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강 성탄1강/요3장16/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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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성탄 말씀 제 1 강
말씀 / 요한복음 3:16-21
요절 / 요한복음 3:16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는 성탄 시즌을 맞이하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의미를 깊이 새겨야겠습니다.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은 아무리 묵상을 해도 그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다 알 수 없습니다. 또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믿음과 영적 안목이 자랄수록 더욱 깊어짐을 깨닫습니다. 이 시간 주님의 사랑이 우리 가슴에 밀물처럼 들어오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이 주님의 사랑을 방황하는 이 시대 지성인들에게 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슬픔과 비극이 있어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을 믿기가 어렵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문제를 바라보고, 어떤 사람들은 가족들의 문제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사랑한다고 믿지 못합니다. 여중생 두 명이 장갑차 바퀴에 깔려 죽었는데 무죄라고 하는 세상을 볼 때 하나님이 이 세상을 사랑하신다는 말을 믿기가 어렵습니다. 지금 직장을 잡지 못해서 먹고 살기도 힘든데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고 하니 믿기가 어렵습니다. 이로 인해서 사람들의 마음은 매우 어둡고 슬프고 운명적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우리는 피조물이고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하실 때만이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을 때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만물의 영장으로 세우셨습니다. 인간에게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하시며 사명을 주셨습니다. 인간은 사명의 존재인 동시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고귀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다고 소감을 발표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을 만드시고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셨습니다. 인간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결혼제도를 창설하시고 작은 천국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베푸신 것들은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인간은 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해서 일생토록 감사해도 부족합니다.
그러나 사단의 꾀임에 빠져서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하나님이 주신 계명에 불순종하였습니다. 심지어 자기가 하나님이 되고자 하나님께 대적하고 배반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깨닫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 세상에 의인은 하나도 없게 되었습니다(롬 3:10-12). 하나님께서 노아 시대에 홍수로 한번 쓸어 버리셨는데도 인간은 변함없이 죄악되었습니다. 전에는 우리도 다 이 세상 풍속을 좇아 살았습니다. 음란하고 더럽고 거짓되고 교만하고 속이고 탐욕스럽고 이기적이었습니다. 시기하고 미워하고 불평하고 증오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 욕을 하고 자신의 인생을 저주했습니다. 우리는 사단의 똘마니가 되어 불순종하며 지냈습니다.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었습니다(엡 2:1-3).
그러나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합니까? 16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런 놀라운 마음을 품으셨을까요? 어떻게 자기를 배반하고 대적하는 자에 대해서 사랑하는 마음을 품을 수 있었을까요? 우리 같으면 이런 세상을 못 본체 하며 심판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이는 마치 부모가 자식을 포기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부모는 자식이 감옥에 갔다고 해서 내팽개칠 수 없습니다. 집 나간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변함없이 죄인들을 사랑하시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은 본성이 사랑이십니다. 무한한 사랑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태평양보다 더 넓고 깊습니다. 끊임없이 솟아나는 사랑을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무지와 연약함을 아십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이는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요나서에 보면 하나님은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할 때 용서하시는 분이심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요나 4:11). 죄가 죄인지도 모르고 병에 걸렸지만 죽어가는 지도 모르고 있는 인생들을 하나님은 깨우치기를 원하십니다. 사탄은 다시는 회개할 수 없는 존재이지만 인간은 회개할 수 있고 회복될 수 있다는 소망을 가지고 계시기에 하나님은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사랑에 대해서 혼돈에 빠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랑을 연애 감정으로 잘못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사랑은 전기가 통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사랑은 결단이요, 사랑하고자 하는 의지라고 가르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명령은 순종하도록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장 사랑할 수 없는 사람조차도 사랑하고자 결단해야 합니다. 참된 사랑은 다른 사람을 살리고 세웁니다. 참된 사랑은 이기적이거나 자기 중심적이 아닌 타인 중심적이고 희생적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심으로 그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는 이 세상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보여 주셨습니다.
