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마9강(6:19-34)/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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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마태복음 제 9 강 307
말씀 / 마태복음 6:19-34
요절 / 마태복음 6:33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나서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사명을 주시고 나서 사람에게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식물로 주셨습니다. 인간은 사명을 위한 존재로 창조되었고 그 사명을 감당할 때 먹는 문제는 하나님께서 친히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출애굽했을 때는 하나님께서 만나를 내려 주시고 메추라기를 보내어 주셔서 그들의 먹는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만나가 그치면서 그 땅의 식물을 먹도록 하셨습니다. 그들은 수고하고 땀을 흘려 일해서 먹고 살아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들은 배와 그물을 버리고 개중에는 주판알과 장부책을 버리고 주님을 좇았습니다. 그들은 먹을 것, 입을 것, 자기들에게 필요한 것들이 채움 받지 못할까봐서 염려하였습니다. 이런 제자들의 염려를 예수님은 다 아시고 그들이 가져야 할 믿음에 대해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는 지금 만 불 시대에 살면서 물질에 대한 이중적인 잣대를 가지고 있고 혼란스러워 하고 있습니다. 즉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가난하게 사는 것에 대해서 못마땅해 하고 있습니다. 부자는 부자대로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대로 불평과 불만이 있습니다. 부 자체가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지 못합니다. 단지 부는 편리하고 가난함은 불편을 줄 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마치 부가 우리에게 행복을 줄 것처럼 생각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성경적인 물질관을 가지고 동시에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해야할 가치가 무엇인가를 배우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앞에서 영적인 것 즉 구제와 기도와 금식 등을 다루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물질적인 차원을 다루십니다. 예수님은 영적인 분이시지만 아주 실제적인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실제적으로 제자들이 음식과 옷과 돈과 같은 물질적인 것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장래 문제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를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보물을 쌓지 말아야 할 이유와 염려하지 말아야 할 이유들을 말씀하십니다.
첫째, 물질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장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사람들은 보물을 땅에 쌓아두고자 합니다. 사람이 돈을 땅에 쌓아두고자 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고이병철 회장은 이 세상을 떠날 때에 공수래공수거라는 말을 남기고 갔습니다. 그리고 돈을 벌기는 많이 했지만 제대로 쓰고 가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후회를 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죽으면 동전 한 푼 가져 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가져가는 방법이 있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우리가 하늘에 보물을 쌓아 두면 그 보물은 영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돈을 쓰는 방법을 말씀하셨지만 더 근본적인 것은 삶의 목적을 하나님 나라에 두어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보물은 꼭 돈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시간, 청춘, 지식, 가정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내가 보물처럼 여기는 것들을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써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쌓아 놓은 것들만이 영원히 남아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디모데에게 명했습니다.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 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딤전6:17-19).” 부자든 가난한 자든 자기 소유를 가지고 어떻게 하나님을 섬겼는가가 중요합니다. 가난한 과부의 헌금 비유를 생각해 볼 때 그녀가 비록 두 렙돈을 드렸지만 부자가 많은 돈을 넣은 것보다 더 많이 헌금을 했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보물을 가지고 청지기로서 사명을 다해야 합니다.
둘째, 물질에 마음이 가게 되면 마음이 어두워집니다. 21절을 보십시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실이 바늘을 따라 가듯이 우리의 마음은 보물을 따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마음이 있는 곳에 보물이 있다고 해야 할 것 같은데 예수님은 보물이 있는 곳에는 마음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를 볼 때 우리가 의식적으로 보물을 하나님 나라에 쌓을 때 마음도 따라 간다는 뜻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식적으로 물질을 영원한 하나님 나라와 복음과 주님을 위하여 드리는 투쟁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타락한 본성대로 따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무디는 “당신의 지갑이 회개하지 아니하면 회개한 것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돈을 내는 곳에 마음이 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돈을 버는 쪽보다는 어떻게 쓰는가에 대해서 더 관심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22,23절을 보십시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오늘날은 눈을 빛을 받아들이는 기관으로 생각하만 옛날에는 눈을 몸의 등불이요 마음의 창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지만 눈이 어두우면 온 몸이 어둡게 됩니다. 좋은 눈을 가진 사람은 사물을 또렷또렷하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눈이 나쁘면 모든 것이 흐리마리하게 보입니다. 만일 눈이 건강하다면 즉 그가 관대한 마음과 자비를 베풀고자 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본다면 그의 삶은 풍성하게 될 것이지만, 반면에 이 세상을 이기적인 마음으로 본다면 그 사람은 분명하게 보지 못하므로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눈이 흐려지면 삶도 어두워집니다.
