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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강 구약 흐름 제 1 강 (창세기-출애굽기) -이바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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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3,167회 작성일 03-04-11 0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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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흐름 제 1 강 (창세기-출애굽기)

  구약의 흐름, 그 중에서 일차적으로 창세기에서부터 출애굽기까지의 흐름을 몇 가지 주제로 공부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은 그 중 첫째 주제입니다.

                      선, 악의 싸움
      (하나님은 인간 세상에 선을 세우고 악을 제거하려 하셨습니다.)

I. 하나님은 모든 것을 선하게 창조하셨습니다(창세기 1-3장).
(1) 선(善)의 세계 :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의 본래의 모습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의 가장 특징적인 모습은 창조주의 모습입니다. 창세기 1:1절은 말씀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나님은 각 날짜에 따라 각기 다른 것들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각 창조하신 것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여섯째 날 모든 것을 창조하신 후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는 말은 본래대로 하면 “보라, 정말 좋다” 하는 말입니다. (ךꔠꗱ בוֹט הꘈꕙꕵ) ‘좋다’는 말은 ‘선하다’는 말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들은 선했습니다. 사람도 선했습니다.  본래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에는 악이 없었습니다. 악이 존재하지도 않았고 들어오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셨고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너무 좋구나.” 땅도 하늘도, 그 안의 모든 것들도 다 선하고 좋았습니다. 보이는 것도, 보이지 않는 것도 선하고 좋았습니다. 겉모습이 아름다운 것도 선하고 겉모습이 아름답지 못하게 보이는 것도 선하고 좋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세계의 모든 것에 대한 가치입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팔리고 노예생활하고 감옥생활하고 하는 그 모든 것들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들은 내게 악을 행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선을 이루사(창 50:20).” 사도 바울은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결국 사람에게는 악이 있을 수 있었지만 하나님 안에서는 모든 것이 선하다는 말입니다.
선이란? בוֹט
윤리적 의미가 있고 미학적 의미가 있습니다. 윤리적 의미의 선이란 윤리적으로 옳고 그름을 의미합니다. 열왕기 상에서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그 때 솔로몬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이 말에서의 ‘선’도 창세기 1장에서의 בוֹט와 같은 말입니다. 그리고 솔로몬이 말하는  선은 윤리적 선으로 옳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선’은 윤리적 선이요, 더 나아가 종교적 선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고 ‘선하다고 말씀하셨을 때는 그 모든 것이 윤리적으로 선하다는 뜻이요, 종교적으로는 모든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았다는 그런 말이 됩니다.
창세기 24장에 보면 아브라함의 종이 이삭의 아내를 구하기 위해 하란으로 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란으로 간 종은 이삭을 위해 가장 적합한 아내를 위해 기도했는데, 리브가가 나왔습니다. 성경은 리브가에 대해서 “그 소녀는 보기에 심히 아리땁고” 라고 말했는데, 여기서 ‘아리땁고’라는 말도 역시 בוֹט입니다. 이렇게 볼 때  בוֹט라는 말은 미학적으로도 쓰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좋았다(선하다) 하는 말은 미학적으로 아름답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세계는 윤리적으로 선하고 미학적으로 아름다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악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
  하나님께서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셨습니다. 에덴(ןꕋ꘠)은 아단(ןꕈꘝ)이라는 동사에서 유래한 말이요, 아단은 ‘부드럽다’, ‘즐겁다’는 뜻입니다. 결국 에덴이란 ‘즐거움’이란 뜻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동산을 다스리며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킨다는 것은? 간직하고 유지하는 것입니다. 또한 보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에덴동산을 보호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간직해 나가도록 하셨습니다. 에덴동산을 보호한다는 것은 에덴동산을 공격하는 세력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데, 무엇이 에덴을 공격한단 말입니까? 
