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강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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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5장 1-58
요절/3,4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부활
김에스라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우리에게 아름다운 자태를 보여 주었던 센터의 목련이 벌써 다 졌습니다. 지금, 꽃잎이 다 떨어진 바로 그 자리에서 잎이 자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말씀은 죽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 죽은 그것에 부활이 있음을 가르칩니다. 우리도 다시 살아날 것을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본문을 통해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깊이 있게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성경대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1-4)
바울이 증거하는 예수님의 복음이 어떠합니까? 1절을 봅시다. “형제들아”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을 양이 아니라 형제들아 하며 부르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에게 있어 양이 아니라 형제였습니다. 당시 고린도는 유대인과 그리스인이 함께 어울려 살았습니다. 고린도는 중요한 무역항이었고 상업적 도시였습니다. 또한 헬라철학이 발달하여 인간의 이성이 고도화 되고 사상이 인간중심적이었습니다. 바울은 이곳에서 1년 6개월동안 복음을 섬겼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섬기는 가운데 이들의 지혜가 뛰어남을 보고 스스로 약함을 느꼈고 심히 떨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고린도 가운데 바울을 통해서 복음을 심으셨습니다. 고린도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전한 복음을 받고 그 가운데 섰습니다. 그러나 교회에 문제가 많았습니다. 분쟁과 분열이 있었습니다. 아비의 아내를 취하는 음행이 있었습니다. 우상의 제물을 먹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 모든 문제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을 사랑에 대해서 썼습니다. 생각해보니 바울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근본문제가 해결될 것 같지 않았습니다. 부활의 복음만이 그들의 근본문제를 해결할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전한 복음을 다시 알게 합니다. 또한 복음을 굳게 지킬 것을 권면합니다. 복음을 헛되이 믿지 말 것을 권면합니다. 복음을 믿어도 확실한 내,외적인 결과가 있도록 믿을 것을 권면합니다. 내 한 사람이 복음을 믿고 확실히 변화가 있도록 할 것을 권면합니다. 이렇게 할 때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면 복음이 무엇입니까? 3,4절을 봅시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바울은 복음을 간결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예수님이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은 우리의 죄와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가 없었다면 예수님께서 죽지 않으셨고 또한 다시 살아날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죄를 잘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죄가 무엇입니까?
로마서 1장 21절을 보면,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고린도 교회는 하나님을 잘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영화롭게 아니하였습니다. 감사치도 않았습니다. 그랬을 때 고린도 교회는 성적으로 타락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세우기보다 나는 아볼로파, 나는 바울파 하며 사람을 세웠습니다. 형제는 자매에게로, 자매는 형제에게로 눈길이 향하였습니다. 좀더 매력적으로 보이고자 성형 수술을 쉽게 하였습니다. 몇 일전 뉴스에서 성형 수술을 한 후에 얼굴모양이 마음에 들지 않아 극약을 먹고 자살했다는 소식은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남을 용서하지 못하므로 괴로워 합니다. 시기심으로 항상 마음을 끓이고 살아 갑니다. 열등감으로 항상 소외되고 자기의 목소리를 분명하게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상처 때문에 생각을 항상 비뚤어지게 합니다. 반발심을 가지게 합니다. 심지어 어떻게 하면 부모님을 괴롭게 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형제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되 영화롭게 하지 않고 감사하지 않을 때 우리가 이렇게 변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죄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담당해야 할 죄를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지우셨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죽도록 하셨습니다. 불순종한 우리를 대신해서 죽음의 고통을 알게 하셨습니다. 멸시를 당하게 하셨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에게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이 예수님께서 대신 십자가에 못 박히시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우리가 나음을 입었습니다. 우리의 내면의 상처들이 치료가 되었습니다. 건강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부활하셨습니다. 4절을 봅시다.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부활하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권능과 살아계심을 나타냅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신 예수님께서 장사되어 묻히셨습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살아있지 않은 것 같이 느껴집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죽었으니 이제 다시는 예수님을 볼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녀의 마음 가운데는 죽으신 예수님만이 남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을 다시 살리시므로 하나님은 하나님의 권능과 살아 계심을 증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셔서 우리 인생들을 죄에서 보호하십니다. 나의 인생 가운데 간섭하고 계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심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며 물으셨을 때 베드로가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가사라대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죽으시고 또한 살아나심으로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우리는 때로 죄 용서함을 받았는데 죄에 잘 넘어 집니다. 어떤 분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으면 죄에 넘어지는 일도 없을 것이라며 목자를 원망합니다. 투쟁하는 삶을 평생동안 감당할 것을 생각하면 차라리 믿지 않는 것이 낫다는 생각마저 들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시고 부활하셨음에도 이렇게 고생을 해야 하는가 한탄마저 듭니다. 바울은 고백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그러나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되시므로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죄를 완전히 극복하시고 도말하셨습니다. 나에게 죄가 전혀 살아있지 않습니다. 우리로 새 생명 가운데 행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로 여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죽을 몸도 살리십니다. 비록 죄에 넘어지지만 우리는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를 드립니다.
II. 부활의 증인들(5-11)
예수님은 성경대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성경대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살아나신 예수님이 누구에게 자신을 보이셨습니까? 5절을 봅시다. 게바는 베드로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자신을 보이셨습니다. 후에 열두 제자들과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습니다. 그 후에 야고보와 모든 사도에게 보이셨습니다. 맨 나중에는 바울에게 보이셨습니다. 이들은 중요한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들입니다. 바울은 특히 자신에 대해서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8절에서 바울 자신을 기록하고 9, 10절에서 설명하는 것을 볼 때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인해서 자신이 어떻게 변화 되었는가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옛 이름이 사울로서 great man입니다. 유명한 가말리엘 문하의 율법학자였고, 뼈대있는 베냐민 지파사람이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는 또한 로마시민권을 가졌습니다. 그는 대제사장에게 위임장을 받아 크리스챤들을 핍박하였습니다. 스테판을 돌로 죽이도록 묵인하였습니다. 이런 그는 살아가는데 자신만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변화되었습니다. 8절을 봅시다. 그는 자신이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자요,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부족한 자임을 발견하였습니다. 그가 변화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은혜는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의 눈에서 비늘이 벗겨지고 영안이 열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죽으셨음을 깨닫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였습니다. 그가 변화되었을 때 크리스챤들을 잡아 가두는 데서 복음으로 겸손하게 섬기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수많은 교회를 개척하였습니다.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에 대해서 가는 곳 마다 증거하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때 도저히 변화될 것 같지 않은 사람이 변화됩니다. 죽고 깨어나도 변화될 것 같지 않은 사람이 변화됩니다. 가능성이 전혀 없는 사람이 하나님의 쓰실만한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던 자가 담대하게 증거하는 자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쓰시는 것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임을 아는 겸손한 자가 됩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됩니다.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자가 됩니다.
