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강 성탄2강/사9장/한 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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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성탄 말씀 제 1 강
말씀 / 이사야 9:1-7
요절 / 이사야 9:6
한 아기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예수님은 2006년 전에 중동 이스라엘 베들레헴에서 한 아기로 태어났습니다. 아기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나심으로 역사가 바뀌게 되었습니다. 역사는 그의 이야기(His story)입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 세계에는 평화가 찾아오고 구원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BC733년경에 메시야의 탄생에 대한 예언을 하셨습니다. 그 당시는 매우 어두웠는데 예수님이 오실 당시에도 그러했습니다. 우리는 큰 빛으로 오신 예수님과 예언된 그의 이름을 생각해 보는 가운데 성탄의 의미를 새기고자 합니다.
I. 큰 빛으로 오신 예수님 (1-5)
1절을 보십시오. “전에 고통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은 북이스라엘의 경계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이 지역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열 두 지파에게 분배한 땅이었습니다. 스불론과 납달리는 예수님께서 거주하셨던 갈릴리 지역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장하신 곳은 스불론 땅 나사렛이었고 그의 공생애의 본거지는 납달리 지역 해변의 가버나움이었습니다. 그는 공생애의 대부분을 이 지역에서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스불론과 납달리 지역은 변방이었기 때문에 외적의 침입을 받으면 가장 먼저 공격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왕 베가 때에 앗수르 왕 디글랏빌레셀이 침공하여 갈릴리와 납달리 온 땅을 취하고 그 백성을 사로잡아 앗수르로 옮겨갔습니다(왕하15:29). 그리고 앗수르 사람들을 이스라엘로 이주를 시켰습니다. 이로 인해서 갈릴리 지방은 이방인과 혼혈이 되고 우상 숭배가 만연하게 되었습니다. 갈릴리 땅은 매우 음란하고 강포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동족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방인 취급을 받고 멸시를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사람들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조소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그곳에서 많은 귀신들린 자들을 고치고 병자들을 치료한 것을 보면 그 땅이 얼마나 황폐되었었는가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한마디로 흑암 가운데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흑암 가운데 있는 삶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방탕과 술 취함, 음란과 호색, 쟁투와 시기,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는” 삶이라고 했습니다(롬13:13).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습니다(골 1:13). 흑암의 권세란 죄와 죽음의 권세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죄의 권세는 우리의 영혼을 어둡게 하고 암세포와 같이 병들이고 멸망으로 빠뜨립니다. 우리 시대는 각종 퇴폐 문화, 그릇된 가치관, 안일과 정욕, 탐욕 등 매우 어둡습니다. 대학생들은 성윤리가 매우 자유로와서 대학생의 73%가 혼전 성 관계를 가져도 좋다고 응답했습니다. 동거족들이 꾸준히 늘어나고 있고 동성애클럽들이 버젓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동성애는 예술의 절정으로 취급되고 있습니다. 청소년 사역자들은 우리 시대의 어두움에 접하고 도망치고 싶다고 고백합니다.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좋을지 알 수 없다고 합니다. 대통령 후보들의 공통된 공약 중 하나가 부패 청산입니다. 그런데 그 공약은 대통령 선거 때마다 한 번도 제외된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희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은 영적으로 죽은 자를 가리킵니다. 그들은 사망의 그늘이 드리우고 있어서 삶의 의욕이 없고 무의미에 시달리고 허무했습니다. 사람이 오래 살려면 삶의 의미를 느껴야 한다고 합니다. 베트남 전쟁 당시 포로가 된 미군들이 수없이 죽어갔지만 삶의 의미를 찾았던 사람들은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삶의 의미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은 빨리 죽고 싶은 것입니다. 