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강 성탄3강/마1장/임마누엘 예수님
페이지 정보

본문
2002년 성탄 말씀 제 3 강
말씀 / 마태복음 1:1-25
요절 / 마태복음 1:23
임마누엘 예수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2002년 성탄을 축하합니다. 우리는 이번 주 새 대통령을 뽑고 새 시대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백성과 함께 하시고 우리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시는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통일 한국, 제사장 나라로서 남북이 하나가 되어 세계 만방에 하나님의 복을 나누어 주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제사장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I. 하나님께 쓰임 받은 사람들 (1-17)
예수 그리스도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입니다. 창세기가 우주와 천지 만물의 발생과 기원에 관한 책이라면 신약은 그 세계를 만드신 분의 기원에 관한 책으로써 시작한다는 점에서 그 영광이 구약의 영광보다 뛰어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히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 열국의 아버지가 될 바로 그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그는 그 어깨에 만국의 통치권을 메게 될 바로 그 다윗의 자손입니다. 아브라함이 구속 역사의 씨였다면 다윗은 꽃이요 예수 그리스도는 열매입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시요 주의 주이신 분이기 때문에 그 족보도 화려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 나라 현대사에 희귀한 성인 노씨 가문에서 대통령이 두 명이나 나온 것을 볼 때 노정섭 형제가 대단해 보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의 족보에 나타난 인물들을 살펴보면 세상 족보와 다른 점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세상 족보는 장자 중심인데 그리스도의 조상들 가운데는 대체로 동생이 계통을 이었습니다. 아브라함도 그렇고 야곱, 유다, 다윗 등이 그러합니다. 이 사실은 그리스도의 탁월성이 조상들의 장자 신분으로부터 나오지 않고 낮은 자를 높이시고 부족한 지체에게 존귀를 더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저자는 인간적인 혈통보다 하나님의 주권을 더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유대인들이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매우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니 부족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75세가 될 까지 자식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믿음 생활을 시작했지만 자식이 없어서 보따리를 수없이 쌌다가 풀렀다가를 반복했습니다. 심지어 가나안에 기근이 들어서 먹고 살기가 힘들자 애굽으로 내려갔는데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자기 아내를 궁녀로 팔아버린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리 자기 목숨이 귀중하기로서니 아내를 팔아서 목숨을 부지하고자 하다니 어처구니가 없는 사람입니다. 이삭은 어떠합니까? 그는 겉으로 볼 때는 매우 점잖은 사람 같지만 그도 자기 아내를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줄 뻔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야곱은 속이는 자입니다. 그는 속이는데 천재였습니다. 자기 형이 배가 고픈 것을 이용해서 장자권을 사 버렸습니다. 야곱의 아들들 가운데 장남부터 넷째 아들까지 모두 불미스러운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르우벤과 유다는 근친 상간 죄를 범했고 시므온과 레위는 살인죄를 범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모두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족장들이 되었고 레위로부터는 제사장들이 나왔고 유다로부터는 이스라엘의 왕들과 메시야가 나왔습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을 쓰시는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믿음의 본보기가 되었고 또 죄사함의 은혜를 얻은 기념비적인 인물들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아들 이삭을 얻었고 그 아들을 하나님께서 번제로 바치라고 했을 때 믿음으로 바쳤습니다. 이삭은 믿음의 중심을 지켜서 기근 중에 100배의 축복을 받고 축복을 잘 누렸습니다. 야곱은 잡초와 같은 인생이었지만 전투적인 믿음으로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사람이 되었습니다.
또 가장 특이한 것은 여인들이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의 구별이 없으며 나그네와 이방인들도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환영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족보상에 나타난 여인들 중에서 간음한 여인들인 다말과 밧세바를 볼 때 예수님께 지워진 수치의 표식 이상의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ㅁ죄 있는 육신의 모양을 취하시고 아무리 큰 죄인들일지라도 회개하면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귀하게 쓰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족보 속에는 선한 자와 악한 자가 뒤섞여 있습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로서 그가 기뻐하시는 대로 은혜를 베풀기도 하고 보류하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오직 하나님 자신의 것입니다. 우리에게 무슨 선한 것이 있어서 쓰임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바벨론 포로 중에 멸절하지 아니하시고 면면히 그 혈통을 잇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기적입니다. 우리는 죄인들 중에서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쓰임 받은 여인들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가운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다말
다말은 시아버지와 관계하여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습니다. 다말은 유다의ㅏ며느리로서 장자 엘과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장자 엘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하므로 하나님께서 그를 죽이셨습니다. 다말은 악한 남편이 죽자 그 동생 오난에게 가서 아들을 낳아 남편의 기업을 이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오난은 형수인 다말에게 아들을 낳게 해도 자신에게는 아무 유익이 없음을 보고 의무를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 일이 악하여 하나님께서는 오난도 죽이셨습니다. 다말은 천하에 재수 없는 여자 같이 여겨집니다. 그런데 유다는 셋째 아들인 셀라마저도 죽을까 두려워서 다말과 결혼을 시키지 않았습니다. 다말은 자신은 청상과부로 늙을 뿐만 아니라 남편이 비록 수치스럽게 죽었지만 그의 권리를 찾아줄 수도 없게 된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시아버지 유다가 양털을 깍으러 딤나로 왔을 때 창녀로 가장을 하여 동침을 하게 되었습니다. 석 달 쯤 후에 며느리 다말이 행음하여 잉태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유다는 당시 법대로 불태워 죽이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다말이 유다에게서 받은 약조물을 내어 놓자 유다가 그것을 알아보고 말했습니다.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는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않았습니다(창 38:26).” 다말은 불에 태워 죽을 수도 있었지만 도덕 관념을 넘어서 남편의 기업을 계승했습니다. 이는 다말이 믿음으로 자신이 감당해야할 하나님의 역사를 성실하게 섬겼음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유다의 가문은 다말을 통해서 베레스와 세라가 출생함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 그들로부터 유다 지파의 주요 가문들이 생겨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말의 믿음을 귀하게 쓰신 것입니다.