저는 아버지에 대한 증오와 정욕의 죄악으로 힘들어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그리스도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아버지를 용서하고 섬기는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정욕된 자였지만 그리스도를 통해 극복하게 하시고 결혼을 이루셨습니다. 또한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의 열등감을 극복하게 하십니다. 저는 열등감으로 할 수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는데 그리스도를 의지하므로 전혀 공부하지 않았던 암치료의 한 분야에서 연구하게 하시고 개척하는 자가 되게 하십니다. 학계에서 지명도가 높으신 분을 통해 California의 City of Hope에 GRE 시험 없이 갈 수 있도록 추진중에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 과기부 지원으로 1년간 해외공동연구에 함여할 수 있도록 추천을 받고 있습니다. 저로서는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상경 후에는 복음역사에 대해서 관심이 덜 하였습니다. 자세가 바울과 같이 확실하지 않았습니다. 원인을 생각해도 그 때 뿐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제가 자신을 복음역사에 확실하게 드리지 못하는 것은 저의 마음 가운데 아직 부활하신 예수님이 분명하게 살아있지 않기 때문임을 발견합니다. 제가 나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더 의지하고 덧입어 확실하게 변화되기를 기도합니다.
Ⅲ. 죽은 자의 부활과 만유의 회복(12-34) 이요한
우리는 김에스라 목자님을 통해 복음과 부활의 증인에 대하여 배웠습니다. 제가 전할 말씀은3장 죽은 자의 부활의 확실성과 그때에 일어날 만유의 회복입니다. (12절로 34절까지 입니다.)
(1)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12-19)
사도 바울은 죽은 자의 부활이 반드시 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어떤 문제들이 생기게 되는가 상상을 해보았습니다. 첫째로, 그리스도의 부활도 없게 됩니다(13). 일반적으로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부활도 없게 됩니다. 그러면,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지 못하셨다면 어떤 문제가 생기게 됩니까?
둘째로, 우리의 전파하는 것이나 믿음도 헛되게 됩니다(14,15a) 우리가 받은 복음이 무엇이였습니까?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죄를 위해 죽으시고 장사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다면 이는 모든 복음의 기초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모든게 무너진다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가 힘썼던 1:1은 다 양들을 속인 것이 됩니다. 팀과 요회는 조직적이고도 인격적으로 거짓말장이를 길러내는 모임이 됩니다. 선교사님들은 어떠합니까? 국내에서 거짓말하기가 너무 재미있어서 해외나가서까지 거짓말하시는 분들이 됩니다. 그러나, 거짓말쟁이가 정직한 사람을 키워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셋째로, 여전히 죄가운데 있게 됩니다.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하시며, 십자가에서 우리죄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은 말씀을 그래로 믿고, 죄사함을 체험하고 눈물을 흘리며 감사했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죄사함의 은혜는 부활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넷째로, 우리가 가장 불쌍한 자가 됩니다. 많은 성도들이 부활의 소망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 받고,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런 분들을 존경하고, 그 길을 가고자 거룩한 믿음의 싸움을 싸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활의 소망이 없다면, 거짓 소망에 속아 죽도록 고생만하고 사는 불쌍한 사람들이 됩니다. 그러나, 부활의 소망이 있기에 김바나바, 부활선교사님의 중국에서의 희생은 값진 것입니다.
이상의 문제들을 볼 때 죽은 자의 부활을 부인하면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인하게 되고,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으면, 우리의 복음과 믿음이 무너져 버립니다.
(2) 만유의 회복(20-28)
(20)“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열매가 되셨도다” “그러나 이제” 이 얼마나 답답했던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는 말입니까? 그동안 말도 안되는 가정으로 인해서 답답했던 우리들에게 사도바울은 그러나 이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열매가 되셨습니다. 아담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게 되었습니다.
첫 열매는 후에 나타날 많은 수확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와같이 그리스도의 부활은 앞으로 모든 신자들이 부활한다는 표증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우리도 언젠가는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과 같이 부활하리라는 소망을 줍니다.
우리가 부활할때는 바로 그리스도 강림하실때입니다. 그때에는 예수님이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세상의 모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치십니다.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 둘 것이며, 왕에 왕, 주의 주가 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원수 사망권세를 완전히 멸망시키 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삶은 날마다 새로워지고 생명력을 얻고 자라게 됩니다. 날마다 예수님안에서 의미와 생명이 풍성케 됩니다.
28절을 보십시요. “만물을 저에게 복종하게 하신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이에게 복종케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
예수님은 만물을 발아래 복종시킨 후 자신도 하나님 아버지께 복종하심으로 만유의 질서를 회복하십니다. 이때까지 세상은 사단의 권세로 인해 창조질서가 무너지고 그 가운데 인생들과 자연만물은 신음하고 탄식했습니다. 동물의 왕국을 보면 무서운 사자가 살이 통통한 사슴을 잡아 먹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빠드득 빠드득” 그리고, 앙상한 뼈만 남김니다. 자연은 썩고 쇠하며 멸종되어 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다시오심으로 우리가 부활할때는 살벌한 양육강식과 무너진 창조 질서가 회복이 됩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만유의 회복의 될 때 곧 무너진 창조의 질서가 바로 잡히는 그때를 비전중에 보았습니다. 그리고, 회복될 에덴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사11:6-9)그때에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7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8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9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그때는 피조물의 탄식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때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계시록에서 그 나라는 애통함이나 눈물이나 죽음이나 아픈 것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괴질도 전쟁도 테러도 핵으로 인한 공포도 없습니다.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이 흐르고, 강좌우에는 생명나무가 있어 풍성한 실과를 맺는 나라, 공평과 공의가 실현되는 나라, 목자되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나라. 이 얼마나 소망이 되는 곳입니까!
바로 이때가 그리스도께서 무너진 창조의 질서를 바로 잡으시고, 만유를 회복하실 때입니다. 인간이나 자연이나 왕성한 생명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에덴에 있었던 생명나무를 먹은 것과 같이 기쁨가운데서 영생을 누릴 것입니다. 하나님과 온전한 교제와 만남으로 우리안에도 하나님 나라가 온전히 이루어지며, 우리 신자들은 새하늘과 새 땅에서 사랑하는 주님과 함께 영원토록 왕노릇하게 될 것입니다.
(3) 깨어 의를 행하라(29-34)
그럼, 부활신앙을 가진 자는 어떠한 삶을 살게 됩니까?