  그 에덴동산에는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각종 열매들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생명나무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대해서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이 말씀에는 ‘악’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창세기 1장은 물론 에덴동산에는 ‘악’이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선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악’을 말씀하셨을까요? 사람이 알지 못하는 ‘악’이 존재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악의 세력을 보셨음이 분명합니다. 그 ‘악’이 어디로부터 나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악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성경은 그 ‘악’이 타락한 천사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악’은 무엇보다도 여호와 하나님을 대적하고자 하는 세력이요, 하나님의 자리를 찬탈하려는 세력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여 그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고자 하는 세력입니다. 그리고 그 악은 뒤에도 나오지만,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같이 되라고 부추기는 그런 세력입니다. 동시에 그 악은 하나님의 선한 세계를 파괴하고자 하는 세력이요, 에덴의 기쁨과 행복을 파괴하려는 세력입니다. 그 악은 즐거움의 동산(하나님의 창조 세계, 인간세계)으로 침투하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베드로전서 5:8). 사람은 그것을 알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알고 계셨음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선한 세계를 악으로부터 지키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일에 사람도 함께 참여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에덴을 보호하고 가꾸어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사람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는다는 것은 선악에 대한 지식을 알게 되는 것뿐만 아니라, 악에 대한 호기심을 갖게 되는 것이요, 또한 악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악을 알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현실 속에서 악에 대한 사람의 호기심은 어떠합니까? 그리고 사람이 악을 알게 되고 체험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악을 알게 되면 악으로 빠져들고 결국 악에게 사로잡힙니다.) 사람이 악을 알게 된다는 것은 경험이 풍부해진다는 것을 넘어서서 죽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악과 싸워야 했습니다. 악에 대한 호기심을 갖지 않아야 했습니다. 악을 알고자, 악을 체험하고자 하지 않아야 했습니다. 도리어 악을 악으로 알고 악과 싸워야 했습니다. 그리함으로써 선을 지켜야만 했습니다.
 (선은 무엇이며 악은 무엇인가? 선은 유일신 여호와를 인정하는 것. 악은 다신교. 선은 유일신 여호와와 사람과의 관계가 유지되고 지켜지는 것. 악은 그 관계가 깨어지는 것. 뱀은 사람에게 하나님 같이 될 수 있다고 함으로써 그 관계를 깨고자 했습니다. 유일신 여호와에게서 나온 것이 선이요, 다신교에서 나온 것이 악입니다.) 
(3) 악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악을 받아들이고 말았습니다. 뱀이 찾아와 여자에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하나님은 결코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하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뱀은 마치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것처럼 말했습니다. 여자도 그것이 아님은 잘 알았습니다. 그런데도 여자는 뱀의 말을 들었습니다. 뱀이 여자에게 다시 말했습니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이 말을 듣고 여자는 선악과를 따먹었고 자기 남편에게도 주었습니다. 아담도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사람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도리어 뱀의 말을 듣고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은 결국 악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 악이 무엇입니까? 첫째, 하나님이 마치 모든 것을 먹지 말라고 하신 것 같은 인상. 하나님은 사람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으라고 말씀하셨는데, 뱀은 마치 하나님이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한 것처럼 말했습니다. 악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사람에게 아무 것도 하지 말라고 하는 것처럼 말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도 금하시고 저것도 금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본래 모습과는 정반대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임의로 따먹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임의대로 결정하고 행할 수 있는 자유를 주셨고, 에덴동산의 풍요함을 주셨습니다. 다만 한 가지만 금하셨습니다. 그런데 뱀은 마치 하나님이 모든 것을 금하신 것처럼 말했습니다.
 그런데 만일 뱀의 말대로 하나님이 모든 것을 금하셨다면 새로운 문제가 대두됩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무엇을 먹고삽니까? 사람은 어떻게 생명을 유지할 수 있습니까? 사람은 자기가 알아서 할 수밖에 없습니다. 혹은 뱀이 약속할 수 있습니다. ‘내가 너를 먹여 살릴게.’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새로운 악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 없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의 말을 듣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 같이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뱀은 여자에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하나님 같이 되어…….”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 같이 될 수 있다는 말을 했고, 결국 사람은 그렇게 되기를 원했습니다. 여기서 볼 때 사람이 하나님 같이 되고자 하는 것이 곧 악임을 알 수 있습니다.
셋째, 선악을 알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를 다시 말하면 악을 알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본래 선하게 지어졌고 사람 자체, 인생 자체가 선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선함 속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인식하든 못하든 그들은 선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선악을 알게 된다는 것은 곧 악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악을 알게 된다고 할 때, 그들이 알게 될 대상으로의 ‘악’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으로서의 악을 말합니다. 사람은 그런 악을 알고자 했고, 그것이 또 하나의 악이었습니다.
 어쨌든 사람은 악과 싸우고 선을 지켰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악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렇게 악을 받아들였을 때 제일 먼저 달라진 것이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서 서로를 감추게 된 것이요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숨었다는 것입니다. 8절.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악을 알게 된 그들은 빛이신 하나님을 피하여 어두움 속으로 피해 들어갔습니다. 또한 그들은 흙으로 돌아가게 되었으며 생명나무에 접근할 수 없었습니다.