그들은 살았으나 죽은 인생입니다. 더 이상 살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불행한 사람들입니까? 깜깜한 밤에는 담뱃불도 밝게 빛납니다. 하물며 그들에게 큰 빛이 비취이면 어떤 역사가 일어나겠습니까? 모든 어두움이 물러가게 됩니다. 어두운 생각, 패배적인 생각, 운명적이고 슬픈 생각들이 물러가게 됩니다. 그리고 밝고 희망차고 긍정적이고 섭리에 기초한 생각을 합니다. 빛이 비추이면 사람이 살아나게 됩니다. 빛되신 예수님으로 인해서 우리는 새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삶의 의미를 찾고 의욕을 회복하고 비전을 보게 됩니다. 밝은 태양 빛이 비추이는 것을 보면 우리는 기쁨을 느낍니다. 빛 가운데 있으면 일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참 빛이시요, 큰 빛이십니다. 예수님은 돋는 해가 되십니다.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습니다(고후 4:6). 그로 인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자신을 알게 되었습니다. 빛도 여러 가지입니다. 가시광선은 우리가 볼 수 있는 빛으로서 사물을 아름답게 합니다. 그런데 적외선은 육안으로 볼 수 없지만 세균을 죽입니다. 큰 빛이 비추이면 우리 속에 있는 죄의 소원을 죽입니다. 큰 빛은 치료하는 광선으로서 죄로 인한 상처를 치료하고 건강한 삶을 살게 합니다. 거룩한 소원을 갖게 합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을 때 그의 얼굴이 빛나서 사람들이 쳐다볼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빛되신 하나님의 영광을 볼 때 우리는 세상의 빛으로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간절히 기도할 때 우리의 영혼에 하나님의 빛이 비추이게 되면 우리의 얼굴도 빛이 납니다. 우리의 선한 행동을 통해서 어두운 세상을 밝게 비추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또 해는 에너지를 줍니다. 이와 같이 흑암에 행하던 백성들에게 큰 빛이 비취므로 의욕을 갖고 살게 되는 놀라운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주님의 얼굴 빛이 여러분 각자의 심령에 항상 환하게 비추이기를 기도합니다.
빛이 비추이면 즐거움이 임합니다. 3,4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케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누는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의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이는 그들의 무겁게 멘 멍에와 그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주께서 빛을 비추시자 그 나라가 창성케 됩니다. 창성하게 된다는 것은 숫자가 많아지는 것으로서 예수님께서 다스리시는 교회가 번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다스림을 받을 때 그 나라도 창성하게 되고 영적인 이스라엘 즉 교회도 왕성하게 됩니다. 교회가 왕성해지면 즐거움도 많아지게 됩니다. 그 즐거움은 추수하는 즐거움과 같을 것이요 탈취물을 나누는 즐거움과 같습니다. 탈취물을 나누는 것은 승리자의 즐거움입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죽음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승리의 소식입니다. 우리의 죄문제를 해결하셨다는 기쁜 소식, 좋은 소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백성을 억압하던 원수 마귀를 물리치시고 우리에게 죄사함과 자유를 주셨습니다. 이것은 300명의 기드온 군대가 13만 오천명 이상 되는 미디안 군대를 하나님의 권능으로 이긴 것보다 더 큰 승리입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권능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또 교회와 나라가 창성하게 되면 자유가 있고 경제적인 풍요가 있고 평화가 따라옵니다.
지금 우리 나라는 많은 사람들이 카드 빚의 멍에를 메고 있습니다. 카드 빚을 독촉하는 사람들로 인해서 자살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생활고의 멍에를 메고, 학업의 스트레스와 취직걱정을 하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빨리 빨리 돌아가는 시대에 살면서 사람들은 조급해지고 이로 인해서 고혈압, 위염, 우울증과 스트레스에 시달립니다. 속도가 생명인 시대에 우리는 여유를 가지고 살아가기 위해서 느림의 철학을 배워야 합니다. 믿음으로 하나님께 맡기고 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빨리 승진하는 사람은 빨리 은퇴해야 합니다. 빨리 빨리가 능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2000년 동안 메시야를 보내고자 준비하시고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각종 멍에와 억압과 채찍으로부터 자유하게 하십니다. 이번 성탄에 주님으로 인해서 즐거움을 풍성히 누리시기를 기도합니다.