둘째, 독생자를 주셨으니. 하나님의 사랑은 주는 사랑입니다. 16절을 다시 보십시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받았을 때 사랑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은 아버지가 자기가 원하는 선물을 주면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만 자기가 원하는 선물을 주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는다고 느낍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먼저 주는 사랑입니다. 성경은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되도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삶의 위대한 비밀입니다. 사랑은 주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사랑하셨지만, 이 세상의 죄를 속하기 위해서 그를 포기하시고 희생제물로 주셨습니다. 그는 아들을 궁전에 왕자로 보내지 않으시고 말구유에 누이시고,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서 평범하게 살게 하셨습니다. 그는 섬김을 받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주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는 자기의 시간을 주시고, 마음을 주시고, 목자없는 양들로 가득한 이 세상에 사랑을 주셨습니다. 그는 제자들을 부르시고 자기를 따라오라고 하시면서 희생적인 사랑으로 섬기셨습니다. 요일 4:9,10절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 독생자를 주시는 사랑은 가장 귀한 사랑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은 독생자를 팔아서 우리를 사셨습니다. 그만큼 나 같은 죄인을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에게 있어서 가장 귀하고 사랑하시는 분이고 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분이신데 이 분을 희생해서 나 같은 죄인을 그 피로 사셨습니다. 영원하고 측량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원수까지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셨다는 것은 우리의 죄문제를 완전히 해결 하셨다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1%의 선행이나 눈물겨운 기도의 투쟁이나 노력도 요구하지 않고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우리는 값없이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조건없이 다른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셨다는 것은 그가 하실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다는 최대의 사랑이요, 완전한 사랑입니다.
셋째,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16절을 다시 보십시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인간은 죄로 인해서 멸망 받아 마땅한 상태였습니다. 사람들은 죽으면 그만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 9:27)”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 21:8).” 지옥은 소멸이 아닙니다. 지옥은 회개하지 않는 죄인이 가는 곳입니다. 거기는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구원자 예수님을 거부한 사람들이 가는 곳입니다. 그곳은 ‘꺼지지 않는 불’(막 9:43),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 곳’(막 9:48),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곳’(마 25:30),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마 25:41)이 있는 곳으로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끝내 거부한 자가 가는 가장 두려운 곳입니다. 계시록에 의하면, 그 곳은 ‘유황불 붙는 못’(계 19:20,20:10,21:8)임을 보여주고도 있습니다. 지옥은 하나님과의 교통이 단절된 곳이요 불에 의한 고뇌가 심한 곳입니다. 죄인들과 함께 영원히 그곳에서 고통을 당하면서 산다는 것은 생각하기만 해도 끔찍합니다. 우리는 죄라는 것이 이렇게 심각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심판 받아 마땅한 죄인들의 죄를 씻기고 영생을 주기 위하여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해주셨습니다. 이제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에 이르는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러면 영생이 무엇입니까? 영생은 그냥 오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영생은 먼저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영적 생명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천지차이입니다. 영생은 사람이 죄사함을 받는 것으로서 수치심과 죄의식과 심판으로부터 자유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자녀로서 성장하게 되며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됩니다. 장차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면 우리의 썩을 몸이 썩지 아니할 몸으로 변화되어 천국 생활을 하게 됩니다. 영생에는 기쁨, 자유, 만족, 행복, 활력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생이 없는 삶은 죄로 인해서 죽은 삶입니다. 살아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꽃병의 꽃과 같이 뿌리가 생명으로부터 잘려 나간 것입니다. 죄는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죄인을 분리시킵니다. 그는 살았으나 죽은 자입니다. 죄로 인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인생은 삶의 의미가 없습니다. 목적도 없습니다. 방향도 없고 진정한 소망도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를 믿는 자에게 영생수를 주시고 기쁨과 평화로 충만하게 하시고 인생 목적과 방향을 분명하게 하십니다. 예수님이 우리 마음에 거하시면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의 종노릇한 데서 자유케됩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선한 의지로 가득하여 선한 일에 열심을 내고 거룩한 삶을 살게 됩니다. 능력있게 사명을 감당합니다. 다스리고 정복하며 열매가 풍성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면 구원을 어떤 사람이 받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자입니다. 구약에서는 본래 율법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지켜야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제정하신 규례와 법도를 행하면 살리라고 하셨습니다(레 18:5). 