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마태복음 전체 흐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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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전체 흐름 (이바울 목자님)
마태복음 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마태는 예수님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함으로써 그의 복음서를 시작합니다. 그러면 그 말의 뜻이 무엇입니까? 창세기 22:17,18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여기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꘥ꙣꕿ)(단수로 쓰임)에 대해서 두 가지를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자손은 대적의 문을 얻습니다. 그 자손은 대적에 대해서 정복자요 지배자가 됩니다. 다음으로, 그 자손으로 인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자손을 통하여 천하 만민을 복 주고 또 복 주십니다. 그리고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을 왕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셨을 때 동방에서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말했습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십니까?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28:1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에서 ‘권세’는 (ἐξουσία) 지배력, 권력, 힘을 말합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것에 대해서 권세를 가지셨다는 말입니다. 곧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것에 대해서 왕이시고 지배력을 가지셨다는 말입니다. 또 예수님은 마태복음 16:1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이 말씀은 4복음서 중 유일하게 마태복음에만 있는 말씀인데, 이 말씀에서 볼 때 예수님은 음부의 권세를 의식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이 복음서를 기록한 마태도 음부의 권세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고백하는 교회에 대해서는 음부의 권세가 결코 이기지 못한다는 것인데, 이는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음부의 권세를 이기심을 뜻하는 것입니다.
마태는 마태복음 1장 1절에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함으로써, 예수님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요 그리스도라는 전제 아래서 그의 복음서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마태복음을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대적들(음부의 권세)과의 싸움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공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런 입장에서 마태복음 흐름을 잡아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 흐름을 잡아보고자 할 때 나는 세 가지 방향을 가집니다. 먼저는 마태복음에서 마태가 기록하는 예수님은 어떤 예수님인가 하는 것이요, 다음으로는 그런 예수님이 싸우신 대적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요, 끝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런 대적들을 어떻게 정복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방향으로 공부를 하되, 본문을 따라가면서 공부하고자 합니다.
I. 죄, 슬픔과 싸우시고 큰 기쁨을 주십니다(1-4장).
(1) 죄와 싸우시고 죄에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십니다(1장).
마태복음 1:18절에 의하면 예수님은 요셉의 약혼녀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되셨지만, 요셉은 성령의 역사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마리아가 부정을 행했다고 생각했고, 그는 의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불의를 행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일 수 없어서 가만히 끊고자 했습니다. 그는 아주 괴로웠을 것입니다.
그가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꿈에 나타나 말했습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이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십니다. 그리고 이 말씀에서 보면 자기 백성이 죄에 갇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죄는 단순한 도덕적 개념의 문제가 아니라 실제적 존재요 세력으로써 자기 백성을 붙잡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백성이 스스로의 힘으로 그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사람의 힘으로 죄의 힘을 깨부술 수 없다는 것을 본문은 암시하고 있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죄와 싸우시고 그리고 죄를 깨부수시고 그리고 죄로부터 자기 백성을 구원하십니다. 이 예수님은 죄보다 그 힘이 강하신 분이십니다(마태 12:29).
예수님이 그렇게 강한 힘을 가지고 자기 백성을 죄로부터 구원하실 수 있으심은 그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2) 세상의 잔혹함, 슬픔과 싸우십니다(2장). - 유대인의 왕과 헤롯의 대조
마태복음 2장에서 우리는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나신 예수님과 헤롯의 극명한 대조를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의 왕 예수님은 멀리 동방에서 온 이방인들로부터도 존경과 경배를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또 유대인의 왕 예수님은 다스리는 자요, 백성의 목자이십니다. 목자는 양을 사랑하고 양의 생명을 풍성케 합니다. 그리고 유대인의 왕 예수님은 동방의 박사들에게 큰 기쁨을 주었습니다. 2:10 “저희가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ἐχάρησαν χαρὰν μεγάλην σφόδρα, 아주 큰 기쁨으로 기뻐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런 기쁨으로 아기 예수님께 엎드려 경배했습니다.
그러나 헤롯은 어린 아기들을 무참하게 죽였으며, 그로 인해 젊은 어머니들이 슬퍼하며 통곡했습니다.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받기를 거절하였도다.” 결국 헤롯은 죽음과 슬픔과 비통함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유대인의 왕 예수님께서 왜 잔혹하고 비통한 세상, 슬픔으로 인해 위로받을 길 없는 사람들 가운데로 오신 것입니까? 생명을 위해서, 아주 큰 기쁨을 위해서,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마태복음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μακάριοs……., 행복한, 축복받은) 예수님은 슬프고 비통한 사람들에게 축복과 행복을 주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잔혹함, 비통함, 슬픔을 정복하려고 오셨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사람들 중에 있는 비통함, 슬픔을 정복하시고 아주 큰 기쁨을 주십니다. (우리에게 이 기쁨이 있습니까?)
(3) 알곡과 쭉정이를 구별하십니다(3장).
세례 요한의 증거에 의하면, 예수님은 천국을 가지고 오십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동시에 예수님은 임박한 진노이십니다. 예수님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는데,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십니다(12). 세례 요한은 사람들을 향해 외쳤습니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예수님은 사람들 중에서 알곡과 쭉정이를 구별하십니다. 알곡은 천국으로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십니다. 이로 볼 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는 예수님은 사람들 중에서 쭉정이와 싸우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은 죄 아래 있고 그래서 본질적으로는 쭉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쭉정이에 알곡을 채우고자 하십니다. 이를 위해서 겸손하게 세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셨고 결국에는 자기 목숨까지 바치셨습니다. 3:15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이 예수님에 대해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3:17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4) 어두움, 병, 약함과 싸우십니다(4장).