큰 빛이 흑암 가운데 있는 백성들에게 비췸으로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진정한 평화가 도래합니다. 5절을 보십시오.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의 갑옷과 피묻은 복장이 불에 섶같이 살라지리니” 전쟁에 필요한 군복이 필요없게 되어 전부 불살라지게 됩니다. 전쟁 무기가 경제 도구로 변합니다. 미국이나 러시아 등 강대국들의 핵폭탄과 미사일들이 모두 폐기됩니다. 북한 핵 문제로 인한 긴장이나 두려움이 없어지고 UN이 필요없게 됩니다. 그때 형제들은 군대 문제로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평신도목자님들도 예비군이나 민방위 훈련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군비 경쟁에 들어가는 돈으로 경제를 살리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데 쓸 수 있습니다. 쾰른 센터는 옛날에 무기 공장이었는데 지금은 복음의 전당으로 쓰임 받고 있습니다. 이 모든 축복이 큰 빛으로 오시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주어집니다. 그러면 이 모든 일을 가능하게 하시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II. 예수님의 이름 (6,7)
6절을 보십시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예수님은 그 어깨에 정사를 메었습니다. 이는 우주적 통치권을 가지고 계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는 세상 모든 왕들의 왕이시요, 땅의 임금의 머리가 되십니다. 그는 이 세계를 그 뜻대로 섭리하십니다. 그의 통치권은 온 우주와 만물에게 까지 미칩니다. 세계의 역사도 그가 주관하십니다. 위협과 강압이 아니라 섬김과 평화와 의로서 다스리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이름이 나타내는 바 메시야의 성품과 하실 일은 무엇입니까?
첫째, 기묘자. 기묘자란 예수님이 이름을 알 수 없으신 분, 불가사의한 존재임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의 탄생, 교훈, 행위, 죽음, 부활 등 모든 것이 기묘합니다. 그는 만물이 조성되기 전에 계셨습니다. 그리고 처녀 마리아를 통해서 성육신하신 것도 기묘합니다. 그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임에도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고 원수들의 조롱과 야유를 묵묵히 견디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죄를 씻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쏟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우리에게 죄사함을 주시는 것도 신비하기만 합니다. 그는 지금 성령으로 우리 각자의 마음 속에 내주하십니다. 그리고 장차 악한 세상을 심판하시고 재림하셔서 우리를 영원히 하나님 나라에서 살게 하십니다. 그는 참으로 기묘한 분이십니다. 그는 인간성을 초월한 기이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신앙 생활을 하면서 예수님께서 얼마나 신기하신 분인가 체험해 나갑니다.
둘째, 모사. 그는 지혜가 무궁한 분이십니다. 그는 지혜로 이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고 운행하시며 섭리하십니다. 이 세상이 그리스도의 지혜를 받았더라면 벌써 진정한 화평 가운데 지냈을 것입니다. 그는 인간의 모든 문제를 완전한 지혜로 해결하십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다 아시고 이해해 주시고 공감해 주시고 변호해주십니다. 남편을 다섯이나 두고 있던 목마른 사마리아 여인에 대한 예수님의 카운슬링을 보십시오. 연약해서 쉽게 상처받는 그녀를 내면 깊이 이해하시고 영생수가 터지도록 도우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잡아와서 돌로 치고자 했을 때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심으로 여인을 구원하셨을 뿐만 아니라 모인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를 돌아보게 하셨습니다. 그는 서로 최고가 되려고 하는 제자들에게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말씀하심으로 모두가 위대하게 되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의 지혜는 사람을 살리고 생명을 풍성하게 하고 어두운 세상을 밝게 비춥니다. 우리는 양을 섬기다가, 또 이 세상에서 일을 하다가 지혜가 모자라 막힐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모사이신 주님께 나아가 구할 때 지혜를 주십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약 1:5,6).”
셋째,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지혜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실행할 힘까지 가지고 계신 전능한 하나님이십니다. 전능하신 예수님은 죽은 지 나흘 된 나사로를 그 무덤에서 일으켜 살리셨습니다.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을 불쌍히 여기사 관에서 일으켜 살리셨습니다. 12년 동안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을 깨끗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람과 파도를 잔잔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인 분이십니다.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요11:40). 우리는 전능하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선한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려움 가운데 있는 우리의 진정한 도움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해진 무릎을 일으켜 세우시고 다스리고 정복하는 인생을 살게 도우십니다.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으로서 경배의 대상이십니다.
