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titled Document
주일말씀 성경별메시지 심포지엄 성경 검색
문제지 성경별문제지

마태복음 마6강(5:1-16)/복있는 사람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3,367회 작성일 03-03-30 09:50

본문

2003년 마태복음 제 6 강                                                       
말씀/마태복음 5:1-16
요절/마태복음 5:3
                              복 있는 사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시면서 복을 주셨습니다(창1:28).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내가 너로 복의 근원이 되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창12:2).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b).”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주기를 원하십니다. 저도 여러분이 정말로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한번 “복”이라는 단어로 성경을 검색해 본다면 놀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축복하기를 열망하시는지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기본적으로 바라는 것도 복을 받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참으로 행복한 인생을 살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I. 복있는 자 (1-12)

  예수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 앉으셨다는 것은 권위있는 교사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이 계신 주위로 모여 앉고 무리들이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그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청명한 하늘 아래, 봄의 정취가 산등성이를 감싸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입을 열어 말씀을 가르치기 시작하자 신령한 영적 보화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첫째. 심령이 가난한 자.  3절을 보십시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가난이란 부족한 상태, 가진 것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영적으로 자신의 자원이 고갈된 자들, 자신만의 힘으로는 어떤 소망이나 목적도 달성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자들, 하나님의 자비에 의존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자들을 말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실패를 경험해 보면 마음이 가난해집니다. 육체적 정신적 질병의 위협을 받을 때나 자기 한계를 뼈저리게 느낄 때 마음이 가난해 집니다. 자신의 힘만으로는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어서 하나님 앞에 엎드러진 자들은 천국에서 귀한 자로 취급을 받습니다. 뿐만 아니라 심령이 가난한 자는 자신의 욕망을 따라서 살지 않고 겸손과 순종의 삶을 살며 가난해지기로 다짐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도 포함합니다. 앗씨시의 성자 프란시스는 스스로 가난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가난 자체가 행복하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고 많은 물질을 소유했거나 권세나 명예를 소유했거나 많은 지식을 소유한 자가 행복하다고 하지 않으시고 영적으로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천국은 심령이 가난한 자들의 것입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했습니다. 부자는 하나님보다 돈을 더 의지하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가난한 자는 의지할 것이 없으니 하나님을 의지하기가 더 쉽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자신이 티끌과 같이 무가치한 존재임을 깨닫고 겸손하게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자신이 영적으로 한없이 부족함을 알기 때문에 영적인 소원을 가지고 끊임없이 겸손하게 배웁니다. 말씀의 깊은 세계를 알고자 밤낮으로 말씀을 연구합니다(시1:1,2). 또 항상 허리를 굽히고 깊은 믿음의 세계, 은혜의 세계로 나아가고자 노력합니다. 항상 배고픔을 느끼는 사람은 건강한 것처럼 영적으로 말씀에 대하여 배고픔을 느끼고 하나님께 대하여 갈급함을 느끼는 사람의 영혼은 건강한 것입니다.

  다윗 왕은 심령이 가난한 자의 좋은 예가 됩니다. 그는 왕으로서 부족함이 없는 자였습니다. 그는 얼마든지 자신의 능력과 영광을 과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목마른 사람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다고 고백했습니다(시42:1). 마태는 세리로서 물질적으로 풍요한 생활을 해보았지만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심령은 고독과 소외, 불만족 등으로 고통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면서 비록 가난하게 살았지만 마음은 풍요로왔습니다.
  사람들의 눈에 가난한 자는 무능력하게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자에게 천국이 임하기 때문입니다.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고 할 때 시제가 현재로서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는 현재 천국이 그 마음에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심령은 모든 복의 기초가 됩니다. 심령이 가난하지 않고 애통할 수 없으며 심령이 가난하지 않고 온유할 수 없습니다.

둘째, 애통하는 자. 4절을 보십시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애통은 깊은 슬픔을 뜻합니다.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 죄에 대해서 더 고민하는 사람입니다. 죄의 짐은 견딜 수 없고, 죄의 기억은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애통하는 사람은 이 세상의 상처를 보고서 탄식의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세상과 현재의 세상이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알았을 때에 이런 탄식이 절로 나옵니다. 세상은 슬픔과 절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지금 이라크 전쟁으로 인해서 애통해 하는 이라크 어머니들을 보십시오. 부모를 잃고 방황하는 아이들을 보십시오. 의미 없는 중노동을 하며 병들고 늙고 죽어가는 것은 인생을 한없이 슬프게 합니다. 이 때문에 세상에는 자기 연민에 빠져 인생을 슬퍼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자신의 처량한 신세를 생각하고 남몰래 슬픈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나 이런 슬픔들은 인간을 황폐하게 만듭니다. 반면에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슬픔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지은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심령으로 사죄의 은혜를 간구하며 그 지은 죄로 인해 슬퍼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의 거짓과 교만과 위선, 게으름, 이기심등의 죄로 인해서  울어야 합니다.
  다윗 왕은 순간적으로 정욕에  빠져 큰 죄를 범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받고 애통하며 침상이 젖도록 눈물로 회개했습니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51:17)” 하나님은 이렇게 애통하는 그에게 사죄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32:1). 그리고 그의 후손 가운데서 세상의 구주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완악한 예루살렘 성을 향하여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하시며 우셨습니다(눅19:41). 우리도 양들의 죄를 인하여 심령이 상하여 남몰래 눈물을 흘릴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양들과 이 시대의 죄로 인해 애통해 할 때 하나님의 위로가 있게 됩니다. 양을 잃고 한 달 동안 눈물로 지낸 목자는 행복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흘린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십니다(계21:4).