둘째, 라합
라합은 여리고 성에 사는 가나안 기생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영도자인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싯딤에서 두 스파이를 보내었는데, 라합은 위험을 무릅쓰고 이들을 자기 집에 유숙시켰습니다. 정탐꾼이 침투했다는 보고를 들은 여리고 왕은 라합에게 연락하여, 네 집에 유숙한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을 끌어내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라합은 이들을 숨기고, 그들이 왔다가 이미 떠나버렸다고 허위 보고를 했습니다. 잡으러 온 사람들은 라합이 말하는 방향으로 추적하러 갔습니다. 라합은 밤에 그들이 숨어 있는 지붕에 올라가서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알기 때문에 나나 이 땅 백성이 두려워하고 있어요. 우리는 당신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홍해를 마르게 하시고, 아모리의 두 왕을 전멸시킨 일을 다 들었기 때문에 정신을 잃었습니다. 그러니 내가 당신들을 선대하였은즉, 후에 내 부모 형제들을 살려 주겠다고 여호와 앞에 맹세하고 진실한 표를 내 주세요”고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들로부터 약속을 받은 라합은 성벽 위 자기 집 창문에서 그들을 줄로 달아 내려 도피시켰습니다. 그들은 도망하기에 앞서 라합에게 우리가 쳐들어 올 때 창문에 붉은 줄을 매어 표시하면 그 집에 있는 사람은 다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수 2장). 그러므로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을 함락시켰을 때, 앞서 그 정탐꾼은 라합과 그 부모, 형제, 친족, 그리고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다 구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과 같이 살았고(수 6:22-25) 라합은 신앙 위인 중의 한 사람(히 11:31, 약 2:25)이 되고, 후에 살몬의 아내가 되고, 보아스의 어미가 되어 다윗과 예수님의 조상이 되었습니다(마 1:5). 라합은 이방인이었지만 하나님의 주권을 영접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나온 새롭고 다른 생활에 매혹되어 그들과 더불어 운명을 같이 하려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적인 생각보다 하나님의 주권을 영접하고 따른 그녀의 믿음으로 인해서 예수님의 혈통을 잇게 되었습니다.
셋째, 룻
룻은 룻기의 여주인공입니다. 룻이란 ‘우정’을 뜻합니다. 베들레헴 사람 엘리멜렉의 아내 나오미가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 있었을 때 룻은 말론의 아내가 된 모압 여자입니다. 모압 지방에서 시아버지 엘리멜렉도, 룻의 남편인 말론도, 작은 서방님 기룐도 죽은 다음, 그녀는 외롭게 시어머니 나오미와 같이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습니다. 나오미는 고향으로 돌아올 때 며느리들에게 각기 친정으로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이때 오르바는 친정으로 돌아갔으나 룻은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라.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단호한 결심을 보였습니다. 룻은 하룻 밤 사이에 결심을 뒤집지 않고 소신있게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랐습니다.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룻은 보아스의 밭에서 이삭을 주울 때 그에게 많은 은혜를 입었습니다. 당시의 관습으로는 말론의 친척이 룻과 결혼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보아스는 말론에게 가장 가까운 친척이 룻과 결혼하지 않을 것을 확인한 다음 룻과 결혼했습니다. 이 결혼은 나오미의 지혜가 크게 작용했습니다. 이 결혼에 의하여 룻은 다윗의 조상의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다윗의 증조모가 되고, 예수님의 족보에 실리는 여인이 되었습니다.