넷째, 영존하시는 아버지. 우리들의 육신의 아버지는 잠시 후에 떠나지만 하나님 아버지는 영원히 함께 거하십니다. 예수님은 삼위일체의 신비를 가지고 계신 분이십니다. 여기서 영존하시는 아버지란 삼위 하나님의 상호관계적인 명칭과는 무관한 내용입니다. 즉 하나님의 신성과 관계적인 측면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를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에게 영존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아담은 우리의 대표자로서 아버지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대표자로서 아버지가 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새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생명의 부여자이십니다. 또 우리 믿음의 시작이며 완성자이십니다. 그는 사랑이 넘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우리 시대에 아버지 문제는 크고 심각합니다. 아버지에게 받은 상처도 많고, 아버지의 연약함으로 인해서 슬픔을 당하기도 합니다. 또 아버지가 사랑이 아무리 많고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90세를 넘기지 못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영존하시는 아버지로 인해서 무한한 사랑을 받고 안전하게 보호를 받습니다. 영존하시는 아버지는 우리의 인생을 책임져 주십니다. 예수님은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 로서 시작한 날도 없고 끝도 없는 분이십니다. 그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한 분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영존하시는 아버지로 경외하고 섬깁니다.
다섯째, 평강의 왕. 그는 하늘로부터 오는 평화를 선물로 주십니다. 본래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는 인간의 죄로 인하여 불화의 담이 높이 쳐져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화목제물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사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고 죄의 담을 허물어 버리셨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화평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또 인간과 인간 사이에 갈등과 불화를 없애기 위해 예수님께서 우리들의 마음 속에 들어 오셔서 평화를 회복하여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쟁의 위협으로 인해 항상 불안과 두려움 가운데 살아왔습니다. 그들은 전쟁이 없는 평화의 시대, 고통이 없는 시대를 갈구했습니다. 그 평화의 시대가 바로 도래할 메시야의 시대라고 믿었습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사 승리하신 것은 모든 대적들로부터 성도들에게 평강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주님께서 말구유에 탄생하셨을 때 천군 천사들이 다음과 같이 찬양을 하였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4).” 예수님의 탄생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예수님을 영접한 자들에게는 평화가 임하게 되리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항상 불안과 두려움 가운데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의 죄 때문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 후 두려움과 불안 가운데 있었습니다. 가인은 질투 컴플렉스로 동생 아벨을 죽인 후 불안과 두려움과 방황 가운데서 살아야만 했습니다. 한 아이로 오신 예수님을 우리가 영접하고 믿지 못할 때 우리도 두려움과 염려와 불안 가운데서 방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불안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지 못한 데서 오는 실존적인 문제입니다. 요즘에 젊은 지성인들은 장래에 대한 염려, 취직에 대한 염려, 인간 관계로 인한 염려, 건강에 대한 염려 등으로 불안과 두려움 가운데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에서 말씀하셨습니다. “평화를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 하지도 말라(요 14:27).”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을 때 참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을 항상 심령에 모시고 평강을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 평강을 계속 누릴 수 있습니까? 7절을 보십시오.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메시야의 통치와 평강은 끝없이 무궁하며 영원하리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공평과 정의로 다스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예언한 말씀을 700백년 후에 그대로 이루셨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신 것입니다. 열심이란 말은 시기를 뜻합니다. 이것은 좋은 의미의 시기인데 곧 자기의 사랑하는 백성을 원수에게 빼앗기지 않으시려는 뜨거운 마음을 가리킵니다. 구원에 대한 열심이 넘쳐서 독생자까지도 내어 놓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열심을 배워야 합니다. 열심을 내는 주님과 그 종이 있는 한 세상은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시겠다던 정의와 공평으로 다스리는 영원한 나라를 반드시 이루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희망이요 온 인류의 희망이십니다.
