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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마8강(6:1-18)/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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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3,603회 작성일 03-04-27 09:43

본문

2003년 마태복음 제 8 강                                                       
말씀 / 마태복음 6:1-18
요절 / 마태복음 6:9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오늘 본문에서는 구제, 기도, 금식에 대한 바른 자세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들은 그리스도인의 대표적인 경건 생활이었습니다. 우리는 구제와 금식보다는 새벽 기도와 소감을 경건 훈련의 일환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어떻게 행해야 할까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기회를 갖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 우리 마음에 참된 기쁨이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올바른 구제(1-4)
1절을 보십시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여기서 말하는 의는 구제를 말합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사람 앞에서 의를 행하게 되면 하나님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합니다. 사람의 인정과 칭찬을 받고자 구제를 하게 되면 사람이 추해집니다. 사람의 인정과 칭찬은 당장 눈에 보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으로 칭찬하게 하고 우리 입으로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2).”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 중에는 회당과 거리에서 나팔을 불면서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구제금을 나누어주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날도 신문과 방송에 자기 이름이 나와야 수재민 돕기나 불우이웃 돕기를 합니다. 이것은 회사의 이미지를 제고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이렇게 하지 않으면 많이 걷히지 않는다고 합니다. 인간의 이기심으로 인해서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고자 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인정을 받고자 하는 사람의 욕구를 만족시켜서 모금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서민들은 동병상련으로 구제를 합니다. 한국의 구세군 활동은 세계에서 가장 활발하다고 합니다. 신자는 사람의 인정이 아니라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희생적으로 구제하되 하나님의 상급을 바라고 구제를 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떠한 자세로 하는 것이 하나님의 상을 받는 구제입니까?

  3,4절을 보십시오.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구제할 때 은밀하게 하는 것은 구제 받는 사람의 입장을 생각한 것입니다. 구제 받는 사람의 자존심을 살려주고 또 부담없이 도움을 받도록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며 살아가는 자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무한히 누리게 됩니다. 그는 구제를 통해서 자신도 하나님의 변함없고 무한하신 자비를 의지하고 살아간다는 것을 기억하게 됩니다. 사실 우리는 모두가 하나님의 관용과 구제의 바다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구제하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끊임없는 은혜를 입게 되고 이것을 자원으로 삼아 다시 다른 사람을 구제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구제가 일상화되어 자기가 구제한 지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구제를 합니다.  이렇게 은밀히 구제하는 사람은 더욱 존귀하게 보입니다. 신자들의 이런 삶을 통해 공동체가 아름다워지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됩니다. 은밀하게 구제하는 사람은 자기만이 아는 하나님의 위로와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가 은밀한 구제를 더욱 풍성하게 실천하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제자의 기도 생활(5-15)
  기도는 신자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경건 생활의 일부입니다. 외식하는 자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루에 세 번 기도했는데 기도 시간이 되면 길을 가다가도 자리를 펴고 엎드려서 또는 서서 기도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 자기는 기도의 종임을 드러내고자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이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하십니다(6). 하나님께서는 은밀한 중에 계실 뿐만 아니라 은밀한 중에 보시고 갚아 주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경건 생활이란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 앞에 신실하게 감당하는 것이 멋있는 것임을 보게 됩니다. 은은하게 풍기는 맛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생활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삶, 실제 삶에서 경건함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삶에서 경건 생활이 열매로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는 공적인 기도 외에 하나님과 자기와만 만나는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다니엘이 하루 세 번씩 자기 방에 들어가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열린 창에서  기도했던 것과 같은 삶이 있어야 합니다. 그의 기도 생활은 다리오 왕의 모든 신하들이 아는 은밀한 시간이었습니다. 이러한 영적 생활을 통해서 다니엘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이방인들에게 드러냈습니다.  이러한 개인 기도는 새벽 기도 시간에 나와서도 할 수 있고 출근길에서도 할 수 있고, 동아리 방에서도 할 수 있고 회사의 화장실에서도 할 수 있습니다. 한 목자님은 매일 점심 시간에 화장실 변기를 덮고 그 위에 앉아서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받으시고 직장 생활에서 승리를 주셨습니다.
  또한 우리는 기도할 때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구하기 전에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단순하고 간결하게 하되 깊은 신뢰를 가지고 해야 합니다. 아이의 엄마는 아기의 울음 소리만 들어도 그가 무엇을 원하는 지 아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말하지 못하는 것 까지도 다 아십니다(롬8:26).