넷째,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
밧세바는 엘리암의 딸이며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입니다. 그녀는 “심히 아름다웠다”고 합니다(삼하 11:2,3). 하루는 다윗이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지붕 위를 거닐다가 목욕하는 밧세바를 발견하고 그녀를 불러다가 동침하여 간음죄를 지었습니다. 그 후 밧세바로부터 잉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다윗은 죄를 숨기기 위해 그녀의 남편이자 자기의 충성스러운 신하 우리아를 전방에서 소환하여 그 처 밧세바와 동침케 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충직한 우리아는 법궤와 일선 장병을 생각하고 귀가를 사양했습니다. 다윗은 이 계획이 실패하자 우리아를 사지에 몰아 넣어 전사케 하고, 공식적으로 밧세바를 아내로 취하였습니다(삼하 11:26,27).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서 난 첫 아이는 하나님의 진노로 일찍 죽었습니다. 그 후 그녀는 솔로몬을 비롯해 네 형제를 낳았습니다(대상 3:5). 성경을 볼 때 밧세바는 다윗이 죽는 날까지 그에게 큰 감화력을 주고, 다윗이 솔로몬을 후계자로 택한 것도 주로 그녀에 의하여 이루어졌다는 것이 확실합니다. 다윗의 네째 아들 아도니아가 요압과 제사장 아비아달의 지지를 얻어 거사를 꾀하는데, 만일 그 계획이 성공하면 솔로몬과 밧세바의 생명이 위험하게 될 이 절박한 사정을 탐지한 나단은, 밧세바를 움직여 둘이서 왕 앞에 나아가 그 같은 음모를 고함과 동시에, 솔로몬의 왕위 계승에 대한 약속을 속히 실현하도록 하였습니다. 이 상주 결과 솔로몬은 기혼에 가서 제사장 사독의 기름 부음을 받고 왕위를 확보하였습니다.
마태는 밧세바라고 기록하지 않고 우리야의 아내라고 함으로 다윗의 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왜 사라나 리브가, 라헬 같은 여인들을 기록하지 않고 이런 여인들을 예수님의 족보에 기록했을까요? 그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 은혜를 드러내기 위해서 그러했을 것입니다. 또 유대인들의 민족적인 교만을 꺾기 위해서, 유다이즘에 도전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큰 감사제목 중 하나는 이방인이나 종으로 태어나지 않고 유대인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마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를 드러냄으로써 하나님 앞에 겸손하도록 돕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에는 하나님의 용서를 깊이 체험한 자들이 쓰임 받습니다. 또 차 떼고 포 떼면 하나님께 쓰임 받을 만한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부족한 사람들을 통해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예수님의 족보에 나타난 죄인들을 보면 상놈들의 족보와 같아 보입니다. 예수님은 낮고 천한 자들의 목자이십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운명적인 인생이 섭리의 인생으로, 슬픔으로 가득한 인생이 즐거움이 넘치는 인생으로, 절망에 처한 사람들이 재기의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예수님 안에서 큰 희망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위대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7-11절은 다윗 왕국이 쇠퇴하여 바벨론으로 잡혀가기까지의 족보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은 이스라엘을 가장 영광스럽게 한 왕이었지만 동시에 이스라엘의 쇠퇴와 멸망의 단초를 제공한 인물입니다. 그는 말년에 우상 숭배와 음란의 죄에 빠져 악영향을 끼쳤습니다. 하나님께서 두 번이나 나타나서 경고를 하셨지만 이를 듣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의 아들 르호보암 때에 나라는 분열되었고 우상 숭배의 죄악이 급속도로 진행되어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하고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습니다. 왕이 되어야 할 사람들이 포로 생활을 하고 있었으니 나라가 얼마나 암담했겠습니까? 그들은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 잠깐 동안 회복하는가 싶더니 다시 메데. 페르샤, 헬라, 로마의 지배를 받으며 572년의 세월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말라기 선지자 이후 400년 동안은 선지자가 나타나지 않아서 암흑기에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구속 역사는 계속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없애지 않고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 준비를 시키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런 백성들을 쓰셔서 구원 역사를 이루시며 메시야를 보내신 것을 볼 때 그 은혜를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민족도 내세울 것이 없지만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시고 제사장 나라로 쓰시는 것을 생각할 때 감사와 찬양을 드릴 뿐입니다.