결론적으로 한 아기 예수님은 기묘자요, 모사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존하시는 아버지요, 평강의 왕이십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한 아기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성탄을 맞이하여 우리는 우리 중심에 한 아기로 오신 구주를 새롭게 영접해야 겠습니다. 그리고 평강과 즐거움을 누리고 예수님을 가족과 이웃과 친구들에게 전하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이사야 9:1-7
요절 / 이사야 9:6
한 아기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예수님은 2006년 전에 중동 이스라엘 베들레헴에서 한 아기로 태어났습니다. 아기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나심으로 역사가 바뀌게 되었습니다. 역사는 그의 이야기(His story)입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 세계에는 평화가 찾아오고 구원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BC733년경에 메시야의 탄생에 대한 예언을 하셨습니다. 그 당시는 매우 어두웠는데 예수님이 오실 당시에도 그러했습니다. 우리는 큰 빛으로 오신 예수님과 예언된 그의 이름을 생각해 보는 가운데 성탄의 의미를 새기고자 합니다.
I. 큰 빛으로 오신 예수님 (1-5)
1절을 보십시오. “전에 고통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은 북이스라엘의 경계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이 지역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열 두 지파에게 분배한 땅이었습니다. 스불론과 납달리는 예수님께서 거주하셨던 갈릴리 지역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장하신 곳은 스불론 땅 나사렛이었고 그의 공생애의 본거지는 납달리 지역 해변의 가버나움이었습니다. 그는 공생애의 대부분을 이 지역에서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스불론과 납달리 지역은 변방이었기 때문에 외적의 침입을 받으면 가장 먼저 공격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왕 베가 때에 앗수르 왕 디글랏빌레셀이 침공하여 갈릴리와 납달리 온 땅을 취하고 그 백성을 사로잡아 앗수르로 옮겨갔습니다(왕하15:29). 그리고 앗수르 사람들을 이스라엘로 이주를 시켰습니다. 이로 인해서 갈릴리 지방은 이방인과 혼혈이 되고 우상 숭배가 만연하게 되었습니다. 갈릴리 땅은 매우 음란하고 강포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동족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방인 취급을 받고 멸시를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사람들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조소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그곳에서 많은 귀신들린 자들을 고치고 병자들을 치료한 것을 보면 그 땅이 얼마나 황폐되었었는가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한마디로 흑암 가운데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흑암 가운데 있는 삶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방탕과 술 취함, 음란과 호색, 쟁투와 시기,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는” 삶이라고 했습니다(롬13:13).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습니다(골 1:13). 흑암의 권세란 죄와 죽음의 권세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죄의 권세는 우리의 영혼을 어둡게 하고 암세포와 같이 병들이고 멸망으로 빠뜨립니다. 우리 시대는 각종 퇴폐 문화, 그릇된 가치관, 안일과 정욕, 탐욕 등 매우 어둡습니다. 대학생들은 성윤리가 매우 자유로와서 대학생의 73%가 혼전 성 관계를 가져도 좋다고 응답했습니다. 동거족들이 꾸준히 늘어나고 있고 동성애클럽들이 버젓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동성애는 예술의 절정으로 취급되고 있습니다. 청소년 사역자들은 우리 시대의 어두움에 접하고 도망치고 싶다고 고백합니다.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좋을지 알 수 없다고 합니다. 대통령 후보들의 공통된 공약 중 하나가 부패 청산입니다. 그런데 그 공약은 대통령 선거 때마다 한 번도 제외된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희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은 영적으로 죽은 자를 가리킵니다. 그들은 사망의 그늘이 드리우고 있어서 삶의 의욕이 없고 무의미에 시달리고 허무했습니다. 사람이 오래 살려면 삶의 의미를 느껴야 한다고 합니다. 베트남 전쟁 당시 포로가 된 미군들이 수없이 죽어갔지만 삶의 의미를 찾았던 사람들은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삶의 의미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은 빨리 죽고 싶은 것입니다. 