첫째, 적극적으로 희생과 위험을 무릎쓰고 하나님을 섬깁니다. 사도바울은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의 본이 되었습니다. 30,31절을 보십시요. “또 어찌하여 우리가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리요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사도바울은 부활의 소망이 있었기 때문에 질병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 궁핍과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날마다 죽은 생활을 했습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그는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였습니다. 안일하게 살고자 하는 소원과 세상성공을 향한 야심을 버렸습니다. 생명을 내놓지 않고서는 복음을 증거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바울은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언제나 주와 복음을 위해 순교할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지금 이 시대는 어떠한 시대입니까? 음란하고 패역한 시대입니다.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하는 시대입니다. 저도 부활이 없다면 일생동안 먹고 마시며 주말마다 놀러다니면서 인생을 후회없이 즐길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신앙이 있는 사람의 삶은 달라야 합니다.
둘째, 부활을 믿는 자는 깨어 의를 행하게 됩니다. “(33,34)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우리 주위에는 악한 동무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부활을 믿지 않습니다. 이들에게는 어차피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므로 이 땅에 사는 동안 즐기고, 마시고 노는 것을 추구합니다. 그러면서 부활의 소망가운데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는 성도들을 비웃고 유혹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로서 영적으로 무지한 자들입니다. 사도바울은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속지말라고 하십니다. 이 세상이 다라고 생각하는 것에서 속지말라고 하십니다. 이는 우리에게 부활의 소망, 영생의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말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이땅에서 깨어 의를 행해야 합니다. 깨어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맺고, 하나님앞에서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죄를 피하고, 적극 의를 좇아 행해야 합니다. 적극 의되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저는 말씀을 준비하려고 보니, 학교에서 실험하는 것이 힘들어서 그런지 입술이 갈라져서 피가 났습니다. 저는 피곤이 누적되어서 입술이 갈라지는 구나 생각하였습니다. 저는 건강을 염려하고, 말씀을 준비할 수 있을지 의문이 되었습니다. 사도바울은 강도의 위협과 생명의 위협을 받았지만, 저는 단지 질병과 피곤의 위협앞에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부활신앙도 덧입을 수 없구나 주저 앉았습니다. 탄식하였습니다.
저는 말씀을 묵상하며, 만유의 회복을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은 질병도 죽음도 없는 곳입니다. 간염이 없는 곳, 피곤과 스트레스가 없는 곳입니다. 제가 꿈꾸는 곳입니다. 이 소망을 바라보니 피곤이 사라졌습니다. 내안에서 생명력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질병으로 연약한 이 몸도 강한 몸을 사시 살게 될 나라를 꿈꾸게 되었습니다. 부활의 소망이 있기에 피곤을 극복하고 깨어 의를 행할 수가 있습니다. 제가 연요절 말씀인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적극 하나님의 뜻과 의를 구하고, 부활을 증거하는 삶을 살겠습니다. 저에게 부활의 믿음과 만유의 회복에 대한 소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IV. 부활의 영광 (35-49) 심마태
바울은 지금까지 죽은 자의 부활이 반드시 있음을 증거했습니다. 그런데 조용히 졸고 있던 한 형제가 갑자기 손을 들고 하나님 말씀에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권한진 형제님이 이의를 제기하듯이 35절을 읽어주시겠습니다. 그의 질문은 아주 이성적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썩어 뼈만 남게 됩니다. 좀 더 지나면 흔적도 없이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어떻게 죽은 자가 부활의 몸을 덧입을 수 있습니까? 도저히 이해가 안됩니다. 또 대개 사람들은 자신의 몸에 대해 한두 가지 많게는 열 가지 이상 불만스런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몽당연필과 같은 짜리몽땅한 키, 절구통을 생각게 하는 불룩한 허리, 너무나 민주적이고 자유분방하게 생긴 얼굴 등으로 자학하고 운명주의에 시달립니다. 지난번 대구 지하철 참사때 많은 사람들이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심하게 불에탄채 죽었습니다. 그런데 부활한 후에도 여전히 지금과 별로 달라질 것이 없다면 부활하는 것이 무엇이 좋은가 헷갈리게 됩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이 문제를 씨앗의 비유를 통해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다시 살아나지 못합니다. 이것은 자연의 법칙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조금의 의심도 없이 당연한 진리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땅 속에 묻혀 죽은 씨가 어떻게 다시 사느냐고 의문을 제기하는 농부는 없습니다. 그냥 믿습니다. 씨를 뿌리면서 당연히 씨가 죽어서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힐 것을 기대합니다.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씨가 땅에 떨어져 죽고 새롭게 살아나듯이 우리가 이 땅에서 죽고 부활의 형체를 덧입게 됩니다. 당연한 진리입니다. 그런데 그 영광은 지금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즐거운 일입니까?
그러면 우리가 어떤 몸으로 부활하게 됩니까? 42-44절을 보십시오.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우리는 현재 노화과정에 있는 썩을 몸을 입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매님들은 식물나라 에센스나 SOD 크림 등을 바르면서 피부노화를 막으려고 애를 씁니다. 하루 3번 식후 3분 내에 3분 동안 부지런히 이를 닦고 1년에 1번 스케일링을 해 썩지 않게 하려고 해도 무정한 이는 하나 둘 썩어갑니다. 또 우리 몸은 욕됩니다. 감정과 욕정에 이끌려 음란하고 정욕적인 것을 추구하며 수치스럽고 욕된 인생을 살아갑니다. 우리 몸은 정말 약합니다. 조금만 무리해도 몸살로 끙끙 앓아야 합니다. 살아있는 동안 끊임없이 여러 가지 질병에 시달립니다. 우리의 마음도 약합니다. 정에 약하고, 정욕에 약합니다. 물질에 약하고 세상명예에 약합니다. 그러나 이런 육체가 어떤 모습으로 부활하게 됩니까? 썩을 것이 썩지 않을 것으로 다시 살고 욕된 것이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게 됩니다. 약한 것이 강한 것으로 다시 살고 육의 몸이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게 됩니다. 그때는 자매님들이 얼굴에 무슨 크림을 바르지 않더라도 얼굴이 달덩이처럼 빛나고, 은하수의 아름다운 별빛처럼 반짝반짝 빛날 것입니다. 부활은 실로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썩어 없어질 인생들에게 영광스러운 부활의 영광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V. 최후의 승리 (50-58)
바울은 이제 마지막 날에 있을 최후의 승리를 노래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혈과 육에 속한 것을 벗어버리고 변화되어야 합니다. 51,52절을 보십시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날은 그리스도께서 큰 권능과 영광으로 재림하시는 인류 최후의 날입니다. 그 때에 예수님의 재림을 알리는 천사장의 나팔 소리가 하늘로부터 온 천지에 울려 퍼집니다. "빰빠라밤빰빠~ 빰빰빰빠 빰빰빰 빰빰빰빰 빰빰빰~빠" 나팔소리에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신령한 몸으로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여 하늘로 올라가게 됩니다. 어떤 분은 눈물로 중보기도를 하다가, 어떤 분은 양과 1:1 하다가 양과 함께 하늘로 올라갈 것입니다. 어떤 분은 찬송을 부르며 센터 화장실 청소를 하다가 대걸레를 잡고 하늘로 올라갈 것입니다. 또 평신도 목자님들은 직장생활로 피곤한 몸을 부인하고 캠퍼스에서 피싱하다가 하늘로 올라갈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에 복음 믿기를 거부하고 세상 죄악을 즐기며 뺀질거리던 사람은 올라갈 수 없습니다. 아무리 높이뛰기를 잘해도, 아무리 돈이 많아 자가용 비행기를 가지고 있다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목자님들의 바지가랑이를 붙들고 통사정해도 소용없습니다. 그날에 신자들은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하시는 예수님의 칭찬과 위로를 받게 됩니다. 이로 인해 그동안 믿음으로 사느라 겪었던 모든 수고와 아픔이 눈 녹듯이 사라지고 남모르게 흘렸던 눈물이 환희로 바뀌게 됩니다. 그 날은 신자들에게는 최고의 날이요 가장 영광스러운 날입니다. 그러나 불신자들에게는 심판의 날입니다. 이 날은 반드시 옵니다. 이것이 신자들만이 간직한 비밀입니다.