II. 하나님은 악과 싸우셨습니다(창세기 4-11장).
(1) 죄를 다스리라
  가인에게 향해 죄가 문에 엎드려 있습니다. 죄가 가인을 삼키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죄의 소원이 가인을 향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가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가인은 죄를 다스리고 지배해야 했습니다. 그것이 가인으로 향한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가인이 지배해야 할 죄는 첫째, 자기 의입니다. 자기는 죄 없다고 하는 마음입니다. 가인은 하나님께서 자기 제사를 받지 않으셨을 때 자기에게는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는 옳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때문에 그는 분해했고 안색이 변했습니다. 이런 그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도 분을 내셨습니다. 둘째, 형제에 대한 미움이었습니다. 형제를 죽이고 싶어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가인은 자기 죄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아벨 때문에 자기가 하나님께 영접되지 않았다고 생각하여 아벨에 대한 미움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아벨을 죽이고 싶어 했습니다. 이것이 그의 악이었습니다.
  가인은 그런 악을 지배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죄를 지배하지 못했습니다. 도리어 죄에게 지배당했습니다. 죄에게 지배당한 가인은 동생 아벨을 들에서 돌로 쳐 죽였습니다. 그렇다면 가인은 왜 죄를 다스리지 못했습니까?
  그 후 사람은 죄에 대해서 더욱 어떻게 되었습니까?
(2) 하나님은 죄와 지속적으로 싸우셨습니다.
a. 6:3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יꖐוּר ןוֹדꖷ אꗟ) 여기서 ‘아돈’은
ןיꕑ에서 나온 말로, 그 뜻은 ‘다투다’, ‘심판하다’의 뜻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 동안 사람과 계속 다투어 오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 사람의 죄 때문에. 하나님은 계속해서 사람의 죄 때문에 사람과 다투어 오셨습니다. 사람들에게 제발 죄 짓지 말라고 말씀하시고 싸우셨습니다. 그런데도 사람이 계속 죄를 짓고 사람의 계획하는 것이 어려서부터 항상 악하니 하나님도 지치셨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사람과 다투지 않고자 하십니다.
  사람이 육체가 되었고 더 이상 영적이 될 가망성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b. 죄를 쓸어버리심 : 그래도 가만 계시지 않고 사람을 쓸어버리고자 하셨고, 그렇게 하셨습니다. 실제로 대홍수로 사람을 쓸어버리셨습니다. 그것은 죄와 악을 쓸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사람의 죄와 줄기차게 싸우신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쓸어버리신 죄악은? 육체가 된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육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악은 어려서부터 사람 속에 있었습니다. 그런 악을 배운 것이기도 하지만, 본래 사람 속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악과 싸우셨고 죄를 없애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청소하셨습니다. 청소하시되 물청소를 하신 것입니다.
c. 사람들을 흩으심 :  11장에서 사람들이 바벨탑을 쌓을 때 하나님은 그것도 헐어버리셨는데, 이 또한 하나님께서 사람의 죄와 싸우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11장에서 하나님이 싸운 사람의 악은 무엇입니까? 자기 이름을 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흩어지지 않고자 하는 것입니다. 다 함께 모여서 자기 이름을 내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죄악된 것이었고, 하나님은 그것을 흩으셨습니다.
(3)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의 죄를 치고 없애고자 하셨습니다. :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약속하셨지만, 아브라함 때에 그 땅을 얻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애굽에서 종살이 하다가 사대 만에 가나안 땅으로 돌아옵니다. 그 이유는? “이는 아모리 사람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러라.” 하나님께서는 아모리 사람의 죄가 가득할 때까지 기다리셨다가, 그 때에 이스라엘을 그 땅으로 이끌어 들여 그 땅을 치고자 하셨습니다. 이는 역사적으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의 죄를 치고자 하신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는 것은 단순히 땅을 차지하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으니, 곧 그 땅의 죄를 치고 그 땅에 하나님의 의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4) 하나님은 동성애를 벌하셨습니다. :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시대에 소돔 고모라를 진멸하셨습니다. 소돔 고모라는 겉으로는 애굽과 같고 여호와의 동산 같았으나 내적으로는 심히 부패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동성애가 만연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소돔 고모라를 완전히 파괴하셨는데, 이는 그 땅의 동성애를 파괴하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소돔 고모라의 동성애와 싸우신 것이었습니다.

