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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03마7강(5:17-48)/ 너희도 온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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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3,858회 작성일 03-04-06 08:59

본문

2003년 마태복음 제 7 강                                                       
말씀 / 마태복음 5:17-48
요절 / 마태복음 5:48

너희도 온전하라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하고자 하는 방향을 잡고 성장해야겠습니다. 오늘 말씀의 핵심은 온전한 사랑에서 자라가기입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맹세하지 말라,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종합해 보면 온전한 사랑을 하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양육을 받고 성장하여 자신의 은사대로 헌신하는 곳입니다. 교회의 사명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따뜻한 사랑과 돌봄을 받는 곳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젊은이들이 이곳에 와서 자신들이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여짐을 느끼고, 영적 필요들을 채움 받고, 하나님께서 주신 열정과 꿈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비전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우리는 성경대로 움직이는 공동체여야 합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따를 때 우리의 삶은 변화됩니다. 17절을 보십시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고 전도 여행을 하고 밀 이삭을 비벼 먹는 제자들을 변호하고 금식하기보다 죄인들과 먹기를 좋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행동은 자유롭고 파격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유대 그리스도인 공동체 안에 있는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은 폐하여졌다고 생각했습니다. 반대로 그리스도인은 구약의 율법을 온전히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위의 두 주장을 물리치시고 세 번째 해결책을 제시했습니다. 율법과 선지자 즉 구약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구약은 오실 예수님에 대한 그림자입니다. 율법과 선지자가 가르치는 모든 면을 그리스도의 사건으로 다시 조명하고 해석하고 삶에 적용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율법에 담긴 원래의 참된 의도가 무엇인지를 분별할 수 있게 됩니다. 대낮이 새벽을 완성하듯이, 어른이 유년기를, 완전한 그림이 거친 스케치를 완성하듯이 예수님은 구약에 예언된 것들을 완전하게 성취하십니다.
  예수님은 성경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18,19절을 보십시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나님의 말씀은 단어 하나 하나까지도 영감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당장에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해서 버리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공부할 때 취사선택하고 싶고 약화시키고 싶은데 그대로 전해야 합니다. 자신이 체험한 것, 마음에서 깨달은 것, 마음에 부딪치는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구약 율법은 의식법과 시민법, 도덕법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의식법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이후에는 더 이상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우리가 이 의식법을 모두 따를 필요가 없지만 그것들 이면에 있는 원리들 즉 거룩하신 하나님을 예배하고 사랑하는 것은 여전히 적용됩니다. 시민법은 이스라엘의 일상생활에 적용되었습니다(신24:10-11). 현대 사회와 문화가 그 시대 및 환경과는 아주 현격하게 다르기 때문에 우리가 이 지침을 모두 엄밀하게 지킬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명령들 이면에 있는 원리들은 시간을 초월하며 우리의 행동을 지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원리들을 모범으로써 나타내보이셨습니다. 십계명과 같은 도덕법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명령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엄격한 순종을 요구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이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놀랐을 것입니다. 제자들 중 그 누구도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의를 따라갈 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제자들은 천국에 들어가기에 충분할 만큼 의로워지기 위해 자신들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나은데, 그 이유는 그 의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종류의 의는 율법과 선지자를 충족시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지는 구절들을 통해서 그런 종류의 의를 설명하실 것입니다. 제자들은 자기 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습니다(롬10:4). 우리의 의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으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행하신 것으로 말미암아야 합니다. 자기중심적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적이어야 합니다. 사람들의 인정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함에 근거해야 합니다. 율법 준수를 넘어 율법을 주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를 행해야 합니까?

