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03년 마태복음 제 3 강/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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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마태복음 제 3 강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말씀 / 마태복음 3:1-17
요절/마태복음 3: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였으니”
마태복음은 예수님이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왕이시오,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이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당시 유대교로부터 핍박을 받고 쫓겨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해서 혼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이요 구약 성경과 신앙의 전통을 가지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누구로 보느냐 하는 문제에서 차이가 있었습니다. 마태는 이런 그리스도인들을 돕기 위해 구약 성경의 예언을 인용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로 증거했습니다. 예수님은 구약 성경을 폐하러 오신 분이 아니라 온전케 하신 분이십니다.
오늘 말씀은 메시야의 선구자 세례요한의 사역과 삶을 소개하고 그로부터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증거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증거한 메시지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였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의 의미를 깊이 영접하고 동일한 메시지를 선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회개하라(1a). 세례 요한은 의인이었던 제사장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외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모태에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고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라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방해를 받지 않으면서 기도에 전념하기 위해 광야로 나갔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홀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가운데 이사야40:3절 말씀을 받았습니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이 말씀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기 까지 광야에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메시야의 오시는 길을 예비하기 위해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서 길을 예비했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외쳤습니다. 회개하라는 뜻은 생각의 방향을 바꾼다는 것입니다. 회개란 사람들이 잘못한 것에 대해서 단순히 죄스러운 마음이나 미안한 생각을 품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란 기본적인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회개를 통해 사람들은 가치관을 바꾸고 자신이나 이웃이나 하나님에 대해 이전에 가졌던 개념을 버리고 새로운 개념을 갖게 됩니다. 그러므로 참되고 올바른 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게 하는 새로운 길이 없을 때에는 회개란 불가능 한 것입니다. 만일 세례 요한이 “회개하라”고만 외쳤다면 그는 헛 수고를 한 것에 불과합니다. 사람은 단순히 옛 삶을 청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인가 더 진실된 것이 있어야 이것을 향해 돌아설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지금까지 의지해 왔던 돈이나 권세, 인정, 또는 질병이나 죽임이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스리신다는 것을 받아들이라고 외쳤습니다. 회개란 예수님을 영접하기 위한 준비입니다. 자기의 현재 삶이 하나님을 떠난 삶,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삶이란 것을 깨닫고 돌이켜야 합니다. 그리고 새 왕을 받아들이고 그의 통치를 받으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회개하라는 말을 듣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회개하라고 하면 거부감을 느낍니다. 또 죄를 죄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런 것을 회개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고 말합니다. 얼마 전 있었던 두 대학의 오리엔테이션에서 무대에 선 사람들이 거의 옷을 걸치지 않은 상태로 춤을 추었다고 합니다. 신입생들이 오리엔테이션에서 이런 것들을 보고 앗싸, 대학이란 이런 것이구나 라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총장이나 교수들이 잘못된 것 인줄 알면서 왜 허용했을까요? 이는 신입생들이 다른 대학으로 가지 못하도록 붙잡기 위해서 그랬다는 것입니다. 교수들도 학생들로부터 평가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함부로 죄를 지적하고 돌이키도록 하지 못합니다. 회사는 학생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서 죄악된 문화를 확산시킵니다. 부모들도 아이들 눈치를 보고 회개의 메시지를 잘 전하지 못합니다. 심지어 교회에서도 목사님들이 회개의 메시지를 잘 전하지 못합니다. 완악한 사람들은 스스로 회개할 수 없고 회개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과 같은 하나님의 종이 나타나서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임박한 진노에서 피하라 하더냐”라면서 가슴이 서늘할 정도로 회개의 메시지를 전했을 때 사람들은 시원함을 느꼈습니다. 반대로 헤롯과 같은 사람은 죄인 줄 알면서도 회개하기보다 반발하고 대적했습니다. 회개는 죄와의 영적인 싸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회개의 영을 주시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야 올바른 회개를 할 수가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회개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광야라는 말은 그 시대의 영적 상황을 표현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회개하라는 말을 듣기 싫어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를 볼 때 사람들의 진정한 소원은 회개의 메시지를 듣고 죄에서 돌이키기를 원하는 것임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회개의 메시지를 통해서 자기 발견을 하고 죄에서 떠나게 될 때 영적으로 시원함을 느낍니다. 파이프에 오물이 걸리면 물이 내려가지 않듯이 죄가 쌓여서 우리 심령을 막고 있으면 얼마나 답답합니까? 그러나 회개하고 막힌 심령이 뚫리면 천국이 임하게 됩니다. 우리는 회개의 메시지를 분명하게 전할 수 있는 용기를 덧입어야 합니다. 그리고 언제든지 자신의 잘못을 발견했을 때는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합니다.