1-11절에서 시험하는 자 마귀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가지고 예수님을 시험(유혹)하여 예수님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의 위치에서 떨어지게 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귀의 시험(유혹)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리치셨고,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분명히 하셨고, 하나님 아버지께 대한 믿음과 경배를 분명히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으로 가셨는데, 예수님에 대해서 마태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쳤도다.” 이 말씀에 의하면 예수님은 큰 빛으로 흑암을 정복하시고 또한 사망을 정복하십니다. 사망과 흑암의 세계에 빛을 가지고 오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셨습니다. 예수님은 땅의 나라 가운데로 오셔서 그 땅에 있는 모든 병, 모든 약한 것들(무기력)과 싸우셨고, 그것들을 정복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병들고 약한 자들을 건강하고 강하게 하셨습니다. (이 땅에서 사람이 얼마나 잘 병들고 또 약해지는가? 그리고 그런 병과 약함은 어디서 온 것인가? 죄에서 왔다고 말할 수 있을까?)
II. 예수님의 좁은 길, 세상의 넓은 길과의 싸움(5-7장)
(1)예수님이 주시고자 하는 축복(행복), 사람들이 세상에서 얻고자 하는 축복(행복)(5:1-12)
예수님에 의하면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는데, 천국이 저희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복은 천국입니다. 천국은? 마지막 날 얻는 그 천국만입니까? 그렇기도 하지만, 사람 마음 가운데 이루어지는 천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 마음에 천국을 주시고자 하고 그것이 진정한 복이요 행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땅에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을 수 없습니다. 심령이 부요한 자, 자기 부족함을 느끼지 않는 사람, 마음이 흡족한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은 천국을 얻지 못합니다.
예수님에 의하면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는데,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 위로를 받습니까? 다스리는 자요, 목자이신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는 애통하는 자가 행복할 수는 없습니다. 애통하는 자에게 위로가 없기 때문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그냥 애통할 뿐입니다. 앞에서 아기가 죽어서 애통하는 어머니들에게 무엇이 위로가 되겠습니까? 그래서 땅에서 사람들은 애통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애통할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땅에서는 애통함이 없는 것이 복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은 예수님의 위로를 받지 못합니다. 예수님에 의하면 비록 애통할지라도 예수님의 위로를 받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예수님에 의하면 온유한 자가 복이 있는데,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얻기 때문입니다. 땅에서는 사나운 사람, 터프가이가 복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땅을 얻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제 온유한 자가 땅을 얻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온유한 자는 도리어 땅을 잃지 않을까요?
예수님에 의하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는데, 저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르면 의로 가득 채워집니다. 그리고 의로 가득 채워지는 것이 복이요 행복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땅에서는 사람이 불의할지라도 세상 권력이나 돈으로 배부른 것이 복이요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불의한 방법으로라도 권력을 얻고 돈을 얻고자 합니다. 불의한 방법으로라도 권력을 얻고 돈을 얻는 것이 과연 행복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에 의하면 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이 있는데,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은 사람으로부터, 하나님께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습니다. 긍휼히 여김을 받게 되면 어려울 때 도움을 받게 됩니다. 정말 도움이 필요할 때 도움을 받습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당시 유대는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그 사회에서는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것이 없었습니다. 사람을 긍휼히 여기기보다는 사람에게 잔혹하게 할지라도 사람에게서 빼앗고자 했습니다. 2장에서 헤롯 왕은 자기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두 살 아래의 남자 아이들을 죽였습니다. 그에게는 긍휼히 여김이 없었습니다. 헤롯은 아이들을 죽여서라도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이 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긍휼의 마음이 조금도 없이 무참히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자기들을 지키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이익이 개입되면 타인에 대한 긍휼은 뒤로 밀어버립니다. 긍휼보다 자기를 지키는 것이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에 의하면 마음이 청결한 자가 복이 있는데,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땅에 사는 사람들은 마음의 청결은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더럽거나 말거나 눈에 보이는 것을 얻으면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음이 비록 더러울지라도 돈만 많으면 행복하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나 자신도 마음의 청결보다는 돈을 더 사모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에 의하면 화평케 하는 자가 복이 있는데,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기 때문입니다. 땅에서 사람들은 남과의 관계가 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자기가 잘 될 수 있다면, 자기 자존심을 지킬 수 있다면, 자기가 높임을 받을 수 있다면 그것이 곧 복이요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를 버리고서라도 화목을 도모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의하면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사람이 복이 있는데, 천국이 저희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욕먹고 핍박 받고 악한 말을 듣는 것은 저주로 여겨지며 말할 수 없는 불행으로 여겨집니다. 사람들은 땅에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욕먹지 않기를 바랍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칭찬의 말을 듣고자 하고 칭찬의 말을 듣는 사람이 복 받았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예수님에 의하면 욕먹는 사람이 천국을 얻기 때문에 복 받았다고 합니다.
이상을 보면,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의 행복 론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땅에서의 일반적인 행복 론과 싸우시고, 정복하고자 하십니다. 땅에서의 일반적인 축복론, 행복론이 사람을 불행하게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돈이 행복이라고 하지만, 도리어 돈 때문에 불행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권력이 복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권력 때문에 사람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2) 제자는 세상적인 복, 행복과 싸우고 세상을 살릴 사람들입니다(5:13-20)
예수님은 세상 속에서의 제자들의 위치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어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라고 말씀하실 때, 세상이 부패하고 죽어간다는 것을 전제로 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그 부패하고 죽어가는 세상과 싸워서 세상을 살리고 건강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세상을 살리고 건강하게 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절대로 맛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맛이란 5:3-12에서 말씀되어진 그것이요, 뒤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것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말씀하셨을 때, 세상이 어두움에 싸여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세상의 어두움과 싸워서 그 어두움을 정복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어두움과 싸우고 그것을 정복하려면 빛을 소유해야 하는데, 빛은 5:3-12에서 말씀되어진 것이요, 뒤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것들입니다. 그들의 의가 바리새인보다 나아야 합니다(5:20).
(3) 마음의 죄와 싸우십니다(5:21-37).