바울은 이 영광스러운 비밀을 말한 후 그의 심령에 산 소망의 감격으로 벅차올랐습니다. 그리고 외쳤습니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54)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그날 썩을 우리 몸의 장막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죄로 죽을 이 몸이 죽지 아니함을 입게 됩니다. 이 얼마나 소망이 됩니까? 그리고 최후의 날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이사야서에 기록된 말씀이 응하게 됩니다.(사 25:8) 한사람으로 말미암아 들어온 사망권세는 인류위에 군림했습니다. 진시황제도 죽었고 마호메트 석가 공자도 죽었습니다. 그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에서 부활하셨습니다.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사망권세를 완전히 멸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 영광 중에 재림하실 것입니다. 이 사실을 확실히 알고 믿은 사도 바울은 사망 앞에서 큰소리를 쳤습니다. 55절을 보십시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이것은 한번 덤벼봐라 이겁니다. 이제 사망쯤은 우습다 이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승패는 이미 끝이 났습니다. 사망은 완전 사망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시는 날은 그야말로 사망의 사망 날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돌려드립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죽은 자의 부활과 부활의 영광과 최후의 승리에 대해 증거했습니다. 바울은 이제 결론적으로 부활신앙을 가지고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 권면하고 있습니다. 다같이 58절을 읽어 보시겠습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첫째, 부활믿음에 견고하게 서서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믿는 자들은 최후 승리하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결코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의 일'은 주 예수님께서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그 사명은 주님의 양을 먹이는 일이요(요 21:15), 가서 모든 족속을 제자삼아 세례를 주고 주님께서 분부하신 모든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입니다(마 28:20). 이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온 땅에 드러내고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런 주의 일을 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특히 오늘날처럼 치열한 생존경쟁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더욱 어렵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라'고 합니다. '힘쓰라'는 것은 주의 일을 감당하는 것이 우리 본성적으로는 안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의 일을 하기 위해 힘쓰지 않으면 아무리 환경이 좋아도 안일한 본성과 세상을 사랑하는 본성 때문에 주의 일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주의 일은 '힘을 써야' 할 수 있습니다. 또 바울은 '항상 힘쓰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상황이 좋을 때나 나쁠 때나, 학생일 때나 평신도일 때나, 한국에 있을 때나 외국에 나간 경우에나 변함없이 항상 힘쓰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또 '더욱 힘쓰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주의 일에 한번 힘을 쓰고 나면 할 일을 다 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신앙의 연륜이 더해갈수록 더욱 힘을 써야 합니다. 더욱 힘을 써서 주의 일을 더 많이 감당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을 쓰게 되면 이 세상에서 자기를 위한 삶이 희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라'고 하면 '그러면 나의 일은 어떻게 되는가'하고 반발심이 듭니다. 또 주의 일에 힘쓰고 나면 피해의식에 빠지기도 합니다. 우리 목자님들은 진심과 시간과 청춘과 꿈을 바쳐 양들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양들이 나의 수고를 몰라줄 때 힘든 생각이 듭니다. 당장 보이는 열매가 없을 때 나의 수고가 헛된 것으로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세상일은 헛되지만 주의 일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재림하신 주님께서 주의 일에 힘쓴 그 모든 것을 아시고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하고 칭찬하시며 영광의 면류관을 씌워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일은 남는 것이 없지만 주의 일은 반드시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죄로 죽어가는 자를 살리고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일만큼 아름답고 가치 있는 일은 없습니다. 주와 복음을 위하여 남몰래 흘린 눈물과 진심을 하나님께서는 다 기억하시고 하늘나라에서 큰 상급으로 보상해 주십니다. 우리를 위한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이 땅에 사는 동안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제가 주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는데 더욱 힘을 쓰야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 속에는 캠퍼스 생명 구원역사를 섬기면서 ‘아무리 노력해도 열매가 맺히지 않을 것이다’는 실패감이 있었습니다. 매년 새롭게 시작해보지만 번번이 빈 그물만 건졌습니다. 그래도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아무 열매가 맺히지 않으므로 그동안 얼마 드리지도 못했지만 주님께 드린 시간과 진심과 열정이 헛수고로 생각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주님은 저의 이 수고가 결코 헛되지 않다고 하십니다. 주와 복음을 위하여 남몰래 흘린 눈물과 진심을 하나님께서는 다 기억하시고 모두 갚아주신다고 하십니다. 제가 주님이 주실 이 상급과 면류관을 소망합니다. 이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므로 올해 캠퍼스 복음역사에 더욱 헌신하는 종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권한진 형제님 한 사람을 위해 자신이 죽고 썩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영광스러운 부활을 체험하고 열매를 풍성히 맺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죽은 후에는 반드시 영광스러운 부활이 있습니다. 이 부활은 우리 믿는 자들의 희망이요, 산 소망입니다. 또한 우리가 인생의 봄과 같은 젊은 시절에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주의 일을 하게 된 것은 참으로 큰 은혜요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최후의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믿음에 굳게 서서 주님께서 맡기신 홍대 캠퍼스 개척과 세계 선교 사명을 더욱 힘써 감당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요절/3,4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부활
김에스라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우리에게 아름다운 자태를 보여 주었던 센터의 목련이 벌써 다 졌습니다. 지금, 꽃잎이 다 떨어진 바로 그 자리에서 잎이 자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말씀은 죽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 죽은 그것에 부활이 있음을 가르칩니다. 우리도 다시 살아날 것을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본문을 통해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깊이 있게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성경대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1-4)