우리 눈이 밝아지려면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면 모든 것을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제대로 볼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뜻을 찾는데 힘쓸 때 우리는 분별력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이 물질과 세상을 사랑하는 데 가 있게 된다면 모든 것이 혼란스럽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실패하고 불만족한 이유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고자 하고 하나님과 사람을 동시에 기쁘게 하고자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은 타협이 없이 전적으로 하나님을 섬기고자 결단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모토는 “오직 한 일(One thing I do)”이었습니다. 하나님만을 섬기고자 할 때 우리의 얼굴, 마음, 머리, 양심이 빛으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돈을 사랑하기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고자 하는 결단은 진정 행복해지는 삶의 비밀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결단하십시오. 온 몸이 빛으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습니다. 24절을 보십시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우리는 한 마음으로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두 주인이 서로 다른 명령을 내린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한 주인을 택하여 충성하기 위해서 다른 주인은 버려야 합니다. 재물은 속삭입니다. “나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하십니다. 누구 말이 맞는 것입니까? 하나님과 재물 중에 누구를 섬기느냐 하는 문제는 근본적으로 누구를 신뢰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재물이란 원어로 맘몬인데 이는 아람어 아멘에서 나온 것이고 히브리어 뜻은 "신뢰하다 "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나중에는 “믿을 만한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NIV영어 성경에서는 대문자로 쓰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재물을 신의 위치에 놓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온전한 헌신을 원하시지만, 돈도 자기에게 100% 헌신하기를 원합니다. 돈이란 것은 그만큼 위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습니다. 재물은 다스려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재물을 다스리는 데는 20년 이상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7살부터 재물을 다스리는 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현대인들은 모자라는 비용을 무조건 수입만 늘려서 해결하려는 태도를 갖고 있는데 이는 매우 위험하며 악의 뿌리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의 욕망은 지구를 다 주어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재물에 대한 균형 잡힌 생활태도를 확립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더 많은 소유와 소비가 보다 잘 사는 지름길이라는 상업주의적 가치관에 길들여져 있습니다. 그러나 절약하고 검소하게 살고 수입에 맞게 살면 행복합니다. 청교도적인 삶은 검소하고 절제하는 삶인데 그로 인해서 부가 축적됩니다. 이렇게 부가 축적될 때 부패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부를 어떻게 다스려야 되는지, 돈을 무슨 목적으로 벌려고 하는지 방향이 잡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어리석은 부자요, 천국에 들어가기 힘든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2000년 전에 벌써 물질의 종된 현대인들의 문제를 꿰뚫어 보셨습니다. 우리는 자유인지만 어떤 점에서 물질에 관한한 현대판 노예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물질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살고자 결단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물질을 다스림으로 참된 자유인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그를 따르면서도 마음 속 깊은 곳에 염려하고 근심하는 것을 보셨습니다. 염려는 마음을 나누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제자들은 어떤 것에 대해서 염려하고 있었습니까? 우리가 염려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 염려하는 것은 하나님의 돌보심을 불신하기 때문입니다. 25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먹는 것, 마시는 것, 입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생명입니다. 생명이 있고 나서야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이 의미가 있습니다. 죽은 시체에게 아무리 좋은 음식과 옷을 주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적인 생명의 풍요함에 먼저 마음을 써야 합니다. 먹고 마시고 입을 것들에 대한 염려로 인해서 생명이 단축되거나 병이 든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우리는 사실 용돈이라도 풍족하게 쓰고 싶고 생활비 걱정하지 않으며 살고 싶습니다. 이런 기본적인 필요들을 어떻게 채울 수가 있습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이 가져야 할 믿음이 어떠한가를 말씀해 주십니다. 26절을 보십시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 하냐” 공중의 새는 열심히 날개 짓을 하면서 날아다니다 보면 먹을 것이 보이고 그것을 취함으로 생명을 유지합니다. 악하고 게으른 죄로 인해서 가난하게 되었다면 그것은 동정의 여지가 없습니다. 사도바울도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라고 하였습니다. 새는 먹고 사는 문제로 인해서 초조해 하지도 않고 계획을 세우는 것도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친히 이들을 먹이십니다. 우리가 염려한다고 키를 한자나 더할 수 없습니다. 염려는 백해무익한 것입니다. 의복을 위해서 염려하는 사람들은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백합화는 수고도 아니 하고 길쌈도 아니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 입은 것보다 더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는 들풀도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입히십니다. 