기존의 율법에 의하면 사람이 행위로 살인하지 않으면 되었고, 행위로 간음하지 않으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살인에 대해서, 간음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예수님은 형제에게 성 내는 것, 형제를 향해 미련한 놈이라고 욕하는 것이 곧 살인죄와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형제에게 성도 내지 말아야 하고 미련한 놈이라고 욕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 마음에 형제에 대한 악한 마음이 없어야 합니다. 형제를 조금이라도 무시하지 말아야 하며, 형제를 해칠 마음이라고는 하나도 없어야 합니다. 마음에서부터 형제를 존중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간음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예수님은 마음의 간음도 간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마음의 죄를 행위적인 죄와 똑 같이 여기십니다. 이 예수님은 결국 사람의 마음의 죄와 싸우십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그 마음에서부터 죄로부터 깨끗하기를 원하십니다. 사람이 마음에서부터 죄를 짓지 않고 깨끗한 것이 곧 행복이 아닙니까?
(4) 미움과 싸우십니다(5:38-48).
구약은 나를 해치는 자에 대해서는 갚으라고 말씀했습니다(38).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치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구약은 원수를 미워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결국 예수님은 제자들 속에 일어날 수 있는 미움과 싸우십니다. 예수님은 사람들 사이의 미움을 정복하고 사랑을 창조하고자 하십니다. 저주의 말과 싸우시고 축복의 기도를 창조하고자 하십니다.
왜 그렇게 하십니까? 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5) 외식(위선), 사람의 상을 받고자 하는 것과 싸우십니다(6:1-18).
예수님은 사람들의 외식(위선)의 문제를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왜 위선의 탈을 씁니까? 사람들로부터 인정과 칭찬을 받기 위해서 입니다. 사람들의 상을 받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땅에서, 사람들 사이에서 살면서 다른 사람을 의식하고 사람들이 주는 상을 받는데 정신이 팔려 있습니다. 사람들이 주는 상을 받으려고 사람들에게 자기를 드러냅니다. 구제를 하고서는 사람들이 알도록 선전을 합니다. 기도할 때도 사람들 앞에서 기도합니다. 심지어 금식을 할 때도 내가 금식합니다 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슬픈 표정을 만들어냅니다.
이런 위선의 문제는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에게 아주 심했습니다. 그들은 속은 더럽고 악하면서, 겉으로만 경건한 척, 선한 척 했습니다(마태 23장). 그들은 진실하지 못했습니다. (사람 앞에서 살고 사람의 상을 얻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의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이 문제인 줄도 모릅니다.) 사람이 사람의 상을 받으면 하나님의 상을 받지 못합니다(6:1).
예수님은 이런 위선과 싸우시고, 사람들을 하나님 앞에 서게 하시고,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상을 바라게 하십니다. 6:4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6:18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니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그리고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말씀하실 때 “네 아버지” 라고 말씀하시고, 그 아버지는 은밀한 중에 너를 보시며 네 은밀한 선한 행위에 대해서 상을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왜 이렇게 제자들로 하여금 사람을 의식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식하도록 힘써 가르치십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제자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사람들(제자들)이 하나님 아버지의 상을 바라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사람들 가운데로 오셔서 바로 이것을 가르치고자 하신 것이 아닙니까? 예수님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 앞으로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 기도하고 구하기를 원하십니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하나님을 내 아버지로 알기를 가장 원하십니다. 6:9-15절에서의 주기도문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부를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라고 부르도록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위선을 싫어하십니다. 겉과 속이 다른 것을 싫어하십니다. (우리가 얼마나 겉과 속이 다르기 쉬운가?) 그리고 예수님은 사람들의 위선과 싸우십니다.
(6) 물질주의, 염려와 싸우십니다(6:19-34).
6:1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6:24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사람이 재물을 섬기든지 하나님을 섬기든지 둘 중 하나밖에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땅에서 사람들은 재물을 섬깁니다. 재물이 구원자로, 행복의 첫째 조건으로 되어 있습니다. 재물을 신으로 여깁니다. 예수님은 그런 재물 지상주의와 싸우십니다. 예수님은 사람들로 하여금 재물을 하나님을 위해서 쓰도록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재물을 하늘에 쌓아두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재물을 쓸 때 염려가 생깁니다.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제자들은 먹고 마시는 것, 입을 것을 염려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6:26 “공중의 새를 보라…….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6: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예수님은 하늘 아버지께 대한 믿음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시고, 그들 속에 있는 염려와 싸우십니다.
*우리는 본문의 예수님에게서 세상 왕들과는 다른 왕의 모습을 봅니다. 세상 왕들은 자기 국민들에게 돈을 많이 벌라고 말합니다. 좋은 왕이란 자기 국민들에게 돈을 벌 수 있는 길을 많이 제시하고 제공하는 왕입니다. 땅에서 좋은 왕이란 자기 국민에게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공급해주는 왕입니다. 그리고 왕은 자기가 그런 모든 것을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리고 그런 왕이 국민에게 인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기 국민들에게 땅에다 재물을 모으기보다 도리어 잘 쓰라고 하십니다. 또 예수님은 자기 국민들로 하여금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에서 하늘 아버지를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늘 아버지가 자기 국민들을 먹이고 입히신다고 가르치십니다. 왕 예수님은 돈 문제(경제 문제), 먹고 마시는 문제를 자기가 직접 해결하고자 하지 않으십니다. 왕 예수님이 직접 돈이나 먹고 마시는 문제와 싸우지 않으십니다. 도리어 자기 국민들 마음 가운데 있는 불신, 하나님께 대한 불신과 싸우시고 그들 속에 있는 염려와 싸우십니다. 그리고 하늘 아버지에 대한 믿음을 가르치고 심으십니다. 먼저 하나님을 찾도록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7) 사람은 먼저 자기가 좋은 나무가 되기 위해서 싸워야 합니다(7:1-5, 15-20).
7:5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7:17,18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사람이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먼저 그 자신이 좋은 나무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이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먼저 자기와 싸워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도우려 하기 전에 먼저 자기 들보부터 뽑아내야 합니다.
(8) 하나님을 아버지로 대접해야 합니다(7:6-12).
