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요한13(8:1-20)/ 정죄치 않으시는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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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요한복음 제 13 강
말씀 / 요한복음 8:1-20
요절 / 요한복음 8:11
정죄치 않으시는 예수님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우리는 오늘 정죄와 용서라는 주제로 말씀을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정죄는 가공할 만한 파괴력이 있습니다. 반대로 용서의 위력도 대단합니다. 우리가 어떤 자세로 사람을 대하는가에 따라서 우리의 주변은 놀랍게 달라집니다. 직장에서 사장이 부장에게 화를 내면 부장은 과장에게 화를 내고 과장은 집에 가서 아내에게 화를 해고 아내는 아이들에게 화를 내고 아이들은 강아지를 발로 걷어 찹니다. 정죄는 연못에 돌을 떨어뜨려서 파장을 일으키듯이 주위로 부정적인 영향력을 끼칩니다. 이런 파장을 잠재우려면 한 사람의 용서가 있어야 합니다. 나로부터 이런 악영향의 고리를 끊고 긍정적인 영향력을 끼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희생으로 막힌 담을 헐고 화평을 가져오시고 기쁨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용서의 사랑을 영접함으로 우리 안에 놀라운 평화를 맛보기를 기도합니다.
초막절 축제 기간 동안 사람들은 마음껏 소리도 지르고 기뻐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월드컵 16강에 들어간 기쁨을 가누지 못하고 밤새도록 경적을 울리고 소리를 지르고 기뻐하였습니다. 이런 축제가 끝나고 사람들은 각각 다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축제로 인한 공허감을 이기지 못한 어떤 사람들은 죄의 쾌락을 좇아 밤을 지새웠습니다. 그런데 이때 예수님은 감람 산으로 가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 사건 이후에도 혼자 산으로 가서 기도하셨습니다. 눅 21:37절을 참고해 볼 때 예수님은 낮이면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이면 나가 감람원이라 는 산에서 쉬셨습니다. 예수님은 산에 가서 쉬면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아침 일찍 성전에 나와 말씀을 가르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치시는 광경은 매우 진지하고 영감이 넘쳤습니다.
그런데 이런 분위기를 깨는 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웠습니다. 그들의 손에는 짱돌이 들려져 있었습니다. 여자는 머리카락과 옷이 헝클어지고 떨려서 두 손으로 몸을 감쌌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수치심으로 고개를 떨구었습니다. 간음 중에 잡힌 여자는 현행범으로서 빠져나갈 길이 없었습니다. 같이 죄를 짓던 남자는 잽싸게 도망을 쳐버렸습니다. 아마 이들은 축제 후에 공허감을 이기지 못해서 죄를 짓고 있었는가 봅니다. 그들은 율법 사회에서 간음 죄를 지으면 둘 다 돌로 쳐 죽임을 당하게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신 22:22). 그런데 그들은 이 말씀을 비웃듯이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죄를 짓고 발각이 되었을 때는 죽고 싶었습니다. 그들은 죄로 인한 독침을 맞고 심히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들은 갑자기 들이닥친 바리새인들로 인해서 허겁지겁 도망을 치다가 여자만 잡혀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덮친 것을 볼 때 그들은 사전에 정보를 입수하여 길목을 지키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백성의 목자로서 밤새도록 기도하시는 예수님과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예수님은 그 시대를 볼 때 잠을 이룰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 나라는 죄를 짓는 것에 대한 제약이 별로 없습니다. 젊은이들은 인터넷과 영상으로 인해서 죄에 넘어갈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죄를 예방하기 위해서 엄하게 법률을 만들지만 정욕은 잘 제어되지 않습니다. 우리 나라는 유교 윤리가 해체되면서 향락 문화가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서 성폭력이 사회 문제가 되었습니다. 우리 나라의 대학 내 성 폭력도 심각한 상태입니다. 왜곡된 대학 문화가 이런 문제를 일으키지만 근본적으로 죄의 노예된 인간이 문제인 것입니다. 인간의 내면에 잠재 되어 있는 죄성이 인간을 비참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인간 속에 있는 죄를 짓고자 하는 소원은 새가 그물 속으로 날아감 같고 소가 푸주간으로 가는 것과 같이 어리석은 것입니다. 아마 이 여인은 어쩌다 한 번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반복해서 죄를 지었을 것입니다. 이래서는 안되는 줄 알면서도 죄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습니다. 정욕죄는 대개 호기심에서 시작해서 죄의 노예가 되기까지 인간을 끌고 다닙니다. 이 여인은 모든 사람 앞에 자신의 죄가 드러나자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마음을 더욱 후비는 질문들이 바리새인들에게서 쏟아져 나왔습니다. 또한 죽음의 공포로 그녀를 몰아갔습니다.