둘째,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천국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영역입니다. 천국과 하나님 나라는 같은 의미인데 유대인들이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쓰는 것을 부담스러워했기 때문에 마태는 천국이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대적하는 모든 것이 파괴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시대를 가리킵니다. 천국이 가까이 온 것은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먼 미래에 천국에서 일어날 일이 예수님 안에서는 현재 실제적인 일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베풀고자 하시는 평화와 사랑과 자비가 예수님 안에서 실제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롬14:17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예수님께서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1).”고 하셨습니다. 회개하는 심령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이 세상에서 누릴 뿐 아니라 장차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게 되면 신령하고 강한 몸으로 변화되어 영원히 그 나라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세상적인 소망을 이룬다는 것은 어렵지만 이룬다 할지라도 썩고 쇠하고 사라질 것들입니다. 삼성 팰리스에 사는 사람들은 이 세상이 천국과 같이 느껴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100년을 넘기지 못합니다. 학생들은 게임천국, 오락 천국에 빠져서 삽니다. 그러나 게임보다 더 좋고 재미있는 나라가 천국입니다. 세상적인 쾌락은 잠시 잠간입니다. 그것으로는 우리 영혼이 만족스럽지 않습니다. 천국은 교회에 열심히 나간다고, 예배에 정기적으로 참석한다고, 피상적인 회개만 가지고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말슴하셨듯이 사람이 회개하고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요3:5). 사람들은 우리가 죽은 다음에 천국을 간다고 생각하지만 천국은 우리의 실제 삶에서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실제 삶에서 천국을 맛보고 경험을 하지 않으면 크리스챤은 불쌍한 사람들이 됩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 나라는 우리의 산 소망이요 진정한 소망입니다. 이 때문에 세례 요한은 천국을 전파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캠퍼스에서 신입생들을 만나 마음껏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무슨 말을 전해야하겠습니까? 세례 요한이 증거하고 예수님이 증거하신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동일한 복음을 전해야겠습니다. 신입생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애쓰기 보다 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하게 전해서 이들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이켜 천국을 맛보도록 해야겠습니다. 많은 학생들이 쾌락은 즐기는데 참된 즐거움은 없고 안일하게는 사는데 마음에 평화가 없고 욕심은 많은데 삶에 의미를 느끼지 못합니다. 우리는 이런 지성인들의 심령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회개와 천국의 메시지를 전해야겠습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가 광야로 나아갑시다. 홍대 뿐만 아니라 신촌과 세계 각지에서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고 천국이 임하는 역사가 일어나도록 합시다. 올해 어찌하든지 세례 요한의 심령으로 말씀을 전하여 12명의 신입생 제자들을 세우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요한의 생활 양식(4). 4절을 보십시오. “이 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세례 요한은 명품 옷을 사기 위해서 이 백화점, 저 백화점 돌아다니지 않고 약대 털옷 한 벌을 입고 사역을 했습니다. 그 옷은 낮에는 자외선을 막아 주고 밤에는 추위를 막는 역할을 했습니다. 또 사람들은 점심 한끼를 먹더라도 전문 음식점, 고급 레스토랑을 찾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살면서 인터넷을 서핑을 하거나 텔레비전을 볼 수도 없었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기도하고 성경을 공부하는 가운데 독수리와 같은 눈으로 세상을 보고 죄로 고통 하는 시대에 대한 상한 심령을 덧입고 회개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요한이 순수한 마음을 가졌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엘리야의 심령과 모세의 목자의 심정을 주셨습니다(눅1:17). 그가 순수한 삶을 살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자기에게 오는 사람들에게 회개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영력을 주셨습니다. 그가 순수한 삶을 살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하나님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으로 사용하셨습니다. 그의 순수한 삶은 그가 메시야의 선구자로 사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동료들의 압력이나 자기 속에 있는 죄의 소원 때문에 불결한 삶을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세례 요한처럼 순결하고 순수한 삶을 살고자 하는 거룩한 소원을 주시도록 기도합니다. 여러분이 지도자로 쓰임 받고자 한다면 더욱 절제되고 순수한 삶을 사모해야 합니다.
