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마10강(7:1-24)/ 대접받고 싶은 대로 대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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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마태복음 제 10 강
말씀 / 마태복음 7:1-29
요절 / 마태복음 7:12
대접받고 싶은 대로 대접하라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오늘 본문은 기독교의 황금률이라고 불립니다. 예수님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자기를 버리고 타인 중심적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기쁨은 먼저 예수님, 타인이 두 번째, 나 자신은 마지막에 둘 때 (JOY= Jesus first, Others second, Yourself third)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말씀을 듣고 행함으로 생명을 얻으라고 하십니다. 이 시간 주님의 황금률을 깊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비판에 대한 교훈(1-6)
1절을 보십시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사람이 남을 비판하는 것은 자기를 의롭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비판이란 남의 공격을 받을까봐 두려워서 먼저 공격하는 자기 보호의 수단이기도 합니다. 비판은 재미가 있고 쾌감을 느끼게 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비판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공동체를 파괴하는 속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대체로 비판은 칭찬보다 더 영향력이 큽니다. 안타깝게도 소수의 부정적 태도가 대다수의 열정적 지지를 간과하도록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우리는 공동체를 세우기 위한 건설적인 비판 즉 ‘쓴소리’는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쓴소리’도 사랑이 없이 한다면 불평과 원망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특히 지도자는 부하들에게 알게 모르게 비판받는 것이 일상사인 위치에 서 있습니다. 직장에서도 사람들은 서넛이 모이면 상사를 씹는 일에 몰두합니다. 거기서 쾌감을 느낍니다. 그러면 지도자는 비판을 받기 싫어서 그 위치에 서지 말아야 합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누구나 지도자의 위치에 서 있습니다. 가정이든, 요회든, 팀이든, 직장이든 자기가 돌보는 사람이 있는 한 지도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판에 대해서 바른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애매하게 비판을 받을 때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요? 먼저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돌아보고 회개하는 기회를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일관된 행동을 통해서 그들의 비판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비판에 악한 마음을 품고 대적하게 되면 사단의 시험에 빠지기 쉽습니다. 자기도 원치 않게 비판받을 꼬투리를 계속해서 제공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마음을 지키고 일관되게 행동해야 합니다. 영적 리더는 비판을 바른 시각으로 보아야 합니다. 비판은 반드시 있습니다. 또 마음에 상처가 납니다. 그러나 비판 때문에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소명에서 이탈해서는 안 됩니다. 그만 두려는 유혹에 굴복하기 전에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다시금 새겨야 합니다. 남들이 방해한다고 당장 소명을 버리는 리더는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확실히 모르는 것입니다. 정확히 하나님의 명을 행하고 있는 리더라면 아무리 심한 비판과 적대에 부딪쳐도 그 일을 두고 다른 일을 찾지 않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우리가 남을 비판하게 되면 그 비판은 부메랑이 되어 돌아옵니다. 인간은 연약하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비판을 했던 상대편의 위치에 서게 될 날이 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판하기보다 자기를 성찰하는데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3-5절을 보십시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도덕적 재판관이 되고 그들이 변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먼저 변화되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죄를 보게 되면 남을 판단하기 전에 먼저 자기를 깊이 성찰해야 합니다. 그렇게 한 후에야 우리는 형제의 잘못을 말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어떤 문제로 심각하게 고심한 자들, 그래서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깨닫고 하나님의 자비가 아니었다면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었다는 것을 아는 자만이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과 짝을 이루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분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6절을 보십시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여기서 개와 돼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당시 유대인들은 개를 성적으로 타락한 짐승으로, 돼지를 탐욕스럽고 부정한 짐승의 대명사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을 그런 존재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마18:17에 보면 “만일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사람을 성급하게 판단하지 않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도우려고 해도 그가 결코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대답으로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거룩한 것, 진주인 복음, 지혜로운 권면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려면 이처럼 단호하게 말해야 하는 경우도 있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둘째, 강청하는 기도(7-12)
우리가 거룩한 것과 진주, 비판할 때와 하지 말아야 할 때, 어떻게 사람을 살려야 하는지를 분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7,8절을 보십시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하나님께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은 지속적으로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구할 때 머뭇거리는 것이나 소심한 태도를 버리고 담대하고 모험적이고 심지어 뻔뻔스럽기까지 한 기도를 드리라고 권고하십니다. 구하는 기도는 우리가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구하는 것입니다. 찾는 기도는 우리가 구하는 것이 명확하지 않을 때, 어떻게 기도해야 좋은지 모른 채 기도할 때 드립니다. 두드리는 기도는 급하고 필사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분별력이 나옵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거나 어떤 결정을 하거나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고자 할 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 내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주십니다.