4,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그들은 예수님을 고소하기 위해서 실정법과 모세의 법을 이용했습니다. 실정법은 유대인들에 의한 처벌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법대로 돌로 치라고 하면 살인 교사죄가 됩니다. 만약 치지 말라고 하면 모세의 법을 어기는 죄인으로 몰아붙일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어떻게 대답하시든지 다 걸려 들도록 질문을 했습니다. 그들은 법으로 사람을 잡는 것만 연구한 사람들 같았습니다. 그들은 사람을 살려야 할 법으로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잡기 위해서 한 여인을 미끼로 사용했습니다. 이 여인이 인격을 가진 사람이란 것을 의식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연약한 여인을 이용하여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것은 사단과 같았습니다. 그것은 백성들의 목자로서 정말 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백성들에 대한 사랑이 없었습니다. 죄로 고통하는 양들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생각은 없고 정죄만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분리를 통해서 죄를 억제 하고자 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 속에 있는 죄문제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질문을 받으시고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무언가를 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땅에 무언가를 쓰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기 위해서 였을까요? 생각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일까요? 아니면 그들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서 였을까요? 아니면 그들의 뜨거운 감정을 식히기 위해서 였을까요? 아니면 그들의 모습이 보기에 뻔뻔스러워서, 역겨워서 였을까요? 하여튼 예수님은 매우 지혜로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땅바닥에 무슨 글을 쓰셨을까요? 도와 주세요? 또는 십계명?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예수님께서 무엇을 쓰셨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신비입니다.
땅에 무언가를 쓰신 예수님을 보고 그들은 묻기를 마지 아니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일어나실 때 그의 입술을 주목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입을 열어 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7b).” 예수님이 하신 한 말씀은 마치 핵폭탄과 같이 그들의 높아진 마음을 무너뜨렸습니다.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 자신있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너는 정말로 깨끗한가? 양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 말씀 앞에 침묵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의 어두운 마음에 빛을 던져 주었습니다. 그들의 양심에 깊은 가책을 느끼도록 했습니다. 죄인에게 먼저 돌을 들어 치는 사람은 그 사람의 죄에 대한 증인이 되어야 하고 책임을 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죄없는 사람은 간음을 행동으로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간음할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자기를 돌아볼 수 있도록 침묵하셨습니다. 만약 한 사람이 돌을 던진다면 많은 사람들이 군중 심리로 확인도 하지 않고 그 여인에게 돌을 던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자신들을 돌아보도록 하는 힘이 있었습니다. 사람이 자신을 돌아보게 되면 다른 사람에게 분노하고 정죄하는 것을 그만두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인터넷과 신문에서 끊임없이 돌로 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만큼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바쁘게 살다보니 자기를 돌아볼 여유가 없습니다. 그런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양심에 철판을 깐 것 같이 인신 공격을 해대고 있습니다. 특히 선거전이 있었을 때는 이런 현상이 심했습니다. 어떤 점에서 우리 시대는 당시에 예수님 앞에 모였던 사람들보다 더 비양심적인 것을 느끼게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무리들뿐만 아니라 여인에게도 큰 도전이 되었습니다. 사실 여인은 현장범으로 끌려 왔지만 변명하고 싶은 말이 많았을 것입니다. 또 반항하는 마음을 갖고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여인에게도 자신이 돌에 맞아 죽을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하고 자기 발견을 하게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앞에 모든 사람들이 숙연해졌습니다. 잠시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예수님께서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님과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게 되었습니다(8,9). 우리는 여기서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것을 보게됩니다.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3:10)”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습니다(롬 3:23). 사람들 중에서 어른들이 먼저 나가고 다음에 젊은이들이 나가고 나중에 좀 더 어린 사람들이 나갔습니다. 어른들은 죄가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또 나이가 들수록 죄에 대한 깨달음도 더 깊어집니다.