II. 임마누엘 예수님 (18-25)
18절을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을 하고 동거하기 전이었습니다. 정혼은 결혼과 같은 효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일년 동안 준비기간을 갖습니다. 요셉은 가난한 목수였지만 결혼을 하게 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벌렁거려서 하루 하루를 구름 위에서 떠다니는 심정이었습니다. 결혼만 생각하면 기쁨이 생기고 일할 의욕이 절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힘든 일도 쉽게 해 낼 수 있었습니다. 그는 신방을 꾸미기 위해서 옷장도 만들고 장롱도 만들고 마리아의 화장대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함께 식사할 원탁도 만들었습니다. 그는 전공이 목공예인 만큼 아름답게 혼례 가구들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마리아가 의심스럽다는 말이 소문을 타고 들려 왔습니다. 그녀가 입덧을 하는 것을 목격했다는 가족들의 말에 의하면 애를 밴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아마 그 어머니는 요셉이 결혼 날짜를 참지 못하고 속도 위반을 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의로운 요셉은 그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요셉은 장모가 찾아와서 하는 말을 듣자 피가 거꾸로 흐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는 목공소로 들어와서 만들어 놓은 옷장을 망치로 사정없이 부수어 버렸습니다. 그래도 속이 풀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 불태워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습니다. 설마 그녀가 그런 짓을 했을까? 설마가 사람 잡는다더니, 여자의 마음은 갈대라더니 등등 수많은 생각으로 고통을 했을 것입니다. 요셉은 못 믿을 것은 여자의 마음이려니 생각하고 정리를 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정리하고자 했습니까? 그는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했습니다. 요셉은 다윗의 자손으로서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의롭다는 말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이 일을 생각할 때 심히 고민이 되었지만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는 가운데 문제를 풀고자 했습니다. 요셉은 신중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조용하게 생각하고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특히 그는 고민이 될 때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생각을 많이 한 것 같습니다. 대개 사람들이 고민을 많이 하고 잠이 들면 악몽을 꿉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요셉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그의 고민을 해결해 주셨습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하나님의 뜻을 찾고자 할 때 침묵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하셨다는 것은 아담의 피를 이어받지 않으신 죄 없으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그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완전한 중보자가 되십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예수란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분이십니다. 자기 백성의 죄란 무엇입니까? 자기 백성은 좁은 의미로는 택한 백성 이스라엘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말씀으로 자기들을 가르치는 대신에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잣대로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2장 1절에서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고 고소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같은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회개치 않음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멸시하는 죄악이었습니다. 바울은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2:4,5)”고 슬퍼하고 있습니다.
택한 백성들의 또 다른 죄는 외식하는 죄였습니다. 자기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치 않으면서도 거룩한 척, 순종하는 척, 믿음이 있는 척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죄는 척보면 알 수 있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은 없기 때문에 시련을 당할 때 그 허약함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이렇게 죄를 짓게 되는 근본 이유는 그들이 배운 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하나님께 대한 불신에서부터 죄가 시작된다는 것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 이스라엘의 죄에 대해서 책망하시면서 믿음이 없고 패역한 시대라고 하셨습니다(마17:17).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치 않고 살아계신 하나님과 그 말씀을 믿지 않을 때 우리는 죄의 노예가 됩니다. 그들은 시대 분위기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쾌락을 추구한다고 자신들도 쾌락을 추구하고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한다고 그들도 이기적이 되어서 하나님보다 자기를 더 사랑하고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했습니다. 우리 시대의 죄는 음란하고 정욕적이고 무정한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적이고 폐쇄적인 마음을 가지고는 자유분방하고 개방적인 시대를 섬길 수 없습니다. 거룩하신 예수님께서 어떻게 음란한 백성들을 구원하십니까?
23절을 보십시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우리가 받게 되는 축복은 무엇입니까? 무엇보다 우리는 그렇게 막연했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알게 된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1:18).” 사도 요한은 이렇게 그 은혜를 찬송하였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할 때 죄사함의 은혜를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들과 함께 하심으로서 구원하십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죄인들의 친구로서 그들의 문제에 공감하시면서 다가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과 같이 유치해지셨습니다. 심지어 제자들과 함께 있다 보니 먹기를 탐한다는 비난도 들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백성들의 고난에 동참하셔서 위로하시고 친히 그 죄의 대가를 짊어 지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함께하심으로 우리의 고통과 문제를 이해하시고 공감하시면서 바른 길로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누구와 함께 하는가에 따라서 말투나 삶이 달라집니다. 한 목자님 가정은 남편된 목자님이 고기를 안 먹으니까 사모님이 육식을 좋아하지만 고기 반찬을 만들지 않게 되고 자연히 채식 위주로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우리는 죄를 깨우치고 거룩하고 사랑과 은혜가 넘치는 삶을 닮아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자신감이 생기고 두려움이 없어지고 불가능한 일도 가능하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그 삶이 밝아집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을 때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거하시면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게 하십니다. 우리는 복음서를 깊이 공부할 때 예수님의 인격을 닮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목자로서 친히 우리의 삶을 인도해 주십니다.