바울이 증거하는 예수님의 복음이 어떠합니까? 1절을 봅시다. “형제들아”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을 양이 아니라 형제들아 하며 부르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에게 있어 양이 아니라 형제였습니다. 당시 고린도는 유대인과 그리스인이 함께 어울려 살았습니다. 고린도는 중요한 무역항이었고 상업적 도시였습니다. 또한 헬라철학이 발달하여 인간의 이성이 고도화 되고 사상이 인간중심적이었습니다. 바울은 이곳에서 1년 6개월동안 복음을 섬겼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섬기는 가운데 이들의 지혜가 뛰어남을 보고 스스로 약함을 느꼈고 심히 떨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고린도 가운데 바울을 통해서 복음을 심으셨습니다. 고린도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전한 복음을 받고 그 가운데 섰습니다. 그러나 교회에 문제가 많았습니다. 분쟁과 분열이 있었습니다. 아비의 아내를 취하는 음행이 있었습니다. 우상의 제물을 먹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 모든 문제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을 사랑에 대해서 썼습니다. 생각해보니 바울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근본문제가 해결될 것 같지 않았습니다. 부활의 복음만이 그들의 근본문제를 해결할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전한 복음을 다시 알게 합니다. 또한 복음을 굳게 지킬 것을 권면합니다. 복음을 헛되이 믿지 말 것을 권면합니다. 복음을 믿어도 확실한 내,외적인 결과가 있도록 믿을 것을 권면합니다. 내 한 사람이 복음을 믿고 확실히 변화가 있도록 할 것을 권면합니다. 이렇게 할 때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면 복음이 무엇입니까? 3,4절을 봅시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바울은 복음을 간결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예수님이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은 우리의 죄와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가 없었다면 예수님께서 죽지 않으셨고 또한 다시 살아날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죄를 잘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죄가 무엇입니까?
로마서 1장 21절을 보면,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고린도 교회는 하나님을 잘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영화롭게 아니하였습니다. 감사치도 않았습니다. 그랬을 때 고린도 교회는 성적으로 타락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세우기보다 나는 아볼로파, 나는 바울파 하며 사람을 세웠습니다. 형제는 자매에게로, 자매는 형제에게로 눈길이 향하였습니다. 좀더 매력적으로 보이고자 성형 수술을 쉽게 하였습니다. 몇 일전 뉴스에서 성형 수술을 한 후에 얼굴모양이 마음에 들지 않아 극약을 먹고 자살했다는 소식은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남을 용서하지 못하므로 괴로워 합니다. 시기심으로 항상 마음을 끓이고 살아 갑니다. 열등감으로 항상 소외되고 자기의 목소리를 분명하게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상처 때문에 생각을 항상 비뚤어지게 합니다. 반발심을 가지게 합니다. 심지어 어떻게 하면 부모님을 괴롭게 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형제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되 영화롭게 하지 않고 감사하지 않을 때 우리가 이렇게 변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죄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담당해야 할 죄를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지우셨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죽도록 하셨습니다. 불순종한 우리를 대신해서 죽음의 고통을 알게 하셨습니다. 멸시를 당하게 하셨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에게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이 예수님께서 대신 십자가에 못 박히시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우리가 나음을 입었습니다. 우리의 내면의 상처들이 치료가 되었습니다. 건강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부활하셨습니다. 4절을 봅시다.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부활하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권능과 살아계심을 나타냅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신 예수님께서 장사되어 묻히셨습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살아있지 않은 것 같이 느껴집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죽었으니 이제 다시는 예수님을 볼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녀의 마음 가운데는 죽으신 예수님만이 남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을 다시 살리시므로 하나님은 하나님의 권능과 살아 계심을 증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셔서 우리 인생들을 죄에서 보호하십니다. 나의 인생 가운데 간섭하고 계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심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며 물으셨을 때 베드로가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가사라대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죽으시고 또한 살아나심으로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우리는 때로 죄 용서함을 받았는데 죄에 잘 넘어 집니다. 어떤 분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으면 죄에 넘어지는 일도 없을 것이라며 목자를 원망합니다. 투쟁하는 삶을 평생동안 감당할 것을 생각하면 차라리 믿지 않는 것이 낫다는 생각마저 들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시고 부활하셨음에도 이렇게 고생을 해야 하는가 한탄마저 듭니다. 바울은 고백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그러나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되시므로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죄를 완전히 극복하시고 도말하셨습니다. 나에게 죄가 전혀 살아있지 않습니다. 우리로 새 생명 가운데 행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로 여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죽을 몸도 살리십니다. 비록 죄에 넘어지지만 우리는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를 드립니다.
II. 부활의 증인들(5-11)
예수님은 성경대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성경대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살아나신 예수님이 누구에게 자신을 보이셨습니까? 5절을 봅시다. 게바는 베드로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자신을 보이셨습니다. 후에 열두 제자들과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습니다. 그 후에 야고보와 모든 사도에게 보이셨습니다. 맨 나중에는 바울에게 보이셨습니다. 이들은 중요한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들입니다. 바울은 특히 자신에 대해서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8절에서 바울 자신을 기록하고 9, 10절에서 설명하는 것을 볼 때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인해서 자신이 어떻게 변화 되었는가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옛 이름이 사울로서 great man입니다. 유명한 가말리엘 문하의 율법학자였고, 뼈대있는 베냐민 지파사람이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는 또한 로마시민권을 가졌습니다. 그는 대제사장에게 위임장을 받아 크리스챤들을 핍박하였습니다. 스테판을 돌로 죽이도록 묵인하였습니다. 이런 그는 살아가는데 자신만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변화되었습니다. 8절을 봅시다. 그는 자신이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자요,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부족한 자임을 발견하였습니다. 그가 변화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은혜는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의 눈에서 비늘이 벗겨지고 영안이 열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죽으셨음을 깨닫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였습니다. 그가 변화되었을 때 크리스챤들을 잡아 가두는 데서 복음으로 겸손하게 섬기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수많은 교회를 개척하였습니다.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에 대해서 가는 곳 마다 증거하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때 도저히 변화될 것 같지 않은 사람이 변화됩니다. 죽고 깨어나도 변화될 것 같지 않은 사람이 변화됩니다. 가능성이 전혀 없는 사람이 하나님의 쓰실만한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던 자가 담대하게 증거하는 자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쓰시는 것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임을 아는 겸손한 자가 됩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됩니다.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자가 됩니다.