하나님을 아버지로 대접해야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아들로 대접하실 것입니다(12). 그런데 하나님을 아버지로 대접하는 길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고 아버지께 구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께 열심히 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아버지는 주십니다. 7: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9) 세상 넓은 문과의 싸움(7:13-1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예수님은 자신의 가르침이 좁은 문, 좁은 길임을 잘 아셨습니다. 그 가르침을 따르는 자가 적다는 것을 잘 아셨습니다. 한편 세상 많은 사람들은 넓은 문, 넓은 길로 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가르침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가는 그 문, 그 길과의 싸움임을 아셨습니다. 그 싸움 역시 힘든 싸움임도 잘 아셨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자신의 가르침이 곧 생명의 길이요, 세상의 넓은 문은 멸망의 문이라는 것입니다.
(10) 비, 창수, 바람과의 싸움(7:15-29)
7:24-26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않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예수님은 인생살이에서 비, 창수, 바람이 있다는 것을 잘 아셨습니다. 인생을 산다는 것은 그런 것과의 치열한 싸움입니다. 그 싸움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행치는 않는 사람은 비, 창수, 바람의 때에 무너지되, 그 무너짐이 심하게 됩니다. 우리가 외부로부터 불어 닥치는 이런 시련과의 한판 싸움에서 어떻게 살아남으며 승리할 것입니까?
III. 예수님은 권세자로서 인간의 병, 죄, 고통과 싸우십니다(8-9장).
(1) 예수님은 말씀의 권세자로서 인간의 병, 연약함, 고통과 싸우십니다(8장).
*예수님은 말씀으로 문둥병을 깨끗케 하셨습니다(1-4).
*예수님은 말씀만으로 중풍병을 고치셨습니다(5-13). 백부장의 말에 의하면, 중풍병이 예수님의 수하에 있어서 예수님이 한 말씀만 하시면 중풍병은 물러갑니다. 8:8,9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습니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로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14-17). 우리 연약한 것을 담당하시고 병을 친히 짊어지십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바람과 바다를 잠잠케 하셨습니다(18-27).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
*예수님은 말씀으로 사나운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28-34).
(백부장의 말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말씀의 권세를 가지신 것은 예수님께 지위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중풍병도 예수님의 수하에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한 마디만 하시면 중풍병은 떠나갑니다. 그렇다면 귀신도, 바람과 바다도 모두 예수님의 수하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말씀의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 영적 지위를 가지신 예수님이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는 병, 연약함, 귀신들과 싸우시고 그것들을 정복하십니다. 그리하여 인간을 고통으로부터 구원하십니다.)
(2) 예수님은 사죄의 권세자로서 죄와 싸우십니다(9장).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죄 사함을 선포하셨습니다(1-8). 어떤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죄 사함의 권세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3).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그리고서 예수님은 그 중풍병자를 일어나 걷게 하심으로써 죄를 용서하는 권세가 있음을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불러 건강하게 하십니다(9-13). 구체적으로 예수님은 세리 마태에게 “나를 따르라” 말씀하셨고, 마태는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은 마태의 집에서 많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셨는데, 그 모습을 보고서 바리새인들이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비난하는 말을 했습니다(11). 예수님께서 들으시고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필요하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그리고 예수님께는 죄인을 고쳐 건강하게 하실 능력이 있습니다. 이 예수님은 죄인에 대해서 긍휼의 마음을 가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여자에게서 죄의식을 없애주셨습니다(18-22). 혈루증 여자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댐으로써 병이 나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여자는 부정한 손으로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기 때문에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여자는 율법에 따른 정죄의식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자에게 “딸아 안심하라” 말씀하심으로써 여자에게서 정죄의식을 없애주셨습니다.
(3) 예수님은 믿음을 축복하시고 믿음없음과 싸우십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8:10.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그리고 그 믿음대로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8:13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메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셨습니다(2). 9:2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은 혈루증 여자의 믿음을 축복하셨습니다(9:22). 9:22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예수님은 소경의 믿음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9:28,29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그가 대답했습니다. “주님, 그러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믿음대로 되라.”
*반면 예수님은 믿지 않음, 믿음 적음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싸우십니다. 8:11,12 그들이 왜 바깥 어두움에 쫓겨납니까? 예수님께 대해서 백부장이 가졌던 그런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8:26 예수님은 제자들의 믿음없음을 책망하셨습니다.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Τί δειλοί ἐστε, ὀλιγόπιστοι)
IV. 제자들이 세상에 나가서 싸워야 할 싸움(10장)
(1)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1-15).
이 일을 제자들의 힘으로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능력을 주셨습니다. 10:1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모든 병’, ‘모든 약한 것’ 이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제자들은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서 모든 병, 모든 약한 것에 도전하고 싸우고 정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권능이 주어졌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명령하셨습니다.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한 가지를 더 말씀하셨습니다.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제자들은 평화의 사자들입니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평화를 선물해야 합니다. 그런 그들은 사람들 속에 있는 두려움, 불안, 또는 불화와 싸우고 정복하는 사람들입니다.
(2) 미움과 싸워야 합니다(16-23).
제자들은 좋은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10: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이리는 양을 잡아 먹으려 할 것입니다.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10:22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그렇게 되면 제자들도 사람들을 미워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애매하게 고난과 핍박을 받고 미움을 받는데 제자들 마음에 미움이 안 생긴다면 그것이 이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그들은 사람들의 죄, 미움에 오염되지 않아야 합니다. 순결해야 합니다. 사랑에 있어서, 온유함에 있어서 순결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려면 그들은 그들 속으로 파고드는 미움과 싸워야 합니다.
(3)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과 싸워야 합니다(24-42).