넷째,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7-12). 요한은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데 오는 것을 보고 말했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7)” 바리새인은 외식으로, 사두개인은 세속주의로 인해서 백성들에게 악영향을 끼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세례 요한이 무슨 권세로 세례를 주는지 조사하려고 나왔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역사를 눈으로 보면서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주로 돈에 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목자라는 자부심과 자만심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 실제 생활에서는 일대일 양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많은 양무리들을 섬겨야 할 사람들이었지만 한 명의 일대일 양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열매 없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이런 삶을 살고 있었던 원인은 속교만과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답게 믿음과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헌신이 있어야 마땅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실 수 있는 분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또한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히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천국이 가까웠다는 것을 아는 자는 천국에 속한 자처럼 살아갑니다. 모세가 잠시 죄의 낙을 거절할 수 있었던 힘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의 마음이 하나님 나라에 가 있었기 때문입니다(히 11:24-26). 우리는 실낙원의 고통을 충분히 맛보았습니다. 이제 더 이상 죄의 낙을 누리지 말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성령의 맺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동시에 심판자이십니다. 요한은 그리스도를 맞이할 준비가 안 된 백성들을 보고 긴박하게 회개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10).”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천년만년 살 것 같지만 언제 죽을지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오늘 밤에라도 데려가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듣는 즉시 회개해야지 내일로 미루면 안됩니다. 우리는 내일 일을 알 수 없습니다.
요한은 그들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었습니다. 세례는 죄를 씻는다는 뜻이있습니다. 또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외적인 공표이기도 합니다. 요한의 물세례는 성례로 끝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십니다. 그래서 요한 자신은 예수님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고 고백합니다. 그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알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게 되는 성령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지혜를 가르치고 긍휼을 베풀게 하고 믿음을 어리석게 여기는 세상에서 믿음을 갖도록 격려하고 복음의 약속에 대한 확신을 갖도록 역사하십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가장 좋은 선물로 성령을 주십니다(눅11:13).
불은 태우고 정결하게 합니다. 이 세상 끝이 오면 하나님은 심판을 베푸시고 공의로운 세상을 이루실 것입니다. 당장에는 탐욕스럽고 불의한 자들이 이 세상을 주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대적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견딜 수 없습니다. 천국을 대적하는 자들은 모두 꺼지지 않는 불에 탈 것입니다. 그 분은 마지막 때가 되면 온 세상에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악을 태워버리고 우리 안에 있는 긍휼과 겸손과 사랑의 행동을 정금처럼 순결하게 하실 것입니다. 당시 세례 요한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신발을 들지도 못하는 종이라고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겸손한 사람이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 받습니다. 겸손한 사람이 하나님의 역사를 동역할 수 있습니다. 자기를 낮추는 사람을 하나님은 높이십니다. 여자가 나은 자 중에 세례 요한 만큼 위대한 자가 없었습니다.
다섯째, 세례 받으신 예수님(13-17). 예수님이 갈릴리로서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셨습니다. 그러자 요한은 말리면서 말했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예수님은 죄가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의는 사람이 하나님이나 다른 사람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구원의 역사를 이루신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의롭게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세상을 구원하려는 뜻을 품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그 분이 모든 인간들과 같이 되신 것을 상징합니다. 그분은 죄인들을 용서하고 구원하고 의롭게 되도록 하기 위해서 죄인들과 같이 되신 것이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의를 이루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장차 십자가에서 죽음의 세례를 받아야 함을 내다보시고 죄인 중의 하나와 같이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서 대속제물이 되고자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저주와 징계를 받고자 결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받을 세례의 본이 되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그 위에 임하셨습니다. 예수님에게 하늘이 열려졌습니다. 하나님이 열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늘과 땅이 연결되었습니다. 야곱의 꿈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모든 나라에 공개적으로 알리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만민 구속 역사를 위해서 이 땅에 오셨고 세례를 받으심으로 장차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대속 사역을 이루고자 결심하셨습니다. 자기 목숨을 버려 세상 만민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결단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장면을 메시야 대관식이라고 부릅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메시야의 선구자로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말씀을 영접합니다. 내 안에 있는 정욕과 자기 영광과 교만을 회개하고 성령을 충만히 받아야겠습니다. 우리가 회개할 때 내 안에 천국이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강한 자기 생각의 다스림을 받을 때 평화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를 회개하고 겸손하신 주님의 다스림을 받을 때 천국이 임합니다. 여러분 안에 천국을 맛보며 전하는 한 주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말씀 / 마태복음 3:1-17
요절/마태복음 3: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였으니”
마태복음은 예수님이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왕이시오,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이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당시 유대교로부터 핍박을 받고 쫓겨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해서 혼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이요 구약 성경과 신앙의 전통을 가지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누구로 보느냐 하는 문제에서 차이가 있었습니다. 마태는 이런 그리스도인들을 돕기 위해 구약 성경의 예언을 인용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로 증거했습니다. 예수님은 구약 성경을 폐하러 오신 분이 아니라 온전케 하신 분이십니다.