그것도 계절마다 아름다운 옷으로 갈아입히십니다. 물론 우리는 공중의 새나 들의 백합화와는 다릅니다. 우리는 세금도 내야하고 아이들도 키워야 하고 장래를 위해서 준비도 해야 합니다. 교육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배워야할 것은 하나님께서 사소한 피조물에게까지 마음을 쏟고 그 필요를 공급하신다면 독생자 예수님의 피로 값 주고 산 자녀들에게는 훨씬 더 섬세하게 공급하지 않으시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애들이 아버지가 자기를 제대로 먹여주시고 입혀주실까 염려하고 있다면 부모된 입장에서 얼마나 민망한 일입니까? 이와 같이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무능력한 분으로 대접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염려하는 것은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증거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적은 증거입니다. 우리는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필요한 것들을 하나님께 아뢰어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 마음을 지키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방법대로 채워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물질문제로 염려하는 것은 믿음이 적은 것이라고 하십니다. 즉 하나님께 대한 신뢰의 결핍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동안 광야에서 만나를 먹으면서 일용할 양식을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것을 믿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실제로 먹고 마시고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갖지 못하고 불평하고 원망하고 불신에 빠졌습니다. 그들이 우리보다 더 악하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제자들은 오병이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그들의 필요를 채우신다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묵상하고 개인적인 믿음을 가져야 했지만 배가 고프면 또 다시 염려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다시 믿음을 심으십니다. 31,32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이 세상 것들을 위해서 지나치게 근심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가장 무가치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부여하시고 보호하시며 필요를 공급하시는 분이십니다. 독생자까지 아끼지 아니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생각하는 것이나 구하는 것에 넘치도록 채워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직장이 필요한 목자님들에게 믿음을 갖도록 연단하시고 하나님의 때에 반드시 주실 줄 믿습니다. 결혼 적령이가 된 분들에게는 합당한 배우자를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둘째, 염려하기보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라. 33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천국 백성이 첫째로 구해야 할 것은 그의 나라와 그의 의입니다. 그의 나라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생활입니다. 그의 의는 주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삶,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입니다. 우리 나라의 경제에 공의가 생겨나야합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번다는 생각은 이제 통하지 않습니다. 정직하고 의로운 회사가 인정을 받고 성장할 수 있습니다. 꾸민 회계, 거짓 회계가 아니라 투명한 회계가 모든 회사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봉사를 하고 일대일을 하고 예배를 드리든지 직장에서 일을 하든지 중요한 것은 마음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때 능력을 덧입을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시 84:11).” 우리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더하여 주십니다. 이것이 신자의 경제법칙이요 생활 법칙입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34).” 우리는 내일을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일에 대해서 상상을 하고 전혀 오지 않을 일들을 반쯤 온 것처럼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상상력이라는 좋은 도구를 주셨는데 그것을 믿음으로 활용하여야 합니다. 재물에 대한 교훈이 염려 하지 말라는 말로 끝났습니다. 부를 얻고 재물을 섬기고자 하는 유혹은 탐심에서 나옵니다. 그 심연에는 우리의 위상과 안전과 생존에 대한 불안감이 깔려 있습니다. 내일에 대한 염려로 쉬지 못한다면 이는 우리 마음이 참된 고향을 찾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어거스틴은 “우리의 마음이 당신 안에서 안식하기까지 우리에게는 안식이 없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는 말은 내일 일을 전혀 준비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현재에 충실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신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존엄성을 지켜야 합니다. 내일 일은 내일로 미루고 오늘은 소매를 걷어붙이고 오늘 당한 문제들을 대면하십시오. 다가올 염려를 당겨서 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염려할 시간이 있다면 그 힘으로 일하고 준비하십시오. 그리하면 모든 필요들이 채워질 것입니다. 사명인으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가 먼저 그 일에 열심을 내면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우리가 필요한 물질을 채움 받을 뿐만 아니라 더욱 풍성해져서 주와 복음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마태복음 6:19-34