사람들이 하나씩 하나씩 돌을 내려 놓고 소리없이 나가고 예수님과 여인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실 나가기보다 여인 뒤에 무릎을 꿇고 예수님의 용서를 구해야 마땅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양심의 가책만 받고 사라집니다. 후회만하고 죄사함에 이르지 못하면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자기 죄를 깨닫고도 죄사함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자기 죄를 인정할 뿐만 아니라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의 은혜를 덧입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나가자 예수님만이 여인 앞에 서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만이 죄가 없으시며 여인을 정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들을 정죄의 눈으로 보지 않습니다. 히 4:15절은 말씀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에게 어떤 은혜를 베푸셨습니까?
10,1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예수님은 깊은 이해심과 동정심을 가지고 여인에게 물으셨습니다.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이 물음은 여인이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서게 만들었습니다. 이 여인에게 숨통을 트이게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주여 없나이다.” 이 고백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인됨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밧세바와 간음죄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시 51:4).” 인간은 인간을 정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심판합니다. 예수님은 여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이 말씀은 죄사함의 선포입니다. 심판으로 인한 두려움에서 해방시켜 주는 해방 선언입니다. 죄의 무거운 사슬로부터 여인을 해방시켜 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여인에게 용서의 은혜를 베푸신 것은 근거가 있습니다. 벧전 2:24절은 말씀합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여인 대신 돌에 맞으시고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여인 대신 모든 비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인이 당해야 하는 모든 비난과 무시와 조롱과 고통을 그 몸으로 담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죄사함의 선포는 자신의 몸으로 여인의 모든 죄를 다 담당하였다는 선언입니다. 마땅히 죽어야 하는 죄인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대신 죽으셨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사죄의 선포를 들었을 때 마음이 하늘을 날아갈듯이 기뻤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용서의 사랑 앞에 새로운 삶을 살고자 다짐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어떤 새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였습니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11b).” 예수님께서는 여인에게 새로운 삶의 방향을 주셨습니다. 여인은 이 은혜를 감당하기 위해서 죄와 싸우면서 거룩한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여인은 은혜를 남용하기 보다 마땅히 죽어야 할 죄인이 살았다는 인식하에 거룩한 삶을 살아야합니다. 주홍글씨에서 헤스터는 처음에 간음죄를 짓고 사람들의 정죄를 받습니다. 그의 가슴에는 Adultery의 약자로서 A자를 달고 다녀야 했습니다. 그녀는 바느질을 해 가면서 연명을 해 가는데 성실하게 일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녀의 가슴에 달고 있는 A자를 Able이라는 뜻으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녀가 다른 사람들에 대한 따뜻한 사랑을 실천해 가자 나중에는 Angel이라는 뜻으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녀가 죄를 지은 인식을 가지고 거룩하게 살고자 투쟁했을 때 천사와 같이 거룩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오하라 미스유는 중학생 때 왕따를 당하였습니다. 그는 왕따를 당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이유없이 정죄 받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비참함과 억울함을 증명하고자 야쿠자가 되었습니다. 자신을 끊임없이 파괴시키는 행위를 함으로써 사람들의 잘못을 증명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할복 자살을 여덟 번이나 시도했습니다. 그러다가 호스티스가 되어 일하다가 아버지 친구를 만나게 되어 용서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을 용서함으로 위대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는 나중에 변호사가 되어 비행 청소년들을 돕는 삶을 살았습니다.