저는 아버지에 대한 증오와 정욕의 죄악으로 힘들어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그리스도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아버지를 용서하고 섬기는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정욕된 자였지만 그리스도를 통해 극복하게 하시고 결혼을 이루셨습니다. 또한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의 열등감을 극복하게 하십니다. 저는 열등감으로 할 수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는데 그리스도를 의지하므로 전혀 공부하지 않았던 암치료의 한 분야에서 연구하게 하시고 개척하는 자가 되게 하십니다. 학계에서 지명도가 높으신 분을 통해 California의 City of Hope에 GRE 시험 없이 갈 수 있도록 추진중에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 과기부 지원으로 1년간 해외공동연구에 함여할 수 있도록 추천을 받고 있습니다. 저로서는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상경 후에는 복음역사에 대해서 관심이 덜 하였습니다. 자세가 바울과 같이 확실하지 않았습니다. 원인을 생각해도 그 때 뿐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제가 자신을 복음역사에 확실하게 드리지 못하는 것은 저의 마음 가운데 아직 부활하신 예수님이 분명하게 살아있지 않기 때문임을 발견합니다. 제가 나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더 의지하고 덧입어 확실하게 변화되기를 기도합니다.
Ⅲ. 죽은 자의 부활과 만유의 회복(12-34) 이요한
우리는 김에스라 목자님을 통해 복음과 부활의 증인에 대하여 배웠습니다. 제가 전할 말씀은3장 죽은 자의 부활의 확실성과 그때에 일어날 만유의 회복입니다. (12절로 34절까지 입니다.)
(1)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12-19)
사도 바울은 죽은 자의 부활이 반드시 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어떤 문제들이 생기게 되는가 상상을 해보았습니다. 첫째로, 그리스도의 부활도 없게 됩니다(13). 일반적으로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부활도 없게 됩니다. 그러면,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지 못하셨다면 어떤 문제가 생기게 됩니까?
둘째로, 우리의 전파하는 것이나 믿음도 헛되게 됩니다(14,15a) 우리가 받은 복음이 무엇이였습니까?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죄를 위해 죽으시고 장사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다면 이는 모든 복음의 기초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모든게 무너진다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가 힘썼던 1:1은 다 양들을 속인 것이 됩니다. 팀과 요회는 조직적이고도 인격적으로 거짓말장이를 길러내는 모임이 됩니다. 선교사님들은 어떠합니까? 국내에서 거짓말하기가 너무 재미있어서 해외나가서까지 거짓말하시는 분들이 됩니다. 그러나, 거짓말쟁이가 정직한 사람을 키워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셋째로, 여전히 죄가운데 있게 됩니다.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하시며, 십자가에서 우리죄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은 말씀을 그래로 믿고, 죄사함을 체험하고 눈물을 흘리며 감사했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죄사함의 은혜는 부활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넷째로, 우리가 가장 불쌍한 자가 됩니다. 많은 성도들이 부활의 소망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 받고,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런 분들을 존경하고, 그 길을 가고자 거룩한 믿음의 싸움을 싸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활의 소망이 없다면, 거짓 소망에 속아 죽도록 고생만하고 사는 불쌍한 사람들이 됩니다. 그러나, 부활의 소망이 있기에 김바나바, 부활선교사님의 중국에서의 희생은 값진 것입니다.
이상의 문제들을 볼 때 죽은 자의 부활을 부인하면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인하게 되고,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으면, 우리의 복음과 믿음이 무너져 버립니다.
(2) 만유의 회복(20-28)
(20)“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열매가 되셨도다” “그러나 이제” 이 얼마나 답답했던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는 말입니까? 그동안 말도 안되는 가정으로 인해서 답답했던 우리들에게 사도바울은 그러나 이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열매가 되셨습니다. 아담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게 되었습니다.
첫 열매는 후에 나타날 많은 수확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와같이 그리스도의 부활은 앞으로 모든 신자들이 부활한다는 표증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우리도 언젠가는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과 같이 부활하리라는 소망을 줍니다.
우리가 부활할때는 바로 그리스도 강림하실때입니다. 그때에는 예수님이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세상의 모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치십니다.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 둘 것이며, 왕에 왕, 주의 주가 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원수 사망권세를 완전히 멸망시키 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삶은 날마다 새로워지고 생명력을 얻고 자라게 됩니다. 날마다 예수님안에서 의미와 생명이 풍성케 됩니다.
28절을 보십시요. “만물을 저에게 복종하게 하신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이에게 복종케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
예수님은 만물을 발아래 복종시킨 후 자신도 하나님 아버지께 복종하심으로 만유의 질서를 회복하십니다. 이때까지 세상은 사단의 권세로 인해 창조질서가 무너지고 그 가운데 인생들과 자연만물은 신음하고 탄식했습니다. 동물의 왕국을 보면 무서운 사자가 살이 통통한 사슴을 잡아 먹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빠드득 빠드득” 그리고, 앙상한 뼈만 남김니다. 자연은 썩고 쇠하며 멸종되어 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다시오심으로 우리가 부활할때는 살벌한 양육강식과 무너진 창조 질서가 회복이 됩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만유의 회복의 될 때 곧 무너진 창조의 질서가 바로 잡히는 그때를 비전중에 보았습니다. 그리고, 회복될 에덴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사11:6-9)그때에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7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8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9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그때는 피조물의 탄식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때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계시록에서 그 나라는 애통함이나 눈물이나 죽음이나 아픈 것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괴질도 전쟁도 테러도 핵으로 인한 공포도 없습니다.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이 흐르고, 강좌우에는 생명나무가 있어 풍성한 실과를 맺는 나라, 공평과 공의가 실현되는 나라, 목자되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나라. 이 얼마나 소망이 되는 곳입니까!
바로 이때가 그리스도께서 무너진 창조의 질서를 바로 잡으시고, 만유를 회복하실 때입니다. 인간이나 자연이나 왕성한 생명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에덴에 있었던 생명나무를 먹은 것과 같이 기쁨가운데서 영생을 누릴 것입니다. 하나님과 온전한 교제와 만남으로 우리안에도 하나님 나라가 온전히 이루어지며, 우리 신자들은 새하늘과 새 땅에서 사랑하는 주님과 함께 영원토록 왕노릇하게 될 것입니다.
(3) 깨어 의를 행하라(29-34)
그럼, 부활신앙을 가진 자는 어떠한 삶을 살게 됩니까?