요절 / 마태복음 6:33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나서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사명을 주시고 나서 사람에게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식물로 주셨습니다. 인간은 사명을 위한 존재로 창조되었고 그 사명을 감당할 때 먹는 문제는 하나님께서 친히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출애굽했을 때는 하나님께서 만나를 내려 주시고 메추라기를 보내어 주셔서 그들의 먹는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만나가 그치면서 그 땅의 식물을 먹도록 하셨습니다. 그들은 수고하고 땀을 흘려 일해서 먹고 살아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들은 배와 그물을 버리고 개중에는 주판알과 장부책을 버리고 주님을 좇았습니다. 그들은 먹을 것, 입을 것, 자기들에게 필요한 것들이 채움 받지 못할까봐서 염려하였습니다. 이런 제자들의 염려를 예수님은 다 아시고 그들이 가져야 할 믿음에 대해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는 지금 만 불 시대에 살면서 물질에 대한 이중적인 잣대를 가지고 있고 혼란스러워 하고 있습니다. 즉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가난하게 사는 것에 대해서 못마땅해 하고 있습니다. 부자는 부자대로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대로 불평과 불만이 있습니다. 부 자체가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지 못합니다. 단지 부는 편리하고 가난함은 불편을 줄 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마치 부가 우리에게 행복을 줄 것처럼 생각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성경적인 물질관을 가지고 동시에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해야할 가치가 무엇인가를 배우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앞에서 영적인 것 즉 구제와 기도와 금식 등을 다루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물질적인 차원을 다루십니다. 예수님은 영적인 분이시지만 아주 실제적인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실제적으로 제자들이 음식과 옷과 돈과 같은 물질적인 것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장래 문제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를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보물을 쌓지 말아야 할 이유와 염려하지 말아야 할 이유들을 말씀하십니다.
첫째, 물질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장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사람들은 보물을 땅에 쌓아두고자 합니다. 사람이 돈을 땅에 쌓아두고자 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고이병철 회장은 이 세상을 떠날 때에 공수래공수거라는 말을 남기고 갔습니다. 그리고 돈을 벌기는 많이 했지만 제대로 쓰고 가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후회를 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죽으면 동전 한 푼 가져 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가져가는 방법이 있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우리가 하늘에 보물을 쌓아 두면 그 보물은 영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돈을 쓰는 방법을 말씀하셨지만 더 근본적인 것은 삶의 목적을 하나님 나라에 두어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보물은 꼭 돈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시간, 청춘, 지식, 가정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내가 보물처럼 여기는 것들을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써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쌓아 놓은 것들만이 영원히 남아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디모데에게 명했습니다.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 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딤전6:17-19).” 부자든 가난한 자든 자기 소유를 가지고 어떻게 하나님을 섬겼는가가 중요합니다. 가난한 과부의 헌금 비유를 생각해 볼 때 그녀가 비록 두 렙돈을 드렸지만 부자가 많은 돈을 넣은 것보다 더 많이 헌금을 했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보물을 가지고 청지기로서 사명을 다해야 합니다.
둘째, 물질에 마음이 가게 되면 마음이 어두워집니다. 21절을 보십시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실이 바늘을 따라 가듯이 우리의 마음은 보물을 따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마음이 있는 곳에 보물이 있다고 해야 할 것 같은데 예수님은 보물이 있는 곳에는 마음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를 볼 때 우리가 의식적으로 보물을 하나님 나라에 쌓을 때 마음도 따라 간다는 뜻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식적으로 물질을 영원한 하나님 나라와 복음과 주님을 위하여 드리는 투쟁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타락한 본성대로 따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무디는 “당신의 지갑이 회개하지 아니하면 회개한 것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돈을 내는 곳에 마음이 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돈을 버는 쪽보다는 어떻게 쓰는가에 대해서 더 관심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22,23절을 보십시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오늘날은 눈을 빛을 받아들이는 기관으로 생각하만 옛날에는 눈을 몸의 등불이요 마음의 창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지만 눈이 어두우면 온 몸이 어둡게 됩니다. 좋은 눈을 가진 사람은 사물을 또렷또렷하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눈이 나쁘면 모든 것이 흐리마리하게 보입니다. 만일 눈이 건강하다면 즉 그가 관대한 마음과 자비를 베풀고자 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본다면 그의 삶은 풍성하게 될 것이지만, 반면에 이 세상을 이기적인 마음으로 본다면 그 사람은 분명하게 보지 못하므로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눈이 흐려지면 삶도 어두워집니다.