우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무서운 분이 아니라 구하는 자에게 좋은 선물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구하는 자에게 사랑의 은사, 말씀의 은사, 지혜의 은사를 주십니다.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구하는 자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시는 것처럼 우리도 무엇이든지 남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주어야 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이 말씀은 황금률인데 율법과 선지자의 말씀을 요약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22:37-40). 그렇다면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는 것은 내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과 같은 맥락 속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구체적인 표현은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지옥불의 땔감이나 종들같이 무시하며 편견을 가지고 대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와 같이 대우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남들이 나의 처지와 어려운 상황을 이해 주기를 바라는 만큼 먼저 남을 이해하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나를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해 주기를 바라는 대로 남을 그 모습 그대로 사랑해야 합니다. 비난 받기를 원치 않으면 비난하지 말고 도리어 은밀히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의 변화를 볼 때 진정으로 기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창조하신 후 심히 기뻐하셨습니다(창1:31). 인간이 타락했을 때도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희생하면서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가장 위대한 표현은 복음을 전해주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희생적인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사랑을 받으려는 욕구 그리고 자기 자신을 드러내려는 욕구가 있습니다. 이는 의식하든 그렇지 못하든 우리의 행동과 다른 사람과 관계에서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묘한 것은 한 사람이 자신의 욕구 충족을 위해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 생각은 않고 그에게 필요한 사랑만을 요구한다면 그는 필시 사랑을 얻기는커녕 따돌림을 받거나 혹은 참담한 심정을 경험하게 될 것 입니다. 왜냐하면 오로지 남의 사랑을 받으려고만 하는 자기중심적인 자를 사람들이 사랑하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을 받으려고 하기보다 주려고 한다면 그는 사랑스러워지고 마침내는 확실히 사랑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한 불변의 법칙입니다. 즉 자신에 대한 관심과 집중은 단지 자신을 고립시키고 더욱 깊고 고통스러운 고독을 유발시킬 뿐입니다. 고독할 때 타인의 사랑을 통하여 그 고독을 덜고자 하는 것은 우리를 포위한 사악하고 무서운 하나의 굴레이며, 그럴수록 고독은 더욱 커질 뿐입니다. 따라서 이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신에 대한 관심을 지양하고 타인과 관계를 열어야 합니다. 이것이 유일한 해결책입니다. 정신의 중심을 자아로부터 타인에게로 전환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황금률의 진정한 의미인 것입니다.
셋째,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13-29)
우리가 이런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3,14절을 보십시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예수님은 우리가 생명을 얻으려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권고하십니다.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이 좁고 협착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종종 고통스럽고 어려운 선택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애매한 상황에서 어려운 선택을 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는 중에서도 하나님의 뜻만을 선택해야하기 때문에 선택의 폭이 좁아집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수준이 높기 때문에 협착합니다. 사람들은 뭐 그런 생각을 다 하느냐, 생각 없이 살면 되지 않느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 좁은 것은 사람들이 잘 안 다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잘 다니는 길, 많이 다니는 길은 넓습니다. 그러나 좁은 길을 갈 때만이 우리가 생명을 얻고 삶에서 생명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도, 하고 싶을 때 하고 소감도 쓰고 싶을 때 쓰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다 하고 산다면 생명력이 없습니다. 선교사님들이 많은 고난 가운데서 스피릿이 있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목자님들 중에서도 적당한 고난이 있을 때 스피릿이 살아나고 열매가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번에 선교사로 파송되신 정모세&드보라 목자님들은 대전까지 순례자 훈련을 받고 주말 부부로 보내면서 양을 잘 치고 기도도 더 많이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 열매도 남길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를 때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입니다. 반대로 넓은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들어가는 자가 많지만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입니다.