그들은 살았으나 죽은 인생입니다. 더 이상 살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불행한 사람들입니까? 깜깜한 밤에는 담뱃불도 밝게 빛납니다. 하물며 그들에게 큰 빛이 비취이면 어떤 역사가 일어나겠습니까? 모든 어두움이 물러가게 됩니다. 어두운 생각, 패배적인 생각, 운명적이고 슬픈 생각들이 물러가게 됩니다. 그리고 밝고 희망차고 긍정적이고 섭리에 기초한 생각을 합니다. 빛이 비추이면 사람이 살아나게 됩니다. 빛되신 예수님으로 인해서 우리는 새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삶의 의미를 찾고 의욕을 회복하고 비전을 보게 됩니다. 밝은 태양 빛이 비추이는 것을 보면 우리는 기쁨을 느낍니다. 빛 가운데 있으면 일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참 빛이시요, 큰 빛이십니다. 예수님은 돋는 해가 되십니다.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습니다(고후 4:6). 그로 인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자신을 알게 되었습니다. 빛도 여러 가지입니다. 가시광선은 우리가 볼 수 있는 빛으로서 사물을 아름답게 합니다. 그런데 적외선은 육안으로 볼 수 없지만 세균을 죽입니다. 큰 빛이 비추이면 우리 속에 있는 죄의 소원을 죽입니다. 큰 빛은 치료하는 광선으로서 죄로 인한 상처를 치료하고 건강한 삶을 살게 합니다. 거룩한 소원을 갖게 합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을 때 그의 얼굴이 빛나서 사람들이 쳐다볼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빛되신 하나님의 영광을 볼 때 우리는 세상의 빛으로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간절히 기도할 때 우리의 영혼에 하나님의 빛이 비추이게 되면 우리의 얼굴도 빛이 납니다. 우리의 선한 행동을 통해서 어두운 세상을 밝게 비추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또 해는 에너지를 줍니다. 이와 같이 흑암에 행하던 백성들에게 큰 빛이 비취므로 의욕을 갖고 살게 되는 놀라운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주님의 얼굴 빛이 여러분 각자의 심령에 항상 환하게 비추이기를 기도합니다.
빛이 비추이면 즐거움이 임합니다. 3,4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케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누는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의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이는 그들의 무겁게 멘 멍에와 그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주께서 빛을 비추시자 그 나라가 창성케 됩니다. 창성하게 된다는 것은 숫자가 많아지는 것으로서 예수님께서 다스리시는 교회가 번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다스림을 받을 때 그 나라도 창성하게 되고 영적인 이스라엘 즉 교회도 왕성하게 됩니다. 교회가 왕성해지면 즐거움도 많아지게 됩니다. 그 즐거움은 추수하는 즐거움과 같을 것이요 탈취물을 나누는 즐거움과 같습니다. 탈취물을 나누는 것은 승리자의 즐거움입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죽음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승리의 소식입니다. 우리의 죄문제를 해결하셨다는 기쁜 소식, 좋은 소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백성을 억압하던 원수 마귀를 물리치시고 우리에게 죄사함과 자유를 주셨습니다. 이것은 300명의 기드온 군대가 13만 오천명 이상 되는 미디안 군대를 하나님의 권능으로 이긴 것보다 더 큰 승리입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권능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또 교회와 나라가 창성하게 되면 자유가 있고 경제적인 풍요가 있고 평화가 따라옵니다.
지금 우리 나라는 많은 사람들이 카드 빚의 멍에를 메고 있습니다. 카드 빚을 독촉하는 사람들로 인해서 자살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생활고의 멍에를 메고, 학업의 스트레스와 취직걱정을 하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빨리 빨리 돌아가는 시대에 살면서 사람들은 조급해지고 이로 인해서 고혈압, 위염, 우울증과 스트레스에 시달립니다. 속도가 생명인 시대에 우리는 여유를 가지고 살아가기 위해서 느림의 철학을 배워야 합니다. 믿음으로 하나님께 맡기고 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빨리 승진하는 사람은 빨리 은퇴해야 합니다. 빨리 빨리가 능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2000년 동안 메시야를 보내고자 준비하시고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각종 멍에와 억압과 채찍으로부터 자유하게 하십니다. 이번 성탄에 주님으로 인해서 즐거움을 풍성히 누리시기를 기도합니다.