셋째. 온유한 자. 5절을 보십시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부드러움이 있고, 과격한 데가 없습니다. 말씨나 태도, 표정이나 행동이 부드럽고 온건하며 극단적인 데가 없어서 많은 사람을 포용할 수 있습니다. 부드럽고 과격한 데가 없는 온건한 사람은 많은 사람을 포용할 수 있습니다. 온유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을 통해서 연단을 받은 성품입니다. 죄사함을 받고 순종 훈련을 받고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된 인격입니다. 온유한 자는 복수할 마음이 없이 상처를 참을 수 있습니다. 온유한 자는 화낼 생각이 없습니다. 온유하다는 것은 약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소신과 원칙은 있으나 그것 때문에 과격하게 사무를 처리하지 않습니다. 부드러우면서도 성취할 것은 다 성취하며 겸손한 데가 있어 위협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동족을 구원하기 위해 애굽 사람을 쳐 죽이는 혈기가 많은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40년 동안 광야 훈련을 받았을 때 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할 만큼 온유한 자가 되었습니다(민12:3). 그래서 40년 광야 생활을 하면서 200만명의 불평을 다 감당하며 사명을 완수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가장 마음이 온유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마11:29).” 우리가 온유하신 예수님을 배워 나갈 때 온유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넷째,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6). 6절을 보십시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의’란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맺는 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맺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진실되고 거룩하게 살고자 하는 소원을 의미합니다. 여기에 나타난 의는 죄악된 욕망으로 인해서 애통해 하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낮추는 대속적인 의로서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칭의라기 보다는 의의 행동, 의로운 행동 자체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마6:1). 대속적인 의의 개념은 바울이 사용한 것인데 마태복음에서는 의를 그렇게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의로운 사람이 되고자 하고 의로운 것을 행하고자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바른 행동을 보여 주고자 열망하는 것을 말합니다. 의로운 사람은 언제든지 공의를 추구하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바른 일, 정직한 일을 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들은 부자가 되거나 배움보다 거룩한 사람이 되고자 애를 씁니다.
  우리 시대는 적당히 죄와 타협하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의인들을 보기가 어렵습니다. 사람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고자 하고 육신의 쾌락을 추구합니다. 그렇게 해서 원하는 것을 얻으면 만족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는 밑 빠진 독에 물붓기와 같습니다. 한 형제님은 의로운 사람이라 불의를 보면 참지를 못했습니다. 그리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보면 발벗고 나서서 섬깁니다. 그는 복음의 능력과 정직한 삶의 방식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다섯째, 긍휼히 여기는 자(7). 7절을 보십시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의’ 다음에 ‘긍휼이 나왔습니다. 의만 있고 긍휼이 없으면 냉정하고 무자비한 의가 되고, 긍휼에 의가 없으면 무분별하게 죄를 용납하기 쉽습니다. ’의‘와 ’긍휼‘은 반드시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긍휼이란 예수님께서 죄인을 불쌍히 여기사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그 사랑에 바탕을 둔 용서의 행위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하나님의 마음과 눈으로 다른 사람을 친절하게 대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벌을 주기 보다는 용서하기를 좋아하는 자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다른 사람들이 당연히 해야 할 것을 엄격하게 주장하기 보다는 동정심을 보이는 자를 말합니다. 참된 긍휼은 인간적인 선에서 우러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자비로운 분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감사하는 데서 나옵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운 분이시라는 것을 아는 자들은 자유를 누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자비롭게 대할 수 있습니다.
  저는 사실 실수도 많고 부족한 점도 많은 사람입니다. 결점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목자님들이 저를 불쌍히 여겨 그것을 감당해 줍니다. 제가 사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에게 다른 것은 없어도 “목자님, 사랑합니다. 형제님 사랑합니다.”라고 서로 긍휼히 여기는 말을 하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그의 보혈로 덮어 씌워 주시면 실수가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 저에게 부족한 것이 많아도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 제가 당신을 사랑합니다. 양을 잘 못 쳐도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우리가 죄와 사단의 노예가 되어 소망이 없는 비참한 상태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허락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이것은 오직 주님의 긍휼하심 때문입니다(디도서 3:4,5).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셨다면 한 사람도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순종하는 자들은 돕기 쉬워도 반발하고 불순종하는 자들은 내버려두기 쉽습니다. 우리가 반발하고 불순종하는 자들을 도울 수 있는 것은 근본적으로 그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하나님의 마음을 품을 때만이 가능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길 때 하나님께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게 됩니다.