그런데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으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가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거짓 선지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15절을 보십시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거짓 선지자들은 양의 옷을 입었기 때문에 순하게 보이지만 속에는 노략질 하는 이리의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그래서 양들을 다 이용해 먹고는 영원한 멸망에 빠지게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거짓 선지자들을 분별할 수 있습니까? 16-20절을 보십시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열매는 속일 수 없습니다. 거짓 선지자가 맺는 나쁜 열매는 음란과 탐욕과 거짓과 분열 등입니다. 반대로 참 선지자가 맺는 열매는 아름다운 열매입니다. 사랑과 정직과 충성과 희생의 열매 등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좁은 문보다 넓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변질시키고 하나님보다 사람들의 마음을 즐겁게 하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짓된 가르침을 분별 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21-23절을 보십시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거짓 선지자들은 주여 주여 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도 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도 쫓아내고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도 행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행한다고 해서 천국에 다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직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분변하는 것보다 그 말씀으로 하여금 자기를 찔러 쪼개도록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웃 사랑은 자기희생과 자기 포기를 전제로 되어 집니다. 성공적인 리더들은 자기를 관리하는데 시간의 50%를 쓰고 상사를 관리하는데 25%, 동료들과의 관계를 위해 20%, 부하들을 위해서 5%를 쓴다고 합니다(전방위리더십). 지도력이란 영향력에서 나오기 때문에 리더는 자신의 성품을 개발하는 데 먼저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24,25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고 집을 지은 사람과 같아서 환란이 닥쳐와도 능히 버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사람은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습니다.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은 쉽고 빨리 할 수 있지만 폭우가 내리고 홍수가 나면 기초까지 다 쓸려 내려가게 됩니다. 탐욕은 경제의 위기가 내리면 끝이 나고, 권력의 집은 정치적 상황이 바뀌면 무너지고, 쾌락의 집은 고난과 죽음의 비가 내리면 무너집니다. 안일한 자세로 살고자 하고 감정대로 육신의 본성대로 사는 사람들은 결국 비참한 종말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의 나라와 그의 의의 집은 폭풍우가 내려도 무너뜨리지 못하며 지옥의 문으로도 멸망시키지 못합니다. 주초를 반석 위에 놓는 것은 보이지 않는 수고가 많이 따르고 비용도 많이 들어갑니다. 완성하고 나면 처음에는 반석 위에 지은 집이나 모래 위에 지은 것이나 별 차이가 없지만 폭우가 내리고 홍수가 나면 그 차이점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말씀을 듣기만 하는 것은 희생이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말씀대로 행하려면 희생이 따릅니다.
여기에 계신 우리 목자님들과 형제 자매님들은 인생의 집을 반석 위에 짓는 참으로 지혜로운 분들입니다. 저희가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말씀대로 살므로 견고한 인생의 집, 신앙의 집을 잘 지어나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무리들은 그 가르치심에 놀랐습니다.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가르치시고 그대로 행하셨기 때문에 그 가르침이 힘이 있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기도를 많이 하시고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전하셨기 때문에 권세가 있었습니다. 특히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양들에 대한 목자의 심정이 충만하여 말씀을 가르치셨기 때문에 힘이 있었습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황금율을 배웠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자기를 버리고 이웃을 먼저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받고 존경받고 생명이 충만해지는 길입니다.