오늘 말씀은 메시야의 선구자 세례요한의 사역과 삶을 소개하고 그로부터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증거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증거한 메시지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였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의 의미를 깊이 영접하고 동일한 메시지를 선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회개하라(1a). 세례 요한은 의인이었던 제사장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외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모태에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고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라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방해를 받지 않으면서 기도에 전념하기 위해 광야로 나갔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홀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가운데 이사야40:3절 말씀을 받았습니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이 말씀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기 까지 광야에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메시야의 오시는 길을 예비하기 위해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서 길을 예비했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외쳤습니다. 회개하라는 뜻은 생각의 방향을 바꾼다는 것입니다. 회개란 사람들이 잘못한 것에 대해서 단순히 죄스러운 마음이나 미안한 생각을 품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란 기본적인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회개를 통해 사람들은 가치관을 바꾸고 자신이나 이웃이나 하나님에 대해 이전에 가졌던 개념을 버리고 새로운 개념을 갖게 됩니다. 그러므로 참되고 올바른 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게 하는 새로운 길이 없을 때에는 회개란 불가능 한 것입니다. 만일 세례 요한이 “회개하라”고만 외쳤다면 그는 헛 수고를 한 것에 불과합니다. 사람은 단순히 옛 삶을 청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인가 더 진실된 것이 있어야 이것을 향해 돌아설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지금까지 의지해 왔던 돈이나 권세, 인정, 또는 질병이나 죽임이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스리신다는 것을 받아들이라고 외쳤습니다. 회개란 예수님을 영접하기 위한 준비입니다. 자기의 현재 삶이 하나님을 떠난 삶,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삶이란 것을 깨닫고 돌이켜야 합니다. 그리고 새 왕을 받아들이고 그의 통치를 받으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회개하라는 말을 듣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회개하라고 하면 거부감을 느낍니다. 또 죄를 죄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런 것을 회개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고 말합니다. 얼마 전 있었던 두 대학의 오리엔테이션에서 무대에 선 사람들이 거의 옷을 걸치지 않은 상태로 춤을 추었다고 합니다. 신입생들이 오리엔테이션에서 이런 것들을 보고 앗싸, 대학이란 이런 것이구나 라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총장이나 교수들이 잘못된 것 인줄 알면서 왜 허용했을까요? 이는 신입생들이 다른 대학으로 가지 못하도록 붙잡기 위해서 그랬다는 것입니다. 교수들도 학생들로부터 평가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함부로 죄를 지적하고 돌이키도록 하지 못합니다. 회사는 학생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서 죄악된 문화를 확산시킵니다. 부모들도 아이들 눈치를 보고 회개의 메시지를 잘 전하지 못합니다. 심지어 교회에서도 목사님들이 회개의 메시지를 잘 전하지 못합니다. 완악한 사람들은 스스로 회개할 수 없고 회개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과 같은 하나님의 종이 나타나서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임박한 진노에서 피하라 하더냐”라면서 가슴이 서늘할 정도로 회개의 메시지를 전했을 때 사람들은 시원함을 느꼈습니다. 반대로 헤롯과 같은 사람은 죄인 줄 알면서도 회개하기보다 반발하고 대적했습니다. 회개는 죄와의 영적인 싸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회개의 영을 주시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야 올바른 회개를 할 수가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회개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광야라는 말은 그 시대의 영적 상황을 표현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회개하라는 말을 듣기 싫어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를 볼 때 사람들의 진정한 소원은 회개의 메시지를 듣고 죄에서 돌이키기를 원하는 것임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회개의 메시지를 통해서 자기 발견을 하고 죄에서 떠나게 될 때 영적으로 시원함을 느낍니다. 파이프에 오물이 걸리면 물이 내려가지 않듯이 죄가 쌓여서 우리 심령을 막고 있으면 얼마나 답답합니까? 그러나 회개하고 막힌 심령이 뚫리면 천국이 임하게 됩니다. 우리는 회개의 메시지를 분명하게 전할 수 있는 용기를 덧입어야 합니다. 그리고 언제든지 자신의 잘못을 발견했을 때는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합니다.