그런데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수준의 의에 이를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인간은 선 의지가 부패해서 아무도 선을 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값없이 구원 받는 길을 열어 놓으셨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매우 어렵습니다. 그렇게 어려운 이유가 무엇일까요? 무엇보다 자기 힘으로 구원에 이르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종교는 두 개로 나눌 수 있습니다. 자기 힘으로 구원에 이르고자 하는 종교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에 이르는 종교입니다. 그런데 기독교 외에는 모두가 다 자기 힘으로, 자기의 선행으로 구원에 이르는 종교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힘으로 구원에 이르는 것이 떳떳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의롭게 살려고 몸부림치는 사람은 절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율법대로 살아보려고 애를 쓰다가 절망에 빠졌습니다. 루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들도 다 그런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더러운 걸레로 더러운 바닥을 땀을 흘리면서 닦아 보십시오. 여전히 더럽습니다. 죄없는 사람만이 죄를 속할 수가 있습니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구원에 이를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구원자를 보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자기의 죄가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그래서 자기 의를 주장하면서 예수님을 거부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단이 심은 교리로 인해서 예수님을 믿기가 어렵습니다. 사단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회의와 의심의 독화살을 쏘아댑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도 사탄이 심은 의심의 독화살에 맞고 쓰러졌습니다. 인간이 교만해져서 하나님의 선물을 우습게 보고 배척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어떤 죄인인지를 발견해야 합니다. 그때 겸손하게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공부하게 되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죄인인지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바로 나와 여러분을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구원자이십니다.
독생자를 믿는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요1:12절은 말씀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내 마음의 중심에 영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3:20)”고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됩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씻기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실을 믿을 때 구원을 받습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 차례가 되자 그는 즉시 이를 거절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요13:8).” 베드로는 즉시 태도를 바꾸었습니다. 사랑을 거절당하면 매우 고통스럽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서 양들을 사랑하고 섬기는데 어느 날 그 양이 등을 돌리게 되면 깊이 상처를 받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하면 하나님도 상처를 받으십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까?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우리 마음에 예수님을 영접할 때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때 우리 마음에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은 순종해야 하는 명령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요14:21)”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 서로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영생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아무 대가 없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삶입니다.
넷째, 세상에 오신 빛.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입니다(17).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선입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무서운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십니다(딤전 2:4).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않지만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이 상태로 계속 나가면 심판이 더욱 가중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죄로 인해서 현재도 고통을 당하고 있고 상처가 있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어두움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죄가 주는 쾌락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쾌락은 매우 일시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 뒤에는 허무와 허탈과 무의미가 찾아옵니다. 악을 행하는 사람들은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않습니다.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두렵기 때문입니다(20). 그래서 자신들의 죄를 감추고자 합니다. 그럴싸하게 죄를 합리화합니다. 매우 뻔뻔스럽게 행동합니다. 죄를 지적하면 인권 침해로 몰고 갑니다. 그래도 안되면 다른 사람에게 죄를 전가시킵니다. 부모를 탓하고 사회를 탓하고 심지어 조상을 탓하면서 자기는 전혀 잘못이 없다고 합니다. 도리어 피해자라고 주장합니다. 거짓의 사람들은 나름대로 논리가 있습니다. 또한 죄는 세력이 있습니다. 즉 악한 영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쉽게 죄가 끝나지 않습니다. 죽을 때까지 몰고 가는 것입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진리를 사랑하는 자들은 다 빛으로 나옵니다. 그들은 복음의 빛 속에서 위로를 얻습니다. 그들은 진리를 좇고자 할수록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더욱 거룩하게 되고 의롭게 살고 싶고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게 됩니다. 참빛되신 예수님을 알아갈수록 더욱 겸손하게 됩니다. 자기의 죄가 더욱 잘 보이고 지금의 자기는 자기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알기때문입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가장 귀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어 희생하셨습니다. 우리가 이번 성탄에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깊이 영접하고 영생을 누립시다. 우리 목자님들과 형제 자매님들 한 분 한 분을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신 나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말씀 / 요한복음 3:16-21