요셉은 잠을 깨어 일어나서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 아내 마리아를 데려왔습니다. 그러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였습니다. ‘예수’란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유일한 구원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를 모든 악과 시험에서 구원하시고 생명의 길, 복된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이 시간 우리가 구원자 예수님을 마음 깊이 영접하고 믿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죄사함과 평화를 주시고 하나님 나라를 주셨습니다. 이번 성탄의 은혜가 북한 주민들과 세계에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화가 한반도를 중심으로 세계에 퍼지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마태복음 1:1-25
요절 / 마태복음 1:23
임마누엘 예수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2002년 성탄을 축하합니다. 우리는 이번 주 새 대통령을 뽑고 새 시대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백성과 함께 하시고 우리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시는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통일 한국, 제사장 나라로서 남북이 하나가 되어 세계 만방에 하나님의 복을 나누어 주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제사장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I. 하나님께 쓰임 받은 사람들 (1-17)
예수 그리스도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입니다. 창세기가 우주와 천지 만물의 발생과 기원에 관한 책이라면 신약은 그 세계를 만드신 분의 기원에 관한 책으로써 시작한다는 점에서 그 영광이 구약의 영광보다 뛰어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히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 열국의 아버지가 될 바로 그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그는 그 어깨에 만국의 통치권을 메게 될 바로 그 다윗의 자손입니다. 아브라함이 구속 역사의 씨였다면 다윗은 꽃이요 예수 그리스도는 열매입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시요 주의 주이신 분이기 때문에 그 족보도 화려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 나라 현대사에 희귀한 성인 노씨 가문에서 대통령이 두 명이나 나온 것을 볼 때 노정섭 형제가 대단해 보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의 족보에 나타난 인물들을 살펴보면 세상 족보와 다른 점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세상 족보는 장자 중심인데 그리스도의 조상들 가운데는 대체로 동생이 계통을 이었습니다. 아브라함도 그렇고 야곱, 유다, 다윗 등이 그러합니다. 이 사실은 그리스도의 탁월성이 조상들의 장자 신분으로부터 나오지 않고 낮은 자를 높이시고 부족한 지체에게 존귀를 더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저자는 인간적인 혈통보다 하나님의 주권을 더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유대인들이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매우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니 부족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75세가 될 까지 자식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믿음 생활을 시작했지만 자식이 없어서 보따리를 수없이 쌌다가 풀렀다가를 반복했습니다. 심지어 가나안에 기근이 들어서 먹고 살기가 힘들자 애굽으로 내려갔는데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자기 아내를 궁녀로 팔아버린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리 자기 목숨이 귀중하기로서니 아내를 팔아서 목숨을 부지하고자 하다니 어처구니가 없는 사람입니다. 이삭은 어떠합니까? 그는 겉으로 볼 때는 매우 점잖은 사람 같지만 그도 자기 아내를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줄 뻔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야곱은 속이는 자입니다. 그는 속이는데 천재였습니다. 자기 형이 배가 고픈 것을 이용해서 장자권을 사 버렸습니다. 야곱의 아들들 가운데 장남부터 넷째 아들까지 모두 불미스러운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르우벤과 유다는 근친 상간 죄를 범했고 시므온과 레위는 살인죄를 범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모두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족장들이 되었고 레위로부터는 제사장들이 나왔고 유다로부터는 이스라엘의 왕들과 메시야가 나왔습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을 쓰시는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믿음의 본보기가 되었고 또 죄사함의 은혜를 얻은 기념비적인 인물들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아들 이삭을 얻었고 그 아들을 하나님께서 번제로 바치라고 했을 때 믿음으로 바쳤습니다. 이삭은 믿음의 중심을 지켜서 기근 중에 100배의 축복을 받고 축복을 잘 누렸습니다. 야곱은 잡초와 같은 인생이었지만 전투적인 믿음으로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사람이 되었습니다.
또 가장 특이한 것은 여인들이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의 구별이 없으며 나그네와 이방인들도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환영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족보상에 나타난 여인들 중에서 간음한 여인들인 다말과 밧세바를 볼 때 예수님께 지워진 수치의 표식 이상의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ㅁ죄 있는 육신의 모양을 취하시고 아무리 큰 죄인들일지라도 회개하면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귀하게 쓰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족보 속에는 선한 자와 악한 자가 뒤섞여 있습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로서 그가 기뻐하시는 대로 은혜를 베풀기도 하고 보류하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오직 하나님 자신의 것입니다. 우리에게 무슨 선한 것이 있어서 쓰임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바벨론 포로 중에 멸절하지 아니하시고 면면히 그 혈통을 잇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기적입니다. 우리는 죄인들 중에서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쓰임 받은 여인들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가운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다말
다말은 시아버지와 관계하여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습니다. 다말은 유다의ㅏ며느리로서 장자 엘과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장자 엘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하므로 하나님께서 그를 죽이셨습니다. 다말은 악한 남편이 죽자 그 동생 오난에게 가서 아들을 낳아 남편의 기업을 이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오난은 형수인 다말에게 아들을 낳게 해도 자신에게는 아무 유익이 없음을 보고 의무를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 일이 악하여 하나님께서는 오난도 죽이셨습니다. 다말은 천하에 재수 없는 여자 같이 여겨집니다. 그런데 유다는 셋째 아들인 셀라마저도 죽을까 두려워서 다말과 결혼을 시키지 않았습니다. 다말은 자신은 청상과부로 늙을 뿐만 아니라 남편이 비록 수치스럽게 죽었지만 그의 권리를 찾아줄 수도 없게 된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시아버지 유다가 양털을 깍으러 딤나로 왔을 때 창녀로 가장을 하여 동침을 하게 되었습니다. 석 달 쯤 후에 며느리 다말이 행음하여 잉태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유다는 당시 법대로 불태워 죽이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다말이 유다에게서 받은 약조물을 내어 놓자 유다가 그것을 알아보고 말했습니다.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는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않았습니다(창 38:26).” 다말은 불에 태워 죽을 수도 있었지만 도덕 관념을 넘어서 남편의 기업을 계승했습니다. 이는 다말이 믿음으로 자신이 감당해야할 하나님의 역사를 성실하게 섬겼음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유다의 가문은 다말을 통해서 베레스와 세라가 출생함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 그들로부터 유다 지파의 주요 가문들이 생겨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말의 믿음을 귀하게 쓰신 것입니다.