둘째,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천국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영역입니다. 천국과 하나님 나라는 같은 의미인데 유대인들이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쓰는 것을 부담스러워했기 때문에 마태는 천국이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대적하는 모든 것이 파괴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시대를 가리킵니다. 천국이 가까이 온 것은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먼 미래에 천국에서 일어날 일이 예수님 안에서는 현재 실제적인 일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베풀고자 하시는 평화와 사랑과 자비가 예수님 안에서 실제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롬14:17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예수님께서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1).”고 하셨습니다. 회개하는 심령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이 세상에서 누릴 뿐 아니라 장차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게 되면 신령하고 강한 몸으로 변화되어 영원히 그 나라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세상적인 소망을 이룬다는 것은 어렵지만 이룬다 할지라도 썩고 쇠하고 사라질 것들입니다. 삼성 팰리스에 사는 사람들은 이 세상이 천국과 같이 느껴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100년을 넘기지 못합니다. 학생들은 게임천국, 오락 천국에 빠져서 삽니다. 그러나 게임보다 더 좋고 재미있는 나라가 천국입니다. 세상적인 쾌락은 잠시 잠간입니다. 그것으로는 우리 영혼이 만족스럽지 않습니다. 천국은 교회에 열심히 나간다고, 예배에 정기적으로 참석한다고, 피상적인 회개만 가지고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말슴하셨듯이 사람이 회개하고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요3:5). 사람들은 우리가 죽은 다음에 천국을 간다고 생각하지만 천국은 우리의 실제 삶에서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실제 삶에서 천국을 맛보고 경험을 하지 않으면 크리스챤은 불쌍한 사람들이 됩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 나라는 우리의 산 소망이요 진정한 소망입니다. 이 때문에 세례 요한은 천국을 전파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캠퍼스에서 신입생들을 만나 마음껏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무슨 말을 전해야하겠습니까? 세례 요한이 증거하고 예수님이 증거하신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동일한 복음을 전해야겠습니다. 신입생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애쓰기 보다 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하게 전해서 이들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이켜 천국을 맛보도록 해야겠습니다. 많은 학생들이 쾌락은 즐기는데 참된 즐거움은 없고 안일하게는 사는데 마음에 평화가 없고 욕심은 많은데 삶에 의미를 느끼지 못합니다. 우리는 이런 지성인들의 심령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회개와 천국의 메시지를 전해야겠습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가 광야로 나아갑시다. 홍대 뿐만 아니라 신촌과 세계 각지에서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고 천국이 임하는 역사가 일어나도록 합시다. 올해 어찌하든지 세례 요한의 심령으로 말씀을 전하여 12명의 신입생 제자들을 세우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요한의 생활 양식(4). 4절을 보십시오. “이 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세례 요한은 명품 옷을 사기 위해서 이 백화점, 저 백화점 돌아다니지 않고 약대 털옷 한 벌을 입고 사역을 했습니다. 그 옷은 낮에는 자외선을 막아 주고 밤에는 추위를 막는 역할을 했습니다. 또 사람들은 점심 한끼를 먹더라도 전문 음식점, 고급 레스토랑을 찾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살면서 인터넷을 서핑을 하거나 텔레비전을 볼 수도 없었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기도하고 성경을 공부하는 가운데 독수리와 같은 눈으로 세상을 보고 죄로 고통 하는 시대에 대한 상한 심령을 덧입고 회개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요한이 순수한 마음을 가졌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엘리야의 심령과 모세의 목자의 심정을 주셨습니다(눅1:17). 그가 순수한 삶을 살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자기에게 오는 사람들에게 회개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영력을 주셨습니다. 그가 순수한 삶을 살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하나님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으로 사용하셨습니다. 그의 순수한 삶은 그가 메시야의 선구자로 사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동료들의 압력이나 자기 속에 있는 죄의 소원 때문에 불결한 삶을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세례 요한처럼 순결하고 순수한 삶을 살고자 하는 거룩한 소원을 주시도록 기도합니다. 여러분이 지도자로 쓰임 받고자 한다면 더욱 절제되고 순수한 삶을 사모해야 합니다.