요절 / 요한복음 3:16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는 성탄 시즌을 맞이하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의미를 깊이 새겨야겠습니다.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은 아무리 묵상을 해도 그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다 알 수 없습니다. 또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믿음과 영적 안목이 자랄수록 더욱 깊어짐을 깨닫습니다. 이 시간 주님의 사랑이 우리 가슴에 밀물처럼 들어오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이 주님의 사랑을 방황하는 이 시대 지성인들에게 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슬픔과 비극이 있어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을 믿기가 어렵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문제를 바라보고, 어떤 사람들은 가족들의 문제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사랑한다고 믿지 못합니다. 여중생 두 명이 장갑차 바퀴에 깔려 죽었는데 무죄라고 하는 세상을 볼 때 하나님이 이 세상을 사랑하신다는 말을 믿기가 어렵습니다. 지금 직장을 잡지 못해서 먹고 살기도 힘든데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고 하니 믿기가 어렵습니다. 이로 인해서 사람들의 마음은 매우 어둡고 슬프고 운명적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우리는 피조물이고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하실 때만이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을 때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만물의 영장으로 세우셨습니다. 인간에게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하시며 사명을 주셨습니다. 인간은 사명의 존재인 동시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고귀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다고 소감을 발표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을 만드시고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셨습니다. 인간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결혼제도를 창설하시고 작은 천국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베푸신 것들은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인간은 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해서 일생토록 감사해도 부족합니다.
그러나 사단의 꾀임에 빠져서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하나님이 주신 계명에 불순종하였습니다. 심지어 자기가 하나님이 되고자 하나님께 대적하고 배반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깨닫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 세상에 의인은 하나도 없게 되었습니다(롬 3:10-12). 하나님께서 노아 시대에 홍수로 한번 쓸어 버리셨는데도 인간은 변함없이 죄악되었습니다. 전에는 우리도 다 이 세상 풍속을 좇아 살았습니다. 음란하고 더럽고 거짓되고 교만하고 속이고 탐욕스럽고 이기적이었습니다. 시기하고 미워하고 불평하고 증오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 욕을 하고 자신의 인생을 저주했습니다. 우리는 사단의 똘마니가 되어 불순종하며 지냈습니다.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었습니다(엡 2:1-3).
그러나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합니까? 16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런 놀라운 마음을 품으셨을까요? 어떻게 자기를 배반하고 대적하는 자에 대해서 사랑하는 마음을 품을 수 있었을까요? 우리 같으면 이런 세상을 못 본체 하며 심판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이는 마치 부모가 자식을 포기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부모는 자식이 감옥에 갔다고 해서 내팽개칠 수 없습니다. 집 나간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변함없이 죄인들을 사랑하시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은 본성이 사랑이십니다. 무한한 사랑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태평양보다 더 넓고 깊습니다. 끊임없이 솟아나는 사랑을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무지와 연약함을 아십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이는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요나서에 보면 하나님은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할 때 용서하시는 분이심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요나 4:11). 죄가 죄인지도 모르고 병에 걸렸지만 죽어가는 지도 모르고 있는 인생들을 하나님은 깨우치기를 원하십니다. 사탄은 다시는 회개할 수 없는 존재이지만 인간은 회개할 수 있고 회복될 수 있다는 소망을 가지고 계시기에 하나님은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사랑에 대해서 혼돈에 빠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랑을 연애 감정으로 잘못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사랑은 전기가 통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사랑은 결단이요, 사랑하고자 하는 의지라고 가르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명령은 순종하도록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장 사랑할 수 없는 사람조차도 사랑하고자 결단해야 합니다. 참된 사랑은 다른 사람을 살리고 세웁니다. 참된 사랑은 이기적이거나 자기 중심적이 아닌 타인 중심적이고 희생적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심으로 그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는 이 세상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보여 주셨습니다.