사람들이 제자들을 핍박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25). 그러므로 그런 일을 당하여서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의 생명, 모든 것이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29-31). 그리고서 사람에 대한 두려움과 싸우고 정복해야 합니다. 사람 앞에서 예수님을 시인해야 합니다. 양이 이리 가운데로 들어가면 두려움이 생기는 것이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 두려움과 싸우고 정복해야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이름을 전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마태는 예수님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함으로써 그의 복음서를 시작합니다. 그러면 그 말의 뜻이 무엇입니까? 창세기 22:17,18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여기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꘥ꙣꕿ)(단수로 쓰임)에 대해서 두 가지를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자손은 대적의 문을 얻습니다. 그 자손은 대적에 대해서 정복자요 지배자가 됩니다. 다음으로, 그 자손으로 인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자손을 통하여 천하 만민을 복 주고 또 복 주십니다. 그리고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을 왕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셨을 때 동방에서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말했습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십니까?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28:1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에서 ‘권세’는 (ἐξουσία) 지배력, 권력, 힘을 말합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것에 대해서 권세를 가지셨다는 말입니다. 곧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것에 대해서 왕이시고 지배력을 가지셨다는 말입니다. 또 예수님은 마태복음 16:1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이 말씀은 4복음서 중 유일하게 마태복음에만 있는 말씀인데, 이 말씀에서 볼 때 예수님은 음부의 권세를 의식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이 복음서를 기록한 마태도 음부의 권세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고백하는 교회에 대해서는 음부의 권세가 결코 이기지 못한다는 것인데, 이는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음부의 권세를 이기심을 뜻하는 것입니다.
마태는 마태복음 1장 1절에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함으로써, 예수님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요 그리스도라는 전제 아래서 그의 복음서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마태복음을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대적들(음부의 권세)과의 싸움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공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런 입장에서 마태복음 흐름을 잡아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 흐름을 잡아보고자 할 때 나는 세 가지 방향을 가집니다. 먼저는 마태복음에서 마태가 기록하는 예수님은 어떤 예수님인가 하는 것이요, 다음으로는 그런 예수님이 싸우신 대적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요, 끝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런 대적들을 어떻게 정복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방향으로 공부를 하되, 본문을 따라가면서 공부하고자 합니다.
I. 죄, 슬픔과 싸우시고 큰 기쁨을 주십니다(1-4장).
(1) 죄와 싸우시고 죄에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십니다(1장).
마태복음 1:18절에 의하면 예수님은 요셉의 약혼녀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되셨지만, 요셉은 성령의 역사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마리아가 부정을 행했다고 생각했고, 그는 의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불의를 행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일 수 없어서 가만히 끊고자 했습니다. 그는 아주 괴로웠을 것입니다.
그가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꿈에 나타나 말했습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이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십니다. 그리고 이 말씀에서 보면 자기 백성이 죄에 갇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죄는 단순한 도덕적 개념의 문제가 아니라 실제적 존재요 세력으로써 자기 백성을 붙잡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백성이 스스로의 힘으로 그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사람의 힘으로 죄의 힘을 깨부술 수 없다는 것을 본문은 암시하고 있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죄와 싸우시고 그리고 죄를 깨부수시고 그리고 죄로부터 자기 백성을 구원하십니다. 이 예수님은 죄보다 그 힘이 강하신 분이십니다(마태 12:29).
예수님이 그렇게 강한 힘을 가지고 자기 백성을 죄로부터 구원하실 수 있으심은 그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2) 세상의 잔혹함, 슬픔과 싸우십니다(2장). - 유대인의 왕과 헤롯의 대조
마태복음 2장에서 우리는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나신 예수님과 헤롯의 극명한 대조를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의 왕 예수님은 멀리 동방에서 온 이방인들로부터도 존경과 경배를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또 유대인의 왕 예수님은 다스리는 자요, 백성의 목자이십니다. 목자는 양을 사랑하고 양의 생명을 풍성케 합니다. 그리고 유대인의 왕 예수님은 동방의 박사들에게 큰 기쁨을 주었습니다. 2:10 “저희가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ἐχάρησαν χαρὰν μεγάλην σφόδρα, 아주 큰 기쁨으로 기뻐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런 기쁨으로 아기 예수님께 엎드려 경배했습니다.
그러나 헤롯은 어린 아기들을 무참하게 죽였으며, 그로 인해 젊은 어머니들이 슬퍼하며 통곡했습니다.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받기를 거절하였도다.” 결국 헤롯은 죽음과 슬픔과 비통함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유대인의 왕 예수님께서 왜 잔혹하고 비통한 세상, 슬픔으로 인해 위로받을 길 없는 사람들 가운데로 오신 것입니까? 생명을 위해서, 아주 큰 기쁨을 위해서,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마태복음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μακάριοs……., 행복한, 축복받은) 예수님은 슬프고 비통한 사람들에게 축복과 행복을 주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잔혹함, 비통함, 슬픔을 정복하려고 오셨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사람들 중에 있는 비통함, 슬픔을 정복하시고 아주 큰 기쁨을 주십니다. (우리에게 이 기쁨이 있습니까?)
(3) 알곡과 쭉정이를 구별하십니다(3장).
세례 요한의 증거에 의하면, 예수님은 천국을 가지고 오십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동시에 예수님은 임박한 진노이십니다. 예수님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는데,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십니다(12). 세례 요한은 사람들을 향해 외쳤습니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예수님은 사람들 중에서 알곡과 쭉정이를 구별하십니다. 알곡은 천국으로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십니다. 이로 볼 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는 예수님은 사람들 중에서 쭉정이와 싸우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은 죄 아래 있고 그래서 본질적으로는 쭉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쭉정이에 알곡을 채우고자 하십니다. 이를 위해서 겸손하게 세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셨고 결국에는 자기 목숨까지 바치셨습니다. 3:15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이 예수님에 대해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3:17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4) 어두움, 병, 약함과 싸우십니다(4장).