넷째,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7-12). 요한은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데 오는 것을 보고 말했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7)” 바리새인은 외식으로, 사두개인은 세속주의로 인해서 백성들에게 악영향을 끼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세례 요한이 무슨 권세로 세례를 주는지 조사하려고 나왔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역사를 눈으로 보면서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주로 돈에 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목자라는 자부심과 자만심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 실제 생활에서는 일대일 양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많은 양무리들을 섬겨야 할 사람들이었지만 한 명의 일대일 양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열매 없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이런 삶을 살고 있었던 원인은 속교만과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답게 믿음과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헌신이 있어야 마땅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실 수 있는 분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또한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히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천국이 가까웠다는 것을 아는 자는 천국에 속한 자처럼 살아갑니다. 모세가 잠시 죄의 낙을 거절할 수 있었던 힘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의 마음이 하나님 나라에 가 있었기 때문입니다(히 11:24-26). 우리는 실낙원의 고통을 충분히 맛보았습니다. 이제 더 이상 죄의 낙을 누리지 말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성령의 맺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동시에 심판자이십니다. 요한은 그리스도를 맞이할 준비가 안 된 백성들을 보고 긴박하게 회개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10).”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천년만년 살 것 같지만 언제 죽을지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오늘 밤에라도 데려가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듣는 즉시 회개해야지 내일로 미루면 안됩니다. 우리는 내일 일을 알 수 없습니다.
요한은 그들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었습니다. 세례는 죄를 씻는다는 뜻이있습니다. 또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외적인 공표이기도 합니다. 요한의 물세례는 성례로 끝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십니다. 그래서 요한 자신은 예수님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고 고백합니다. 그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알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게 되는 성령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지혜를 가르치고 긍휼을 베풀게 하고 믿음을 어리석게 여기는 세상에서 믿음을 갖도록 격려하고 복음의 약속에 대한 확신을 갖도록 역사하십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가장 좋은 선물로 성령을 주십니다(눅11:13).
불은 태우고 정결하게 합니다. 이 세상 끝이 오면 하나님은 심판을 베푸시고 공의로운 세상을 이루실 것입니다. 당장에는 탐욕스럽고 불의한 자들이 이 세상을 주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대적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견딜 수 없습니다. 천국을 대적하는 자들은 모두 꺼지지 않는 불에 탈 것입니다. 그 분은 마지막 때가 되면 온 세상에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악을 태워버리고 우리 안에 있는 긍휼과 겸손과 사랑의 행동을 정금처럼 순결하게 하실 것입니다. 당시 세례 요한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신발을 들지도 못하는 종이라고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겸손한 사람이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 받습니다. 겸손한 사람이 하나님의 역사를 동역할 수 있습니다. 자기를 낮추는 사람을 하나님은 높이십니다. 여자가 나은 자 중에 세례 요한 만큼 위대한 자가 없었습니다.
다섯째, 세례 받으신 예수님(13-17). 예수님이 갈릴리로서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셨습니다. 그러자 요한은 말리면서 말했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예수님은 죄가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의는 사람이 하나님이나 다른 사람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구원의 역사를 이루신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의롭게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세상을 구원하려는 뜻을 품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그 분이 모든 인간들과 같이 되신 것을 상징합니다. 그분은 죄인들을 용서하고 구원하고 의롭게 되도록 하기 위해서 죄인들과 같이 되신 것이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의를 이루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장차 십자가에서 죽음의 세례를 받아야 함을 내다보시고 죄인 중의 하나와 같이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서 대속제물이 되고자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저주와 징계를 받고자 결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받을 세례의 본이 되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그 위에 임하셨습니다. 예수님에게 하늘이 열려졌습니다. 하나님이 열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늘과 땅이 연결되었습니다. 야곱의 꿈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모든 나라에 공개적으로 알리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만민 구속 역사를 위해서 이 땅에 오셨고 세례를 받으심으로 장차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대속 사역을 이루고자 결심하셨습니다. 자기 목숨을 버려 세상 만민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결단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장면을 메시야 대관식이라고 부릅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메시야의 선구자로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말씀을 영접합니다. 내 안에 있는 정욕과 자기 영광과 교만을 회개하고 성령을 충만히 받아야겠습니다. 우리가 회개할 때 내 안에 천국이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강한 자기 생각의 다스림을 받을 때 평화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를 회개하고 겸손하신 주님의 다스림을 받을 때 천국이 임합니다. 여러분 안에 천국을 맛보며 전하는 한 주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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