둘째, 독생자를 주셨으니. 하나님의 사랑은 주는 사랑입니다. 16절을 다시 보십시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받았을 때 사랑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은 아버지가 자기가 원하는 선물을 주면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만 자기가 원하는 선물을 주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는다고 느낍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먼저 주는 사랑입니다. 성경은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되도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삶의 위대한 비밀입니다. 사랑은 주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사랑하셨지만, 이 세상의 죄를 속하기 위해서 그를 포기하시고 희생제물로 주셨습니다. 그는 아들을 궁전에 왕자로 보내지 않으시고 말구유에 누이시고,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서 평범하게 살게 하셨습니다. 그는 섬김을 받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주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는 자기의 시간을 주시고, 마음을 주시고, 목자없는 양들로 가득한 이 세상에 사랑을 주셨습니다. 그는 제자들을 부르시고 자기를 따라오라고 하시면서 희생적인 사랑으로 섬기셨습니다. 요일 4:9,10절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 독생자를 주시는 사랑은 가장 귀한 사랑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은 독생자를 팔아서 우리를 사셨습니다. 그만큼 나 같은 죄인을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에게 있어서 가장 귀하고 사랑하시는 분이고 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분이신데 이 분을 희생해서 나 같은 죄인을 그 피로 사셨습니다. 영원하고 측량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원수까지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셨다는 것은 우리의 죄문제를 완전히 해결 하셨다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1%의 선행이나 눈물겨운 기도의 투쟁이나 노력도 요구하지 않고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우리는 값없이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조건없이 다른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셨다는 것은 그가 하실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다는 최대의 사랑이요, 완전한 사랑입니다.
셋째,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16절을 다시 보십시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인간은 죄로 인해서 멸망 받아 마땅한 상태였습니다. 사람들은 죽으면 그만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 9:27)”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 21:8).” 지옥은 소멸이 아닙니다. 지옥은 회개하지 않는 죄인이 가는 곳입니다. 거기는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구원자 예수님을 거부한 사람들이 가는 곳입니다. 그곳은 ‘꺼지지 않는 불’(막 9:43),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 곳’(막 9:48),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곳’(마 25:30),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마 25:41)이 있는 곳으로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끝내 거부한 자가 가는 가장 두려운 곳입니다. 계시록에 의하면, 그 곳은 ‘유황불 붙는 못’(계 19:20,20:10,21:8)임을 보여주고도 있습니다. 지옥은 하나님과의 교통이 단절된 곳이요 불에 의한 고뇌가 심한 곳입니다. 죄인들과 함께 영원히 그곳에서 고통을 당하면서 산다는 것은 생각하기만 해도 끔찍합니다. 우리는 죄라는 것이 이렇게 심각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심판 받아 마땅한 죄인들의 죄를 씻기고 영생을 주기 위하여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해주셨습니다. 이제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에 이르는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러면 영생이 무엇입니까? 영생은 그냥 오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영생은 먼저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영적 생명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천지차이입니다. 영생은 사람이 죄사함을 받는 것으로서 수치심과 죄의식과 심판으로부터 자유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자녀로서 성장하게 되며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됩니다. 장차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면 우리의 썩을 몸이 썩지 아니할 몸으로 변화되어 천국 생활을 하게 됩니다. 영생에는 기쁨, 자유, 만족, 행복, 활력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생이 없는 삶은 죄로 인해서 죽은 삶입니다. 살아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꽃병의 꽃과 같이 뿌리가 생명으로부터 잘려 나간 것입니다. 죄는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죄인을 분리시킵니다. 그는 살았으나 죽은 자입니다. 죄로 인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인생은 삶의 의미가 없습니다. 목적도 없습니다. 방향도 없고 진정한 소망도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를 믿는 자에게 영생수를 주시고 기쁨과 평화로 충만하게 하시고 인생 목적과 방향을 분명하게 하십니다. 예수님이 우리 마음에 거하시면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의 종노릇한 데서 자유케됩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선한 의지로 가득하여 선한 일에 열심을 내고 거룩한 삶을 살게 됩니다. 능력있게 사명을 감당합니다. 다스리고 정복하며 열매가 풍성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면 구원을 어떤 사람이 받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자입니다. 구약에서는 본래 율법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지켜야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제정하신 규례와 법도를 행하면 살리라고 하셨습니다(레 18:5). 그런데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수준의 의에 이를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인간은 선 의지가 부패해서 아무도 선을 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값없이 구원 받는 길을 열어 놓으셨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매우 어렵습니다. 그렇게 어려운 이유가 무엇일까요? 