여섯째, 마음이 청결한 자.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마음이 순수하고 깨끗하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란 진실된 믿음을 가진 사람,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진실된 자를 가리킵니다. 이런 사람은 사심이 없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음이 세상의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으면 결코 영적인 세계를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순수하고 깨끗한 자는 영적인 세계를 볼 수 있고 더 나아가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마음을 깨끗케 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보배 피는 부패한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1:9).” 예수님의 보배피로 씻음 받아 마음이 정결케 될 때 영적 눈이 열려 신령한 영적 세계를 볼 수 있고 더 나아가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일곱째, 화평케 하는 자.  9절을 보십시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예수님께서는 죄인과 하나님을 화평케 하시려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엡 2:16은 말씀합니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화평케 하는 자에게는 희생이 따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습니다(고후5:18,19). 우리는 복음을 전해서 하나님과 불화한 자들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도록 하는 직분을 맡았습니다. 우리가 이 일을 힘써 감당할 때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게 됩니다. 

여덟째.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 10,11절을 보십시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여기서 ‘의’는 예수님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딤후 3:12).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의롭고 진실되게 살고자 하면 세상이 우리를 용납하지 못하고 우리를 핍박하게 됩니다. 우리가 캠퍼스에 올라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욕을 먹기도 하고 배척을 받기도 하고 속기도 합니다. 복음을 위해서 많은 것을 희생했는데 남는 열매가 없을 때 손해 의식이 들어 무기력해집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가 당장에 보이는 열매는 없지만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상이 크기 때문입니다. 열매가 없다고 핍박이 많다고 어렵다고 복음을 전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상 받기 싫어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핍박을 많이 받을수록 상도 큽니다. 주님을 위해서 살다가 이 세상에서 받은 상이 적을수록 하나님 나라에서는 더욱 큰 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시편 기자의 고백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시오니 주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시 16:2).”
 
 II. 빛과 소금 (13-16)

  13-16절은 제자들이 세상에서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말해줍니다.
첫째,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13). 13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소금은 그 자체로는 별 가치가 없지만 육신의 생명을 유지시키는데 없어서는 안 될 필수 불가결한 영양소입니다. 또 소금은 음식에 맛을 냅니다. 싱거워서 맛이 없는 음식이라도 소금이 들어가면 맛이 납니다. 또 소금은 부패를 방지시켜 음식을 신선하게 보존해줍니다. 이와 같이 우리 믿는 자들은 부패하게 하는 세력들의 활동을 억제함으로써 선이 실행되고 신선한 상태를 보존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소금이 맛을 내고 부패를 방지하려면 반드시 보이지 않는 가운데 녹아서 내부 세계에 침투해 들어가야 합니다. 이는 자기를 죽이고 희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소금은 보이지 않지만 효과가 지대한 것을 우리는 영향력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세상에서 영향력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신앙 생활에 있어서 영향력은 매우 중요합니다. 영향력을 잃은 신자는 맛잃은 소금과 같이  아무 쓸모없는 자가 되어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고 밟히울 뿐입니다. 우리는 말을 좀 못하고 부족할지라도 영향력있는 신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바닷물의  소금은 2.8%이지만 바다의 모든 부패를 방지합니다. 그런데 현재 한국에는 25%가 신자라고 하는데 왜 이렇게 부패해 있습니까? 신자들이 소금의 역할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죄악과 타협하지 말고 의를 추구해야 합니다. 세상과 다르게 살아야 합니다. 신자로서 맛을 내야합니다.

둘째,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14-16). 14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신 것은 “너희는 이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빛의 자녀들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사람들은 빛 되신 예수님께로부터 빛을 받아 그 빛을 주위 사람들에게 비추는 자입니다. 빛을 비추인다는 것은 적극적으로 진리의 말씀으로 영적무지를 깨우쳐 주고 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또한 도덕적으로 깨끗하고 순결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정직, 근면, 검소한 삶을 살고 공평하고 정의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착한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16). 불신자들은 신자들의 말보다 생활을 봅니다. 세상이 어둡다고 불평만 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처한 곳에서 적극적으로 빛을 비추이는 생활을 할 때 세상은 밝아질 것입니다 .세상에 빛을 비추이는 예수님의 사람들이 있는 한 세상은 소망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 나라 시민으로서 그 나라를 소유한 참으로 복된 자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사나운 사람이 되지 말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 참된 행복을 누리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팔복은 많은 점에서 성령의 열매와 동일합니다. 팔복은 예수님의 인격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배울 때 이런 복을 풍성히 누리게 될 줄 믿습니다.
 

첨부파일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Total 1,323건 81 페이지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