독일의 유대인 수용소에서 온갖 학대를 받았던 유명한 복음전도자 코리 텐 붐 여사가 독일인에게 용서의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가는 곳마다 용서의 복음이 선포되었습니다. 어느 날 많은 사람이 줄을 지어 한 사람씩 코리의 손에 입을 맞추며 그녀를 통해 깨달은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했는데 문득 다가서는 한 남자의 얼굴을 보자 그녀의 온 몸이 그 자리에 얼어 붙는 것 같았습니다. 그 사람은 수용소에서 그녀의 옷을 벗기며 채찍을 가하고 침을 뱉았고, 그녀의 언니를 죽였던 사람이었습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던 그 사람을 앞에 두고서 그녀는 “주여, 저는 저 사람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사랑할 수 있게 해주소서. 주여, 믿나이다”하고 손을 내 밀어 그 독일 간수의 손을 잡는 순간 하늘의 사랑이 자기의 영혼을 파고 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코리의 이 이야기는 바로 오늘날 우리들이 살고 있는 삶에서 일어날 수 있고 일어나야 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를 깨닫는 만큼 다른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용서는 강자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정죄는 사람을 파괴하지만 용서는 관계를 회복하고 견고하게 합니다. 정죄는 두려움과 불안을 주지만 용서는 평화와 안정을 줍니다. 용서는 이해보다 차원이 높은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의 삶 속에서 서로 불쌍히 여기며 용서하기를 먼저 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한 후에 어떻게 해야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는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빛이 있을 때 어두움은 물러 갑니다. 사람들은 어두움 속에서 죄를 짓습니다. 마음이 어두울 때 죄를 잘 짓습니다. 죄는 인간을 황폐하게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생명의 빛이 됩니다. 생명의 빛은 생명을 주는 빛이요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빛입니다. 생명의 빛 되신 예수님을 따를 때 어두운 죽음의 그림자들이 물러가게 됩니다. 생명의 빛이 있는 사람은 영생의 소망과 능력으로 충만합니다. 그 마음에 생명의 빛이 있는 사람은 방황하지 않습니다. 생명의 빛되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그의 말씀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내 안에 심겨질 때 예수님의 제자로 성장하고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그를 닮게 됩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용서의 위력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우리가 정죄와 판단이 난무하는 이 시대에 먼저 용서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로부터 용서를 받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먼저 용서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힘써 이루기를기도합니다.
말씀 / 요한복음 8:1-20
요절 / 요한복음 8:11
정죄치 않으시는 예수님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우리는 오늘 정죄와 용서라는 주제로 말씀을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정죄는 가공할 만한 파괴력이 있습니다. 반대로 용서의 위력도 대단합니다. 우리가 어떤 자세로 사람을 대하는가에 따라서 우리의 주변은 놀랍게 달라집니다. 직장에서 사장이 부장에게 화를 내면 부장은 과장에게 화를 내고 과장은 집에 가서 아내에게 화를 해고 아내는 아이들에게 화를 내고 아이들은 강아지를 발로 걷어 찹니다. 정죄는 연못에 돌을 떨어뜨려서 파장을 일으키듯이 주위로 부정적인 영향력을 끼칩니다. 이런 파장을 잠재우려면 한 사람의 용서가 있어야 합니다. 나로부터 이런 악영향의 고리를 끊고 긍정적인 영향력을 끼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희생으로 막힌 담을 헐고 화평을 가져오시고 기쁨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용서의 사랑을 영접함으로 우리 안에 놀라운 평화를 맛보기를 기도합니다.
초막절 축제 기간 동안 사람들은 마음껏 소리도 지르고 기뻐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월드컵 16강에 들어간 기쁨을 가누지 못하고 밤새도록 경적을 울리고 소리를 지르고 기뻐하였습니다. 이런 축제가 끝나고 사람들은 각각 다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축제로 인한 공허감을 이기지 못한 어떤 사람들은 죄의 쾌락을 좇아 밤을 지새웠습니다. 그런데 이때 예수님은 감람 산으로 가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 사건 이후에도 혼자 산으로 가서 기도하셨습니다. 눅 21:37절을 참고해 볼 때 예수님은 낮이면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이면 나가 감람원이라 는 산에서 쉬셨습니다. 예수님은 산에 가서 쉬면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아침 일찍 성전에 나와 말씀을 가르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치시는 광경은 매우 진지하고 영감이 넘쳤습니다.