큰 빛이 흑암 가운데 있는 백성들에게 비췸으로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진정한 평화가 도래합니다. 5절을 보십시오.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의 갑옷과 피묻은 복장이 불에 섶같이 살라지리니” 전쟁에 필요한 군복이 필요없게 되어 전부 불살라지게 됩니다. 전쟁 무기가 경제 도구로 변합니다. 미국이나 러시아 등 강대국들의 핵폭탄과 미사일들이 모두 폐기됩니다. 북한 핵 문제로 인한 긴장이나 두려움이 없어지고 UN이 필요없게 됩니다. 그때 형제들은 군대 문제로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평신도목자님들도 예비군이나 민방위 훈련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군비 경쟁에 들어가는 돈으로 경제를 살리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데 쓸 수 있습니다. 쾰른 센터는 옛날에 무기 공장이었는데 지금은 복음의 전당으로 쓰임 받고 있습니다. 이 모든 축복이 큰 빛으로 오시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주어집니다. 그러면 이 모든 일을 가능하게 하시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II. 예수님의 이름 (6,7)
6절을 보십시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예수님은 그 어깨에 정사를 메었습니다. 이는 우주적 통치권을 가지고 계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는 세상 모든 왕들의 왕이시요, 땅의 임금의 머리가 되십니다. 그는 이 세계를 그 뜻대로 섭리하십니다. 그의 통치권은 온 우주와 만물에게 까지 미칩니다. 세계의 역사도 그가 주관하십니다. 위협과 강압이 아니라 섬김과 평화와 의로서 다스리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이름이 나타내는 바 메시야의 성품과 하실 일은 무엇입니까?
첫째, 기묘자. 기묘자란 예수님이 이름을 알 수 없으신 분, 불가사의한 존재임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의 탄생, 교훈, 행위, 죽음, 부활 등 모든 것이 기묘합니다. 그는 만물이 조성되기 전에 계셨습니다. 그리고 처녀 마리아를 통해서 성육신하신 것도 기묘합니다. 그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임에도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고 원수들의 조롱과 야유를 묵묵히 견디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죄를 씻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쏟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우리에게 죄사함을 주시는 것도 신비하기만 합니다. 그는 지금 성령으로 우리 각자의 마음 속에 내주하십니다. 그리고 장차 악한 세상을 심판하시고 재림하셔서 우리를 영원히 하나님 나라에서 살게 하십니다. 그는 참으로 기묘한 분이십니다. 그는 인간성을 초월한 기이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신앙 생활을 하면서 예수님께서 얼마나 신기하신 분인가 체험해 나갑니다.
둘째, 모사. 그는 지혜가 무궁한 분이십니다. 그는 지혜로 이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고 운행하시며 섭리하십니다. 이 세상이 그리스도의 지혜를 받았더라면 벌써 진정한 화평 가운데 지냈을 것입니다. 그는 인간의 모든 문제를 완전한 지혜로 해결하십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다 아시고 이해해 주시고 공감해 주시고 변호해주십니다. 남편을 다섯이나 두고 있던 목마른 사마리아 여인에 대한 예수님의 카운슬링을 보십시오. 연약해서 쉽게 상처받는 그녀를 내면 깊이 이해하시고 영생수가 터지도록 도우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잡아와서 돌로 치고자 했을 때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심으로 여인을 구원하셨을 뿐만 아니라 모인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를 돌아보게 하셨습니다. 그는 서로 최고가 되려고 하는 제자들에게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말씀하심으로 모두가 위대하게 되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의 지혜는 사람을 살리고 생명을 풍성하게 하고 어두운 세상을 밝게 비춥니다. 우리는 양을 섬기다가, 또 이 세상에서 일을 하다가 지혜가 모자라 막힐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모사이신 주님께 나아가 구할 때 지혜를 주십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약 1:5,6).”
셋째,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지혜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실행할 힘까지 가지고 계신 전능한 하나님이십니다. 전능하신 예수님은 죽은 지 나흘 된 나사로를 그 무덤에서 일으켜 살리셨습니다.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을 불쌍히 여기사 관에서 일으켜 살리셨습니다. 12년 동안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을 깨끗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람과 파도를 잔잔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인 분이십니다.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요11:40). 우리는 전능하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선한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려움 가운데 있는 우리의 진정한 도움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해진 무릎을 일으켜 세우시고 다스리고 정복하는 인생을 살게 도우십니다.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으로서 경배의 대상이십니다.