둘째, 살리는 말을 해야 합니다.
  21,22절을 보십시오.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바리새인들은 문자적으로 어떤 사람을 살해하지 않았으므로 자기들은 의롭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직접 예수님을 죽이지는 않겠지만 머지 않아 예수님의 살해를 모의할 정도로 예수님에 대해서 분노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자들은 살인을 할 만큼 노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 그들은 이미 마음에 살인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살인은 끔찍한 범죄입니다. 그러나 분노 역시 커다란 죄인 것은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범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형제를 대하여 라가가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라가란 ‘바보’ 혹은 ‘천치’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지옥의 위험에 처하게 하는 것은 말 자체가 아닙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이 바보’라고 부르는 것 이상으로 나쁜 욕지거리를 많이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태도입니다. 어떤 사람을 바보라고 부름으로써 당신은 그 사람을 무익하고, 빵점이고, 아무 것도 아니며, 보잘 것 없다고 간주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거기에 어떤 문제가 있을까요? 당신이 판단하기에 그 무익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형상을 받은 그를 바보라고 한다면 하나님 역시 바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한 조사에 의하면 성인의 84%가 한번 이상 다른 사람을 죽이는 상상을 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말로서 사람을 죽이기보다 살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태리 어느 작은 고을에 유명한 오페라 가수가 되는 것이 꿈인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혼자 열심히 노래를 연습하다가 드디어 오페라 가수 오디션을 치룰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이 청년은 정말 최선을 다해 노래했지만, 아쉽게도 오디션에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오디션에 낙방한 이 청년은 심하게 좌절했습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다시는 노래를 부르지 않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이때 그를 지켜보던 어머니가 다가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아들아, 나는 네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목소리를 지녔다는 것을 안단다. 이 엄마는 네가 부르는 노래 소리를 들을 때마다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단다. 엄마는 네가 꼭 유명한 오페라 가수가 되리라 믿는다.” 이 청년은 어머니의 격려에 힘입어 다시 노래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는 세계적인 오페라 가수가 되었는데 그의 이름이 바로 엔리코 카루소입니다.
  우리가 형제에게 분노하고 욕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를 드리기 전에 형제와 화목해야 합니다. 자존심을 버리고 먼저 화목해야 합니다. 또한 즉각적으로 사과해야 합니다. 우리는 형제를 용서할 뿐 아니라 섬기기로 결정하고 친절한 행동을 해야 합니다. 화목이란 아무 문제없이 지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영접하고 사랑하고 귀히 여기는 것을 말합니다(25-26). 여러분이 어떤 형제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으면 오늘 해가 지기 전에 사과하고 화목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거룩해야합니다. 27,28절을 보십시오.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남자에게는 어떤 여자를 쳐다보고 음욕을 품는 것은 사실상 간음을 한 것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음란한 눈길도 죄가 된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음욕이란 부정한 관계에 대한 욕망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간음은 음욕을 품은 마음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설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생각보다는 우리의 마음에 품고, 자리 잡고 있는 근본적인 태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먼저 정욕적인 상상을 하고 이것을 마음 속으로 품고 용납하고 은밀히 즐기면 마침내 파괴적인 행동이 밖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간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고의적인 반항입니다.  그것은 결혼을 파괴합니다. 간음은 결혼 언약을 파기하고 부부의 신뢰와 사랑의 관계를 파괴합니다. 간음은 항상 범죄자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힙니다. 간음은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인 자기 몸을 더럽히는 행위요 하나님이 세우신 순리를 어기는 것이기 때문에 큰 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남편과 아내로서 신실한 본을 보이고 세상에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나타낼 수 있어야 합니다.
 
  요즈음은 음란 메일, 광고, 영화, 텔레비전, 드라마의 악영향, 노래, 도색 잡지 등 음란한 상상을 자극하는 것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앞서서 차단해야 합니다. 그런 것들에 자신을 노출시키게 되면 음란한 마음이 자라게 됩니다. 29,30절을 보십시오. “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예수님은 음란한 영상을 보고 그것이 나로 실족케 하면 눈깔을 파버리라고 하십니다. 그만큼 단호한 자세로 죄를 끊으라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눈으로 음란한 영상을 보고 음욕을 품게 되면 눈알을 파버리라는 것은 과장법으로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처럼 귀중한 것이므로 어떤 것도 우리가 이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방해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문자 그대로 적용한다면 우리는 모두 눈을 파고 손을 잘라야 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뇌도 잘라버려야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성병이 30%가 증가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혼율이 OECD 국가 중에 2위인데 지금과 같은 추세로 나간다면 2010년이 되면 1위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음란한 생각이 들어올 때 이것을 붙잡지 말고 말씀을 암송하거나 십자가를 묵상함으로 생각의 방향을 돌려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의 순결을 지키고자 힘써야 합니다. 우리는 유혹에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즉시 회개하고 예수님의 보혈로 죄씻음을 받고 거룩한 일에 자신을 드리기를 힘써야 합니다. 또한 인터넷을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쓰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유혹으로부터 우리와 양들과 자녀들을 지켜 주시도록 힘써 기도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놀이 문화를 잘 계발해야 합니다. 운동이나 야유회 등 함께 하는 것이 좋습니다.