그런데 이런 분위기를 깨는 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웠습니다. 그들의 손에는 짱돌이 들려져 있었습니다. 여자는 머리카락과 옷이 헝클어지고 떨려서 두 손으로 몸을 감쌌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수치심으로 고개를 떨구었습니다. 간음 중에 잡힌 여자는 현행범으로서 빠져나갈 길이 없었습니다. 같이 죄를 짓던 남자는 잽싸게 도망을 쳐버렸습니다. 아마 이들은 축제 후에 공허감을 이기지 못해서 죄를 짓고 있었는가 봅니다. 그들은 율법 사회에서 간음 죄를 지으면 둘 다 돌로 쳐 죽임을 당하게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신 22:22). 그런데 그들은 이 말씀을 비웃듯이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죄를 짓고 발각이 되었을 때는 죽고 싶었습니다. 그들은 죄로 인한 독침을 맞고 심히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들은 갑자기 들이닥친 바리새인들로 인해서 허겁지겁 도망을 치다가 여자만 잡혀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덮친 것을 볼 때 그들은 사전에 정보를 입수하여 길목을 지키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백성의 목자로서 밤새도록 기도하시는 예수님과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예수님은 그 시대를 볼 때 잠을 이룰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 나라는 죄를 짓는 것에 대한 제약이 별로 없습니다. 젊은이들은 인터넷과 영상으로 인해서 죄에 넘어갈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죄를 예방하기 위해서 엄하게 법률을 만들지만 정욕은 잘 제어되지 않습니다. 우리 나라는 유교 윤리가 해체되면서 향락 문화가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서 성폭력이 사회 문제가 되었습니다. 우리 나라의 대학 내 성 폭력도 심각한 상태입니다. 왜곡된 대학 문화가 이런 문제를 일으키지만 근본적으로 죄의 노예된 인간이 문제인 것입니다. 인간의 내면에 잠재 되어 있는 죄성이 인간을 비참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인간 속에 있는 죄를 짓고자 하는 소원은 새가 그물 속으로 날아감 같고 소가 푸주간으로 가는 것과 같이 어리석은 것입니다. 아마 이 여인은 어쩌다 한 번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반복해서 죄를 지었을 것입니다. 이래서는 안되는 줄 알면서도 죄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습니다. 정욕죄는 대개 호기심에서 시작해서 죄의 노예가 되기까지 인간을 끌고 다닙니다. 이 여인은 모든 사람 앞에 자신의 죄가 드러나자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마음을 더욱 후비는 질문들이 바리새인들에게서 쏟아져 나왔습니다. 또한 죽음의 공포로 그녀를 몰아갔습니다.
4,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그들은 예수님을 고소하기 위해서 실정법과 모세의 법을 이용했습니다. 실정법은 유대인들에 의한 처벌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법대로 돌로 치라고 하면 살인 교사죄가 됩니다. 만약 치지 말라고 하면 모세의 법을 어기는 죄인으로 몰아붙일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어떻게 대답하시든지 다 걸려 들도록 질문을 했습니다. 그들은 법으로 사람을 잡는 것만 연구한 사람들 같았습니다. 그들은 사람을 살려야 할 법으로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잡기 위해서 한 여인을 미끼로 사용했습니다. 이 여인이 인격을 가진 사람이란 것을 의식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연약한 여인을 이용하여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것은 사단과 같았습니다. 그것은 백성들의 목자로서 정말 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백성들에 대한 사랑이 없었습니다. 죄로 고통하는 양들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생각은 없고 정죄만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분리를 통해서 죄를 억제 하고자 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 속에 있는 죄문제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질문을 받으시고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무언가를 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땅에 무언가를 쓰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기 위해서 였을까요? 생각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일까요? 아니면 그들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서 였을까요? 아니면 그들의 뜨거운 감정을 식히기 위해서 였을까요? 아니면 그들의 모습이 보기에 뻔뻔스러워서, 역겨워서 였을까요? 하여튼 예수님은 매우 지혜로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땅바닥에 무슨 글을 쓰셨을까요? 도와 주세요? 또는 십계명?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예수님께서 무엇을 쓰셨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신비입니다.