우리 눈이 밝아지려면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면 모든 것을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제대로 볼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뜻을 찾는데 힘쓸 때 우리는 분별력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이 물질과 세상을 사랑하는 데 가 있게 된다면 모든 것이 혼란스럽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실패하고 불만족한 이유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고자 하고 하나님과 사람을 동시에 기쁘게 하고자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은 타협이 없이 전적으로 하나님을 섬기고자 결단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모토는 “오직 한 일(One thing I do)”이었습니다. 하나님만을 섬기고자 할 때 우리의 얼굴, 마음, 머리, 양심이 빛으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돈을 사랑하기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고자 하는 결단은 진정 행복해지는 삶의 비밀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결단하십시오. 온 몸이 빛으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습니다. 24절을 보십시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우리는 한 마음으로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두 주인이 서로 다른 명령을 내린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한 주인을 택하여 충성하기 위해서 다른 주인은 버려야 합니다. 재물은 속삭입니다. “나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하십니다. 누구 말이 맞는 것입니까? 하나님과 재물 중에 누구를 섬기느냐 하는 문제는 근본적으로 누구를 신뢰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재물이란 원어로 맘몬인데 이는 아람어 아멘에서 나온 것이고 히브리어 뜻은 "신뢰하다 "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나중에는 “믿을 만한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NIV영어 성경에서는 대문자로 쓰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재물을 신의 위치에 놓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온전한 헌신을 원하시지만, 돈도 자기에게 100% 헌신하기를 원합니다. 돈이란 것은 그만큼 위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습니다. 재물은 다스려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재물을 다스리는 데는 20년 이상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7살부터 재물을 다스리는 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현대인들은 모자라는 비용을 무조건 수입만 늘려서 해결하려는 태도를 갖고 있는데 이는 매우 위험하며 악의 뿌리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의 욕망은 지구를 다 주어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재물에 대한 균형 잡힌 생활태도를 확립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더 많은 소유와 소비가 보다 잘 사는 지름길이라는 상업주의적 가치관에 길들여져 있습니다. 그러나 절약하고 검소하게 살고 수입에 맞게 살면 행복합니다. 청교도적인 삶은 검소하고 절제하는 삶인데 그로 인해서 부가 축적됩니다. 이렇게 부가 축적될 때 부패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부를 어떻게 다스려야 되는지, 돈을 무슨 목적으로 벌려고 하는지 방향이 잡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어리석은 부자요, 천국에 들어가기 힘든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2000년 전에 벌써 물질의 종된 현대인들의 문제를 꿰뚫어 보셨습니다. 우리는 자유인지만 어떤 점에서 물질에 관한한 현대판 노예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물질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살고자 결단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물질을 다스림으로 참된 자유인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그를 따르면서도 마음 속 깊은 곳에 염려하고 근심하는 것을 보셨습니다. 염려는 마음을 나누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제자들은 어떤 것에 대해서 염려하고 있었습니까? 우리가 염려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 염려하는 것은 하나님의 돌보심을 불신하기 때문입니다. 25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먹는 것, 마시는 것, 입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생명입니다. 생명이 있고 나서야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이 의미가 있습니다. 죽은 시체에게 아무리 좋은 음식과 옷을 주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적인 생명의 풍요함에 먼저 마음을 써야 합니다. 먹고 마시고 입을 것들에 대한 염려로 인해서 생명이 단축되거나 병이 든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우리는 사실 용돈이라도 풍족하게 쓰고 싶고 생활비 걱정하지 않으며 살고 싶습니다. 이런 기본적인 필요들을 어떻게 채울 수가 있습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이 가져야 할 믿음이 어떠한가를 말씀해 주십니다. 26절을 보십시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 하냐” 공중의 새는 열심히 날개 짓을 하면서 날아다니다 보면 먹을 것이 보이고 그것을 취함으로 생명을 유지합니다. 악하고 게으른 죄로 인해서 가난하게 되었다면 그것은 동정의 여지가 없습니다. 사도바울도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라고 하였습니다. 새는 먹고 사는 문제로 인해서 초조해 하지도 않고 계획을 세우는 것도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친히 이들을 먹이십니다. 우리가 염려한다고 키를 한자나 더할 수 없습니다. 염려는 백해무익한 것입니다. 