  이제 예수님은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기도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주 기도문이라고 부릅니다. 주기도문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을 위한 기도와 우리 자신을 위한 기도입니다. 우리가 첫째로 기도할 제목이 무엇입니까? 9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초월적인 분이시며 동시에 우리와 함께 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피조물인 우리와 엄연히 구별되는 분이시오 창조주시오, 심판자시오, 생명의 주이십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위엄과 능력이 한이 없는 분이십니다. 그는 우리와 엄연히 구별된 분이심에도 우리가 필요를 구하기 전에 다 아시는 아버지이십니다. 모든 피조물의 필요를 공급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때 경외심과 함께 친밀감을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할 때는 사려 깊고 절제된 말로 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본래 거룩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이 이 세상에서 높임을 받으시도록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역사 가운데, 또 우리 가운데 어떻게 일하고 계신지 알고 드러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시도록 하는 것이 우리 인생의 근본 목적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시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은 본래 영광스러운 분이십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영적으로 죽어 있기 때문에 우리의 삶을 보고 하나님을 인식합니다. 이삭을 핍박했던 아비멜렉은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의 사이에 맹세를 세워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창26:28).”고 했습니다. 이스라엘과 유다가 분열된 이후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고 아사에게로 돌아오는 자가 많았습니다(대하15:9). 우리가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찾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역사하십니다.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 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의 큰 능력을 베푸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강력하게 역사하심을 볼 때 캠퍼스 지성인들은 몰려 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힘써야 할 것은 무엇보다 하나님과 교제에 힘쓰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둘째 기도 제목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시도록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하는 바램은 성경 전체를 관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시작되었고 지금은 자라나고 있으며 장차 예수님의 재림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해야 이 땅에 진정한 평화와 사랑과 공의가 실행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에 임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가정과 국가와 학문에도 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사회의 구석구석에 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는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것입니다. 그는 만물을 저에게 복종케 하시고 자신도 하나님 아버지께 복종하시어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게 할 것입니다(고전15:27,28).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세 번째 기도는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믿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항상 기뻐하며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살전5:16-18).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음란을 버리고 거룩하게 사는 것입니다(살전4:3). 이 간구는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평화의 시기, 하늘과 땅이 조화를 이루는 시기를 기대하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오직 하나님만이 이 세상을 구원하실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기도입니다. 세상의 어떤 혁명도, 어떤 개혁도, 사회사업을 위한 어떤 프로그램도 사람과 사람이 서로 상처를 주고받을 뿐 이 세상을 온전히 치유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교회, 시장,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맺고 있는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서 이루어가는 대리인입니다. 이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강하게 하셔서 화목하게 하시는 그 분의 대리인으로서 일하게 하실 것을 간구하는 기도이다. 우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해야 합니다(롬12:2). 그래야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힘을 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우리 자신을 위해서 기도할 제목을 말씀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기도는 일용할 양식, 죄사함, 시험에 들지 않고 악에서 구원을 해 주시도록 간구하고 있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일용할 양식은 하루하루를 살아갈 양식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나온 후에 일주일이면 들어갈 가나안 땅을 40년 동안 돌아다니면서 일용할 양식을 먹는 훈련과 안식일을 지키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매일 하나님께 나아와 교제를 나누기를 원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교제를 나누는데서 실패했을 때 가나안 땅에 들어가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을 감당하지 못하고 우상 숭배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일용할 양식은 우리의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들입니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손에서 흘러나오는 선물을 의지해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과학과 유전자 공학을 발전시킨다 해도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채우지 않으면 사람들은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지혜와 힘으로 물질을 얻고 살아가는 것처럼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지 않으면 그런 수고도 헛되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나의 일용할 양식이 아니라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공동체 의식을 갖도록 한 기도입니다. 인간이 고통하는 근본 죄문제는 이기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온 인류가 먹고 살기에 충분한 식량을 주시지만 인간의 이기심으로 인해서 굶어 죽는 사람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의 필요만이 아니라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의 필요를 위해서도 기도하고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약2:15,16)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기도는 그 자체가 죽은 것입니다.