첫째, 적극적으로 희생과 위험을 무릎쓰고 하나님을 섬깁니다. 사도바울은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의 본이 되었습니다. 30,31절을 보십시요. “또 어찌하여 우리가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리요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사도바울은 부활의 소망이 있었기 때문에 질병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 궁핍과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날마다 죽은 생활을 했습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그는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였습니다. 안일하게 살고자 하는 소원과 세상성공을 향한 야심을 버렸습니다. 생명을 내놓지 않고서는 복음을 증거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바울은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언제나 주와 복음을 위해 순교할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지금 이 시대는 어떠한 시대입니까? 음란하고 패역한 시대입니다.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하는 시대입니다. 저도 부활이 없다면 일생동안 먹고 마시며 주말마다 놀러다니면서 인생을 후회없이 즐길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신앙이 있는 사람의 삶은 달라야 합니다.
둘째, 부활을 믿는 자는 깨어 의를 행하게 됩니다. “(33,34)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우리 주위에는 악한 동무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부활을 믿지 않습니다. 이들에게는 어차피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므로 이 땅에 사는 동안 즐기고, 마시고 노는 것을 추구합니다. 그러면서 부활의 소망가운데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는 성도들을 비웃고 유혹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로서 영적으로 무지한 자들입니다. 사도바울은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속지말라고 하십니다. 이 세상이 다라고 생각하는 것에서 속지말라고 하십니다. 이는 우리에게 부활의 소망, 영생의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말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이땅에서 깨어 의를 행해야 합니다. 깨어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맺고, 하나님앞에서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죄를 피하고, 적극 의를 좇아 행해야 합니다. 적극 의되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저는 말씀을 준비하려고 보니, 학교에서 실험하는 것이 힘들어서 그런지 입술이 갈라져서 피가 났습니다. 저는 피곤이 누적되어서 입술이 갈라지는 구나 생각하였습니다. 저는 건강을 염려하고, 말씀을 준비할 수 있을지 의문이 되었습니다. 사도바울은 강도의 위협과 생명의 위협을 받았지만, 저는 단지 질병과 피곤의 위협앞에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부활신앙도 덧입을 수 없구나 주저 앉았습니다. 탄식하였습니다.
저는 말씀을 묵상하며, 만유의 회복을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은 질병도 죽음도 없는 곳입니다. 간염이 없는 곳, 피곤과 스트레스가 없는 곳입니다. 제가 꿈꾸는 곳입니다. 이 소망을 바라보니 피곤이 사라졌습니다. 내안에서 생명력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질병으로 연약한 이 몸도 강한 몸을 사시 살게 될 나라를 꿈꾸게 되었습니다. 부활의 소망이 있기에 피곤을 극복하고 깨어 의를 행할 수가 있습니다. 제가 연요절 말씀인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적극 하나님의 뜻과 의를 구하고, 부활을 증거하는 삶을 살겠습니다. 저에게 부활의 믿음과 만유의 회복에 대한 소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IV. 부활의 영광 (35-49) 심마태
바울은 지금까지 죽은 자의 부활이 반드시 있음을 증거했습니다. 그런데 조용히 졸고 있던 한 형제가 갑자기 손을 들고 하나님 말씀에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권한진 형제님이 이의를 제기하듯이 35절을 읽어주시겠습니다. 그의 질문은 아주 이성적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썩어 뼈만 남게 됩니다. 좀 더 지나면 흔적도 없이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어떻게 죽은 자가 부활의 몸을 덧입을 수 있습니까? 도저히 이해가 안됩니다. 또 대개 사람들은 자신의 몸에 대해 한두 가지 많게는 열 가지 이상 불만스런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몽당연필과 같은 짜리몽땅한 키, 절구통을 생각게 하는 불룩한 허리, 너무나 민주적이고 자유분방하게 생긴 얼굴 등으로 자학하고 운명주의에 시달립니다. 지난번 대구 지하철 참사때 많은 사람들이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심하게 불에탄채 죽었습니다. 그런데 부활한 후에도 여전히 지금과 별로 달라질 것이 없다면 부활하는 것이 무엇이 좋은가 헷갈리게 됩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이 문제를 씨앗의 비유를 통해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다시 살아나지 못합니다. 이것은 자연의 법칙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조금의 의심도 없이 당연한 진리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땅 속에 묻혀 죽은 씨가 어떻게 다시 사느냐고 의문을 제기하는 농부는 없습니다. 그냥 믿습니다. 씨를 뿌리면서 당연히 씨가 죽어서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힐 것을 기대합니다.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씨가 땅에 떨어져 죽고 새롭게 살아나듯이 우리가 이 땅에서 죽고 부활의 형체를 덧입게 됩니다. 당연한 진리입니다. 그런데 그 영광은 지금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즐거운 일입니까?
그러면 우리가 어떤 몸으로 부활하게 됩니까? 42-44절을 보십시오.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우리는 현재 노화과정에 있는 썩을 몸을 입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매님들은 식물나라 에센스나 SOD 크림 등을 바르면서 피부노화를 막으려고 애를 씁니다. 하루 3번 식후 3분 내에 3분 동안 부지런히 이를 닦고 1년에 1번 스케일링을 해 썩지 않게 하려고 해도 무정한 이는 하나 둘 썩어갑니다. 또 우리 몸은 욕됩니다. 감정과 욕정에 이끌려 음란하고 정욕적인 것을 추구하며 수치스럽고 욕된 인생을 살아갑니다. 우리 몸은 정말 약합니다. 조금만 무리해도 몸살로 끙끙 앓아야 합니다. 살아있는 동안 끊임없이 여러 가지 질병에 시달립니다. 우리의 마음도 약합니다. 정에 약하고, 정욕에 약합니다. 물질에 약하고 세상명예에 약합니다. 그러나 이런 육체가 어떤 모습으로 부활하게 됩니까? 썩을 것이 썩지 않을 것으로 다시 살고 욕된 것이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게 됩니다. 약한 것이 강한 것으로 다시 살고 육의 몸이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게 됩니다. 그때는 자매님들이 얼굴에 무슨 크림을 바르지 않더라도 얼굴이 달덩이처럼 빛나고, 은하수의 아름다운 별빛처럼 반짝반짝 빛날 것입니다. 부활은 실로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썩어 없어질 인생들에게 영광스러운 부활의 영광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V. 최후의 승리 (50-58)
바울은 이제 마지막 날에 있을 최후의 승리를 노래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혈과 육에 속한 것을 벗어버리고 변화되어야 합니다. 51,52절을 보십시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날은 그리스도께서 큰 권능과 영광으로 재림하시는 인류 최후의 날입니다. 그 때에 예수님의 재림을 알리는 천사장의 나팔 소리가 하늘로부터 온 천지에 울려 퍼집니다. "빰빠라밤빰빠~ 빰빰빰빠 빰빰빰 빰빰빰빰 빰빰빰~빠" 나팔소리에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신령한 몸으로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여 하늘로 올라가게 됩니다. 어떤 분은 눈물로 중보기도를 하다가, 어떤 분은 양과 1:1 하다가 양과 함께 하늘로 올라갈 것입니다. 어떤 분은 찬송을 부르며 센터 화장실 청소를 하다가 대걸레를 잡고 하늘로 올라갈 것입니다. 또 평신도 목자님들은 직장생활로 피곤한 몸을 부인하고 캠퍼스에서 피싱하다가 하늘로 올라갈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에 복음 믿기를 거부하고 세상 죄악을 즐기며 뺀질거리던 사람은 올라갈 수 없습니다. 아무리 높이뛰기를 잘해도, 아무리 돈이 많아 자가용 비행기를 가지고 있다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목자님들의 바지가랑이를 붙들고 통사정해도 소용없습니다. 그날에 신자들은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하시는 예수님의 칭찬과 위로를 받게 됩니다. 이로 인해 그동안 믿음으로 사느라 겪었던 모든 수고와 아픔이 눈 녹듯이 사라지고 남모르게 흘렸던 눈물이 환희로 바뀌게 됩니다. 그 날은 신자들에게는 최고의 날이요 가장 영광스러운 날입니다. 그러나 불신자들에게는 심판의 날입니다. 이 날은 반드시 옵니다. 이것이 신자들만이 간직한 비밀입니다.