둘째, 라합
라합은 여리고 성에 사는 가나안 기생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영도자인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싯딤에서 두 스파이를 보내었는데, 라합은 위험을 무릅쓰고 이들을 자기 집에 유숙시켰습니다. 정탐꾼이 침투했다는 보고를 들은 여리고 왕은 라합에게 연락하여, 네 집에 유숙한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을 끌어내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라합은 이들을 숨기고, 그들이 왔다가 이미 떠나버렸다고 허위 보고를 했습니다. 잡으러 온 사람들은 라합이 말하는 방향으로 추적하러 갔습니다. 라합은 밤에 그들이 숨어 있는 지붕에 올라가서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알기 때문에 나나 이 땅 백성이 두려워하고 있어요. 우리는 당신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홍해를 마르게 하시고, 아모리의 두 왕을 전멸시킨 일을 다 들었기 때문에 정신을 잃었습니다. 그러니 내가 당신들을 선대하였은즉, 후에 내 부모 형제들을 살려 주겠다고 여호와 앞에 맹세하고 진실한 표를 내 주세요”고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들로부터 약속을 받은 라합은 성벽 위 자기 집 창문에서 그들을 줄로 달아 내려 도피시켰습니다. 그들은 도망하기에 앞서 라합에게 우리가 쳐들어 올 때 창문에 붉은 줄을 매어 표시하면 그 집에 있는 사람은 다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수 2장). 그러므로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을 함락시켰을 때, 앞서 그 정탐꾼은 라합과 그 부모, 형제, 친족, 그리고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다 구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과 같이 살았고(수 6:22-25) 라합은 신앙 위인 중의 한 사람(히 11:31, 약 2:25)이 되고, 후에 살몬의 아내가 되고, 보아스의 어미가 되어 다윗과 예수님의 조상이 되었습니다(마 1:5). 라합은 이방인이었지만 하나님의 주권을 영접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나온 새롭고 다른 생활에 매혹되어 그들과 더불어 운명을 같이 하려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적인 생각보다 하나님의 주권을 영접하고 따른 그녀의 믿음으로 인해서 예수님의 혈통을 잇게 되었습니다.
셋째, 룻
룻은 룻기의 여주인공입니다. 룻이란 ‘우정’을 뜻합니다. 베들레헴 사람 엘리멜렉의 아내 나오미가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 있었을 때 룻은 말론의 아내가 된 모압 여자입니다. 모압 지방에서 시아버지 엘리멜렉도, 룻의 남편인 말론도, 작은 서방님 기룐도 죽은 다음, 그녀는 외롭게 시어머니 나오미와 같이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습니다. 나오미는 고향으로 돌아올 때 며느리들에게 각기 친정으로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이때 오르바는 친정으로 돌아갔으나 룻은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라.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단호한 결심을 보였습니다. 룻은 하룻 밤 사이에 결심을 뒤집지 않고 소신있게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랐습니다.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룻은 보아스의 밭에서 이삭을 주울 때 그에게 많은 은혜를 입었습니다. 당시의 관습으로는 말론의 친척이 룻과 결혼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보아스는 말론에게 가장 가까운 친척이 룻과 결혼하지 않을 것을 확인한 다음 룻과 결혼했습니다. 이 결혼은 나오미의 지혜가 크게 작용했습니다. 이 결혼에 의하여 룻은 다윗의 조상의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다윗의 증조모가 되고, 예수님의 족보에 실리는 여인이 되었습니다.