땅에 무언가를 쓰신 예수님을 보고 그들은 묻기를 마지 아니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일어나실 때 그의 입술을 주목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입을 열어 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7b).” 예수님이 하신 한 말씀은 마치 핵폭탄과 같이 그들의 높아진 마음을 무너뜨렸습니다.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 자신있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너는 정말로 깨끗한가? 양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 말씀 앞에 침묵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의 어두운 마음에 빛을 던져 주었습니다. 그들의 양심에 깊은 가책을 느끼도록 했습니다. 죄인에게 먼저 돌을 들어 치는 사람은 그 사람의 죄에 대한 증인이 되어야 하고 책임을 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죄없는 사람은 간음을 행동으로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간음할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자기를 돌아볼 수 있도록 침묵하셨습니다. 만약 한 사람이 돌을 던진다면 많은 사람들이 군중 심리로 확인도 하지 않고 그 여인에게 돌을 던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자신들을 돌아보도록 하는 힘이 있었습니다. 사람이 자신을 돌아보게 되면 다른 사람에게 분노하고 정죄하는 것을 그만두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인터넷과 신문에서 끊임없이 돌로 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만큼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바쁘게 살다보니 자기를 돌아볼 여유가 없습니다. 그런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양심에 철판을 깐 것 같이 인신 공격을 해대고 있습니다. 특히 선거전이 있었을 때는 이런 현상이 심했습니다. 어떤 점에서 우리 시대는 당시에 예수님 앞에 모였던 사람들보다 더 비양심적인 것을 느끼게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무리들뿐만 아니라 여인에게도 큰 도전이 되었습니다. 사실 여인은 현장범으로 끌려 왔지만 변명하고 싶은 말이 많았을 것입니다. 또 반항하는 마음을 갖고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여인에게도 자신이 돌에 맞아 죽을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하고 자기 발견을 하게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앞에 모든 사람들이 숙연해졌습니다. 잠시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예수님께서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님과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게 되었습니다(8,9). 우리는 여기서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것을 보게됩니다.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3:10)”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습니다(롬 3:23). 사람들 중에서 어른들이 먼저 나가고 다음에 젊은이들이 나가고 나중에 좀 더 어린 사람들이 나갔습니다. 어른들은 죄가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또 나이가 들수록 죄에 대한 깨달음도 더 깊어집니다.
사람들이 하나씩 하나씩 돌을 내려 놓고 소리없이 나가고 예수님과 여인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실 나가기보다 여인 뒤에 무릎을 꿇고 예수님의 용서를 구해야 마땅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양심의 가책만 받고 사라집니다. 후회만하고 죄사함에 이르지 못하면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자기 죄를 깨닫고도 죄사함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자기 죄를 인정할 뿐만 아니라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의 은혜를 덧입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나가자 예수님만이 여인 앞에 서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만이 죄가 없으시며 여인을 정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들을 정죄의 눈으로 보지 않습니다. 히 4:15절은 말씀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에게 어떤 은혜를 베푸셨습니까?