 예수님은 이혼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는 황혼 이혼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혼율이 10년 전에 비해서 3배나 늘어났습니다. 여성들이 일을 하여 경제적인 힘이 생기자 이런 현상이 더욱 많아지고 있습니다. 또한 결혼의 가치관이 없이 너무나 쉽게 결혼을 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로 인해서 깨어진 가정, 소망이 없는 가정, 육체적 정신적 학대와 위험이 있는 가정, 부부가 상대방에게 부정직하고 파괴적인 가정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내를 버리지 말라고 하신 것은 아내의 존엄성과 가치를 보존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가정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오래 참아야 합니다. 배우자의 부정을 발견한 사람은 용서하고 화해하고 배우자와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결혼 관계를 떠날 핑계보다는 회복시켜야 할 이유를 찾아야 합니다. 이혼은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하는 큰 죄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마19:4-6).”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믿는 자들은 꿈에서조차 이혼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가정을 안전과 돌봄과 존경의 장소가 되도록 힘써 가꾸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녀들에게는 안정된 가정을 제공하고 인생의 폭우와 긴장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제공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맹세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맹세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은 맹세 자체가 아니라 성실함이 주된 문제라는 것을 지적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맹세는 결코 개인적인 성실함을 나타내는 것이 아닙니다. 거짓말쟁이의 맹세는 무익한 약속입니다. 그러나 성실한 사람이 ‘예’나 ‘아니오’라고 말할 때 그 사람의 단순한 말은 신뢰를 받을 수 있습니다. 성실함을 신자의 규범으로 삼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분을 좇는 자들에게 진실을 말해야 한다고 단순하게 강조하셨습니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37).” 이것은 옳다 하면 옳다는 의미이고 아니라고 말하면 아니라는 의미가 되게 하라는 뜻입니다. 결과적으로 사람들은 그들이 하는 말은 어떤 것이라도 신뢰하고 믿을 수 있습니다. 자기들의 말에 맹세를 덧붙이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말이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난다는 말은 맹세로써 말을 뒷받침하려는 악한 사람의 필요를 드러내 보여줍니다. 사람들은 거짓말하는 것이 가능할 때에만 맹세를 사용합니다. 그러나 신자들은 자기들이 하는 모든 말에 대해 하나님께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실하게 말을 하고 약속한 바를 철저히 지켜야합니다. 약속을 지키는 것은 신뢰를 쌓고 헌신적인 인간 관계를 가능하게 해 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예’라고 말하고 그것을 진심으로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하고 ‘아니오’라고 말하고 그 말에 충실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누군가 여러분에게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을 하라고 요청한다면 당신의 일정상 어려움에 대해서 20분 동안이나 설명하고픈 마음을 누르고 그저 “미안합니다만 안되겠는데요”라고 말하는 것이 멋진 것입니다.

넷째, 신자는 원수까지도 사랑해야합니다. 율법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고 하였습니다. 이 율법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 개인적인 복수가 더 확대되지 않도록 막아주는 지침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재판관들에게 범죄를 다루는 하나의 지침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처벌은 범죄에 맞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 율법은 앙갚음을 제한했고 법정이 엄격하지도 않고 지나치게 관대하지도 않게 형벌을 집행하게끔 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악이 방해받지 않고 활동하는데도 신자들이 수동적으로 앉아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좇는 자들이 기꺼이 개인의 권리를 주장하는 대신에 십자가의 길을 좇는 이타적인 태도를 갖기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보복의 악순환을 끊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개인적인 갈등과 공격을 다루는 실제적이고 합리적이며 거룩한 방법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40-42)”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자기 소유에 집착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또 로마에 대항하여 싸우려고 시도할 필요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단지 패배로 끝나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보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일해야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일하는 것이 로마 군인의 짐을 지고 오리를 더 가야 하는 것이라면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개인의 권리와 소유에 집착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들은 필요가 생기면 아낌없이 나누어 줄 수 있고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소유를 무턱대고 거저 주지 말아야 합니다(잠17:18,잠22:26). 그렇지만 제자는 자신들의 필요보다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자신들의 권리보다 다른 사람들의 권리를 기꺼이 앞세우라고 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은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이웃을 동일한 국적이나 믿음을 가진 사람으로 해석했습니다. 네 원수를 미워하라고 명백히 말하는 성경 구절은 전혀 없음에도 바리새인들은 시편의 일부를 재해석했습니다(시139:19-22). 그런데 예수님은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44-47).”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롬 12:19-2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48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온전하게 된다는 말은 모든 면에서 부족함이 없이 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성숙하고 장성한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온전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대하시듯이 우리도 다른 사람들, 우리의 원수까지도 포함하여 선을 행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우리는 ‘사랑의 온전’에서 자라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완전하게 남을 사랑하기를 추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곧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셨습니다(롬5:10a).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죄인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우리는 지옥 불에 떨어져서 영원한 고통을 당해야 마땅한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원수같은 죄인들을 사랑하시고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그를 믿는 자에게 죄사함을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이 사랑을 체험한 사람은 그리스도를 닮고자 노력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모든 제자들에게 자신을 닮아 탁월해질 것을, 평범함을 뛰어넘을 것을, 그리고 모든 영역에서 성숙할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그렇게 해보려고 시도하라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보내 주셔서 그리스도를 닮도록 축복해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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