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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마28장/ 말씀대로 살아나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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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3,332회 작성일 03-04-13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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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부활절 마태복음 특강                                               
말씀/마태복음 28:1-20
요절/마태복음 28:6

말씀대로 살아나셨느니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자연은 부활을 숨쉰다고 합니다. 죽은 것 같던 나무들에  새순이 돋고 잎이 자라고 꽃이 피었습니다. 죽음의 겨울 그림자가 피조물로부터 철수할 때 생명의 승리가 산과 숲을 축복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얼마 전에 대구 지하철 방화로 인한 참사와 최근에는 미국과 이라크 전쟁으로 인한 죽음의 비통함을 맛보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미국과 이라크 전쟁을 반대하였지만 결국 수천명의 사람들이 죽어갔습니다. 오늘날 세대 사람들은 죽음을 합리적이고 별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없는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텔레비전을 통해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수없이 보고 있습니다. 병원에 있는 영안실에 가보면 누구든지 죽음을 매우 가깝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죽음에 대한 실제적인 부담은 죽음 자체가 아니라 죽음이 현재 우리의 전 삶에 던지는 그림자인 것입니다. 이런 과정 속에서 우리는 나도 일할 수 없는 밤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가장 위대한 일을 위해서 할 수 있는 대로 열심을 다해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우쳐 줍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현재 생활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했던 제자들, 사도 바울, 그 외에 수많은 사람들은 엄청난 확신을 가지고 복음을 증거했으며 사자의 이빨도, 뜨거운 불도, 고난과 죽음도 그들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도시의 휘황찬란한 광고물, 조명들이 아침이 오고 날이 새자마자 사라지는 것처럼 세상의 반짝이는 모든 빛은 부활의 주님이 태양같이 그들의 앞에 서자마자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영광을 초개와 같이 버리고 영원한 나라를 소망하며 살았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기독교의 힘이요 비밀이요 자랑입니다. 부활은 우리의 기쁨이요 소망입니다. 이 시간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증거들을 찾아보고 증인으로서 해야 할 일들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빈 무덤
  안식일이 다하여 가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미명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왔습니다. 이때 땅이 흔들 흔들 거리더니 무덤을 막고 있던 돌이 벽에 부딪치는 소리가 났습니다. 쿵쿵, 쿵쿵, 데구르르... 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었습니다. 큰 지진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데 예수님의 부활이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이루어졌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돌로 막은 바위 무덤을 나오는데 아무 문제가 없지만 천사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돌을 굴려 낸 것은 무덤이 비어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함입니다. 여인들은 무덤이 입을 쩍 벌리고 있는 모습을 볼 때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무덤을 지키고 있던 로마 군인들은 대개 강심장을 가진 용감한 사람들인데 이 광경을 보고 무서워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의기양양하게 무덤 입구를 지키고 있던 그들이 이런 광경을 보고는 죽은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신 후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행10:40,41).” 고전15장에 보면 교회는 어떤 사람들이 부활하신 주를 만났는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 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고 맨 나중에 바울에게 보이셨습니다(고전15:5-8). 전에 어떤 사람에게도 일어난 적이 없고 후에 어떤 사람에게도 일어날 수 없었던 것이 이들에게 일어났습니다. 누구나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이 만남의 충격 아래서 반드시 거듭나게 되고 또 전에는 결코 가능할 수 없었던 새로운 실체를 볼 수 있는 새 기관을 반드시 받게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때 영적인 눈이 뜨여서 하나님과 그 영광스러운 나라를 보게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믿는 자들 속에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충만한 은혜를 부어 주십니다.
 
  여인들이 삼일 전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보았을 때 그 심정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참담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다하지 못했던 사랑을 표현하고, 마음의 위로도 받고자 시신에 향품을 바르기 위해서 새벽 일찍 무덤을 찾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무덤 문이 열려 있고 천사가 그 돌 위에 광채를 내면서 앉아 있었습니다. 여인들은 무서워 떨고 있었습니다. 이를 보고 천사들이 기쁜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5).” 죽음의 권세 아래 있는 인간은 두려움에 시달리기 쉽습니다. 젊은이들은 모험을 좋아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변화를 두려워합니다. 어떤 형제는 예수님을 믿고 변화될까봐서 성경 공부를 거부합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믿고 변화될까봐서 수양회에 가지 않습니다. 살아 있는 생명체는 성장하는데 성장은 변화를 의미합니다. 생명력은 생명의 억제와 파괴에 의해서만 성장할 수 있습니다. 창조성이 있는 사람은 변화를 만들어 냅니다. 천사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사건은 두려움이 아니라 기쁨을 주는 소식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예수님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습니다. 역사상 예수님 외에 어느 누구도 자신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할 것을 예언하고 그대로 된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세 번씩이나 자신의 부활을 예언하셨습니다(16:21-28, 17:22-23, 20:17-19). 그리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은 비어 있습니다. 천사는 “와서 보라!”고 여인들을 초청했습니다. 요20:6-7을 보면 예수님의 시신을 쌌던 세마포 천이 예수님이 바로 빠져나가신 것처럼 있던 자리에 그대로 있었습니다. 머리를 쌌던 수건은 머리 모양으로 개여서 예수님의 시신을 쌌던 세마포 천의 오른 편에 놓여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권세, 사단의 권세를 다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더 이상 무덤에 누워 계시지 않고 부활하사 우리에게 새 생명과 부활의 소망을 주셨습니다. 한 사람 아담의 죄로 인해서 모든 사람이 죽게 된 것 같이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모든 사람이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늘나라가 지상의 역사에 개입하게 됨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서 새 생명을 창조하는 것이 개인에서 공동체적으로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은 재앙이 아니라 구속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서 죽음이 정복되었습니다. 우리가 비록 이 세상에서 어떤 비극을 만난다 할지라도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부활은 실패한 사람들에게 재도전 하고자 하는 의욕을 불태우게 합니다. 또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의 권능은 도덕적이고 영적으로 죽어 있는 우리를 다시 소생시켜서 우리로 변화되고 성장할 수 있도록 합니다. 이기적이고 무정하고 무자비한 사람도 사랑과 온유가 충만한 사람으로 점진적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게으르고 성장이 더딘 사람도 점차적으로 변화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자신의 영적 성장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또 예수님의 부활하심은 우리에게 영원한 하나님 나라 소망을 갖게 해 줍니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1:3,4)."