  우리를 위한 두 번째 기도는 죄사함을 위한 것입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죄문제야 말로 인간을 파괴하는 가장 무서운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만큼 하나님으로부터 용서함을 받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는 근시안적 해석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행함으로써 긍휼이 없으신 하나님을 긍휼하신 분으로 바꿀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지은 사람을 긍휼히 여기지 않을 때에도 역시 긍휼을 베푸십니다. 하나님은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 말씀을 하셨던 대상이 성도들,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은혜로 죄사함을 받고 천국에 들어가는 여권을 받은 자들입니다. 천국 시민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신분에 변화가 일어나고 살아가는 방식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게 되면 천국 시민이 된 것입니다. 그 나라에서는 모든 해로운 것과 악한 것들이 소멸되고 모든 병이 고침을 받고 모든 죄가 사함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천국 시민으로서 다른 사람들을 끝까지 섬기고 용서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은 죄를 사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죄사함을 베풀지 않으면 우리들은 스스로 천국 시민이 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 속에 원한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면 그런 기도는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 돌아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죄사함을 받아 용서의 위력을 체험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를 위한 세 번째 기도는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13)”입니다. 시험이란 우리를 괴롭히고 실패하게 하고 분열시키는 모든 유혹과 시련을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매일 당하는 일상적인 시험을 포함해서 역사의 종말에 있을 마지막 심판까지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과 양들의 연약함을 깊이 이해하기 때문에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만 악에서 구하여 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악이란 사단을 말합니다. 우리를 죄에 넘어지게 하고 시험에 들게 하는 원인은 사단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악의 실체를 인식하고 영적인 싸움을 해야 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덧입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단의 꾀임에 빠지지 않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14, 15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다시 용서의 위력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우리는 30조원 빚진 자로서 다른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우리는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야 합니다.

셋째, 올바른 금식(16-18)
  이 부분에서는 올바른 금식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외식하는 자들은 금식할 때에 슬픈 기색을 내고 얼굴을 흉하게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는 목적은 사람들이 자신의 경건을 알아 달라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명함에 40일 금식 기도 두 번이라고 써서 나누어 준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금식을 왜 하는 것입니까? 남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금식 기도의 목적은  자신의 죄에 대한 애통함과 슬픔을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또한 완악하고 고집스러운 자아를 죽이고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굴복시키기 위해서 순종의 표현으로 드리는 기도입니다. 또한 국가적 위기를 당해서(대하1-4장), 회개와 개혁의 시기에(렘36:9-20), 하나님을 겸허히 대면할 때(행9:9) 금식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사야58장 1-12절에는 이 땅에 공의가 이루어질 것을 간절히 바라며 의로운 금식을 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금식은 어떤 자세로 해야 할까요? 17,18절을 보십시오.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금식도 구제나 기도와 마찬가지로 은밀한 중에 보시는 나의 아버지 앞에서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식하고 그 앞에서 할 때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갚아 주십니다. 이와 같이 신앙이란 겸손하게 자기를 감추는 맛이 있어야 합니다. 또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식하고 그 앞에서 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우리가 행하고 있는 경건의 훈련은 소감쓰기입니다. 이것은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가르치기 위한 수단입니다. 내 생활 가운데 일어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찾고 이를 나눌 때 풍성한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사람을 의식해서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게 되면 내면 투쟁은 하지 않고  적당하게 발표용 소감을 쓰게 되는 것입니다. 전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기보다 영원한 지옥에 던져져 영원한 고통을 당할 영혼을 불쌍히 여기고 구령의 열정에 불타서 전해야 합니다. 새벽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체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해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해서 할 때 모든 것이 제대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의식하고 해야 함을 보게 되었습니다. 특히 은밀한 중에 계신 하나님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곳에서도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초월적인 분이시면서 동시에 우리의 삶 속에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신앙생활을 할 때 하나님의 백성다운 경건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 무엇을 하기보다 내면적인 일에 더욱 힘을 쓰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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