1-11절에서 시험하는 자 마귀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가지고 예수님을 시험(유혹)하여 예수님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의 위치에서 떨어지게 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귀의 시험(유혹)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리치셨고,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분명히 하셨고, 하나님 아버지께 대한 믿음과 경배를 분명히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으로 가셨는데, 예수님에 대해서 마태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쳤도다.” 이 말씀에 의하면 예수님은 큰 빛으로 흑암을 정복하시고 또한 사망을 정복하십니다. 사망과 흑암의 세계에 빛을 가지고 오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셨습니다. 예수님은 땅의 나라 가운데로 오셔서 그 땅에 있는 모든 병, 모든 약한 것들(무기력)과 싸우셨고, 그것들을 정복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병들고 약한 자들을 건강하고 강하게 하셨습니다. (이 땅에서 사람이 얼마나 잘 병들고 또 약해지는가? 그리고 그런 병과 약함은 어디서 온 것인가? 죄에서 왔다고 말할 수 있을까?)
II. 예수님의 좁은 길, 세상의 넓은 길과의 싸움(5-7장)
(1)예수님이 주시고자 하는 축복(행복), 사람들이 세상에서 얻고자 하는 축복(행복)(5:1-12)
예수님에 의하면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는데, 천국이 저희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복은 천국입니다. 천국은? 마지막 날 얻는 그 천국만입니까? 그렇기도 하지만, 사람 마음 가운데 이루어지는 천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 마음에 천국을 주시고자 하고 그것이 진정한 복이요 행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땅에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을 수 없습니다. 심령이 부요한 자, 자기 부족함을 느끼지 않는 사람, 마음이 흡족한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은 천국을 얻지 못합니다.
예수님에 의하면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는데,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 위로를 받습니까? 다스리는 자요, 목자이신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는 애통하는 자가 행복할 수는 없습니다. 애통하는 자에게 위로가 없기 때문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그냥 애통할 뿐입니다. 앞에서 아기가 죽어서 애통하는 어머니들에게 무엇이 위로가 되겠습니까? 그래서 땅에서 사람들은 애통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애통할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땅에서는 애통함이 없는 것이 복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은 예수님의 위로를 받지 못합니다. 예수님에 의하면 비록 애통할지라도 예수님의 위로를 받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예수님에 의하면 온유한 자가 복이 있는데,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얻기 때문입니다. 땅에서는 사나운 사람, 터프가이가 복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땅을 얻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제 온유한 자가 땅을 얻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온유한 자는 도리어 땅을 잃지 않을까요?
예수님에 의하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는데, 저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르면 의로 가득 채워집니다. 그리고 의로 가득 채워지는 것이 복이요 행복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땅에서는 사람이 불의할지라도 세상 권력이나 돈으로 배부른 것이 복이요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불의한 방법으로라도 권력을 얻고 돈을 얻고자 합니다. 불의한 방법으로라도 권력을 얻고 돈을 얻는 것이 과연 행복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에 의하면 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이 있는데,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은 사람으로부터, 하나님께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습니다. 긍휼히 여김을 받게 되면 어려울 때 도움을 받게 됩니다. 정말 도움이 필요할 때 도움을 받습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당시 유대는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그 사회에서는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것이 없었습니다. 사람을 긍휼히 여기기보다는 사람에게 잔혹하게 할지라도 사람에게서 빼앗고자 했습니다. 2장에서 헤롯 왕은 자기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두 살 아래의 남자 아이들을 죽였습니다. 그에게는 긍휼히 여김이 없었습니다. 헤롯은 아이들을 죽여서라도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이 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긍휼의 마음이 조금도 없이 무참히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자기들을 지키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이익이 개입되면 타인에 대한 긍휼은 뒤로 밀어버립니다. 긍휼보다 자기를 지키는 것이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에 의하면 마음이 청결한 자가 복이 있는데,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땅에 사는 사람들은 마음의 청결은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더럽거나 말거나 눈에 보이는 것을 얻으면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음이 비록 더러울지라도 돈만 많으면 행복하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나 자신도 마음의 청결보다는 돈을 더 사모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에 의하면 화평케 하는 자가 복이 있는데,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기 때문입니다. 땅에서 사람들은 남과의 관계가 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자기가 잘 될 수 있다면, 자기 자존심을 지킬 수 있다면, 자기가 높임을 받을 수 있다면 그것이 곧 복이요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를 버리고서라도 화목을 도모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의하면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사람이 복이 있는데, 천국이 저희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욕먹고 핍박 받고 악한 말을 듣는 것은 저주로 여겨지며 말할 수 없는 불행으로 여겨집니다. 사람들은 땅에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욕먹지 않기를 바랍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칭찬의 말을 듣고자 하고 칭찬의 말을 듣는 사람이 복 받았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예수님에 의하면 욕먹는 사람이 천국을 얻기 때문에 복 받았다고 합니다.
이상을 보면,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의 행복 론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땅에서의 일반적인 행복 론과 싸우시고, 정복하고자 하십니다. 땅에서의 일반적인 축복론, 행복론이 사람을 불행하게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돈이 행복이라고 하지만, 도리어 돈 때문에 불행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권력이 복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권력 때문에 사람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2) 제자는 세상적인 복, 행복과 싸우고 세상을 살릴 사람들입니다(5:13-20)
예수님은 세상 속에서의 제자들의 위치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어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라고 말씀하실 때, 세상이 부패하고 죽어간다는 것을 전제로 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그 부패하고 죽어가는 세상과 싸워서 세상을 살리고 건강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세상을 살리고 건강하게 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절대로 맛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맛이란 5:3-12에서 말씀되어진 그것이요, 뒤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것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말씀하셨을 때, 세상이 어두움에 싸여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세상의 어두움과 싸워서 그 어두움을 정복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어두움과 싸우고 그것을 정복하려면 빛을 소유해야 하는데, 빛은 5:3-12에서 말씀되어진 것이요, 뒤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것들입니다. 그들의 의가 바리새인보다 나아야 합니다(5:20).
(3) 마음의 죄와 싸우십니다(5:21-37).