무엇보다 자기 힘으로 구원에 이르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종교는 두 개로 나눌 수 있습니다. 자기 힘으로 구원에 이르고자 하는 종교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에 이르는 종교입니다. 그런데 기독교 외에는 모두가 다 자기 힘으로, 자기의 선행으로 구원에 이르는 종교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힘으로 구원에 이르는 것이 떳떳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의롭게 살려고 몸부림치는 사람은 절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율법대로 살아보려고 애를 쓰다가 절망에 빠졌습니다. 루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들도 다 그런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더러운 걸레로 더러운 바닥을 땀을 흘리면서 닦아 보십시오. 여전히 더럽습니다. 죄없는 사람만이 죄를 속할 수가 있습니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구원에 이를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구원자를 보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자기의 죄가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그래서 자기 의를 주장하면서 예수님을 거부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단이 심은 교리로 인해서 예수님을 믿기가 어렵습니다. 사단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회의와 의심의 독화살을 쏘아댑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도 사탄이 심은 의심의 독화살에 맞고 쓰러졌습니다. 인간이 교만해져서 하나님의 선물을 우습게 보고 배척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어떤 죄인인지를 발견해야 합니다. 그때 겸손하게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공부하게 되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죄인인지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바로 나와 여러분을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구원자이십니다.
독생자를 믿는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요1:12절은 말씀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내 마음의 중심에 영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3:20)”고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됩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씻기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실을 믿을 때 구원을 받습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 차례가 되자 그는 즉시 이를 거절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요13:8).” 베드로는 즉시 태도를 바꾸었습니다. 사랑을 거절당하면 매우 고통스럽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서 양들을 사랑하고 섬기는데 어느 날 그 양이 등을 돌리게 되면 깊이 상처를 받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하면 하나님도 상처를 받으십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까?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우리 마음에 예수님을 영접할 때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때 우리 마음에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은 순종해야 하는 명령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요14:21)”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 서로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영생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아무 대가 없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삶입니다.
넷째, 세상에 오신 빛.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입니다(17).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선입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무서운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십니다(딤전 2:4).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않지만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이 상태로 계속 나가면 심판이 더욱 가중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죄로 인해서 현재도 고통을 당하고 있고 상처가 있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어두움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죄가 주는 쾌락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쾌락은 매우 일시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 뒤에는 허무와 허탈과 무의미가 찾아옵니다. 악을 행하는 사람들은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않습니다.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두렵기 때문입니다(20). 그래서 자신들의 죄를 감추고자 합니다. 그럴싸하게 죄를 합리화합니다. 매우 뻔뻔스럽게 행동합니다. 죄를 지적하면 인권 침해로 몰고 갑니다. 그래도 안되면 다른 사람에게 죄를 전가시킵니다. 부모를 탓하고 사회를 탓하고 심지어 조상을 탓하면서 자기는 전혀 잘못이 없다고 합니다. 도리어 피해자라고 주장합니다. 거짓의 사람들은 나름대로 논리가 있습니다. 또한 죄는 세력이 있습니다. 즉 악한 영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쉽게 죄가 끝나지 않습니다. 죽을 때까지 몰고 가는 것입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진리를 사랑하는 자들은 다 빛으로 나옵니다. 그들은 복음의 빛 속에서 위로를 얻습니다. 그들은 진리를 좇고자 할수록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더욱 거룩하게 되고 의롭게 살고 싶고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게 됩니다. 참빛되신 예수님을 알아갈수록 더욱 겸손하게 됩니다. 자기의 죄가 더욱 잘 보이고 지금의 자기는 자기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알기때문입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가장 귀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어 희생하셨습니다. 우리가 이번 성탄에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깊이 영접하고 영생을 누립시다. 우리 목자님들과 형제 자매님들 한 분 한 분을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신 나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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