넷째,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
밧세바는 엘리암의 딸이며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입니다. 그녀는 “심히 아름다웠다”고 합니다(삼하 11:2,3). 하루는 다윗이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지붕 위를 거닐다가 목욕하는 밧세바를 발견하고 그녀를 불러다가 동침하여 간음죄를 지었습니다. 그 후 밧세바로부터 잉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다윗은 죄를 숨기기 위해 그녀의 남편이자 자기의 충성스러운 신하 우리아를 전방에서 소환하여 그 처 밧세바와 동침케 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충직한 우리아는 법궤와 일선 장병을 생각하고 귀가를 사양했습니다. 다윗은 이 계획이 실패하자 우리아를 사지에 몰아 넣어 전사케 하고, 공식적으로 밧세바를 아내로 취하였습니다(삼하 11:26,27).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서 난 첫 아이는 하나님의 진노로 일찍 죽었습니다. 그 후 그녀는 솔로몬을 비롯해 네 형제를 낳았습니다(대상 3:5). 성경을 볼 때 밧세바는 다윗이 죽는 날까지 그에게 큰 감화력을 주고, 다윗이 솔로몬을 후계자로 택한 것도 주로 그녀에 의하여 이루어졌다는 것이 확실합니다. 다윗의 네째 아들 아도니아가 요압과 제사장 아비아달의 지지를 얻어 거사를 꾀하는데, 만일 그 계획이 성공하면 솔로몬과 밧세바의 생명이 위험하게 될 이 절박한 사정을 탐지한 나단은, 밧세바를 움직여 둘이서 왕 앞에 나아가 그 같은 음모를 고함과 동시에, 솔로몬의 왕위 계승에 대한 약속을 속히 실현하도록 하였습니다. 이 상주 결과 솔로몬은 기혼에 가서 제사장 사독의 기름 부음을 받고 왕위를 확보하였습니다.
마태는 밧세바라고 기록하지 않고 우리야의 아내라고 함으로 다윗의 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왜 사라나 리브가, 라헬 같은 여인들을 기록하지 않고 이런 여인들을 예수님의 족보에 기록했을까요? 그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 은혜를 드러내기 위해서 그러했을 것입니다. 또 유대인들의 민족적인 교만을 꺾기 위해서, 유다이즘에 도전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큰 감사제목 중 하나는 이방인이나 종으로 태어나지 않고 유대인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마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를 드러냄으로써 하나님 앞에 겸손하도록 돕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에는 하나님의 용서를 깊이 체험한 자들이 쓰임 받습니다. 또 차 떼고 포 떼면 하나님께 쓰임 받을 만한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부족한 사람들을 통해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예수님의 족보에 나타난 죄인들을 보면 상놈들의 족보와 같아 보입니다. 예수님은 낮고 천한 자들의 목자이십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운명적인 인생이 섭리의 인생으로, 슬픔으로 가득한 인생이 즐거움이 넘치는 인생으로, 절망에 처한 사람들이 재기의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예수님 안에서 큰 희망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위대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7-11절은 다윗 왕국이 쇠퇴하여 바벨론으로 잡혀가기까지의 족보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은 이스라엘을 가장 영광스럽게 한 왕이었지만 동시에 이스라엘의 쇠퇴와 멸망의 단초를 제공한 인물입니다. 그는 말년에 우상 숭배와 음란의 죄에 빠져 악영향을 끼쳤습니다. 하나님께서 두 번이나 나타나서 경고를 하셨지만 이를 듣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의 아들 르호보암 때에 나라는 분열되었고 우상 숭배의 죄악이 급속도로 진행되어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하고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습니다. 왕이 되어야 할 사람들이 포로 생활을 하고 있었으니 나라가 얼마나 암담했겠습니까? 그들은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 잠깐 동안 회복하는가 싶더니 다시 메데. 페르샤, 헬라, 로마의 지배를 받으며 572년의 세월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말라기 선지자 이후 400년 동안은 선지자가 나타나지 않아서 암흑기에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구속 역사는 계속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없애지 않고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 준비를 시키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런 백성들을 쓰셔서 구원 역사를 이루시며 메시야를 보내신 것을 볼 때 그 은혜를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민족도 내세울 것이 없지만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시고 제사장 나라로 쓰시는 것을 생각할 때 감사와 찬양을 드릴 뿐입니다.