말씀 / 마태복음 7:1-29
요절 / 마태복음 7:12
대접받고 싶은 대로 대접하라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오늘 본문은 기독교의 황금률이라고 불립니다. 예수님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자기를 버리고 타인 중심적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기쁨은 먼저 예수님, 타인이 두 번째, 나 자신은 마지막에 둘 때 (JOY= Jesus first, Others second, Yourself third)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말씀을 듣고 행함으로 생명을 얻으라고 하십니다. 이 시간 주님의 황금률을 깊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비판에 대한 교훈(1-6)
1절을 보십시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사람이 남을 비판하는 것은 자기를 의롭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비판이란 남의 공격을 받을까봐 두려워서 먼저 공격하는 자기 보호의 수단이기도 합니다. 비판은 재미가 있고 쾌감을 느끼게 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비판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공동체를 파괴하는 속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대체로 비판은 칭찬보다 더 영향력이 큽니다. 안타깝게도 소수의 부정적 태도가 대다수의 열정적 지지를 간과하도록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우리는 공동체를 세우기 위한 건설적인 비판 즉 ‘쓴소리’는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쓴소리’도 사랑이 없이 한다면 불평과 원망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특히 지도자는 부하들에게 알게 모르게 비판받는 것이 일상사인 위치에 서 있습니다. 직장에서도 사람들은 서넛이 모이면 상사를 씹는 일에 몰두합니다. 거기서 쾌감을 느낍니다. 그러면 지도자는 비판을 받기 싫어서 그 위치에 서지 말아야 합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누구나 지도자의 위치에 서 있습니다. 가정이든, 요회든, 팀이든, 직장이든 자기가 돌보는 사람이 있는 한 지도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판에 대해서 바른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애매하게 비판을 받을 때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요? 먼저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돌아보고 회개하는 기회를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일관된 행동을 통해서 그들의 비판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비판에 악한 마음을 품고 대적하게 되면 사단의 시험에 빠지기 쉽습니다. 자기도 원치 않게 비판받을 꼬투리를 계속해서 제공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마음을 지키고 일관되게 행동해야 합니다. 영적 리더는 비판을 바른 시각으로 보아야 합니다. 비판은 반드시 있습니다. 또 마음에 상처가 납니다. 그러나 비판 때문에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소명에서 이탈해서는 안 됩니다. 그만 두려는 유혹에 굴복하기 전에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다시금 새겨야 합니다. 남들이 방해한다고 당장 소명을 버리는 리더는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확실히 모르는 것입니다. 정확히 하나님의 명을 행하고 있는 리더라면 아무리 심한 비판과 적대에 부딪쳐도 그 일을 두고 다른 일을 찾지 않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우리가 남을 비판하게 되면 그 비판은 부메랑이 되어 돌아옵니다. 인간은 연약하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비판을 했던 상대편의 위치에 서게 될 날이 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판하기보다 자기를 성찰하는데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3-5절을 보십시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도덕적 재판관이 되고 그들이 변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먼저 변화되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죄를 보게 되면 남을 판단하기 전에 먼저 자기를 깊이 성찰해야 합니다. 그렇게 한 후에야 우리는 형제의 잘못을 말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어떤 문제로 심각하게 고심한 자들, 그래서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깨닫고 하나님의 자비가 아니었다면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었다는 것을 아는 자만이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과 짝을 이루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분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6절을 보십시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여기서 개와 돼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당시 유대인들은 개를 성적으로 타락한 짐승으로, 돼지를 탐욕스럽고 부정한 짐승의 대명사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을 그런 존재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마18:17에 보면 “만일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사람을 성급하게 판단하지 않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도우려고 해도 그가 결코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대답으로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거룩한 것, 진주인 복음, 지혜로운 권면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려면 이처럼 단호하게 말해야 하는 경우도 있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둘째, 강청하는 기도(7-12)
우리가 거룩한 것과 진주, 비판할 때와 하지 말아야 할 때, 어떻게 사람을 살려야 하는지를 분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7,8절을 보십시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하나님께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은 지속적으로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구할 때 머뭇거리는 것이나 소심한 태도를 버리고 담대하고 모험적이고 심지어 뻔뻔스럽기까지 한 기도를 드리라고 권고하십니다. 구하는 기도는 우리가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구하는 것입니다. 찾는 기도는 우리가 구하는 것이 명확하지 않을 때, 어떻게 기도해야 좋은지 모른 채 기도할 때 드립니다. 두드리는 기도는 급하고 필사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분별력이 나옵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거나 어떤 결정을 하거나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고자 할 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 내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주십니다.