10,1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예수님은 깊은 이해심과 동정심을 가지고 여인에게 물으셨습니다.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이 물음은 여인이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서게 만들었습니다. 이 여인에게 숨통을 트이게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주여 없나이다.” 이 고백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인됨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밧세바와 간음죄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시 51:4).” 인간은 인간을 정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심판합니다. 예수님은 여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이 말씀은 죄사함의 선포입니다. 심판으로 인한 두려움에서 해방시켜 주는 해방 선언입니다. 죄의 무거운 사슬로부터 여인을 해방시켜 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여인에게 용서의 은혜를 베푸신 것은 근거가 있습니다. 벧전 2:24절은 말씀합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여인 대신 돌에 맞으시고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여인 대신 모든 비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인이 당해야 하는 모든 비난과 무시와 조롱과 고통을 그 몸으로 담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죄사함의 선포는 자신의 몸으로 여인의 모든 죄를 다 담당하였다는 선언입니다. 마땅히 죽어야 하는 죄인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대신 죽으셨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사죄의 선포를 들었을 때 마음이 하늘을 날아갈듯이 기뻤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용서의 사랑 앞에 새로운 삶을 살고자 다짐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어떤 새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였습니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11b).” 예수님께서는 여인에게 새로운 삶의 방향을 주셨습니다. 여인은 이 은혜를 감당하기 위해서 죄와 싸우면서 거룩한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여인은 은혜를 남용하기 보다 마땅히 죽어야 할 죄인이 살았다는 인식하에 거룩한 삶을 살아야합니다. 주홍글씨에서 헤스터는 처음에 간음죄를 짓고 사람들의 정죄를 받습니다. 그의 가슴에는 Adultery의 약자로서 A자를 달고 다녀야 했습니다. 그녀는 바느질을 해 가면서 연명을 해 가는데 성실하게 일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녀의 가슴에 달고 있는 A자를 Able이라는 뜻으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녀가 다른 사람들에 대한 따뜻한 사랑을 실천해 가자 나중에는 Angel이라는 뜻으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녀가 죄를 지은 인식을 가지고 거룩하게 살고자 투쟁했을 때 천사와 같이 거룩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오하라 미스유는 중학생 때 왕따를 당하였습니다. 그는 왕따를 당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이유없이 정죄 받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비참함과 억울함을 증명하고자 야쿠자가 되었습니다. 자신을 끊임없이 파괴시키는 행위를 함으로써 사람들의 잘못을 증명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할복 자살을 여덟 번이나 시도했습니다. 그러다가 호스티스가 되어 일하다가 아버지 친구를 만나게 되어 용서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을 용서함으로 위대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는 나중에 변호사가 되어 비행 청소년들을 돕는 삶을 살았습니다.
독일의 유대인 수용소에서 온갖 학대를 받았던 유명한 복음전도자 코리 텐 붐 여사가 독일인에게 용서의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가는 곳마다 용서의 복음이 선포되었습니다. 어느 날 많은 사람이 줄을 지어 한 사람씩 코리의 손에 입을 맞추며 그녀를 통해 깨달은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했는데 문득 다가서는 한 남자의 얼굴을 보자 그녀의 온 몸이 그 자리에 얼어 붙는 것 같았습니다. 그 사람은 수용소에서 그녀의 옷을 벗기며 채찍을 가하고 침을 뱉았고, 그녀의 언니를 죽였던 사람이었습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던 그 사람을 앞에 두고서 그녀는 “주여, 저는 저 사람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사랑할 수 있게 해주소서. 주여, 믿나이다”하고 손을 내 밀어 그 독일 간수의 손을 잡는 순간 하늘의 사랑이 자기의 영혼을 파고 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코리의 이 이야기는 바로 오늘날 우리들이 살고 있는 삶에서 일어날 수 있고 일어나야 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를 깨닫는 만큼 다른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용서는 강자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정죄는 사람을 파괴하지만 용서는 관계를 회복하고 견고하게 합니다. 정죄는 두려움과 불안을 주지만 용서는 평화와 안정을 줍니다. 용서는 이해보다 차원이 높은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의 삶 속에서 서로 불쌍히 여기며 용서하기를 먼저 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한 후에 어떻게 해야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는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빛이 있을 때 어두움은 물러 갑니다. 사람들은 어두움 속에서 죄를 짓습니다. 마음이 어두울 때 죄를 잘 짓습니다. 죄는 인간을 황폐하게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생명의 빛이 됩니다. 생명의 빛은 생명을 주는 빛이요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빛입니다. 생명의 빛 되신 예수님을 따를 때 어두운 죽음의 그림자들이 물러가게 됩니다. 생명의 빛이 있는 사람은 영생의 소망과 능력으로 충만합니다. 그 마음에 생명의 빛이 있는 사람은 방황하지 않습니다. 생명의 빛되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그의 말씀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내 안에 심겨질 때 예수님의 제자로 성장하고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그를 닮게 됩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용서의 위력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우리가 정죄와 판단이 난무하는 이 시대에 먼저 용서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로부터 용서를 받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먼저 용서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힘써 이루기를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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