기존의 율법에 의하면 사람이 행위로 살인하지 않으면 되었고, 행위로 간음하지 않으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살인에 대해서, 간음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예수님은 형제에게 성 내는 것, 형제를 향해 미련한 놈이라고 욕하는 것이 곧 살인죄와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형제에게 성도 내지 말아야 하고 미련한 놈이라고 욕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 마음에 형제에 대한 악한 마음이 없어야 합니다. 형제를 조금이라도 무시하지 말아야 하며, 형제를 해칠 마음이라고는 하나도 없어야 합니다. 마음에서부터 형제를 존중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간음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예수님은 마음의 간음도 간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마음의 죄를 행위적인 죄와 똑 같이 여기십니다. 이 예수님은 결국 사람의 마음의 죄와 싸우십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그 마음에서부터 죄로부터 깨끗하기를 원하십니다. 사람이 마음에서부터 죄를 짓지 않고 깨끗한 것이 곧 행복이 아닙니까?
(4) 미움과 싸우십니다(5:38-48).
구약은 나를 해치는 자에 대해서는 갚으라고 말씀했습니다(38).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치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구약은 원수를 미워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결국 예수님은 제자들 속에 일어날 수 있는 미움과 싸우십니다. 예수님은 사람들 사이의 미움을 정복하고 사랑을 창조하고자 하십니다. 저주의 말과 싸우시고 축복의 기도를 창조하고자 하십니다.
왜 그렇게 하십니까? 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5) 외식(위선), 사람의 상을 받고자 하는 것과 싸우십니다(6:1-18).
예수님은 사람들의 외식(위선)의 문제를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왜 위선의 탈을 씁니까? 사람들로부터 인정과 칭찬을 받기 위해서 입니다. 사람들의 상을 받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땅에서, 사람들 사이에서 살면서 다른 사람을 의식하고 사람들이 주는 상을 받는데 정신이 팔려 있습니다. 사람들이 주는 상을 받으려고 사람들에게 자기를 드러냅니다. 구제를 하고서는 사람들이 알도록 선전을 합니다. 기도할 때도 사람들 앞에서 기도합니다. 심지어 금식을 할 때도 내가 금식합니다 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슬픈 표정을 만들어냅니다.
이런 위선의 문제는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에게 아주 심했습니다. 그들은 속은 더럽고 악하면서, 겉으로만 경건한 척, 선한 척 했습니다(마태 23장). 그들은 진실하지 못했습니다. (사람 앞에서 살고 사람의 상을 얻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의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이 문제인 줄도 모릅니다.) 사람이 사람의 상을 받으면 하나님의 상을 받지 못합니다(6:1).
예수님은 이런 위선과 싸우시고, 사람들을 하나님 앞에 서게 하시고,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상을 바라게 하십니다. 6:4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6:18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니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그리고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말씀하실 때 “네 아버지” 라고 말씀하시고, 그 아버지는 은밀한 중에 너를 보시며 네 은밀한 선한 행위에 대해서 상을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왜 이렇게 제자들로 하여금 사람을 의식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식하도록 힘써 가르치십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제자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사람들(제자들)이 하나님 아버지의 상을 바라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사람들 가운데로 오셔서 바로 이것을 가르치고자 하신 것이 아닙니까? 예수님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 앞으로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 기도하고 구하기를 원하십니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하나님을 내 아버지로 알기를 가장 원하십니다. 6:9-15절에서의 주기도문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부를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라고 부르도록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위선을 싫어하십니다. 겉과 속이 다른 것을 싫어하십니다. (우리가 얼마나 겉과 속이 다르기 쉬운가?) 그리고 예수님은 사람들의 위선과 싸우십니다.
(6) 물질주의, 염려와 싸우십니다(6:19-34).
6:1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6:24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사람이 재물을 섬기든지 하나님을 섬기든지 둘 중 하나밖에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땅에서 사람들은 재물을 섬깁니다. 재물이 구원자로, 행복의 첫째 조건으로 되어 있습니다. 재물을 신으로 여깁니다. 예수님은 그런 재물 지상주의와 싸우십니다. 예수님은 사람들로 하여금 재물을 하나님을 위해서 쓰도록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재물을 하늘에 쌓아두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재물을 쓸 때 염려가 생깁니다.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제자들은 먹고 마시는 것, 입을 것을 염려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6:26 “공중의 새를 보라…….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6: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예수님은 하늘 아버지께 대한 믿음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시고, 그들 속에 있는 염려와 싸우십니다.
*우리는 본문의 예수님에게서 세상 왕들과는 다른 왕의 모습을 봅니다. 세상 왕들은 자기 국민들에게 돈을 많이 벌라고 말합니다. 좋은 왕이란 자기 국민들에게 돈을 벌 수 있는 길을 많이 제시하고 제공하는 왕입니다. 땅에서 좋은 왕이란 자기 국민에게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공급해주는 왕입니다. 그리고 왕은 자기가 그런 모든 것을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리고 그런 왕이 국민에게 인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기 국민들에게 땅에다 재물을 모으기보다 도리어 잘 쓰라고 하십니다. 또 예수님은 자기 국민들로 하여금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에서 하늘 아버지를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늘 아버지가 자기 국민들을 먹이고 입히신다고 가르치십니다. 왕 예수님은 돈 문제(경제 문제), 먹고 마시는 문제를 자기가 직접 해결하고자 하지 않으십니다. 왕 예수님이 직접 돈이나 먹고 마시는 문제와 싸우지 않으십니다. 도리어 자기 국민들 마음 가운데 있는 불신, 하나님께 대한 불신과 싸우시고 그들 속에 있는 염려와 싸우십니다. 그리고 하늘 아버지에 대한 믿음을 가르치고 심으십니다. 먼저 하나님을 찾도록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7) 사람은 먼저 자기가 좋은 나무가 되기 위해서 싸워야 합니다(7:1-5, 15-20).
7:5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7:17,18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사람이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먼저 그 자신이 좋은 나무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이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먼저 자기와 싸워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도우려 하기 전에 먼저 자기 들보부터 뽑아내야 합니다.
(8) 하나님을 아버지로 대접해야 합니다(7:6-12).