넷째, 영존하시는 아버지. 우리들의 육신의 아버지는 잠시 후에 떠나지만 하나님 아버지는 영원히 함께 거하십니다. 예수님은 삼위일체의 신비를 가지고 계신 분이십니다. 여기서 영존하시는 아버지란 삼위 하나님의 상호관계적인 명칭과는 무관한 내용입니다. 즉 하나님의 신성과 관계적인 측면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를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에게 영존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아담은 우리의 대표자로서 아버지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대표자로서 아버지가 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새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생명의 부여자이십니다. 또 우리 믿음의 시작이며 완성자이십니다. 그는 사랑이 넘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우리 시대에 아버지 문제는 크고 심각합니다. 아버지에게 받은 상처도 많고, 아버지의 연약함으로 인해서 슬픔을 당하기도 합니다. 또 아버지가 사랑이 아무리 많고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90세를 넘기지 못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영존하시는 아버지로 인해서 무한한 사랑을 받고 안전하게 보호를 받습니다. 영존하시는 아버지는 우리의 인생을 책임져 주십니다. 예수님은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 로서 시작한 날도 없고 끝도 없는 분이십니다. 그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한 분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영존하시는 아버지로 경외하고 섬깁니다.
다섯째, 평강의 왕. 그는 하늘로부터 오는 평화를 선물로 주십니다. 본래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는 인간의 죄로 인하여 불화의 담이 높이 쳐져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화목제물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사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고 죄의 담을 허물어 버리셨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화평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또 인간과 인간 사이에 갈등과 불화를 없애기 위해 예수님께서 우리들의 마음 속에 들어 오셔서 평화를 회복하여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쟁의 위협으로 인해 항상 불안과 두려움 가운데 살아왔습니다. 그들은 전쟁이 없는 평화의 시대, 고통이 없는 시대를 갈구했습니다. 그 평화의 시대가 바로 도래할 메시야의 시대라고 믿었습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사 승리하신 것은 모든 대적들로부터 성도들에게 평강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주님께서 말구유에 탄생하셨을 때 천군 천사들이 다음과 같이 찬양을 하였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4).” 예수님의 탄생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예수님을 영접한 자들에게는 평화가 임하게 되리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항상 불안과 두려움 가운데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의 죄 때문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 후 두려움과 불안 가운데 있었습니다. 가인은 질투 컴플렉스로 동생 아벨을 죽인 후 불안과 두려움과 방황 가운데서 살아야만 했습니다. 한 아이로 오신 예수님을 우리가 영접하고 믿지 못할 때 우리도 두려움과 염려와 불안 가운데서 방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불안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지 못한 데서 오는 실존적인 문제입니다. 요즘에 젊은 지성인들은 장래에 대한 염려, 취직에 대한 염려, 인간 관계로 인한 염려, 건강에 대한 염려 등으로 불안과 두려움 가운데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에서 말씀하셨습니다. “평화를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 하지도 말라(요 14:27).”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을 때 참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을 항상 심령에 모시고 평강을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 평강을 계속 누릴 수 있습니까? 7절을 보십시오.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메시야의 통치와 평강은 끝없이 무궁하며 영원하리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공평과 정의로 다스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예언한 말씀을 700백년 후에 그대로 이루셨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신 것입니다. 열심이란 말은 시기를 뜻합니다. 이것은 좋은 의미의 시기인데 곧 자기의 사랑하는 백성을 원수에게 빼앗기지 않으시려는 뜨거운 마음을 가리킵니다. 구원에 대한 열심이 넘쳐서 독생자까지도 내어 놓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열심을 배워야 합니다. 열심을 내는 주님과 그 종이 있는 한 세상은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시겠다던 정의와 공평으로 다스리는 영원한 나라를 반드시 이루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희망이요 온 인류의 희망이십니다.
결론적으로 한 아기 예수님은 기묘자요, 모사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존하시는 아버지요, 평강의 왕이십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한 아기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성탄을 맞이하여 우리는 우리 중심에 한 아기로 오신 구주를 새롭게 영접해야 겠습니다. 그리고 평강과 즐거움을 누리고 예수님을 가족과 이웃과 친구들에게 전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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