의복을 위해서 염려하는 사람들은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백합화는 수고도 아니 하고 길쌈도 아니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 입은 것보다 더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는 들풀도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입히십니다. 그것도 계절마다 아름다운 옷으로 갈아입히십니다. 물론 우리는 공중의 새나 들의 백합화와는 다릅니다. 우리는 세금도 내야하고 아이들도 키워야 하고 장래를 위해서 준비도 해야 합니다. 교육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배워야할 것은 하나님께서 사소한 피조물에게까지 마음을 쏟고 그 필요를 공급하신다면 독생자 예수님의 피로 값 주고 산 자녀들에게는 훨씬 더 섬세하게 공급하지 않으시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애들이 아버지가 자기를 제대로 먹여주시고 입혀주실까 염려하고 있다면 부모된 입장에서 얼마나 민망한 일입니까? 이와 같이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무능력한 분으로 대접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염려하는 것은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증거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적은 증거입니다. 우리는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필요한 것들을 하나님께 아뢰어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 마음을 지키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방법대로 채워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물질문제로 염려하는 것은 믿음이 적은 것이라고 하십니다. 즉 하나님께 대한 신뢰의 결핍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동안 광야에서 만나를 먹으면서 일용할 양식을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것을 믿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실제로 먹고 마시고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갖지 못하고 불평하고 원망하고 불신에 빠졌습니다. 그들이 우리보다 더 악하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제자들은 오병이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그들의 필요를 채우신다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묵상하고 개인적인 믿음을 가져야 했지만 배가 고프면 또 다시 염려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다시 믿음을 심으십니다. 31,32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이 세상 것들을 위해서 지나치게 근심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가장 무가치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부여하시고 보호하시며 필요를 공급하시는 분이십니다. 독생자까지 아끼지 아니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생각하는 것이나 구하는 것에 넘치도록 채워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직장이 필요한 목자님들에게 믿음을 갖도록 연단하시고 하나님의 때에 반드시 주실 줄 믿습니다. 결혼 적령이가 된 분들에게는 합당한 배우자를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둘째, 염려하기보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라. 33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천국 백성이 첫째로 구해야 할 것은 그의 나라와 그의 의입니다. 그의 나라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생활입니다. 그의 의는 주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삶,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입니다. 우리 나라의 경제에 공의가 생겨나야합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번다는 생각은 이제 통하지 않습니다. 정직하고 의로운 회사가 인정을 받고 성장할 수 있습니다. 꾸민 회계, 거짓 회계가 아니라 투명한 회계가 모든 회사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봉사를 하고 일대일을 하고 예배를 드리든지 직장에서 일을 하든지 중요한 것은 마음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때 능력을 덧입을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시 84:11).” 우리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더하여 주십니다. 이것이 신자의 경제법칙이요 생활 법칙입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34).” 우리는 내일을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일에 대해서 상상을 하고 전혀 오지 않을 일들을 반쯤 온 것처럼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상상력이라는 좋은 도구를 주셨는데 그것을 믿음으로 활용하여야 합니다. 재물에 대한 교훈이 염려 하지 말라는 말로 끝났습니다. 부를 얻고 재물을 섬기고자 하는 유혹은 탐심에서 나옵니다. 그 심연에는 우리의 위상과 안전과 생존에 대한 불안감이 깔려 있습니다. 내일에 대한 염려로 쉬지 못한다면 이는 우리 마음이 참된 고향을 찾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어거스틴은 “우리의 마음이 당신 안에서 안식하기까지 우리에게는 안식이 없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는 말은 내일 일을 전혀 준비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현재에 충실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신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존엄성을 지켜야 합니다. 내일 일은 내일로 미루고 오늘은 소매를 걷어붙이고 오늘 당한 문제들을 대면하십시오. 다가올 염려를 당겨서 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염려할 시간이 있다면 그 힘으로 일하고 준비하십시오. 그리하면 모든 필요들이 채워질 것입니다. 사명인으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가 먼저 그 일에 열심을 내면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우리가 필요한 물질을 채움 받을 뿐만 아니라 더욱 풍성해져서 주와 복음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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