하나님을 아버지로 대접해야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아들로 대접하실 것입니다(12). 그런데 하나님을 아버지로 대접하는 길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고 아버지께 구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께 열심히 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아버지는 주십니다. 7: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9) 세상 넓은 문과의 싸움(7:13-1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예수님은 자신의 가르침이 좁은 문, 좁은 길임을 잘 아셨습니다. 그 가르침을 따르는 자가 적다는 것을 잘 아셨습니다. 한편 세상 많은 사람들은 넓은 문, 넓은 길로 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가르침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가는 그 문, 그 길과의 싸움임을 아셨습니다. 그 싸움 역시 힘든 싸움임도 잘 아셨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자신의 가르침이 곧 생명의 길이요, 세상의 넓은 문은 멸망의 문이라는 것입니다.
(10) 비, 창수, 바람과의 싸움(7:15-29)
7:24-26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않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예수님은 인생살이에서 비, 창수, 바람이 있다는 것을 잘 아셨습니다. 인생을 산다는 것은 그런 것과의 치열한 싸움입니다. 그 싸움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행치는 않는 사람은 비, 창수, 바람의 때에 무너지되, 그 무너짐이 심하게 됩니다. 우리가 외부로부터 불어 닥치는 이런 시련과의 한판 싸움에서 어떻게 살아남으며 승리할 것입니까?
III. 예수님은 권세자로서 인간의 병, 죄, 고통과 싸우십니다(8-9장).
(1) 예수님은 말씀의 권세자로서 인간의 병, 연약함, 고통과 싸우십니다(8장).
*예수님은 말씀으로 문둥병을 깨끗케 하셨습니다(1-4).
*예수님은 말씀만으로 중풍병을 고치셨습니다(5-13). 백부장의 말에 의하면, 중풍병이 예수님의 수하에 있어서 예수님이 한 말씀만 하시면 중풍병은 물러갑니다. 8:8,9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습니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로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14-17). 우리 연약한 것을 담당하시고 병을 친히 짊어지십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바람과 바다를 잠잠케 하셨습니다(18-27).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
*예수님은 말씀으로 사나운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28-34).
(백부장의 말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말씀의 권세를 가지신 것은 예수님께 지위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중풍병도 예수님의 수하에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한 마디만 하시면 중풍병은 떠나갑니다. 그렇다면 귀신도, 바람과 바다도 모두 예수님의 수하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말씀의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 영적 지위를 가지신 예수님이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는 병, 연약함, 귀신들과 싸우시고 그것들을 정복하십니다. 그리하여 인간을 고통으로부터 구원하십니다.)
(2) 예수님은 사죄의 권세자로서 죄와 싸우십니다(9장).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죄 사함을 선포하셨습니다(1-8). 어떤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죄 사함의 권세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3).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그리고서 예수님은 그 중풍병자를 일어나 걷게 하심으로써 죄를 용서하는 권세가 있음을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불러 건강하게 하십니다(9-13). 구체적으로 예수님은 세리 마태에게 “나를 따르라” 말씀하셨고, 마태는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은 마태의 집에서 많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셨는데, 그 모습을 보고서 바리새인들이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비난하는 말을 했습니다(11). 예수님께서 들으시고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필요하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그리고 예수님께는 죄인을 고쳐 건강하게 하실 능력이 있습니다. 이 예수님은 죄인에 대해서 긍휼의 마음을 가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여자에게서 죄의식을 없애주셨습니다(18-22). 혈루증 여자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댐으로써 병이 나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여자는 부정한 손으로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기 때문에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여자는 율법에 따른 정죄의식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자에게 “딸아 안심하라” 말씀하심으로써 여자에게서 정죄의식을 없애주셨습니다.
(3) 예수님은 믿음을 축복하시고 믿음없음과 싸우십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8:10.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그리고 그 믿음대로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8:13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메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셨습니다(2). 9:2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은 혈루증 여자의 믿음을 축복하셨습니다(9:22). 9:22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예수님은 소경의 믿음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9:28,29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그가 대답했습니다. “주님, 그러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믿음대로 되라.”
*반면 예수님은 믿지 않음, 믿음 적음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싸우십니다. 8:11,12 그들이 왜 바깥 어두움에 쫓겨납니까? 예수님께 대해서 백부장이 가졌던 그런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8:26 예수님은 제자들의 믿음없음을 책망하셨습니다.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Τί δειλοί ἐστε, ὀλιγόπιστοι)
IV. 제자들이 세상에 나가서 싸워야 할 싸움(10장)
(1)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1-15).
이 일을 제자들의 힘으로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능력을 주셨습니다. 10:1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모든 병’, ‘모든 약한 것’ 이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제자들은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서 모든 병, 모든 약한 것에 도전하고 싸우고 정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권능이 주어졌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명령하셨습니다.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한 가지를 더 말씀하셨습니다.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제자들은 평화의 사자들입니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평화를 선물해야 합니다. 그런 그들은 사람들 속에 있는 두려움, 불안, 또는 불화와 싸우고 정복하는 사람들입니다.
(2) 미움과 싸워야 합니다(16-23).
제자들은 좋은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10: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이리는 양을 잡아 먹으려 할 것입니다.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10:22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그렇게 되면 제자들도 사람들을 미워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애매하게 고난과 핍박을 받고 미움을 받는데 제자들 마음에 미움이 안 생긴다면 그것이 이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그들은 사람들의 죄, 미움에 오염되지 않아야 합니다. 순결해야 합니다. 사랑에 있어서, 온유함에 있어서 순결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려면 그들은 그들 속으로 파고드는 미움과 싸워야 합니다.
(3)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과 싸워야 합니다(24-42).
사람들이 제자들을 핍박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25). 그러므로 그런 일을 당하여서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의 생명, 모든 것이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29-31). 그리고서 사람에 대한 두려움과 싸우고 정복해야 합니다. 사람 앞에서 예수님을 시인해야 합니다. 양이 이리 가운데로 들어가면 두려움이 생기는 것이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 두려움과 싸우고 정복해야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이름을 전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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