로 순종하는 자들입니다.
마음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그들은 마귀의 자식들이었습니다. 42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 나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 그들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께로 나지 않고 마귀에게서 났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욕심대로 행하는 마귀의 자녀였습니다. 마귀는 거짓말쟁이요, 살인자입니다. 마귀는 진리가 그 속에 없기 때문에 하는 말을 종합해 보면 모두 거짓말입니다(44). 그러나 예수님은 진리의 근원이심으로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47).
그러자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사마리아 사람이다, 또는 귀신들렸다”하며 예수님을 무시했습니다(48,49). 이런 모욕을 참는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를 참으실 수 있었던 것은 사람의 인정보다 하나님의 인정을 바라고, 하나님께 모든 판단을 맡기셨기 때문입니다(50). 예수님은 대적하는 그들을 포기할 수 밖에 없지만 포기치 아니하시고 영생에로 초대하셨습니다. 51절을 보십시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 사단은 말씀을 빼앗아 가고자 갖은 수단을 다 쓰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영생합니다. 영적인 투쟁은 말씀을 붙잡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안에 거하면 참 제자가 되고 그 말씀은 우리로 자유하게 합니다. 우리가 말씀 안에 거하면서 여름 수양회를 준비하고 또 말씀을 심는 수양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또 우리의 성경 공부를 통해서 많은 젊은이들이 죄에서 자유함을 얻고 제자로 자라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진리를 알고 자유를 누리며 제자의 삶을 살게 하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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