우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무서운 분이 아니라 구하는 자에게 좋은 선물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구하는 자에게 사랑의 은사, 말씀의 은사, 지혜의 은사를 주십니다.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구하는 자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시는 것처럼 우리도 무엇이든지 남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주어야 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이 말씀은 황금률인데 율법과 선지자의 말씀을 요약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22:37-40). 그렇다면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는 것은 내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과 같은 맥락 속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구체적인 표현은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지옥불의 땔감이나 종들같이 무시하며 편견을 가지고 대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와 같이 대우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남들이 나의 처지와 어려운 상황을 이해 주기를 바라는 만큼 먼저 남을 이해하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나를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해 주기를 바라는 대로 남을 그 모습 그대로 사랑해야 합니다. 비난 받기를 원치 않으면 비난하지 말고 도리어 은밀히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의 변화를 볼 때 진정으로 기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창조하신 후 심히 기뻐하셨습니다(창1:31). 인간이 타락했을 때도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희생하면서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가장 위대한 표현은 복음을 전해주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희생적인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사랑을 받으려는 욕구 그리고 자기 자신을 드러내려는 욕구가 있습니다. 이는 의식하든 그렇지 못하든 우리의 행동과 다른 사람과 관계에서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묘한 것은 한 사람이 자신의 욕구 충족을 위해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 생각은 않고 그에게 필요한 사랑만을 요구한다면 그는 필시 사랑을 얻기는커녕 따돌림을 받거나 혹은 참담한 심정을 경험하게 될 것 입니다. 왜냐하면 오로지 남의 사랑을 받으려고만 하는 자기중심적인 자를 사람들이 사랑하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을 받으려고 하기보다 주려고 한다면 그는 사랑스러워지고 마침내는 확실히 사랑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한 불변의 법칙입니다. 즉 자신에 대한 관심과 집중은 단지 자신을 고립시키고 더욱 깊고 고통스러운 고독을 유발시킬 뿐입니다. 고독할 때 타인의 사랑을 통하여 그 고독을 덜고자 하는 것은 우리를 포위한 사악하고 무서운 하나의 굴레이며, 그럴수록 고독은 더욱 커질 뿐입니다. 따라서 이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신에 대한 관심을 지양하고 타인과 관계를 열어야 합니다. 이것이 유일한 해결책입니다. 정신의 중심을 자아로부터 타인에게로 전환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황금률의 진정한 의미인 것입니다.
셋째,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13-29)
우리가 이런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3,14절을 보십시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예수님은 우리가 생명을 얻으려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권고하십니다.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이 좁고 협착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종종 고통스럽고 어려운 선택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애매한 상황에서 어려운 선택을 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는 중에서도 하나님의 뜻만을 선택해야하기 때문에 선택의 폭이 좁아집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수준이 높기 때문에 협착합니다. 사람들은 뭐 그런 생각을 다 하느냐, 생각 없이 살면 되지 않느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 좁은 것은 사람들이 잘 안 다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잘 다니는 길, 많이 다니는 길은 넓습니다. 그러나 좁은 길을 갈 때만이 우리가 생명을 얻고 삶에서 생명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도, 하고 싶을 때 하고 소감도 쓰고 싶을 때 쓰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다 하고 산다면 생명력이 없습니다. 선교사님들이 많은 고난 가운데서 스피릿이 있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목자님들 중에서도 적당한 고난이 있을 때 스피릿이 살아나고 열매가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번에 선교사로 파송되신 정모세&드보라 목자님들은 대전까지 순례자 훈련을 받고 주말 부부로 보내면서 양을 잘 치고 기도도 더 많이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 열매도 남길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를 때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입니다. 반대로 넓은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들어가는 자가 많지만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입니다.