III. 개인의 삶 속에서 자신을 나타내신 여호와 하나님(창세기 12-50장)
  앞에서 우리는 선과 악의 싸움으로서의 흐름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악과 싸우시고 선을 세우고자 하셨습니다. 여기서 선에 대해서 한 가지 분명한 정의를 해야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성경 전체적으로 볼 때 선에 대해서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성경에 기록된 신이신 여호와를 유일한 신으로 믿고 의지하고 따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여러 신들을 믿는다거나 혹은 사람을 신으로 여기는 것이 성경적인 악입니다. (이런 정의에 대해서 사람들은 기독교는 너무 배타적이다 하며 비난합니다. 그러면서 기독교가 다른 종교에 대해서 좀더 포용적이 되기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볼 때 기독교가 만일 다른 종교를 인정한다면, 곧 다른 신의 존재를 인정한다면 그것은 기독교가 기독교이기를 포기하는 것이나 같습니다. 기독교가 진정한 기독교인 것은 그 배타성에 있습니다.)
  그런데 노아 시대 이후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여호와를 유일한 하나님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여러 신들을 믿었습니다. 자연을 신으로 여겼습니다. 하늘의 태양을 신으로 여기고, 바다의 폭풍과 사나운 파도를 신으로 여겼습니다. 사람들은 성경적으로 여전히 악을 행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볼 때 다른 신들은 다 형상이 있고 모양이 있는데, 여호와는 아무런 형상이 없었기 때문에 믿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이 여호와를 비겨 어떤 형상을 만들 수는 없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여호와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으로서 말씀으로서 자기를 나타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부르시고 그들의 삶 속에서 자기를 나타내셨습니다. 야곱의 아들인 요셉의 삶 속에서도 자기를 나타내셨습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은 자신이 누구인가 말씀하실 때,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의 삶 속에서 자신을 어떻게 또 무엇이라고 나타내셨습니까?
(1) 세계의 주인이심을 나타내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먼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저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을 것이니라.” 이 말씀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이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삭에게 말씀하셨습니다. 26:4 “네 자손을 인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이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야곱에게도 동일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28:14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이 말씀은 여호와 하나님이 세계의 하나님이요, 세계의 주인이심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일단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라함,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서 땅의 모든 족속을 복 주고자 하셨습니다. 이는 여호와 하나님이 온 세계의 하나님이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당시에 신들은 주로 민족 신들로서 신의 영역은 민족에 국한되어 있었습니다. 민족에 국한되어 있거나 어떤 특정한 장소에 국한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단군신화에 나오는 단군도 우리 민족에 국한된 것입니다. 이런 민족 신들은 땅의 모든 족속을 축복하는 일에는 무관심했습니다. 다만 자기 민족만을 생각하는 신이요, 다른 민족에 대해서는 적대감을 가진 신이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땅의 모든 족속을 축복하고자 하십니다. 이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온 땅, 온 하늘의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2) 여호와 하나님은 축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땅의 모든 족속을 축복하고자 하십니다. 그리고 그 축복은 막연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을 축복하시고 이삭을 축복하시며 야곱을 축복하시는 데 나타난 그런 축복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여호와 하나님은 먼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축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축복하고.” 여호와 하나님은 이삭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이 땅에 유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그리고 실제로 축복하셨습니다. 그 해에 이삭이 농사를 지었는데 백배나 거두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신들은 저주하는 신들입니다. 사람들은 신들의 저주가 두려워서 신들에게 제물을 바쳐서 신들의 노여움과 저주를 달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고대에는 심지어 아들까지 신들에게 바치기도 했습니다. 신들을 달래기 위해서 고행을 하기도 했습니다. 고대 사람들은 그런 두려움 속에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는 저주의 신이 아니라, 축복의 신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땅의 모든 족속을 축복하고자 하시고, 구체적으로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부르시고 축복하셨습니다. 그들의 생애에 구체적으로 개입하사 축복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의 기근을 피하여 애굽으로 갔을 때 그는 아내 사라를 애굽 왕에게 빼앗길 뻔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도와주셨고, 아브라함은 아내를 찾아 왔을 뿐 아니라 많은 재산까지 덤으로 얻었습니다. 그런 축복은 이삭의 생애에도, 야곱의 생애에도 함께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생애, 그리고 요셉의 생애를 통해서 여호와는 축복하시는 신이심을 나타내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축복하심으로써 요셉은 노예에서 애굽의 총리가 되기도 했습니다.
(3) 여호와 하나님은 각 사람이 한계에 처했을 때 자신의 전능하심, 사랑, 돌보심, 축복을 나타내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롯을 구출하기 위해 318명의 군사를 이끌고 가서 여러 왕들의 연합군을 쳤습니다. 그것은 인간적으로 승산이 없는 싸움이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으로 이기게 하셨습니다. 창 14:20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후사를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나이 99세, 사라의 나이 89세가 되기까지 후사가 없었습니다. 그 때는 두 사람이 아기를 낳는다는 것은 인간적, 생리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포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 아브라함에게 말했습니다.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또 여호와 하나님은 자신에 대해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능력이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 사라의 나이 90세 때에 아들을 낳게 하심으로 나타났습니다. 두 사람은 아들 이삭의 탄생을 통해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구체적으로 체험하고 알게 되었습니다.