II. 임마누엘 예수님 (18-25)
18절을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을 하고 동거하기 전이었습니다. 정혼은 결혼과 같은 효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일년 동안 준비기간을 갖습니다. 요셉은 가난한 목수였지만 결혼을 하게 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벌렁거려서 하루 하루를 구름 위에서 떠다니는 심정이었습니다. 결혼만 생각하면 기쁨이 생기고 일할 의욕이 절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힘든 일도 쉽게 해 낼 수 있었습니다. 그는 신방을 꾸미기 위해서 옷장도 만들고 장롱도 만들고 마리아의 화장대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함께 식사할 원탁도 만들었습니다. 그는 전공이 목공예인 만큼 아름답게 혼례 가구들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마리아가 의심스럽다는 말이 소문을 타고 들려 왔습니다. 그녀가 입덧을 하는 것을 목격했다는 가족들의 말에 의하면 애를 밴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아마 그 어머니는 요셉이 결혼 날짜를 참지 못하고 속도 위반을 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의로운 요셉은 그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요셉은 장모가 찾아와서 하는 말을 듣자 피가 거꾸로 흐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는 목공소로 들어와서 만들어 놓은 옷장을 망치로 사정없이 부수어 버렸습니다. 그래도 속이 풀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 불태워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습니다. 설마 그녀가 그런 짓을 했을까? 설마가 사람 잡는다더니, 여자의 마음은 갈대라더니 등등 수많은 생각으로 고통을 했을 것입니다. 요셉은 못 믿을 것은 여자의 마음이려니 생각하고 정리를 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정리하고자 했습니까? 그는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했습니다. 요셉은 다윗의 자손으로서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의롭다는 말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이 일을 생각할 때 심히 고민이 되었지만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는 가운데 문제를 풀고자 했습니다. 요셉은 신중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조용하게 생각하고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특히 그는 고민이 될 때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생각을 많이 한 것 같습니다. 대개 사람들이 고민을 많이 하고 잠이 들면 악몽을 꿉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요셉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그의 고민을 해결해 주셨습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하나님의 뜻을 찾고자 할 때 침묵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하셨다는 것은 아담의 피를 이어받지 않으신 죄 없으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그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완전한 중보자가 되십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예수란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분이십니다. 자기 백성의 죄란 무엇입니까? 자기 백성은 좁은 의미로는 택한 백성 이스라엘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말씀으로 자기들을 가르치는 대신에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잣대로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2장 1절에서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고 고소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같은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회개치 않음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멸시하는 죄악이었습니다. 바울은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2:4,5)”고 슬퍼하고 있습니다.
택한 백성들의 또 다른 죄는 외식하는 죄였습니다. 자기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치 않으면서도 거룩한 척, 순종하는 척, 믿음이 있는 척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죄는 척보면 알 수 있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은 없기 때문에 시련을 당할 때 그 허약함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이렇게 죄를 짓게 되는 근본 이유는 그들이 배운 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하나님께 대한 불신에서부터 죄가 시작된다는 것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 이스라엘의 죄에 대해서 책망하시면서 믿음이 없고 패역한 시대라고 하셨습니다(마17:17).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치 않고 살아계신 하나님과 그 말씀을 믿지 않을 때 우리는 죄의 노예가 됩니다. 그들은 시대 분위기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쾌락을 추구한다고 자신들도 쾌락을 추구하고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한다고 그들도 이기적이 되어서 하나님보다 자기를 더 사랑하고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했습니다. 우리 시대의 죄는 음란하고 정욕적이고 무정한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적이고 폐쇄적인 마음을 가지고는 자유분방하고 개방적인 시대를 섬길 수 없습니다. 거룩하신 예수님께서 어떻게 음란한 백성들을 구원하십니까?
23절을 보십시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우리가 받게 되는 축복은 무엇입니까? 무엇보다 우리는 그렇게 막연했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알게 된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1:18).” 사도 요한은 이렇게 그 은혜를 찬송하였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할 때 죄사함의 은혜를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들과 함께 하심으로서 구원하십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죄인들의 친구로서 그들의 문제에 공감하시면서 다가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과 같이 유치해지셨습니다. 심지어 제자들과 함께 있다 보니 먹기를 탐한다는 비난도 들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백성들의 고난에 동참하셔서 위로하시고 친히 그 죄의 대가를 짊어 지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함께하심으로 우리의 고통과 문제를 이해하시고 공감하시면서 바른 길로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누구와 함께 하는가에 따라서 말투나 삶이 달라집니다. 한 목자님 가정은 남편된 목자님이 고기를 안 먹으니까 사모님이 육식을 좋아하지만 고기 반찬을 만들지 않게 되고 자연히 채식 위주로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우리는 죄를 깨우치고 거룩하고 사랑과 은혜가 넘치는 삶을 닮아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자신감이 생기고 두려움이 없어지고 불가능한 일도 가능하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그 삶이 밝아집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을 때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거하시면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게 하십니다. 우리는 복음서를 깊이 공부할 때 예수님의 인격을 닮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목자로서 친히 우리의 삶을 인도해 주십니다.
요셉은 잠을 깨어 일어나서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 아내 마리아를 데려왔습니다. 그러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였습니다. ‘예수’란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유일한 구원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를 모든 악과 시험에서 구원하시고 생명의 길, 복된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이 시간 우리가 구원자 예수님을 마음 깊이 영접하고 믿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죄사함과 평화를 주시고 하나님 나라를 주셨습니다. 이번 성탄의 은혜가 북한 주민들과 세계에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화가 한반도를 중심으로 세계에 퍼지기를 기도합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