  천사는 부활의 현장을 목격한 여자들에게 무슨 사명을 주었습니까? 7절을 보십시오.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재판을 받으실 때 그를 버리고 도망했습니다. 지금은 두려움에 사로 잡혀서 집 안에서 떨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대할 염치가 없었습니다. 정말로 주님께 도움이 필요할 때 그들이 배반하고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천사가 여인들에 전해준 말을 듣고 제자들은 회복과 용서의 가능성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버리고 떠났지만 갈릴리에서 예수님을 만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마가는 특별히 베드로를 언급하였다고 했는데 이는 베드로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그를 버리지 않았음을 알리기 위해서 특별히 언급한 것입니다(막16:7). 여인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무덤을 빨리 떠나 제자들에게 알게 하려고 달음질 할 새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을 만나주셨습니다. 그리고 “평안하뇨”라고 인사하셨습니다. 여자들이 예수님의 발을 붙잡고 경배하자 예수님은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자기를 버리고 부인한 그들을 용서하시며 새로운 교제의 차원으로 그들을 격상시키셨습니다. 그들은 제자에서 내 형제로 영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회복하기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처음 부르셨던 갈릴리에서 다시 만나자고 하십니다. 그들은 훈련이 필요한 사람들임에도 당장 훈련을 주기보다 그들 편에서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연약함을 아시기 때문에 이들에게 이렇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들은 갈릴리 해변 가를 거닐면서 예수님께서 자기들을 부르셨던 때를 기억했을 것입니다. 풍랑을 만났을 때 “고요하라 잠잠하라” 하시던 주님의 말씀과 그 능력을 기억했습니다.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시던 때를 생각했습니다. 갈릴리는 구석구석 주님과 그들이 함께 했던 사랑스럽고 의미로 가득 찬 장소였습니다. 그들이 삼년 뒤에 다시 이 곳에 와서 주님의 말씀들과 행하신 일들을 기억할 때 그 의미가 무엇인지 새록새록 깨달아졌습니다.

  여자들이 갈제 파수꾼 중 몇이 성에 들어가 모든 된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고했습니다(11). 이들이 전해주는 예수님의 부활 소식으로 인해서 예루살렘은 큰 소동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파수꾼들은 빌라도에게 가지 않고 대제사장들에게 갔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군병들에게 돈을 많이 주면서 거짓된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즉 예수님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자기들이 잘 때에 그를 도적질하여 갔다고 말한 것입니다. 만일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면 자신들이 권하여 그들로 근심되지 않게 하리라는 약속까지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군병들이 돈을 받고 가르친대로 하였습니다.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들의 거짓이 부활을 반증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예수님이 체포될 당시 이미 도망을 쳐버렸기 때문에 예수님의 시신을 훔치기 위해서 철통같은 방어망을 뚫고 봉인을 떼고 시신을 훔쳐갈 수 없었습니다. 만약 그들의 말대로 제자들이 훔쳐갔다면 그들을 체포하여 시신을 증거물로 제시하면 깨끗하게 끝나는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들의 거짓은 만 천하에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거짓된 사람들에게 자신을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가라지와 곡식이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이 온 천하만국에 전파되기까지 심판을 유보하셨습니다. 그러나 재림 때에는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계1:7).”   

둘째, 예수님의 지상 명령(16-20)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님이 명하시던 산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뵈옵고 경배하였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었습니다. 제자 중에 몇 명이 의심을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기를 주저했습니다. 사실 제자들 입장에서 보면 부활이란 것은 들어보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믿음이 어린 제자들은 자기들의 눈으로 살아계신 예수님을 보면서도 믿겨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게 의심하는 제자 중 하나인 도마에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요20:27-29).” 예수님은 제자들이 보고 믿기보다 증인들의 말을 듣고 믿기를 원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자신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하나님께로부터 받으셨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권세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는 시작입니다. 세상의 새로운 창조는 완성되기 까지 간격이 있습니다. 그 기간 동안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19,20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핵심은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가고, 세례를 주고,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것입니다. 제자를 삼는 것은 예수님을 주요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그의 가르침을 따라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이 많이 있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일생 배우면서 제자를 삼는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 삼기 위해서 가라고 하십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나가야 합니다. 캠퍼스로 나아가고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세계 구석 구석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나아갈 때 주님께서는 세상 끝날 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 있겠다고 하십니다. 항상은 모든 날이란 뜻입니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셨다가 안하셨다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이 주님을 믿고 복음을 전하며 제자의 길을 가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교제를 지속함으로 지치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캠퍼스 지성인들에게 증거하는 가운데 구원의 역사를 줄기차게 이루어 가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기도하는 가운데 살아계신 주님을 체험합니다. 기도의 응답을 받을 때 주님께서 살아계심을 체험하게 됩니다. 부활은 세계 완성의 시작이며 이 땅에서 하나님의 최후 승리의 시작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를 통하여 지금도 힘차게 완성되어 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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