 이삭은 물 얻기가 정말 어려운 지방에서 파는 곳마다 우물이 나오는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 돌보심을 구체적으로 체험했습니다. 야곱은 속이는 자였습니다. 그런 그가 외삼촌 라반에게 속임을 당했고 자칫하면 고향으로 돌아오지도 못하고 하란에 붙잡혀 있을 판이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를 이렇게 저렇게 도와주셔서 그는 한 재산 모아서는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야곱은 말년에 자기 인생과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조부 아브라함과 이삭의 섬기던 하나님, 나의 남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사자께서 이 아이에게 복을 주시…….”
  이런 구체적인 체험을 통해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여호와 하나님을 유일신으로, 유일한 구원자요 목자로 믿었습니다. 주변의 다른 신들을 좇지 않았습니다.
(4) 여호와 하나님은 말씀으로 자기를 나타내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인도하시고 도우실 때 말씀으로 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너는 복이 될지라.”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그 외에도 여호와 하나님은 결정적인 때마다 나타나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삭이 기근을 피하여 가나안을 떠나 애급으로 가고자 했을 때에도 말씀을 주셨습니다. 야곱이 형을 피해 고향을 떠나 하란으로 갈 때에도 여호와 하나님은 그에게 나타나 말씀을 주셨습니다. 28:13-15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그리고 그 말씀대로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고, 그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들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이 유일신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5) 함께 하시는 하나님,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
  요셉의 생애는 한 마디로 하면 하나님께서 꿈을 주시고 함께 하신 생애요, 악이 선으로 바꿔진 생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요셉의 소년 시절에 한 위대한 꿈을 주셨습니다(창 37:1-11). 그러나 요셉은 그 꿈 때문에 감당해내기 힘든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한 형제인 형들에게 노예로 팔려 애굽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 여호와 하나님은 요셉과 함께 하셔서 그로 하여금 노예생활에 의해 내면이나 삶이 파괴되지 않게 하셨습니다. 노예로서도 구김살 없이 살게 하셨고, 밝게 힘차게, 지혜롭게 살게 하심으로써 있는 그 자리에서 형통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형통도 잠시 그는 모함을 받아 강간 미수죄라는 파렴치한 죄목을 쓰고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 상황은 노예가 된 상황보다 더 나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도 여호와 하나님은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함께 하셔서 그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셨습니다. 그는 비참해지지 않았으며 사람들에 대해서 복수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사람을 섬기는 마음을 가졌고, 감옥이라는 어두운 곳에서도 빛을 발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써 요셉은 어느 곳에 있든지 내적으로, 외적으로 승리자가 되었습니다.
 그런 그는 자기가 믿는 여호와 하나님이야말로 진정한 신이심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섬겼던 애굽에는 수많은 신들이 있었지만, 그는 그 어떤 신에게도 미혹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의 아버지가 믿었던 여호와 하나님을 굳게 믿고 의지했습니다. 그 하나님은 그에게 견딜 수 없는 상황을 주시긴 했지만, 동시에 그 모든 상황에서 이기게 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여호와 하나님은 요셉의 인생에서 모든 악을 선으로 바꾸신 선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자기를 팔았던 형들을 만나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셨나니.”
요셉의 생애를 보면, 사람들은 요셉에게 악을 행했습니다. 그것도 제일 가까운 사람들이 그에게 악을 행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더욱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그 모든 악을 결국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이것이 창세기의 한 결론입니다. 창세기의 하나님은 선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은 선하고 아름다웠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악을 행하였고, 선이 파괴되는 것 같았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지으신 세계를 망치는 것 같았습니다. 사람들이 행하는 악이 사람을 파괴하고 자연을 파괴했습니다. (이런 현상은 지금도 여전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악을 선으로 바꾸십니다.
  그리고 그 선은 무엇입니까? 만민의 생명을 죽음과 파멸에서 구원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악으로 인해 죽음과 파멸이 인간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사람을 죽음과 파멸에서 구원하고자 하십니다. 구원을 위해 사람을 부르시고 세우시고 말씀을 주시고 함께 하시며 인도하십니다. 그 부르시고 세우신 사람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유일신임을 나타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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