바울은 이 영광스러운 비밀을 말한 후 그의 심령에 산 소망의 감격으로 벅차올랐습니다. 그리고 외쳤습니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54)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그날 썩을 우리 몸의 장막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죄로 죽을 이 몸이 죽지 아니함을 입게 됩니다. 이 얼마나 소망이 됩니까? 그리고 최후의 날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이사야서에 기록된 말씀이 응하게 됩니다.(사 25:8) 한사람으로 말미암아 들어온 사망권세는 인류위에 군림했습니다. 진시황제도 죽었고 마호메트 석가 공자도 죽었습니다. 그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에서 부활하셨습니다.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사망권세를 완전히 멸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 영광 중에 재림하실 것입니다. 이 사실을 확실히 알고 믿은 사도 바울은 사망 앞에서 큰소리를 쳤습니다. 55절을 보십시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이것은 한번 덤벼봐라 이겁니다. 이제 사망쯤은 우습다 이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승패는 이미 끝이 났습니다. 사망은 완전 사망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시는 날은 그야말로 사망의 사망 날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돌려드립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죽은 자의 부활과 부활의 영광과 최후의 승리에 대해 증거했습니다. 바울은 이제 결론적으로 부활신앙을 가지고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 권면하고 있습니다. 다같이 58절을 읽어 보시겠습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첫째, 부활믿음에 견고하게 서서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믿는 자들은 최후 승리하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결코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의 일'은 주 예수님께서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그 사명은 주님의 양을 먹이는 일이요(요 21:15), 가서 모든 족속을 제자삼아 세례를 주고 주님께서 분부하신 모든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입니다(마 28:20). 이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온 땅에 드러내고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런 주의 일을 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특히 오늘날처럼 치열한 생존경쟁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더욱 어렵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라'고 합니다. '힘쓰라'는 것은 주의 일을 감당하는 것이 우리 본성적으로는 안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의 일을 하기 위해 힘쓰지 않으면 아무리 환경이 좋아도 안일한 본성과 세상을 사랑하는 본성 때문에 주의 일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주의 일은 '힘을 써야' 할 수 있습니다. 또 바울은 '항상 힘쓰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상황이 좋을 때나 나쁠 때나, 학생일 때나 평신도일 때나, 한국에 있을 때나 외국에 나간 경우에나 변함없이 항상 힘쓰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또 '더욱 힘쓰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주의 일에 한번 힘을 쓰고 나면 할 일을 다 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신앙의 연륜이 더해갈수록 더욱 힘을 써야 합니다. 더욱 힘을 써서 주의 일을 더 많이 감당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을 쓰게 되면 이 세상에서 자기를 위한 삶이 희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라'고 하면 '그러면 나의 일은 어떻게 되는가'하고 반발심이 듭니다. 또 주의 일에 힘쓰고 나면 피해의식에 빠지기도 합니다. 우리 목자님들은 진심과 시간과 청춘과 꿈을 바쳐 양들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양들이 나의 수고를 몰라줄 때 힘든 생각이 듭니다. 당장 보이는 열매가 없을 때 나의 수고가 헛된 것으로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세상일은 헛되지만 주의 일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재림하신 주님께서 주의 일에 힘쓴 그 모든 것을 아시고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하고 칭찬하시며 영광의 면류관을 씌워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일은 남는 것이 없지만 주의 일은 반드시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죄로 죽어가는 자를 살리고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일만큼 아름답고 가치 있는 일은 없습니다. 주와 복음을 위하여 남몰래 흘린 눈물과 진심을 하나님께서는 다 기억하시고 하늘나라에서 큰 상급으로 보상해 주십니다. 우리를 위한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이 땅에 사는 동안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제가 주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는데 더욱 힘을 쓰야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 속에는 캠퍼스 생명 구원역사를 섬기면서 ‘아무리 노력해도 열매가 맺히지 않을 것이다’는 실패감이 있었습니다. 매년 새롭게 시작해보지만 번번이 빈 그물만 건졌습니다. 그래도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아무 열매가 맺히지 않으므로 그동안 얼마 드리지도 못했지만 주님께 드린 시간과 진심과 열정이 헛수고로 생각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주님은 저의 이 수고가 결코 헛되지 않다고 하십니다. 주와 복음을 위하여 남몰래 흘린 눈물과 진심을 하나님께서는 다 기억하시고 모두 갚아주신다고 하십니다. 제가 주님이 주실 이 상급과 면류관을 소망합니다. 이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므로 올해 캠퍼스 복음역사에 더욱 헌신하는 종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권한진 형제님 한 사람을 위해 자신이 죽고 썩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영광스러운 부활을 체험하고 열매를 풍성히 맺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죽은 후에는 반드시 영광스러운 부활이 있습니다. 이 부활은 우리 믿는 자들의 희망이요, 산 소망입니다. 또한 우리가 인생의 봄과 같은 젊은 시절에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주의 일을 하게 된 것은 참으로 큰 은혜요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최후의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믿음에 굳게 서서 주님께서 맡기신 홍대 캠퍼스 개척과 세계 선교 사명을 더욱 힘써 감당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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