그런데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으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가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거짓 선지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15절을 보십시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거짓 선지자들은 양의 옷을 입었기 때문에 순하게 보이지만 속에는 노략질 하는 이리의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그래서 양들을 다 이용해 먹고는 영원한 멸망에 빠지게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거짓 선지자들을 분별할 수 있습니까? 16-20절을 보십시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열매는 속일 수 없습니다. 거짓 선지자가 맺는 나쁜 열매는 음란과 탐욕과 거짓과 분열 등입니다. 반대로 참 선지자가 맺는 열매는 아름다운 열매입니다. 사랑과 정직과 충성과 희생의 열매 등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좁은 문보다 넓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변질시키고 하나님보다 사람들의 마음을 즐겁게 하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짓된 가르침을 분별 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21-23절을 보십시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거짓 선지자들은 주여 주여 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도 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도 쫓아내고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도 행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행한다고 해서 천국에 다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직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분변하는 것보다 그 말씀으로 하여금 자기를 찔러 쪼개도록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웃 사랑은 자기희생과 자기 포기를 전제로 되어 집니다. 성공적인 리더들은 자기를 관리하는데 시간의 50%를 쓰고 상사를 관리하는데 25%, 동료들과의 관계를 위해 20%, 부하들을 위해서 5%를 쓴다고 합니다(전방위리더십). 지도력이란 영향력에서 나오기 때문에 리더는 자신의 성품을 개발하는 데 먼저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24,25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고 집을 지은 사람과 같아서 환란이 닥쳐와도 능히 버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사람은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습니다.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은 쉽고 빨리 할 수 있지만 폭우가 내리고 홍수가 나면 기초까지 다 쓸려 내려가게 됩니다. 탐욕은 경제의 위기가 내리면 끝이 나고, 권력의 집은 정치적 상황이 바뀌면 무너지고, 쾌락의 집은 고난과 죽음의 비가 내리면 무너집니다. 안일한 자세로 살고자 하고 감정대로 육신의 본성대로 사는 사람들은 결국 비참한 종말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의 나라와 그의 의의 집은 폭풍우가 내려도 무너뜨리지 못하며 지옥의 문으로도 멸망시키지 못합니다. 주초를 반석 위에 놓는 것은 보이지 않는 수고가 많이 따르고 비용도 많이 들어갑니다. 완성하고 나면 처음에는 반석 위에 지은 집이나 모래 위에 지은 것이나 별 차이가 없지만 폭우가 내리고 홍수가 나면 그 차이점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말씀을 듣기만 하는 것은 희생이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말씀대로 행하려면 희생이 따릅니다.
여기에 계신 우리 목자님들과 형제 자매님들은 인생의 집을 반석 위에 짓는 참으로 지혜로운 분들입니다. 저희가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말씀대로 살므로 견고한 인생의 집, 신앙의 집을 잘 지어나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무리들은 그 가르치심에 놀랐습니다.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가르치시고 그대로 행하셨기 때문에 그 가르침이 힘이 있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기도를 많이 하시고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전하셨기 때문에 권세가 있었습니다. 특히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양들에 대한 목자의 심정이 충만하여 말씀을 가르치셨기 때문에 힘이 있었습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황금율을 배웠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자기를 버리고 이웃을 먼저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받고 존경받고 생명이 충만해지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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